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8 22:06:20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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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 번역에 대해서2. 해석과 루머
2.1. 성장물인가?2.2. 마지막 테스트2.3. 매춘숙 묘사와 루머
2.3.1. 미야자키의 제작의도

1. 제목 번역에 대해서

원제인 '千と千尋の神隠し'의 카미카쿠시(神隠し)를 '행방불명'으로 번역한 것은 의미는 통하지만 어감을 살린 번역이라고는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다. 카미카쿠시는 '신(神)이 감춘다(隠し)'는 의미인데, 이는 과거 일본에서 아이를 잃어버리면 신이 아이를 데려갔다고 믿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치히로가 "신"이라는 초현실적인 존재에 의해 현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끌려가는 플롯과 정확히 부합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반면 사람에 의해 사라지게 되는 경우(자의/타의 불문)는 유쿠에후메이(行方不明), 즉 한국과 마찬가지로 행방불명이라고 한다. 즉, 행방불명으로 번역하게 되면서 영적인 존재의 개입이라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한계도 가지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이 '카미카쿠시'와 완벽히 부합하는 단어가 없기 때문. 개봉 전에야 행방불명이라는 단어가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현실은 2001년 개봉 후 20년이 넘도록 행방불명을 대체할 만한 '더 적절한' 번역을 내놓은 사람은 국내에 단 한 명도 없다. 한국적 개념에서 그나마 의미가 근접한 것을 찾자면 망태 할아버지 정도인데, 망태 할아버지는 동사형이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인데다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보다 '센과 치히로의 망태 할아버지'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의문. 또한 망태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세대도 21세기 이후로는 점점 사라져 가는 추세라 오히려 직관성을 해칠 우려도 있다. 무조건 원문과 1대1로 대응하는 번역에 집착하는 것 또한 좋은 풍조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예 중 하나다.이외에도 미스터리한 실종에 사용할 수 있는 동사로는 '증발하다'가 있긴 하지만 역시 어색하고, 원제의 어감을 단 하나도 살리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제는 'Spirited Away'인데, spirit는 동사로 '몰래 갑자기 옮기는 것'을 뜻한다. spirited가 되었으므로 옮겨진, 옮겨지다가 되고 치히로의 원래 자아 내지 이름 등이 특수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 점점 사라지는 점과 Spirit이 명사로서는 '영혼'을 뜻하는 점까지 고려하면 카미카쿠시에 대한 번역으로 훌륭한 셈이다.[1] Spirited away를 한국어로 중역하면 '영혼과 함께 사라지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지만 영어 특유의 매우 쉽고 직관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을 주지고 않고, 무엇보다 본 작품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는 하등 무관한 작품이라 이 역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대체 제목으로 쓰이기에는 부적합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논쟁을 이어가면, 차라리 카미카쿠시의 의미를 살리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만의 번안 제목을 따로 짓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카미카쿠시를 적절하게 번역하기 어려운 것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중국, 홍콩, 마카오에서는 '센과 치히로'(千与千寻/千與千尋)까지만 번역해서 썼고, 대만싱가포르에서는 카미카쿠시(神隠し)의 한자를 그대로 읽어서 '신은소녀(神隱少女)'라고 했다.[2]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에서는 '치히로의 여행(Le Voyage de Chihiro/El viaje de Chihiro/De reis van Chihiro)', 독일에서는 '치히로의 마법 나라 여행(Chihiros Reise ins Zauberland)', 이탈리아에서는 '마법 걸린 나라(La città incantata)', 러시아에서는 '사라진 혼령(Унесённые призраками)'으로 번역했다.

2. 해석과 루머

2.1. 성장물인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 작품을 흔해 빠진 성장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 할수 있다. 오히려 성장물에 대한 안티테제를 말하고 있다. 인터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근의 영화에서 성장신화라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성장하면 뭐든지 좋다고 여기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자신을 보면, (누군가가) '너 성장했냐?' 라고 물어보면,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은 예전보다는 조금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으로, 나의 경우 이 60년, 그저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장과 연애가 있으면, 좋은 영화라는 뻔해 빠진 생각을, 뒤집어 엎고 싶었습니다."[3](『折り返し点』 P267:『ロマンアルバム 千と千尋の神隠し』])

어쩌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올바른 성장[4] 혹은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5]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인터뷰에서 밝히기로, 세상에 나갔을 때 원래부터 자신도 모르고 있던 내면에 잠들어있던 힘을 발휘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사항을 담은 작품이다. 그래서 미야자키는 이 작품은 성장물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래서 영화 마지막에 치히로는 목욕탕에서 있던 일을 잊어버리고 겁많고 소심한 소녀로 돌아가 터널을 빠져나갈 때 엄마 팔을 꼭 붙잡는다. 반면 같은 장면에서 제니바에게 받은 보라색 머리끈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는 치히로가 여러 수난을 겪으면서 성장한 부분도 있지만 순수한 본질은 닳지 않았다는 두 사실을 동시에 시사한다.

