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3:51:48

알렉스 퍼거슨/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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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스트 스털링셔, 세인트 미렌 FC3. 애버딘 FC4.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5.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과 리빌딩(1986-1992)5.2. 전성기를 맞이하다 (1992-1999)5.3. 지속적인 리빌딩과 장기 집권 (1999-2006)5.4. 다시 맞은 전성기5.5. 말년5.6. 은퇴
6. 감독으로서의 능력
6.1. 전술적 능력6.2. 선수단 장악 및 관리 능력6.3. 유망주 육성 및 선수를 보는 안목6.4. 동기부여 능력6.5. 매우 유동적인 선발 라인업6.6. 총평
7. 퍼거슨 리더십

1. 개요

알렉스 퍼거슨의 감독 커리어를 정리한 문서.

2. 이스트 스털링셔, 세인트 미렌 FC

국내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 이전 퍼거슨의 커리어는 그렇게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퍼거슨은 1974년에 감독 생활을 시작했으나 국내에 해외축구가 널리 퍼진 건 2000년대 중반 즈음이기 때문이다. 해외축구의 선구자들로 대접받는 이들도 빨라야 1990년대 초 즈음에 입문한 경우가 많으니 맨유 이전 퍼거슨의 경력이 유명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퍼거슨의 진정한 진가는 맨유 부임 이전에 드러났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퍼거슨은 맨유 이전의 커리어 또한 엄청난 감독이다. 사실 맨유 부임 이전 경력만으로도 퍼거슨은 이미 명장으로 대접받기 충분했고, 또 이미 그렇게 대접받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퍼거슨은 1974년 6월, 32세의 젊은 나이에 스코틀랜드 3부 리그 이스트 스털링셔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정규 계약이 아닌 주당 40파운드를 받는 파트타임 계약이었다. 당시 이스트 스털링셔는 파산 직전에 몰려 팀 상황이 엉망이었다. 기존 선수들을 전부 팔아버려 시즌 시작이 2주 전인데 스쿼드에 선수가 8명밖에 없었고, 심지어 그 중에는 골키퍼가 1명도 없었다. 막 선수에서 은퇴해 술집을 운영하고 있던 32살의 퍼거슨을 파트타임 감독으로 앉힌 것도 돈이 없어서였다.
저는 구단의 회장한테 가서 말했습니다. "회장님, 아시다시피 축구 경기를 하려면 11명이 필요합니다." 회장은 환상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는 상황이 나쁠수록 더 줄담배를 피웠거든요.
출처
퍼거슨은 부임과 동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팀에 쏟아부었다. 우선 100파운드에 그의 감독 커리어 첫 영입으로 골키퍼를 영입했고, 2주 사이에 2000파운드[1]를 써 5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그리고 자신의 카리스마와 엄격한 규율로 선수단을 장악하고 엉망이었던 구단을 뜯어고쳤다. 당시 퍼거슨이 얼마나 매섭게 나왔는지, 이스트 스털링셔의 공격수였던 바비 맥컬리는 훗날 "그 전까지 누구도 두려워해본 적이 없었는데 퍼거슨은 처음부터 무서운 놈이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훈련해야 했고, 그는 사납고 팔을 휘두르고 이것저것 걷어차는 사람이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심지어 퍼거슨은 자신도 축구화를 신고 자신이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높은 강도의 훈련을 함께 소화했다.

동기부여 방법도 다양했다. 폴커크와의 경기가 다가오자 마을에 발행되는 유일한 신문이었던 '폴커크 헤럴드'를 들먹이며 지역 언론이 폴커크만 편애한다고 연설했고, 경기에서 2:0으로 이긴 일화까지 있다. 시즌을 치를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이스트 스털링셔의 성적은 반등하였고 초짜 감독의 재능은 다른 구단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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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 스털링셔 부임 고작 4개월 뒤인 1974년 10월, 같은 3부 리그의 세인트미렌이 퍼거슨에게 정식 감독직을 제의했다. 퍼거슨은 잠시 갈등했으나 그의 은사 조크 스타인의 권유로 세인트미렌 부임을 결정한다.[2] 세인트미렌의 팀 규모는 이스트 스털링셔보다 컸지만, 성적은 여러 시즌 동안 3부 리그 중하위권 내지 하위권 정도를 오가던 팀이었다. 부임 당시에도 퍼거슨이 이끌던 이스트 스털링셔보다 순위가 낮았다. 게다가 퍼거슨은 시즌 중인 10월에 중도 부임했고, 선수들이 32살의 어린 감독을 제대로 대접할 리가 없었다. 부임 첫 날 퍼거슨의 세인트미렌 감독 선임 소식을 알리는 신문 기사에 팀 단체 사진이 실렸는데, 퍼거슨이 발견한 것은 주장 이안 리드가 자신 뒤에서 손가락 욕[3]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퍼거슨은 그 즉시 리드를 불러 팀에 성숙하지 않은 인간의 자리는 없으니 넌 앞으로 뛰지 못할 것이며, 원하면 팀을 떠나라고 통보했다.
감독을 시작했을 때 내가 가졌던 자산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었다. 나는 학생 시절에 팀을 선택할 때조차도 내 결정에 대해 불안감을 갖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런 나에게 선수 시절 나를 지도한 감독 중 한 명인 윌리 커닝엄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거 알아? 넌 진짜 밥맛 없는 놈이다."
퍼거슨 본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 49p
이후 40년의 세월 동안 퍼거슨이 명장으로 군림하도록 만든 과감함과 선수단 장악 능력, 선수를 보는 날카로운 눈 등 감독직에 대한 천부적 재능은 감독 생활 초기부터 두드러졌다. 시즌 도중에 부임했음에도 퍼거슨은 시작과 동시에 주장을 내쫓았고, 팀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켰다. 특히 선수들이 게으르거나 술을 마시면 곧바로 엄벌이 날아왔다. 거기에 빌리 스타크[4], 피터 위어[5], 프랭크 맥가비[6], 토니 피츠패트릭 등 팀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어린 선수들을 발굴해 1군으로 끌어왔다. 막 1군에 올라온 선수들의 열정과 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는 기존 선수들의 긴장은 팀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가장 파격적이었던 것은 피츠패트릭의 주장 임명이었는데, 유소년 팀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7살의 피츠패트릭을 눈여겨 본 퍼거슨은 그를 주전으로 쓰더니 돌연 주장 완장을 채워버렸다.[7] 이는 누구의 자리도 안전하지 않으며 퍼거슨 자신이 원하면 그 어떤 파격적인 결정도 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퍼거슨이 피츠패트릭에게서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실로 날카로웠다. 피츠패트릭은 훗날 선수 은퇴 후 세인트미렌의 감독, 심지어는 CEO까지 역임하게 될 타고난 리더였다.[8] 피츠패트릭은 주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하며 퍼거슨의 라커룸 장악을 도왔다. 기존 주장의 추방, 32살의 어린 감독에 대한 반항이 예상된 상황에서의 엄격한 규율 적용, 유소년 선수들의 잇따른 1군 콜업, 17살 선수의 주장 임명 등 도박수들로 보였던 파격적 선택들은 신들린 듯이 연달아 적중했다. 세인트미렌은 퍼거슨 시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되어갔고, 결국 퍼거슨은 팀을 반등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순위가 몇 개 올라가거나 경기력이 좀 좋아지는 수준의 반등이 아니었다. 3부 리그 하위권의 세인트미렌을 이끈 퍼거슨은 중도 부임 시즌인 1974-75 시즌에, 세인트미렌을 2부 리그로 곧장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이어진 1975-76 시즌, 세인트미렌은 2부 리그에서도 곧바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퍼거슨이 발굴한 어린 선수들이 만개했고, 32세의 젊은 감독에 의문을 가졌던 선수들도 하위권에 머물던 팀을 곧장 승격시키자 퍼거슨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인트미렌은 승격 시즌에 중상위권에 해당하는 리그 6위의 성적을 받아들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퍼거슨의 세인트미렌은 다음 시즌인 1976-77 시즌에 2부 리그를 우승해 버리며 1부 리그로 승격하였다. 3부 리그 하위권이었던 팀이 고작 3년 만에 1부 리그로 승격한 것이다. 당시 세인트미렌의 평균 연령은 19세, 주장 피츠패트릭은 20세였으며 감독 알렉스 퍼거슨은 35세였다.

퍼거슨 감독 커리어 역사상 1부 리그에서의 첫 시즌이었던 1976-77 시즌, 세인트미렌은 10개 팀 중 8위를 기록하며 강등당하지 않고 1부 리그에 잔류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또 다시 예상을 뒤엎은 이변이었다. 하지만 퍼거슨은 시즌 직후 클럽과의 마찰 과정에서의 복잡한 문제[9]로 세인트미렌에서 경질되었고, 몇 개월 뒤 애버딘 부임을 결정하였다. 이는 퍼거슨의 감독 경력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경질이라는 기록으로 남아있다.[10]

3. 애버딘 FC

애버딘은 나름대로 매년 리그에서 4위권 정도에 위치하는 스코틀랜드의 유명 구단이기는 했으나[11] 1955년 우승이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은 그때도 레인저스셀틱의 양강 체제로 두 팀이 우승컵을 나눠갖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면은 10~20년도 아니고 1890년 창설 이래로 쭉 지속되어 왔다. 퍼거슨은 늘상 올드 펌이 다 해먹던 스코틀랜드 축구판에 혁명과도 같은 강세를 보여줬기에 아직까지도 스코틀랜드 축구팬들에게 회자된다.[12] 단적으로 퍼거슨의 애버딘 이후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에서 셀틱과 레인저스 이외의 팀이 우승한 적은 없다. 여기에 유럽 대항전 성적까지 더해지며 퍼거슨이 가장 위대했던 시절로 애버딘 시절을 꼽는 팬들도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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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미렌에서 3년 만에 3부 리그에서 1부 리그 승격이라는 업적을 이뤄낸 퍼거슨은 1978년 애버딘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은 셀틱, 레인저스와 나머지 팀들 간의 격차가 너무 컸다. 실력뿐만 아니라 예산과 시설, 멘탈리티 등 모든 면에서 그랬다. 애버딘의 사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애버딘에는 트레이닝 시설이 없었으며, 선수들은 오전에는 동네 공원 오후에는 주차장 또는 해변에서 훈련을 했다. 체력 훈련은 마을의 언덕과 골프장 주변을 달리는 것이었다.[13] 어차피 우승은 셀틱이나 레인저스일 테니 선수들도 팬들도 강등만 당하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마인드였다고 한다. 후일 퍼거슨은 애버딘 지역 사람들 자체가 특유의 굉장히 너그러운 촌 사람들이기도 했고, 양강 체제가 너무 뿌리깊어 열등감을 느끼다 못해 다들 포기한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퍼거슨은 여전히 36세의 젊다 못해 어린 감독이었고, 당연히 퍼거슨과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도 있었다. 이스트 스털링셔나 세인트미렌은 부임 당시 3부 리그 팀이었지만 애버딘은 1부 리그 팀이었고, 퍼거슨은 라커룸 장악에 애를 써야 했다. 때문에 첫 시즌은 쉽지만은 않았다. 올드 펌의 양강을 무너트리길 꿈꿨던 퍼거슨은 라인을 올리고 강팀의 축구를 하고 싶어했지만, 이를 반대한 윌리 밀러, 조 하퍼를 비롯한 고참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퍼거슨을 저격하며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렇게 1978-79 시즌, 애버딘은 리그에서는 4위를 기록했다. 컵 대회들은 스코티시컵은 준결승, 리그컵은 결승까지 가며 우승컵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이 시즌에 퍼거슨은 팀을 정비하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선수들을 휘어잡으며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데 집중해야 했다. 퍼거슨은 이를 위해 일부러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키거나, 하프타임에 과격한 행동을 하거나, 스코틀랜드 언론들이 글래스고에 연고지를 둔 셀틱과 레인저스에게만 호의적이라고 연설하며 지역 감정까지 자극했다.[14] 결국 퍼거슨은 라커룸을 확실히 장악하기 시작했고 애버딘 선수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퍼거슨 부임 후 두 번째 시즌인 1979-80시즌, 애버딘은 더 빠른 템포, 높은 라인을 가진 공격 축구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애버딘은 퍼거슨의 의도대로 강팀이 되었고 시즌 말까지 2위에 위치했다. 다만 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애버딘은 4월까지 셀틱과 승점 7점 차로 2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당시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기 때문에 이는 지금으로 치면 승점 10점 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애버딘은 시즌 막판 연승을 질주했고,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5:0으로 승리하고 셀틱이 0:0 무승부를 거두며 극적인 역전으로 리그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올드 펌 이외 구단이 리그 우승을 한 것은 15년 만이었고, 애버딘이 25년 만에 들어올린 두 번째 리그 우승 트로피였다. 셀틱의 1/10도 안 되는 금액으로 수십 년간 이어진 올드 펌의 양강 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한때 퍼거슨에게 반항했던 선수들도 올드 펌이라는 거대 양강에 맞서는 과정에서 하나로 뭉쳤고, 상상도 하기 어려웠던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자 퍼거슨을 인정했다. 리그 우승 다음 날 새벽 2시, 부임 초기에 전술 문제로 퍼거슨과 부딪혔던 윌리 밀러에게 전화가 왔다. 퍼거슨이 전화를 받자 밀러와 그의 집에서 파티를 하던 선수들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웃으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금주령을 내린 퍼거슨을 대놓고 도발한 것이다. 퍼거슨은 선수들이 이제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친밀해졌다는 생각에 내심 기분이 좋았지만, 겉으로는 내일 너네 다 벌금이라고 말했고 다음 날 그 선수들은 언덕을 달려야 했다고 한다.

다음 시즌이었던 1980-81 시즌은 팀에 부상 악재가 덮치며 무관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레인저스를 밀어내고 리그 2위를 차지하며 애버딘은 완전한 강팀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이후 애버딘은 승승장구했고 1981-82 시즌부터 3년 연속 컵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8시즌 간 3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스코틀랜드의 대표 강호로 자리잡았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양강은 무너졌고 이젠 퍼거슨의 애버딘과도 경쟁해야 했다. 이 시기가 스코틀랜드 리그의 양강 체제가 마지막으로 붕괴된 시기이자 마지막 황금기였다. 1985년 애버딘 이후 현재까지 셀틱과 레인저스 이외의 팀이 리그를 우승한 사례는 없다.

나아가 퍼거슨이 이끄는 애버딘의 성과는 스코틀랜드 국내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1982-83 시즌에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15]에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바이에른 뮌헨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우승했다. 당시에도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축구 클럽들이었고, 스코틀랜드의 시골 도시 애버딘은 환호하며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됐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전이 열리는 스웨덴 예테보리로 가기 위해 인구 15만 명의 도시에서 1만 2천 명이 비행기를 탔고, 500명이 배를 탔다. 당시 애버딘 공항 면세점에서는 3일 만에 한 달치 술이 팔려나갔다. 그 다음 시즌에 애버딘은 함부르크를 꺾고 UEFA 슈퍼컵까지 우승했다. 이 두 개의 트로피가 현재까지도 유이한 애버딘의 유럽대항전 우승 트로피이다. 이 업적으로 인해 퍼거슨은 젊은 명장으로 유럽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축구 팀이 아니었다. 그건 불굴의 투혼이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당시 퍼거슨은 UEFA 클럽 랭킹 100위대의 클럽이었던 애버딘을 단 8년 만에 UEFA 클럽 랭킹 6위로 끌어올렸다.
(애버딘의 UEFA 클럽 랭킹)
1978년 - 106위 ← 애버딘 감독 부임
1979년 - 116위
1980년 - 97위
1981년 - 78위
1982년 - 45위
1983년 - 20위
1984년 - 16위
1985년 - 13위
1986년 - 6위 ← 이때를 끝으로 맨유 감독 부임
2023년 기준 UEFA 클럽 랭킹 116위는 헝가리 리그의 몰 비디, 106위는 이탈리아의 토리노이며 6위는 파리 생제르망이다. 100위권 클럽이 6위까지 올라가는게 어떤 일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다.
정말 믿기 힘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모든 스코틀랜드 시민들은 그를 믿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믿지 않았냐구요? 그가 사람일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국 내 수사국에 마법사라는 고소가 수십 건 들어왔고, 실제로 그를 체포해 조사하기도 했답니다.[16]
애버딘 FC 박물관
파일:Alex Ferguson Statue_Aberdeen FC.jpg
애버딘의 홈 구장에 있는 퍼거슨의 동상[17]
이후 퍼거슨은 바르셀로나, 레인저스, 아스날, 토트넘[18] 등에서 구애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86년 11월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구단주였던 마틴 에드워즈[19]의 권유를 받은 퍼거슨은 곧바로 맨유의 감독직을 맡기로 했다.

4.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85년, 퍼거슨은 애버딘 감독직과 함께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직도 수행하고 있었다. 웨일스와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지역예선 경기에 스코틀랜드의 월드컵 플레이오프 진출이 달려있던 상황에서, 조크 스타인 감독과 퍼거슨은 엄청나게 긴장했다.[20] 이 경기에서 비긴 스코틀랜드는 웨일스와 전적은 같았지만 골득실에서 앞서 간신히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조크 스타인은 경기 종료 휫슬이 불리고 심장마비로 사망했고[21] 졸지에 퍼거슨은 갑작스레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게 됐다.
조크 스타인과 알렉스 퍼거슨.

퍼거슨으로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운 시기였다. 감독 생활 초기부터 자신의 정신적 지주와 같았던 사람[22]이자 당시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조크 스타인이 경기 도중 사망한 충격은 팀에게도, 퍼거슨 본인에게도 매우 컸다. 그 와중에 월드컵 본선 진출이 걸린 플레이오프를 곧 치러야 했고, 월드컵 개막도 고작 수 개월 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퍼거슨이 감독을 맡고 있던 애버딘은 시즌이 막 시작한 시점이었다. 매주 클럽 팀 경기를 하면서 동시에 혼란에 빠진 국가대표팀까지 수습하는 건 제 아무리 퍼거슨이라도 버거운 일이었다. 자신의 정신적 충격도, 팀의 혼란도 제대로 수습할 여유가 없었던 상황에서 플레이오프를 맞이한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대표팀을 이끌고 호주를 상대했다.[23]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는 홈에서 2:0 승, 원정에서 무승부 1점으로 월드컵 24강 본선에 진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악재는 계속되었다. 스타인 체제부터 대표팀에 소극적이었던 앨런 한센[24]이 갑자기 퍼거슨과의 관계 악화를 이유로 월드컵 불참을 선언했고, 이어 리버풀의 전설이자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 케니 달글리시가 월드컵 직전 부상으로 아웃,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면서 스코틀랜드는 월드컵 직전 거대한 전력 손실과 계획 수정이 불가피했다. 결국 본선에서 스코틀랜드는 서독, 덴마크, 우루과이와 한 조가 되었는데 서독과 덴마크에게 패하고 우루과이와 비겨 1무 2패 조 4위 월드컵 19위로 탈락한다. 물론 스코틀랜드는 24강 본선도 간신히 올라온 전력이었고, 모시던 은사의 갑작스런 사망과 충격, 클럽팀 감독 겸직, 짧았던 월드컵 준비 기간, 주요 선수 이탈 등 상황을 고려하면 퍼거슨의 감독 커리어에 있어 오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되려 그 혼란한 상황에서 호주를 이기고 스코틀랜드를 월드컵 본선(24강) 진출과 월드컵 19위까지 올려놓은 것은 나름대로의 성과였다고 할 수 있다.

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만약 맨체스터가 어떤 팀이었는지 요약할 스코어가 필요했다면 그것은 나의 마지막 경기였던 1,500번째 게임을 보면 된다.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 멋지고 재미있고 엄청나고 말도 안 되는 경기였다. 만약 당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면, 골과 드라마를 보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의 심장은 시험받았을 것이다. 우리가 겨우 9분 만에 웨스트 브롬과의 5대2 리드를 걷어 차버린 것에 대해 나는 아무런 불평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화가 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선수들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경기가 끝난 뒤 나는 선수들에게 말했다. "고맙다, 이 녀석들아. 정말 더럽게 멋진 작별 선물이었다."
본인의 자서전 '나의 이야기'에서

5.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과 리빌딩(1986-1992)

스코틀랜드에서 연달아 기적을 일으킨 젊은 감독 퍼거슨은 자연히 많은 구단들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최고의 명문인 레인저스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등이 퍼거슨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다가 거절당했다. 특히 잉글랜드 클럽들이 퍼거슨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울버햄튼, 아스날, 토트넘 등이 감독 오퍼를 했으나 퍼거슨은 거절했다. 1985년에는 리버풀과 링크가 나기도 했다. 그러던 1986년 11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론 앳킨슨 감독이 경질되었고, 후임 감독 후보에 퍼거슨이 올랐다. 퍼거슨은 맨유의 오퍼를 수락했고 1986년 11월 6일 맨유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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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부임 직후 마틴 에드워즈 회장과 함께
45세의 나이로 맨유에 부임하며 퍼거슨은 기대보다 열악한 대우를 수용했다. 부임 직전 구단 측에 선수 영입에 쓸 충분한 자금을 요구했지만 맨유의 금고는 거의 바닥이 드러난 상태였고, 연봉 또한 실망스러웠다. 애버딘에서 살고 있던 주택도 구단이 구입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맨유의 재정 사정상 힘들다며 거절당했다.[25] 퍼거슨이 맨유의 감독으로 가게 된 건 금전적인 동기보다는 감독으로서의 꿈과 야심 때문이 컸다. 스승과 같았던 조크 스타인이 생전에 자신에게 고백한 후회와 맷 버스비 시대를 지나 침체된 명문을 되살리는 새로운 도전이 퍼거슨을 자극하고 있었다.
언젠가 조크 스타인 감독이 내게 맨유 감독직을 거절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맨유에게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시즌 도중 부임한 퍼거슨에게 주어진 과제는 소방수 역할이었다. 1986년 11월, 맨유는 평소에 4위 정도를 기록하던 팀이 극심한 부진에 빠져 22팀 중 2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퍼거슨은 일단 이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그에게도 쉽지 않은 출발이었다. 데뷔전 옥스퍼드 유나이티드전에서 0:2로 패하고, 노리치 시티전에서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맨유 부임 3주 후 모친이 사망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퍼거슨은 QPR전에서 첫 승리를 가져왔고, 리버풀 원정에서 승리한 것을 기점으로 박싱 데이를 잘 보내면서 반전에 성공했다. 이후 구단의 혼란은 수습됐고 21위였던 팀을 1986-87 시즌 최종 11위로 마무리시키며 소방수 역할을 잘 해냈다.

일단 중도 부임 시즌의 위기를 넘긴 퍼거슨의 다음 임무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리빌딩이었다. 1986-87 시즌의 혼란 이전 맨유는 3연속 리그 4위를 기록했고, 지금보다 권위가 높았던 FA컵도 몇 차례 우승하던 팀이었다.[26] 하지만 리그는 우승한 지 거의 20년이 지나있었고, 장기전인 리그에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고 팬들을 달래줄 컵 대회 우승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게다가 술주정뱅이 구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팀 멘탈도 형편없었다. 오죽하면 퍼거슨이 "난 축구감독이지 술집을 차린 게 아니야."라고 말했을 정도였다.[27] 이는 맷 버스비 시절 데니스 로,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등 3명의 발롱도르 수상자를 배출하고 잉글랜드 클럽 사상 처음으로 유러피언 컵을 우승했던 찬란한 과거의 영광과 비교하면 명백히 침체된 구단의 모습이었다.
맨유는 당시 19년 동안 리그 우승을 못 해봤고 나는 낮은 기대 속에 클럽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컵 대회 전용팀이었고 팬들은 우승 희망을 억제했던 리그보다 토너먼트 대회에서 더 좋은 성과를 기대했다.
알렉스 퍼거슨 나의 이야기, 239p
퍼거슨은 두 번째 시즌 팬들에게 과거의 영광을 되살릴 희망을 보여줬다. 스티브 브루스, 비브 앤더슨, 브라이언 맥클레어 등을 영입한 맨유는 두 번째 시즌을 리버풀에 이은 2위로 마무리했다. 물론 승점 차는 9점으로 컸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고무적인 성과였다.

하지만 문제는 리빌딩이었다. 먼저 퍼거슨은 주정뱅이 구단이라는 이미지에 걸맞게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던 노먼 화이트사이드와 폴 맥그래스, 고든 스트라칸 등을 방출했다.[28] 당시 팀 주축이면서 알코올 중독 수준이었던 선수 중 퍼거슨 체제에서 살아남은 건 브라이언 롭슨 하나였다. 거기에 퍼거슨은 새로운 훈련 체계와 엄격한 규율을 적용시키면서 팀 분위기를 바꿨고, 마지막으로 유소년 시스템을 재구축하고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퍼거슨은 그동안 기적 같이 빠른 성과를 내온 감독이었고 같은 모습을 기대하는 팬들과 언론들 때문에 너무 조급해하고 있었다. 핵심 선수들의 판매를 통한 선수단 장악은 바꿔 말하면 팀의 기둥을 뽑아버린 것이기도 했다. 물론 선수들을 판매한 돈으로 스티브 브루스, 게리 팰리스터, 마크 휴즈, 마이크 펠란, 폴 인스 등 퍼거슨 맨유 1기의 주축이 되는 선수들을 사들였다. 그러나 이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팀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연히 팀에 혼란을 가져왔고, 인기 선수들의 판매는 성적이 동반되지 않을 시 팬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올 터였다.[29]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퍼거슨의 세 번째 시즌인 1988-89 시즌, 맨유가 리그 11위로 추락하며 현실이 됐다. 특히 리그 막판 10경기 2승 2무 6패를 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음 시즌에도 이어졌다. 1989-90 시즌 퍼거슨은 자신의 감독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어두운 시기를 보냈다. 첫 다섯 경기를 1승 1무 3패로 시작했고, 좀 살아나나 싶더니 주요 선수들의 연이은 부상 악재가 팀을 덮치면서 참담한 겨울을 맞이했다. 12월과 1월 2달 간 동안 맨유가 기록한 리그 성적은 5무 5패.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팬들은 구단 사무실에 퍼거슨을 경질하라는 전화 폭탄을 날렸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퍼거슨은 나가라는 배너를 걸었으며, "퍼기 나가!(Fergie Out!)"라는 구호를 외치며 구단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시즌 맨유의 리그 최종 순위는 13위. 15년 전 1부 리그로 재승격한 이후 가장 낮은 리그 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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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버스비와 함께한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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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찰튼과 함께
이런 상황에서 퍼거슨을 지킨 것은 맨유의 보드진들이었다. 특히 당시 이사진으로 활동하고 있던 바비 찰튼과 맷 버스비 등 팬들에게 인기가 높은 이들이 앞장서서 퍼거슨을 변호했다. 물론 이들도 아무 근거 없이 퍼거슨을 지키려 든 것은 아니었다. 일단 팀의 부상 문제와 리빌딩 도중 발생하는 혼란기라는 점을 참작했다. 여기에 퍼거슨은 맨유의 유스 시스템을 크게 발전시키고 있었고[30], 클럽 내부 인사들은 변화된 팀 분위기와 규율을 감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장기적인 클럽의 발전을 위해 리빌딩이 끝날 때까지는 퍼거슨을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수파이지만 일부 팬들도 이런 입장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시즌 연속 중위권으로 추락한 성적은 이들로서도 감당하기 버거웠고, 그만큼 팬들의 분노와 언론의 압박은 대단했다. 구단의 이사진은 거듭 퍼거슨에게 경질로부터 위험하지 않다고 안심시켰고, 퍼거슨도 진심으로 이를 믿었지만 동시에 팬들과 언론에 구단이 결국 굴복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시즌 내내 퍼거슨은 경질설에 시달렸고, 실제로 시즌 막판에는 경질이 임박했다는 언론 보도들이 이어졌다.

이대로 끝나나 싶던 퍼거슨을 구원한 것은 FA컵이었다. 1989-90 시즌 맨유는 FA컵 3, 4, 5, 6라운드를 전부 한 점차로 승리하면서[31] 4강까지 올랐다. 준결승에서는 올드햄 애슬레틱을 만나 대니 윌리스의 92분 동점골로 3:3 무승부, 승부를 재경기로 끌고 갔다. 재경기도 연장전 끝에 2:1로 한 점차 진땀승을 거두었고, 크리스탈 팰리스를 결승에서 만났다. 이 결승에서도 맨유는 연장 후반 8분 마크 휴즈의 동점골로 간신히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고, 재경기에서 마침내 1:0으로 승리한 맨유는 3라운드부터 결승까지 한 점차 승부로 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당시 FA컵의 위상은 현재보다 높았고, 팬들도 5년 간 우승 트로피에 목말라 있던 터라 이 우승은 퍼거슨이 맨유에 남을 명분이 되어줬다. 결국 퍼거슨은 간신히 감독직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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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부진은 허용될 수 없었던 만큼 1990-91 시즌은 퍼거슨에게 매우 중요한 시즌이었다. 퍼거슨은 좌측 풀백 데니스 어윈을 영입했고, 맨유는 초반 다섯 경기를 3승 1무 1패로 기분 좋게 시작했다. 중간에 리버풀에게 0:4 대패를 당하거나 1월 말~ 3월 초에 4무 3패를 기록하는 등 부침이 있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맨유는 이전 두 시즌보다 휠씬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 6위를 기록했다. 리그컵도 비록 결승전에서 셰필드 웬즈데이에게 패배했으나 팀에 체계가 갖춰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UEFA 컵위너스컵 우승이었는데, 맨유는 결승에서 마크 휴즈의 멀티골에 힘입어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는 헤이젤 참사로 인해 내려진 잉글랜드 클럽의 유럽 대항전 5년 정지 징계가 끝나자마자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들어올린 것이었다. 그만큼 맨유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축구계 전체에 의미가 컸던 우승이었다. 그리고 시즌 막판에는 라이언 긱스가 데뷔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제2의 조지 베스트로 불리며 퍼거슨이 공을 들인 유스 시스템이 첫 성과를 올렸다.

1990-91 시즌이 퍼거슨의 맨유가 혼란을 끝낸 시즌이었다면, 1991-92 시즌은 맨유가 마침내 궤도에 오른 시즌이었다. 먼저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라고 불리는 피터 슈마이켈이 고작 0.5M 파운드에 맨유로 이적했다. 이외에도 폴 파커와 칸첼스키스가 가세하며 퍼거슨의 맨유 1기는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 시즌 맨유는 라이벌 리즈 유나이티드와 우승 경쟁을 펼쳤으나 아쉬운 뒤심으로 마지막 5경기에서 1승 1무 3패를 기록, 승점 4점 차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UEFA 슈퍼컵 우승으로 또 다시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가져왔고, 리그컵도 우승하면서 길었던 맨유의 리빌딩이 끝났음을 알렸다. 퍼거슨 유스 시스템의 첫 작품인 라이언 긱스도 PFA 올해의 유망주에 선정되는 등 최고 유망주로 급부상했다.

퍼거슨은 중도 부임 시즌인 1986-87 시즌부터 여섯 시즌간 11위-2위-11위-13위-6위-2위라는 롤러코스터 같은 리그 성적을 내면서도 결국 살아남았고, 리빌딩을 끝마쳤다. 이제 맨유 선수단은 완전히 재편되었고 퍼거슨의 장악 아래 있었다. 공들인 유스 팀도 라이언 긱스가 끝이 아니라는 듯 유소년 대회를 휩쓸며 파란을 예고했다. 퍼거슨은 쇠락해가던 맨유를 5년 만에 천재들의 양성소이자 우승 경쟁이 가능한 팀으로 바꾸어 놓았다. 남은 건 강력한 마지막 한 조각을 찾아 25년 만에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일이었다. 때 마침 리그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헤이젤 참사와 힐스버러 참사로 더럽혀진 리그 이미지를 씻어내고 중계권료 분배 문제를 해결하고자 1부 리그 팀들이 기존 잉글리시 풋볼 리그를 탈퇴, 제도 개편으로 프리미어 리그를 창설한 것이다. 동시에 헤이젤 참사로 몰락했던 잉글랜드 프로 축구는 유럽 대항전 출장 정지가 풀리며 부활을 꿈꿨다. 격변의 시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기나긴 암흑기를 끝내고 비상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5.2. 전성기를 맞이하다 (1992-1999)

이전 시즌 2위를 기록한 퍼거슨의 맨유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 에이스, 팀의 마지막 한 조각을 찾아나섰다. 처음에 맨유가 노렸던 선수는 훗날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되는 앨런 시어러였다. 그러나 블랙번 로버스가 시어러를 가로챘고, 데이비드 허스트, 브라이언 딘 등 잉글랜드 타 팀의 스트라이커들을 비싼 값에 빼오려던 시도들은 실패했다.

결국 맨유는 스트라이커 영입 없이 1992-93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 중반까지 5위권에 머물면서 이번에도 리그 우승은 어려워 보였다. 그러던 11월 말, 리즈 유나이티드데니스 어윈을 판매하라고 문의했고, 전화를 받은 마틴 에드워즈 회장은 마침 옆에 있던 퍼거슨에게 의견을 물었다. 거절하라고 말하던 퍼거슨의 머리에 불현듯 에릭 칸토나가 스쳤는데, 그는 천재였지만 문제아 그 자체였다. 심부름을 시켰다고 팀원에게 주먹을 날렸고[32], 프랑스 대표팀에선 감독에게 욕설을 해 사실상 퇴출됐다. 이후 심판이 맘에 안 들자 심판의 얼굴에 축구공을 던졌고 징계가 내려오자 은퇴를 선언해 버렸다. 재능을 안타깝게 여긴 미셸 플라티니의 소개로 잉글랜드로 가 리즈가 맨유를 2위로 밀어내고 우승하도록 이끌었지만 감독, 팀원들과 대판 싸우는 등 여전히 시한 폭탄이었다. 어쨌든 에드워즈는 퍼거슨이 시킨 대로 어윈에 대한 오퍼를 거절하면서 넌저시 칸토나를 팔 생각이 없냐고 미끼를 던졌고, 리즈는 이를 물었다. 그렇게 단돈 1M 파운드[33] 훗날 올드 트래포드의 왕으로 불리게 될 남자가 맨유로 이적했다.

