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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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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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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秀清
병음: Yang Xiuqing, 양슈칭
(1821.9.23~1856.9.2)

1. 개요2. 유년기3. 태평천국 초반기4.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5. 숯구이, 권력의 핵심에 오르다6. 동왕의 활약7. 형제의 손에 죽다8. 기타9. 양수청의 패악10. 평가

1. 개요

태평천국의 인물이다. 정식 칭호는 화내사속병주좌보정군사동왕(禾乃師贖病主左輔正軍師東王). 흔히 동왕(東王)으로 알려져 있다.

2. 유년기

광서성 객가인 출신으로 집안이 고향은 광서성 계평(桂平)이다. 조상은 객가가 많이 사는 광동의 매주(梅州) 출신인데 광서까지 흘러들어 왔다고 한다.

부모를 어릴적에 잃고, 숙부의 슬하에서 자랐는데 영양실조로 인해서 한 쪽 눈이 먼 애꾸였다. 집안이 가난해서 숯을 구워 파는 숯구이를 업으로 삼아 먹고 살았는데 머리가 좋아서 숯구이들 중에서 세력을 갖췄다고 한다.

1846년경에 훗날 태평천국이라 불리는 배상제회에 가입했다.

3. 태평천국 초반기

배상제회가 몸집을 키우는 동안 주변의 향촌 및 지방정부와의 갈등이 잦았는데 결국 풍운산이 계평의 관아에 체포됐다. 홍수전이 이 일을 탄원하고자 양광총독을 만나러 간 사이 조직은 1인자와 2인자를 잃어서 흔들리고 있었는데 1848년 3월 3일, 양수청은 오로지 배상제회 신도들과의 만남에서 말하거나 들을 수 있는, 청각장애인이자 벙어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1]

그는 성령에 빙의되어 상제가 자신을 통해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태평천국의 교리에서 천부하범(天父下凡)이라고 불렀다. 당시 광서성은 수많은 민간 신앙이 발달해 있었고 특히 양수청의 고향인 심주(潯州)[2]는 어린아이의 몸에 신이 빙의 한다는 믿음이 통용되는 곳이었다. 또한 객가인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광동성의 매주(梅州)[3]에서도 비슷한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발달하거나 미신이 많이 타파된 지방에서는 씨알도 안먹힐 이야기지만 낙후된 광서에서는 통하는 이야기였고, 이를 통하여 흔들리는 조직을 다잡을 수 있었다. 또한 이런 의식을 본 토착 사람들은 태평천국의 교리를 생소한 기독교가 아니라 그들이 흔하게 보는 다신교적인 성격으로 받아들여 포교 역시 용이했다. 또한 천부하범을 통해서 유교의 충효와 같은 교리 역시 신의 뜻이라 주장하니 종교적 다툼 없이 다양성을 띄게 돼서 태평천국은 포섭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다.

양수청은 천부하범을 시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풍운산 석방을 위하여 행동에 나서는데 방법은 바로 배상제회에 가입된 숯구이들이 을 팔아서 번 돈의 일부를 저축하여 양광총독에게 뇌물로 보내는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풍운산은 비록 배상제회의 근거지인 자형산(紫荊山) 일대의 금전촌(金田村)에서는 추방당했지만 풀려나서 뒤이어 돌아올 수 있었다.

이렇게 풀려난 홍수전과 풍운산은 기묘하게도 양수청의 천부하범과 그에 따른 권위를 인정했다. 당시 배상제회는 종교성이 강한 무리라서 천부하범이라는 요인을 무시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또한 양수청은 머리가 아주 좋아서 광서에 거주하는 사기꾼이라면 누구나 시전 가능한 신내림을 천부하범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다. 대표적으로 천부하범을 통해서 배신자를 찾거나 암살 시도 등을 발견하고[4] 자신의 애꾸눈을 예수가 인류를 위하여 죄를 대속(代贖)한 것과 같은 결과라고 선전도 했다.

거기에 더하여 양수청은 광서성 출신에 현지 숯구이 조직의 수령을 하는 등 실력이 있었다. 따라서 객지인 광둥성 출신의 홍수전, 풍운산의 입장상 양수청의 제어는 힘든 것이었다.