이 작품이 성장보다는 순수한 본질의 '불변'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시사하는 아이템이 있는데, 바로 치히로의 노란색 운동화이다. 신발은 많은 작품에서 그 인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데, 치히로가 처음에 보일러실을 통해 여관에 들어올 때 린이 "신발 같은것 들고 와서 뭐 하게! 양말도 벗고 와!" 라고 꾸짖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치히로와 친해진 숯검댕이들이 치히로의 신발을 몰래 보관해주고 있었고, 이는 치히로가 잠시 자신의 정체성을 잃겠지만 언젠가는 되찾을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해석은 신발이 다시 활용되는 장면을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치히로가 자기 신발을 도로 신는 장면은 작중에서 두 번 나오는데, 첫 번째는 하쿠를 만나러 가서 자기 이름을 다시 기억해 낼 때, 두 번째는 여관 밖으로 나가서 하쿠를 구하러 간 뒤, 그대로 이 세계에서 나갈 때이다. 즉 치히로는 여관에서 일하면서도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고 언제든지 찾아신을 수 있었고, 작중 모든 종업원은 자기 맘대로 여관에서 멀어지지 못하지만 치히로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을 기억해 내는것도, 전차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치히로가 모든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한켠에 간직해두었기 때문이다.
지금 센의 성우는 13살인데, (나에게는) 그 또래의 '걸프렌드'가 몇 명 있는데, 그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그 아이들이 기뻐해주면 아저씨(하야오)가 이겼다는 느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이랬으면 좋겠다"라는 느낌을 만들어왔습니다만[6], 그런 주인공과는 달리 "이런 거구나"라는 여자애입니다. 세간(世間)에 나간다는, 세간으로 나가서 자신의 안에 잠자고 있던 힘이 뿜어져나온다는 영화를 만들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젊은 친구들이 그렇게 살길 바란다는 바람과, 아마 그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미야자키 하야오. 니혼 테레비 방송 '스튜디오 지브리 이야기' 2011년 방송. 인터뷰 영상에서

2.2. 마지막 테스트

2016년 7월, 트위터 유저 0910noncha(계정 삭제됨)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궁금증이 생겨 지브리 스튜디오에 글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장문의 답장이 돌아왔다.#

0910noncha는 주인공의 부모가 음식을 먹고 왜 돼지로 변했는지 알고 싶으며, 치히로는 어떻게 수백 마리의 돼지 가운데 누가 부모님인지 골라야 하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질문을 했는데, 이에 지브리 측은 "부모가 돼지로 변한 것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기간 동안 사람들이 가졌던 욕망을 의미한다"고 밝혔으며, 이어 "현실 세계에서 욕망이라는 것이 그렇듯, 영화에서도 부모가 돼지로 변신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설정했다"고 밝혔다. 또한, 치히로가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 가운데 자신의 부모님이 없다고 알아맞힌 이유에 대해서는 "치히로가 비현실 세계에서 겪은 경험으로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7] 마지막으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특별한 심장을 가진 대단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영화는 두려움에 맞서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삶에 대한 애정이 생기면서 강해진 소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임을 밝히며 편지의 내용은 끝이 난다.

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돼지 알아맞히기 테스트'는 1971년 독일 동화 크라바트(Krabat)에 나오는 장면이다. 소설에서는 까마귀 알아맞히기 테스트. 17세기 독일을 무대로, 고아가 된 14살 소년이 우연히 물레방아가 있는 방앗간집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 집의 주인은 마법사(흑마술사)였다. 그는 주인공과 같은 처지의 소년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악한이었다. 소년은 3년간 실컷 힘든 노동을 하면서 마법사가 되기 위한 수련 생활을 하는 이야기다. 이윽고 소년은 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엔딩에서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내기를 하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로 까마귀로 변한 방앗간 직공 12명 중에서[8] 한 명을 맞혀야 하는 테스트가 있었다. 또한 소녀는 눈을 가린 채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을 알아맞혀야 했다. 이 장면이 전후 맥락 없이 인용돼서, 모르고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했다. 유바바가 까마귀로 변신하는 것도 이 소설을 연상시킨다. 또한 소녀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반지가 힘을 준다는 설정이 여기서는 제니바가 만들어준 머리끈으로 이어진 것일 수도.

