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8:10:03

이데이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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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제5대 대표이사 사장
이데이 노부유키
出井伸之| Idei Nobuyuki
파일:face_ideinobuyuki.jpg
<colbgcolor=#000> 이름 이데이 노부유키 (出井伸之)
출생 1937년 11월 22일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세타가야구 세이죠
사망 2022년 6월 2일 (향년 84세)
도쿄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직책 소니 대표이사 및 사장 (1999년 ~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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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부모 아버지 이데이 모리유키, 어머니 이데이 아야코
배우자 이데이 아키요 (1960년 결혼 ~ 202년 사망)
자녀 장녀 이데이 마리
신체 170cm
학력 세이조가쿠엔 소학교 (졸업)
세이조가쿠인 중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졸업)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 / 학사)
종교 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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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에 성장하고 디지털 기술에 눈을 반짝이는 디지털 드림 키즈가 미래의 우리의 고객이다. 그들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새로운 기술 환경에 눈을 빛내 디지털 드림 키즈가 되어야 한다."(1995년 소니 제 2 제너레이션 창업 연설에서)
"자신의 시장 가치를 생각해라. 그저 회사 이름을 이용하지는 않는지,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는지."(2010년 일본의 한 TV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1. 개요2. 상세3.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
3.1. 실패3.2. 너무 앞서간 판단
4. 신흥 시장 판매 외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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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기업인이자 전 소니 CEO. 소니의 공동 창업자인 이부카 마사루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휼륭한 아이디어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이 있었으나 이것을 제대로 실천시키지 못해 소니의 추락을 가져온 비운의 CEO로 평가받는다. 그래도 나름의 업적도 있는데,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아 플레이스테이션플레이스테이션 2는 당대 게임기 시장의 지배자가 되었다.

2. 상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nyCEO2.jpg

2005년 소니의 이사진하고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데이 CEO며 가운데는 당시 새롭게 취임했던 하워드 스트링거 CEO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추바치 료지 사장.

1937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 아버지는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였으며 이데이 노부유키도 1960년 3월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다. 후에 와세다대학에서 법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0년대 소니의 초창기 시절부터 인턴으로 활동했으며 60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소니에 입사했다.

제네바 국제 연구 대학원에서 유학을 하면서 소니 유럽에서 9년 동안 근무해 국제적인 감각을 익히고 프랑스어와 영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감각과 탁월한 영업 능력이 인정되어 초고속으로 승진해, 소니 오디오 사업 부문 부장 및 홈 비디오 사업 부문 부사장직을 거친 후 1989년 소니의 이사로 선정되었다. 이후 전무 이사와 1990년대부터 광고 선전 분야 본부장도 추가로 역임하여 소니의 이미지에도 크게 기여한다. 1994년에는 소니의 상무 이사가 되었으며 1995년 6월 14명의 다른 경쟁자를 제치고 소니의 사장으로 선정되었다.

원래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엔지니어 출신에 이공계 쪽 사람을 채용하라고 말했고 회사 내부에서도 엔지니어 출신을 선임하려고 했으나, 이공계 차기 사장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스캔들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소니의 CEO였던 오가 노리오가 이데이가 제출한 3개의 보고서를 보고 감명을 받아 "이데이는 영업분야(인문) 출신이지만 기술에 밝다" 라고 추천해서 이데이가 사장이 되었다.

사장으로 선임된 이후 디지털 드림 키즈(Digital Dream Kids) 전략을 발표하며 대대적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은 전세게 IT 사업가들에게 귀감이 되어서 1997년 비즈니스 위크지에서 세계 최고의 사업가로도 선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취임 당시만 해도 부채로 허덕이던 소니를 여러 혁신을 통해 반석에 올려놓았고, 1998년에 역대 최고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일본의 동종 업계를 놀라게 해 자극을 주었다. 1999년에 정식으로 소니의 CEO로 취임한 이후, 2001년 라스베이거스에서 디지털 드림 키즈의 핵심인 Ubiquitous Value Network (유비쿼터스 밸류 네트워크)를 발표했는데 이 전략은 다가오는 광대역 네트워크 시대를 맞아 소니의 기기와 콘텐츠를 네트워크로 언제 어디서든 연결할 수 있게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1] 이는 애플스티브 잡스가 당시 주력 제품이었던 Mac을 중심으로 계획한 디지털 허브 전략과 함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전략으로 평가 받았으나 애플과 다르게 소니의 이데이 CEO는 그 계획을 정확히 실행하지는 못했다. #

금융 사업을 확대하고 인터넷 같은 네트워크 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각 사업부의 제품들을 하나의 네트워크에 연결시키려고 했으나 구체성이 결여되면서 각 사업부가 따로 노는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사일로 현상[2]을 초래하여 소니의 사업부끼리 서로 반목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데이는 다가오는 모바일 사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01년 에릭슨과 합작으로 모바일 사업을 진행하지만 여기서도 에릭슨과의 의견 차이와 계획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문제는 에릭슨의 지분을 인수한 현재까지도 개선되지 않아서 모바일 사업이 소니의 발목을 잡고 있다.