폭탄과도 같았던 칸토나를 퍼거슨은 자신의 평상시 스타일과 정반대로 부드럽게 대했고, 그런 퍼거슨을 칸토나도 받아들이면서 칸토나는 맨유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그리고 1992년 12월 1일, 칸토나가 첫 경기를 뛴 이후 맨유의 성적은 수직 상승했다. 칸토나의 이적 후 맨유는 리그에서 경쟁자들을 압도했고, 칸토나는 1993년 발롱도르 3위를 기록했다. 그렇게 칸토나의 가세로 완성된 맨유는 1992-93 시즌에 26년 만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다. 프리미어 리그 출범 원년 우승이자 맨유의 암흑기가 완전히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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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맨유의 숙원이 달성된 해였지만, 막대한 투자를 했던 유스 팀의 성과 또한 두드러졌다. 이 시즌에 데이비드 베컴, 니키 버트, 게리 네빌이 데뷔했고 세 선수 모두 10대의 나이에 맨유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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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2 황금 유스, 퍼기의 아이들[34]
1993-94 시즌 시작 전 퍼거슨은 또 한 건의 역사적인 영입을 해내는데, 그 주인공은 로이 킨이었다. 킨은 이적하자마자 폴 인스와 파트너를 이루어 중원 에이스 역할을 해냈다. 문제는 그 성깔이었는데, 공격진의 에이스가 칸토나였던 걸 감안하면 퍼거슨은 두 스타 선수이자 시한폭탄이라는 위험 요인을 안고 있던 셈이었다.[35] 언론에서도 이 부분을 우려했다. 그러나 퍼거슨은 두 선수들을 문제 없이 컨트롤 해냈고 이 시즌에 맨유는 승승장구했다. 리그에서는 독주를 이어나가며 승점 8점 차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고, FA컵은 결승에서 첼시를 4:0으로 완파하고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다. 도메스틱 트레블도 달성할 뻔했지만 아깝게 리그컵 결승에서 패해 무산되었다. 라이언 긱스는 완전히 만개했고, 폴 스콜스필 네빌이 데뷔하면서 맨유 1군에는 6명의 유소년 선수가 있게 되었다. 이들은 미래에 Class of 92라고 불리우며 축구계 유소년 세대의 전설로 남게 될 선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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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시즌은 퍼거슨으로서는 씁쓸한 시즌이었다. 시즌 중반까지 순조로웠고 높은 확률로 2연속 더블도 노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칸토나라는 시한폭탄이 결국은 터졌다. 자신에게 패드립을 시전한 관중에게 쿵후킥을 날리고 출장 정지 9개월의 중징계를 받은 것이다. 당시 칸토나를 축구계에서 추방하라는 요구를 포함해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고, 자존심 강한 칸토나도 그냥 은퇴하겠다며 대치했다.[36] 그 상황에서 퍼거슨은 끝까지 언론에 맞서며 칸토나를 감쌌다.[37] 그 어떤 축구계 광인들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는 칸토나였지만, 모두가 욕하는 상황에서 홀로 자신을 보호하는 퍼거슨에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이전에 프랑스 리그에서 출장 정지 징계를 받고[38] 은퇴를 선언했다가 잉글랜드로 이적했던 이력이 있었기에 인터 밀란을 비롯한 많은 해외 팀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칸토나는 이를 모두 거절했고 은퇴도 일축한 후 선언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뼈를 묻겠다.
이 말대로 칸토나는 훗날 맨유에서 은퇴했고, 퍼거슨에게 엄청난 충성심을 보이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다른 선수들이 퍼거슨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누구도 길들이지 못할 것 같았던 망나니 칸토나를 퍼거슨이 결국엔 길들인 것이다.[39] 하지만 일단 해당 시즌에 에이스가 이탈한 맨유는 시즌 후반 힘이 급격히 빠지며 무너졌다.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의 무승부로 시어러를 앞세운 블랙번 로버스에게 승점 1점차 리그 우승을 내주었고, FA컵도 결승전에서 패배해 준우승에 그치며 연속 더블의 기회를 눈 앞에서 놓쳤다.

한편 이 1994-95 시즌을 전후해 맨유는 리빌딩을 필요로 하게 됐다. 시즌 시작 전 13년 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지켰던 주장 브라이언 롭슨이 팀을 떠나 미들즈브러의 감독이 됐고, 이어 마이크 펠란도 이적했다. 시즌 도중에는 칸토나가 쿵푸 킥 사건으로 출전 정지를 먹었고 이는 다음 시즌 중반까지 이어질 예정이었다. 시즌 후에는 팀의 추축이었던 폴 인스, 마크 휴즈, 칸젤스키스가 이적하면서 스쿼드에 구멍이 생겼다. 그러나 퍼거슨은 이 위기를 역으로 어린 유스 선수들이 자리잡는 기회로 사용하고자 했고, 유소년 출신 선수들을 중심으로 1995-96 시즌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때문에 맨유는 이적시장에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당연히 상당한 우려를 불러일으켰고, 이 우려대로 맨유는 개막전에서 아스톤 빌라에게 3:1로 패배했다. 그날 저녁에 있었던 BBC MOTD 하이라이트에서 고정 패널인 앨런 한센은 "꼬맹이들 갖고 우승할 수 없다"라며 혹평했다.[40]
You can't win anything with kids '꼬맹이들 갖고 우승할 수 없어'
그리고 그 시즌에 맨유는 프리미어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41]

2라운드부터 '퍼기의 아이들'은 그 재능의 크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20살의 베컴, 21살의 폴 스콜스, 23살의 긱스의 골이 연일 터졌고, 20세의 니키 버트는 폴 인스의 빈 자리를 완벽히 대체했으며 각각 20세, 18세의 네빌 형제가 수비진에서 버텼다. 개막전 패배 이후 11월 초까지 패배하지 않은 맨유에 징계가 끝난 칸토나와 겨울에 영입된 앤디 콜이 가세했고, 결국 맨유는 뉴캐슬 유나이티드와의 우승 경쟁에서 승리했다. 시즌 후반인 1996년 3월 맨유가 1위에 올랐고 이를 시즌 끝까지 수성하며 리그 트로피를 탈환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FA컵도 우승하며 퍼거슨은 두 번째 더블을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시즌 후 칸토나가 30세의 나이로 충격적인 은퇴를 선언하였고, 맨유 수비진의 대들보 역할을 수행하던 스티브 브루스도 떠났다. 이와 함께 약 3년 간의 점진적인 리빌딩 과정이 마무리됐다. 이 시점에서 26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끈 퍼거슨의 맨유 1기 전성기 주요 선수들은 대부분 떠났다. 칸토나, 마크 휴즈, 브라이언 맥클레어의 공격진은 앤디 콜, 테디 셰링엄, 올레 군나르 솔샤르로 바뀌어 있었다. 브라이언 롭슨과 폴 인스의 중원은 로이 킨과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등이 메웠다. 리 샤프와 칸첼스키스가 뛰던 양 윙은 라이언 긱스데이비드 베컴 두 유스 출신 선수들이 차지했고, 폴 파커가 게리 네빌로, 스티브 브루스로니 욘센과 데이비드 메이로 대체 되었다. 여전히 주전으로 뛰고 있는 첫 리그 우승 멤버는 1990년 합류한 좌측 풀백 데니스 어윈과, 1991년 합류한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 정도였다. 리빌딩 하는 와중에도 맨유는 두 번의 더블을 차지하는 등 더욱 강해지고 있었고, 퍼거슨이 키워낸 유소년 선수들은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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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7 시즌, 솔샤르는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며 칸토나를 대체했고 맨유는 다시 한 번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데이비드 베컴은 PFA 올해의 유망주로 선정되었고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시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아르센 벵거가 이끄는 아스날이었다. 아스날은 이 시즌 리그 3위를 차지하면서 부상했고, 1997-98 시즌 맨유를 상대로 승점 1점차로 리그 우승을 가로챘다. 맨유는 시즌 중반 아스날을 승점 12점 차까지 따돌리며 독주했으나 3~4월 많은 승점을 잃었고 결국 아스날에게 역전을 허용했다. 게다가 벵거의 아스날은 FA컵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차지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8-99 시즌 베스트 XI
CF
9. 앤드루 콜
CF
19. 드와이트 요크
LM
11. 라이언 긱스
CM
18. 폴 스콜스
CM
파일:주장 아이콘.svg 16. 로이 킨
RM
7. 데이비드 베컴
LB
3. 데니스 어윈
LCB
6. 야프 스탐
RCB
5. 로니 욘센
RB
2. 게리 네빌
GK
1. 페테르 슈마이켈
위기 의식을 느낀 퍼거슨은 1998-99시즌 시작에 앞서 야프 스탐의 영입으로 수비진을, 드와이트 요크의 영입으로 공격진을 강화했다. 그러나 정작 시즌이 시작하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커뮤니티 실드에서 아스날에게 0-3으로 패배했고, 리그에서도 첫 5경기를 2승 2무 1패로 출발했다. 특히 5R 아스날에게 다시 한 번 0-3으로 참패했다.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리그에서 8승 7무 3패를 기록한 맨유는 우승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이 시즌 퍼거슨을 괴롭혔던 것은 지독하리 만큼 없었던 대진운이었다. FA컵은 64강부터 1부리그인 미들즈브러를 만나더니, 32강에서는 리버풀을 만나 패배 직전에 몰렸다가 추가 시간 2골로 역전했다. 16강에서 풀럼을 1-0으로 겨우 물리쳤더니 8강에서는 이 시즌 리그 3위를 기록한 첼시를 만나 재경기까지 간 끝에 승리했다. 그랬더니 4강에서 다시 아스날을 만나 재경기, 그리고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어야 했다. 챔피언스리그는 더욱 심했다. 이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조는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브뢴비였다. 한 조에 4대리그 우승팀이 세 팀 있는 역대 최악의 조였던 것이다.[42]

그러나 기적이 이어졌다. 챔피언스리그 최악의 죽음의 조에서 맨유는 2승 4무로 조 2위를 기록, 조2위 6개 팀 중 2위로 8강행 막차를 탔다[43]. 8강에서는 인터밀란을 만나 합계 스코어 3-1로 눌렀으나, 4강에서 유벤투스 상대로 크게 고전했다. 그러나 2차전 초반까지 합계 스코어 1-3으로 끌려가던 맨유는 4-3으로 역전해 결승에 진출했다. 전반기 부진한 리그에서도 슬로우 스타터의 저력을 보여주며 크리스마스 이후 단 한 경기도 패배하지 않았다. 후반기 14승 6무 0패를 기록한 맨유는 38R까지 간 우승 경쟁 끝에 승점 1점차로 아스날을 누르고 우승했다. FA컵도 8강을 재경기 끝에 승리했고, 4강 아스날 전도 재경기까지 갔다. 재경기 후반전 1-1 상황에서 로이 킨이 퇴장 당해 수적 열세가 됐고, 네빌이 후반 추가 시간 PK를 내주며 경기가 완전히 기울었다. 그러나 슈마이켈이 이 PK를 막아냈고[44], 연장 후반 5분 긱스가 드리블로 5명을 제치고 골을 넣어 승리했다. 그렇게 결승에 간 맨유는 뉴캐슬을 상대로 2-0으로 승리, FA컵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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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 커리어의 최고 전성기인 1998-99 시즌 트레블
극적인 드라마로 가득 찼던 1998-99 시즌의 절정은 마지막 경기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조별예선에서 맨유를 2위로 밀어냈던 바이에른 뮌헨과 다시 만났다. 그리고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0-1로 뒤지다가 후반 추가시간 3분 만에 교체 투입된 선수 두 명이 두 골을 넣어 역전했다.[45] 캄 노우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챔피언스리그 역사상 최고의 명경기를 끝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트레블이 완성되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저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축구, 이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I can't believe it. I can't believe it. Football, bloody hell.)
알렉스 퍼거슨, 챔피언스리그 우승 직후 경기장에서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믿을 수 없었다. 승자가 울고 있고 패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레나르트 요한슨 UEFA 회장, 그가 경기 막판 뮌헨의 리본으로 장식된 트로피를 가지러 경기장 지하에 갔다 온 사이 우승팀이 바뀌었다. [46]
경기 내적으로도 드라마틱 했지만 경기 외적으로도 극적인 트레블이었다. 이는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트레블이었으며, 맷 버즈비바비 찰튼뮌헨 비행기 참사를 이겨내고 들어올렸던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 후 30년 만에 맨유의 우승이었다. 또 이는 주전의 절반 가량을 유스 출신 선수들로 기용해 만들어 낸 트레블이었다. 퍼거슨 부임 직후 공격적인 유스 정책으로 12~13살 때 영입된 6명의 소년들은 프리미어리그, FA컵,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우승한 팀의 주축으로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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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의 암흑기를 도래시킨 헤이젤 참사의 여파를 보여주는 리그 그래프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일개 클럽이 아니라 리그를 세계 정상에 다시 올려 놓는 것이다."
알렉스 퍼거슨, 1992년 첫 리그 우승 직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럽 제패는 무엇보다도 잉글랜드 프로 축구계에 큰 의미를 가졌다. 1985년 헤이젤 참사로 유럽대항전 5년 정지 징계를 받은 잉글랜드 리그는 UEFA 리그 랭킹이 29위까지 추락했다. 용병들은 대부분 떠났고 한때 선수 말년에 가는 리그로 전락했었다.

알렉스 퍼거슨은 참사 1년 후인 198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부임하였고, 1991년 유에파컵 위너스컵 우승으로 유럽 대항전 정지가 풀린 후 잉글랜드에 첫 유럽대항전 트로피를 가져다 주었다. 이후에도 퍼거슨의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첫 10년 간 7번의 리그 우승을 하며 잉글랜드 프로 축구를 이끌었다. 그러나 유럽대항전 정지가 풀리고도 1990년대 프리미어리그는 UEFA 리그 랭킹 5-10위 사이를 헤매며 고전하고 있었다. 맨유의 트레블로 잉글랜드의 UEFA 리그 랭킹이 5위 안으로 복귀하고, 유럽 축구계에 잉글랜드 리그가 유럽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인식을 심어준 건 그런 와중이었다. 영국 축구팬들의 자존심을 되찾아 준 것이다.

때문에 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뿐만 아니라 영국의 국가적 경사였다. 당시 영국 전역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바이에른 뮌헨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이 기록한 평균 시청률은 64%, 맨체스터가 있는 영국 북서부 지역으로 한정하면 78%였다.[47] 출처 BBC 기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이 확정되자 영국 주요 언론들이 일제히 속보를 타전했고, 맨체스터 거리에 70만 명의 군중들이 운집했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경기를 직접 시청하고 환호했고, 영국 왕실과 의회는 앞다투어 축하를 전했다. 다음 날 열린 웨일즈 의회 개회식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우승을 축하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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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은 15년 간 이어진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암흑기로부터의 부활을 주도하고 직접 마침표를 찍음으로써 감독 커리어의 정점에 섰다. 영국 의회 공훈 심사단은 즉시 퍼거슨에 대한 기사 작위 수여를 검토했고, 의회가 이를 승인했다. 우승 17일 후인 1999년 6월 12일, 알렉스 퍼거슨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으로부터 잉글랜드 프로 축구의 구원자로 공인받는 기사 작위를 수여 받는다.

5.3. 지속적인 리빌딩과 장기 집권 (1999-2006)

많은 사람들이 1998-99 시즌 트레블을 퍼거슨의 최고 업적으로 꼽지만, 그의 또 다른 진가는 그 직후에 나왔다. 많은 감독들이 한 사이클, 길어야 두 사이클 돌고 나면 팀을 떠나거나 리빌딩 타이밍을 잡는 데 실패하여 부진에 빠진다. 반면 퍼거슨은 끊임 없는 개혁과 리빌딩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정점을 찍은 1999년 후에도 14년 동안 계속해서 프리미어리그 최강의 자리를 지켰다. 차라리 다른 팀으로 떠나는 것이 차라리 쉽지, 같은 팀에서 자신이 만든 팀을 부수고 다시 팀을 재건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서 그 과정 중에도 정상급을 지키는 일을 해낸 감독은 정말 많지 않다.

우선 퍼거슨은 1998-99 시즌 트레블 직후 유럽 유수의 클럽들의 러브콜을 받은 주장 로이 킨을 잔류시키는 등 팀의 중심을 잡는 데에 성공하며 두 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최초로 한 팀을 이끌고 3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 된다.
퍼거슨 감독만큼 축구를 이해하는 감독도 흔하지 않다. 이 말은 시즌 중이거나 경기 중이라도 축구와 관련된 모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한다는 뜻이다. 그는 최고의 조건이 아니더라도, 또 어떤 말을 듣게 되어도, 자신이 상황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을 한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데이비드 베컴

퍼거슨은 커다란 변화를 위해 과감한 도전을 시도할 줄 아는 배짱 큰 명장이다. 리빌딩, 즉 세대 교체라는 것은 단순히 영입과 유망주 기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어느 정도 클럽의 과도기가 될 것을 감안하면서도 그것에 개의치 않고 과감한 도전을 해야만 성공을 이룰 수 있는 매우 예민하고 어려운 것이다. 리빌딩 과정에서 올 수 있는 과도기는 팀의 전력이 전과 같지 않게 급격히 약화되어 오는 경우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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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3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맨유가 레알 마드리드 CF에게 합산 스코어 6:5로 패배하며 탈락하자 당시 레알의 감독이었던 비센테 델보스케에게 위로를 받는 퍼거슨[48]

퍼거슨은 트레블 직후 4-4-2의 시대는 끝났다며 팀의 전술적인 개편과 리빌딩을 예고했다. 하지만 큰 기대를 하며 영입했던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에릭 젬바젬바 등은 먹튀가 되어 맨유 팬들의 속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들은 딱히 개인 기량이 떨어졌다기보다는 너무나도 강한 맨유의 색에 전혀 녹아들지 못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2006년까지(2003-04, 2004-05, 2005-06) 총 세 시즌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대대적인 리빌딩이 진행되었다.
2002-03 시즌 리그 우승 직후 : 데이비드 베컴 OUT,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IN
2003-04 시즌 리그 3위 : 웨인 루니 IN
2004-05 시즌 리그 3위 : 필 네빌, 로이 킨 OUT, 에드빈 판데르사르, 박지성, 파트리스 에브라, 네마냐 비디치 IN
2005-06 시즌 리그 2위 : 뤼트 판니스텔로이 OUT, 마이클 캐릭 IN

하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어렸던 유망주들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맨유는 팀의 리그 성적을 희생해야만 했다.[49] 비록 2003-04 시즌에 FA컵 우승을 하기는 했으나 리빌딩이 진행되었던 3년 동안 챔스에서는 FC 포르투AC 밀란를 만나 16강에서 탈락하더니, 기어이 2005-06 시즌에는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으로 인해 10년 만에 챔스 예선 탈락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맨유가 리그 우승을 2년 연속으로 놓친 것도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로 처음이었다.
(2005-06 시즌 10년 만에 챔스 예선 탈락에 대해) 어떤 선수들(=콩나물들)은 완전히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망가졌다. 나는 그들이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선수들은 탑 레벨이 아니었고 루니는 맨유가 전성기가 아닐 때 들어왔다. 어린 루니에 의존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부합되는 수준에서 경기를 하지도 않았고, UEFA컵 본선에 못 나가게 됐다.
루드 굴리트
(맨유 소속으로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경기를 치렀던 챔스 벤피카 전에서) 호날두는 자신이 왜 프리미어 리그의 선수인지를 증명하려 했지만 좋지 못한 활약을 했고, 팀은 졌다. 당시 호날두는 패스를 꺼렸고 이 때문에 하프 타임 때 드레싱 룸에서 영감님께 헤어드라이어를 당한 10대의 막내 호날두는 울기 시작했다. 퍼거슨 경 왈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독단적으로 플레이 하는 선수? 만약 계속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넌 절대 위대한 선수가 될 수 없어!" (이에 대해 리오 퍼디난드는) "호날두는 늘 배우고자 했어요, 이는 단지 감독님으로부터 나온 메시지가 아닌 전체 팀으로부터 나온 메시지였죠. 동료들 모두 그가 좀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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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표시가 리빌딩 세 시즌. 그리고 다음 시즌인 2006-07 시즌에 맨유는 리그 우승을 했고, 2007-08 시즌에는 리그 우승과 챔스 우승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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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감독이 쉬운게 아닐텐데요
실제로 들의 행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위 댓글에 깨알같이 20~30년 후에 세워질 거라던 퍼거슨의 동상은 저 댓글이 달린 이후 단 7년 만에(2012년) 세워졌다.

그러나 맨유는 이 힘든 시기에도 결코 리그 3위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과감한 리빌딩을 단행하며 찾아온 과도기 속에서도 맨유가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고 상위권을 유지하며 클럽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선수단을 확실하게 장악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휘력을 발휘하며 빛을 낸 퍼거슨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03-04시즌 FA컵 우승, 05-06시즌 칼링컵 우승으로 결국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라이벌 아르센 벵거가 이끄는 아스날 FC는 2003-04 시즌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 이후 115년 만에 무패 우승을 차지하고, 러시아 석유 재벌인 로만 아브라모비치[50]에게 인수된 첼시 FC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엄청난 돈을 쓰면서 영입하고 FC 포르투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끈 주제 무리뉴를 감독으로 영입하면서 갑자기 확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맨유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맨유의 암흑기 라고 할 수 있었던 2003년부터 2006년까지 퍼거슨은 무리뉴와 벵거에게 번번히 발목을 잡히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퍼거슨은 결국 2005-06 시즌에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희대의 꿀영입을 하게되는데, 향후 몇 년간 확고한 주전으로 온갖 영광을 안겨다 줄 네마냐 비디치, 파트리스 에브라, 박지성, 에드빈 판데르사르 4명을 고작 2,600만 유로라는 초 헐값[51]에 영입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슬슬 부활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5.4. 다시 맞은 전성기

5.4.1. 2006-07 시즌

수년간 영입한 선수들이 점차 팀에 적응하고 자리잡으면서, 과거 스타 선수들의 공백이 메워지며 팀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앤디 콜드와이트 요크의 공백은 웨인 루니가 일찌감치 메웠고, 페터 슈마이켈이후 오래 이어진 골키퍼 문제는 에드빈 판데르사르가, 로랑 블랑의 후계자 미카엘 실베스트르의 불안함은 네마냐 비디치가, 필 네빌의 빈 자리는 파트리스 에브라가, 로이 킨의 공백은 이 시즌 직전 새로 영입된 마이클 캐릭이 해결했다.

데이비드 베컴의 대체자로 데려온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전문 윙어 자리에서 한동안 기대 이하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었으나, 뤼트 판니스텔로이가 떠난 이후 보다 공격적인 역할을 맡게 되자, 반니와 베컴의 공격력을 합친 듯한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재능이 만개했다. 호날두의 공격 전념과, 스콜스긱스의 점진적인 노쇠화로 인해 부족해질 수도 있었던 미드필드의 활동량은 박지성과 유스 출신 대런 플레처가 훌륭히 메워 주면서, 약점이 잘 보이지 않는 강력한 팀으로 진화했다.

그 결과 2002-03 시즌 이후 4년만에 다시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 2차전에서 7:1 승리를 따내는 등 준결승까지 진출했다.[52] 리그컵에서는 4라운드에서 탈락했고, FA컵에서는 결승에서 첼시를 상대로 연장 혈투 끝에 디디에 드록바에게 실점하면서 1:0으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다시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도 경쟁력을 보이고 리그 우승을 따내며 새로운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시즌이었다.

5.4.2. 2007-08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07-08 시즌 베스트 XI
CF
32. 카를로스 테베즈
CF
10. 웨인 루니
LM
11. 라이언 긱스[53]
CM
18. 폴 스콜스
CM
16. 마이클 캐릭
RM
7.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LB
3. 파트리스 에브라
LCB
15. 네마냐 비디치
RCB
파일:주장 아이콘.svg5. 리오 퍼디난드[54]
RB
6. 웨스 브라운
GK
1. 에드윈 반 데 사르
2007-08 시즌에는 카를로스 테베스, 오언 하그리브스 등을 영입하며 스쿼드를 보강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첼시와의 커뮤니티 실드에서는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판데르사르가 홀로 3개의 페널티킥을 막으며 우승했다.

그러나 시즌 출발은 좋지 않았다. 개막전 레딩과의 홈 경기에서 수적 우세에도 0:0으로 비기더니 2라운드 포츠머스 원정에서는 스콜스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동점골을 허용하며 1:1로 비겼고, 설상가상으로 호날두는 박치기를 저지르고 퇴장당하며 3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당했다. 그리고 3라운드에서는 개막 후 연승을 기록 중이던 맨체스터 시티 원정에서 0:1로 패하며 2무 1패의 저조한 출발을 보였다. 리그 순위는 17위까지 떨어졌다.

4라운드 토트넘과의 홈 경기에서는 이적생 나니의 데뷔골이 된 중거리 슛 결승골로 첫 승을 기록했고, 5라운드 선덜랜드와의 홈 경기와 6라운드 에버튼 원정 경기도 루이 사아네마냐 비디치의 천금같은 결승골로 꾸역꾸역 1:0으로 이기며 한동안 '1:0 유나이티드'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다.

9월 23일에는 무리뉴가 떠난 뒤 아브람 그랜트의 부임 후 뒤숭숭했던 첼시를 상대로 테베스의 데뷔골과 사하의 페널티킥으로 2:0으로 승리하며 7라운드만에 시즌 처음으로 2득점에 성공했다.

9월 26일 칼링컵 3라운드에서는 2부 리그 코번트리를 상대로 둥팡줘를 선발로 내보내는 등 후보 선수들을 내보냈지만 0:2로 패하며 광탈하고 말았다.

8라운드 버밍엄 원정에서는 호날두의 리그 첫 골이 결승골이 되며 1:0 신승을 거뒀다. 리그 8경기에서 단 2실점만 기록했지만 7득점에 그친 공격력이 아쉬웠던 맨유였다.

9라운드 위건과의 홈 경기에서는 후반에만 테베스의 결승골과 호날두의 멀티골, 루니의 시즌 첫 골로 화끈하게 4골을 넣으며 리그 6연승을 거두었고, 10라운드 아스톤 빌라 원정과 11라운드 미들즈브러와의 홈 경기에서도 모두 4:1 대승을 거두며 리그 8연승을 기록했다. 그 사이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조별리그 3차전에서도 FC 디나모 키예프에게 4득점을 하며 1907-08 시즌 이후 100년 만에 4경기 연속 4득점 이상을 기록하게 되었다.

리그 1위와 2위의 대결로 주목받았던 12라운드 아스날 원정에서는 갈라스의 자책골과 호날두의 골로 종료 직전까지 2:1로 이기며 아스날의 무패 행진을 끊어내고 1위로 올라가는 듯 했으나, 추가시간에 갈라스에게 극적인 동점골을 허용하며 2:2로 비겼다. 13라운드 블랙번과의 홈 경기에서는 호날두의 멀티골로 2:0 승리를 거뒀지만 인터내셔널 브레이크 후 14라운드 강등권 팀 볼턴 원정에서는 니콜라 아넬카에게 일격을 당하며 1:0으로 패배하며 무패 행진을 10경기에서 마감하게 되었다.

볼턴 전의 충격패가 있었지만 맨유는 12월에 5연승을 거두며 다시 상승세로 돌아왔다. 15라운드와 16라운드에서는 하위권의 풀럼과 더비를 상대로 2:0, 4:1[55] 완승을 거두었고 17라운드 리버풀과의 노스웨스트 더비에서는 카를로스 테베스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리버풀과 같은 머지사이드 팀인 에버튼과의 홈 경기에서는 호날두의 멀티골로 2:1 승리를 거두었고, 박지성이 무릎 연골 부상으로 인한 재활에서 돌아와 9개월 만에 복귀전을 치른 선덜랜드 원정에서는 4:0 대승을 거두며 시즌 첫 선두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루니와 캐릭이 독감으로 빠지고 퍼거슨이 볼턴 전에서의 항의로 2경기 징계를 받은 가운데 2007년 마지막 경기인 20라운드 테베스의 첫 친정팀 방문인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원정에서는 호날두가 선제골을 넣었지만 페널티킥 찬스를 놓치며 달아나지 못했고, 리오 퍼디난드의 동생인 안톤 퍼디난드매튜 업슨에게 연달아 골을 먹히며 1:2 역전패를 당했다. 결국 웨스트 햄 전 3연패와 함께 에버튼에게 4:1 대승을 거둔 아스날에게 선두 자리를 내주며 2007년을 마감했다.

한편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 첫 4경기에서 모두 승리하면서 일찌감치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5차전 스포르팅 CP과의 홈 경기에서는 1:1로 맞선 후반 추가시간 호날두의 무회전 프리킥 역전골로 5연승으로 조 1위를 확정짓게 되었고, 6차전 로마 원정에서는 주축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며 1:1로 무승부를 거두었다.

새해 첫 경기였던 21라운드 버밍엄과의 홈 경기는 카를로스 테베스의 결승골로 1:0 신승을 거두었다. 경기 후 이 경기에서 터치라인 징계를 받아 벤치에 앉지 못한 퍼거슨은 올드 트래포드가 장례식장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FA컵 64강 아스톤 빌라 전에서는 2:0 승리를 따냈다.

22라운드에서는 아스날이 버밍엄에게 1:1로 비긴 가운데 뉴캐슬을 상대로 후반에만 6골 맹폭을 가하며 6:0 대승을 거두며 아스날에게 골득실에서 앞서 두 경기 만에 선두를 탈환했다.

23라운드 레딩 원정에서는 후반 30분이 흘러갈 때까지 경기를 지배하고도 0:0으로 이어지며 전반기 무승부의 악몽이 재현되는가 했으나, 웨인 루니의 결승골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추가골로 2:0 승리를 거뒀다. 24라운드 포츠머스와의 홈 경기에서는 호날두가 무회전 프리킥 골 등 멀티골로 원맨쇼를 펼치며 2:0 완승을 거뒀다.

FA컵 32강 토트넘 전에서는 3:1 승리를 거뒀다.

25라운드에서는 일주일 전 FA컵에서 상대했던 토트넘을 다시 만났는데, 디미타르 베르바토프에게 선제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던 경기를 테베스의 추가시간 동점골로 간신히 1:1 무승부를 거뒀다. 아스날이 맨체스터 시티에게 3:1 승리를 거두며 아스날이 승점 2점 차이로 리그 선두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26라운드 맨체스터 시티 전에서는 1:2로 패했고, 다음날 아스날이 승리하며 승점 5점 차이로 리그 2위가 되었다.

FA컵 16강 아스날 전에서는 4:0 완승을 따내며 8강 진출에 성공했다.

아스날이 버밍엄 원정에서 2:2로 비긴 가운데 27라운드 뉴캐슬 원정에서는 5:1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면서 아스날을 승점 3점 차이로 따라붙었다.

28라운드 풀럼 원정에서는 오언 하그리브스의 데뷔골과 박지성의 시즌 첫 골과 상대의 자책골을 합쳐 3:0 대승을 거두었다. 아스날이 홈에서 아스톤 빌라에게 0:1로 끌려가며 선두를 탈환하는 듯 했으나, 추가시간에 벤트너의 동점골이 나오며 승점 1점차로 쫓아온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한편 챔피언스 리그 16강 상대는 2004-05 시즌 조별리그 이후 3시즌 만에 재회한 올랭피크 리옹. 1차전 원정 경기에서는 카림 벤제마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후반 막판까지 끌려갔으나 카를로스 테베스의 천금같은 동점골이 나와 1:1로 비겼고, 2차전에서는 호날두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하며 합산 스코어 2:1로 8강에 올랐다.

FA컵 8강 포츠머스 FC 전에서는 판데르사르의 부상과 토마시 쿠슈차크의 퇴장으로 골키퍼를 두 명이나 잃고 퍼디난드가 골키퍼를 보는 악재 끝에 설리 문타리에게 페널티킥 골을 먹히며 0:1로 패해 탈락했다. 안타까운 점은 포츠머스를 제외한 FA컵 4강 진출 팀이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 반즐리 FC, 카디프 시티 FC로 모두 챔피언십 클럽이라 이변이 없었으면 FA컵 우승이 유력해 두 번째 트레블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충격의 FA컵 광탈 이후 30라운드에서는 단 1승 뿐인 꼴찌 더비 원정에서는 예상 외로 0:0 팽팽한 경기가 이어졌고, 판데르사르의 부상과 토마시 쿠슈차크의 징계로 맨유에서의 데뷔전을 치른 벤 포스터가 결정적인 선방을 기록한 가운데 호날두가 후반 31분 천금같은 결승골을 기록하며 1:0 신승을 거두었다. 그러면서 아스날에 골득실에서 앞서고 한 경기를 덜 치른 상황에서 선두를 탈환했다. 그리고 3월 19일 주중 순연된 볼턴과의 29라운드 홈 경기에서는 호날두의 멀티골로 2:0 4연승을 거두며 아스날과의 격차를 벌렸다.

우승의 향방에 크게 영향을 끼칠 31라운드 리버풀과의 노스웨스트 더비 홈 경기에서는 전반전에 웨스 브라운이 선제골을 득점했고, 후반 마스체라노의 퇴장으로 수적 우위를 잡은 뒤 호날두와 나니의 추가골로 3:0 대승을 거두며 5연승에 성공했다. 경기 후 같은 날 열린 첼시와 아스날의 경기에서는 첼시가 드록바의 원맨쇼로 2:1 승리를 거두며 첼시가 맨유와 승점 5점차 2위, 아스날이 승점 6점차 3위가 되었다.

32라운드 아스톤 빌라와의 홈 경기에서도 4:0 완승을 거두며 6연승을 기록했다.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는 직전 시즌 8강과 이번 시즌 조별리그에 이어 또 AS 로마를 만났다. 1차전 로마 원정에서 폴 스콜스의 크로스를 받은 호날두가 쇄도하며 헤딩으로 선제골을 득점했고, 후반 박지성의 헤딩을 로마의 도니 골키퍼가 미숙하게 처리한 틈을 타 루니가 추가골을 득점하며 2:0 승리를 거뒀다.

33라운드 원정에선 호날두의 이른 시간 선제골로 순조롭게 가는듯 했지만 아폰소 알베스에게 동점골과 역전골을 허용하며 2-1로 역전당했다. 다행히 교체 투입된 박지성의 어시스트를 받은 루니의 동점골로 2-2로 마쳤지만 맨시티에 2-0 승리를 거둔 첼시와의 격차가 승점 3점으로 좁혀졌다. 아스날은 리버풀에 1-1로 비기며 맨유와 승점 6점 차로 멀어졌고 다음 경기 맞대결이 리그 우승을 위한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되었다.

챔스 8강 2차전 홈경기에선 테베스의 결승골로 1-0으로 승리, 합산 스코어 3-0으로 2년 연속 준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대망의 4월 13일, 34R 아스날과의 홈경기가 열렸다. 절박한 아스날에겐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을 수 있는 경기였다. 선제골을 내줬으나 호날두의 PK로 동점에 성공했고, 그리고 후반 27분 오언 하그리브스가 프리킥으로 역전골을 성공시키면서 경기는 2-1 승리로 끝났다. 그렇게 4경기를 남기고 승점 9점차가 된 아스날의 우승경쟁은 여기서 사실상 끝이 났다. 다음날 첼시가 홈에서 위건에 충격적인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승점 5점차 선두가 되었다.

4월 19일 35R 블랙번 원정에서 답답한 경기 속에 테베스가 이번에도 리옹전에 이어 후반 막판 극적인 동점골에 성공하며 1-1 무승부를 거뒀다. 첼시가 에버튼 원정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승점 3점차로 좁혀졌다.

FC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1차전 캄프 누 원정에서 호날두의 페널티킥 실축이 나오며 0-0으로 비겼다.

