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3:37:32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파일:Johannes Steinhoff.jpg
요하네스 슈타인호프(Johannes Steinhoff: 1913년 9월 15일~1994년 2월 21일)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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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1~20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주 기종 비고
21위 쿠르트 브렌틀레 독일 180대
22위 귄터 요스텐 독일 178대
23위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독일 176대
24위 에른스트-빌헬름 라이네르트 독일 174대
귄터 샤크 독일
26위 에밀 랑 독일 173대
하인츠 슈미트 독일
28위 호르스트 아데마이트 독일 166대
29위 볼프 디트리히 빌케 독일 162대
30위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 독일 158대 Bf109 서방 비행기 최다 격추
▼ 31~5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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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우수한 학생3. 해군에 입대4. 유럽 전선에서5. 러시아 전선에서6. 본토 방공전에서7. 종전 이후의 행적8. 창작물에서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 소위로 복무를 시작해 2차 대전 동안 대령까지 진급한 슈퍼 에이스이며 종전 후 서독 공군의 재건에도 활약한 인물이다. 에이스로 시작해서 말년에는 군 최고위직까지 올라간 얼마 안 되는 사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우수한 학생

독일 중부 튀링겐주의 보텐도르프에서 제분업자의 3남 2녀 중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슈타인호프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아주 좋아하고 탐구심이 왕성한 학구적인 소년이었다. 소싯적에는 한스라 불린 그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이미 프랑스어영어, 라틴어에다 그리스어까지 익혔던 것을 보면 두뇌가 비상했던 모양이다. 한스는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원래 집안이 그리 부유하진 못했던데다가 그가 학교에 들어간 후부터는 가세가 기울어 학비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3. 해군에 입대

이처럼 집안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고통받고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게 되자 학교를 중퇴하고 독일 해군에 지원해 입대하게 된다. 해군에서 조타수로 훈련을 받던 그는 해군 항공대에서 사귀게 된 친구 디트리히 흐라박이 신생 독일 공군으로 이적할 때 따라가게 된다. 친구 따라 강남에 간 이야기가 바로 그에게 해당될 것이다. 1936년에 독일 공군으로 전속을 간 그는 전투조종사 훈련을 마치고 장교가 되어 제26전투항공단(JG 26)에 배치되었다. 묘하게도 슈타인호프는 원래 파일럿 지망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조종 실력을 몸에 익히게 되었고, 1939년 4월 29일에는 아내 우르슬라를 맞아들여 결혼도 하게 된다.

4. 유럽 전선에서

그는 대전 초기에 활약한 다른 에이스들처럼 폴란드네덜란드 침공 작전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독일이 유럽 침공을 시작했을 때, 그는 중위로 진급해 있었고 처음 적기를 만난 것은 독일 북서부의 빌헬름스하펜에 공습을 하러 날아온 비커즈 웰링턴 폭격기를 맞아 싸워 격추한 것이었다. 1940년 2월에는 제52전투항공단 예하 제4비행중대(4./JG 52)로 소속을 옮겼고, 슈타인호프 중위는 이 부대에서 프랑스 침공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루게 된다.

5. 러시아 전선에서

이후 전선이 확대되자 1941년 6월부터 동부 전선으로 가게 된 JG 52의 선임 비행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노련하고 결연한 의지로 무장한 영국 조종사들이 모는 슈퍼마린 스핏파이어호커 허리케인 같은 뛰어난 성능을 가진 적기들과 어렵게 싸우다가 러시아에서 마주친 소련 공군은 짐작 그대로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슈타인호프는 동부전선에서 전투를 개시한 첫 달 동안에만 무려 28대의 적기를 확인 격추하는 엄청난 무공을 세웠다. 그 해 8월까지 35대를 해치운 그는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게 된다.

이듬해인 1942년 2월에 대위로 진급한 슈타인호프는 제II비행단(II./JG 52)을 지휘하게 되면서 격추 페이스는 더욱 급상승했고, 그해 8월 31일까지 자신의 격추수를 100대로 늘려 놓았다.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대위는 루프트바페에서 18번째로 수직 미익에 100대 격추를 의미하는 센튜리 마크를 그려넣을 수 있었다. 그는 1943년 3월까지 JG 52에서 복무하다가 사령부로부터 소령 계급장을 받으며 지중해에서 작전하고 있는 제77전투항공단(JG 77)의 사령관으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다. 1944년 7월 28일에는 곡엽검 기사철십자장까지 받은 그였지만, 이 시절의 그는 점차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과 불화가 심해져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여담으로 그는 전원 여성으로 이루어져있던 제46 친위 야간폭격 비행연대의 활약을 목격하고 이런 말을 남겼다.
나와 동료들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던 자들이 여성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비행대라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6. 본토 방공전에서

1944년 10월에는 전사한 발터 노보트니가 지휘하던 제트전투기 부대 제7전투항공단(JG 7)의 지휘봉이 맡겨졌다. 그토록 명성이 자자한 슈타인호프였지만 1945년 벽두에 벌어진 전투기 조종사들의 반란 사건 이후 완벽히 괴링의 눈밖에 나게 된 그는 한직을 떠돌게 되었고, 그 처벌로 본토 방공을 위해 신설된 JV 44에서 그와 마찬가지로 좌천된 아돌프 갈란트의 지휘를 받으며 메서슈밋 Me 262를 타게 되었다.

