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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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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서술상 특징3. 이후의 좌전4. 한계5. 각종 매체에서의 좌전6. 번역본7. 관련 고사성어8. 외부 링크

1. 개요

공자(孔子)가 지은 노나라(魯)의 역사서인 춘추(春秋)의 주석서로 공자의 제자인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고 전해지나, 실제로는 그가 아니라 어떤 무명의 인물이 저술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줄여서 춘추좌전, 좌씨전, 좌전 등으로 부른다. 또한 인경(經)으로도 일컬어지는데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 봄 노나라 서쪽에서 기린을 잡았다는 기록에서 비롯되었다.[1]

2. 서술상 특징

춘추공양전, 춘추곡량전 등과 함께 춘추 3전으로 불린 책으로, 철학적인 면에 집중한 공양전과 곡량전과는 달리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면에 치중했기 때문에[2] 한나라 때는 외면받았고 공양전이 대세였지만, 후한 말부터 좌씨전이 주목받기 시작했는데[3] 서진 시대에 가면 3전 중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획득했다.[4] 지금도 춘추좌씨전이 가장 잘 알려졌고 또한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에 비해 그 내용이 상당히 많다.

특히나 춘추는 내용이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 나오는 연표처럼 짧게 한 줄 문장으로 기술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초자(초장왕)[5]가 정나라를 7년 동안 칠 때 그 7년을 담은 문장들은 하나같이
초자(초나라 자작, 즉 초나라 왕)가 AA년 정후를 치다.
초자(초나라 자작, 즉 초나라 왕)가 BB년 정후를 치다.
이렇게 짧게 7번이 반복되며 AA나 BB에는 갑신 등 그해 연도가 들어가지만 그에 비해 춘추좌씨전은 그 인과 관계가 제법 상세하게 서술되었다. 또한 춘추는 사건을 묘사할 때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비평하기 위해 어휘를 달리 한다. 예를 들어 살(殺)은 춘추시대에도 일반적으로 "죽인다"는 뜻을 사용할 때 쓰던 단어이지만, 역적을 군주가 처벌하여 죽인 것은 주(誅)라는 단어를 쓰고, 신하가 하극상으로 군주를 죽인 것은 시(弑)를 썼다. 또한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라도 그 행동이 악독하다 싶으면 그의 본명을 그대로 부름으로써 깎아내렸다. 그런데 춘추만 읽어선 미묘한 어휘 사용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춘추좌씨전은 그 어휘를 사용한 까닭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고 그 뒤에 사가의 평을 넣는 좌전의 구성은 후대에도 이어져 사기, 한서뿐 아니라 삼국사기고려사 등 한국의 역사서에도 영향을 끼쳤다.

춘추 본문과 맞먹을 정도로 저자의 가치관이 깊이 개입하여 어떤 사건을 두고 예에 맞다, 안 맞다 하는 평가가 자주 나온다. 당연히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평가라 보는 이에 따라 이게 뭐가 예가 맞는 사례인지 납득이 안 가는 경우도 있다. 더불어 가치관에 따라 어떤 내용은 자세히 넣고 어떤 내용은 삭제하는 경향이 있어, 심지어 춘추 본문에 나오는 내용도 자기 가치관에 안 맞는 이야기라며 주석을 안 달고 넘어가는 대목도 존재한다.

3. 이후의 좌전

사통에서는 춘추좌씨전에 대해 서사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진(晉)나라 이후 좌전을 흠모해 모방하려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 모방한 작품들은 점차 볼품이 없어졌고 그중에는 우연이라 해도 좋은 사례도 있다고 하면서 그 예시를 몇 가지 제시했다.

배송지가 주를 단 강표전에 따르면 관우가 좌씨전을 암송할 정도로 즐겨 읽었다고 하며,[6] 아버지의 영향으로 경전학에 조예가 있는 두예는 단순히 즐겨 읽음을 넘어 현대까지 두루 쓰이는 형태로 좌씨전과 춘추의 본문을 합쳐 정리하고 주석까지 붙여 춘추좌씨경전집해, 춘추석례 등을 저술했다. 동우도 춘추좌씨전의 주석을 썼고 가규도 춘추좌씨장의를 편찬했다. 그 외에 삼국시대의 인물 중에서는 위나라종요, 오나라사섭, 촉한내민과 재야에 있던 인물로 고대 등이 좌전을 익혔다고 한다.