2.3. 매춘숙 묘사와 루머

국내외를 막론하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사실 가정 경제가 파탄나서 빚을 갚기 위해 매춘을 하는 소녀의 이야기', '가오나시가 센에게 사금을 건네는 건 사실 매춘을 제안하는 것'이라는 식의 괴담 내지 루머가 떠돌았던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틀린 이야기로[9] 미야자키 하야오가 작품의 모티브 중 하나로 풍속산업을 참고한 것은 맞지만, 해당 루머 내용대로 작품이 설명되기에는 왜곡된 부분이 있다.

2001년 1월 1일에 치히로의 대모험이라는 특집잡지가 출간하는데, 이 잡지는 편집자가 미야자키 하야오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기에 제작단계부터 취재를 한 잡지인데 여기서 감독조수를 한 미야지 마사유키의 제작일기가 실려있다. 여기에 미야자키의 발언이 기록되고 있다.

『치히로의 대모험』의 감독조수 제작일기 2000년 3월
원본
● 왜 유야(湯屋)인가
작화 회의에서의 일이였다. 원화가들에게 간결하게 이야기의 줄거리를 해설하는 미야자키 씨가
「이 영화는 요컨대, 소프랜드에서 일하는 여자애의 이야기입니다.(웃음)」
이라고 말한 게 생각났다.
그렇다면 「千(센)」은 源氏名(겐지나. 역주:매춘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의 예명)인 셈이군.

『프리미어』수록내용
원본
풍속영업화된 지금의 일본
(생략)
"제가 어릴 적에는 신주쿠에도 빨강 등이 걸려있는 듯한 거리가 있었죠. 의도적으로 그런걸 이라기보다는, 조금더 옛날의, 어느샌가 모두가 잊어버린 번화가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원래 일본은 성에 관해서는 개방적이 였으니까요. 유럽인들부터 너무 정조관념이 없다고 놀림 받고, 성도덕을 강요받기 전까지는요. 야나기나 쿠니오(柳田國男)의 민속학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와카슈야도(若衆宿 역주: 남자 청년들이 모여 사는 곳. 남색하는 사람이 남창들을 살게 하는 곳으로 이용)도 성적인 것이였죠. 저는 그런걸 부활시키자는 걸 말하자고 하는 게 아니지만, 현재의 세계를 묘사하기에 뭐가 제일 적합하냐고 말하자면, 그건 풍속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모든 것이 풍속영업같은 사회로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여성들은 매춘굴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는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토쿠마사장의 장례의 위원장을 했는데 눈앞을 지나가는 높으신 분들도 아닌 사람도, 어울리지도 않는 양복 입고 걸어다니는 꼴을 보니까, 다들 개구리로 보였습니다.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 같은 건 한명도 없어요. 이젠 개구리 남자와 민달팽이 여자의 나라입니다. 영화에서는 결국 그럴 듯하게 그렸지만요. (웃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작의 은유나 함의가 매춘이라는 키워드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같은 책에서 센과 치히로는 지브리를 그리는 것이 목적이다(「『千と千尋』はジブリを描くのが目的だ」)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욕탕 아부라야는 스튜디오 지브리라고도 말하고 있다. 해당 서적에서는 미야자키 본인을 유바바로 비유하며 목욕탕의 모티브를 스튜디오 지브리로 삼았음을 밝히고 있다.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를 시작으로, 저도 흉포해지는 일은 자주 있고, 소리도 요란하고 머리도 유바바처럼 크고, 젊은 스태프에게 있어서는 그런, 자신의 할아버지의 나이의 인간이, 핏빛을 바꾸어 호통을 치면 무서우니까요.
그래서 그것만으로 충분한 악역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지브리를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10]
(중략)
거기(편주: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일하지 않는 것에는 어쩔 수 없는 입장의 아이가 나타나면, 어떤 일을 당할까 하고 리얼하게 생각해 보았을 때, 이 이야기가 생겼습니다.[1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별책 부록 '치히로의 대모험(千尋の大冒険)'

2002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의 씨네21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다.
"10살 된 친구 딸을 보면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구상하면서 생각하기가 귀찮아 온천장을 지브리 스튜디오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어갔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센과 같은 10살짜리 어린아이가 가정을 떠나 다른 사람이 주는 밥 먹고, 그러면서 느낀 점들을 그린 영화다."

그렇다면 왜 굳이 지브리와 매춘시설을 연결지어 묘사했을까? 여기서 위에 서술한 일본 사회를 풍속화(자본주의화)가 진행된 사회라고 말하면서 그걸 "개구리 남자와 민달팽이 여자의 나라입니다"라는 부분이 중요해진다. 이 부분은 다른 인터뷰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며, 자기 자신도 개구리 남자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한다.