4. 태평천국 운동의 시작

배상제회가 태평천국으로 커가는 동안 양수청의 발언권은 커져갔지만 아직까지는 절대적이지 않았다. 양수청이 천부하범을 시전하자 비슷한 시기에 소조귀천형하범(天兄下犯)을 시전했는데 이는 예수가 자신의 몸에 빙의했다는 것이었다. 파편적으로 발견된 태평천국의 교리서 상으로는 소조귀가 양수청보다는 권력이 조금 더 높아서 둘은 협력하면서 동시에 상호 견제도 하는 관계였는데 차츰차츰 홍수전풍운산의 권력은 작아져 갔다.

그리고 이러한 국면이 급격히 바뀌는 계기는 바로 태평천국의 난의 시작이었다. 1851년 1월 1일, 근거지로 처들어온 청군을 무찔렀는데 양수청은 좌군을 이끌면서 나름 공을 세웠다. 반란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서 영안(永安)을 향했는데 양수청은 이동하는 군의 중앙을 맡아서 지휘했고 영안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당연히 청나라는 영안을 공격했는데 이 때 성 외곽의 전투에서 소조귀가 중상을 입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이 부상을 계기로 소조귀의 천형하범이 끊어지는데 이것을 계기로 천부하범을 계속하던 양수청에게로 권력의 추가 쏠리기 시작했다. 1851년 12월 17일, 홍수전은 소조귀의 상태에 대해서는 언급없이 각 왕들을 임명했는데 양수청은 동왕(東王)으로 봉해지고, 구천세(九千歲)를 받았으며 홍수전을 제외한 왕들의 지휘권을 쥐어주니 양수청은 실질적 1인자가 됐다. 또한 양수청은 천부하범을 통해서[5] 영안성 내에서 주석능(周錫能)이라는 배신자를 잡아내는 등 절대적인 자리에 올랐고 실질적인 성령으로 여겨지게 된다.

5. 숯구이, 권력의 핵심에 오르다

태평천국은 계속되는 압박에 영안성을 탈출했고, 양수청 역시 따라나섰다. 태평천국군은 계림 공략 실패, 전주(全州)[6] 점령 후 사의도(蓑衣渡)에서 풍운산을 잃고, 장사 공략에 실패하고 소조귀를 잃는 등 고전했지만 기어이 무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라이벌인 풍운산소조귀가 전사하여 양수청의 조직내 입지는 더더욱 올라갔다.

그리고 태평천국군은 양수청의 건의를 따라서 남경을 향했고 1853년 2월 10에 출발해서 3월 20일에 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남경을 수도로 삼아 천경(天京)이라고 칭했다.

남경까지 점령한 후 양수청의 권력은 정점에 오르는데 태평천국이 간행한 《행군총요》(行軍總要)에 따르면 양수청은 천부로 여겨지고 있었으며 대다수 남경 시민들을 그를 성령이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였다. 또한 천부하범이 처음 일어난 3월 3일은 야강절(爺降節)이라 하여 태평천국이 시행하는 6일의 공휴일 중 하나였다.

양수청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타고난 성격이 드러나며 권위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우선 천부의 입을 빌어서 입법이나 행정 등에서 자신의 의지를 개입시키기 시작했다. 또한 다른 왕들의 반발을 의식했는지 천부하범을 통하여 그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워낙 권위가 세다보니 홍수전, 석달개, 위창휘도 양수청의 천부하범 아래에서는 땀을 뻘뻘 흘릴 정도였다. 당시 양수청은 정군사(正軍師)로서 군권을 쥐고 있었기에 실질적 권위도 상당했고, 종교국가인 태평천국에서 천부의 입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1853년 말, 홍수전이 후궁을 가혹히 때리자 양수청이 불만을 품고 홍수전을 매질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 홍수전은 잘못을 빌었지만 태형 40대를 맞았다[7]. 이런 일이 반복돼서 위창휘, 석달개가 대신 매를 맞겠다고 나설 정도였으니 그의 위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또한 '권위사(勸慰師), 성신풍(聖神風)'이라 스스로를 칭하고 50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나섰다. 이 가마는 크기가 매우 컸으며, 가마 사이의 벽마다 물을 넣어 무더운 여름에도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여 안에 들어가면 아주 시원했다고 한다. 남경 점령 후 많은 태평천국 간부들이 일부다처제를 따라 첩을 취했는데 가장 앞장선 것도 양수청이라 전해진다.