이외에도 춘추좌씨전을 좋아한 사람은 많으며 조선시대에도 좌전은 매우 대우받았다. 특히 조선 성종 때 문신인 구종직은 눈 감고도 춘추좌씨전을 외울 정도로 좋아했다. 읽어보면 명언들이 넘쳐나며 춘추의 구절들의 이해관계를 설명하다 보니 서사 구조가 만들어져 읽기에도 흥미로우니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다.[7] 유명한 경극조씨고아와 이를 바탕으로 한 볼테르의 "중국의 고아"는 춘추좌씨전에 수록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다.

에도 시대의 탈성리학유학자인 이토 진사이는 춘추좌씨전을 높게 평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춘추》를 아는 이로는 맹자만 한 분이 없었고, 《좌씨전》만이 홀로 맹자의 뜻에 합치되었다. 그러므로 《춘추》를 읽는 자는 마땅히 맹자의 말씀을 정칙으로 삼고, 좌씨의 설을 참고해 보아야 한다. ...(중략) 좌씨가 전(傳)을 저술한 것은 역시 그 일의 본말을 두루 기록하여 뒷사람으로 하여금 그 선악의 실상을 지각게 한 것이니, 이것이 좌씨가 성인(聖人)의 뜻을 안 것이요, 맹자의 뜻과 합치된 것이다.

4. 한계

  • 신뢰성
고대 역사서라는 한계가 여기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여타 고대 역사서들과 맞지 않는 내용들도 제법 있는 편이라 어떤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아직 학자들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부분은 사기와 많이 상충되는데 사기 역시 그 정확성에 대해서 비판이 많은 만큼 주의해서 봐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런 부분을 오점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전체적인 내용은 다른 사서들과도 크게 상충되지는 않아 국내에 번역된 서책들은 이런 부분을 소개하는 책들도 다수 존재한다.(예시: 상하기수진나라[陳]의 멸망 전후 이야기.)

이 때문에 강유위, 양계초, 고힐강 등 청말 신공양학파들은 유흠의 좌전 위작설을 부각시켰고, 이로 인해 한동안 좌전의 내용은 상당한 불신을 받았다. 강유위는 왕망 때 유흠이 춘추좌전을 위조하고 남은 사료로 국어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는데, 스웨덴의 칼그렌이 좌전과 국어의 언어를 분석하여 좌전이 성립된 시기는 전국시대이고, 좌전과 국어의 언어가 서로 다름을 밝혀냈다. 애당초 강유위가 춘추좌전 위조설을 주장한 것 자체가 사기극이었다. 그의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와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역시 장지동의 문하생인 요평(廖平)의 고금학고(今古學考)와 지성편(知聖篇)을 그대로 베꼈고, 강유위는 이를 정치적인 명성을 얻기 위해 사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현대에는 유흠의 좌전 위작설은 거의 부정된다. 신공양학파 학자들은 공양전을 중시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좌전을 공양전과 대립하는 것으로 보고 필요 이상으로 부당하게 좌전을 깎아내렸다고 보지만, 여전히 좌전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논쟁 중. 이에는 현대 중국 역사학계의 고대 문헌 신뢰[8] 경향이 도를 넘어섰다는 외국 사학계의 판단도 있다.
  • 내용의 누락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의 주석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춘추 시대를 장식하는 개막을 포함한 초반 100여 년의 내용이 빠져 춘추 시대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5. 각종 매체에서의 좌전