『치히로의 대모험(千尋の大冒険)』 원본
유야에 있는 개구리 남자들은 양복 입고 다니는 일본 아저씨하고 닮았죠. 도쿠마사장 장례위원장을 했을 때, 인사하면서 "줄줄이 개구리가 들어가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이게 총리대신이라는 개구리이군", "이건 외무대신이라는 개구리네, 흠..." 라고요. 죄송하지만 개구리로밖에 안보였어죠.(웃음)

- 이해가 가는 듯한 느낌도 있지만, 이미지로서 딱 개구리가 떠올랐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서 공언하기는 꺼렸지만, '리본 붙여 가지고 굽신 인사하는 나도 개구리구나' 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개구리에게는 개구리의 생활이 있고, 집에서는 맘 놓고 쉬고 있겠지든가...

『로망스 앨범』수록내용원본
-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개구리 남자와 민달팽이 여자로 한 건 왜인가요
저희 일상이 개구리나 민달팽이 같은게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까다로운 걸 말하는 개구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한마디로 저 이세계는 이 현실 그 자체라는 것일까요
그건 일종의 현실감이 없으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현실을 비꼬기 위함이라든가, 풍자하기 위해서 작품을 만든 게 아닙니다. 예로 들면 스튜디오 지브리에 10살의 소녀가 일해야 한다고 가정하면, 거기에는 친절한 사람도 있고, 심술궂은 사람도 포함한, 개구리 떼 속에 들어간 것과 같은 거죠. 이건 그런 영화입니다.

인터뷰를 보면 작품의 리얼리티,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서 미야자키가 느낀 지브리 스튜디오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브리를 나타내는 개구리 남자와 민달팽이 이외에 똑같은"현실을 비꼬기 위함이라든가, 풍자하기 위해서 작품을 만든 게 아닙니다." 라는 문구를 사용하면서 언급되는 캐릭터로 "돼지"가 된 "부모"가 있다.

『프리미어』수록내용원본
- 그 부모를 왜 돼지로 변하게 한 건가요?

치히로가 주인공으로 되기 위해서는 방해가 되니까요. "빨리해"를 계속 말하거나, 우호적으로 비위를 맞춰주는 부모 밑에서는 아이는 자기 힘을 발휘 못 합니다. "부모가 있기에 아이가 자란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비꼬기 위해서 돼지로 한 게 아닙니다.진짜로 돼지로 되고 있었으니까요. 버블 시기의 많은 사람들이, 그 이후에도. 지금도 있잖나요. 브랜드 돼지나 희귀 돼지가.

이후에 잡지 일면의 반을 쓰면서 돼지 비판으로 이어간다. 원본
(중략)
일본인이 돼지라는건 이미 끝났어요. 돈이 된다고 골프 회원권을 구매한 녀석들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다들 알고 있잖나요. 그 버블이라는 것은 갑자기 생긴 게 아닙니다. 쇼와 20년부터 40년에 걸쳐서 엄청난 기세로 이쪽으로 돌진해 왔자나요. 일하는 것에 아무런 고민도 안한 청년들이 지금의 부모 세대나 아이들을 만든 것이기에, 이미 거기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12]

『치히로의 대모험(千尋の大冒険)』 원본
(중략)
돼지에게 뭔가를 걸려고 풍자의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당나귀로 된다는 이야기는 잘알려지고 있었으니까, 당나귀라도 좋았지만... 예로 들면 피노키오가 놀이공원에 놀고 있으면 어느샌가 귀가 길어져서 당나귀로 변하고 있었다는 건 아주 재미있었어요. 디즈니의 "피니키오"라는 영화 속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술에 취하면서 당구치는 피노키오를, 저는 두근거리면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퇴폐적인 걸 좋아하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그 본가인 디즈니가 건전한 디즈니랜드 같은걸 하기 시작하니, 뭐가 뭔지. 지브리에도, 그곳(디즈니)에도 푹 빠지고 있는 여자애들이 있는데, "분명 어느샌가 귀가 길어져서 당나귀가 되겠지"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각 캐릭터는 피노키오의 당나귀와 같은 맥락으로 변해버린 말로이며, "풍자하기 위함이 아니다"라는 언급은, 풍자함으로서 회생이나 변화가 불가능한 현 부모세대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지브리에 대한 체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오나시가 치히로에게 사금을 건네주고 호의를 가지는 장면은 '어린아이가 선물로 남의 환심을 사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가오나시는 남들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로, 얼굴과 목소리, 고정된 형태의 모습이 모두 없지만 그런 가오나시를 알아본 것이 치히로였고, 그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이다.
"가오나시가 인기를 얻은 이유는 일본의 심각한 불황과 연관이 깊다. 지금 일본에서는 '강하지 않으면 험난한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일본영화의 주인공도 주로 강한 인물이다. 그런 흐름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최대 특징은 가오나시로 드러나는 약자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이 일본인들에게 어필한 것 같다."