결국 1998년 최고의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하던 이데이 노부유키는 2003년 소니 쇼크라 불리우는 주가 폭락을 맞으며 위기를 맞이했고 무너진 신뢰와 브랜드 가치를 다시 되찾기 위해 프리미엄 브랜드인 소니 퀄리아를 발표하고 큐리오와 같은 신사업을 발굴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크게 실패했다.

결국 이데이 CEO는 미래를 내다보는 좋은 전략과 아이디어가 있었으나 가지고 있는 역량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 하고 여기 저기 문어발식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여 소니의 추락의 원인을 제공한 CEO로 평가받았다.

2005년 부진의 책임을 지고 CEO의 자리를 하워드 스트링거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데이는 2007년 소니의 최고 고문 자리에서 사임하면서 소니의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으며 2012년에는 최고 자문위원회 의장에서도 퇴임하여 이제 소니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이후 2006년에 자신이 설립한 퀀텀 리프 코퍼레이션의 대표로 있으면서 IT 분야 차세대 젊은 지도자를 육성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레노버의 사외이사로 활동하였다.

2022년 6월 2일 향년 84세로 타계했다.

저서로는 "일본 대전환"과 "일본 진화론" 등이 있다.

3.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

파일:external/si.wsj.net/BN-IZ753_jhuman_DV_20150619000333.jpg
이데이 CEO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큐리오 로봇.


이데이 노부유키 CEO의 경력과 성과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을 소개한 영상.

이데이 CEO가 취임할 당시 소니는 아날로그 시대의 최고의 전자 기업이었다. 소니의 트리니트론워크맨은 세계 시장을 재패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있었다. 따라서 이데이 CEO는 다가오는 시대에 디지털 기술이 가전과 오락 산업을 지배할 것이라 생각했다.

1995년, 소니의 간부들 2000여명이 모인 앞에서 이데이 CEO는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을 발표한다. 디지털 드림 키즈는 디지털 시대에서 자라고 디지털 기술에 친숙한 신세대를 뜻하며 그들의 꿈을 만족시킬 독창적이고 재치있는 상품을 만들어 나가자고 이데이 CEO는 주장했다. 이데이 CEO는 3단계 전략을 통해 디지털 드림 키즈를 구체화했는데 바로 1단계 Connect, 2단계 Synergy, 3단계 Hub였다.

1단계 Connect는 콘텐츠, 유통, 기기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소비자들을 쉽고 편리하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1995년 이데이 CEO는 소니의 방대한 영화와 음반 콘텐츠를 디지털로 변환해 인터넷과 케이블 TV로 연결하였고 별도의 인터넷 접속 회사인 소네트도 설립하였다. 또한 위성 TV인 스카이 퍼펙트 서비스도 실시하고 애플아이튠즈 스토어보다 먼저 프레스 플레이라는 온라인 음악 상점도 개설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에버퀘스트 등을 개발하고 온라인으로 다운받을수 있도록 했다. 1996년 이데이 CEO는 1단계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자 디지털 콘텐츠를 더욱 원할하게 연결하는데 컴퓨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VAIO 브랜드로 유명한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였고 iLink(IEEE1394)를 개발하여 제품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2단계의 Synergy 계획은 소니의 제품이 서로 연결되면 소비자가 소니의 제품을 사게 되면 자연스럽게 다른 소니의 제품들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계획이고 3단계의 Hub 계획은 전세계 각 가정을 소니 제품으로 하나의 디지털 허브로 만드는 계획이다. 여기까지 계획이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이데이 CEO는 TV, 각종 전자기기, 컴퓨터 등을 소니의 콘텐츠와 연결하여 하나의 홈네트워크가 되어 다양한 수익 모델이 창출될 것으로 보았고 이렇게 소니 왕국이 건설되면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를 재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었다.

3.1. 실패

하지만 이 계획은 1단계에서 끝나게 되는데 이데이 CEO는 소니 제품을 서로 연결하게 되면 소비자들이 인기 있는 소니의 제품을 구매하면서 자연스럽게 판매가 취약한 제품의 점유율도 끌어올릴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과는 이와 달랐다.