4월 26일 36R 첼시 전에서는 양팀이 주중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을 치른 가운데,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의 향방을 좌우할 맞대결을 펼쳤다. 챔스 2차전을 앞두고 몇몇 주전 선수들이 휴식을 취한 가운데, 불운한 골운으로 인해 1-2로 패배. 결국 첼시와 승점이 같아졌고, 골득실에서만 앞선 선두가 되었다.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는 잠브로타의 클리어링 미스를 놓치지 않은 폴 스콜스의 빨래줄같은 중거리슛 결승골로 합산 점수 1-0으로 승리했다. 그러면서 1998-99 시즌 트레블 이후 9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5월 3일 웨스트햄과의 37라운드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4-1 대승을 거두었고, 첼시가 뉴캐슬 원정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리그 우승팀은 최종전에서 결판나게 되었다.

5월 11일 위건 애슬레틱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호날두의 리그 31호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넣었고 바비 찰튼 경의 맨유에서의 758번째 경기와 동률을 이룬 것을 자축하듯 라이언 긱스의 추가골로 2-0으로 승리함으로써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던 첼시 FC를 승점 2점차로 따돌리고[56]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58의 골득실은 2004-05 시즌 첼시가 기록한 +57을 넘어선 당시 최고 기록이었다.

대망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첼시 FC를 상대로 호날두의 선제골로 앞서가다가 램파드에게 동점골을 내줬고, 연장 혈투 끝에 승부차기까지 진행되었다. 세번째 키커 호날두가 실축하며 준우승의 그림자가 보였으나, 첼시의 5번째 키커였던 존 테리가 실축하며 데스매치까지 가게 되었다. 결국 아넬카의 슈팅을 판데르사르가 막아내며, 퍼거슨과 맨유는 9년만에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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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전체가 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앞세워 챔피언스리그와 EPL 우승의 더블을 이뤄내며 건재를 알렸다.[57] 결승전에서 선발 출전한 선수 중에 1999년 트레블 당시 맨유에서 뛴 선수는 단 두 명, 폴 스콜스웨스 브라운 뿐이었다.[58] 퍼거슨 감독이 9년 만에 완전히 다른 팀으로 또 한 번 맨유를 유럽 정상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더블도 더블이지만, 그동안 수비 로테이션 자원이었던 웨스 브라운을 주전 라이트백으로 활용하여 성과를 거둔 것 또한 높게 평가받고 있다.

5.4.3. 2008-09 시즌

2008-09 시즌에는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를 영입했다. 8월 10일 FA 커뮤니티 실드 포츠머스전에서는 정규시간 내에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승부차기에서 3-1로 승리하면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59]

8월 17일에 펼쳐진 개막전 뉴캐슬 유나이티드전에서 마르틴스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지만, 이내 대런 플레처가 동점골을 넣었다. 하지만 승리를 거두는 데에는 역부족이었고,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2R 포츠머스전에서도 플레처의 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3R 풀럼과의 홈 경기는 UEFA 슈퍼컵 참가로 순연되었다.

그러나 8월 29일에 모나코에서 펼쳐진 UEFA 슈퍼컵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전에서는 네마냐 비디치가 만회골을 넣었지만, 2-1로 지면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데에 실패했다.

9월 13일에 열린 4R 리버풀 FC 원정에서는 카를로스 테베스가 전반 3분만에 선제골을 넣으면서 분위기를 가져왔으나, 27분에 웨스 브라운이 자책골을 넣었고, 후반전에 라이언 바벨에게 결승골을 내주면서 2-1 패배를 거두었다. 안필드에서 패배한 것은 2004년 이후 처음이다.

리그 5R 첼시 FC 원정에서는 박지성의 득점으로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유로 2008 이후 발목 수술로 초반 결장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교체투입으로 리그에서의 복귀전을 치렀다. 시즌 초반 성적이 1승 2무 1패로 좋지 않다. 1경기를 덜 치렀지만 16위라는 어색한 순위를 기록 중이다.

9월 27일 6R 볼튼 원더러스 전에서는 호날두와 루니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었다. 10월 4일 7R 블랙번 원정에서는 웨스 브라운과 루니의 골로 2연승에 성공했고, 순위도 8위로 올라갔다. 10월 18일 8R WBA 전에서는 루니, 호날두, 베르바토프, 나니의 골로 4-0 대승을 거뒀다. 무실점 3연승으로 6위가 되었다.

10월 25일 9R 에버튼 전에서 1-1로 비겼다. 맨유는 리그 4승 3무 1패로 6위를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했다. 10R 웨스트 햄 전에는 호날두의 활약이 빛났고, 2-0 승리로 끝났다. 순위는 그대로 6위이지만, 헐시티가 첼시에 패하고 아스날이 토트넘과 4-4로 비기며 상위권에 변동이 생겼다.

11R 헐시티전에서는 4-3 승리를 따냈다. 이 승리로 5위였던 돌풍의 팀 헐 시티를 6위로 끌어내리고 아스날과 빌라가 패한 틈을 타 3위로 올라갔다. 선두였던 리버풀이 토트넘에 패하며 1경기 덜치르고 선두 첼시에 5점 차로 따라붙었다. 12R 아스날 전에서는 전반전에 선제골을 내줬고 후반전 초반에 추가골을 내주며 점수는 2점차까지 벌어졌고, 후반전 막판에 하파엘의 골이 나왔으나 경기는 1-2 패배로 끝났다. 이 패배로 선두권과 격차가 승점 8점으로 벌어지고 아스날에 3위를 내준 뒤 4위로 추락했다.

11월 15일 리그 13R 상대는 승격팀 스토크 시티와의 홈경기, 호날두의 맨유 통산 100번째 골이 나오는 등 완벽한 경기력을 보이며 5-0 대승으로 마무리했다. 아스날이 빌라와의 홈경기에서 0-2 완패를 기록하며 3위가 됐다. 11월 22일 14R 아스톤빌라 원정에서는 경기 막판까지 득점을 위해 맹공을 펼쳤지만 소득없이 0-0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다. 2002년 이후 빌라전에서 리그와 컵대회를 포함해 13연승을 기록했으나 이날 그 기록을 마감했다. 2007-08 시즌 11월 볼튼 원정 이후 리그 38경기 만에 무득점을 기록했다. 다행히 14라운드에서 빅4팀이 약속이나 한듯 모두 승리하지 못했다.

11월 30일 15R 맨시티 원정에서 루니의 개인 통산 리그 100호 골에 힘입어 귀중한 1-0 승리를 챙겼다. 이로써 리그 3위 자리를 유지했으며 리버풀이 웨스트햄과 홈에서 비기며 선두와 6점 차로 좁혔다. 12월 6일에는 로이 킨이 사퇴한 선더랜드와 홈경기를 가졌다. 퍼거슨 감독이 징계로 벤치에 앉지 못하는 가운데, 후반전 추가시간에 나온 비디치의 득점으로 1-0으로 극적으로 승리했다. 

클럽 월드컵 참가 전 치러진 마지막 경기인 12월 13일 17R 토트넘 원정에서는 골 결정력 부족으로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17라운드도 빅4 팀들이 약속이나 한듯 모두 무승부를 기록했다. 여담으로 4위는 아스날이 아닌 빌라였는데 빌라는 볼튼에 4대2로 꺾으며 맨유에 승점 1점차로 따라왔다.

18R 위건과의 홈경기는 클럽월드컵 참가로 연기되었다. 맨유가 2경기 덜 치른 가운데 웨스트햄을 잡은 빌라가 3위를 차지했고 1위와 2위인 리버풀과 첼시는 무승부를 기록했다.

일본에서 열린 클럽 월드컵에서는 우승을 거머쥐었다.

클월 참가 후 5일만에 열린 박싱데이 12월 26일 19R 스토크시티 원정에서는 수적 우세 쇠에서 후반 39분 베르바토프가 페널티지역 오른쪽 측면에서 내준 패스를 2선에서 달려든 테베스가 밀어 넣으며 1-0 천금같은 승리를 거뒀다. 빌라가 아스날에 2-2로 비기며 3위를 탈환했다.

12월 29일 20R 홈에서 미들즈브러를 상대로 베르바토프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호날두가 스토크전 이후 침묵하는 가운데, 리그에서 12월에 거둔 모든 승리를 후반에 터진 득점으로 1-0으로 승리했다. 6경기 연속 클린시트. 1위 리버풀이 뉴캐슬을 5-1로 대파한 가운데 2위 첼시가 풀럼에 비겨 맨유는 2경기 덜치르고 선두 리버풀과 2위 첼시에 각각 승점 7점, 4점차 3위로 2008년을 마감했다.

2009년 1월 11일 21R 새해 첫 경기 홈에서의 첼시와의 중요한 맞대결에서는 그야말로 압도했다. 전반 막바지에 비디치의 헤더골, 후반전에 나온 루니와 베르바토프의 득점으로 3-0 완승을 거두면서 2위 첼시와의 승점차는 1점으로 줄어들었다. 선두 리버풀이 스토크 원정에서 0-0으로 비기며 선두에 승점 5점 차가 되었다.

1월 14일 클럽 월드컵 참가로 순연된 18R 위건전 홈경기에서는 경기 1분만에 나온 루니의 골로 1-0 승리를 거뒀다. 2위 탈환과 함께 선두 리버풀에 1경기 덜 치르고 승점 2점 차로 따라갔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전반 8분만에 아웃되었던 루니가 2주 아웃, 전날 부상을 입은 에브라가 4주 아웃 판정을 받으면서 리그 우승 경쟁에 적신호가 켜졌다.

1월 17일 22R 볼튼 원정에서 답답한 흐름 속에서 대런 플레처와 안데르송 대신에 라이언 긱스와 폴 스콜스를 투입하며 변화를 꾀했고, 이 승부수는 후반 44분 베르바토프의 결승골로 연결되며 1-0 신승을 거뒀다. 이 승리로 주중 에버튼과 경기가 있는 리버풀을 제치고 시즌 첫 1위로 올라갔다. 리버풀이 에버튼과 무승부를 기록하며 맨유는 1경기 덜 치르고 골득실에서 앞서 선두를 지켰다. 2004-05 시즌 첼시가 기록한 10경기 연속 무실점 경기와 동률이 되었다.

칼링컵 준결승에서는 더비 카운티를 상대로 원정에서 1-0으로 졌지만, 홈에서 4-2 완승을 따내며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1월 27일 23R WBA 원정에서는 5-0 완승을 따냈다. 정규리그 6연승을 달리며 승점 50점(15승5무2패) 고지에 가장 먼저 올랐다. 위건에 발목잡힌 2위 리버풀(13승9무1패)과 격차를 승점 2점 차로 벌리며 선두를 지켰다. 또 프리미어리그 최다 경기 연속 무실점 기록(11경기)도 세웠다. 판데르사르는 체흐의 1025분 무실점을 뛰어넘어 1032분 무실점으로 신기록을 경신했다.

1월 31일 24R 에버튼 전에서 호날두의 전반 44분 PK 결승골에 힘입어 1-0 승리를 거두면서 판데사르가 지난 1979년 4부리그 스티브 데스(당시 1103분 무실점)의 잉글랜드 축구 무실점 기록을 1122분으로 경신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여기에 맨유는 정규리그에서 7연승을 기록하면서 선두를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12경기 연속 무실점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2월 8일 25R 웨스트햄 원정에서 6경기 무패를 기록하고 있던 상대에게 고전했다. 지난 두 시즌 연속으로 맨유를 상대로 승리를 기록했던 팀이기도 했고. 그래도 긱스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따내면서, 파죽지세의 8연승과 함께 하루 만에 리버풀로부터 선두를 되찾았고 13경기 연속 무실점 기록을 이어나갔다.

FA컵 16강 더비 카운티 전에서는 4-1 완승을 따내며 8강 진출에 성공했다.

2월 18일 주중 UEFA 슈퍼컵으로 순연된 풀럼과의 3R 경기가 열렸다. 스콜스, 베르바토프, 루니의 골로 3-0 완승. 리그 9연승과 14경기 연속 무실점 기록을 이어나가며 2위 리버풀에 승점 5점 차로 벌렸다.

2월 21일 26R 블랙번과의 홈경기에서는 로테이션을 가동했고, 2-1 승리를 따냈다. 이날 비록 무실점 기록은 깨졌지만 10연승을 이어나갔고 다음날 맨시티와 비긴 리버풀에 승점 7점차로 벌릴 수 있었고 19승5무2패로 승점 62점이 되어 첫 승점 60점을 돌파했다.

포츠머스와의 27R 홈경기는 칼링 컵 결승으로 인해 순연되었다. 그 사이 리버풀이 강등권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2대0으로 패배하며 맨유는 우승이 더 유력해졌다.

칼링컵 결승전에서는 토트넘을 상대로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승부차기에서 4-1 완승을 따내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3월 4일 28R 뉴캐슬 원정경기는 아직 무실점 기록이 유지되고 있는 반 데 사르가 골문을 다시 지켰으나, 불과 9분 만에 반 데 사르의 무실점 기록은 허무하게 중단되었다. 그래도 루니와 베르바토프의 득점으로 경기는 2-1 승리. 11연승으로 1경기 덜 치르고 승점 7점 차 선두를 이어나갔다.

FA컵 8강 풀럼 전에서는 테베즈의 멀티골, 루니와 박지성의 골로 4-0 완승과 함께 준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3월 14일 리버풀과의 29R 홈경기에서는 박지성이 얻어낸 PK를 호날두가 마무리하며 앞서갔으나, 수비진의 불안 및 비디치의 퇴장에 의한 수적열세로 인해 4대1로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리그 11연승과 리그 17경기 무패가 여기서 깨졌고 리버풀과의 승점차는 4점으로 줄어들었다. 리버풀에게 더블을 허용한 것은 2001/02 시즌 이후 7년 만의 일이었다.

3월 21일 30R 풀럼 원정에서도 2:0으로 패배하며 리그 우승 방어에 제동이 걸렸다. 그리고 루니가 거친 항의로 또 퇴장당하며 다음 경기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2005년 이후 4년 만에 리그에서 연패를 허용하게 되었으며 리버풀과의 승점차는 1점으로 줄었다.

A매치 브레이크 이후 4월 5일 31R에서 아스톤 빌라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전날 리버풀은 풀럼 원정에서 극적인 승리를 따내며 2위로 일단 내려간 상황. 페널티박스에서 얻은 간접 프리킥 찬스에서 호날두의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었으나 카레브와 아그본라허에게 전반전 연달아 실점하며 1:2로 후반 막판까지 끌려가며 3연패 위기를 맞게 되었다. 후반 35분 호날두의 중거리슛으로 2대2 동점을 만들었지만 이대로 가면 무승부와 함께 2위로 내려가는 것이 유력했던 가운데 추가시간 이날 데뷔전을 치른 교체투입된 페데리코 마케다의 결승골로 3대2, 올드 트래포드 극장을 만들어내며 연패의 흐름을 끊어냈다. 그리고 리그 선두를 하루 만에 되찾았다.

4월 8일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 포르투 전에서는 이른 시간에 선제골을 내줬다가 역전에 성공했으나, 경기 막바지에 동점골을 내주며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4월 11일 32R 선덜랜드 원정에서 전반 19분 스콜스가 루니의 크로스를 받아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후반 10분 켄와인 존스에게 동점골을 실점하며 1:1이 되었다. 다행히 이번에도 교체 투입된 마케다가 2경기 연속으로 후반 30분 결승골을 기록하며 맨유를 구원해냈다.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 경기에서는 전반전에 나온 호날두의 환상적인 중거리 슈팅 득점[60]에 힘입어 1-0 승리를 따내면서 3년 연속 준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33R 위건 원정경기는 FA컵 준결승 경기로 순연되었다. 그리고 FA컵 준결승 에버튼 전에서는 0-0 스코어가 이어지며 승부차기까지 갔고, 4-2로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트레블 도전은 물건너갔다.

4월 21일 리버풀이 아스날에 4대4로 비긴 가운데 2경기 덜 치른 상황에서 골득실에 뒤쳐진 선두가 되었으나 하루 뒤에 열린 27R 포츠머스와의 순연된 홈경기에서 루니와 캐릭의 득점으로 가볍게 2대0 승리를 거두며 1경기 덜 치르고 승점 3점차 선두가 되었다.

4월 25일 34R 토트넘과의 홈경기에서 전반전 벤트와 모드리치에게 실점하며 0대2로 실점했으나 후반전 56분부터 78분까지 호날두와 루니의 2골과 베르바토프의 골로 폭풍같이 5골을 몰아치며 5대2 대역전승으로 우승에 한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4월 29일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1차전 아스날 전에서는 전반 17분에 나온 오셰이의 득점으로 1-0 승리를 따내면서 결승 진출에 한발짝 다가갔다.

5월 2일 35R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긱스의 결승골과 박지성의 추가골로 여유롭게 2:0 승리, 우승 확정까지 승점 7점을 남겨두게 되었다.

5월 5일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 아스날 원정에서는 전반 초반에 박지성의 득점으로 앞서나갔고, 이후 호날두의 환상적인 중거리 프리킥 득점과 후반전에 나온 호날두의 쐐기골로 3-1 승리를 따내며 합산점수 4-1로 2년 연속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다만 대런 플레처가 퇴장으로 인해 결승에 나올 수 없는 변수가 발생했다.

5월 10일 36R 맨시티와의 홈경기에서 전반전 호날두의 프리킥 결승골과 테베스의 중거리슛 추가골로 2:0으로 승리하며 승점 4점이면 자력으로 우승할 수 있게 되었다.

5월 13일 순연된 33R 위건 원정경기에서 전반전 로다예가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고전했으나 후반전 테베스와 캐릭의 골로 뒤집으며 우승까지 승점 1점만 남게 되었고, 5월 16일 37R 아스날과의 홈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며 홈경기에서 18번째 우승을 확정짓고 우승 세레머니를 열게 되었다. 18번째 우승으로 리버풀 FC의 18회 우승과 동률이 되었다. 20년 전 맨유 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현실로 이룬 셈이다.

5월 24일 최종전 헐시티 원정경기에서 챔피언스리그를 앞두고 주전 선수들을 대거 휴식을 취하게 한 가운데 대런 깁슨이 중거리슛으로 자신의 데뷔골을 만들어내며 1:0으로 이겼다. 최종전까지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헐 시티는 뉴캐슬이 빌라 원정에서 패배하며 프리미어리그 잔류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대망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FC 바르셀로나전에서는 대런 플레처가 나올 수 없었다지만 스콜스를 거르고 안데르손을 선발 출장시키고, 433의 3톱에서 호날두를 중앙에 놓는 등 좀 희한한 경기 운영을 했다. 또 호날두의 무리한 개인 플레이를 그냥 방치했고, 에투와 메시에 실점하며 2-0으로 압도적으로 패했다.

이렇듯 시즌 중반까지 쿼트러플을 노릴 만큼 좋은 기세였으나, 선수들의 체력 소모 등의 문제로 인하여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칼링컵 우승,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FA컵 준결승,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기록했다. 그래도 매우 성공적인 시즌이었다.

5.4.4. 2009-10 시즌

2009-10 시즌에는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등 '퍼거슨의 아이들'의 노쇠화와 함께 먹튀가 된 베르바토프의 부진, 카를로스 테베스의 이적, 무엇보다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이적 공백으로 인하여 공격진과 중원의 무게감이 매우 떨어졌다. 또한 에드빈 판데르사르리오 퍼디난드의 부상 공백과 개리 네빌의 노쇠화 등으로 인하여 수비진도 예전 같지 않았다. 시즌 초반 긱스가 2경기 5도움을 찍는 등 활약하기도 했지만 결국 여러 요소들이 겹치면서 팀 성적도 하락했다. 이 시즌에는 웨인 루니가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리그 득점 2위에 오르고 루이스 나니와 이적생 안토니오 발렌시아가 좋은 활약을 했지만 우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 탈락,[61] 리그 2위 등 한 끝씩 모자라면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칼링컵 우승에 그쳤다.

5.4.5. 2010-11 시즌

퍼거슨 감독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심장이 나빠지는 등 건강에 문제를 보였고, 2010-11 시즌까지만 감독직을 수행하고 그 이후에는 은퇴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오기도 했다. 맨유의 데이비드 길 단장은 퍼거슨 감독이 후임자를 정하고 물러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일단 2010-11 시즌에도 계속 감독직을 수행했다.

에이스 웨인 루니가 심한 부진을 겪었지만 그가 야심차게 영입한 하비에르 에르난데스가 대박을 터뜨리고 미드필더들의 적절한 득점 지원, 베르바토프의 득점, 나니의 공격이 터지며 그럭저럭 순항. 5라운드 리버풀전에서는 베르바토프의 헤트트릭으로 제라드의 세트피스 멀티골을 누르고 승리했다.[62] 그러나 점점 무재배를 거두는 경우가 많아지고[63] 그러면서 잃는 승점이 늘어나며, 한번도 패를 기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패가 있는 첼시 FC, 아스날 FC, 맨체스터 시티와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웨인 루니이적 선언을 하면서 팀 분위기에 악영향이 미쳤다. 거기다 09-10 시즌 맹활약한 안토니오 발렌시아가 레인저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큰 부상을 당하며 긴 시간 아웃되는 악재가 겹쳤다. 발렌시아가 빠지자 퍼거슨은 박지성-나니로 측면을 운영하며 어느새 1위를 꿰찼고, 팬들은 저 스쿼드 가지고 리그 무패 행진을 계속하는것만해도 정말 신기하다고 이야기. 혹자는 퍼거슨이 로드신공을 쓰는것 같다고 하기도 한다 17R 아스날 원정에서 루니가 패널티킥을 날렸지만 박지성이 기묘한 궤적의 헤딩골을 넣으며 승리했다.

2011년 들어 루니가 득점감각을 회복하고 발렌시아가 돌아오는 등 25R까지 리그 31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하고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리오 퍼디난드의 부상에 의한 수비 불안으로 25R 꼴찌팀 울버햄튼에게 1:2로 역전패하면서 무패 행진이 마감됐다. 첫 패배를 했음에도 2위 아스날이 뉴캐슬 극장의 희생양이 되면서 4-4로 비겨 아스날과의 승점 차이는 4점이 되었다. 또 잘하던 박지성이 아시안컵 문제로 스쿼드에서 빠졌다. 그래도 26라운드에서 루니가 바이시클 킥을 터뜨리며 맨시티를 2-1로 잡아내고 여전히 순항중. 근데 2011년 3월 1일에 연기됐던 첼시와의 18R 원정에서 루니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역전패했고 이어지는 29R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나니가 부상을 입고 카윗의 헤트트릭에 1:3으로 패배하면서 연패를 당했다. 이후 볼턴과의 안방 경기에서 꽤 답답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막판 87분쯤에 터진 베르바토프의 골로 1:0으로 모처럼 이겼고, 31라운드 웨스트 햄 원정[64]에서 전반에 패널티킥으로만 2골을 실점하였으나 루니의 해트트릭을 비롯한 활약으로 4:2로 역전승을 거두며 2위 아스날과의 승점 차를 7점으로 벌렸다.

한편,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마르세유를 2-1로 꺾고 8강에 진출했는데 상대가 하필이면 첼시로 결정되었다. 2002년 이후로 9년동안 첼시 원정에게 이겨보질 못했고 그동안 AC 밀란 감독으로 토너먼트에서 맨유를 탈탈 털었던 카를로 안첼로티라 불안했지만, 돌아온 발렌시아와 라이언 긱스의 활약에 이은 루니, 치차리토, 박지성의 골로 합산 스코어 3-1(1:0, 2:1)로 첼시를 무너트리는데 성공하며 2년만에 다시 4강에 진출했다. FA컵에서는 4강 맨체스터 시티 전에서 야야 투레의 골로 1:0으로 지면서 12년만의 트레블 재도전에 실패하여 더블을 노리게 되었다. 이후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에서 샬케04 원정 경기에서 압도적인 경기를 펼쳐 2:0으로 승리하면서 결승 진출의 8부 능선을 넘었고, 홈 경기에서도 4:1로 관광을 태우며 합산점수 6-1로 결승 진출에 성공하며 2년 만에 다시 FC 바르셀로나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5월 9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벌어진 리그 2위 첼시와의 사실상 우승의 행방을 결정짓는 경기에서 치차리토네마냐 비디치의 골, 어시스트를 기록한 라이언 긱스박지성, 그 외에도 모든 선수들이 빼어난 활약을 보인 끝에 2:1로 승리를 거두어 사실상 확정지었다. 5일 뒤, 블랙번 원정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면서 결국 10-11시즌 EPL 우승을 확정지었다. 맨유는 이로서 리버풀의 최다 우승 기록을 경신하였다. 퍼거슨 감독은 부임 당시의 약속, (헤이젤 참사로 리그 전체에 민폐를 끼친) 리버풀을 끌어내겠다는 것을 훌륭하게 지킨 셈이 되었다.

FC 바르셀로나와의 리벤지 매치인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를 아예 명단에서 제외시키고, 파비우를 우측 풀백으로 선발 기용하는 다소 의아한 전술을 들고나왔다. 4-4-2 전술을 택하여 전반을 1-1 스코어로 마치는 등 잘 버티는 모습을 보였지만 후반전에 FM 로드신공의 한계를 보였고, 리오넬 메시다비드 비야에게 골을 내주면서 바르셀로나에게 3:1로 패해 다시 준우승에 그쳤다. 이 날 치차리토는 패스 실수에 기회도 못 잡는 등 거의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65] 그러나 감독으로서의 능력에 의문을 가지는 자는 거의 없다. 현재 현지 언론 등에서 뽑는 축구역사상 최고의 감독에 못해도 3위는 하고 있으며 향후 활약 여부에 따라 1위를 차지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야말로 현존 최고의 감독으로 구단주 글레이저 일가는 물론 팬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지지와 신임은 절대적이다. 현지 언론이 매달 뽑는 '경질 가능성이 높은 감독' 예상도에서 항상 20위를 차지하곤 한다.[66] 경기 운영 및 선수 영입 등의 문제를 포함해 거의 전권을 가진 감독으로 정확히는 감독이라기 보단 매니저로 봐야 한다는 말도 많다. 아마 프리미어리그 팀 감독 중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감독일 것이다.

5.5. 말년

5.5.1. 2011-12 시즌

2011-12 시즌은 지난 시즌 도중 또는 종료 후에 게리 네빌, 에드빈 판데르사르, 폴 스콜스가 은퇴하였기 때문에 베테랑 노장 선수는 라이언 긱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편 오언 하그리브스는 결국 자유계약으로 풀려났다. 은퇴한 판데르사르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부터 다비드 데 헤아를 영입하였고 블랙번 로버스 FC에서 필 존스, 아스톤 빌라 FC에서 애슐리 영을 데려왔다. 하지만 십수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주던 웨스 브라운존 오셔는 함께 선덜랜드 AFC로 이적했다.

8월 7일에 펼쳐진 커뮤니티 쉴드에서는 맨시티에게 먼저 2점을 실점했으나 연이어 추격골을 넣은 끝에 90분 막판에 나니가 넣은 골로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우승했다.

리그 개막전에서 WBA를 상대하여 2:1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주전 수비수인 리오 퍼디난드와 네마냐 비디치가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여러모로 잃은 것이 많은 경기였다. 필 존스는 생각보다 빨리 기회를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웨스트 브롬과의 경기를 보고 불안해하던 팬들을 안심시키려는듯, 2R 토트넘 핫스퍼 전에서는 대니 웰벡, 안데르송, 그리고 루니의 골에 힘입어 토트넘을 3-0으로 격파했다.

그리고 리그 3R 아스날 FC와의 홈 경기. 부상과 출장정지로 인해 19살짜리 선수를 세 명이나 기용한 아스날을 상대로 8-2로 대승했다.[67]

A매치 기간 후 첫 경기인 4R 볼턴 원정에서 5-0으로 볼턴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렸다. 루니 해트트릭, 치차리토 2골.

리그 5라운드, 첼시 FC와의 홈 경기. 오프사이드 논란이 있지만 스몰링의 헤딩골과 나니의 중거리골, 그리고 루니의 쐐기골로 전반에만 3-0으로 벌려놓으며 사실상 승부를 끝냈다. 후반 시작하자마자 페르난도 토레스에게 시즌 첫 골을 허용했지만, 경기 종료 10분 전, 토레스가 데 헤아 골키퍼를 제치고 골문이 비어있는 상황에서 허공에 슈팅하는 예능을 보여주어 더 이상의 실점은 하지 않은 채 3-1로 승리하였다. 맨시티가 풀럼 원정에서 2-0 스코어를 지키지 못하고 2-2로 비긴 가운데, 현재 맨유는 5경기 전승으로 좋은 스타트를 보여주는 중이다.

하지만 6R 스토크 시티 원정에서 전반전에 나온 나니의 선제골을 지키지 못하고, 피터 크라우치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전승행진을 마감했다. 맨시티에 골득실에 앞서 선두 자리는 유지.

7R 노리치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선두를 유지했다. 노리치의 안소니 필킹턴에게 골이나 다름없는 1대1 찬스를 허용하는 등 위태로운 장면도 있었지만, 맨유는 안데르손과 웰벡의 골로 홈에서 승리를 가져갔다. 박지성은 웰벡의 쐐기골을 어시스트했다.

그리고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32강 조추첨에서 꽤 약체들을 만났다. 포르투갈SL 벤피카, 스위스FC 바젤[68], 루마니아의 오텔툴 갈라티, 그나마 벤피카를 제외하면 다들 그동안 이 대회 32강 진출로도 만족하던 팀들이라고 여겼는데 초반 3차전에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벤피카 원정에서 1:1로 비겼고 안방에서 바젤에게 앞서다가 프라이에게 헤트트릭을 허용하며 지고 있다가 막판 90분 애쉴리 영의 골로 가까스로 3:3으로 비겨버렸다. 3차전인 오텔툴 원정에서도 웨인 루니의 패널티킥만 2골을 뽑아내 2:0으로 이겼는데, 2승 1무인 벤피카에 밀려 조 2위이다.

8R 시즌 첫 노스웨스트 더비에서 1-1로 비기며, 아스톤 빌라에 4-1로 승리한 맨시티에 밀려 2위로 내려갔다. 시종일관 리버풀의 우세 속에서 진행된 가운데 후반 22분 제라드에게 프리킥으로 실점하며 시즌 첫 패배를 당하는 듯 했지만, 후반 35분 교체투입된 치차리토가 동점골을 넣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리버풀의 파상공세가 경기종료 직전까지 이어졌지만 데 헤아의 선방에 번번히 걸리며 무산되었다.

이렇듯 루니의 꾸준한 득점 등으로 승승장구하다가 리그 9R 맨체스터 더비에서 6:1이라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자, 헤어드라이기 모드로 변신하고는 경기 종료 후 선수들에게 "빌어먹을 멍청이들아" 부터 시작으로 갖은 욕설과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여파로 칼링컵 16강 올더숏전에서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맨시티전 출전 선수를 한 명도 안쓰는 배짱을 보여주었다. 결과는 3:0으로 맨유의 승리.

11월 6일 선덜랜드와 경기가 있던 날 맨유 감독 취임 25주년을 맞아 구단주로부터 올드 트래포드의 가장 큰 스탠드인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로 명명하는 것을 선물받았다. 스탠드가 개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은 올드 트래포드 101년 역사상 처음이다. 스탠드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경기장에 세워질 알렉스 퍼거슨 경의 동상도 만들었다.

12월 8일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16강은 갈 수 있었으나, 바젤 원정 경기에서 1:2로 패하며 유로파로 떨어지게 되었다. 유로파 리그 32강 상대는 추첨결과 AFC 아약스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아약스를 이길 경우에는 아틀레틱 빌바오:로코모티브 모스크바 전 승자와 16강전을 치르게 된다.

12월 31일 퍼거슨 감독의 70번째 생일. 이럴 때는 잔칫집 분위기가 제맛인데, 블랙번에게 2:3으로 역전패를 당하며 반대로 생일빵을 맞고 말았다. 리그 우승 가능성이 낮아 보였으나 2012년 들어 자신의 능력을 100% 발휘하며 맨체스터 시티를 제치고 리그 1위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축구 전문가들과 팬들은 맨유의 상승세의 이유를 감독이라고 하고 동의했다.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다.

그리고 1월 8일 FA컵 64강, 맨체스터 더비에서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3-2 승리를 따냈다. 32강에서는 리버풀 FC와 상대하게 되었고, 이 경기에서 박지성이 골을 기록했지만 결국 2:1로 패하면서 탈락했다.

리그 23R 스토크 시티 전에서는 2:0으로 이기면서 맨시티와 똑같은 17승 3무 3패로 바짝 추격하게 되었다. 골득실에 밀려 2위이긴 하지만 맨시티가 초반에 보여주던 가공할 화력이 식어버린 모습이라서 희망이 있다.

24R 첼시 원정에서는 일찌감치 먼저 3실점을 하여 패색이 짙었으나 페널티킥을 2개나 얻어 성공시키며 옵사이드 추가골로 3:3으로 경기를 끝내며 극적인 무승부를 거두었다. 맨시티와 승점 차는 2점으로 벌어졌다.

2012년 2월 11일 리그 25라운드 리버풀전은 2:1 승리. 이로써 맨유와 리버풀은 이번시즌 1승1무1패에 골득실차까지도 똑같게 승부의 균형을 맞췄다.

이후 AFC 아약스와의 유로파 32강 1차전에서 영과 치차리토의 골로 2:0 원정에서 승리를 가져갔지만 한참 폼이 올라온 발렌시아가 부상을 당해버렸다. 느긋하게 2차전에선 여러 주전을 쉬게하고 여러 신인들도 경기에 나서게 하며 박지성을 임시 주장으로 경기를 벌였는데 1:2로 패했다. 그래도 골득실에 앞서 16강전으로 올라가서 아틀레틱 빌바오와 경기를 벌이게 되었다.하지만 2경기 모두 지면서(2:3, 1:2) 16강에서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탈락하는 굴욕을 당했다.

리그 26라운드에서 8위 노리치 시티 원정에서 선취 득점을 기록했으나 84분 동점골을 허용,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는가 했으나 라이언 긱스가 인저리타임에 넣은 골로 가까스로 2:1로 이기면서 1위인 맨시티와 승점차를 2점으로 그대로 유지했다. 그리고 28차전 웨스트 브로미치를 2:0으로 이기면서 스완지 시티 원정에서 0-1로 패한 맨시티를 승점 1점차로 제치고 5달만에 리그 1위로 올라섰다.

남은 리그 일정은 맨유에게 유리하다. 30차전 풀럼를 1:0으로 이기면서 승점 차가 3점을 벌려놨다. 이후 블랙번 로버스, 퀸즈 파크 레인저스, 위건 애슬레틱같은 모두 강등권 약체들 경기가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물론 강등권팀들도 리그 잔류가 리그 우승 못지않은 경제적, 자존심 상황이 걸려서 상대들이 필사적이기에 얕보다간 일격을 당하기 쉽지만 연승을 달리는 맨유 분위기가 좋다. 그리고 이후로도 아스톤 빌라, 에버턴, 선더랜드, 스완지 시티 경기같이 중하위 팀들 경기이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우려되는 게 바로 맨체스터 더비. 하지만 36라운드 맨시티 원정 경기라서 남은 경기에서 맨시티가 원정에서 고전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이 경기 여부 상관없이 우승 확정을 일찍 볼 수 있게 된다.