중국 삼국 시대를 다룬 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두예의 애독서로 그려지고 있으며 관우의 경우 청룡언월도를 주창이 받들고 선 가운데 춘추를 읽는 초상화가 잘 알려져 있고 두예는 춘추좌씨전을 줄줄 외울 정도라 당대 사람들이 좌전벽이라고 일컬었다 전한다. 여하간 "의"의 상징으로서 적절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수로 유명한 촉의 학자 내민 역시 춘추좌씨전에 조예가 뛰어났다고 한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서적 계열으로 등장해 정치 능력을 5 올려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시나리오에 따라서 관우가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는 듯. 아쉽게도 삼국지 11에선 서적 아이템들의 효과가 몽땅 설전의 모든 커맨드 사용 가능으로 통합되어 존재 가치가 없어졌다(...). 삼국지 12에서는 다시 정치 + 5 시켜주고 공성 특기까지 부여해 준다. 재미있는 것은 삼국지 13에서 관우에게 춘추좌씨전을 증여해도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어서 감정 상태가 호감으로 되진 않는다(...) 해당 게임에서 관우의 선호도는 무기 쪽이기 때문.

토탈 워: 삼국에선 관우의 대사인 '좌씨전을 가져와라'란 언급이 있으며, 노식을 플레이하는 경우 세력 특성으로 춘추좌씨전을 획득할 수 있는데, 이 조건이 관우가 속한 '목속성 장군으로 전투를 승리'하는 것이다.

드라마 연모에서는 주인공 세자와 나중에 스승이 되는 어릴 때 친구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춘추좌씨전 필사 주석본이 등장한다.

6. 번역본

경전이면서도 역사 사실을 다루고 있으며, 스토리텔링이 되어 있다는 특징 때문인지 2022년 현재 7종의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는 상태이다. 삼경(三經)[9]을 제외한 오경(五經) 가운데 가장 많은 번역본이 출간되어 있는 셈이다. 분량이 분량이니만큼 2천 쪽은 기본으로 넘어서는 거질로 번역된 경우가 많다.[10]
  • 장세후 교수가 번역한 을유문화사판(총 3책, 4452쪽)[11]
  • 임동석 교수가 번역한 동서문화사판(총 6책, 3776쪽)[12]
  • 정태현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명예교수가 번역한 전통문화연구회판(총 8책, 3324쪽)이 있다. [13]
  • 문선규 교수가 번역한 명문당판(총 3책, 2377쪽)
  • 신동준 21세기 정경연구소장이 번역한 인간사랑판(총 2책, 1805쪽)[14]
  • 한학자 남기현이 번역한 자유문고판(총 3책, 2011쪽)
  • 허호구 전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가 번역한 전통문화연구회 오서오경 독본판(총 3책, 1472쪽)

이 가운데 장세후 번역본, 임동석 번역본, 신동준 번역본, 남기현 번역본은 약칭인 《춘추좌전》으로 발매되었다. 이 외에 2022년부터 전통문화연구회의 오서오경 독본판을 번역한 원로 한학자 허호구 전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의 책임번역으로 《춘추좌전정의》의 완역이 시작되었다! 2024년 4월 현재 2책까지 출간되었으며 원문 기준 환공(桓公) 2년(권5)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간 아쉬운 것은 글 자체의 분량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13경 관련 번역서들은 주석서가 번역되는 경우가 의외로 좀 있는 편인데 춘추좌씨전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회자되곤 하였다. 그나마 정태현 역본의 경우, 진(晉)나라 두예(杜預)와 송(宋)나라 임요수(林堯叟)의 주석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이것은 정태현 역본이 조선 시대에 가장 애독하던 판본인 두림합주(杜林合註)를 저본으로 삼아 모두 번역한 책이기 때문이다.[15] 심지어 정태현 역본을 낸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낸 오서오경 독본판은 정태현 역본보다도 못하게 두예와 임요수의 주석을 다 빼버렸었는데- 무려 1년 만에 두예의 주, 공영달의 소를 모두 완역하는 대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7. 관련 고사성어

