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2:34:55

엔도 야스히토

엔도 야스히토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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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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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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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4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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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야스히토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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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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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엔도 야스히토 152회 2002.11.20 2015.1.23
2 나가토모 유토 142회 2008.5.24 2022.12.5
3 요시다 마야 126회 2010.1.6 2022.12.5
4 이하라 마사미 122회 1988.1.27 1999.7.5
5 오카자키 신지 119회 2008.10.9 2019.6.24
6 가와구치 요시카쓰 116회 1997.3.15 2008.11.19
7 하세베 마코토 114회 2006.2.10 2018.7.2
8 나카자와 유지 110회 1999.9.8 201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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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리그 20주년 베스트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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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리그 30주년 베스트 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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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엔도 야스히토.jpg
<colbgcolor=#003287><colcolor=#fff> 이름 엔도 야스히토
[ruby(遠藤 保仁, ruby=えんどう やすひと)] | Yasuhito Endo
출생 1980년 1월 28일 ([age(1980-01-28)]세)
가고시마현 가고시마군[1] 사쿠라지마정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 체중 75kg[2]
직업 축구 선수 (중앙 미드필더 / 은퇴)
축구 코치
소속 <colbgcolor=#003287><colcolor=#fff> 유스 가고시마실업고등학교 (1995~1997)
프로 요코하마 플뤼겔스 (1998)
교토 퍼플 상가 (1999~2000)
감바 오사카 (2001~2021)
주빌로 이와타 (2020~2021 / 임대)
주빌로 이와타 (2022~2023)
코치 감바 오사카 (2024~ )
국가대표 152경기[3] 15골 (일본 / 2002~2015)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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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287><colcolor=#fff> 역대 등번호 일본 대표팀 - 4, 7, 19
요코하마 플뤼겔스 - 27
교토 퍼플 상가 - 14
감바 오사카 - 7, 19, 30
주빌로 이와타 - 50
가족 엔도 아키히로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개인 기록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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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축구 선수 출신 코치. 현역 시절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였으며, 은퇴 후 현 친정팀이었던 감바 오사카의 코치를 맡고 있다.

전성기 시절 사무라이 블루 중원의 핵이었으며, 일본 축구를 대표하는 레전드 중 한 명이다. 대표적 별명은 얏토(ヤット).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가고시마시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축구를 시작한 건 형들의 영향을 받았으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축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가고시마 실업 고등학교에서는 3년 동안 고교선수권 우승, 타카도노미야배 등 여러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다. 여담으로 2학년 재학 당시 가고시마 실업고교 축구부 코치였던 호세 카를로스의 권고를 받고 1개월 동안 브라질 EC 상벤투의 연습에 참가하기도 했다 .

고등학교 졸업 이후 1998년 J리그의 강호 요코하마 플뤼겔스에 입단했다. 팀이 천황배 우승을 차지하여 데뷔 첫 해에 첫 우승을 달성했으나 팀은 재정난 때문에 이 시즌이 끝나고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합병[4]되었고 이후 교토 퍼플 상가[5]로 이적했다. 교토 상가에서는 점차 주전으로서 활약했으나 팀이 2000 시즌 이후 J2리그로 강등되자 2001년 감바 오사카로 옮겼다.

이적 이후 감바 오사카의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여 2003년에는 처음으로 J리그 디비전 1 베스트 11에도 선정되었고 그 다음 시즌에도 2년 연속 베스트 11에 들더니 2005년에는 감바 오사카의 첫 J리그 디비전 1 우승을 이끌었다.[6] 동시에 차기 시즌 팀의 창단 첫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큰 기여를 했다.

2006년에도 변함없는 활약을 보여줬으나 팀은 리그 3위, 천황배 준우승, ACL 조별리그 탈락에 그치면서 무관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 다음 시즌에는 팀의 첫 J리그컵 우승에도 일조했다.