이와 같은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의 발언으로 미뤄보면 치히로가 관심을 가져준 것(=배려)에 대한 호의를 보였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가오나시는 치히로가 괜찮다며 거부하자 크게 당황한다. 이것은 치히로가 세속적이지 않은, 때타지 않은 순수한 아이라는 면을 묘사하는 연출로 볼 수 있다. 또한, 가오나시가 치히로의 거부에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그 어떤 이도 알아주지 않은 '잊힌 자' 가오나시가 인정받은 보답을 물질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영화에서 가오나시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몰라주던 자였는데, 사람들이 사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사금을 뿌려 엄청난 관심을 얻게 된다. 하지만 치히로는 가오나시의 이러한 호의를 거절했고, 가오나시는 이내 분노하여 목욕탕을 헤집고 다니지만 이후 치히로와 함께 제니바의 집에 가 제니바를 도와주는 생산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때문에 가오나시는 사회에서 소외된 외톨이가→돈으로 인해 유례없던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자 물질주의에 찌들어 자신의 고유함과 능력 대신 물질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존재에서→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존재로 성장해가는 캐릭터로 해석된다. 이런 맥락에서 치히로가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 것도, 하쿠가 이름과 본모습을 잊어버린 것도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환경에서 자신만의 고유성을 잃게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회춘'이라는 글자만으로 매춘설에 무게가 실리기에는 영화의 흐름에 큰 영향을 끼치고 간 오물신과 그다지 맞지 않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일본인들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신들의 세계로 처음 갔을 때 낡은 유원지를 보고 치히로 아버지가 90년대에 유원지를 많이 건설하였지만 다 망했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 시절 경제 호황으로 테마파크 건설이 많이 이루어졌지만 결국 버블이 무너지고 망했다. 완공되지 못하고 버려진 유원지들이 많았다. 가오나시는 욕망과 탐욕의 빠진 사람으로 사금을 주어서 종업원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손놈 짓을 하지만 다들 사금의 열광한다. 이 또한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로 버블경제 시절 땅투기로 벼락부자가 되어서 돈을 물 쓰듯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3]

작중 치히로 부모의 차는 아우디 A4 콰트로 1세대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거품경제 이전에는 외제 럭셔리 브랜드 차량은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거품경제 시대에는 갑자기 벤츠가 길거리에 흔해빠진 차량이 되어 버렸고, 보다 특별함을 원한 사람들은 BMW, 아우디 등으로 눈을 돌렸다. 즉 치히로의 부모는 일본의 거품경제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다. 아래의 해석과 연관지어서 보면 더더욱 그럴 듯하다. 사실 차를 보고 치히로의 부모가 거품경제 세대라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일단 작중 등장하는 차는 4륜인데, 아우디 A4는 원래 전륜구동 차이며 4륜구동인 고성능 모델은 S4이며 일본 버블이 무너진 이후에 출시된 차다. 또한 작중 아버지가 "1990년대 즈음에 이런 놀이공원이 많았는데 버블이 무너지면서 다 망해버렸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작중 시점이 버블이 무너진 이후란 것을 볼 수 있다. 작중 시점은 명시되지 않지만 이러한 묘사를 보면 아무리 빨라도 1990년대 중후반 정도인데[14], 이 시점에 10살 딸을 둔 젊은 부부가 거품경제 세대라고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 앞 대사처럼 본인들이 버블에 대해 예전 일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다. "1980년대의 브랜드 돼지 놈들"이란 표현은 이들이 거품경제 세대가 그런 것처럼 황금만능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란 걸 의미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즉, 거품경제 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경제적 여유를 누리며 '돈이면 다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란 소리지, 작중 시점에서 이미 몰락한 사람들이라고 보긴 힘들다.[15]

2.3.1. 미야자키의 제작의도

그렇다면 이 작품이 이런 은유들을 통해 관객들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바는 무엇일까? 미야자키는 치히로가 온갖 고난을 겪는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어린이는 여러 가지 체험을 하며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런 과정을 지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오지 않는다. 그걸 표현하고자 했다. 어린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영화라서 좋은 결말이 났다고 생각하길 원치 않는다. 이런 일은 보통 어린이들에게 일어난다. 친구 딸에게 전달하고픈 것도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10살짜리 친구 딸에 대한, 또 그러한 아이들에 대한 헌정 영화이다. 이 밖에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본작의 테마에 대해 '매춘'이 아니라 '자립'을 중점으로 설명한다.

『센과 치히로 제작기획서』의 제작의도부분 발췌
원본
이 작품은 무기를 휘들거나, 초능력의 대결은 없지만 모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모험이라고 하지만, 선과 악의 대결이 주제가 아니며, 선한 자도 악한 자도 둘다 섞여서 존재하는 이 세상이라고 말할 수 도 있는 곳에 말려들어가, 수행하고, 우애와 헌신을 배워, 지혜를 발휘하여 생환하는 소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녀는 극복하고, 피해 가면서 일단은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지만, 세상이 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그건 악을 멸하였기 때문이 아니며, 그녀가 살아가는 힘을 획득한 결과인 것이다.