6. 동왕의 활약

1853년에 남경을 점령했지만 태평천국이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청나라는 당연히 그들을 소탕하려고 했고 향영(向榮)을 흠차대신으로 삼아 남경 함락 3일만에 성의 지척에 강남대영(江南大營)을 건설했고, 양주에 강북대영(江北大營)을 설치하여 남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또한 태평천국군이 버리고 간 호북성, 호남성 일대에 아직 청군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상하이, 항저우, 쑤저우 등의 배후 지방 역시 얻지 못했다. 그리고 베이징에는 함풍제가 눈에 불을 켜고 태평천국을 멸하려 궁리를 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대해 양수청은 뜻밖에 군사를 3갈래로 나누어서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한다. 우선 1853년 5월, 양수청은 북벌군 20,000여명을 편성하여 출병시켰는데 대장은 임봉상이었으며 이개방, 길문원, 주석곤, 황익운을 부장으로 삼아서 북벌을 지시한다. 양수청은 신속히 북상하여 베이징 근처에 도달한 후 후속 제대와 힘을 합쳐서 베이징을 함락토록 지시했으나 선전에도 불구하고 1855년 북벌군은 궤멸당했다.

뒤이은 군사 행동은 서정이었는데 1853년 6월 3일을 기일로 하여 출병시켰다. 약 3년간 석달개, 뇌한영, 호이황, 위준, 증천양, 석상정, 진일강, 진옥성, 황옥곤, 범여증, 이수성 등의 장수가 분전하여 구강(九江), 안경, 무창을 점령하여 영역을 확대하고 식량 수급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늦게 공략한 곳은 바로 앞서 언급된 강남대영과 강북대영이었는데 당시 대다수 군이 북벌, 서정에 나서서 남경내 병사는 성 밖의 강남대영, 강북대영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54년 봄까지는 강남대영의 군사가 북벌군 및 진강의 태평군 등을 경계하느라 7,000명까지 줄어서 대치상황만 이어졌으나 홍단선(紅單船)이라 불리는 큰 함선 50척이 흠차대신 향영의 손에 들어가자 전국은 급변했다. 홍단선은 1척에 대표 50문의 탑재가 가능하여 그간 밀리던 청나라 수군의 전황을 변화시켰고 수운이 점령당하며 천경의 식량 사정은 급박해져 갔다.

이에 태평천국은 서정에 나섰던 군대를 회군시키는데 1856년 봄을 기일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오여효(吳如孝)는 진강에서 출발하여 천경을 향해 서진을 개시했고, 진일강이 이끄는 남경의 태평천국군 본대는 성에서 출병하여 동진을 개시하니 3월 18일에 양군은 회합에 성공했고 4월 2일에는 양주를 점령하여 압박의 강도를 낮췄다. 또한 향영이 장국량(張國樑)을 강북대영으로 파견하도록 만들어서 강남대영의 본대는 약해져 가도록 만들었다. 이 때 홍수전, 양수청의 명을 받고 달려온 석달개는 서정군을 이끌고 안휘성을 돌아서 회군하고 있었다. 또한 진일강이 이끄는 군대는 진강으로 다시 돌아 들어가 강소 순무 길리항아(吉爾杭阿)를 패배시키고 자살케 만들었다. 더 나아가서 6월 13일에 진일강은 남경으로 진격하여 청군 근처에 진을 쳤고 향영은 다시 장국량을 본영으로 불렀다. 그런데 어이 없게도 석달개가 진군해오자 향영은 태평천국군의 의도대로 장국량이 이끄는 정예를 밖으로 보냈는데 이로인해서 강남대영 본영은 크게 취약해졌다.