총 993회 출격에서 적기 178기를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린 요하네스 슈타인호프 대령이었지만, 그런 대기록을 세우면서 그 자신도 12회나 격추되었다. 그렇지만 낙하산 탈출은 딱 한번이었고 전부 어떻게 해서든 기체를 살리는 불시착이었다. 그의 두둑한 배짱을 알 수 있는 통계치라고 하겠다.
그는 독일이 패하기 직전인 1945년 4월 18일에 Me 262를 몰고 이륙하다가 활주로의 폭탄 구덩이에 빠져 기체가 전복되면서 큰 화재가 나서 전신에 중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슈타인호프는 입원한 채로 종전을 맞이했지만 얼굴에 남은 화상의 흔적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7. 종전 이후의 행적

1945년부터 1947년까지 2년간이나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은 슈타인호프는 퇴원한 후 도자기를 만들다가 1950년에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서독이 재군비를 위해 슈타인호프를 영입하면서 곧바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유럽방위공동체의 협상단 임원으로도 일한 그는 1954년부터 서독 공군의 재건 책임자가 되었다.

1955년 11월에 정식으로 창설된 독일 연방군에 다시 입대한 슈타인호프는 1956년 3월까지 미국에서 비행 훈련을 받고 귀국한 다음 곧바로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서독 국방성 제6국 계획부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NATO 군사위원회 서독 대표라는 보직까지 역임한 슈타인호프는 1962년소장으로 승진했다.

1963년에 제4항공사단장을 거친 그는 1965년중장으로 승진해 중유럽 연합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이라는 고위 장성이 되었다. 1966년에 공군총감(Inspekteur der Luftwaffe)을 거쳐[1] 1970년에 NATO 군사위원장으로 선출된 그는 대장까지 승진해 3년간 더 복무하고 1974년에 퇴역했다.

예편한 다음에는 도르니에 사에 고문 자격으로 들어갔다가 1977년에는 사장이 되어 1983년까지 근무했다.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 슈타인호프는 독일 서부의 고데스베르크에서 살며 가끔 항공 행사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고, 람슈타인 에어쇼 참사의 조사위원회를 이끌기도 했다. 슈타인호프는 회고록을 쓰다가 1994년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이후 1997년에는 그를 기리는 뜻에서 독일 공군 제73전투비행단(JG 73)의 이름이 "슈타인호프"로 명명되었다. 이 비행단은 현재도 존속 중이다. 참고로 독일 공군 비행단 중 인명이 붙은 비행단은 총 네 개인데, 그중 세 개는 모두 1차대전기 에이스들(제31전투폭격비행단(JaboG 31) 뵐케, 제51정찰비행단(AG 51) 임멜만, 제71전투비행단(JG 71) 리히트호펜)[2]의 이름이 붙은 데 반해 슈타인호프만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기 에이스이다.[3]

8. 창작물에서

본인이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마브러브 시리즈의 번외편으로써 1983년 동독의 이야기를 다룬 슈발체스마켄의 서독군 여위사인 키르케 슈타인호프가 이 사람의 손녀라는 설정이다.

[1] F-104G로 인해 서독 국방부와 공군이 구설수에 휘말렸던 시기에 공군총감이 되면서 임기 동안 위기를 수습해냈다.[2] 셋 모두 독일 공군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뵐케는 뵐케의 금언을 처음 창시하면서 공중전의 기초적인 틀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임멜만은 임멜만 턴이라 불리는 특유의 회피기동술을 개발하고 최후의 순간에도 무려 7기의 영국 공군 항공기들과 혼자서 교전하다가 전사했으며 마지막으로 리히트호펜은 1차 세계대전 최다 격추수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을 세웠다.[3] 나치 시절을 극도로 혐오하는 현대 독일이 왜 비행단에 2차 세계대전기 에이스인 슈타인호프의 이름을 붙였을지 의아할 수 있는데, 슈타인호프는 전쟁 중 활약도 활약이지만 나중에 에이스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서독 공군의 재건에 전방위적으로 참여하고 끝내 대장까지 진급한 인물이었기에, 서독 공군에서의 활동을 기리는 의미에서 명명하였다고 보는 것이 옮다. 당장 슈타인호프보다 더 높은 격추수를 기록하고 나중에 서독 공군에 입대한 나치 독일 공군 조종사들도 많지만 그들 중 누구도 슈타인호프처럼 서독 공군 고위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귄터 랄도 중장까지 오르고 공군총감을 역임했다. 사실 제74전투비행단(JG 74) 묄더스도 있었지만, 1998년에 인명 제거가 거론되었고 2005년에 최종적으로 제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