32라운드까지 맨유는 연승을 달린 반면, 맨시티는 1승 2무 2패 부진 속에 8점이나 승점이 벌어져서 맨체스터 더비와 상관없이 리그 우승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33라운드 위건 애슬레틱 원정에선 처음으로 위건에게 0:1로 패했다. 위건 골키퍼인 알리 알 합시의 선전도 눈부셨고 위건도 심판 판정으로 날뛸 법[69]함에도 침착하게 경길 진행하면서 승리했고 강등권을 탈출했다. 같은 33라운드 웨스트 브로미치를 4:0으로 이긴 맨시티와 승점차는 아직 5점으로 큰 걱정은 없지만 앞으로 1경기라도 진다면 맨체스터 더비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34라운드 아스톤 빌라를 4:0으로 이기면서 분위기가 잘 되어가나 했더니만 35라운드 에버턴과의 안방 경기에서 4:4로 비겨 버렸다. 80분대까지만 해도 4:2로 앞서다가 막판 골을 연이어 허용한 타격이 컸다. 이로 인하여 맨시티가 울버햄턴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하면서 다음 경기인 36라운드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시티에게 지면 리그 1위를 다시 넘겨줄 상황이 되어버렸다. 승점은 같아도 득실에서 맨시티가 앞서있기 때문이다. 결국 맨시티에 1:0으로 지면서 2위로 밀려났으며 자력 우승은 매우 힘들어졌다. 자력 우승을 위해서는 남은 두 경기에서 매우 큰 점수차로 이겨 8점이라는 득실차를 역전시키거나, 아니면 남은 스완지 시티와 선더랜드 경기를 이기고 맨시티가 뉴캐슬 원정에서 지거나 비기길 기원해야 한다.

그러나 맨시티가 뉴캐슬을 2:0으로 이기면서 맨유가 스완지 시티를 2:0으로 이긴 게 소용이 없어졌다. 맨유로선 이젠 마지막으로 17위로 강등권 탈출에 총력을 다하는 퀸즈 파크 레인저스가 맨시티 원정에서 이겨줘야 하는 희망만 남아있다. 문제는 맨시티가 올시즌 안방 경기는 무패(17승 1무!)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퀸즈 파크 레인저스 원정에선 힘겹게 3:2로 이긴 맨시티이지만 안방 경기는 거의 맨시티의 압승이 유력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맨시티가 후반전 인저리 타임 때 믿기지 않는 대역전극을 펼치면서 리그 우승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한편 시즌 종료 후, 박지성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이적했다.

5.5.2. 2012-13 시즌

2012-13 시즌에는 로빈 반 페르시카가와 신지 등을 영입했으나 부실하다고 평가받던 포지션인 중앙 미드필더는 별 손을 대지 않았고, 오히려 폴 포그바박지성 같은 자원들이 이적하면서 이번 시즌도 우승은 힘들지 않을까 했다.[70]

리그 개막 경기는 에버튼과의 경기였으나, 공수 모두 마루앙 펠라이니에게 압도당하면서 0:1로 패하고 말았다. 맨유가 리그 개막전에서 패한 건 2004-05 시즌 주제 무리뉴의 데뷔전이었던 첼시 원정에서 0:1로 패한 뒤 처음이다. 결국 슬로우 스타터 이미지가 있는 맨유는 이번 시즌에도 슬로우 스타터라는 수식어를 달고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적시켜 달라고 땡강을 부리느라 프리시즌 내내 팀 훈련에 불참했던 반 페르시는 결국 후반에 교체로 투입되었으나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카가와 역시 공격 면에서는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으나 중원이나 수비에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2R 풀럼전에서도 수비 불안을 보이며 전반 2분 만에 데미안 더프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0:1로 끌려갔지만[71], 전반 10분 반 페르시가 페널티 박스 좌측에서 멋진 하프 발리 슈팅으로 데뷔골을 신고했고, 전반 35분에 카가와가 톰 클레벌리의 슈팅이 마크 슈워처 골키퍼를 맞고 흐른 볼을 달려들어 골망을 흔들며 역전에 성공하였다. 전반 41분에는 하파엘이 추가골을 넣었다. 하지만 후반 19분 네마냐 비디치다비드 데 헤아와 호흡이 맞지 않아 자책골을 허용하며 3:2 추격을 허용했고, 설상가상으로 경기 막판에는 카가와와 교체되어 들어온 루니가 스파이크에 허벅지가 깊게 파이는 부상을 입어버렸다. 부상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경기 후 4주짜리 부상이라는 다행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맨유는 루니의 부상으로 인해 남은 시간을 10명으로 싸웠지만 3:2 승리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에서는 H조 시드를 받았는데, 포르투갈 SC 브라가, 터키 갈라타사라이, 루마니아 CFR 1907 클루지와 한 조가 되었다. 무난하다는 평가이지만 지난 시즌에 꿀조에서 조 3위에 그쳐 유로파 리그에 나가는 망신을 당한 바 있어 조심해야 하는 상황.

9월 2일 리그 3R 경기는 승격팀 사우스햄튼 원정을 가게 되었다. 맨유의 불안정한 경기력은 계속되어 리키 램버트에게 선제골을 먹히는 등 초반 열세를 보였다. 반 페르시가 전반 23분에 동점골을 넣었지만 후반 11분 모르강 슈나이덜린에게 실점하며 2:1로 끌려갔다. 맨유는 후반 24분 페널티킥을 얻어내며 동점골의 기회가 왔다. 하지만 반 페르시가 파넨카킥을 시도했는데 사우스햄튼의 켈빈 데이비스 골키퍼가 막아내며 동점골 기회가 날라갔다. 4-2-3-1 포메이션을 쓰다가 1-2로 뒤진 경기 막바지에 스콜스, 나니, 치차리토를 연속으로 투입시키며 전술을 4-4-2로 변경했는데, 이후 맨유 특유의 공격력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전반적에 한골을 넣었던 반 페르시가 경기종료 직전 2점을 득점. 해트트릭에 성공하며 극장을 완성, 3-2로 역전승하였다.

9월 15일, 4R에서는 홈에서 위건을 맞아 4:0으로 승리. 반 페르시와 카가와를 벤치에 앉히고 간만에 4-4-2로 경기에 나섰는데, 전반전에는 이렇다할 공격을 하지 못했으나 후반전에 스콜스의 득점을 시작으로 공격력이 폭발하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는 닉 포웰과 뷔트너도 골을 넣었는데, 이로서 이번 시즌 맨유가 영입한 모든 선수가 4경기에서 5골을 만들어내는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9월 19일 갈라타사라이와의 챔피언스리그 조별단계 1차전 홈경기에서 전반 7분 만에 터진 마이클 캐릭의 결승골을 끝까지 지켜내며 1:0 신승을 거두며 좋은 출발을 보였다.

9월 23일, 5R 리버풀 원정에서 2:1로 승리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리버풀의 우세 속에서 진행되던 중 리버풀의 존조 셸비가 거친 태클로 인해 다이렉트 퇴장을 당하여[72] 맨유는 수적 우세를 맞이했다. 그러나 맨유는 수적 우세를 점했음에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오히려 후반 시작하자마자 스티븐 제라드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여 0:1로 끌려갔다. 하지만 하파엘이 카가와 신지가 가슴 트래핑으로 떨어트린 공을 슈팅으로 연결하며 동점골을 넣었다. 동점골을 넣었음에도 리버풀의 우세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후반 36분 발렌시아의 역습으로 페널티킥을 얻어내어 반 페르시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 결국 2-1 역전승에 성공했다. 시종일관 리버풀에 밀렸음에도 승리에 성공한 것은 매우 훌륭한 성과였다.

9월 26일, 캐피탈원컵 3라운드 홈에서 뉴캐슬에 2:1 승리를 거두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러나 9월 29일 EPL 6라운드 토트넘과의 안방 경기에서 2:3으로 패하면서 23년만에 토트넘에게 안방 경기 패배를 당했다. 전반전에 베르통헌과 베일에게 속수무책으로 골을 허용하며 무기력하게 0-2로 끌려가던 맨유는 후반전 긱스를 빼고 루니를 투입하며 180도 변화된 경기력을 보였고, 나니가 1-2 추격골을 넣었다. 그러나 추격골을 넣은 지 1분 만에 토트넘의 뎀프시에게 추가골을 내주며 1-3. 또 1분 만에 카가와 신지가 추격골을 넣으며 2-3으로 추격했다. 맨유가 남은 경기의 주도권을 잡았음에도 동점골은 끝내 터지지 않았고, 루니의 프리킥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불운을 겪으며 안방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 패배로 4승 2패로 연고지 라이벌 맨시티와 같은 승점 12점으로 리그 3위를 기록했다.

10월 2일 챔스 조별리그 루마니아의 클루지 원정에서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반 페르시의 2골로 2-1 역전승을 거두며 2연승에 성공하였다.

10월 7일 7R 지난 시즌 0-3 패배를 당했던 뉴캐슬 원정에서 3-0 대승을 거두며 지난시즌 패배를 그대로 되갚아줬다. 조니 에반스파트리스 에브라, 톰 클레버리[73]가 득점했다.

A매치 휴식기를 가진 뒤, 10월 20일 8R 스토크 시티와의 안방 경기에서 4-2 승리를 거뒀다. 루니가 전반 11분에 자책골을 기록하며 먼저 실점했지만 전반 28분 동점골을 넣으며 자책골을 넣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했다. 전반 종료 직전 반 페르시의 골로 역전한 가운데 후반 시작하자마자 대니 웰벡이 다이빙 헤딩슛으로 3-1 추가골을 넣었다. 스토크의 마이클 카이틀리에게 3-2 추격을 허용했지만, 루니가 다시 한 번 골을 넣으며 4-2 추가골을 넣었다.

10월 23일 SC 브라가와의 홈경기에서 먼저 2골을 허용했지만 치차리토의 2골(만회골, 역전골)과 조니 에반스의 동점골로 3-2 역전승, 3연승에 성공하며 16강 토너먼트행이 유력해졌다.

10월 28일 9R 첼시 FC 원정에서 오심 논란 끝에 3-2 승리를 거뒀다. 10년 만에 거둔 스탬포드 브릿지에서의 첫 승리를 거두며 첼시 원정 징크스를 끊었다. 첼시의 다비드 루이스의 자책골[74]과, 반 페르시의 추가골로 전반 12분 만에 2-0으로 앞서갔지만 전반 종료 직전 첼시의 후안 마타에게 프리킥으로 1-2 추격골을 허용했다. 자르 콤비에 오스카까지 어우러지며 활발한 첼시 2선에 고전하며 결국 후반 8분 오스카의 크로스를 받은 하미레스에게 헤딩으로 동점골을 허용하며 2-2 동점이 되었다. 맨유의 첼시 원정 징크스가 이어질 것 같았지만 심판이 경기를 맨유의 흐름으로 가져왔다. 이바노비치가 후반 17분에 퇴장당한 가운데, 후반 23분 페르난도 토레스가 석연치 않게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하며 11:9가 되었고 경기는 급격하게 맨유 쪽으로 넘어왔다. 결국 맨유는 후반 30분 문전 혼전 상황에서 치차리토가 결승골을 넣으며 3:2 신승을 거두었다. 결승골이 가장 논란이 되었는데 치차리토의 위치는 오프사이드였지만 부심은 보지 못했고 결승골로 인정되었다. 선두 첼시를 잡은 맨유는 7승2패 승점 21점을 기록, 첼시(승점 22)를 1점 차이로 추격하게 되었다.

맨유와 첼시는 3일 뒤 같은 장소에서 재격돌했는데 이번에는 캐피탈원컵 4라운드였다. 맨유는 1.5~2군을 들고 나온 가운데 첼시는 베스트11을 대거 출격시켰고, 맨유가 종료 직전까지 3-2로 앞서나갔지만 추가시간 통한의 페널티킥을 허용하며 아자르에게 3:3 동점을 허용,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연장전 끝에 희대의 난타전인 5:4로 패하며 결국 캐피탈원컵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맨유는 1.5군에서 2군에 가까운 라인업으로 나왔기 때문에 탈락해도 손해볼 것은 없었다. 오히려 오심으로 인한 패배에 욱해서 맨유에 복수하기 위해 베스트11으로 나서 연장전 끝에 체력을 소모하며 승리한 첼시가 더 손해인 셈. 결국 첼시는 이 경기 이후 체력이 저하된 모습을 보이며 리그 7경기 무승행진을 겪으며 1위에서 3위로 추락, 챔스에서 유벤투스에 0-3 충격패를 당한 직후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은 결국 경질되고 말았다.

11월 3일 EPL 10라운드 홈에서 아스날을 상대하여 2:1 승리를 거두었다. 아스날전 승리를 통해 맨유는 시즌 첫 프리미어리그 선두에 올랐다. 아스날에서 라이벌 맨유로 이적한 로빈 반 페르시는 전반 시작한 지 3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하파엘이 오른쪽 측면에서 올린 크로스를 아스날의 現 주장 토마스 베르마엘렌이 걷어낸다는 것이 前 아스날의 주장이자 이제 친정팀의 골문을 겨냥하게 된 반 페르시의 발에 걸리고 말았다. 반 페르시는 자기 발 앞에 떨어진 행운을 놓치지 않고 선제골을 넣었다. 물론 친정팀을 예우해주는 차원에서 세레머니는 하지 않았다. 이른 시간만에 리드를 잡은 맨유는 전반 종료 직전 산티 카솔라의 핸드볼 파울로 페널티킥을 얻었다. 하지만 키커로 나선 웨인 루니가 이를 실축하며 추가골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맨유는 후반 23분 파트리스 에브라의 추가골로 2-0으로 달아났다. 프리킥 상황에서 루니가 올린 볼을 에브라가 헤딩으로 연결하며 아스날의 골망을 흔들었다.[75] 그리고 3분 뒤에는 아스날의 잭 윌셔가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하며 수적 우위까지 등에 업었다. 맨유는 무리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했고, 아스날은 종료 몇 초 전 산티 카솔라가 중거리슛으로 1골 만회 하는 데 그쳤다. 카솔라의 득점이 나오자마자 주심은 휘슬을 불었다.

11월 7일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예선 4라운드 SC 브라가 원정에서 후반 3분 페널티킥으로 실점하며 후반 34분까지 0-1로 끌려갔지만 후반 34분에 터진 반 페르시의 동점골, 후반 40분 루니의 페널티킥 역전골, 그리고 추가시간 치차리토의 쐐기골로 3-1로 역전승했다. 맨유는 4전 전승을 거두며 토너먼트 진출에 이어 조1위까지 확정지었다. 남은 두 경기는 체력 안배를 시킬 것이 유력하다.

11월 10일 EPL 11R 아스톤 빌라 원정경기에서 0-2로 끌려가던 경기를 3-2 대역전승을 거두며 리그 선두를 지켰다. 전반 종료 직전 안드레아스 바이만에게 선제골을 허용한 맨유는 후반 4분 바이만에게 또다시 실점하며 0-2로 끌려갔다. 하지만 교체투입된 치차리토가 후반 12분 폴 스콜스의 패스를 받아 추격골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5분 후에는 하파엘의 크로스를 받은 치차리토가 슈팅을 날렸고, 이 슈팅이 빌라의 수비수 론 블라르의 등에 맞고 들어갔다. 2-2 동점. 그리고 후반 42분에는 반 페르시의 프리킥을 치차리토가 반대편에서 쇄도하며 헤딩골을 성공시켰고 경기를 기어이 뒤집었다. 맨유는 11라운드까지 거둔 9승 중 무려 5승을 역전승으로 이기는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였다.

11월 17일 EPL 12R 노리치 시티 원정에서 후반 14분 상대팀의 앤소니 필킹튼[76]에게 내준 실점을 만회하지 못하고 0-1로 패배. 시즌 3번째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아스톤 빌라를 5-0으로 꺾은 맨체스터 시티에게 선두 자리를 내줬다. 맨시티는 8승4무, 승점 28점으로 1위, 맨유는 9승3패, 승점 27점으로 2위. [77]

11월 20일 조1위가 확정된 맨유는 UEFA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5차전 갈라타사라이 원정에서 1.5군과 어린 선수들을 투입시켰고 0-1로 졌다.

11월 24일 EPL 13R 홈에서 개막 후 12경기 무승 행진으로 꼴찌인 QPR에 후반 6분에 제이미 마키에게 먼저 실점했지만, 조니 에반스와, 대런 플레쳐, 치차리토의 연속골로 3-1 역전승을 거뒀다. QPR의 박지성은 부상으로 나오지 못하며 친정팀 맨유와 만남이 무산되었다. 시즌 6번째 역전승을 거둔 맨유는 다음 날 첼시 원정에서 0-0으로 비긴 맨시티를 제치고 리그 선두를 탈환했다. 그리고 4일 뒤인 11월 28일 같은 장소에서 치러진 웨스트햄과의 EPL 14라운드는 경기 시작한 지 31초 만에 나온 반 페르시의 선제골을 끝까지 지켜내며 1-0 승리를 거뒀다.

12월 1일 EPL 15라운드 레딩 원정에서 전반에만 7골이 터지는 난타전 끝에 4:3으로 승리했다. 맨유는 에버튼과 비긴 맨시티에게 3점차로 앞선 리그 1위를 지켰다.

12월 5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클루지 전에서 5차전 갈라타사라이와의 경기와 마찬가지로 주력 선수들을 빼고 나왔고 결국 0-1로 패했다. 한편 클루지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잡으므로써 실날같은 토너먼트 진출에 희망을 가졌지만 갈라타사라이가 브라가 원정에서 역전승을 거두며 결국 무산되었다.

그리고 12월 9일 EPL 16R, 숙적 맨체스터 시티와의 맨체스터 더비 원정전에서 전반전 루니의 2골로 2-0으로 앞서나가다 야야 투레와 사발레타에게 두 골을 허용했지만, 막판에 로빈 반 페르시가 극적인 프리킥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일궈냈다. 작년 맨체스터 더비 원정에서는 유효슈팅 0개로 패배를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매우 고무적인 결과. 이 승리로 인해 16경기를 치른 시점에서 6점차로 선두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한편 반 페르시의 결승골이 터진 뒤 리오 퍼디난드가 눈 부위에 맨시티의 관중이 던진 동전에 맞아 피가 흐르는 사태가 터졌다.

12월 15일 EPL 17R 선더랜드전에서는 3-1 가볍게 완승을 거두었다.

12월 20일 스위스 니옹에서 열린 챔피언스 리그 16강 추첨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상대가 결정되었다. 주제 무리뉴와 퍼거슨의 맞대결로 주목을 모으는 상황. 그리고 과거 맨유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레알 이적 후 처음으로 올드 트래포드를 밟게 되었다.

12월 23일 EPL 18R 스완지 원정 경기에서 에브라의 시즌 3호골로 먼저 앞서갔지만 반 페르시, 수아레스와 득점 선두를 다투고 있던 스완지의 미추가 시즌 13호골을 넣으며 1-1로 비겼다. 2위 맨시티와 승점차는 4점으로 좁혀졌다.

12월 26일 EPL 19라운드 뉴캐슬과의 홈경기에서 세 번이나 리드를 빼았기며 고전했지만 3차례 빼앗긴 리드를 모두 동점골을 넣으며 쫓아갔고 결국 종료 직전 치차리토가 4-3 역전결승골을 성공시켰다. 뉴캐슬전을 승리한 맨유는 15승1무3패 승점 46점으로 전반기를 마치며 리그 선두 자리를 공고히 했다. 같은 날 맨시티는 하위권인 선덜랜드 원정에서 0-1로 패했고, 승점차를 7점으로 벌리는 데 성공했다. 한편 맨유는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경기에서 28골이나 실점하며 불안한 수비력을 노출했다. 경기당 1.5골에 가까운 실점률.

12월 29일 EPL 20R 웨스트 브롬위치와의 홈경기에서 상대의 전반 9분 가레스 맥컬리의 자책골과 경기종료 직전 반 페르시의 쐐기골로 2-0 완승을 거두며 2012년을 마감했다.

새해 첫 날, EPL 21R 위건 원정에서 치차리토와 반 페르시의 2골로 4:0 대승을 거두었다.

1월 5일 FA컵 3라운드(64강) 웨스트햄 원정에서 톰 클레버리가 전반 23분에 선제골을 넣었으나, 리버풀에서 이적료 없이 친정팀 웨스트햄으로 복귀한 조 콜이 어시스트 2개를 적립하며 1:2로 역전당하며 첫 라운드부터 광탈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교체 투입된 반 페르시가 후반 추가시간에 극적인 동점골로 간신히 비기며 승부를 재경기로 끌고 갔다.

1월 13일 EPL 22R 리버풀과의 노스웨스트더비 홈경기에서 반 페르시와 비디치의 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1월 16일 OT에서 열린 FA컵 3라운드 재경기에서 루니의 결승골로 웨스트햄에 1:0 승리를 거두며 4라운드(32강)에 진출했다.

1월 20일 EPL 23R 토트넘 원정에서 전반 24분 반 페르시의 헤딩골로 종료 직전까지 1:0으로 이기고 있었으나, 경기 종료직전 추가시간 클린트 뎀프시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하며 1:1로 아쉽게 비겼다. 토트넘과 비기며 2위 맨시티와의 승점차는 5점으로 좁혀졌다.

1월 26일 FA컵 4라운드 풀럼과의 홈경기에서 긱스의 페널티킥 선제골과 루니의 추가골, 그리고 치차리토의 2골로 가볍게 4:1 승리를 거두며 5라운드(16강)에 진출했다. 같은 날 크리스탈 팰리스의 유망주 윌프리드 자하를 영입했다. 그리고 다시 친정팀으로 임대보내며 다음 시즌부터 맨유에 합류할 예정.

1월 30일 EPL 24R 사우스햄튼과의 홈경기에서 전반 2분 만에 제이 로드리게스에게 선제골을 허용했지만 웨인 루니의 2골로 2:1 역전승을 거두었다. 전날 맨시티가 꼴찌 QPR 원정에서 0:0으로 비기며 승점차는 7점으로 벌어졌다.

2월 2일 EPL 25R 1주일 전 FA컵에서 만났던 풀럼을 원정에서 후반 34분 웨인 루니의 결승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 2위 맨시티는 리버풀과의 홈경기에서 2:2로 비기며 승점차는 9점으로 벌어졌다.

2월 10일, 전날 맨시티가 26R 사우스햄튼 원정에서 1:3으로 패한 가운데 맨유는 개막전 패배를 안겼던 에버튼을 홈으로 불러들여 긱스와 반 페르시의 득점으로 2:0 완승을 거두며 승점차를 12점으로 벌렸다.

2월 13일 원정에서 열린 챔스 16강 1차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맞불을 놓았으나 다소 밀리는듯한 전반전에서 웰백의 코너킥 선취골로 분위기를 잡았으나 얼마안되어 호날두의 헤딩 동점골을 허용했다. 하지만 후반전에서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전환하여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들을 잘 막아냈으며 가끔 허용한 찬스도 데헤아의 선방들로 잘 막았다. 비록 반 페르시가 결정적인 찬스를 놓친 게 아쉽긴 하지만 어쨌든 원정에서 1:1 무승부로 끝내는데 성공하면서 만족스런 결과를 얻게되었다. 2차전은 홈인 OT에서 열리고 상대 팀인 레알 마드리드의 험난한 일정에 비해 맨유는 비교적 여유있는 일정이기 때문에 맨유가 유리하다는 반응이었다.

2월 18일, 레딩과의 FA컵 16강 경기에서 후반 60분경에 나니치차리토의 골로 앞서나갔으나, 레딩 특유의 막판 몰아붙이기에 한 골 허용하며 불안불안하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어쨌건 FA 컵 8강 합류. 올 시즌 다른 윙어들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출장조차 하기 어려웠던 나니가 살아난 모습은 플러스였지만, 에버턴전과 레알 마드리드전 1차전에서 상대의 핵심 선수를 집중마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필 존스가 부상당한 건 맨유로서는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2월 23일, EPL 27R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원정전에서 2-0 승리를 거뒀다. 전반 25분, 오버래핑으로 공격에 가담한 하파엘이 상대 키퍼 훌리오 세자르의 선방으로 나온 공을 브라질 풀백 특유의 감각으로 슈팅하며 호쾌한 중거리포로 1:0으로 앞서나갔고, 후반전에 나니가 긱스에게 어시스트를 넣어주며 무덤덤한 2:0 승리를 거뒀다. 사실 이 경기는 QPR이 워낙 무기력했는지라...다만 경기 도중 로빈 반 페르시가 슈팅 후 미끄러져서 경기장 근처에 있던 카메라에 허리를 부딪혀 경기 도중 교체되었다. 심각한 부상은 아니지만 중대한 경기가 조만간 있을 예정인 만큼 맨유 팬들에게 그닥 달갑지는 않은 소식.

3월 2일 EPL 28라운드, 노리치 시티와의 홈 경기에서 카가와 신지의 해트트릭(!)과 웨인 루니의 원더골로 4-0 압승을 거두었다. 중요한 경기들인 3월 6일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과 3월 11일 첼시 FC와의 FA 컵 8강을 앞두고 기세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호날두의 올드 트래포드 복귀전인, 3월 5일에 치러진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2차전이 치러지게 되었다. 루니가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고 라이언 긱스가 자신의 1000번째 경기에서 주전으로 나오면서 의아해하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맨유는 잘 짜여진 작전 수행으로 마드리드의 공격을 전반전 동안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오히려 비디치가 코너 킥에서 헤더로 골대를 맞추는 등 위협적인 기회는 맨유가 더 많이 만들어냈지만 전반전은 0:0으로 끝났다. 후반전 시작 후, 나니가 나갈 듯한 공을 쫓아 잡아내 올린 땅볼 크로스가 세르히오 라모스에 의해 자살골이 되면서 유리한 고지를 잡았으나, 10분 후 나니가 퇴장당하며[78] 경기의 양상은 바뀌었고, 루카 모드리치의 벼락같은 중거리 슛과 곤살로 이과인의 훌륭한 크로스를 호날두가 골로 집어넣으며[79] 불과 3분 안에 맨유는 유리한 입장에서 아주 불리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이후 맨유는 총공세를 펼쳤지만 전체적인 골 결정력 부족과 마드리드 골키퍼 디에고 로페즈의 신들린 선방에 막히며 트레블을 향한 꿈을 접어야 했다.[80]

뒤이어 3월 10일에 OT에서 벌어진 FA컵 8강전에서 전반에 먼저 2골을 넣으며 승리를 잡나 했더니 후반에 2실점을 허용하며 2:2로 비겨 첼시 원정에서 추가경기를 해야하는 번거로움을 겪게 되었다.

3월 16일 간만에(?) 맨꾸역스럽게 레딩 FC와의 리그 홈 경기에서 웨인 루니의 골로 1:0 꾸역승을 거두었다. 같은 라운드에서 맨시티에버턴 FC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9경기를 남긴 채 승점 15점차까지 벌려놓게 되었다. 사실상 리그 우승을 굳혀가는 분위기.

3월 30일 선덜랜드 AFC와의 리그 원정 경기에서 또다시 1:0 승리를 거두었다. 전반전 각도가 별로 없는 상황에서 들어간 반 페르시의 멋진 슛이 그대로 선덜랜드 수비수인 브램블의 자책골로 연결되어 버린 것. 비록 전반전 부상을 당한듯한 하파엘의 빠른 교체와 후반전 공중볼 경합상황에서 데헤아와 비디치가 서로 입술을 제대로 부딪치기도 하고[81] 반 페르시의 무득점이 계속 이어지는등 첼시와의 FA 컵 8강을 앞두고 걱정되는 소식도 있었지만 리그 8경기를 남겨둔 이 시점에서 앞으로 승점 10점만 더 쌓으면 우승을 확정짓게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또한 현재 리그 18경기 연속 무패에 6경기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는중.

선더랜드 원정 후 48시간도 안지난 4월 1일에 벌어진 FA컵 6라운드(8강) 재경기 첼시 원정에선 뎀바 바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1로 패하면서 더블 우승은 좌절되었다. 치차리토의 골문앞 헤딩슛이 체흐에게 막힌 장면이 두고두고 아쉬울 법 하다.

4월 8일 EPL 32R 주중 맨체스터 시티와의 리그 홈 경기에서 1-2로 패배했다. 동시에 리그 18경기 연속 무패와 6경기 연속 무실점이 깨졌다. 전반전은 골 없이 흘러갔고 후반 6분 제임스 밀너에게 선취골을 허용했으나 8분만에 세트피스 상황에서 동점골을 만들었다. 반 페르시가 찬 프리킥이 필 존스의 어깨를 맞고 그 공이 빈센트 콤파니의 등에 맞으며 자책골로 연결되어 버린 것. 그러나 후반 33분 세르히오 아게로의 기가 막힌 원더골에 패배하고 말았다. 졌다 하더라도 7경기를 남기고 12점차기에 우승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그래도 2년 연속 홈에서 라이벌에게 패배한 건 아쉬울 듯.

4월 14일 EPL 33R 최근 부진으로 강등위기에 몰린 스토크 시티와의 리그 원정 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뒀다. 전반 4분 세트피스에서 캐릭의 빠른 선취골, 그리고 후반 69분 PK이긴 했지만 반 페르시가 기나긴 득점 침묵을 깨는데 성공했다. 골을 넣은 이후 반 페르시는 퍼거슨에게 달려가서 포옹하는 세레모니를 보여주었다. 그 정도로 득점을 못한 것에 대한 마음 고생이 심했던듯...

4월 17일 리그 29R 순연경기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2:2로 비겼다. 같은 라운드에서 맨시티위건 애슬레틱 FC를 1:0으로 잡아내면서 맨유가 1경기를 더 치른 상태에서 승점차가 13점차로 좁혀졌던 상황. 맨유의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위한 매직넘버는 6점.

그러나 4월 21일 리그 34R에서 맨시티토트넘 핫스퍼에게 1:3으로 패배하며 우승을 위한 매직넘버가 승점 3점이 되었다. 한국 현지시각으로 다가올 화요일 아스톤 빌라와의 홈 경기가 있는데, 그 경기에서 이기면 우승을 확정짓게 됨은 물론 로빈 반 페르시는 4월 29일, 거의 1년만에 돌아가게 되는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아스날 선수들의 우승 축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게 된다(...).

사실 토트넘 vs 맨시티 경기 이전에 이미 맨유 공홈에서는 '아스날 원정 경기 이전에 미리 우승을 확정지어 놓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박수 받으며 입장하기 vs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서 반 페르시의 결승골로 우승 확정짓기'를 가지고 설문 조사를 하고 있던 상황(...). 일단 다가올 빌라와의 경기를 지켜봐야 될 듯싶다.

그리고 다음날 운명의 34R 빌라전. 게임시작 1분 30초만에 라이언 긱스가 크로스를 받아 반대 방향으로 땅볼크로스, 로빈 반 페르시가 그 크로스를 골로 연결시키며 산뜻하게 출발했고, 10분 후에는 미드필더로 출전한 웨인 루니가 정확한 장거리 패스를 연결했고, 반 페르시가 그걸 논스톱으로 슈팅, 올해의 골 후보에 오를 법한 골을 작렬시키며 2-0. 이후 반 페르시는 기어이 한 골을 추가하며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동시에 프리미어 리그 득점 선두 고지를 루이스 수아레스로부터 재탈환했다. 카가와 신지가 오픈 찬스를 놓치고 하파엘이 위력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골대를 맞추는 등 맨유가 몇몇 구간을 빼고는 시종일관 지배한 경기였고, 이 승리로 맨유는 20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알렉스 퍼거슨 개인적으로는 맨유에서의 13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82]

4월 28일 EPL 35라운드 아스날 원정에서 맨유 선수들은 아스날 선수들의 우승 축하 박수를 받으며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 입장하였다. 월콧이 경기시작하자마자 선제골을 넣었으나 전반 43분 바카리 사냐의 파울로 얻은 페널티킥을 작년까지 아스날의 주장이었던 반 페르시가 깔끔하게 성공시키며 갈길바쁜 친정팀에게 비수를 꽂았다. 경기는 1:1로 무승부.

한편 다음 시즌 초반에는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유는 엉덩이 수술 때문으로 그리 심한 것은 아니라며 병명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일부 팬들 반응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팬들은 올드 트래포드에 도넛 방석을 보내자며 쾌유를 빌고 있고 경기 중에 빡쳐서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며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다만 고관절일 거라는 의견도 많은데, 실제로 과거 몇 년간의 영상을 보면 걸음이 불편한 장면이 보이기는 한다. 그래도 시즌 투어까지는 다 소화하고 자리를 비울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5.6. 은퇴

(2013년 5월 7일) 퍼거슨의 은퇴 계획이 알려진 날. 팀 스태프와 선수들이 함께 골프를 치러갔다. 게임을 마치고 라운지로 올라갔더니, 따로 놔뒀던 모두의 휴대전화가 테이블 위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스콜스, 캐릭, 긱스가 올려둔 휴대전화가 동시에 울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퍼거슨경의 은퇴 계획이 알려진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데이비드 길 사장은 당시 골프를 치던 중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요?'라면서 말이다. 퍼거슨 경은 다음 날 아침에야 나타나서는 '나 은퇴해'라고 말했다. 그제야 확실해졌다. 퍼거슨경은 아침 7시에 나를 비롯해 마이크 펠란 수석코치, 르네 뮬레스틴 1군 코치를 자신의 사무실로 호출했다. 정말 감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다른 스태프에게도 은퇴 계획을 밝혔다. 이후로는 선수들에게도 알렸고 말이다.
(퍼거슨이 은퇴한 12/13 시즌에 리그 우승을 확정 한 뒤) 기념 버스 퍼레이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퍼거슨경이 트레블을 달성했을 때보다 더 대단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공사를 위해 설치한 비계에까지 매달려 있었다.
당시 맨유의 골키퍼 코치였던 에릭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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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8일, 한국시각으로 이른 아침부터 현지에서 은퇴기사가 일제히 보도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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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십수년전부터 은퇴기사가 연례행사처럼 떴었기에 지나가는 소문으로 보는 팬들도 있는 한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BBC를 제외하고 어지간한 매체에서는 다 이 주장을 보도하는 상태. 구단 측에서는 현지에서 오전 10시쯤에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2012~2013시즌을 끝으로 맨유 감독에서 은퇴함을 공식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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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트래포드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팬들의 모습
은퇴 발표 후 37R 스완지 시티 AFC 전에서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가졌다. 경기는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의 선제골과 리오 퍼디난드의 라스트 미닛 골로 2-1 승리를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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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 입장하는 퍼거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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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13번째 프리미어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은퇴식을 성대하게 장식했다.