양수청을 이 때가 적기라 판단하여 성의 동북면에 모인 군대에게 총공격을 지시하니 6월 17일에 태평천국군은 진공을 개시한다. 6월 18일에 진일강은 부장인 이수성, 진옥성과 군대를 삼분하여 명효릉(明孝陵)[8]에 있는 강남대영 북편을 집중 공격했고, 19일에 청군은 물러나기 시작하여 20일에는 총공격을 받았다. 이 때 남경의 수비대도 출병하여 강남대영의 서쪽을 치니 장국량도 싸우다 큰 부상을 입고 향영은 철수를 결정한다. 항영은 단양(丹楊)으로 진을 물리고 남경의 숨통은 트이게 됐으며 양수청의 권위는 절정에 달했다.

7. 형제의 손에 죽다

양수청의 활약은 굉장했고 태평천국의 안정을 불러왔다. 하지만 양수청의 교만과 욕심이라는 불꽃에 기름을 부은 격이 돼서 더욱 방자한 행동을 개시했다. 우선 양수청은 구천세(九千歲)를 받는 자신의 입지를 더욱 높이고자 했다. 홍수전만이 천왕으로서 만세(萬歲)를 받을 수 있었는데 자신도 만세를 받고자 했다. 이것을 위해서 천부하범을 사용해서 홍수전을 압박했는데 홍수전은 일시적으로 굴복하여 양수청과 그의 아들이 만세를 받게 하겠다고 했다. 이 때가 양수청의 생일 약 2달전이었다. 물론 홍수전 입장에서야 속이 뻔히 보이는 짓거리가 싫었고 그간 당해온 것에 대해 압력과 위협을 느껴서 양수청의 숙청할 필요를 느꼈으나 당장은 할 수가 없었다.

양수청은 정치적 감각이 좋았는데 이런 협박을 위해서 석달개호북성, 진일강은 단양, 위창휘는 서정군을 지휘토록 해서 남창으로 보내버려 홍수전은 당장 힘이 없었다. 또한 진성용(陳成瑢)[9]석달개의 장인 황옥곤과 홍수전을 오래 섬긴 진일강, 북왕 위창휘에게도 사적인 태형을 내리는 등 위세를 과시했다. 또한 가족이 있었지만 사명(賜名)[10], 사성(賜姓)[11]을 통해서 세력을 확대했는데 이런 식으로 약 10여 명이 양씨 성을 얻거나 양수청의 이름 일부를 받고 그의 형제가 됐다. 대표적인 예시가 양수청의 의동생인 보왕(輔王) 양보청이다.[12] 이러한 형편이니 양수청에게 대들기는 쉽지 않았다.

당연히 홍수전도 바보는 아닌 이상 양수청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는데 시작은 양수청의 실언이었다. 1차 강남대영 격파 후 양수청은 홍수전의 의견대로 방어만 했으면 어떻게 됐겠냐면서 면박을 줬는데 이 말을 홍수전의 처남뇌한영이 들은 후 당할 수만 없다면서 양수청 제거를 권했다. 뇌한영은 궁중 내에서는 양수청의 눈을 피해서 일을 꾀할 수 없으니 외부의 장수를 불러들이라고 권했다. 또한 진옥성숙부인 진성용(陳成瑢)이 양수청을 역적이라 참소하자 이를 계기로 석달개, 위창휘, 진일강에게 밀명을 내려서 양수청을 제거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본 아일랜드 출신 용병에 따르면 양수청은 개인적인 첩보망 혹은 타고난 직감을 통해 고민과 절망을 상당히 드러냈다고 한다.