소니는 제품들을 서로 연결할 때 하나의 소니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하여 독자 규격을 고집하였다. 예를 들어 소니 TV는 소니의 멀티미디어 기기만 연결할 수 있었고 소니 멀티미디어 기기는 소니 제품만 연결할 수 있었다. 독자 규격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소니의 콘텐츠를 이용하려면 소니의 제품을 사야만 했다.

당시 소니는 기술적으로 일등 기업이었고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소니는 혁신적이었던 제품과 다양한 콘텐츠를 가졌으므로 소니의 둘레 안에서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대표적으로 메모리스틱, UMD 등이 있다. 한때 애플과 함께 이끌던 IEEE1394 또한 이러한 갈라파고스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인 소니의 태도는 전자 시장에서 소니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소비자들은 소니 제품을 외면하게 되었다. 이는 애플과 반대되는 결과인데, 애플은 전용 규격을 유지함으로써 소비자들을 앱등이로 만들어 묶을 수 있었지만 소니는 그러지 못 했다.

이러한 결과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비싸고, 연동될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나 부족했고, 불필요한 부분까지 독자 규격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애플과는 달리 감성 마케팅으로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제품을 호소하지 못하였다. 애플과 소니 모두 디자인은 훌륭했으나 GUI 디자인은 애플이 압도적이었으며, 애시당초 소니는 스티브 잡스와는 달리 감성 마케팅을 시도할 발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잡스가 애플 제품으로 잠재적 소비자들에게 "애플 제품을 사는 순간 당신의 품격은 주위의 다른 이들보다 높아진다." 라며 시대를 꿰뚫는 마케팅으로 성공한 것과는 달리 소니는 정적인 자세로 그동안의 성공만 믿은 채 똑똑한 소비자들이 알아서 자신들의 훌륭한 제품들을 구입할 거라는 안일한 자세를 가졌다. 물론 이전에 모리타 아키오 창업자는 소니는 전자 제품 시장의 캐딜락과 같다며, 소니는 프리미엄 전자 브랜드라고 홍보하기는 했었다.

애플과 소니는 소프트웨어 수준 역시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당시 애플은 운영 체제 macOS부터 시작해서 개발 도구오피스 스위트까지 독자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사실상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외하면 유일한 기업이었다.[3] 애플이 Mac OS를 통해 오랫동안 축적된 사용자 경험 디자인에 대한 노하우가 아이팟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커버플로우와 클릭휠로 편리하고 부드러운 사용자 경험을 제공했으나, 소니 워크맨은 당시 유저 인터페이스가 무성의했고 싸구려 느낌의 딸깍거리는 플라스틱 버튼을 눌러 조작해야 했다. 아이튠즈윈도우즈에는 최적화하지 않고 쓸데없이 많은 기능에 퀵타임 플레이어까지 끼워 넣어 당시 컴퓨터 사양에 무겁게 하고 내놓아 원성이 컸지만, 정작 소니는 윈도우 전용 소프트웨어만 출시하면 그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튠즈보다 나은 미디어센터 소프트웨어를 제공하지도 못했다. 아이튠즈가 유저의 혈압을 올리는 수준이었다면 소닉 스테이지는 아예 정상적인 이용이 힘들 정도였고, 이후 iPhone이 나올 때까지 이를 개선하지도 않았다. 이 쯤 되면 워크맨으로 일군 포터블 미디어 플레이어 시장에서 자멸하는 길만 골라서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이데이의 전략은 스티브 잡스의 그것과 상당히 흡사했으나, 그걸 실행시킬 전술에서는 많은 격차가 있었다.

애플은 겉으로는 소비자들에게 '애플의 고유한',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애플에서만 느낄 수 있는'을 계속 강조해 왔으나 실제로는 타 회사 제품에 있는 기능 중 괜찮다 싶은건 바로 반영하고 자신들이 만든 것 중 IEEE1394 처럼 인기 없는 건 바로 버리는 등, 합리적으로 제품을 개선해 확고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일례로 아이팟 클래식은 3세대까지만 해도 반드시 매킨토시에 IEEE1394(Firewire)로 연결해야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USB윈도우즈와도 호환할 수 있도록 개선했다. 이러한 기조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애플의 독자 규격은 표준 규격이 만들어지기 전에 제품에 신기술을 먼저 적용하기 위해서라던가(라이트닝 단자), 비용 절감을 위해 표준 규격을 제거한 후(3.5mm 스테레오 단자) 이후 더 좋은 제품을 내놓는 전략을 구사했지만(에어팟) 소니는 오로지 규격을 팔기 위해 가전 부문을 혹사시킨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4]

또한 애플은 규모의 경제로 액세서리 서드파티 제조사들도 많아 제품들이 폭넓고 저렴했다.