퍼거슨 감독의 은퇴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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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got no script in my mind, I'm just going to ramble on and hope I get to the core of what this football club is meant to be.
"대본은 절대로 준비 안 했습니다. 그냥 장황하게 얘기할게요. 그리고 이 축구 클럽이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 핵심까지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First of all, it's a thank you to Manchester United, not just the directors, not just the medical staff, the coaching staff, the players, the supporters, it's all of you. You have been the most fantastic experience of my life, thank you.
"무엇보다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여러분에게 감사합니다, 이사진만이 아니라, 의료진만이 아니라, 코치진 및 선수들이나 서포터들만이 아니라, 여러분들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내 인생의 가장 환상적인 경험은 바로 여러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I have been very fortunate. I have been able to manage some of the greatest players in the country, let alone Manchester United. All these players here today have represented our club in the proper way. They have won a championship in a fantastic fashion, well done to the players.
"난 정말 운이 좋았어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잉글랜드 역대 최고의 선수들도 몇 명 지도할 수 있었으니까요. 오늘 여기 있는 이 선수들 모두, 각자 적절하게 우리 클럽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환상적인 방식으로 리그를 제패했죠, 수고했습니다 선수들.
"My retirement... doesn't mean the end of my life with the club. I will be able to enjoy watching them, rather than suffer with them.
"은퇴라는 게... 클럽과의 연을 끊는다는 걸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젠 경기를 보면서 고통을 받기보다, 더 즐길 수 있겠죠.
"But, if you think about it, those last minute goals, the comebacks, even the defeats, are all part of this great football club of ours. It has been an unbelievable experience for all of us, so thank you for that.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런 막판에 기록한 득점, 극적인 승부, 심지어 패배하는 순간조차, 그 모든 것이 우리, 바로 이 위대한 클럽의 일부인 겁니다. 우리 모두에게 믿기지 않는 경험이었던 거죠, 그 점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I'd also like to remind you that when we had bad times here, the club stood by me, all my staff stood by me, the players stood by me, your job now is to stand by our new manger. That is important.
"여러분에게 또 전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힘든 시기를 맞을 때, 클럽, 내 코치진 모두, 선수들까지도 내 곁을 변함없이 지켰다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이 할 일은 우리의 새 감독을 끝까지 지지하는 거예요. 그게 중요합니다.
"I'd just... Before I start bubbling, I just want to pay tribute to Paul Scholes who retires today. He is a unbelievable, one of the greatest players this club has ever had or ever will have. Paul, we wish you a good retirement. I know you will be around to annoy me. But a... also, I would like to say a little word wishing Darren Fletcher a speedily comeback to our club.
"감정이 벅차오르기 전에, 일단 오늘 은퇴하는 폴 스콜스에게 찬사를 전하고 싶네요. 믿을 수 없는 선수였습니다; 여태까지, 또 앞으로도 이 클럽이 가질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일 거예요. 폴, 우리 모두 너가 편하게 은퇴하길 바란다. 어디 안 가고 계속 나 귀찮게 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리고 어... 또 대런 플레처도 어서 클럽에 복귀할 수 있길 바랍니다.
"The players, I wish the players every success in the future. You know how good you are.You know the jersey you are wearing, you know what it means to everyone here. And don't let yourselves down. The expectation is always there.
"얘들(선수들)아, 앞으로도 모든 성공을 거머쥐길 기원한다. 너희들이 얼마나 훌륭한 지는 너희들이 잘 알 거다. 너희들이 입고 있는 저지에 대해서도 잘 알 거고, 여기 있는 모든 분들께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 거고. 그리고 절대 스스로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우린 언제나 기대를 짊어지고 있으니까.
"So, I'm going home, well, I'm going inside for a while. I just want to say thank you once again for all the Ferguson family! They are all up there, 11 grandchildren!
"그래서 이제 전 집으로 갈 거고, 어, 거기 좀 있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우리 퍼거슨 집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손주들 11명이 다 저기 있네요!
"Thank you, thank you."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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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 2012/13(은퇴) 시즌,이적료 지출 순위
추가적으로 총 수익 대비 스펜딩을 감안하면, 퍼거슨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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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퍼거슨의 맨유는 3위 아래로 내려간 적이 단 한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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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트래포드 승률: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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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왼쪽이 각 클럽의 감독들 수. 오른쪽이 트로피 수.[83]

이로써 알렉스 퍼거슨은 맨유 감독으로서 13번의 리그 우승, 2번의 챔스 우승을 포함한 27년간의 화려한 장기집권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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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했지만, 그 끝은 창대하였다.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은퇴를 결심하게 된 것은 아내를 위해서라고 한다. 체력적으로는 아직 문제가 없었던지라 은퇴는 앞으로 몇 시즌 뒤가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처제 브리짓 로버트슨이 사망한 이후 아내 캐시 퍼거슨이 TV를 켜둔채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매우 고독하게 느껴졌고, 언제나 새벽에 귀가하는 자신을 잠들지 않고 기다려주던 그런 아내에게 보답하기 위해 은퇴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6. 감독으로서의 능력

완벽에 가까운 만능 육각형 감독이다. 보통 감독이라면 전술적 완성도가 높으면 선수단 장악력이 부족하고, 선수단 장악력이 좋으면 좋은 선수 영입 안목이 부족하고, 좋은 선수 영입 안목이 좋으면 유소년 성장에 약점을 보이는 식으로 장단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퍼거슨은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역량 중 어느 하나 부정적 평가를 받는 영역이 없었다. 이는 맡았던 클럽팀에서 오점이 없는 커리어와 맞물려 퍼거슨에 대한 평가를 크게 높이는 요인 중 하나다.

6.1. 전술적 능력

유나이티드의 전술 마스터
UEFA가 역대 최고의 감독 10인을 선정하며 퍼거슨에게 붙힌 칭호
퍼거슨에게는 리누스 미헬스의 토탈풋볼, 아리고 사키의 샤키이즘, 펩 과르디올라의 티키타카, 위르겐 클롭의 게겐프레싱과 같은 본인의 시그니처 전술이 없었고, 전술적 혁명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팀의 성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퍼거슨이야 말로 위대한 전술가였다. 퍼거슨 최대의 장점은 변화에 대한 열린 사고와 과감함이었다. 1974년 감독으로 데뷔해 2013년 은퇴하기까지, 퍼거슨의 전술은 일관되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팀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전술 스타일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갔다. 이길 수 있는 전술이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았고, 성공했던 전술이라도 시대가 변했다고 느끼면 버리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것은 퍼거슨이 매번 혼란스러운 상황의 팀을 맡으면서도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였고, 40년에 이르는 커리어 동안 도태되지 않고 계속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다. 퍼거슨을 명장으로 만든 건 전술적 혁명이나 한 가지 전술의 극대화가 아니라 무려 40년 동안 축구계의 전술 변화를 모조리 쫓아가 연달아 기적을 만들고, 은퇴하던 그 순간까지도 팀을 성공으로 이끈 변화무쌍함과 과감함이었다.

팀의 조직을 다지는 능력이 탁월한 데다가 워낙 가진 능력이 많은 육각형 감독이었고, 국내에서 해외축구가 널리 퍼진 2000년대 중반에는 이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안정된 후였기 때문에 전술가로서의 역량은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애시당초 퍼거슨이 최고의 감독으로 뽑히는 건 그가 매번 무너지거나 침체된 팀, 리그에 부임해 팀을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었다. 퍼거슨은 전술적으로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이 능력으로 스쿼드에 부족함이 있고 불리한 상황에 처했더라도 본인의 역량으로 채워넣었고, 덕분에 세인트미렌, 애버딘에서의 기적을 만들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인상적인 말년을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1980년대 애버딘에서는 수비 라인을 높이고 강한 압박 강도를 가져가는 축구를 구사했고, 1990년대 맨유처럼 비교적 긴 패스로 쭉쭉 역습해 나가는 스타일을 보이는가 하면, 2000년대 중후반에는 선수들의 빠른 스위칭과 짧은 패스를 통해 상대를 현란하게 교란하는 기동전 축구의 정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시기의 맨유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의 라이언 긱스데이비드 베컴[84], 그 후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85]였다. 그렇기에 2명의 윙어를 통해 측면 플레이에 능한 4-4-2가 가장 유명한 포메이션이지만 때에 따라 4-5-1 등의 포메이션도 활용하는 등 포메이션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면 호날두를 제로톱으로 활용한 경기도 있었고 경기 중에는 리오 퍼디난드네마냐 비디치를 포워드로 기용한 적도 있다. 2000년대 중후반부터는 주제 무리뉴로부터 선도된 선수 전원의 수비 가담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헐거운 중원을 커버하는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맨유가 더블을 한 시기에는 화려하고 다이나믹한 축구로 팬들에게 재미를 선사했다.

감독 커리어 전체를 놓고 보면 4-4-2를 기반으로 양쪽 측면으로 볼을 운반해서 어떻게든 페널티 박스로 공을 투입하고 훌륭한 공격수가 이를 마무리짓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세부적으로는 매번 다른 시스템을 들고 나왔고 한 가지 전술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여러 전술 옵션을 갖고 상대 감독과 수싸움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예컨대 2006-07 시즌에는 굉장히 잦은 좌우 스위칭을 통한 공격 패턴을 선호했고, 2007-08 시즌에는 좌우 스위칭의 빈도를 줄이고 루니-테베즈 투톱이 폴스 나인처럼 움직이고 호날두에게 더 많은 자유도를 부여하면서 상술했듯이 호날두를 제외한 선수들 전원이 많은 수비 가담을 통해 적극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약팀을 상대로는 라인을 올리고 점유율을 높이면서 폴 스콜스마이클 캐릭 같은 훌륭한 후방 플레이 메이커가 빠르게 좌우로 전환해 수비 라인을 좌우로 벌려서 공략하고, 강팀을 상대할 때는 깊숙히 눌러앉아 재빠른 역습으로 때려잡기도 했다. 그래서 강팀들이 맨유의 '선 수비 후 역습'을 예상하고 플랜을 짜오면 2009-10 시즌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2차전, 2010-11 시즌 첼시와의 리그 2차전과 같이 초반부터 벼락같은 전방 압박으로 리드를 확 잡아내기도 하였다.

또 퍼거슨은 경기의 흐름을 읽고 용병술과 변칙 전술을 사용하는데 매우 능했다. 경기가 지지부진 할 때면 자주 이른 시간에 변화를 줬고, 승패가 걸린 결정적 순간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런 결정들은 단지 과감할 뿐만 아니라 성공률 자체가 높았는데 퍼거슨의 수석코치였던 케이로스는 "레알 마드리드 감독 때 퍼거슨 옆에서 봤던 대로 과감한 결정들 많이 해봤는데 나는 해보는 족족 실패하더라."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만큼 날카로운 안목에 엄청난 경험이 쌓여 수싸움, 심리전의 대가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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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어떻게든 이기는 축구를 했던 것도 유명하다. 특히 글레이저의 맨유 인수 후 구단이 엄청난 빚에 짓눌려 제대로 리빌딩을 못하던 말년에 소위 꾸역승을 가져가는 모습들을 많이 보였다. 분명 경기력도 별로고 라인업도 별로인데 어떻게든 골을 넣어 이기는 축구를 구사했다. 감독으로서 퍼거슨의 역량이 잘 드러나는 부분으로 각 포지션의 선수의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87]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골치 아픈 성향의 감독이었다. 로테이션을 하도 돌려서 스쿼드조차 변화무쌍한 데다가[88] 전술에 있어서도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했고 나쁘게 말하면 일관성이 없었다. 때문에 전술을 예측해 대응 전술을 짜는 것도 용이치 않았다. 다만 그 와중에도 퍼거슨은 언제나 공격적인 축구를 추구했는데, 그 이유는 맨유가 세계 최강의 팀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문화와 전통이 있는 팀이라는 것이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퍼거슨은 새로운 페러다임을 계속 받아들였으나, 이 공격적인 축구 하나는 절대로 변하지 않았고 이러한 다이나믹한 축구는 팬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해 맨유가 세계적인 인기 구단이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바르셀로나, 뮌헨, 레알 등 강팀을 상대로도 맞불을 놓았고 이 점은 퍼거슨이 명성에 비해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적은 대표적인 이유로 꼽힌다.[89]

6.2. 선수단 장악 및 관리 능력

현역 시절 퍼거슨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확실한 선수단 장악이었다. 때로는 불같았고, 때로는 인자했다. 상대팀 뿐만 아니라 본인이 이끄는 선수들을 상대로도 심리전을 했고 선수들이 감독의 권위를 넘보면 반드시 무자비하게 처분하였다. 선수들이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하면 코앞에서 선수들의 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거센 비난을 퍼부어 '헤어드라이어'라는 별명을 얻음과 동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으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하고 끝까지 선수들을 보살펴 선수들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라는 평도 들었다. 퍼거슨은 다른 무엇보다 라커룸을 장악하고 팀을 하나로 만드는 것을 우선시 했고, 선수들을 컨트롤 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일부 축구 팬들은 퍼거슨의 선수단 장악 능력은 지금 와서는 통하지 않을 권위로 찍어누르는 방식인데 시대를 잘 타고나 쉽게 선수단을 장악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퍼거슨의 커리어를 제대로 살펴보면 이는 국내 많은 축구팬들이 본 퍼거슨은 이미 말년이었기 때문에 나오는 오해라는 걸 알 수 있다. 박지성이 맨유에 이적했을 때 퍼거슨은 이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 20년 차로 구단에서 전설적인 위치에 오른 뒤였다.[90] 당연히 팀내 그 누구도 퍼거슨에게 감히 대항할 수 없었다. 최고참 라이언 긱스조차도 청소년 시절 퍼거슨이 직접 유소년 팀에 영입해 키우고 데뷔시킨 선수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40년 감독 커리어 중 마지막 7-8년, 그것도 이미 팀이 완성된 상황에서의 퍼거슨만을 보고 그의 선수단 장악 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퍼거슨의 그 권위는 절대 시대적 배경 등으로 인해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퍼거슨은 32살의 어린 나이에 감독이 되어 처음에는 선수들로부터 대놓고 모욕당했고, 가는 팀마다 어린 감독인 퍼거슨을 무시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축구 선수들이 지금보다 휠씬 거칠고, 규율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영국 축구가 술에 관대했던 시절 금주령과 엄격한 규율을 요구했던 알렉스 퍼거슨에게는 요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반발과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스트 스털링셔에서 파트 타임 임시감독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스쿼드에 8명의 선수 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정신 상태도 엉망이었다.[91] 공격수였던 짐 미킨은 가족여행 간다고 허락없이 3주 동안 사라지는 등 선수들이 대놓고 퍼거슨을 무시했다. 첫 정식 감독이 된 세인트미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감독 부임 첫날, 지역지에 실린 자신의 기사를 보던 퍼거슨이 발견한 것은 팀 단체 사진에서 주장이 자신의 뒤통수에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선수들은 술을 먹고 다음 날 훈련에 나오지 않기 일쑤였다. 애버딘에서도, 퍼거슨은 과 싸워야 했다. 또 셀틱레인저스의 양강 체제에 우승을 포기하고 무기력해진 선수들은 퍼거슨의 공격적인 전술 지시를 거부했다. 고참 선수들이 인터뷰에서 퍼거슨을 공개 저격하는 일까지 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부임 초기에도 퍼거슨은 알콜 중독을 벗어나지 못하는 선수들을 팔아치워야 했고, 덕분에 부진과 반항에 시달렸다.

퍼거슨은 거친 선수들을 휘어잡기 위해 더 거칠고 과감해져야만 했다. 직접 훈련에 참여해 선수들에게 요구하는 강도높은 훈련을 자신도 소화했고, 규율을 어긴 선수들에게는 엄벌을 가했다. 자신에게 욕을 한 세인트미렌의 주장은 즉각 팀에서 추방됐다. 선수들이 술을 마시거나 느슨해지면 술병을 벽에 던져 깨트리고 이것저것 걷어차는 등 분노를 폭발시키며 선수들이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에도 '헤어드라이어'로 대표되는 퍼거슨의 다혈질 성향은 사실 처음에는 감독 생활 초기, 어린 감독이 반항하는 선수들에게 무시 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장착한 무기였다.
내 분노는 유용한 도구였다. 분노를 터뜨리는 일은 내 권위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선수들과 스태프들에게 내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인간이라는 메시지를 주었다. 그러나 대들고 거역하려는 인간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알렉스 퍼거슨 나의 이야기 45p
퍼거슨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말하듯 이런 퍼거슨에게 더 크게 반항하는 선수들도 당연히 있었다. 그때마다 퍼거슨은 자신의 유소년 선수들을 보는 안목을 사용해 젊은 선수들을 끌어왔다. 젊은 선수들은 열정에 불탔고, 자신에게 기회를 준 퍼거슨을 잘 따랐다. 그들에게 자리를 위협받은 기존 선수들은 떠나거나 퍼거슨 체제에 적응해야 했다. 심지어 세인트미렌에서는 17살의 피츠패트릭에게 주장 자리를 주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면 퍼거슨은 언제나 성적을 냈고, 퍼거슨이 데려온 유소년 선수들도 대부분 만개했다. 결국 선수들은 퍼거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92]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퍼거슨을 인정하고, 팀 내 주축들은 퍼거슨이 키운 어린 선수들이었다. 구단도 팬도 성적을 내는 퍼거슨을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므로 퍼거슨 편이었다. 퍼거슨은 이미 장악된 선수단을 적절히 관리하면 됐다.

이 과정은 말이 쉽지 사실 하나하나가 도박수였다. 팀 내 주축들과의 분쟁은 당연히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팀 내 주축 선수의 기강을 잡겠다고 몇 주 제외시켰는데 팀 성적이 안나오면 그건 반대로 망신이다. 분노를 통한 기싸움도 퍼거슨이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가능했지, 단순히 화만 냈다면 선수단은 오히려 어린 감독을 비웃었을 것이다. 유소년 선수의 콜업은 선수를 보는 안목이 동반되어야지 그냥 콜업만 시키면 오히려 성적은 추락하기 마련이다. 또 성적을 낸다고 해도, 감독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인정받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인트미렌에 있을 시절, 나는 경기에서 0-2로 패했다. 그날 밤 내 친구인 존 도나키가 전화로 말했다. "네가 열 받을 거 같아서 말 안했는데 실은 금요일 밤에 프랭크를 펍에서 봤어. 잔뜩 취해 있더라고." 나는 즉시 프랭크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프랭크가 시내에 나가 집에 없다고 말했다.

"돌아오면 내게 전화하라고 전해주세요. 전화가 올 때까지 아무리 늦어도 자지 않을 겁니다." 밤 11시 45분에 전화가 왔다. 공중전화였다.

"금요일 밤에 어디있었나?" "생각이 안 나는데요." 그가 말했다. "그래? 그럼 내가 말해주지. 넌 워털루 바에 있었어. 넌 영구 출장 정지다. 돌아올 생각 하지 마. 스코틀랜드 U-21세 팀에서도 빠지게 될 거다. 내가 탈락시킬 거야. 평생 두 번 다시 축구공을 차게 되나 봐라."

그 후 나는 3주 동안 그를 영구출장 정지 시켰고 선수들은 모두 불평을 늘어놓았다. 3주 뒤 리그 상위권 팀인 클라이드뱅크와의 경기가 다가왔다. 프랭크가 필요했다. 고민하며 캐시와 걷고 있는데 프랭크가 기둥에서 뛰어나오더니 애원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이었다. 나는 캐시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하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말했잖아. 넌 평생 뛰지 못할 거라고." 그러자 우리를 보고 있던 주장 피츠패트릭이 앞으로 나섰다. "감독님. 프랭크에게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세요. 제가 앞으로 녀석이 말썽 피우지 않도록 책임지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와서 말해. 지금은 안 돼." 나는 잘라 말하고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클라이드뱅크 전에서 승리했고 프랭크는 골을 넣었다.
알렉스 퍼거슨의 자서전에 언급되는 세인트미렌에서의 일화
이런 식으로 선수단을 장악하면 이제 팀을 관리하고 유지해야 했다. 이 부분에서는 맨유에서의 행보가 유명하다. 27년 간 한 팀에 있으면서 꾸준히 선수단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선수단이 장악됐다 싶으면 퍼거슨은 이전보다는 팀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선수들을 인자하게 대하며 인간적인 유대를 쌓았다. 맨유 말년 뿐만 아니라, 애버딘의 선수였던 스튜어트 케네디도 퍼거슨을 회상하며 "헤어드라이기? 우리 때는 용광로였는데 몇 년 지나니까 헤어드라이기 수준으로 감소하더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애버딘 말년에는 선수들과 장난도 많이 쳤다. 박지성도 "언론에는 퍼거슨 감독님이 되게 무서운 이미지인데 사실 친절하고 인자하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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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의 아버지 모드
언론에서는 다혈질이고 파격적인 결단들을 많이 내렸던 알렉스 퍼거슨을 주로 조명했지만, 평상시 알렉스 퍼거슨은 선수들을 섬세하게 보살피는 사람이었다. 특히 자신이 어릴 때부터 봐온 선수들를 매우 애지중지했는데, 게리 네빌은 레딩의 호텔에서 퍼거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팀에 있다가 다른 팀으로 간 선수들 60명의 명단을 적으며 기억하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퍼거슨은 팀을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항하는 하나의 가족처럼 만드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선수들이 자신의 기준을 충족하면 관대해졌고, 부진한다고 무조건 질책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퍼거슨은 대부분의 맨유 선수들과 좋은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선수들을 항상 무섭게만 대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퍼거슨은 내게 정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정말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엄청 자주 대화해요. 서로 문자도 보내고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대해 얘기해요. 예를 들어 최근에 UEFA 슈퍼컵에서 우승했을 때 퍼거슨이 제게 'Man of the Match'를 시상했죠. 리스본에서 챔스 우승을 했을 땐 내가 도핑테스트를 받으러 갈 때 그가 동행했어요.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고 친한 친구예요. 함께한 모든 감독님들 중 우정을 나눈 사람은 퍼거슨이 유일해요. 페예그리니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안첼로티와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관계를 맺고 주기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은 퍼거슨 뿐이에요.출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퍼거슨은 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다가오고 거기서 더 분발할 수 있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축구 외에도 온갖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해주곤 했다. 훈련은 힘들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전력을 쏟아야 하는 것인게 맞다. 그러나 훈련 분위기는 항상 즐거웠는데, 이는 그가 선수들이 분위기에 눌려있는 걸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드러내보이면 족했다. 퍼거슨은 보수적인 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경기 중에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선수들이 경기장 위에서 누굴 상대할 지에 대한 자유를 부여했고, 진심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운 방식으로 움직이길 바랬다.
게리 네빌
판할은 변함없이 딱딱한 성격이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강하다. 안첼로티는 퍼거슨 같이 좀 더 자유롭다.
하비에르 에르난데스
(12/13시즌 10경기 정도 무득점을 했던 시기에 대해)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퍼거슨 감독님이 드디어 나한테도 헤어드라이기를 시전하실 때가 온 건가!' 하지만 그는 '괜찮다 로빈, 넌 골을 넣을 거야. 만약 득점을 하지 못하더라도 넌 항상 팀을 돕고 있단다.' 라고 저를 독려했습니다. 맨유는 2012/13시즌 26라운드에서 결국 역전 우승을 이뤄냈어요.(2위팀과 승점 11점차 우승) 정신적인 동기부여의 힘이 팀에 끼친 영향은 정말로 대단했습니다. 퍼거슨 경은 언제나 선수들이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때때로 그는 말합니다. "얘들아, 내가 어디부터 시작해야겠니? 지루하다고! 내 생각 좀 해주렴, 얘들아. 72살이나 나이를 먹은 내가 이런 경기를 보고만 있어야 하니? 나를 좀 재밌게 해주길 바란다. 40미터 이상 패스를 시도하라고. 실패해도 상관없으니까 드리블도 해보렴. 막 두근거리고 싶다고. 나를 좀 흥분시켜줘. 경기를 더 빠르게 더! 더! 제발!" 퍼거슨 경은 천재였습니다.
로빈 반 페르시
판할 체제에서 팀 분위기가 급격히 나빠졌어요. 주된 이유는 소통이에요. 판할 체제에서 맨유 유스팀은 1군 선수를 만나는 것 조차 어려웠습니다. 모든 것이 단절됐고 분리됐어요. 가족같은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죠. 퍼거슨 체제에서는 맨유 유스는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모두가 함께하고 소통했어요. 당시 1군 선수들도 우리에게 다가와 안부를 묻기도 했었습니다. 반면 판할은 근엄한 행동만을 요구할 뿐이었어요.
맨유 유스출신 라이언 맥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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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퍼거슨의 포용력과 리더십을 보여주는 또 다른 대표적인 사례들은 축구계의 문제아들을 팀에 포함시키고 컨트롤 했다는 점이다. 말년에는 악동 웨인 루니를 길들였고, 선수 커리어 초반부터 스타성 넘쳤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개인 플레이만 하고 윙크 사건으로 팀 내 파동을 일으켰을 때에도 호날두를 끌어안았다. 한 성깔 했던 로이 킨도 키노게이트 전까지 퍼거슨 체제 하에서는 훌륭한 주장이었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당연히 에릭 칸토나일 것이다. 칸토나는 심부름을 시켰다고 팀원에게 주먹을 날렸고[93], 프랑스 대표팀에선 감독에게 욕설를 해 사실상 퇴출됐다. 이후 심판이 맘이 안들자 심판 얼굴에 축구공을 던졌고 징계가 내려오자 은퇴를 선언해 버린 전적까지 있었다. 이런 칸토나가 맨유에서도 관중에 쿵푸킥을 날려 사고를 쳤을 때, 퍼거슨은 언론에 맞서며 칸토나를 감쌌다. 은퇴까지 시사하던 칸토나도 이를 보고 뭔가 느꼈는지 이적 제안을 전부 거부하고 맨유에 남았고, 퍼거슨에게 굉장한 존중과 충성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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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상시에는 인자했던 퍼거슨도, 선수들이 좀 느슨해지면 다시 가차없이 욕설 섞인 헤어드라이기를 날렸다. 그리고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면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와 관계없이 내쳤다. 주장으로 퍼거슨과 오랜 세월을 함깨한 로이 킨이 키노게이트를 일으키자 고민 끝에 그를 내쳤고, 데이비드 베컴이 팀의 기강을 해친다고 생각되자 퍼거슨을 아버지 같이 생각했던 베컴도 내쳤다. 어린 선수들로 스쿼드를 구성한 것에 불만을 갖고 반항한 반 니스텔로이도 내쳐졌다. 아무리 월드 클래스 선수라도, 퍼거슨에게 반항하고서는 팀에 남을 수 없었다. 퍼거슨이 맨유에서 오랜 세월 유지한 규율과 권위의 바탕에는 기꺼이 팀에 생기는 구멍도 감수하겠다는 퍼거슨의 가차없음이 있었다.

6.3. 유망주 육성 및 선수를 보는 안목

알렉스 퍼거슨은 선수를 보는 안목과 육성 능력에서도 정상급이었다. 더욱 대단한 것은 이 점이 오랜 감독 생활로 인한 경험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감독 커리어 초반부터 갖고 있었던 재능이라는 점이다. 퍼거슨은 세인트미렌에서 자신에게 반항하는 1군 선수들 대신 유소년 선수들을 끌어왔다. 이때 발굴된 빌리 스타크는 미드필더로 대성해 세인트미렌에서 255경기 60골을 기록했고, 훗날 퍼거슨을 따라 애버딘으로 이적, 애버딘의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우승까지 함께했다. 윙어였던 피터 위어도 훗날 애버딘까지 퍼거슨을 따라갔다. 퍼거슨 부임 당시 18세였던 프랭크 맥가비는 퍼거슨 부임 이후 세인트미렌의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어 132경기 52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 유소년 시절 키가 작아 별 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자신이 방출되리라 생각했던 토니 피츠패트릭은 17살에 팀의 주장이 되었다. 특히 퍼거슨이 피츠패트릭에게서 무엇을 봤는 지는 몰라도, 그의 사람 보는 눈은 실로 날카로웠다. 피츠패트릭은 훗날 선수 은퇴 후 세인트미렌의 감독, 심지어는 CEO까지 역임하게 될 타고난 리더였다.

애버딘에서도, 퍼거슨은 항상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길 즐겼다. 이런 선수들을 알아보는 눈이 있고 성장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3부리그 하위권에 있던 세인트미렌, 변변찮은 트레이닝 시설도 없었던 애버딘, 20년 간 리그 우승을 못한 맨유 등 상황이 좋지 않은 구단에 부임해 반전을 꾀할 수 있었다. 유망주들은 가격이 싸거나 공짜였고, 열정적이라 팀 분위기를 바꾸는데도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내가 세인트미렌에서 2부리그를 우승했을 때 우리팀 평균연령은 19세였다. 나는 팀의 상황이 나쁘면 항상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줬고, 애버딘에서도 똑같이 했다.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기회를 감사히 생각한다. 둘째, 그들은 감독에게 충성한다. 셋째, 그들의 태도는 일관된다. 애버딘의 소년들은 환상적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링크

그리고 퍼거슨의 이러한 능력은 경력이 쌓이며 발전해 나갔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절정에 달했다. 맨유 부임 초기부터 유소년 팀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 퍼거슨이 맨유에서 영입한 소년들은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 네빌, 폴 스콜스였다. 이들은 'CLASS OF 92' 혹은 퍼기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며 축구 유소년 육성의 전설이 되었다. 이후에도 퍼거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소년들을 애용하였고, 이 능력은 당시 맨유의 항상 최고의 자리를 유지할수 있게 도와주었다. 침체되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팀내 유스 시스템은 부활하여 다시 천재들의 양성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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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2 황금 유스, 퍼기의 아이들
퍼거슨은 무너졌던 세 팀을 재건한 감독이었고, 그만큼 격렬한 리빌딩을 했다. 그 과정에서 퍼거슨이 현명하게 돈을 쓰지 못했다면 퍼거슨의 업적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퍼거슨이 피터 슈마이켈은 0.5M 파운드, 에릭 칸토나는 1M 파운드에 영입한 것은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물론 알짜 영입들만 한 것은 아니었다. 로이 킨이나 드와이트 요크, 리오 퍼디난드 등 쓸 때는 쓰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성공률이 좋았고, 27년 간 여러 번의 리빌딩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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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 2012/13(은퇴) 시즌,이적료 지출 순위
추가적으로 총 수익 대비 스펜딩을 감안하면, 퍼거슨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올레 군나르 솔샤르는 자국 노르웨이 내에서는 어느정도 알아주는 선수였으나 유럽에서는 무명이었고 퍼거슨은 당시 몰데 구단을 뒤집어 놓는 파격제시를 해 그를 올드 트레포드로 데려왔으며 처음에는 다들 반신반의 했으나 그는 중요할때마다 골을 넣어주며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선수가 되었고 13시즌 동안 활약하며 레전드로 남았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호나우지뉴 영입 실패이후 대체로 영입한 선수였다. 원래 어느정도 알아주는 유망주이긴 했으나 초반에는 프리미어리그의 특유의 거친무대에서 다소 고전하는 모습을 면치못하면서 언론은 퍼거슨에게 오류였다고 보도를 쏟아낸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그를 믿고 신뢰를 보냈으며 결국 호날두는 최고의 선수가 되었고 맨유의 전성기를 이끄는 선수로 성장한다. 그리고 2005년 2천6백만 파운드(한화로 약 330억)의 헐값으로 향후 몇시즌간 맨유를 이끌 박지성, 파트리스 에브라, 에드윈 반데사르, 네마냐 비디치 4명을 영입한 이적시 역시 아직까지 회자된다. 반데사르를 제외하고는 아직 전성기가 오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었으며 이들은 모두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94]

한 번의 기적을 만들어내는 감독들은 많지만, 대부분 그 세대가 끝나며 함께 무너지거나 그 업적이 다른 팀에서는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퍼거슨은 세인트미렌, 애버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연속해서 기적을 만들었으며, 맨유는 20년 간 정상의 위치에 있었다. 그 사이 퍼거슨은 매번 리빌딩에 성공했고, 리빌딩 와중에도 팀은 3위 아래로 내려가 본 일이 없었으며, 결국에는 다시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퍼거슨의 유망주 육성 능력과 현명한 선수 영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업적이었다.

6.4. 동기부여 능력

천재다. 그냥 천재였다. 일단 선수의 심리를 가장 적절하게 자극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박살나는 날들이 있었다. 영감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경기를 하면 하프타임 때 문을 부숴져라 닫고 나서 ,"2-0? 2-0? 야 이 좆같은 새끼들아. 지금 솔직히 양심적으로 6:0 7:0은 나와야 하는거 아니야? 니네 그 따위 공 찰래? 장난하냐? 그 따위로 할꺼면 때려쳐!"라고 소리쳤다. 시합이 잘 풀리는 날도 영감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건 완벽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완벽한 게임을 위해, 그리고 영감을 위해 달렸다.
리오 퍼디난드
퍼거슨의 또 다른 능력은 선수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최선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증언들이 많은데, 하나 같이 겹치는 언급은 퍼거슨이 마치 선수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선수들을 조종했다는 부분이다. 퍼거슨은 동기부여를 위해 때로는 진실을 왜곡하고 선수들을 고의로 자극했다.

특히 감독 경력 초반에는 정말 별 짓을 다했다. 이스트 스털링셔에서 같은 동네 팀 폴커크를 상대로 패배하자 분했던 퍼거슨은 한 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당시 유일한 그 지역 신문이 '폴커크 헤럴드'였는데 발행부수 4만부 짜리 작은 신문이었다. 퍼거슨은 이 신문을 들먹이며 "언론이 부당하게 폴커크 편만 들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음에 폴커크를 만나 2-0으로 이겼다. 또 세인트미렌 시절 구장이 텅텅 빈 게 선수들의 동기부여에 악영향을 준다고 생각한 퍼거슨은 벤 차량에 확성기를 달고, 직접 마이크를 든 채로 경기를 홍보하고 다녔다. 이는 실제로 효과가 있어 관중 수가 많이 증가했다고 한다. 출처 애버딘에서도 선수들이 패배주의에 빠져있고 자꾸 술을 마시자 라커룸에서 콜라병을 집어던져 산산조각 냈으며, 눈 앞에 있는 걸 전부 걷어차는 등 일부러 과격한 행동을 했다. 나아가 자신도 글래스고 출신이면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글래스고 클럽인 셀틱, 레인저스에만 호의적이라고 연설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부임하고 감독 경력이 20년이 넘어가고서 부터는 덜 과감했지만 더 교묘했다. 뉴캐슬과의 경기를 앞두고 갑자기 퍼디난드를 구석에 몰아세웠다. 그러더니 말했다고 한다. "리오, 내가 휴즈랑 친하잖아, 언론에 나온건 아니고...벨라미가 마크 휴즈한테 그랬대. 솔직히 너 별거 없다고." 리오 퍼디난드는 벨라미에 대한 적개심에 차 경기에서 완전히 그를 봉쇄했다. 퍼디난드는 자서전에서 나중에서야 자신이 퍼거슨에게 조종당한 걸 깨달았다고 적었다. 한편 반 페르시의 폼이 떨어졌을 때, 반페르시가 강하게 몰아붙여서 잘하게 될 선수는 아니라고 생각한 퍼거슨은 오히려 반 페르시에게 "골을 못 넣어도 걱정하지 마라. 넌 뛰는 것만으로도 팀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다독였다. 그리고 팀 미팅에서는 '반 페르시는 매 경기 기가 막히게 공간을 찾아 들어가고 있는데 니 놈들이 공을 제대로 안찔러주고 있다. 제정신이면 반 페르시에게 패스해라.'라고 오히려 다른 선수들을 다그쳤다. 다음 경기에서 선수들은 의식적으로 반 페르시에게 패스를 많이 했고, 득점 찬스를 많이 얻은 반 페르시가 득점하면서 슬럼프에서 빠져 나왔다.