진일강은 정예를 이끌고 미리 남경에 들어왔으며 1856년 9월 1일 밤에 위창휘 역시 3,000명을 이끌고 돌아와 9월 2일 새벽에 양수청이 머무는 동왕부를 공격했다.[13] 석달개를 기다리다가 반격 당할 위험을 제거키 위함이었다. 9월 2일의 학살을 통해서 동왕부의 인원들은 전멸당했다. 양수청 역시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하려 했으나 발각당해 그 자리에서 죽었다[14]. 태평천국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여자를 대상으로 치른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한 부선상(傅善祥)은 양수청의 비서였는데 이 때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석달개는 9월 26일에 남경으로 귀환했지만 그 사이에 홍수전은 옛 형제인 양수청에게 손속을 두지 않았으니 양수청을 따르는 세력 6,000여명을 학살했다. 9월 3일, 홍수전은 소동을 일으킨 진일강, 위창휘공개처형하겠다고 공표하여 양수청의 세력을 한데 모은 후 군사를 시켜서 살육을 저질렀다. 짐승몰이를 하듯이 죽였다고 하는데 화약까지 사용할 정도였다. 죽은 대다수는 태평천국의 난 초기부터 따른 광서성 출신의 신자들이었다. 이에 반발한 석달개는 귀환한 9월 26일 밤에 바로 남경을 빠져나간 후 군사 10만을 모아서 약 3개월 후 위창휘, 진일강의 처벌을 요구하며 오는데 그 3개월간 홍수전, 위창휘, 진일강은 신고를 장려하며 의심스러운 자를 죽이니 남녀노소를 포함하여 약 40,000명이 죽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홍수전은 양수청이 승천했다면서 9월 2일을 동왕승천절이라 정했다. 대부분 양수청의 세력은 죽었지만 보왕(輔王) 양보청은 남경 밖에 있어서 변을 피할 수 있었다.

