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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병일

파일:AKR20220727173900504_01_i_P4.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연일 승씨[1]
출생 1926년 6월 10일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2]
(現 평안북도 정주시 신안리)
사망 2022년 7월 27일 (향년 96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학력 정주 오산중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문학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46호
상훈 대통령표창 수훈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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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授與)받았다.

독립유공자 승치현은 그의 조부이며, 독립유공자 승준현·승영제 형제는 각각 큰아버지와 첫째 작은아버지이다. [3]

2. 생애

1926년 6월 10일 在 평안북도 정주군 신안면 안흥동(現 정주시 신안리)에서 아버지 승영기(承英基)와 어머니 사이의 7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4] 조부와 큰아버지, 작은아버지가 모두 독립운동가였기에 학교를 다니며 늘 일본 경찰과 친일 성향의 교사들의 감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정주 오산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2년 3월,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조부 승치현의 유지(遺旨)를 이어받아 학우들과 함께 조국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이에 그해 4월 선우진(鮮于塡)·조응택(趙應澤)·고창정(高昌廷)·지세붕(池世鵬)·윤영언(尹英彦) 등의 학우들과 함께 비밀결사 혈맹단(血盟團)을 조직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이들은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과 접선하여 뜻 있는 조선 청년들과 학생들을 충칭으로 망명시켜 광복군에 가입시키는 것을 행동강령으로 삼고, 각자 심신단련에 힘쓸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동지규합에 힘쓰는 한편, 심훈의 《상록수》,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이광수의 《금강산유기(金剛山遊記)》 등 당시 금서로 지정된 책들을 윤독하고 애국애족정신 및 해방 이후의 미래상 등을 토론하며 항일민족의식을 함양하고자 했으며, 매일 아침 등산을 하며 체력단련을 하고 단검을 구해 투검연습을 하기도 했다. 또한 재학 중에는 근로동원 거부 및 항일 선전과 일본인 교장 배척운동 등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산중학교 졸업 후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45년 소학교 교사가 된 한 단원이 일본인 교장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과 함께 용천군 용암포경찰서에 체포되었고, 그해 5월 15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되어 신의주형무소에 3개월 여 간 구금되었다가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3일 후인 8월 17일 출옥하였으며, 이후 월남하여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였다. 동국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졸업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하여[5] 창녕군 박진지구 전투 등에 참전하고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전역하였다.

군 전역 후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거주하면서 오양섬유공업사를 창립하여 대표에 취임, 스웨터를 생산했다가 1981년 5월 경영난으로 회사를 정리했다. 그해 겨울 그는 친지를 통해 대부업을 하는 장동호(張東浩)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공장을 정리한 자금을 이용해 그로부터 1982년 2월 말과 4월 말 두 차례에 걸쳐 공영토건(共榮土建) 발행 3천만원짜리 약속어음 2장을 액면가보다 3.5% 저렴한 가격에 매입했다.

하지만 장동호가 그해 6월 발생한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면서, 그 또한 36억 9천만원의 예금을 유치하여 자금 조성을 도운 사채업자로 오인되어 수배 명단에 올랐다가 같은 달 3일 검찰에 자진 출두하여 결백을 밝히고 혐의없음입증했다.

이후 평안북도 정주군 고안면 면민회장, 광복회 부회장, 평안북도 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2015년 7월 3일 제11대 사단법인 한국독립유공자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2015년 강남구 일원동거주하다가, 2019년부터 2022년 사망할 때까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동거주했다.

2022년 7월 27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2022년 7월 3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

3. 기타




[1] 행단파(杏壇派) 29세손 ○영(○泳) 항렬. 족보명 승일영(承逸泳).[2] 연일 승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승계련·승영제·승영호·승준현·승진·승치현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아버지 승영기(承英基, 보명(譜名) 승민현承民鉉)와 승준현·승영제 형제는 본래 친형제였으나, 자식이 없던 조부 승치현에 입양된 것이므로 족보상으로는 7촌 재종숙(再從叔)이 된다.[4] 위로 형 승병학(承炳鶴, 보명(譜名) 승학영承鶴泳), 아래로 동생 승병선(承炳善, 보명(譜名) 승선영承善泳), 승병만(承炳萬, 이명 승훈承壎, 보명(譜名) 승만영承萬泳), 승병무(承炳武, 보명(譜名) 승철영承哲泳), 승병인(承炳仁, 보명(譜名) 승화영承華泳), 승병혁(承炳赫, 보명(譜名) 승길영承吉泳) 등의 남동생이 있었다. 첫째 남동생 승병선도 대한민국 육군 대위로 군 복무를 마쳤다.[5] 대학교를 이미 졸업한 상태이므로 아마도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