다소 가혹한 일도 했는데 파트리스 에브라의 가족들이 경기를 보러 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를 벤치에 앉혀놓고 쓰지 않았다. 집에 돌아간 에브라는 괴성을 지르며 분노했다고 한다. 다음 경기 퍼거슨은 에브라를 선발로 썼고, 에브라는 화풀이를 하듯 크게 활약했다. 박지성도 퍼거슨의 이런 심리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부상도 회복하고 몸도 너무 좋은데 퍼거슨은 훈련 때마다 컨디션 어떻냐고 물을 뿐 박지성을 쓰지 않았다. 이런 일이 세 번 반복되자 아무리 박지성이라도 화가 났고, 퍼거슨이 또 훈련 때 몸 어떻냐고 물어보자 살짝 화난 기색을 드러냈다. 다음 경기 퍼거슨은 박지성을 선발로 썼고, 마찬가지로 분노에 찬 박지성은 골까지 기록했다. 에브라와 박지성의 일화 둘 다 박지성의 자서전에서 언급되는데, 박지성은 "퍼거슨 감독이 정말 나의 이런 심리를 읽고 있었다면 나는 그가 진정 천재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타팀을 깎아내리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아스날과의 경기에서는 "아스날 선수들은 아가야. 박살내버려."라고 말하거나, 리버풀과의 경기에서는 "솔직히 지금 리버풀이 리버풀이냐?"라고 말하며 선수들을 자극했고, 선수들이 라이언 긱스를 잘 따른다는 것을 알고 긱스가 잘못한 게 없어도 야단치기도 했다. [95] 그리고 맨유가 경기를 잘했는데 졌으면 분위기를 전환하고 외부에 적을 만들어 팀을 하나로 다시 뭉치게 하기 위해 일부러 심판이나 타팀 감독들과 싸웠다고 한다.[96]

6.5. 매우 유동적인 선발 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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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5-0 위건 애슬레틱 FC (공격수 2명 미드필더 6명 수비수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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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fL 볼프스부르크 1-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공격수 2명 미드필더 7명 수비수 1명)[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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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유나이티드 FC 0-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공격수 4명 미드필더 4명 수비수 2명)[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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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1 레알 마드리드 CF[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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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2-0 아스날 FC (공격수 2명 미드필더 1명 수비수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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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쿼드로 승점 11점차 2012-13 시즌 EPL 우승[101]
미드필더였던 선수들을 다 수비에 몰아넣어도 아스날 등을 상대로 승리하거나 지금 보면 어떻게 저런 멤버들로 우승을 하지? 라는 생각을 갖게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을 보면 정말 천재.[102] 이것들말고도 2009-2010 시즌 중후반 박지성을 공격형미드필더처럼 중앙에서 써먹는 전술로 재미를 본 적도 있다. [103]

선발라인업뿐 아니라 경기중에도 포지션을 파괴하는 운영을 여러번 선보였는데 이런식으로 승리한 경기도 많지만 이런 운영을 해서 진 적도 많다. 2010-2011시즌 박지성의 아시안컵 종료후 복귀전인 웨스트햄전에서 에브라의 핸드볼 2번으로 0:2로 밀리자 공미로 나온 긱스를 레프트백으로 놓고 그 자리에 최전방의 루니를 놓고 치차리토를 넣은 후 또 왼쪽의 박지성 자리로 루니를 옮기고 베르바토프를 투입해서 루니의 헤트트릭으로 역전승했다. 후반기 아스날전에는 경기가 안 풀리자 박지성ㆍ루니를 중앙미드필더로 넣었는데 패했고, 2011 UCL 결승에서도 스코어에서 밀리자 라이트백 파비우 자리에 발렌시아[104]를 내리고 나니를 넣고 중앙의 긱스와 왼쪽의 박지성의 위치를 바꿨지만 패했다.

6.6. 총평

알렉스 퍼거슨은 전술적 통찰력, 동기부여 능력, 유망주 육성능력, 리빌딩 능력, 조직 운영 능력, 꾸준함, 심리전 능력, 선수 관리 능력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뛰어난 감독이었다. 그는 다재다능했기에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해결 방안을 찾아내고 실행할 수 있었다. 이스트 스털링셔에서는 골키퍼도 없던 팀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세인트 미렌에서는 3부리그 중위권을 멤돌던 팀을 고작 3년 만에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애버딘에서는 90년 간 이어지던 셀틱과 레인저스라는 소위 올드 펌의 독주를 그들의 10분의 1 예산으로 붕괴시켰다. 또 유럽 클럽 랭킹 106위였던 애버딘이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 마드리드을 꺾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과 UEFA 슈퍼컵을 우승했으며, 국내리그에서도 고전하던 팀이 클럽 랭킹 6위의 유럽 강호가 됐다.[105] 맨유에서는 25년 간 리그 우승이 없던 팀이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20년 간 리그 우승 13회를 비롯해 총 38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도록 이끌었다. 맨유를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구단이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축구 클럽 위치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며, 헤이젤 참사 이후 추락했던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를 다시 일으킨 최대 공헌자로 이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퍼거슨은 리누스 미헬스-아리고 사키-펩 과르디올라 같이 축구 전술의 흐름을 바꾼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매 시대 새롭게 등장했던 강적들과의 맞대결에서 고전했다.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아르센 벵거에게 무패우승을 내주었고, 트레블을 달성한 1998-99시즌에도 0-3 패배를 두 번 기록했다.[106] 2000년대 중반에는 주제 무리뉴가 등장했고, 퍼거슨은 그와의 맞대결 전적에서 역시 밀렸다. 이후 퍼거슨은 펩 과르디올라에게 고전하며 챔피언스리그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마셨다. 퍼거슨이 위대한 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 나와 압도적으로 한 시대를 지배했거나, 맞수들과의 대결에서 많이 승리하는 전술의 스페셜리스트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알렉스 퍼거슨이 진정으로 위대했던, 그리고 가장 무서웠던 건 그가 구단의 성공을 총체적으로 이끌 수 있는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퍼거슨은 전술적으로도 매우 뛰어났고, 그랬기에 40년의 커리어 동안 도태되지 않았으며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키고 그걸 유지해냈다. 하지만 감독 퍼거슨의 진가는 훨씬 넓은 범위에서 발휘됐다. 그는 침체되거나 몰락한 조직을 성공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꾸는, 시스템을 재설계할 수 있는 감독이었다.

퍼거슨은 선수단의 헤드코치였다기 보다는 구단의 총체적인 매니저였다. 퍼거슨이 감독직을 시작하던 때는 현재처럼 보드진의 업무가 분업이 철저히 되어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107] 더욱이 퍼거슨은 부임하는 팀마다 침체되어 있었고 당연히 그곳에는 좋은 보드진이 있지 않았다. 따라서 퍼거슨의 활동 범위는 축구장 안으로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전권을 행사했고, 현재는 대부분 디렉터를 비롯한 보드진들의 영역인 유소년 정책 개혁 및 영입, 선수 방출 및 영입과 재계약, 구단 스태프들의 개편과 선수들의 사생활 관리, 구단 사무까지 광범위한 분야을 주도했다.[108] 만약 그가 단순히 대단한 전술가로, 단지 축구 구단이라는 조직의 한 부분이었다면 세인트미렌, 애버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업적을 이뤄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퍼거슨은 조직의 관리자로서 활동하면서 구단을 재편했고, 침체되고 몰락했던 조직에 멘탈리티를 주입했으며 체계적이고 성공적인 시스템을 창조해냈다. 그리고 동시에 전술가, 승부사로서도 정상급의 기량을 보여주며 팀을 성공으로 이끌었다.[109]

축구 감독은 팀의 성공을 위해 존재한다. 성공을 위해서는 승리해야 하며, 승리하기 위해 전술이 발달한다. 퍼거슨은 팀의 성공이라는 목표에 있어 가장 강력하고 범용성이 넓은 감독이었다. 퍼거슨이라면 그 팀이 몰락했든, 침체됐든, 정상을 유지해야 하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매 시즌 다양한 상태의 구단을 이끌었다. 파산 위기에 빠져 스쿼드에 8명 밖에 남아있지 않은 팀(이스트 스털링셔), 하부리그 중에서도 하위권 팀(세인트미렌 초기), 막 승격한 팀(세인트미렌 말년), 리그 중상위권 팀(애버딘), 침체된 명문(맨유 초기), 정상을 지키는 팀(맨유 전성기), 긴축 재정을 하는 팀(맨유 말년)이 퍼거슨 지휘 하에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알렉스 퍼거슨은 40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다양한 상황들을 마주해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종합적으로 알렉스 퍼거슨은 단순히 선수들을 관리하고 전술을 짜는 축구 감독으로서 대단했을 뿐 아니라, 축구 구단이라는 조직을 이끈 리더로서 위대했다. 퍼거슨은 여러 차례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조직을 물려받아 어떻게든 성공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갱생시켰고, 실제로 그 조직들을 성공시켰다. 성공한 후에도 변화를 두려워 하지 않으며 그 성공을 유지해냈다. 커리어가 증명하듯, 그는 자신이 맡은 조직이 어떤 상황에 있어도 성공으로 이끌 줄 아는 리더였다. 그의 지휘 아래 구단의 위상은 격상되었고, 수입 구조는 극적으로 바뀌었으며, 구단이 속한 리그의 명예가 수복되고 드높여졌다. 또 매번 우승컵을 들어올리기 힘든 구단에 부임했음에도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 되었다. 이러한 알렉스 퍼거슨의 업적은 축구 감독이 구단을 성공으로 이끈 사례의 정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역 당시에도 그 위상이 엄청났지만 은퇴한 후 맨유의 행보가 그가 얼마나 넓은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는지, 얼마나 어려운 일을 해냈던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21세기 들어 자본유입으로 구단들의 규모가 커졌고, 축구 전술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이에 따라 감독들은 전술의 스페셜리스트들이 경쟁력이 커지고, 경기장 밖 영역들은 프런트들의 분업과 권한이 강해지는 쪽으로 축구계가 변화했다.[110] 그러나 2004년 맨유를 인수한 글레이저 가문은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구단 구조 개혁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럼에도 퍼거슨이 감독일 때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구단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퍼거슨의 거대한 영향력이 클럽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축구계의 변화와 구단주의 무관심 속에서도 퍼거슨이 20년 간 구축해 놓은 시스템은 견고했다. 심지어 퍼거슨은 글레이저 가문이 구단 인수로 발생한 부채를 전부 맨유에 돌려 엄청난 빚이 짓누르는 와중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긴축재정으로 리그 정상에서 경쟁을 계속해나갔다.

하지만 2013년 퍼거슨이 은퇴했고, 글레이저 가문은 이때도 프런트 개혁에 무관심했다. 그들은 오히려 구단 단장에 축구팀 경영 능력이 없는 에드 우드워드를 앉혀 사태를 악화시켰다. 퍼거슨 은퇴 이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디렉터조차 없었고, 그나마 감독을 도와줄 수 있는 단장은 초보였다. 결국 후임 감독들은 프론트들의 부담 분산 없이, 퍼거슨이 져 왔던 과중한 책임을 견디지 못하고 연달아 무너졌다. 퍼거슨처럼 본인이 영입도 잘하고 유망주도 잘 키우면서, 전술적으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떼우며 리그를 우승하며, 팀의 기강도 유지하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111] 퍼거슨은 휠씬 힘든 상황에서 팀을 재건했고, 초기와 말년에는 예산에도 쪼들렸던 데 비해 후임들이 물려받은 건 세게에서 가장 부유하고 리그를 우승하던 팀이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퍼거슨은 정말로 대단했다. 맨유의 팬들도 퍼거슨이 사라지고 후임 감독들이 몇 번 실패하자 프론트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긴 시위 끝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에드 우드워드가 퇴임했고 풋볼 디렉터 직책이 생겼다. 그러나 후임 단장 아놀드와 풋볼 디렉터 머터프도 전문가라고 보기 어려운 내부 승진 인사인지라 불만과 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이 문제는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인수 사가에서 주요 입찰자인 카타르와 이네오스 양측이 모두 즉각적인 구단 내부 개혁과 새 디렉터를 약속하는 등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7. 퍼거슨 리더십

7.1. 포용력

퍼거슨은 편견이 없이 선수들을 감싸는 포용력이 있다. 몇몇 선수들이 사고를 쳐도 그 사고를 치는 것만으로 선수를 평가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베컴은 어린 시절부터 퍼거슨을 존경했고 아버지처럼 믿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퍼거슨은 선수들과 농담도 잘하고 경기에 승리하면 입이 귀에 닿을 정도로 큰 웃음도 짓는 등 선수들과 가까이 하면서도 요령껏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오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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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네빌과 나는 오랫동안 퍼거슨 감독 밑에서 축구를 해왔기 때문에 그가 선수들을 기용하는 교묘한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퍼거슨 감독은 주전에서 제외할 선수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잘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퍼거슨 감독의 태도만 가지고도 경기 출전 여부를 알았고, 그것을 가지고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했다. 이를테면 그 주에 감독이 유난히 신경을 써주면..."게리, 감독이 무척 신경 써주는데, 이번 경기는 분명히 못 나갈 것 같아." 라는 말을 자주 했다.
데이비드 베컴
퍼거슨 감독은 내가 할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선을 확실하게 정해준다. 꼭 우리 엄마 아빠같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내가 퍼거슨 감독을 처음으로 본 건 내가 13세 때 14세 이하 경기를 뛰고 있을 때다. 경기 후 퍼거슨 감독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잘했다. 꼬마야.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하면 나중에 큰 선수가 될 수 있을거야.' 나에게 그 말은 엄청난 말이었다. 퍼거슨 감독은 그렇게 유소년 선수들이 뛰는 곳에 자주 나타나 그들을 격려해주고는 했다.
웨스 브라운

퍼거슨은 그의 제자들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심지어 그가 내보내야 했던 선수들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한 번은 그가 다음 시즌에도 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던 어린 선수가 있었는데, 그는 슬프게도 맨유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퍼거슨은 자신이 다른 클럽을 구해주겠다고 했고, 10분 동안 그는 전화를 몇 번 걸더니 그 선수의 계약을 따냈다. 그가 그 선수에게 미안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 선수의 다음 팀이 결정된 것이다.
(잉글랜드 축구협회의 유스 규정에 대해) 프레이저 캠벨, 키에런 리차드슨, 필립 바슬리, 라이언 쇼크로스 등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하는 맨유 유스 출신은 상당수지만, 맨유의 눈높이에 맞는 선수들은 아니었다. 빛을 본 선수는 이들보다 훨씬 선배인 대런 플레쳐 이후 조니 에반스, 최근엔 대니 웰벡, 톰 클레버리 정도다. FA의 유스 규정은 최악이었다. '90분 룰(90-minute rule)'은 유스 시스템을 옭아맸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들을 찾기란 어려웠다.
90분 룰이란 각 클럽 유스 아카데미에서 1시간 30분 이내에 거주하고 있는 유스 선수들과만 계약할 수 있다는 조항. 이 룰로 인해 프리미어 리그의 클럽들은 유망주 영입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이 규정은 많은 클럽들로부터 반발을 샀고, 결국 2011년경에 폐지되면서 종전의 유스 계약 방식으로 회귀했다. 출처

또 게리 네빌은 레딩의 호텔에서 퍼거슨이 몇 명의 선수들과 맨유의 유스 팀에 있다가 지금은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을 쭉 적어내려가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 명단은 굉장히 길었는데 무려 60명에 달했다고. 퍼거슨은 이들을 모두 기억하려고 했다. 그에게는 어린 선수들을 퍼스트 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에 못지 않게 중요했던 것이 비록 맨유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 선수들이 축구 선수로서 성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퍼거슨의 아래에서 맨유 선수로 뛰고 나면 클럽을 떠나게 되더라도 맨유 선수로 남게 되는 것이다.

7.1.1. 에릭 칸토나

에릭 칸토나는 그간 이곳저곳에서 말썽을 일으켰던 트러블 메이커였다. 실력은 뛰어났지만 그를 감당할 수 있는 구단이 없었다. 충성심은 애초에 바랄 수도 없었다. 마르세유와 계약을 할 시 칸토나는 베르나르 타피 회장(국회의원)에게 대들었으며, 후에 이렇게 말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헤어진 뒤 나는 내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칸토나가 제어가 불가능한 선수라는 것을 그 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를 프랑스 내에서 원하는 클럽은 없었다. 전력 증대가 급했던 리즈 유나이티드는 칸토나를 영입했고, 칸토나는 팀에 18년 만에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또 다시 리즈의 감독이었던 하워드 윌킨스와의 불화로 맨유에 입단했고, 윌킨스는 칸토나를 120만 파운드에 시원하게 넘겼다.

칸토나는 프랑스 축구계의 앙팡테리블이라고 불리던 존재였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골에 대한 집중력, 공간 창출 능력을 겸비한 공격수였지만 프랑스 대표팀 감독의 전술을 공개석상에서 비난하거나 심판에게 유니폼 상의를 벗어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팀 훈련 외에도 개인 훈련을 거르지 않는 성실파였는데, 수위가 워낙 혹독한 게 아니었다. 그의 장기는 절묘한 볼 컨트롤과 페인팅, 그리고 페널티 박스 외곽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중거리포였다. 칸토나는 출중한 기량으로 찬사를 많이 받았지만, 여러 가지 사건을 벌이며 신문 기사 1면에 단골로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사고들 가운데 가장 큰 대형 사고는 1995년 1월에 터졌다.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 도중 상대 선수를 향해 킥을 날린 칸토나는 퇴장 명령을 받아 필드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장에서 나가는 도중 상대 서포터로부터 패드립[112]을 들은 칸토나는 관중석으로 돌진해 쿵후를 연상하게 하는 이단 옆차기를 날리는 행동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칸토나는 2주간의 구류 처분을 받았고, 결국 쿵후의 제왕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과 함께 9개월간의 출장 정지와 120시간의 봉사 시간을 채워야 했다. 당시 모두가 그를 비난했고, 필드를 평생 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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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토나가 있으면 우승했고 칸토나가 없으면 눈 앞에서 트로피를 놓쳤던 맨유

하지만 단 한 사람만이 온갖 비난을 감수하고 칸토나의 편에 서 있었는데, 바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었다. 결국 퍼거슨과 팬들의 지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었던 칸토나는 달라졌다. 이 시기쯤 맨유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맨유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징계 기간 동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칸토나에게 러브콜을 날렸는데, 칸토나는 "나는 맨체스터에 뼈를 묻겠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1995-96 시즌, 9개월간 필드를 떠나있었던 칸토나가 합류했다. 당시 맨유에는 팀의 주축이었던 폴 인스가 팀을 떠났고, 주전이었던 마크 휴즈와 칸첼스키스도 타 팀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퍼거슨의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라이언 긱스개리 네빌, 필 네빌,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등의 유망주를 기용했을 때였다. 재능은 뛰어나나 어린 선수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카리스마가 필요했고, 칸토나가 적임자였다. 승부욕과 근성, 특유의 카리스마로 상대를 압도하고 동료들을 이끌었다. 슈마이켈과 로이 킨도 칸토나의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결국 칸토나는 퍼거슨의 아이들과 함께 1996-97 시즌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1995년 어느 날 아침, 주장인 스티브 브루스가 15,000파운드짜리 수표를 들고 드레싱룸에 나타났다. 맨유 퍼스트팀 선수들이 축구 비디오에 다 같이 출연했는데, 이게 그 출연료였고 이 돈은 18명이 나눠 가져야만 하는 돈이었다. 똑같이 나눌지 출연 비중으로 각자 나줄지. 대체 어떤 방법으로 18명이서 이 돈을 나눠 가질지에 대해서 옥신각신하다가 결국에는 다수결 투표 끝에 Winner takes all 한 사람에게 몰아주기로 결론이 났다. 물론 여기에 응하기 싫은 사람도 선택권을 줬는데, 800파운드(약 150만원)를 자기 몫으로 챙기고 내기에서 빠질 수 있었다. 당시 800파운드라는 돈은 어린 선수들(데이비드 베컴, 개리 네빌, 필 네빌 등)에게는 월급의 반에 해당되는 엄청 큰 돈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내기 대신 800파운드를 선택했다. 어린 선수들 중에는 오직 폴 스콜스니키 버트. 이 두 사람만이 내기에 참가해 잭팟을 노려보기로 결정했다. 12,000파운드, 과연 이 돈은 누구에게로 갈 것인가. 마침내 내기에 참가한 각 선수들의 이름이 적혀있던 쪽지를 모자에 넣어 섞고 그 중 하나를 뽑았을 때, 모자 속에서 나온 쪽지에는 에릭 칸토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승자 칸토나는 그 12,000파운드 수표를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칸토나는 수표 두 장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거기에는 폴 스콜스와 니키 버트, 이 두 선수들의 이름이 각각 적혀져 있었다. 칸토나가 말하길 "이 돈은 자칫하면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위험한 내기에 용기내어 참가한 두 어린 선수들에게 내가 주는 상이다." 이게 바로 진짜 칸토나의 모습이다. 무슨 행동을 할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특별한 클래스가 있으며 그 자신보다 훨씬 더 간절히 그 돈이 필요할 두 어린 선수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
로이 킨, 본인의 자서전에서 칸토나에 대해 쓴 말

칸토나가 맨유에 있던 기간 동안, 그가 없던 시즌은 정말 너무도 아쉽게 승점 1점차로 트로피를 눈 앞에서 놓쳤다.[113] 올드 트래포드의 팬들은 칸토나가 있고 없고가 얼마나 다른지 경험했고 그의 영향력을 온몸으로 느꼈기에, 그를 더 사랑할 수 밖에 없었고 추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베컴도 FA컵 우승을 하고 다 함께 축하 파티를 했는데, 베컴의 아버지가 칸토나랑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칸토나와 한 테이블에서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얼마나 흥분했는지 자신의 아버지가 바로 저 순간을 위해서 자신을 그렇게 미친듯이 연습시켜서 맨유 선수를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칸토나는 1997년 5월 11일 웨스트 햄과의 경기를 끝으로 더 이상 경기를 뛰지 않았다. 나이가 많았거나, 실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만 31세에 불과했다. 단지 그는 정상에서 멈추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팬들이 나의 이름을 연호하는 노랫소리가 자랑스러웠다. 하지만, 내일 그 소리가 멈출까 봐 두려웠다.
(칸토나가 은퇴 시 퍼거슨이 쓴 편지) 우리가 마지막 대화를 나눈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네. 그리고 난 늘 내가 너에 대해 품고 있는 존경의 표시로 이 편지를 꼭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어. 우리가 훈련을 다시 시작했을때, 난 다시 너의 몸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다려왔어. 그런데 그건 단지 나의 희망이었고 현실이 아니었지. 우리가 Mottram에서 만났을때, 난 너의 눈의 눈을 보고 알 수가 있었어. 맨유에서의 너의 시간이 끝났음을 말이야. 그래도, 난 여전히 네가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너의 아버지와 나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해,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말이지. 한가지 네게 바라는 건 늘 활동적이고 몸 상태를 최고로 유지해야한다는 사실이야. 나는 내가 32살의 나이에 스털링 샤이어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어. 그땐 난 늘 훈련과 선수에 대한 코치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 나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선 잊어버리고 말이야. 그리고 6년 후, 어떤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을때, 난 다시 나의 예전의 몸상태를 되찾기 위한 훈련을 시작했어. 끔찍한 시간이었지. 그러니까 너도 너의 몸 상태를 늘 최고조로 유지시켜야 할거야. 난 당연히 네가 우리의 매 경기 결과들을 지켜볼 것이라는 걸 확신해. 그리고 너를 대체하기 위한 선수로 쉐링햄을 데리고 온 것 또한 알거야. 우리가 꽤 잘하고 있다는 거 알 수가 있겠지? 그런데 테디 셰링엄은 그가 토트넘에서 뛰었던 자리를 찾는데 힘겨워하고 있고, 가끔 너무 깊숙한 위치에서 뛰려는 경향이 있어. 그래서 우린 뭔가 수정을 가해야할 것 같아. 새로운 선수들은 가끔 우리의 레벨에서 뛰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해. 매경기가 마치 대회 결승전에서 만난 상대들과도 같잖아. 그래서 난 테디 셰링엄이 우리 팀을 위해 해내길 기대하고 있어. 난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 우리가 시즌 말에 고민했던 거 있잖아. 맨유에겐 분명 탑클래스의 공격수가 필요하고 그러한 공격수의 부재는 분명 문제로 남을거라고. 맨유의 재정 규제가 앞으로도 늘 우리가 최고의 선수를 OT에 데리고 오는데에 있어 늘 걸림돌이 될거니까. 바로 그 급여 체계때문에. 그런데 생각해보면 또 웃긴거지. 왜냐하면 네가 바로 그 탑클래스의 선수인데. 그럼 너를 정상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또 다른 선수를 사야한다고 말하는 게 되니까. 내가 만약 젊었다면, 분명 좀 다르게 바라봤을 수도 있어. 어찌됐든, 난 팀을 짊어 지고 나아가야하고. 어떠한 마음의 장벽도 담아두지 않을거야. 그리고 난 항상 내 선수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고. 계속 그러길 희망해. 그리고 늘 어린 칸토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야. 정말 꿈같은 일이 되겠지! 편지를 마치면서, 앞으로도 우리가 담소도 나누고, 한잔도 하고, 아님 뭐 식사라도 하고...그렇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고 싶어. 안그래도 클럽이 다가오는 만찬에 널 초대했다는 얘길 들었어. 난 그 날 만남에 대해 네가 이것저것 신경을 써줬음 싶어. 근데 뭐, 그런것보다 여전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맨유에게 얼마나 훌륭한 선수였고. 그리고 선수로써 네가 나를 위해 행했던 모든 노고에 대해 얼마나 감사함을 가지고 있는지를 상기시켜주는 거야. 네가 그냥 차 한잔을 하러 오든, 성대한 행사같은 거 말고 그냥 친구로 대화를 하러오든, 넌 언제든지 OT에서 환영 받을거야. 사실 그러한 단순한 것들이 내겐 가장 의미깊은 일이 될거고. 에릭, 넌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언제든지 날 찾을 수 있어.그리고 이젠 넌 더 이상 나의 선수가 아니지만, 너에게 소중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7.1.2. 웨인 루니

당신들은 19살 때 어떤 청소년이었지? 나는 글래스고에서 노동자 시위에 참가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루니의 난폭한 성격에 대해 기자들에게 질문을 받자 퍼거슨이 한 대답[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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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 루니 시절
과거 퇴장 머신이라고 불리던 악동 루니. 루니의 잦은 성질 폭발에 화가 난 퍼거슨은 당근과 채찍을 내리며 공을 들였고, 결국 루니는 퍼거슨의 의도대로 맨유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잡아 팀을 이끄는 기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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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님 루니 쓰담쓰담 출처
(루니의 이적설이 있었을 때) 오늘 루니가 좀 주위를 둘러보길 바랍니다.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군요. 여기 말고는 갈 곳이 없어요. 유럽의 다른 클럽으로 떠난 선수들을 본 적이 있죠. 그리고 그들은 항상 모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돌아오고 싶어 하더군요.
게리 네빌#

7.1.3.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호날두는 입단 당시 스포르팅에서 썼던 번호인 28번을 원했지만, 퍼거슨에게 받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7번은 그로서는 큰 부담감이었다.
2003~2004시즌 리그 29경기 4골 / 맨유 리그 3위
2004~2005시즌 33경기 5골 / 맨유 리그 3위
2005~2006시즌 33경기 9골 / 맨유 리그 2위 (초기 스탯)
당시 호날두는 프리미어 리그 특유의 거친 무대에서 다소 고전하는 모습을 면치 못하면서 언론은 퍼거슨에게 오류였다고 보도를 쏟아냈다. 하지만 퍼거슨은 호날두는 세계 최고가 될 테니 지켜봐 달라며 그는 잠재력이 있는 선수이며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라며 언론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이렇듯 퍼거슨은 호날두에게 무한한 신뢰하는 모습을 보이며 언젠가는 최고가 될 것임을 자부했다.

또한 호날두가 선수 생활 최대 위기를 맞았을 때 끝까지 그의 옆에 있었던 것도 퍼거슨이었다. 그는 2006 FIFA 월드컵 독일당시 웨인 루니의 퇴장 때에 심판에게 가서 루니의 퇴장을 유도했다는 이유로 잉글랜드 언론과 국민들의 엄청난 비난거리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홈에서도 관중의 야유가 쏟아졌다. 거기다 그는 이전부터 프리미어 리그에서 최고 수준의 시뮬레이션 액션 메이커인 일명 'Diver'라고 불리며 맨유를 제외한 타 팀의 수많은 팬들에게 집중포화를 받고 있었던 상황이어서 그는 순간적으로 이런 돌출발언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 뛰기 힘들다. 맨체스터를 떠나야 할 것 같다. 나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는데 (잉글랜드 팬들과 언론이) 나에게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2, 3일 안에 어디로 떠날지 결정하겠다. 엄마 당분간 잉글랜드에 오지마세요.[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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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를 다트판으로 만들 정도로 험악했다.

그때 호날두를 감싸고 나선 이가 퍼거슨이었다. 퍼거슨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루니의 퇴장은 호날두의 잘못이 아니라고 거듭 주장했다. 잉글랜드 팬들의 홀대를 감수하며 호날두는 맨유는 항상 자신을 지지했고 자신을 위해 존재했다면서 자신은 맨유에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자신을 알아주고 믿어주는 퍼거슨 감독에게서 어릴 때 받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결국 호날두는 맨유에 잔류했고, 케이로스 코치의 말마따나 훈련 종료 후에도 한 두시간 더 개인기 연습을 하는 열성을 보인 끝에 현재 최고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출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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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기타임. 각도까지 제대로 배운 애제자

퍼거슨은 호날두를 얼마나 데리고 있을지 케이로스 코치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케이로스 코치는 "알렉스, 당신이 쟤한테서 5년간 뽕을 뽑는다면, 대박입니다. 포르투갈 선수들이 타국(예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같은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으로 17살에 진출해서 5년 동안 머물렀던 전례가 없어요." 라고 말했다고. 퍼거슨은 회고하건데 상당히 괜찮은 결과물이었다고 평했다.
퍼거슨은 내게 정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에요. 지금까지도 우리는 정말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엄청 자주 대화해요. 서로 문자도 보내구요. 우리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대해 얘기해요. 예를 들어 최근에 UEFA 슈퍼컵에서 우승했을 때 퍼거슨이 제게 'Man of the Match'를 시상했죠. 리스본에서 챔스 우승을 했을 땐 내가 도핑테스트를 받으러 갈 때 그가 동행했어요.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사람이고 친한 친구예요. 함께한 모든 감독님들 중 우정을 나눈 사람은 퍼거슨이 유일해요. 페예그리니와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했고 안첼로티와도 좋은 관계를 갖고 있어요. 하지만 진정한 관계를 맺고 주기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은 퍼거슨 뿐이에요.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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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까지도 호날두와 퍼거슨은 서로를 아끼고 있다. 2021년 여름, 호날두의 맨체스터 시티 이적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도 그에게 연락하여 마음을 돌리고 맨유로 금의환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도 다름 아닌 퍼거슨이었다.

7.2. 리빌딩

퍼거슨은 클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맨유라는 클럽은 항상 감독이 가장 중요한 인물인 곳이라는 신념을 항상 유지해왔다.
내가 더 이상 맨유의 억만장자 축구선수들을 통제할 수 없으면, 난 끝난 목숨이다. 그래서 난 절대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리빌딩에 대해) 열심히 뛰었던 선수를 내보내는 게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든 증거는 필드에 있다. 선수의 기량이 저하되고 있는 걸 본다면, 2년 뒤에 어떨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축구 매니지먼트는 결국 선수에 관한 모든 일이다. 감독은 내가 선수들보다 잘 뛸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선수들도 내가 감독하면 더 잘하겠다고 생각한다.
(리빌딩 때문에 퍼거슨이 판니스텔로이를 쫓아내듯 이적시켜 버린 것에 대해) 퍼거슨이 새로운 팀을 리빌딩 하고 있을 때, 그는 기꺼이 그와 같은 일을 하죠. 그에게는 팀이 최우선이에요. 그는 항상 그 말을 했고 그가 제일 많이 반복한 말이죠. 그가 한 일은 충분히 납득할 만 했어요. 저도 받아들였구요. 저는 레알 마드리드로 떠나 그곳에서 훌륭한 4년을 보냈고, 그도 그의 클럽을 더 성장시켰죠. 유나이티드에 대한 내 종합적인 느낌은 이거에요. 그곳에서 훌륭한 5년을 보냈고, 감독님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오늘(퍼거슨 동상 오픈 행사) 돌아오기를 원했다는 거죠. 그가 제게 줬던 기회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거든요. 물론 결별할 때의 방식에 대한 감정들이 있지만, 그는 선수들에게서 최고를 이끌어 내는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마찬가지 일을 했구요.
뤼트 판니스텔로이

퍼거슨은 선수들을 다룰 때는 어느 정도 관용의 모습을 보인다. 한 번씩 선수들끼리 펍에 가서 술을 마셔도, 나이트클럽에 가서 놀더라도 개의치 않는다. 한 번씩 팀플레이에 어긋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두세 번의 질책 이외의 별다른 반응은 없다. 어쩌다 그런 플레이가 비난을 받을 때면 한 번씩 앞장서서 선수의 플레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 주고 경쟁에서 밀려서 팀을 떠나게 되더라도 최대한 곱게 보내주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아버지 같이 인자했던 퍼거슨도 선수단의 위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터질 때만큼은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다.