지금 세상이 모호해졌고, 모호해진 주제에 침식하여 먹어려고 하는 세상을, 판타지라는 형식을 빌려 뚜렷이 그려나가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과제이다.
허구한 날 패닉에 빠져 「거짓말!」하며, 그 자리에서 쭈구려 앉아버리는 인간이 대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치히로와 같은 상황에 놓이면, 바로 사라져 버리든지, 먹혀버릴 것이다. 치히로가 주인공일수 있었던 자격은 실은 먹히지 않았던 힘에 있다고 말할수 있다. 결코 미소녀여서라든지, 특출난 마음씨를 가져서 주인공이 되는게 아니다. 그 점이 이 작품의 특징이며, 그러기에 10살 여자아이들을 위한 영화이기도 하는 것이다.

말은 힘이다. 치히로가 말려들어간 세계에서는 말을 내뱉는 것이 되돌릴 수 없는 무게를 가진다. 유바바가 지배하는 유야에서는 「싫어요」, 「돌아갈래」라고 단 한마디라도 말하면, 마녀는 바로 치히로는 내쫓고, 그녀는 방황하다가 소멸하든지, 닭이 되어서 죽을 때까지 알을 낳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여기서 일한다」라고 치히로가 말을 하면 마녀라 한들 무시할 수 없다.

『오리카에시텐』수록내용
원본
기자 : 이 작품에 등장하는 치히로 이외의 캐릭터는, 판타지의 세계에 분방헤게 살고있는 느낌이 있는데, 모모타로가 오니가시마에 가서 오니를 퇴치하러가는데, 섬에 도착하자마자 오니들이 항복해버리는 것처럼, 요즘은 옛날전래동화가 순화되는 풍조가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야자키 : 카치카치야마에서 너구리가 할머니를 죽이는 부분이라든가, 그런 이야기는 전후에 바로 그렇지 않는 이야기로 변경되어서, 점점 골자가 빠져나갔습니다. 이건 아이들 속에서 전래동화의 힘이 상실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마 전래동화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멋대로 손본 것이겠죠. 예로 들면 샤를 페로의 동화나 그림의 동화등도 그렇지만, 진짜로 피비린내 나는 죽음의 이야기도 많이 있습니다. 빨간 두건이야기도, 원래는 잡아 먹혀서 끝입니다.
멍청한 아이는 먹혀버린다. 이 세계 그 자체인거죠.
이야기 자체에 매력이 있으니까, 나중에 가서 사냥꾼이 늑대의 배를 갈라서 구출하는 이야기로 발전하여, 살아남은 것이지만요. 아마 모모타로의 이야기는 일본의 해외 침략등으로 동일시 당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 쉬운 플롯이니까 그런 식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역주:전래동화)에 손보는 것 자체를 그만하는게 좋습니다.

『프리미어』수록내용
일을 안해도 괜찬아. 대신 일을 안하면 사라져 버린다. 노골적인 설정이지만,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지금 세상에 많이 있죠. 어느 쪽을 선택해도 되는데, 치히로는 사라지기 싫었던 거죠. 일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해야 하니까 일하는 것이고,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프리터(백수)가 되었다고 해서, 그 영향밖이라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로망스 앨범』수록내용
(중략) 사람은 사회적 생물이기에 기본적으로 사회와 관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살 수 없어. 일을 할 수 밖에 없어요.
- 감독님도 부지런한 분이죠?
난 일하는 걸마다하지 않아. 일하는게 좋아하기도 하고. 자기 번뇌 때문에 "조금 더 좋은 영화로 하고 싶다"라는 욕심을 내니까, 막판에 개판이 되버리지. 스텝들이 8시간 노동으로 집에 갈 수 있는 콘티를 쓰고, 관객이 많이 들어가주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제일 좋은데,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쥐어짜가면서 영화를 만들지. 그렇다고 해서 노동이 신성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치히로의 대모험』수록내용
이 스튜디오에서 여러 직군의 신인을 보고 있으면, 대부분 예의바르고 성실히 노력을 합니다. 다만 불행하게도 이 업종의 특징상, 재능이나 적성을 요구하는 부분이 많아서, 좌절해버리는 사람이 있지만, 다들 치히로정도는 열심히 일합니다. 멋진 일이라든가, 개성적인 삶 같은 걸 이야기하니까 다들 모르게 되는 겁니다. 살기위해서 일한다고 결심하면 더 힘을 낼수있어요. "영화이니까 가능하다"가 아니라 "나라도 가능하다"라는 느낌의 세계로 하고 싶었습니다. "세계는 이 이상으로 복잡하지도 않아", "아저씨는 거짓말 안해"라고 말하려는 의도로 만들었습니다.