8. 기타

  • 양수청이 실제로 홍수전을 끌어내리려 했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가능성은 적은 편이었다. 우선 홍수전은 천부의 대리인이자 성령노릇을 하는 양수청의 위세하에 허수아비 노릇이었지만 종교의 교주라는 입장상 양수청이 그를 쉽게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고 얻을 것이 크지 않았다. 또한 양수청은 후반기에는 군권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는데 진심으로 홍수전을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할 수 있었다. 당시 홍수전은 궁궐에 틀어박힌 신세라 그가 양수청을 제거하기는 쉽지 않았다.
  • 행적에서 연상되는 외모는 이아고나 음흉한 정치꾼이지만 실제로 본 신원미상의 용병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상당히 귀티나고 호감형의 외모였다고 한다. 애꾸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의외의 외모. 평소에 늘 과격한 것은 아니고 말투 역시 온화한 축에 들었다고 한다.
  • 또한 음모만 꾸밀 것 같은 느낌과는 다르게 상당한 워커홀릭이었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했고 태평천국의 법도에 따라 왕이지만 직접 교리 전파나 설교 하러 밖에도 나갔다고 한다.
  • 위에 언급된 아일랜드 용병[15]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고 외국인이라도 차별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양수청은 유교의 교리도 흡수하고 중국의 현실에 맞게 사상을 개창하는 성향이 있어서 꽉막힌 인물은 아니었다. 단지, 정치나 행정 관련 센스에 비해서 욕심이나 인성이 따라와 주지 못했다.
  • 문맹이라 알려져 있다.
  • 상당한 호색한이었는데 첩실이 약 열댓 명 정도였다. 양수청의 주치의는 과로로 인해 나빠지는 양수청의 눈 외에도 자양강장제 등 정력에 좋은 약도 챙겨야 했다.
  • 1961년 1월 11일, 태평천국 운동 110주년을 기념하는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이 개관했는데 위치는 난징의 첨원(瞻园)이라는 정원이었다. 이곳은 원래 양수청의 개인 궁궐인 동왕부(東王府)였고 그가 죽은 후 소조귀의 아들이자 유서왕(幼西王) 소유화(蕭有和)에 의해서 유서왕부(幼西王府)로도 쓰였다. 이곳은 남경에 현존하는 유일한 명나라, 청나라 대의 정원인데 금릉제일원(金陵第一園)이라고 불리며 한 때는 서달 관저의 일부였으며 청나라 때는 포정사의 관청이었다. 건륭제도 남방 순행 중 들르기도 했으며 국가 핵심 문물 보호지역 및 5A급 관광 특구인데 태평천국과 관련된 전시 기관 중 가장 풍성한 내용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9. 양수청의 패악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천부하범을 통해 다른 왕들 및 관료들에게 압박을 가한걸로 유명한데 참아낸 사람들이 용할 정도였다.
양수청이 한 행동들은 다음과 같았다.
  • 교리와 관련하여 홍수전에게 반박을 날렸는데 과 관련된 해석이 대표적이었다. 홍수전은 기독교성경》의 내용에 근거하여 이라는 동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양수청은 그것에 반대했다. 양수청은 용이 성경에 나오는 과는 다르며 고귀한 존재라고 주장했는데 홍수전은 권위에 밀려서 태평천국의 용은 고귀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 홍수전은 과거에 떨어진 경력이 있어서 유교를 매우 싫어했는데 양수청은 천부하범을 통해서 유교를 옹호하며 일부 요소는 권장하며 받아들이도록 권했다. 당시 남경에 있는 유학자들에게 인기를 얻고 유교를 포섭하여 전도를 쉽게 하고자 위함이었는데 당연히 홍수전의 권위를 깎는 행위였다.
  • 홍수전에게 궁전내의 이 충분하니 더 이상 만들지 말 것을 권고했다. 위창휘는 홍수전 편을 들면서 반박했지만 오히려 양수청은 절약 정신을 보여야 한다면서 강하게 권고했고 홍수전은 양수청의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다.
  • 위창휘는 양수청의 여종들이 그가 천부하범에 들어갔음을 알리는 북을 칠 때마다 달려와서 양수청이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조금이라도 늦을 경우 양수청의 여종 발 밑에 엎드려서 듣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 위창휘는 양수청이 가마를 탈 때 천부하범에 들어가 있다면 가마를 탈 수 없고 걸어가야 했다. 또한 천부하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천부하범이 끝났는지 양수청의 시종들에게 물어야 했는데 그들은 위창휘를 무시하며 대답을 잘 하지 않았다.
  • 진일강도 위창휘와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양수청의 가마를 들어야 할 때도 있었다.
  • 천부하범을 통해 성경에 문제가 있으며 천부하범을 통한 지시야 말로 진리라 주장했다. 즉, 자신의 말이 진리이니 따르라는 것인데 홍수전과 신하들은 굴복하여 많은 성경에 수정을 가해야 했다.
  • 양수청이 꿈에서 하느님께 들은 말이라 주장하는 모든 것에 홍수전을 포함한 간부들은 긴장해야 했다. 여기에 더하여 홍수전은 양수청이 궁궐에 입궁할 때마다 문까지 마중 나가서 무릎을 꿇고 위창휘는 시도 때도 없이 불려와 천부하범의 계시를 듣게 하는 등 고생은 나날히 더해졌다. 진일강 역시 위협을 당하며 노예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 아무리 날씨가 가혹해도 양수청의 계시를 듣기 위해 기다려야 했으며 장수들이 길거리에서 양수청 집안의 사람을 만난다면 예를 갖춰야 했고 거부한다면 처형당했다. 양수청은 이전에도 장수들을 모은 후 몰래 부인을 만나 성관계를 가졌다면서[16] 1명을 처형 시켰는데 자신의 정보망이 모두를 감시함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 1854년, 양수청의 측근 두 명이 양수청의 명령으로 집필한 《천정도리서》(天情道理書)에서, 양수청은 "태평천국의 최고 조언자, 최고 관료, 굶주리고 병든 자를 구하고, 온 세상 모든 나라의 형제, 자매들을 다스리기 위해 천부상제가 친히 명하여 세상에 내려보낸" 존재로 묘사됐다. 엄연히 교주인 홍수전이 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무례한 일이었다.
  • 본문에서 언급한대로 홍수전이 후궁을 때리자 양수청은 홍수전에게 태형 40대를 가했다. 또한 위창휘도 양수청이 천부하범으로 내린 계시를 자녀들에게 말하지 않아 40대를 맞은적이 있다.
  • 군재가 뛰어난 석달개도 양수청이 천부하범의 상태면 무릎을 꿇고 식은땀을 흘리며 경청했다고 한다.
  • 양수청은 홍수전의 정실인 뇌씨에게 천부하범의 상태로 후궁을 다루는 법을 지시했는데 이 때 뇌씨 며느리라고 칭했다.
  • 양수청의 천부하범이 역기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홍수전이 후궁에 들어가 향락을 즐기는 것과 홍수전이 후계자 교육에 신경쓰지 않은 탓에 홍천귀복이 난행을 일삼는 것을 꾸짖기도 했다.
  • 양수청은 무학 문맹에 홍수전의 배상제회 교리만 배웠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래서 남경 입성 이후에, 양수청은 태평천국을 방문한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다양한 질문을 하고 각종 교리와 신학적 지식을 습득했다. 특히나 그가 집중적으로 질문했던 부분은 '삼위일체'였다.
  • 1차 강남대영 격파방어를 주장한 홍수전에 반발한 양수청의 주도로 이뤄졌는데 승리를 거둔 후 양수청은 홍수전에게 면박을 줬다. 홍수전의 말대로 방어만 했으면 우리가 어떤 꼴을 당했을 것이냐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10. 평가