7.2.1. 로이 킨

대표적인 예가 MUTV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팀원들을 디스했던 로이 킨인데, 아무리 킨이 주장이라지만 특정 선수들에게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대놓고 디스를 하는 데에 있어서 퍼거슨은 킨이 감독의 위치를 침해한 것으로 여겼고 결국 키노게이트가 터진 지 일주일 만에 킨은 맨유와의 계약을 종료할 수밖에 없었다.
(유벤투스전 경기를 보고) 그날 로이 킨의 경기력은 내가 지금까지 본, 한 선수로부터 나온 가장 강인하고 인상적인 플레이였다. 그는 마치 '경기에서 지느니 탈진해서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한 선수처럼 경기장의 모든 잔디를 밟고 다녔고, 바로 그의 그런 모습이 우리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줬다. 그런 선수를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느꼈을 정도였다.[116]
로이 킨은 1인 엔진룸이며, 다른 선수들 2명이 할일을 혼자서 하는데다, 경기가 가라앉았을때 그는 혼자서 스타디움의 관중을 기립시키는 선수다. 내가 지도한 최고의 선수.
로이 킨은 내가 프리미어 리그에서 겪어본 미드필더 중에서 가장 터프했다. 우린 서로 자주 투닥거렸지만 그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선수로 남아있다. 로이 킨은 카리스마가 넘친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싸울 줄을 안다. 그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권리를 위해 싸우며, 그는 승리자로 남아있다.
파트리크 비에라
킨은 맨유에서의 짬밥이 커지면서 점점 라커룸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했고, 그날 킨의 기분에 따라 라커룸의 분위기가 좌지우지 되었다고 한다. 결국 키노게이트[117]가 터진 것. 키노게이트가 터진 후 케링턴에 모여있는 선수들은 킨을 보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헤이", "와썹" 이라고 말하면서 몸을 풀었고, 선수들이 일부러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걸 본 킨은 폭발하며 "니들도 남자들이면 나한테 화났을꺼 아냐, 그럼 나한테 한놈이라도 먼저 와서 말을 하든가, 여태 가만히 있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고 있냐! 뭐라고 말들을 좀 해봐!"라고 말했다. 이때 퍼거슨이 나타나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킨은 물러서지 않았다. 둘은 합의 후에 전 선수단이 모인 자리에서 MUTV 비디오 인터뷰 테이프를 틀었고, 킨은 팔짱을 낀 채 그 자리에 산처럼 서서 함께 비디오를 지켜보았다. 퍼거슨은 주장으로서 팀의 사기를 저하시켰으니 사과하라고 했고, 이에 킨은 "나는 사과할 게 없다, 승리의 의지를 잃고 자신과 팀메이트들을 실망시킨 선수들은 스스로에게 사과해라"라고 대꾸했다. 결국 퍼거슨은 약 15일 동안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고 고심 끝에 킨을 팀에서 떠나보낸다.
맨유를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축구에 대한 사랑을 잃었다.
로이 킨
맨유를 떠난 킨을 영입한 당시 셀틱 FC의 감독은 퍼거슨의 제자인 고든 스트라칸이었다.[118] 영상 후에 킨이 선덜랜드 AFC의 감독으로 부임하자 퍼거슨은 맨유의 선수들을 보내주기도 했지만, 킨이 자서전에서 퍼거슨을 아주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아직도 이 둘의 사이는 굉장히 안 좋은 편이다.

7.2.2. 야프 스탐

자서전을 발표하며 팀원들을 디스했던 야프 스탐도 있다. 맨유 수비진의 핵이었던 스탐은 1999년 프리미어 리그, UEFA 챔피언스 리그,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3관왕에 오르는 등 퍼거슨과 함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2001년에 터진 자서전 파문으로 인해 SS 라치오로 쫓겨나듯 이적했다.[119] 스탐은 집을 고치며 맨유 생활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이적에 힘들었다고 한다.
(스탐을 판 것에 대해 퍼거슨이 한 말) 라치오에게 내가 먼저 18.5m 오퍼를 넣었지. 그들은 "18.5m? NO, 16m? YES" 라고 했었고, 나는 거절할 수 없었어. 스탐의 나이가 벌써 30세의 나이였거든. 나는 만약 우리가 1년 정도 로랑 블랑을 얻을 수 있었다면...이라고 생각했어. 스탐이 이적한 뒤, 웨스브라운과 존 오셔 같은 젊은 선수들을 데려왔었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패였어. 야프와 나는 같이 잘 지내. 네덜란드의 아약스 토터먼트에서 있었던 마지막 시간에도 통화를 했어. 스탐과 나는 오랫동안 이야기했어. 괜찮았어.
스탐: 나는 클럽이 나를 이적시키기를 원하는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빠른 이적 때문에 퍼거슨이랑 갈등이 생겼습니다. 어느날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죠. 퍼거슨의 비서였어요. 그녀는 퍼거슨을 바꿔줬고, 영감은 '어디있니'라고 물었어. 내가 '집 근처 주유소'라고 말하니 그는 '거기서 기다려'라고 말한 뒤 곧장 차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왔었죠. 집 근처 주유소까지 온 퍼거슨은 내게 '빨리 라치오로 이적해줄 수 없을까'라고 물어보았어요... 출처
또한 당시 스탐의 아킬레스건 부상도 이적에 영향을 끼쳤는데, 첫 두 시즌에 51경기씩을 소화하다가 바로 다음 시즌인 2000-01 시즌에는 평시즌의 절반도 못 미치는 23경기에 출전하는 데에 그쳤다. 이적 시즌인 2001-02 시즌에는 2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하며 퍼거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스탐) 지도를 하다 보면 왜 감독이 어떤 특정 시기에 확고한 결정을 내리는 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설령 선수가 부상을 달고 있으면 수개월 정도는 경기에 나설 수 없죠. 그리고 선수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예전의 기량을 찾을 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선수는 거절하기 힘든 또 다른 클럽의 제안에 받아들일지도 모르죠.
(레딩의 공식 웹사이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선수 시절 함께 일했던 감독들 중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 알렉스 경은 이미 세계적으로 축구계에서 이름을 떨친 분이죠. 제가 맨유에 합류한 1998 시즌이에요. 하지만 그는 감독으로서도 계속 성장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일하면 감독으로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는데 도움이 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죠.
야프 스탐
어렸을 때부터 맨유의 팬이었던 스탐은 은퇴한 지금도 맨유의 경기를 즐겨본다. 맨유에서 스카우트직으로 일한 적이 있으며, 2016-17 시즌에 레딩 FC의 감독으로 부임함으로서 임시직 혹은 영구직으로 프로 구단에서 감독직 자리를 얻은 퍼거슨의 여러 선수들 중 31번째 선수가 되었다. 언젠가 맨유의 감독이 되는 게 그의 꿈이라고 한다.

7.2.3. 폴 인스

퍼거슨이 맨유의 감독에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초창기 시절에는 맨유의 레전드 중 한 명인 폴 인스가 자신이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퍼거슨에게 대들었는데[120]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인스는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맨유 팬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인스의 이적 때문에 맨유 팬들이 퍼거슨을 비난했는데도 퍼거슨은 폴 인스와의 뒷얘기를 함구했다. 당시 서포터스 협회는 '폴 인스 되찾기 캠페인'까지 벌였으나 퍼거슨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포터스를 차분하게 설득하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게 했다. 훗날 맨유의 다른 레전드인 스티브 브루스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인스를 비판하며 알려지게 되었다. 하여튼 이런 인스도 이적 후 퍼거슨과 사이가 나쁘진 않았는지 퍼거슨 은퇴 발표가 나자 그를 기리며 칭송했다.
큰 충격을 받았다. 퍼거슨 감독이 이룩한 업적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런 훌륭한 감독은 우리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퍼거슨 감독이 2주 전쯤 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2년 정도 더 맡는 문제를 논의했기 때문에 충격이 더 크다. 퍼거슨은 언제나 나를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
폴 인스, 퍼거슨의 은퇴 소식을 접하고

7.2.4. 뤼트 판니스텔로이

칸토나 이후 최고의 포워드라는 평을 들었던 뤼트 판니스텔로이는 2000년대 초중반 맨유와 아스날 FC의 라이벌리를 상징하던 선수였다.[121] 리그 득점왕 1회, 리그 우승 1회, 챔스 득점왕 3회로 당시 맨유를 상징하던 에이스였는데, 웨인 루니의 영입 이후 2005-06 시즌부터 출장 시간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122] 도화선은 2005/06시즌 칼링컵[123] 결승전이었는데, 이 당시 퍼거슨 감독은 반니를 선발에서 제외했고, 교체로라도 출전시켜줄것을 약속했으나[124] 끝끝내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결국 판니스텔로이는 퍼거슨에게 욕을 했다. 또한 그를 위로하기는 커녕 타 선수들을 챙기며 눈 앞에서 우승을 챙긴 감독의 반응에 대해서 판니스텔로이의 반응은 훈련에 불참하고 감독의 허락 없이 경기장을 이탈하는 등의 것이었으며, 퍼거슨은 그가 분위기를 흐리는 모습을 더는 지켜보지 못했다.
You XXXX. 판니스텔로이가 말했다. 난 항상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믿을 수 없었다. 케이로스 코치가 그에게 달려들었고 덕아웃은 다루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다른 선수들은 그에게 '얌전히 굴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끝이었다. 나는 절대 그를 (예전 모습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그 사건 후, 그의 행동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또한 퍼거슨의 말에 따르면 판니스텔로이는 맨유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같은 어린 선수들을 데리고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출처. 이후 2010년 판니스텔로이는 그의 행동에 대해서 후회했고, 이를 사과하기 위해 퍼거슨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드 트래포드 퍼거슨 동상 오픈 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다시 화기애애한 무드를 연출했다.
2001-2006, 219경기, 150골을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 밑에서 달성했어. 유니크한 특권이었어.
여담으로 이렇게만 보면 반니가 굉장히 꽁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맨유 시절 박지성이랑도 친하게 지냈고 그 영향인지 이후 유럽 무대에 갓 진출한 손흥민이 팀에 적응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손흥민이 함부르크 시절 반니가 아니었음 자긴 유럽 무대 적응도 못하고 힘들게 지냈을거라며 감사를 표했을 정도.

7.2.5. 데이비드 베컴

지금까지 가르친 선수들 중에서 자기가 실수를 저질러도 그에 대해 요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은 데이비드 베컴 뿐이었다. 베컴은 자신이 끔찍한 플레이를 하고 있어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남자였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재능이었다.
알렉스 퍼거슨, 본인의 자서전에서
그 어떤 선수도 퍼거슨에게 대체가 불가능한 선수는 없으며, '퍼거슨의 아이들'로 유명했던 애제자 데이비드 베컴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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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보다 열흘 먼저 은퇴를 발표한 퍼거슨 감독과의 첫 사진을 찾은 베컴
"지금 방금 이걸 찾았다. 참으로 오래 전 사진...믿을 수 없이 뿌듯한 날이었다"
퍼거슨은 베컴의 아버지 테드, 베컴의 어머니 산드라와의 전화를 통해 베컴의 맨유행을 꾸준히 권했다. 베컴이 뛰는 모습을 보기 위해 런던에서 맨유의 경기가 있었을 때는 경기 전에 베컴을 드레싱룸으로 초대까지 했을 정도. 베컴의 아버지는 맨유의 팬이었고 특히 바비 찰튼을 좋아했다. 베컴의 미들네임은 로버트 조셉인데, 로버트는 바비 찰튼, 조셉은 조부에서 따온 것이다. 참고로 조부는 토트넘의 팬이었다고.
토트넘의 초대로 테리 베너블스(당시 토트넘 감독)를 만나러 갔었지만, 그 사람은 베컴이 누구인지도 몰랐습니다. 테이블에 발을 올려둔 상태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눴고, 계약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퍼거슨과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퍼거슨을 만나기 위해 맨체스터로 갔을 때, 그는 이미 데이빗에 대한 모든 서류를 가지고 있었고, 그 날이 데이빗의 생일이라고 케이크까지 준비해뒀었습니다. 우리가 감독 자신과 맨유에게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대했었죠. 열정이 넘쳤고, 우리에겐 미래에 대한 눈을 뜨게 해 준 일이었습니다. 계약에 대해서는 두 번 생각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토트넘에게 데이빗은 그냥 서류상의 숫자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맨유에게는 한 명의 사람이었지요..
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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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 영감의 아버지 모드
베컴의 재능은 신이 주신 재능이다. 베컴은 영국 최고의 슈퍼스타이다
(은퇴 경기를 앞둔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베컴은 놀라운 선수였다. 자신을 재창조하는 능력이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어느 날 베컴은 휴가를 떠났는데, 퍼거슨이 전화를 걸어서 자기가 달던 등번호 10번을 뺏었다고 전했고 즉시 열받아서(?) 퍼거슨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는데도 안 받아서 마음이 상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맨유의 등번호 10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결국 베컴은 시무룩해진 채로 다시 팀에 돌아갔는데, 퍼거슨이 갑자기 7번을 달으라고 할 때 베컴은 너무 기뻤고 영광스러웠다고 한다. 맨유 7번은 에이스를 의미하기 때문. 그 당시 칸토나가 은퇴하고 난 후 7번이 비워져 있었고, 퍼거슨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베컴에게 7번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25][126][127]

이렇게 퍼거슨이 예뻐하던 베컴도 퍼거슨의 통제력을 벗어난 순간에는 맨유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 너무 가정적인 남자였던 베컴은 아내 빅토리아 베컴과 아들 브루클린 등 가족 문제를 때론 축구보다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컴은 이것을 보통 사람이 누리는 평범한 행복이며 축구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고 여겼지만 퍼거슨의 생각은 달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마치고 2002-03 시즌이 시작되면서 베컴과 퍼거슨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갈비뼈 부상을 입고 여름 휴가를 떠난 베컴은 휴가지로 바로 가지고 않고 잉글랜드 대표팀과 함께 버킹검 궁전으로 가서 영국 여왕을 알현했다. 대표팀 일정이기 때문에 공적인 일로 여왕을 만난 것이지만 퍼거슨은 이것을 혼냈다. 부상을 당한 선수는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부상 치료에만 전념해야 하는데 휴가 도중 다른 일을 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퍼거슨은 당시를 회상하며 베컴이 버킹엄 궁에 모습을 드러낸 걸 TV로 보았을 때 그가 맨유에 대해 얼마만큼이나 진심인 것인지에 의문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어 경기를 앞두고 아들 브루클린의 유치원 연극 공연에 참석했다가 훈련에 늦자 또 혼이 났다. 그러던 중 베컴은 퍼거슨과 긴 이야기를 할 기회를 얻었고, 이때 서로 간의 오해를 풀고 일시적으로 관계를 회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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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알 수 있는 치명적인 삼각관계
내게 큰 문제는...그가 빅토리아와 사랑에 빠졌고 그게 모든것을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He was never a problem until he got married. He used to go into work with the academy coaches at night time, he was a fantastic young lad. Getting married into that entertainment scene was a difficult thing - from that moment, his life was never going to be the same. He is such a big celebrity, football is only a small part.

그러나 2월 16일 바로 그 유명한 라커룸 사건이 터졌다. 경기에서 패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퍼거슨은 경기 후 라커룸에서 2번째 골을 허용한 것에 대해 화를 냈고 베컴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그 골이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 베컴은 그것은 상대 선수가 미드필드에서 돌파해 넣은 골이 아니냐고 말했고, 퍼거슨은 경기 전 그것에 대해서도 베컴에게 말했고 베컴의 가장 큰 문제는 남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둘은 계속 말다툼을 벌였는데, 베컴은 그만 퍼거슨에게 욕을 했다고 한다.[128] 감독이 왕인 맨유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가 난 퍼거슨은 앞에 놓인 축구화를 걷어찼고, 그 축구화는 의자에 앉아있던 베컴에게 날아가 베컴은 눈 부위를 맞아 피를 흘렸다. 이때 베컴은 이성을 잃고 퍼거슨에게 달려들었으나 팀 동료들이 제지해 약 1분 간의 소동은 끝났다. 팀 동료 라이언 긱스가 후에 밝힌 바에 의하면 이 사건 전에도 둘은 자주 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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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실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온 베컴에게 퍼거슨은 이번 일은 정말 미안하며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며 사과를 했으나,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베컴은 이를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됐으나, 이후 사건의 자초지종을 베컴의 부인인 빅토리아가 언론에 공개해 버리면서 둘의 사이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베컴은 유벤투스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앞두고 팀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이번 사건은 잊어버렸다고 밝히고 경기에 전념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경기에서 맨유는 승리했고 둘은 화해를 해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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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의 이적에 대해) 또한, 전에는 맨유를 위해 전력을 다하던 베컴의 폼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베컴은 내게서 4미터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고 그와 나 사이 바닥 위에는 축구화가 놓여 있었다. 베컴이 X을 했고 나는 그를 향해 다가가다가 축구화를 걷어차 버렸다. 그 축구화는 베컴의 눈 바로 위에 맞았고 그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에게 덤벼들려고 했다.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모두 그를 말리고 나섰고 나는 그에게 '너는 네 팀과 동료들을 실망시켰다. 할 말이 있으면 맘대로 해봐'라고 말했다. 그가 어떤 선수이든, 자신이 맨유라는 팀보다 더 큰 존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팀을 떠나야만 한다. 감독이 권위를 잃는 그 순간, 그는 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 팀은 선수들에 의해 돌아가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이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자제력을 잃은 순간은 처음이었다. 내가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을 때 나는 그들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클럽이 나를 팔 거라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레알 마드리드와 대화했다. 나는 내 꿈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됐고, 다른 팀과 대화를 해야만 했다. 그 후 2년 동안 맨유 경기를 볼 수 없었다. 처참했다. 맨유를 떠나는 것은 그렇게나 힘들었다.
난 단 한번도 맨유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나 클럽은 나를 팔려고 했고 때문에 떠날 수 밖에 없었어. 다만 난 맨유 아카데미로 들어온 이후로 단 한 번도 맨유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거지.
맨유에서 보낸 7년의 하루하루를 매일마다 그리워하고 있다. 맨유의 선수였던 시절과 팬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 있는 친구들이 모두 그립다. 맨유는 항상 내 가슴에 있다.

베컴은 맨유를 떠나면서 프리미어 리그에는 맨유 외에 다른 클럽은 가지 않겠다고 말했고,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이후 둘은 화해했고 PSG와의 경기 관람도 같이 하는 등 화기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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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꼭 꼽아야 한다면 처음으로 맨유와의 입단 계약서에 서명을 한 것입니다. 사실 그날이 내 생일이었고 퍼거슨 감독님은 나를 위해 생일 케잌을 준비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위해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유니세프 자선 경기에 퍼거슨이 감독을 하는 것에 대해) 제가 영감님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했어요. 감독님은 제게 아버지 같은 존재이지요.
절반은 내 부모님의 덕이고, 절반은 퍼거슨 감독님의 덕입니다. 그 만큼 그를 존경해요. 부모님은 나를 기르시고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퍼거슨 감독님은 나를 완전히 다른 레벨의 선수로 성장해 맨유를 위해 그리고 잉글랜드를 위해 뛸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세요. 그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어리고 젊은 맨유의 선수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특히 그는 나에게 있어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런던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맨체스터로 올라왔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었고, 그는 나에게 아버지와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때로는 그는 매우 엄격하게 나를 교육시켰고 나는 그의 교육에 잘 따랐죠. 그는 나를 비롯하여 다른 선수들에게도 그러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방문은 열려있으니 언제든지 오라고 말하며 용기를 주었죠. 그는 단순히 감독을 떠나 아버지였어요.
퍼거슨 감독님은 아직도 항상 그래오셨던 것처럼 저희를 잘 챙겨주십니다. 몇 주전에도 뵈었고, 항상 저희를 아이들 보듯, 케어해주십니다. 감독님 앞에서는 절대 술도 마시지 않고, 밤에 나가서 놀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샌가 제가 와인잔을 들고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군요. 제가 그러고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얼른 잔을 등 뒤로 숨겼어요! 저와 니키 버트, 폴 스콜스 모두 같았지요. 우리는 모두 등 뒤로 와인을 숨겼어요.
퍼거슨 감독님은 제게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그는 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우리와 함께 했던 어린 선수들 또한 신뢰했었죠. 12년 동안 그와 함께 할 수 있어서 행운이었고 그는 진정 최고입니다.

7.3. 헤어드라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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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스포츠인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퍼거슨은 화가 나면 축구인들 사이에서도 매우 무서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나 가끔 경기장에서도 선수들을 실시간으로 질책하는 사례가 꽤 있는데, 이때 굉장히 매서운 모습을 보여줘 팬들에게도 그의 질책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선수들에게 퍼거슨의 매서운 질책은 '헤어드라이어'로 불리는데, 이유는 그가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거나 졸전을 펼치면 라커룸에서 선수들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불같이 분노하기 때문이라고. 처음 그에게 '헤어드라이어'라고 부른 제자는 마크 휴즈로, 2015년 6월 25일, 솔즈베리 경마장에서 열린 경마 대회에서 퍼거슨의 소유의 말 '헤어드라이어(Hairdryer)'가 데뷔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129]
항상 소리치고 괴성을 지를 순 없다. 비난을 받고 싶은 선수는 누구도 없다. 그렇게 해서는 먹혀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라커룸에서 상황은 다르다. 실수에 대해서는 지적해야 한다. 난 경기 직후 곧바로 실행에 옮긴다. 월요일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다음 경기를 향해 전진한다. 30명의 백만장자 선수들과 호흡하면서 통제력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행동을 하면 벌금을 부과한다.
터널로 들어가고 심판이 다시 피치로 부를 때 까지(하프타임) 8분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을 잘 써야 하는건 필수다. 이기고 있을 땐 모든 것이 쉽다. 만족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이야기하고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지고 있을 땐 임팩트(충격이라고 쓰고 헤어 드라이어라고 읽는다.)를 줘야 한다. 전반이 끝나기 몇 분전에 나는 항상 가서 무엇을 말해야 할까 생각한다. 거의 무아지경이다. 정신을 집중한다. 나는 노트에 적는걸 믿지 않는다. 다른 코치들이 수행하는걸 본다. 하지만 난 게임의 어떤 부분에서도 실수하는걸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드레싱룸으로 가면서 내 노트를 보면서 , '오 30분에 이렇게 했으니까 됐어.'라고 말하는걸 상상할 수 없다. 나는 그 방식이 선수들에게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개개인이 잘못한 경우에도 퍼거슨 감독님이 당사자를 나무라기보다 우리 전체를 나무랐던 여러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왜 네 동료가 곤경에 처하도록 놔둔 것이냐? 왜 그를 보호하지 않았던 것이냐? 너희들 모두가 그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에 책임이 있다. 너희의 동료가 곤경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가 선수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는 그가 벌금이 효과적인 지도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그가 벌금을 부과했을 때 이는 항상 팀 단위였다. 그는 우리가 연대 책임에 대한 그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명이 실패하면 우리 모두가 고통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연대에 대한 의식을 우리에게 심어주고자 했다.
게리 네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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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에 실시간으로 헤어 드라이를 맞은 조니 에반스라이언 긱스[130]
실제로 목격하면 감독이 미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화를 내는데[131], 퍼거슨 본인이 인정했듯 자신의 화를 못 이겨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선수들에게 과도하게 쏟아낸 적도 많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짧고 굵게 말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드록바 마크 제대로 못하는 새끼는 끝나고 뒤질 줄 알아라.", "지금 저 리버풀이 리버풀이냐? 제라드? 걔 공 좀 차지, 근데 너희들에게 비할 바냐?", "얘들아 쟤넨 토트넘이야." 등의 말들이 있다.

물론 아무리 퍼거슨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눈 바로 앞에서 머리가 휘날릴 듯이 욕을 쏟아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선수가 헤어드라이어 트리트먼트에 반발한 적도 종종 있었다. 퍼거슨에게 충성심이 강한 맨유 유스 출신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한 번은 긱스가 챔피언스 리그 유벤투스전에서 하프타임에 퍼거슨이 자기를 집중적으로 조지기 시작하자 참지 못하고 음료수를 퍼거슨의 발에 집어던졌는데 이를 용납할 리가 없는 퍼거슨은 바로 긱스를 교체 아웃시켰다.[132] 자기와 충돌할 수는 있어도 선을 넘어서 감독의 권위에 도전하면 그 누구라도 경기에서 빼버렸던 퍼거슨은 선수들에게 자기가 보스임을 늘 각인시켰다고 한다.

웨인 루니는 베컴 사건과 헤어드라이어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영상 루니의 말에 따르면 헤어드라이어를 제일 많이 당한 선수는 게리 네빌이었다고. 그건 네빌이 그걸 견딜 수 있을 만큼 정신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네빌: 사실 나도 힘들었..읍..
2006-07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셀틱전이 제가 본 최악의 헤어드라이어였어요. 그는 루이 사하의 얼굴에 대고 소리를 질렀어요. 호되게 당한 사람은 루이 사하뿐만이 아니었죠. 제가 클럽과 새로운 계약을 협상 중이라는 걸 감독님은 알고 있었어요. 그는 제게 들어갈 돈을 절약하게 되었죠. 선수들은 재계약을 할 때 더 많은 돈을 원해요. 하지만 그런 형편없는 경기를 한 후에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죠. 그 시합 후에 전 상향된 계약을 할 자격이 없었어요. 이 세상에서 알렉스 경의 헤어드라이기를 당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어요. 그는 제 얼굴 바로 앞에 서서 소리치죠. 마치 제 머리를 BaByliss Turbo Power 2000 앞에 놓은 거랑 같은 느낌이예요. 그건 끔찍해요. 저는 누구에게서도 그런 고함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 고함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때때로 저도 되받아쳐서 소리질러요. 저는 그에게 당신이 틀렸고 내가 옳다고 말하죠. 하지만 진정이 되고 난 후에는 대개 그 반대라는 것을 깨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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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liss Turbo Power 2000
천재다. 그냥 천재였다. 일단 선수의 심리를 가장 적절하게 자극했다.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박살(=헤어드라이어) 나는 날들이 있었다. 영감의 수준에 맞지 않는 경기를 하면 하프타임 때 문을 부숴져라 닫고 나서 ,"2:0? 2:0? 야 이 좆같은 새끼들아. 지금 솔직히 양심적으로 6:0 7:0은 나와야 하는거 아니야? 니네 그 따위 공 찰래? 장난하냐? 그 따위로 할꺼면 때려쳐!" 시합이 잘 풀리는 날도 영감이 우리에게 주문하는 건 완벽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 완벽한 게임을 위해, 그리고 영감을 위해 달렸다.
리오 퍼디난드
(호날두의 10대 시절 맨유 첫 시즌) 호날두가 패스하는 법을 배우고 있던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선수들은 유나이티드의 공격수들이었다. "얘랑 못 뛰겠어. 크로스를 아예 안 하잖아." 판니스텔로이는 훈련 중 종종 소리치곤 했다. "백날 달려봤자 저 자식은 패스도 안 할 텐데 뭐" (에드빈 판데르사르 왈) "베컴은 볼을 잡으면 판니스텔로이에게 항상 크로스를 올려줬으니까요. 퍼거슨은 채찍질 후에는 당근을 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알릭 와일리 코치 왈) "가끔씩 감독님은 모든 선수들 앞에서 호날두를 혼내곤 했습니다. '왜 크로스를 안하고 드리블을 한 거냐?!!!!'라는 식으로요. 그런 식으로 호통을 친 후, 그는 슬그머니 호날두의 옆에 가서 앉아 왜 그가 그렇게 혼내야만 했는 지를 설명해 줍니다." 선수들은 둘의 스페셜한 관계를 질투하면서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퍼거슨 니 아빠잖아, 니 아빠!!" 출처
하지만 오직 에릭 칸토나만은 헤어드라이어에서 예외였다고 한다.[133]
퍼거슨 감독은 피터 슈마이켈, 나, 폴 인스, 팰리스터를 비롯해서 모든 선수들의 영혼을 쏙 빼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 앞에서 '도대체 누가 사우스게이트를 맡기로 되어있었나?' '칸토나요.' 내가 대답했다. 퍼거슨 감독은 칸토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칸토나, 너에게 실망했다. 경기장에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돼.'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다야? 정말 그게 다야? 다른 선수였다면 헤어드라이어를 정통으로 맞고도 남았을 텐데.'
데이비드 메이
또한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H조 1경기 독일 vs 멕시코의 중계를 했던 SBS 해설위원 박지성은 자기는 맨유 선수 생활 중에 직접 헤어드라이어를 당해본 적은 없었다고 증언했지만, 옆 사람이 당하는 것만 봐도 오금이 저려서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134] 이런 걸 보면 퍼거슨의 헤어 드라이어에서 예외였던 경우는 그를 만족시키면서 예의가 좋거나, 아니면 팀 리더격이라 권위를 세워줄 필요가 있거나 하는 경우 등이었을 듯 싶다.[135]

7.4. 지략가

퍼거슨은 우리가 제대로 했는데도 경기를 졌으면 분위기 전환용으로 어디가서 싸움을 붙어와 분위기를 바꿨다. 언론과 싸우거나 심판과 싸우거나. 다만 우리가 엉망으로 한 날은 우리를 아작냈다.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아작났는지 아무도 모를 뿐이다. 그게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도 위대한 거다.
리오 퍼디난드
퍼거슨은 언론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며 자기 팀 선수를 보호할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하는 감독이었다.[136] 영상 맨유를 10년 동안 담당했던 출입 기자에 의하면 퍼거슨에게 '너 오지마'라는 소리를 듣는 신문/타블로이드/방송국의 담당자가 속한 부서는 그날 뒤집어졌다고. 기자들에게 퍼거슨은 "당신들은 멍청이들. 아, 아니다. 진정 축구 전문가들이지? 왜 4-3-3이 어쩌고, 4-4-2가 어쩌고 해봐. 다시는 캐링턴에 못 들어오게 할 줄 알어."라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한 번은 '더 선'이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의 명칭을 스폰서의 이름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도한 적이 있는데, 퍼거슨 경이 노발대발한 것은 당연지사. 그는 그 기사를 직접 작성한 기자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며 디스.

하지만 가장 웃긴 것은, 기자들이 이런 퍼거슨을 '이해'하며 일부 기자들을 제외하면 그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보였다고. 퍼거슨이 질문하는 사람을 이름으로 부른다거나 하면 그 기자들은 화색이 돌고, 자신을 놀리거나 하는 발언 "이봐, 자네는 그걸 양복이라고 입었나?"를 들으면 그 어떤 기자(자신도 포함)들도 무슨 대단한 영광인듯 행동했다고.

퍼거슨이 말하길 "내가 맨날 성질만 내면 이미 죽었겠다. 난 부드러운 사람이야. 대신에 니(기자)들이 날 화나게 하는 경우, 내 선수들이 날 화나게 하는 경우가 무척이나 많지. 그리고 난 화가 나면 바로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그러나 자신이 많은 수의 선수들을 헤어드라이어로 불어버린 것은 인정.