8. 외부 링크



[1] 十有四年, 春, 西狩獲麟. (14년 봄이라. 서쪽에서 사냥하다 기린을 잡았다.)[2] 보통 경문의 의미를 잘 밝힌 것은 공양전, 명분론을 잘 밝힌 것은 곡량전, 역사적 사실을 충실히 기록한 것은 좌씨전이라고 평하곤 했다. 비록 일부 해설은 그 내용을 알기 힘든 상황(예컨대, 암살당하는 사람이 죽기 직전에 한 말이 그대로 적혀 있다.)이 첨부되어 있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허구가 아니라 그 상황에 사람이 했음직한 말을 추정하여 서술했거나, 혹은 사람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진 내용을 서술했다. 사실 사기도 그런 식으로 윤색된 감이 없지 않다. 현실은 소설보다 소설 같고, 소설은 현실보다 사실 같다고 했던가.[3] 정현이 고문에 근거하여 유교 경전을 정리하면서 비주류였던 좌씨전의 위치가 주류의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다. 곡량전은 전한 중기에 잠시 주목받긴 했지만, 줄곧 비주류....[4]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두예. 원래 경문과 전문이 분리된 체제였던 좌씨전을 한 체제로 재구성하여 경전으로서 위치를 다졌다.[5] 초나라는 화하족이 세운 주나라와는 뿌리가 다르다고 보는게 정설이며, 실제로는 남방의 이민족(묘족)이 세운 국가였다. 이후 중원문화를 받아들여 점점 중국화되고 주나라에서는 이런 초나라 왕에게 가장 오등작의 아랫등급의 자작을 제수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중원의 패자(진(晉)이나 제(濟)) 들과 겨룰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국가였기 때문에, 스스로는 주나라에 맞먹는 "왕"을 칭했다. 춘추필법으로 명분을 중시하던 공자는 그를 여전히 초자라고 썼다.[6] 종이가 나오기 이전엔 비단이나 죽간에 글을 썼는데, 비단은 너무 귀하고 죽간은 부피와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갔다. 그래서 당시 학자들은 글을 간결하게 썼고, 책 몇 권쯤은 암송하고 다님이 기본이었다.[7] 참고로 고전업계(?)에서 《춘추좌씨전》은 《맹자(孟子)》, 《장자(莊子)》와 함께 선진(先秦) 시대 3대 명문으로 불린다.[8] 이른바 '신고'라고 부른다. 이에 반대되는 서양 사학계의, 혹은 자국 사학계의 고대 문헌에 대한 의심의 시선을 '의고'라고 부른다. 이는 춘추좌씨전뿐 아니라 동양 사학서의 정점인 사기에도 현재 적용되는 시선들이다.[9] 이 가운데에는 『주역』 번역이 가장 많다. 다만 『주역』의 경우 점서라는 책 자체의 특성 때문인지 비전공자의 신비주의적 번역의 양이 많다.[10] 물론 글자의 크기, 책의 판형 등 전체 분량에 있어서 책 자체의 분량 외에도 페이지 수를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이 많긴 하다.[11] 책의 부피나 쪽수 면에서 가장 압도적임[12] 2020년, 올재 클래식스에 전자판 도서에 포함되기도 했다. 올재판의 분량은 2책에 3689쪽. 아마 전자책을 출간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출간된 신동준 역본이 인간사랑에서 재출간된 상태이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임동석 역본을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13] 이상의 3종이 업계에서는 공히 대표적인 번역본으로 꼽힌다. 이유는 각기 다르다. 을유판은 자세한 역주, 동서판은 접근성, 전통판은 원문의 충실한 번역으로 이름이 높다.[14] 본래 2006년 한길사에서 출판되었던 것을 개정한 것이다. 당시 분량은 총 3책 1591쪽. 신동준 역본은 이후 2015년 올재 클래식스에 포함되어 출간된 바 있는데 분량은 총 2책에 1160쪽.[15] 사실 삼전 중 다른 두 전, 그러니까 공양전,公羊傳,과곡량전,穀梁傳,은 아예 주석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쪽은 양반에 가깝다......였으나! 2023년부터 《춘추공양전주소》가 완역되기 시작했다! 곡량전이 아직 착수되지 않은 아쉽지만 그래도 고무적인 상황이다.[16] 춘추좌씨전 노 희공 9년(기원전 651년) 제 환공이 제후들을 모아 규구지맹(葵丘之盟)을 열었을 때, 이 자리에서 「주 왕실을 드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찬역과 시해를 금지하고 겸병을 억제한다」(尊周室攘夷狄, 禁篡弒抑兼併)라고 제창하였던 데서 유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