그리고 2008 시즌, 팀은 리그에서 8위에 그쳤으나 천황배와 ACL에서 우승을 하여 2관왕을 달성하는데, 엔도는 해당 시즌 ACL 대회 MVP에 선정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그 다음 시즌에도 천황배 2연패에 일조했고 2009년 AFC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꾸준한 활약을 선보였고 2012년에도 J리그 디비전 1 베스트 11에 선정되어 무려 10년 연속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뤘지만 정작 팀은 2012년 17위에 그치면서 디비전 2로 강등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엔도의 거취가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고 감바 오사카 사장은 엔도를 반드시 잡겠다는 입장이지만, 일단 엔도 자신이 교토 상가 시절 강등을 이유로 팀을 옮긴 전적이 있는 데다가, 태국의 촌부리 FC, 중국의 항저우 뤼청, 그 밖에 중동 팀들이 매의 눈으로 엔도를 노리고 있는 만큼 지켜내기 쉽지는 않으리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결국 감바 오사카에 남았다.

2013년 팀의 디비전 2 우승으로 다시 1부 리그로 승격시키는 데에 공헌을 했고 2014년에는 리그, 천황배, 리그컵을 우승하는 도메스틱 트레블의 주역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해당 시즌 J리그 MVP에도 선정되었다.

2015년에는 ACL에서 감바가 K리그팀 분쇄기[7]로 거듭나며 4강까지 진출하는 데에 공헌했으나 광저우 에버그란데에 패배해 4강에서 탈락했다. 그래도 천황배 우승으로 우승 이력에 한 줄 추가했다.

클럽에서는 여태껏 좋은 활약을 꾸준히 보여줬으나 대표팀에서는 2013년부터 노쇠화가 뚜렷하게 보여 기량이 저하되었고 이는 클럽에서까지 이어져 결국 2016년에는 2003년부터 J1에서 뛰는 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베스트 11 수상에도 실패했다. 그래도 클래스 있는 모습은 간간히 보여주고 있긴 하다.

2017년 6월 17일 빗셀 고베와의 경기로 J1리그 통산 55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일본 역대 J리그 선수 가운데 통산 3번째의 기록이다.

2018년 11월 10일 쇼난 벨마레와의 경기에서 J리그 역대 두 번째, 필드 플레이어로는 J리그 최초로 6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파일:endo_600match_memorial.png

2019년 8월 2일에는 공식전 10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 일본 선수로는 최초다.

2020년 7월 4일 세레소 오사카와의 더비전에서 선발 출전하여 J리그 역대 최다 출전 선수 기록도 세웠다.(632경기)

이후 감바가 2016년 이후 흔한 중위권 팀으로 전락한 가운데 본인의 노쇠화와 새로운 선수들의 영입으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자 J2리그주빌로 이와타로 임대 이적했다. 이후 2021년에도 이와타에 남아 팀의 1부 리그 승격에 공헌하면서 완전 이적을 추진하게 되었다. #

2021년 12월 27일, 주빌로 이와타로 완전 이적했다. # 2022년 이미 40세가 넘은 나이었음에도 주전으로 계속 뛰었으나 팀은 최하위로 마감하여 J2리그로 다시 강등되었다. 그래도 이듬해인 2023년에 팀을 한시즌만에 다시 J1리그로 승격시키면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게 되고, 시즌 종료 후 2024년 1월 9일에 현역에서 은퇴하면서 무려 25년간에 프로생활을 마감짓게 되었다. 이로써 엔도까지 은퇴를 선언하면서 요코하마 플뤼겔스에서 뛴 경험이 있는 선수 전원이 은퇴하게 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99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나이지리아[8]에 참가하면서 처음으로 대표팀에 모습을 드러냈고 해당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바로 두각을 드러냈다. U-23도 거친 엘리트 코스 끝에 2002년에 성인 대표팀 데뷔를 한 엔도는 2003년 8월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진행한 나이지리아와의 친선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넣었다.