[1] 약 330만원 가량[2] 이스트 스털링셔의 선수들에게 자신이 떠난다고 말했을 때 윙어였던 톰 도널리가 "이 개자식아!(You bastard!)"라고 소리쳤다고 한다.[3] 손등을 뒤로 보이며 브이를 만드는 사인. 영국의 대표적인 손가락 욕이다.[4] 퍼거슨의 부임 당시 유소년 팀에 있던 선수로, 미드필더로 대성해 세인트미렌에서 255경기 60골을 기록했다. 훗날 퍼거슨을 따라 애버딘으로 이적해 애버딘의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우승까지 함께했다.[5] 포지션은 윙어로, 빌리 스타크와 같이 훗날 애버딘까지 퍼거슨을 따라갔다.[6] 포지션은 포워드, 퍼거슨의 부임 당시 18세였다. 이후 세인트미렌의 주전 스트라이커가 되어 132경기 52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격을 이끌었다.[7] 피츠패트릭은 어릴 적부터 키가 작다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고, 그가 성인 팀으로 올라온 직후 퍼거슨이 "이번 주 화요일에 누가 남고 떠날지 발표하겠다."라고 말해 자신이 방출되리라 예상하고 체념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의 화요일에 퍼거슨은 사무실로 선수들을 한 명씩 불러냈고, 가장 먼저 불려간 피츠패트릭에게 퍼거슨은 대뜸 "몇 주 동안 널 지켜봤다. 넌 엄청난 재능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고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훗날 인터뷰에서 회상했다.[8] 17살에 주장이 되어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세인트미렌의 감독, CEO까지 역임하며 구단의 레전드가 됐다. 2022년 66세의 나이로 구단과의 49년 간의 동행을 마치고 CEO 직에서 은퇴했다. 이때 퍼거슨도 영상 인터뷰로 경의를 표한다며 축하해줬다.[9] 당시에는 선수들에게 임금을 무단 지불하는 등 계약 위반이 경질 이유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퍼거슨을 해고했던 세인트미렌 경영진은 2008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1977년 애버딘과의 접촉 과정에서 퍼거슨이 최소 한 명의 선수에게 자신과 함께 애버딘으로 가자고 한 것이 경질 사유였다고 밝혔다. 문제는 퍼거슨은 고민하다가 이 오퍼를 거절했고 세인트미렌에 남기를 바랬다는 것인데, 해당 경영진은 시즌 도중에 퍼거슨에게 접근한 걸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애버딘을 비판하면서도 경질 결정은 후회한다고 밝혔다. 퍼거슨은 세인트미렌에서 경질된 후 부당 해고로 복직 소송까지 검토했으나 애버딘이 본인에게 다시 접근했고, 이번에는 오퍼를 수락했다.[10] 이후 세인트미렌은 퍼거슨이 만들어놓은 평균 연령 20세의 팀이 전성기 나이대에 들어가며 10년 정도 황금기를 보냈다. 퍼거슨의 경질 두 시즌 후인 1978-79 시즌에 기록한 1부 리그 3위가 현재까지 세인트미렌의 리그 최고 성적이다. 참고로 그 시즌 우승팀은 퍼거슨의 애버딘이었다. 이후 황금 세대가 나이가 들어가며 1980년대 후반에는 강등을 두고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결국 몰락했던 팀이 퍼거슨을 기점으로 현재까지도 1부 리그 팀으로 꾸준히 자리잡는데 성공했다.[11] 다만 위에서도 설명됐듯이 당시 스코틀랜드 리그는 1부 리그에 10개 팀이 있었으므로 4위면 중상위권 정도에 해당한다.[12] 현재까지도 올드 펌 두 팀이 다 해먹으며 리그가 정체된 양상이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이 양강 체제를 무너트렸던 퍼거슨이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 올드 팬들은 퍼거슨이 맨유에 부임하면서 다시 양강 체제가 복구된 것을 스코틀랜드 리그가 죽어버린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13] 퍼거슨을 다룬 다큐멘터리 'Never Give in'(2021)에서 언급된다.[14] 참고로 퍼거슨은 글래스고 출신인데, 그가 얼마나 절박하게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어찌나 불같았는지 당시 애버딘의 수비수였던 스튜어트 케네디는 퍼거슨이 나중에 맨유에서 '헤어 드라이어'라는 별명을 얻자 인터뷰에서 "헤어 드라이어? 그놈 애버딘 초기에는 헤어 드라이어가 아니라 그냥 용광로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5] UEFA 컵위너스컵의 이전 명칭[16] 실제로 애버딘은 퍼거슨이 떠난 다음 시즌부터 급속도로 성적이 떨어지며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만년 삼류 팀을 순식간에 일류 팀으로 일구어냈던 것은 선수빨 같은 게 아닌 순전히 퍼거슨의 능력 덕이라 봐야 옳다.[17] 맨유에 이어 애버딘도 구장에 퍼거슨 동상을 만들며 퍼거슨은 살아 생전에 이미 두 경기장에 동상이 세워진 인물이 됐다.[18] 이때 토트넘의 제의를 받고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19] 마틴 에드워즈는 1986년 이후로 맨유의 감독을 선임한 최후의 맨유 경영진이었으나, 퍼거슨의 은퇴로 데이비드 모예스가 선임되며 기록이 중단되었다.[20] 퍼거슨의 아내 캐시는 집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중 카메라에 잡힌 남편의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퍼거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곧 심장 발작이라도 일으킬 사람처럼 초조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훗날 퍼거슨은 그랬던 자신보다도 조크 스타인이 휠씬 긴장했다고 회상했다. 손을 떨고 식은 땀을 흘리며 경기를 지켜봤다고.[21] 조크 스타인은 셀틱에서 유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이라는 엄청난 실적을 남긴 감독으로, 축구 전문지에서 매기는 명장 순위에서도 높은 편에 드는 뛰어난 인물이다. 퍼거슨도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사제 관계로 묘사될 정도로 그를 따랐다.[22] 퍼거슨이 감독의 길에 들어선 것도, 세인트미렌의 정식 감독직 제의를 수락한 것도 그 뒤에는 조크 스타인의 조언이 있었다. 애버딘의 감독이었음에도 대표팀 수석코치직을 수락한 것도 평소 스승으로 모셔왔던 조크 스타인이 감독으로서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퍼거슨은 맨유에 부임할 때도 조크 스타인이 생전에 자신에게 맨유 감독직을 거절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며 자신은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23] 당시 플레이오프에는 4팀이 올라왔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호주. 스코틀랜드로서는 네덜란드를 피하고 호주를 만난 건 대진운이 따라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24] 문서를 계속 읽다 보면 알겠지만 훗날 은퇴 후 출연한 방송에서 유소년 선수들을 중심으로 맨유를 리빌딩하던 퍼거슨에 대해 "꼬맹이들을 데리고 우승할 수는 없다."라고 일갈했다. 나름 타당한 비판이었지만 문제는 그 꼬맹이들이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필 네빌,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였다는 것. 결국 앨런 한센의 발언은 영상으로 박제되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25] 이런 대우 때문에 맨유의 회장이었던 마틴 에드워즈와 마찰이 있기도 했는데, 훗날 재계약으로 임금이 인상되고도 당시 아스날 감독 조지 그레이엄의 임금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열받은 퍼거슨은 친분이 있던 그레이엄의 계약서를 얻어 마틴 에드워즈에게 따지러 간 적도 있을 정도였다. 이는 퍼거슨의 자서전에서 언급되는 에피소드다. 결국 임금은 더 올려받지 못했다고 한다.[26] 다만 꾸준했던 건 아니다. 당시 맨유는 맷 버스비 시대 이후 몰락해 강등당했다가 승격한 지 12년 된 팀이었다. 이후 성적이 중상위권에서 오락가락하다 론 앳킨슨의 지휘 아래 다섯 시즌간 두 번의 FA컵 우승과 3위-3위-4위-4위-4위라는 버스비 이후 최고 성적을 냈던 것이다. 하지만 론 앳킨슨도 마크 휴즈 등의 이적을 대체하지 못하며 리빌딩에 실패했고 팀 분위기도 망가졌으며, 결국 앳킨슨은 부임 5년 후 맨유가 강등권까지 미끄러지면서 경질됐고 그렇게 퍼거슨이 부임했다.[27] 아르센 벵거도 아스날 감독으로 부임해서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이 음주를 통제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당시 잉글랜드 축구계는 술에 지나치게 관대했었다.[28] 하지만 퍼거슨은 노먼에게는 존경심을 갖고 있었고, 노먼 또한 맨유에서 방출된 후에도 퍼거슨을 존경하고 거액을 약속하며 퍼거슨의 뒷담화를 원했던 언론의 제의도 뿌리쳤다.[29] 퍼거슨도 훗날 "그 당시의 나는 지나치게 야심에 차있었다. 다시는 너무 많은 선수들을 한 번에 사고 팔지 않겠다."라고 말한 바 있다.[30] 퍼거슨이 맨유에 오자마자 했던 일이 바로 유스팀의 강화였고, 그것을 위해 스카우트팀의 대대적 개편은 물론 본인 스스로 유스 선수들의 계약에 관여했다. 퍼거슨 스스로 14세 생일이 되자마자 선수의 집에 직접 생일케이크를 들고 가서 계약서를 받아내는 정성을 보였다. 1군 팀을 운영하면서도 수시로 유스팀과 같이 훈련하며 유대감을 키웠고, 유스팀에 있는 선수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있을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팀을 이끌었다. 피치 못해 유소년 선수를 내보낼 때조차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선수의 다음 팀과의 계약을 도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31] 1:0, 1:0, 3:2, 1:0으로 승리[32] 당시 17세로 막 1군에 올라온 선수였다. 재능으로도 똘끼로도 떡잎부터 범상치 않았다.[33] 이후 영입된 로이 킨이 3.75M에 맨유로 왔는데, 이게 당시 영국 이적시장 최대 이적료 기록이었다는걸 감안하면 1M이 사실 적은 돈이라고 볼 순 없다. 칸토나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헐값으로 보였던 것 뿐이다. 이전에도, 당시에도, 이후에도 칸토나가 다루기 힘든 선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자.[34] 상단 사진 왼쪽부터 당시 유소년 감독 에릭 해리슨,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 네빌, 폴 스콜스, 테리 쿠크. 이들 중 테리 쿠크만이 맨유 1군에 자리잡는 데에 실패했다.[35] 칸토나는 쿵푸 킥 사건으로, 킨은 키노게이트로 이와 같은 우려가 어느 정도 현실이 되기도 했다.[36] 직후 칸토나는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이 사과 안 하냐고 묻자 "갈매기가 어선을 따라오는 것은 어부들이 정어리들을 바다에 버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When the seagulls follow the trawler, it's because they think sardines will be thrown into the sea. Thank you very much)"라는 희대의 드립을 날렸다. 해석하면 "너희들 기삿거리 던져줄 일 없으니 꺼져라." 칸토나는 지금까지도 때릴 만해서 때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37] 처음에는 퍼거슨도 칸토나를 포기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를 남기기로 마음먹었고, 강경하게 칸토나를 두둔하며 언론의 집중 포화를 자신에게로 분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퍼거슨에게도 비난이 쏟아졌고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다. 감독 은퇴 후 인터뷰에서 이 사건이 언급되자 퍼거슨은 20년이 흘렀음에도 한숨을 푹 쉬고 말을 잇지 못했다.[38] 위에도 소개됐지만 국대에선 감독에게 욕설을 해서, 그리고 소속팀에선 판정이 맘에 안 들자 심판의 얼굴에 공을 던져서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었다.[39] 은퇴 후 20년이 휠씬 넘은 지금까지도 칸토나는 퍼거슨만큼은 인터뷰 때마다 치켜세워 준다. 물론 퍼거슨도 칸토나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 둘의 관계는 두 천재가 서로를 각자 분야의 최고로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40] 참고로 패배한 아스톤 빌라전에서 만회골을 넣은 선수가 베컴이었으며, 이는 베컴의 프리미어 리그 데뷔골이었다.[41] 훗날 한센은 틀리는 사람들은 틀릴거면 이렇게 확실히 틀려야 한다.고 셀프디스를 시전했다.(...)[42] 이 시즌 바르셀로나는 라리가를,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를, 맨유는 프리미어리그를 우승했다. 심지어 뮌헨과 맨유는 결승에서 다시 만났다.[43] 이 당시 챔스는 24개팀이 참가했기 때문에 16강이 없었다. 4개팀씩 6개 조를 이뤄 각 조 1위 6팀 8강 직행, 2위팀들은 6개 팀을 다시 줄 세워 상위 2개팀 만이 8강에 가는 시스템이었다.[44] 이때 PK를 찬 베르캄프는 큰 충격을 받고 그의 선수 인생에서 다시는 페널티킥을 차지 않았다.[45] 유벤투스와의 준결승에서 킨과 스콜스가 모두 경고 누적으로 결승 진출이 무산되었고, 중원이 박살난 경기에 임할 수 밖에 없었던 맨유는 크게 고전했다. 전반 6분 선제골을 내주고도 뮌헨은 맨유의 골대를 2번 맞추었고, 슈마이켈이 1대1 찬스를 막아내기도 했다. 결국 후반 추가시간까지 지고 있자 솔샤르와 셰링엄을 투입한 직후 퍼거슨도 이대로 패배하면 선수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 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46] 경기 내내 뮌헨이 우세했고, 추가 시간까지 뮌헨이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스태프들이 이미 트로피를 뮌헨의 리본으로 장식해 둔 상태였다.[47] 이는 국가대항전 주요 경기와 맞먹는 시청률이었으며, 1999년 영국 스포츠 경기 최고 시청률이었다. 1998년 월드컵과 비교해도 아르헨티나 전을 제외한 나머지 두 경기는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본선 시청자 수가 맨유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시청자 수보다 적었다.[48] 호나우두 전설의 3슛 3골이 나온 경기다. 경기는 맨유가 4대3으로 승리했지만 1차전 3대1 패배로 인해 합산스코어에 밀려 탈락했다.[49] 뿐만 아니라 로이 킨, 뤼트 판니스텔로이 같은 주축 선수들은 팀 케미스트리를 해친다는 이유로, 필 네빌은 더 많은 출장을 위해 팀에서 내보냈으니 말 그대로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셈[50] 2003-04시즌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 체제 하에 자신의 인수 이래 첫 시즌을 시작한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곧 라니에리에게는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감독에게 첼시 감독직을 제안하고 나섰는데, 그 첫 타겟이 다름 아닌 퍼거슨이었다. 그가 퍼거슨에게 감독직을 제안했다는 사실은 아브라모비치가 첼시를 인수했던 배경을 살펴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그가 잉글랜드 축구에 매료됐던 경기가 다름 아닌 2002-03 시즌 맨유와 레알 마드리드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였는데, 그에게 퍼거슨은 그 맨유를 이끌었던 감독이자 이미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이미 들어올린 감독이었다. 그러나 퍼거슨은 맨유를 떠날 이유가 전혀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맨유에 남는다.[51]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첼시는 같은 시즌 숀 라이트 필립스 한 명을 사는데 2,700만 유로를 넘게 썼다.[52] 다만 4강에서 카카에게 털렸다..[53] 긱스가 맨유 윙어들 중 출전이 가장 많긴 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확고한 주전은 아니었다.[54] 주장인 게리 네빌의 장기적인 부상이탈로 인해 실질적인 주장역할을 맡았다.[55] 라이언 긱스의 100번째 리그 골이 나왔다.[56] 첼시는 최종전 볼튼과의 홈경기에서 셰브첸코의 첼시에서의 마지막 골로 앞서있다가 종료 직전 동점골을 실점하며 맨유와 같은 승점으로 시즌을 마감하는데 실패했다.[57] 이 무렵의 맨유는 맨유라는 구단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으로 평가받고 있다.[58] 교체 출전한 라이언 긱스도 1999년 트레블 멤버이긴 하다.[59] 지난 해에 이어 2연속 우승이다.[60] 초대 푸스카스 상을 수상한 그 골 맞다.[61] 2차전에서 나니가 멀티골을 넣는 등 맹활약했지만 하파엘이 리베리에게 무리하게 들러붙다가 퇴장당하는 바람에 3골을 먼저 넣고도 2골을 허용하여 원정 다득점 규칙에 따라 탈락했다.[62] 이때 퍼거슨은 토레스가 헐리우드 액션으로 PK와 FK를 얻어냈다며 토레스를 액션배우라고 비난했다.[63] 리그 13라운드까지 진행되었을 때 6승 7무였다.[64] 이 경기에서 파격적인 포지션 파괴가 나왔다.[65] 일각에서는 이 때문에 4-3-3에 루니가 톱으로 서고 스콜스를 선발출장시켜 긱스ㆍ스콜스ㆍ캐릭으로 바르셀로나의 미드필더진을 상대했어야 했다고도 한다.[66] 알겠지만 프리미어 리그는 20개 팀이 있어 감독도 20명. 따라서 경질 가능성이 가장 낮다는 말이다. 참고로 19위는 아스날의 아르센 벵거였는데 서서히 벵거의 입지도 위험해지고 있다.[67] 더 흠좀무한 건, 이 날 주전 멤버들의 평균 연령은 맨유가 오히려 더 낮았다! 19세의 존스, 20세의 스몰링, 20세의 데 헤아, 21세의 웰벡, 22세의 클레버리 등이 출전하고, 비디치, 퍼디난드, 베르바토프, 긱스같은 노장들이 교체투입되거나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68] 박주호가 소속되어있다.[69] 1골을 먼저 넣었으나 무효화되었다.[70] 게다가 지난 시즌에는 웨인 루니 의존도가 극에 달했던 상황이기도 했다.[71] 이 골은 2006년 8월 이후 풀럼이 올드 트래포드에서 기록한 첫 골이다.[72] 셸비는 경기장을 나가면서 퍼거슨 감독에게 폭언을 날렸다.[73] 클레버리의 골은 25야드 거리에서 찬 강력한 중거리슛 득점이었다.[74] 반 페르시가 문전에서 오른발로 때린 슈팅이 골대를 맞고 루이스 등에 맞고 들어갔다.[75] 12/13시즌 에브라의 리그 2호골인데, 12/13시즌 전까지 에브라가 맨유의 골망을 흔든 횟수는 두 차례였다. 12/13시즌에 기록한 득점 횟수가 그 전 시즌까지 에브라가의 득점 횟수 총합과 동률이 되었다.[76] 맨유 유스 출신 선수이다.[77] 그러나 맨유는 이 경기 이후 4월 8일 홈에서 맨체스터 시티에 1-2로 패하기 전까지 5개월 동안 리그 18경기 무패를 달렸다.[78] 공중에 뜬 공을 잡기 위해 발을 들었는데 그 발이 쇄도해오던 알바로 아르벨로아의 복부를 제대로 강타하고 말았다. 퍼거슨은 이 판정에 제대로 열받아 칠순 먹은 노인답지 않게 불같이 터치라인까지 뛰어나왔다.[79] 호날두는 득점 후 아무런 세리머니도 하지 않았다. 맨유 시절 친정팀이었던 스포르팅 리스본과의 경기에서도 득점을 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세레모니를 하지 않았던 경력이 있다.[80] 경기 종료 후 퍼디난드를 필두로 맨유 선수단은 주심에게 판정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고, 퍼거슨도 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81] 비디치는 치아에서 출혈이 날 정도였다.[82] 참고로 퍼거슨의 13번 리그 우승은 리그 우승 횟수 3위인 아스날 FC의 통산 우승 횟수와 같은 수치이다.[83] 여기서부터 퍼거슨의 위엄이 드러나는데, 이 표의 팀들은 퍼거슨 재임부터 사임까지 대표적인 리그 라이벌 리버풀 FC, 아스날 FC, 첼시 FC, 맨체스터 시티 FC와 유럽 각국 명문 클럽인 FC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 CF, FC 바르셀로나, 유벤투스 FC, 그리고 AC 밀란인데, 퍼거슨과 트로피로 비교될 수 있는 팀은 오직 뮌헨 한 팀밖에 없으며, 심지어 그 뮌헨도 퍼거슨에 비해 독일의 국가 컵인 DFB-포칼의 비중이 높다. 또한 아스날+리버풀+맨체스터 시티 세 팀을 합한 트로피 개수는 퍼거슨이 얻은 트로피 개수보다 더 적고, 퍼거슨보다 대륙 대회를 더 많이 든 팀은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밀란 3팀 밖에는 없다. 참고로 퍼거슨의 후임 감독인 데이비드 모예스루이 판할 2년의 트로피 개수(FA컵 1개)보다 1998년 트레블 당시 맨유의 트로피가 더 많다. 게다가 이 자료는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된 이후부터 집계를 시작한 것이므로 퍼거슨의 부임 당시부터 세면 적어도 리그 7개+FA컵 1개=8개를 더해야 한다.[84] 클래식 윙어 조합[85] 골 넣는 윙어[86] 사실 꼭 위의 만화대로는 아닌 게, 퍼거슨은 공격수만큼은 가능하다면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를 영입했다. 마크 휴즈부터 전설적인 에릭 칸토나, 드와이트 요크-앤디 콜의 투톱과 테디 셰링엄, 올레 군나르 솔샤르로 이어지다가 그 뒤 뤼트 판니스텔로이, 루이 사하가 활약하고 웨인 루니카를로스 테베스,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말년의 로빈 반 페르시까지 퍼거슨이 지휘하던 맨유의 공격진은 항상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호날두와 반 페르시 사이 루니와 함께 2010년대에 활약한 디미타르 베르바토프하비에르 에르난데스 역시 상당한 수준의 공격수였다.[87] 비슷하게 어떻게든 승리를 갈구하는 무리뉴의 선 수비 후 역습의 축구와는 또 달랐다. 무리뉴식 꾸역승 경기는 대체로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득점을 얻어 승리하는 방식인데, 퍼거슨은 수비고 공격이고 라인업이고 다 별로인데 일단 이기기는 한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팀 전술 차원에서의 적절한 포지셔닝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수들의 포지셔닝이 적절하고 이것이 팀 전술로도 잘 갖춰져 있다면 청소부가 그라운드에 서 있어도 상대를 막을 수 있다고 아리고 사키가 말했던 것의 실제 예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88] 나름 최고의 라이벌이라는 리즈 유나이티드 FC와의 컵대회 경기에서는 주전 2명에 유소년 4명, 그 외 나머지 서브 선수들로 베스트 11 기용, 아스날과의 FA컵 경기에서는 풀백만 4명 기용, VfL 볼프스부르크와의 챔피언스 리그 원정 경기에서는 미드필더인 캐릭과 대런 플레처를 센터백으로 두고 마이클 오언을 원톱으로 출전시켰다. 그리고 상술한 저 경기들을 모두 이겼고, 아스날은 당시 기용이 가능한 선수들 중에서 최대한 고른 주전으로 출전하고 경기력 면에서는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2:0 패배를 당했으며 그중에서도 전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팀이었던 볼프스부르크는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물 건너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데다가 당시 맨유에서도 3번째 공격수 옵션이었던 오언에게 해트트릭을 얻어맞으며 침몰했다.[89] 그 예로 2010-2011 시즌 챔스 결승에서 바르셀로나에게 패했을 때 상대적으로 열세인 상황임을 알고도 수비적으로 나가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갔지만 후반전에는 공격다운 공격도 못해보고 완패했다. 퍼거슨은 이 경기 후 "맨유가 수비적 축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90] 퍼거슨이 맨유에 부임한 게 1986년, 26년 만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긴 게 1992년, 트레블을 하면서 잉글랜드 리그를 살리고 기사 작위를 받은 게 1999년이었다. 박지성 이적 불과 5-6년 후 올드 트래포드의 북쪽 스탠드가 '알렉스 퍼거슨 스탠드'로 개칭되고, 구장에 퍼거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91] 금전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선수들을 모조리 팔았다. 오죽하면 감독으로 코치 경험도 일천한 32살의 알렉스 퍼거슨을 알바로 쓸 정도였다. 퍼거슨의 감독 커리어는 그렇게 시작됐다.[92] 세인트미렌은 3부리그 하위권 팀이 3년 만에 1부리그로 승격했고, 애버딘은 상상하기 힘들었던 리그 우승을 퍼거슨 부임 2년 만에 해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그 이후 너무 급한 리빌딩이 문제였지 사실 퍼거슨 부임 당시 21위였던 팀이 11위로 시즌을 마쳤고, 그 다음 시즌은 리그 2위를 차지하는 등 팀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었다. 1992년 리그 우승 이후야 말할 것도 없다.[93] 당시 17세로 막 1군에 올라온 선수였다. 재능으로도 똘끼로도 떡잎부터 범상치 않았다.[94] 특히 비디치는 별로 유명하지 않아 뜬금포 영입이었다는 말이 많았는데 후에 리오 퍼디난드와 함께 수비진을 이끄는 리그 최고의 수비수로 거듭난다.[95] 아마 제일 유명한 일화는 토트넘과의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을 모은 뒤, 딱 세 단어만 한 것이다: "Lads, it's Tottenham(얘들아, 고작 토트넘이다)." 당연하지만, 맨유는 그 경기를 승리했다.[96] 역시 퍼디난드의 증언이다.[97] 아직 안토니오 발렌시아가 풀백으로 전향하기 전이다. 지금에 와서는 익숙해 보이는 포지션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기용. 지금으로 치면 전문 윙어이면서도 수비 가담이 괜찮다고 평가되는 윌리안이 풀백으로 출장한다고 가정하면 비슷한 상황이 될 것이다.[98]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볼프스부르크와 2009-10 시즌 챔피언스리그 조별 리그 6차전 경기. 당시 맨유는 핵심 자원들의 부상, 징계 등의 이유로 인해 사면초가에 빠져있었다. 그러나 퍼거슨 감독은 남아있는 자원들을 활용하여 원정 경기에서 3:1 대승을 거두었다. 수비진들이 부상을 당해서 미드필드 자원으로 포백 수비 라인을 구성했음에도 안정적인 수비를 보여주었다. 마이클 캐릭대런 플레처는 자신들의 성향을 바탕으로 새로운 색깔을 뽐내며 수비진을 지휘했다. 마이클 오언은 오프사이드 트랩을 뚫고 수비 뒷공간을 파고 드는 영리한 움직임과 순도 높은 골 결정력(5개의 슈팅 중 3개의 골)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교체 투입된 가브리엘 오베르탕은 오언의 2번째 골을 어시스트했다. 참고로 아무리 백업들을 극도로 쥐어짰다고 해도 볼프스부르크 상대로 이긴게 그렇게 큰 의미가 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저 시즌 볼프스부르크는 전시즌 분데스리가 우승팀이었다. 독일 챔피언팀을 저런 전술로 때려잡은 것.[99] 2011/12시즌 칼링컵 3라운드 경기. 투톱인 오웬과 베르바토프, 레프트백인 파비우만 제자리에서 뛰고있다. 전반전에만 3골을 몰아치고 후반전엔 긱스와 박지성까지 교체 아웃 시켰다. 폴 포그바가 이때 긱스의 교체로 맨유에서 데뷔했고, 교체 3명을 다 쓴 상황에서 센터백으로 나온 프라이어스가 부상당하자 베르바토프가 센터백으로 10여 분간 뛰었다.[100] 이 경기에서 필 존스는 호날두를 전담마크 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압도적인 점프력으로 호날두는 헤딩골을 넣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이전에 있었는데 2011년 코파델레이 결승과 챔피언스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페페를 수미 자리에 넣어 메시를 잘 막았고 코파델레이 결승에서는 이겼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페페가 퇴장당하며 끝났다.[101] 노란색으로 강조된 선수들은 다비드 데헤아, 리오 퍼디난드, 마이클 캐릭, 로빈 반페르시인데, 이들은 해당 시즌 PFA 올해의 팀에 선정되었다.[102] 사실 퍼거슨 감독은 돈을 함부로 쓰는 편이 아니다. 오버페이 한 정도가 리오 퍼디난드 정도로 손 꼽히는 편. 그 퍼디난드도 무려 10년 가량을 주전으로 써먹었으니 결과적으로는 손해가 아니었다.[103] AC밀란전ㆍ리버풀전 등[104] 발렌시아는 대타 풀백을 소화했지만 2013~2014년까지는 완전한 윙어였다.[105] 2023년 기준으로, 7년 만에 토리노가 파리생제르망의 위치까지 올라간 것과 같다.[106] 이 시즌 맨유는 아스날을 다섯 번 만나 1승 2무 2패를 기록했다. 그나마 1승도 FA컵 준결승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승부 끝의 승리였다.[107] 과거에는 감독에게 전권을 주는 경우도 꽤 많았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축구계 자본 유입으로 빅클럽들의 규모가 너무 커져버렸고, 전술이 급속하게 발달하며 보드진의 권한이 커졌다. 현재는 대부분의 빅클럽들에서 클럽 운영 부분은 보드진이 담당하고, 감독들은 과거보다 전술적 능력이 휠씬 중요해졌다. 요즘 주목 받는 감독들 대다수가 전술색이 뚜렷하거나 세부전술이 있다. 이런 추세에, 글레이저 인수 후 엄청난 빚으로 돈도 제대로 못 쓰는 상황이었음에도 본인이 구축한 시스템으로 2013년까지 리그 정상에서 버틴 게 퍼거슨의 또 다른 위용이라면 위용.[108] 이 때문에 한준희, 장지현 해설위원들도 펩 과르디올라와 알렉스 퍼거슨을 비교하는 영상에서 "둘의 직함은 감독으로 같았지만 실질적으로 역할은 완전히 달랐던 감독들이었다."고 평가했다. 펩을 최고의 헤드코치, 퍼거슨을 최고의 매니저로 칭하며 대학에 비유한다면 최고의 총장은 알렉스 퍼거슨이고 최고의 교수는 펩 과르디올라 일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 영상[109] 감독과 보드진의 분업이 뚜렷해진 요즘 축구계로 생각하면 경영자로도 감독으로도 최고 수준의 기량이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퍼거슨을 분석한 매체나 서적들에서 퍼거슨을 단순한 감독이라기 보다는 조직의 리더나 경영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담으로 퍼거슨은 은퇴 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최고위 과정 강사로 채용되어 몇 학기 동안 강단에 서기도 했다.[110] 본래 감독에게 전권을 주는 경우가 흔했지만 이런 추세로 인해 구단 운영, 구단 방향 설정, 선수 영입 및 방출과 재계약 등은 구단 보드진이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디렉터의 역할이 중요해진 것도 이 시기이다. 또 요즘 축구계에서 지속적으로 성공하는 명장들은 대부분 전술적 색체가 뚜렷한 감독들이 됐다.[111] 현재 축구계에서 퍼거슨이 펼쳤던 상당수 능력들은 대부분의 팀들에서 더 이상 감독의 권한이라고 보기 힘든 점도 있다. 정말로 제2의 퍼거슨이 등장하지 않는 이상, 맨유의 부진은 결국은 제대로 된 보드진을 데려와 시스템을 구축하는게 먼저인 문제다.[112] 당시 병환중이던 칸토나의 어머니를 욕하는 내용이었다.[113] 그 시즌에는 앨런 시어러가 몸을 담고 있었던 블랙번 로버스 FC가 우승하였다.[114] 루니는 프로 선수이기 이전에 당시 어린 소년이었으므로, 그보다 더 험난했던 19살을 보냈던 퍼거슨 본인은 이를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보인다.[115] 이에 퍼거슨은 "잔말 말고 공이나 차라. 공을 차다 보면 가만 있을 때 나던 온갖 생각이 다 사그러든다."라고 말했다.[116] 다만 로이 킨은 이 칭찬에 대해 오히려 "나를 모욕되게 만든다. 내가 뭘 하길 바라는건가? 포기하라는건가? 모든 잔디를 밟지 말라는건가? 팀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건가? 내 클럽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건가?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코멘트를 남기고 내가 영광스러워 해야한다는 식의 반응이 기분 안좋다. 우체부가 편지를 배달하는건 자기 할 일인데 그걸 칭찬하나? 나의 일은 맨유가 축구 경기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면서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117]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 4:1로 대패한 직후 5명의 동료 선수들의 실명을 인용해 가며 비판했고 이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 당시 킨에게 비판을 받았던 선수들은 대런 플레처, 키어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리오 퍼디난드, 존 오셔이다.[118] 스트라칸은 선수 시절 공격적이며 기술이 뛰어난 측면 미드필더였다. 그는 에버딘 시절 퍼거슨 감독의 휘하 아래 유럽컵을 거머쥔 핵심 멤버로 후에 맨유 선수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119] 퍼거슨 본인도 스탐을 쫓아낸 것은 큰 실수라고 인정했을 정도였으며, 이후 웨스 브라운, 로니 욘센 등으로 버티는 데에 한계를 느낀 퍼거슨은 리오 퍼디난드에게 3,500만 달러를 지르게 된다. 스탐의 나이가 이제 곧 서른이었던 데다가 주식 상장을 해 돈지랄을 하던 라치오에서 1,500만 파운드 딜을 제시하자 승낙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120] 권총 협박을 했다는 설도 있는데, 항목에 따르면 권총이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출처가 없다고 한다.[121] 당시 아스날을 상징하는 선수라면 하이버리의 왕(king)이라 불린 티에리 앙리.[122] 서브와 주전을 오가는 선수였던 솔샤르의 폼 역시 준수했기에 판니스텔로이의 자리는 애매해져갔다. 게다가 그 당시 유망주였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한테 사실상 패드립을 시전하는 사건도 발생하면서 퍼거슨에게 단단히 찍혀있었다.[123] 지금의 EFL컵[124] 실제로 이때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맨유가 골을 넣을때마다, 몸을 푸는 경기장 뒤쪽에서 계속해서 환호하는 반니를 볼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본인이 출전하지 못할거라곤 생각 못했겠지만[125] 베컴 자서전 원문 "When I first got into United's first team as a regular, my squad number was 24 (he had worn 28 before that, too). The following season I was given the number 10 shirt. The meant a great deal to me: Denis Law and Mark Hughes had both worn it before me. Maybe the history that went with the number was why I scored so many goals wearing it. I remember, though, the summer we signed Teddy Sheringham, the boss actually took the trouble to phone me when I was away on holiday in Malta to tell me he was taking that squad number off me. No explanation, NO alternative and no argument. I remember saying to Gary Neville at the time: 'What's he done that for? Whay would he phone to tell me that? Did he just want to make sure he ruined my holiday? I was devastated, trying to work out what I'd done wrong. Then, a month later when we turned up for pre-season training, he had a new shirt ready: the number 7. The boss handed me Eric Cantona's squad number. The surprise of that honour stopped me in my tacks." 출처[126] 하지만 미러에 의하면 퍼거슨은 베컴에게 7번을 주기 싫었다고 하는데, 당시 칸토나가 은퇴하고 7번이 공석이 되자 퍼거슨이 제일 먼저 면담했던 건 로이 킨이었고 그때 킨은 자신은 16번이 좋고 대놓고 베컴이 7번을 달기를 원하는 게 보이는데 걔나 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퍼거슨은 "나도 ㅅㅂ(Fucking) 걔가 7번을 달기를 원하는 거 아는데 걔한테 주기 싫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미 베컴의 안에서 축구만 좋아하던 순수 청년이 사라져가고 스타성만 쫓고 있다고 생각한 퍼거슨은 베컴에게 7번을 주는 게 선수를 망치는 결정타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7번에 어울리는 선수는 없었고, 결국 7번은 베컴에게로 돌아갔다.[127] 물론 스타성만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베컴을 비판하는 판단이고 실제 베컴은 언제나 축구를 최우선시 했다. 다만 긱스스콜스같이 미디어를 가까이하지 않은 선수들을 눈 앞에서 지켜본 퍼거슨에겐 너무나 연예계 생활을 챙기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훗날 레알 마드리드, LA 갤럭시에 입단해 두 팀 모두 리그 우승까지 이끌었던 베컴의 폼을 보자면 퍼거슨의 걱정이 너무 컸던 거이기도 했다.[128] 베컴이 당시 했던 말은 제가 애슐리 콜에게 발려서 진거라고요? 그러는 영감님도 벵거 감독에게 전술로 발린거잖아요!라고 항변했다고 한다.[129] 사실 영국 경마계에서 퍼거슨은 나름 유명한 마주이다. 2002년 유럽 경마의 발롱도르라고 할 수 있는 카르티에 상 연도대표마인 록 오브 지브롤터의 공동 마주이기도 했으며, 말의 은퇴 후 소유권을 놓고 공동 마주이자 오랜 지기인 존 매그너와 분쟁 끝에 합의는 봤지만 매그너가 소유한 유럽 최대의 서러브레드 목장인 쿨모어 스터드가 맨유 주식을 처분하고 축구 사업에서 철수하는 사건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다.[130] 참고로 긱스가 헤어 드라이를 맞은 이유는 박지성 때문이었다. 당시 박지성은 상대 골대 앞에서 멋진 가슴 트래핑으로 긱스에게 공을 내줬지만 이를 예상하지 못한 긱스는 공을 받지 못했는데, 이로 인해서 퍼거슨의 화를 불러일으킨 것. 제스처를 잘 보면 가슴을 치면서 가슴 트래핑으로 공을 내줬는데 놓치다니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냐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1] 카가와 신지는 퍼거슨처럼 무서운 감독은 난생 처음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고, 리오 퍼디난드는 그렇게 라커룸이 터지는데 밖으로 이야기가 새나가지 않는 것도 참 대단한 거라고 회고하기까지 했다. 고든 램지가 연상된다는 팬들도 많다. 마침 둘 다 스코틀랜드 사람이다[132] 다만 이날은 긱스 입장에서도 억울할 만했던 것이, 퍼거슨은 경기 전 팀 회의 시간에 "지단은 이제 끝났다. 얜 느리고 약하니까 너네들이 가서 부딪치면 이길수 있을 거다"라며 꽤나 무리수(...)를 뒀는데 당시 지단은 아직 20대 중반으로 몸 상태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경기장 터널에서 지단의 옆에 서있었던 긱스는 지단의 엄청난 피지컬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감독님이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133] 상당히 현명한 결정인 것이, 칸토나는 자신만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고 동시에 자신만의 기준이 타인의 잣대에 휘둘리는 것을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이다. 즉 내 기준에는 잘했음에도 상대가 그것에 대해 비판한다면 불같이 달려든다는 것. 거기다가 칸토나는 상대방이 강하게 나온다고 주눅이 들거나, 머리를 식힐 만한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더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기행을 벌일 정도의 인물인지라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계산된 행동이라고는 하나 퍼거슨이 헤어드라이어를 시전했다가는 그대로 칸토나가 폭발해 둘의 관계가 그대로 파토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칸토나에게만큼은 웬만해서는 에둘러서 조용히 말한 것이다.[134] 그래서인지 박지성은 2006년에 쓴 자서전 제 1장의 이름을 헤어드라이어 트리트먼트라고 했다.[135] 사실 박지성 같은 선수에게 감독이 헤어드라이어를 가동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딱히 사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이 축구에만 집중하는 타입이고, 이타적인 플레이를 즐기고 항상 열심히 하는데다 중요한 경기에 믿고 내보낼 수 있을 만한 실력이지만 확고한 주전으로 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크게 반발하는 것도 없이 묵묵하게 감독이 시키는 대로 잘 뛰고 있으니 인간적으로 박지성 같은 선수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노발대발 화를 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하게 폴 스콜스 역시 헤이드라이기를 맞지 않았는데 박지성처럼 다소 조용하고 튀는 행동이 별로 없는 유형이었다.[136] 이게 가끔 지나치면 사단이 나는데 대표적인 게 독일인 드립이다. 이 사건으로 바이에른 뮌헨이나 분데스리가 팬덤에서는 심심찮게 까인다. 독일인 드립이 무엇인지 덧붙이자면, 2009-10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 3-1로 앞서다가 후반전 하파엘의 퇴장으로 경기력이 밀려 추격골을 먹혀 원정 다득점으로 패한 후, 전형적인 독일인 방식이라고 판정을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발 역풍을 강하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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