미야자키는 잔혹한 세상을 판타지라는 형식으로 뚜렷하게 그려나가는 잔혹동화의 연장선에서 그려나가고, 제작당시에 일본에서 대두되고 있던 니트같은 사회문제를 은유하며, 아이들에게 그걸 헤쳐나가는 힘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잠재력이며 그것을 발휘하게 하는 수단은 노동이라는 취지로 제작한 걸 알수있다.

설령 목욕탕이 풍속시설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한들, 치히로가 겪는 사건들이나 극의 전체적인 전개, 미장센 등을 봤을 때 이는 버블경제로 인한 호황과 상업 시설들을 대변하는 장소로 해석되며, 그곳에서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치히로의 성장기 정도로 해석되지, '매춘'이라는 면에 국한시켜 작품을 해석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 매춘을 암시한다고 보이는 것들도 영화의 내용이나 메시지와 상관이 없으며, 그냥 그렇다는 정도이지 거기서 더 깊게 해석하기에는 무리다. 굳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를 기반으로 해석하자면, "자본주의로 찌든 현대사회는 손님을 만족시키고, 한없이 소비하고 돈버는 풍속산업과 같다."' 정도다.

결론적으로는 풍속시설이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본작을 만드는데 있어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나[16] 본작의 모티브는 풍속시설 뿐만 아니라 도고온천이나 스튜디오 지브리 등의 장소들도 서사적, 공간적으로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면면을 합쳐 '당대 일본 사회를 은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17] 더 관련된 얘기는 오기노 치히로 항목과 위의 '성장물인가?' 문단 참조.