양수청은 태평천국 지도층 중 정치가, 행정가로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천부하범을 통해서 조직을 결속시키며 교리를 조정하여 다양한 집단을 포섭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첩보망을 구축했으며 군사적으로는 태평천국의 1차 전성기를 여는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한계도 뚜렷 했는데 바로 독선적인 성격과 지나치게 정치성을 띈 행적이었다. 태평천국은 배상제회 시절부터 미묘한 권력 다툼이 있었지만 양수청이 이런 양상에 불을 붙이고 정점에 오른 뒤부터는 거칠 것이 없이 행동했으며 많은 이들의 피를 불러왔다. 타고난 출신 및 성격으로 인하여 권위와 권력에 집착했고 과도한 집착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천부하범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모욕을 주니 자연스레 적들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오랜 시간 함께한 동지와 형제들은 그를 제거할 수 밖에 없었고 태평천국의 일각을 담당한 그의 재주가 없어진 이래 태평천국의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1] 많은 사람이 보는 중이었고 실제로 고통을 겪었다는 묘사가 많아서 신내림 같은 재주는 있었다는 견해가 많다. 아니면 연기력이 출중하던가.[2] 현재의 계평[3] 현재의 메이저우[4] 실제로는 양수청이 조직한 첩보망이 낸 성과라는 설이 많다.[5] 실제로는 첩보망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6] 현재 취안저우 시[7] 심지어 이것도 수많은 신하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에 벌어진 일이었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신하한테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는데, 이토록 오만방자하게 횡포를 부리는 양수청을 홍수전이 미워하여 제거하려 들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8] 주원장황후인 마황후의 무덤[9] 진승용(陳承瑢)이라고도 불리며 진옥성의 숙부[10] 이름을 하사하는 것[11] 성을 내림[12] 양보청의 원래 이름은 양금생(楊金生)인데 성은 원래 양씨지만 양수청과 실제 형제 관계는 아니었다. 양수청의 이름 중 淸자를 받았다.[13] 당시 태평천국의 왕들은 각자의 부를 설치했는데 홍수전, 석달개, 위창휘, 양수청의 부는 남경성에 있었다.[14] 이때 잘려나간 양수청의 목은 그가 평소에 물고기들을 넣어서 키우던 대형 수족관 안에 던져졌다.[15] 신원은 미상이며 진일강 밑에서 일하다가 신뢰를 얻어서 남경에 들어왔고 양수청의 호감을 사서 그가 죽기 전에 관찰한 기록을 남겼다. 천경사변 때 살아남아 1856년 12월 10일 상하이로 도망쳤다.[16] 초창기만 해도 태평천국은 일단 가입하는 신도들은 부부라고 해도 남자와 여자끼리 따로 분리시켰으며, 만약 허가없이 만나서 성관계를 갖게 되면 사형 같은 엄벌에 처했다. 그러나 계속 이런 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자니 임신을 한 여군이나 남자들끼리의 동성애가 늘어나 통솔에 어려움을 겪어서 남경을 점령한 이후부터는 부부간의 성관계는 자유롭게 하도록 풀어주었다. 다만 결혼을 하지 않는 남녀신도가 만나서 성관계를 하면 사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