2004 AFC 아시안컵 중국[9] 최종 명단에 들어 A대표팀 데뷔 이후 첫 메이저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전 미드필더로서 활약한 끝에 일본의 우승에 기여해 첫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되었다.[10]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출전했으나 팀은 조별리그[11]에서 탈락했고[12] 2007 AFC 아시안컵 아세안에서는 숙명의 라이벌인 대한민국에게 3위 결정전에서 져 4위에 그쳤다.[13]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에 출전해 2번째 월드컵 무대에 발을 들이게 된 엔도는 조별리그 3경기 모두 풀타임으로 일본의 중원을 책임졌고 특히 덴마크와의 3차전에서 2:0으로 달아나는 환상적인 프리킥으로 월드컵에서의 첫 골을 넣었다. 엔도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은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업적을 세웠다.[14]

2010년 10월 12일 대한민국과의 친선경기에서 선발 출전해 A매치 100번째 경기를 치르면서 FIFA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에 출전한 엔도는 하세베 마코토와 중원에서 짝을 이뤄 대회 내내 좋은 경기력을 펼쳤고 4강 대한민국 전에서도 승부차기 끝에 꺾어 지난 대회에서의 복수에 성공하며 일본의 결승행을 이끌었다. 그리고 호주와의 결승전에서도 120분 활약 끝에 우승을 차지해 개인 통산 2번째 아시안컵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2년 10월 16일,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A매치 123번째 경기에 출전해 122경기 출전한 이하라 마사미를 제치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통산 A매치 출전 1위에 등극했다.

이후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최종 명단에 들며 통산 3번째 월드컵에 출전하게 되었으나 일본은 1무 2패로 탈락했다.[15]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고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이 부임하면서 잠시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지만, 2014년 11월 대표팀에 복귀하여 2015 AFC 아시안컵 호주에 출전했다. 팔레스타인과의 개막전에서 선제골을 넣어 4:0 대승에 기여했고 다음 경기인 이라크전에서는 일본 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A매치 15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썼다. 경기 역시 1:0 승리를 거뒀다.

8강 탈락의 책임으로 아기레 감독이 경질되고 알제리의 월드컵 16강행을 이끈 바히드 할릴호지치가 부임한 이후 좀처럼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했고 결국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엔도는 2002년부터 2015년까지 13년 간 152경기 15골을 기록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안드레아 피를로처럼 정확하고 간결한 패스를 통해 공격활로를 만드는 패스형 플레이메이커 타입이었다. 쉽게 말해 몸이 아닌 머리로 축구를 하는 타입의 선수. 본인 왈로도 공이 오는걸 보고서 달려가는게 아니라, 예측과 빠른 결단을 통해 공이 올 위치로 미리 가 있는 플레이를 했다. 본인 스스로 반농담 삼아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떻게 하면 달리지 않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서 플레이했다'라고 말했을 정도.

한마디로 체력온존형이라 불릴 수 있는 플레이 스타일이었지만 2010년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일본 대표팀의 감독이던 이비차 오심의 '팀을 위해 달리는 플레이를 해라'라는 조언을 받아 볼 키핑과 드리블을 통해 좀 더 공을 소유하고 수비가담도 비교적 적극적으로 하는 선수로 바뀌었다. 그 결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일본 팀 내 활동량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16]그래서 특유의 활동량으로 한일전에 출전했을 때는 한국을 상대로 피지컬이 열세임에도 비교적 공중볼을 잘 따냈던 선수이기도 했다.

해외파가 아님에도 나카무라 슌스케, 혼다 케이스케, 카가와 신지 등의 해외파 속에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의 중심을 맡아왔는데, 이는 엔도의 스타일이 일본 축구가 지향하는 일명 스시타카차비 에르난데스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기 때문이다.[17]이 때문에 전성기 때는 일본 대표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그러나 이후 노쇠화로 인한 운동량 저하로 인해 2013년부터는 일본 대표팀의 양날의 검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럼에도 2014년 브라질 월드컵, 2015년 아시안컵 때까지는 꾸준히 대표팀에 뽑히긴 했으나 별다른 활약은 하지 못했고, 체력과 주력 등 선수들의 피지컬적인 측면을 중요시하던 바히드 할릴호지치 감독 부임[18] 이후부터는 대표팀에 더 이상 뽑히지 못하다가 국가대표 은퇴를 해야 했다.