한편으로는 고참 엔지니어나 기술 부서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여파로 소니 제품의 품질 저하로 이어지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 소니타이머 얘기가 소비자들에게 퍼져 나간 것도 이데이 시절부터다.

3.2. 너무 앞서간 판단

"휴대전화의 인터넷 접속 서비스와 가정에서 인터넷에 늘 접속할 수 있는 초고속 통신 등이 급속히 보급됐다" "이런 변화를 내다보고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대가 너무 빨리 쫓아와 버린 셈이다." "고객 지향에서 기술 지향으로 너무 나가버린 게 실수였다." "디지털 텔레비전용 화면 부문에선 유기EL(OLED)과 같이 소자 자체가 빛을 내는 기술에 너무 집착했고, 광디스크에선 DVD보다 그 이후 제품에 과도하게 힘을 쏟았다."
(2003년 11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데이 CEO는 1996년 한 연설에서 "앞으로 TV 1대에 10엔이 되는 시대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전의 아날로그 시대에서는 각 회사마다 기술력과 제품으로 승부를 볼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에서는 기술이 평이해져 더 이상 하드웨어로는 승부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존의 전자사업은 부품이 모듈화되고 각 회사마다의 기술 수준이 비슷해져 생산에 필요한 부품은 다양한 회사에서 공급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술은 개발하였지만 TV 부품은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않았다.

LCD와 PDP 패널을 다른 회사에서 공급 받는 대신에 디지털 콘텐츠 사업인 소프트웨어와 차세대 기술인 OLED나 FED(Field-Emission Display)에 투자했다. 하지만 이데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기술 발전 속도는 현저히 느렸고 LCD TV는 빠르게 시장을 잠식했다. 자체적으로 LCD 패널을 생산하지 않던 소니는 TV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잃었고 투자한 차세대 디스플레이 사업은 기술력의 벽으로 실용화하는 데 실패했다. 미래 기술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데도 이데이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대비하려 했고, 오히려 다가오는 기술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이 이데이 CEO가 실패한 원인이다.

4. 신흥 시장 판매 외면

미국과 유럽 같은 해외 선진국 시장에 주력하고 신흥 시장을 등한시했던 것도 이데이의 실책으로 거론된다.[5]

대표적으로 인도를 꼽을 수 있는데, 1990년대만 해도 소니에 대한 인지도가 큰 인도에 대해서 그는 그리 관심도 없었고 일본의 재고품이나 대충 팔아도 된다며 가볍게 대했다. 그러다 인도에 공장을 세우고 막대한 홍보를 하고 스포츠 대회 스폰서로 나서며 인도 시장을 파악한 삼성전자LG전자의 가전 제품들이 중산층에게 크게 인지도를 쌓게 되었다. 이는 한국 언론 보도뿐만 아니라 NHK에서 2000년 대 중순에 현지 취재를 가서 방영한 인도 시장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도 지적했다.

내용은 제법 잘 사는 인도인들이 잘 다니는 고급 전자 상가를 취재했는데 비디오콘 같은 인도 현지 기업과 삼성이나 LG가 매출 상위를 차지했고 소니는 정말 구석에 처박혀서 파나소닉보다 매출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실책을 깨달은 이데이는 "나에게 가장 후회되는 것이 인도를 우습게 봐서 한국에게 시장을 넘겨준 것이다." 라고 은퇴해서도 아쉬워 했을 정도이다.


[1] 당시 소니의 사장이었던 안도 구니타케는 소니의 방향성이 더 이상 가전 기업이 아닌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화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2] 조직 부서들이 서로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내부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 곡식 및 사료를 저장해두는 굴뚝 모양의 창고인 사일로(silo)에 빗대어 조직 장벽과 부서 이기주의를 의미하는 경영학 용어로 사용된다.[3] 구글은 당시에 검색과 광고를 제외하면 아직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프트웨어를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4] 사실 가장 주요한 차이는 아이폰과 같은 킬러 하드웨어가 없었다는 데에 있다. 애플은 사람들을 자사 생태계로 유입시킬 아이폰이라는 매우 강력한 떡밥이 있었으나, 소니의 워크맨은 그 정도가 되지 못하였다.[5] 여기서 중국은 예외이다. 중국은 선진국 시장 수출용 공장이 1980년대부터 들어선 데다, 이미 21세기 초반에 일본에 뒤지지 않는 고급품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