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22:26:06

시운마루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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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운마루호 침몰 사고[1]
공식이름 紫雲丸事故 (しうんまるじこ)
발생일 1955년 5월 11일
발생시각 06시 56분
유형 해상충돌로 침몰
발생 위치 일본 카가와현 메기지마 남서쪽 해역
탑승인원 781명
사망 168명
구조 613명
기종 기차 수송 연락선

1. 개요2. 사건 진행 상황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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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5년 5월 11일 오전 6시 56분, 수학여행을 떠난 초등학생, 중학생들을 태운 일본국유철도 우코연락선(宇高連絡船)[2] 소속 철도 연락선(기차 수송 연락선) "시운마루호(紫雲丸, 상행 객화제8편 (上り第客貨8便))"가 같은 철도 연락선인 "제3우코마루(第三宇高丸, 하행 153편 대형 화차운항선 (下り153便大型貨車運航船))"[3]와 충돌하여 168명이 사망한 해양 사고다. 그리고 "전후 국철 5대사고(国鉄戦後五大事故)" 중 하나이다.[4][5]

2. 사건 진행 상황

1955년 5월 11일,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치 현 초등학생과 고치 현 중학생을 태운 시운마루호는 안개가 끼었는데도 출항을 강행한다. 계속하여 바닷길을 나아간 시운마루호는 이윽고 세토 내해 메기지마(女木島) 남서쪽 해역에 다다른다. 참고로 해당 해역은 조수 간만의 차도 크고 조류도 빠른 곳.

이런 와중에 맞은편에서 같은 항로를 다니는 일본국유철도의 대형화차운항선 제3우코마루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두 배는 모두 과속 운항을 하였다! 그나마 두 배는 맞부딪치기 전에 서로를 식별하고 회피했으나, 하필 두 배 다 같은 방향으로 꺾는 바람에 결국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운마루 선체 우현 기관실 쪽에 높이 3.5m, 최대폭 3.2m, 선내쪽 3.5m로 찢어져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게다가 기관실 엔진룸 복수기와 주배전장치까지 폭발하여 선내 전체가 정전이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선내 침수를 막아 침몰을 지연시키는 역할인 수밀문이 정전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이미 선미 쪽에 물이 차버린 탓에 선원들도 수동으로 폐쇄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런 연유로 배가 좌현으로 급속도로 기울자, 승객들까지 황급히 우현으로 몰리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힘이 일반 남성보다 약한 어린이와 청소년은 그대로 배 안에 남겨져 희생되고 말았다.

한편 서로 부딪치긴 했어도 제3우코마루는 상대적으로 멀쩡했고, 파손된 시운마루호 우현 기관실의 침수 진행을 막으면서 조난 당한 승객들을 옮겨 태우려고 좌현으로 완전히 틀어 배 엔진을 전속력으로 전진시켜 밀어 붙었다. 제3우코마루가 접근하는 광경을 보자마자 사람들은 재빨리 배를 옮겨타는 가운데 인솔하는 교사들은 선내에 남겨진 학생들을 구하러 갔다. 하지만 이미 학생들은 이미 들어찬 바닷물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고, 구하러 내려온 교사들 역시 함께 희생되고 말았다.

왜 희생자들 중에 학생들이 많았냐면 우선 주변 어른들이 정신없이 서로 밀쳐댔기 때문에 대피가 늦어졌다. 게다가 구명조끼를 수납한 곳에 손이 닿지 않았고 선원들이 배포한 구명 조끼를 입으려 해도 착용법을 몰랐다는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3. 여담

참고로 이 사고는 시운마루호가 1947년 6월에 취항한 뒤로 겪은 다섯번째 해난사고이다.

일본에 있는 거의 모든 학교에는 수영장이 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정착한 것이다.[6] 또한 세토 대교는 이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출처#
2014년 4월 16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유사점이 많아 재조명받았다.


[1] 해난심판에서는 "시운마루호 사건(紫雲丸事件)"라고 칭한다.[2] 훗날 JR 시코쿠로 이관되었다.[3] 여객열차 객차와 화물열차 화차를 실어서 해상수송하는 것 달리, 이 배는 화물열차 화차만 실어 해상수송하는 역할을 한다.[4] 다른 것은 사쿠라기초 사고, 토야마루 침몰사고, 미카와시마 사고, 츠루미 사고 이다.[5] 해상 사고임에도 국철 5대사고에 들어가는 이유는 이 배가 철도 연락선이기 때문이다.[6] 그러나 일본어 위키백과의 경우 해당 의견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해당 사고 이전에도 수영부, 수영장이 있는 학교는 존재했으며 단순히 전후 경제발전의 결과로 그 숫자가 늘어났을 뿐이라는 주장. 다만 해당 사고 이후 (비슷한 시기의 수련회 여학생 수난사고가 겹치면서) 학교 교원의 수영능력, 학교의 수영장 설치 등을 짚고 넘어간 정부 문서 정도는 존재하는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