국대에서나 클럽에서나 패널티킥 키커로 나설 때가 많은데, J리그에선 PK를 몇 번 놓친 적이 있지만 클럽 국제대회나 국대 경기에서는 아직까지 PK를 실패한 적이 단 한 번밖에 없다. 국대 전담 PK 키커는 한동안 나카무라 슌스케였고 이후 혼다 케이스케로 넘어가 생각보다 PK를 자주 차진 않았지만 2010년 월드컵 16강 파라과이전 승부차기에서 1번 키커로 나섰을 만큼 PK에 관해선 신뢰를 받아왔다.[19] 이러한 비결에는 엔도의 PK 스타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임팩트 전 동작이 상당히 특이하다. 천천히 전진하다가 한순간에 템포를 빠르게 높여서 볼을 구석으로 느리게 깔아차는데 그라운드에 통통 튀기며 굴러가는 모습 때문에 일본에선 이를 코로코로 PK[20]라고 주로 부른다. 물론 항상 이런 식으로 차는 건 아니다. 2010년 EAFF 동아시안컵 한일전에서는 그냥 강하게 차서 선제골을 넣었다. 이운재2007년 AFC 아시안컵 3-4위전 승부차기에서 엔도의 코로코로 PK에 당한 적이 있다.

2018~19 시즌 감바에서 함께 뛰었던 황의조는 엔도에 대해 넓은 시야와 좋은 패스, 경기 완급 조절 능력을 바탕으로 감바 오사카의 빌드업에 큰 역할을 하며, 황의조의 플레이 특징을 잘 파악해서 좋은 타이밍에 순도 높은 패스를 보내주는 선수라고 평했다.#

4. 지도자 경력

현역 은퇴 직후 2024년부터 감바 오사카의 코치를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AFC 올해의 축구 선수: 2009
  • AFC 챔피언스 리그 MVP: 2008
  • J리그 MVP: 2014
  • 일본 올해의 축구선수: 2008, 2014
  • J리그 베스트 일레븐: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4, 2015
  • J리그 20주년 기념 팀

5.3. 개인 기록

6. 여담

  • 일본의 공룡 인형 가챠핀(ガチャピン)과 닮았다. 덕분에 감바 오사카의 캐릭터 상품으로 엮여 구단 홍보 겸 자신을 상징하기도 했으며 소수 의견으로는 G-DRAGON의 중장년 버전이라는 설도 있다.
  • 긴 헤어스타일에 헤어밴드를 착용하는게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될 만큼 오랜기간 같은 스타일을 유지해왔다. 그 때문인지 킥을 차거나 롱패스를 하고 나서는 꼭 머리를 가다듬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2010년 5월 24일 사이타마에서 벌어진 남아공 월드컵 출정식 한일전에서 이 습관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했는데 박지성과 공중볼 경합 후 바로 압박을 하는게 아닌[21] 제자리에서 습관인 머리를 만지다 프리해진 박지성이 볼을 몰고가 첫 득점을 성공했다. 일본에서는 관련 기사도 나오고 2ch에서 관련 스레드도 세워지는 등 꽤 비판을 받았다.
  • 묘하게 배우 장혁 혹은 정우성과 닮았다는 말이 종종 나오곤 한다. 사실 코미디언 이상구와 많이 닮았다.
  • 20세가 된 다음부터 경마를 즐겨 본다고 한다.#
  • 가고시마 실업고교 1년 후배인 스기우치 토시야에게 축하 문자를 보내고서 답장을 못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 일본 선수 중에서 한국에 팬이 많은 선수이기도 하다. 팀에 대한 충성심, 탁월한 자기 관리, 특유의 프리킥 및 페널티 킥 능력, 졸린 듯한 눈을 하고서는 중원에서 미친 존재감을 발휘하며 할 거 다 하는 그라운드에서의 모습 등이 주된 이유. 또한 박지성과는 교토 상가에서 한 시즌 동안 동료로 뛴 이력이 있어 친분이 있는데, 한일전 국대경기에서는 경기 전 후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카메라에 자주 잡혔었고 감바 오사카 시절에는 팀 동료였던 이근호에 대해 호평하고 서로 호흡도 잘 맞는 편이었다.[22]