[1] spirit에 특별한 동사 뜻이 없었다고 한들 영어는 어순과 문맥에 따라 명사가 동사로 자연스럽게 응용될 수 있는 고립어이기 때문에 역시 가능하다. 꼭 어미와 조사가 필수적인 교착어한국어는 이런 식의 응용이 불가능하다.[2] '신이 숨긴 소녀'라는 뜻이니 뜻 자체는 가장 원문과 통한다.[3] “最近の映画から成長神話というようなものを感じるんですけど、そのほとんどは成長すればなんでもいいと思っている印象を受けるんです。だけど現実の自分を見て、お前は成長したかと言われると、自分をコントロールすることが前より少しできるようになったぐらいで、僕なんかこの六十年、ただグルグル回っていただけのような気がするんです。だから成長と恋愛があれば良い映画だっていうくだらない考えを、ひっくり返したかったんですね。”[4] "최근의 영화에서 성장 신화라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성장하면 뭐든지 좋다고 여기는 인상을 받습니다."라는 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성장도 성장 나름이라는 것.[5] "하지만 현실의 자신을 보면, (누군가가) 너 성장했냐? 라고 물어보면, 자신을 통제하는 것은 예전보다는 조금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으로, 나의 경우 이 60년, 그저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미야자키 감독의 말이 그 근거. 그렇다면 이 경우 앞에서 언급한 "최근의 영화에서..."라는 말은 "성장이다 뭐다 하고들 있지만 사실 성장이라는 것은 없으며, 그저 (뭔가를 배워나가면서)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을 예전보다는 조금 더 할 수 있게 되는 것뿐이다."라는 뜻이 된다. 한마디로 센은 그 자체로 완성된 인물이라는 것.[6] 미야자키는 1985년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TV 방영 시 선전을 위해 TV에 출연해서 나우시카의 모델이 있냐는 질문에, '이런 사람이 있을거야 라기보다는, 이런 사람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인터뷰 한 적이 있다[7] 1~2초 정도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복선도 나온다. 보오가 햄스터에서 다시 보오로 돌아오자 유바바가 놀라는 장면에서 유바바와 보오에게만 시선이 집중되기 쉬운데 그 뒤의 돼지들을 자세히 보면 되돌아온 보오를 보고 놀란 돼지들이 마치 돼지가 아닌 것처럼 사람같은 표정을 짓는다. 이 장면을 잘 살펴본 후엔 치히로가 돼지들을 살펴볼 때의 동물같은 반응이 연기라는 걸 알 수 있다.[8] 본 영화에서 변한 돼지도 12마리이다. 숫자까지 따온 모양.[9] '매춘'이라는 키워드는 일본의 영화 평론가 마치야마 도모히로(町山智浩)이다(해당 2004년 블로그 글 #, #[18] )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한 해석이 나오면서 영화 해석으로는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언급이 되었다. 이후에 이 해석이 번역자 미국 영화사이트 CBR의 기자 "Jonathon Greenall"가 센과 치히로의 매춘묘사 해석에 관해서 "어린 친구를 위해서 만든 작품에서 그럴리는 없다", "그러한 해석은 불쾌하다"라는 기자의 의견과 억측을 쓴 기사를 작성했다.# 이것이 한국에 전해지면서 작품의 등장무대와 배경이 매춘에 관해 비유하고 있다는 '괴담'으로 전달되고, "Jonathon Greenall"의 기사를 번역하는 차원에서 기자의 의견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발언으로 오역되어, 미야자키 하야오가 직접 아니라고 부정했다라는 루머가 탄생되었다. 2001년에 개봉한 영화의 인터뷰들이 2004년에 있을 블로그를 먼저 해명하는 건 시간상 불가능하며, 그때는 이미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제작에 집중하고 있는 때이다. 무엇보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전집의 해설/해석으로, 위 매춘묘사를 유일하게 언급한 영화 평론가 마치야마 도모히로를 해설서의 집필자로 지명하고, 지브리에 초청한 뒤,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작품을 보게 하여 공식 해설서를 만들었고, 지브리가 검수한 공식해설집에도 매춘(풍속산업)으로 표현한 것은 실려있는 사실이다.[10] 원문: 鈴木敏夫プロデューサーを初め、僕も凶暴になることはしょっちゅうありますし、わめき散らすし頭も湯婆婆のようにでかいですし、若いスタッフにとってはそういう、自分の爺さんの年の人間が、血相変えて怒鳴ったら怖いですからね。で、それだけで十分な悪役になると思うので、こういう、ジブリをモデルにした映画を作りつつあるわけです。[11] 원문: そこ(編注:スタジオジブリ)で働かないことにはどうしようもない立場の子が現れたら、どういう目にあうんだろうとリアルに考えてみた時に、この物語が出来てきたんです。[12] 해당 발언에 이어, 대량소비사회 비판과 에반게리온같은 자아찾기 작품 비판, 울트라맨의 몇화에 어떤 괴수가 나왔냐 등의 쓸데 없는 숫자놀음/설정놀음에 몰두하는 오타쿠들 비판을 하면서, 이러한 퇴폐사회에 살아야하는 아이들은 선세대가 만든 짐을 짊어지고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있다.[13] 여담으로 간접적으로는 가오나시와 후반부 극전개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카부키 연극이 존재한다. 아부라야 소동(油屋騒動)사건과 그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카부키 연극/소설/영화인 이세온도코이노네타바(伊勢音頭恋寝刃)라는 이야기가 있다. 사건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돈만 남아도는 의사가 "아부라야"라는 온천유곽에 갔다가 거기서 잡일하는 시중인 소녀에게 반해 그 소녀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그 때 유곽에 단체고객이 와서 주인 노파가 단체고객준비를 위해서 소녀를 불러서 대응시키자 의사는 자기가 소녀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 유곽에서 칼부림을 벌여 유곽 종업원 및 손님 9명을 공격, 3명이 사망한 사건이다.[14] 차의 헤드라이트 모양을 본다면 97년에 출시된 S4의 B5 모델에 가장 가깝다.[15] 당시 흔치 않은 외제차를 몰고, 엄마는 귀걸이와 목걸이를 주렁주렁 달고 있으며, 새로 이사가는 파란 지붕의 집도 꽤 규모가 큰 이층집이다. 즉, 작중 시점에서 이미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집안이다.[16] "미야자키는 유야에 대해 “지금의 세계로서 그리려면 무엇이 가장 합당한가 하면, 그것은 풍속 산업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은 모두 풍속 산업 같은 사회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 출처 '지브리 교과서 12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ジブリの教科書12 千と千尋の神隠し)', 원문: "宮崎は湯屋について「今の世界として描くには何がいちばんふさわしいかと言えば、それは風俗産業だと思うんですよ。日本はすべて風俗産業みたいな社会になってるじゃないですか"」と語っている。[17] "저는 이번에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다.", "너희들이 나가야 하는 세상이다"라는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전 거짓말을 해서, 허울 좋은 말을 해서 지금 있는 세상을 내 친구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처 '지브리 교과서 12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ジブリの教科書12 千と千尋の神隠し)', 원문: 僕は今回「これが僕の知っている世の中だ」「君たちが出ていく世の中だ」と思ってこの映画を作ったんです。僕はウソをついて、きれい事を言って、今ここにある世界をその友人の娘たちに見せたいとは思わなかったんです。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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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해당 평론의 근본이 된 개봉직전인 2001년 6월 1일의 잡지"プレミア" 인터뷰기사 일부 발췌 (모자이크 처리)1, 2, 3, 4과, 『折り返し点』P255,256,258,259 일부발췌 (모자이크 처리)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