[1]가고시마시[2] 감바 오사카 공식 프로필[3] 일본 대표팀 역대 최다 경기 출장.[4] 때문에 현재 팀명인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F가 바로 플뤼겔의 F다. 참고로 엔도는 플뤼겔스 성인팀의 마지막 현역 선수가 되었다.[5] 이 시기에 박지성과는 1년 같이 뛰었다.[6] 개인으로서도 J리그 디비전 1 첫 우승컵을 들어올렸다.[7] K리그 팀 상대 패배는 성남 FC와의 조별리그 2차전이 유일하고 FC 서울과의 16강은 2승, K리그 디펜딩 챔피언 전북 현대 모터스와의 8강전은 1승 1무로 꺾어버렸다.[8]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9] 첫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10] 첫 우승은 기린컵이었으나 기린컵은 축구 친선 대회에 불과했다.[11] 32강 조별리그[12] 일본 조 4위 월드컵 29위[13] 3위까지 주어지는 차기 대회 자동 본선 진출 기회도 날려버리고 지역예선까지 거쳐야 했다.[14] 같은 대회에 진출한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원정 첫 16강에 진출했다.[15] 당시 브라질 월드컵에 AFC 소속으로 대한민국, 일본, 이란, 호주 4개국이 진출했으나 4개국 모두 16강은 고사하고 1승도 거두지 못한 채 초라하게 퇴장했다.[16] 다만 실제 경기를 보면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 선수라는 인상은 못 받는데, 기본적으로 발이 느린 탓도 있지만 전력질주를 할 때가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넓은 활동량도 열심히 달려서 경기장을 가로지르기보단 조깅하듯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경기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덕분이다.[17] 일본 대표팀 진형인 4-2-3-1의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 하세베와 호흡을 주로 맞췄는데, 하세베가 수비에 중점을 두고 아래 DF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맡았다면 엔도는 위의 MF, FW들에게 공을 배급하며 공격의 시작 스위치 역할을 맡았다. 또한 강하고 정교한 오른발 중거리 능력도 갖고 있어 왼발슛이 강력한 혼다와 함께 프리킥을 주로 맡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때 엔도와 혼다가 프리킥만으로 2골을 넣은 것이 대표적이다.[18] 부임 이후 대표팀 공개 미팅에 선수들 각자의 체지방율 리스트를 들고나와 공개하며 체지방률 12% 이상인 선수는 뽑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같은 자리에서 미드필드진에게 강조한 것이 전력질주 횟수가 너무 적다는 점이었는데, 늙어가는 나이로 인해 체력과 주력의 저하가 진행되고 있던 엔도가 결국 감독의 눈 밖에 난 듯. 엔도를 대체할 선수들이 발굴되기도 했다.[19] 유튜브에서 엔도의 PK만 모아놓은 동영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20] 한국어로 번역하면 데굴데굴 PK[21] 볼이 누구의 소유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 떨어졌고 끝까지 집중력을 가지고 바로 달려간 박지성의 소유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일본 수비의 견제가 들어오던 상황에 엔도가 머리를 가다듬는게 아닌 바로 따라붙었으면 슈팅까지 나오긴 힘들었을것으로 보인다.[22] 참고로 감바 오사카에서 엔도와 같이 뛴 한국인 선수가 무려 13명(!)으로 엔도가 데뷔하기 전에 뛴 최덕주와 엔도가 떠난 뒤에 이적한 권경원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한국인 선수와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