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03:42:46

세계 4대 해전


1. 개요2. 진위성 논쟁
2.1. '원조 4대 해전' 논쟁2.2. 한국에서의 '한산도 대첩 포함' 논쟁
3. 진실

1. 개요

'세계 해전사상 가장 중요한 네 번의 해전'을 통틀어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진위 여부는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 한국에서도 한산도 대첩이 포함되느냐의 여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데, 이에 대해서는 신빙성 있는 출처가 지금까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2. 진위성 논쟁

2.1. '원조 4대 해전' 논쟁

  • L: 레판토 해전 Battle of Lepanto
    베네치아, 제노바, 에스파냐신성동맹 함대 vs 오스만 제국

    역사적 의미: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은 것.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의 팽창정책을 포기하게 된다. 당시 오스만의 재상이었던 소콜루 메메드 파샤가 콘스탄티노플 주재 베네치아 대사와의 회담에서 '키프로스는 팔과 같고, 우리네 패전은 수염과 같다. 당신네들은 팔을 뽑혔으니 다시 자랄 리 없지만, 우리의 수염은 다시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했을 정도로 오스만 제국은 이 해전에서 입은 피해를 금세 복구했으나 그것은 함선뿐이었고, 숙련된 선원들과 병사들을 대거 잃은 피해는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1]. 더군다나 이후 오스만 제국에서는 암군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한편 하렘 세력이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등 국정에 혼란을 겪으며 침체기를 맞이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1683년에 2차 빈 공방전에서 패하면서 육지에서의 팽창도 멈추었고,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가끔 레판토 해전이나 악티움 해전이 빠지고 칼레 해전(영국 vs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이 들어간 경우도 있다.
보다시피 누가 선정했는지는 몰라도 지극히 서유럽 중심의 편견에 바탕을 두고 선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술적으로 일시적인 승리를 가져왔지만 전략적으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 레판토 해전[2]이 껴 있는 것도 논란이 많다.

엄밀히 말해 (악티움을 제외한) 세계 3대 해전의 의미는 역사적 변환점이 아니라 해전양상의 변환점이다.
  • 살라미스는 전함 간의 충돌을 이용하여 격파하는 방식의 해전의 시작이고,
  • 레판토는 최초로 함포위주의 전투,[3]
  • 트라팔가르는 기존의 라인배틀 개념이 해전에서 극복되었음을 상징한다.[4]

이런 맥락이라면 뒤에 나오는 한산도 대첩의 의의는 사령선 우선 점사와 육전과도 같은 유연한 진형 운용등의 의의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드웨이 해전은 항공기의 효과적 활용, 쓰시마 해전은 한산도 대첩과 같은 의미로 들어갈 수 있다.[5]

일단 세계 해전사를 연구하는 관점에서 이들 전투는 꼭 숙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세계 3대 해전은 변환점 이외에도 해당 내용의 교과서적 답안을 작성한 해전이니…. 예를 들어 범선시대 포격전을 연구한다면 칼레 해전의 상세한 내용을 분석해나가야 한다.

2.2. 한국에서의 '한산도 대첩 포함' 논쟁

한산도 대첩이 세계 4대 해전에 속한 것을 외국의 해군 사관학교 등에서 보았다는 글들이 종종 올라온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예고편에 인용되었을 정도.

그런 글에서 주장되는 한산도 대첩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정예군이었다. 한산도 해전이 실패하여 수륙병진작전이 진행되었다면, 조선은 멸망했을 것이고 그들은 조선을 병참기지 삼아 그대로 명나라으로 진격했을 것이다. 후금팔기군에게도 망했던 명군이니 승패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여하간 이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권이 망하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이후 일본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은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역사학적으로 사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굳이 따지자면 명나라는 청나라에 망한 게 아니라 이자성의 농민 반란군에 망했다.[6] 청나라는 명이 망하는 그 순간까지 산해관에 막혀서 진입을 못했고, 오삼계가 문을 열어주자 그때서야 관내로 들어올 수 있었다. 물론 청나라가 위쪽에 버티는 바람에 반란군을 진압할 수비군을 못 보낸것도 원인이긴 하지만. 일본의 막부가 쇄국 정책을 고수하게 된 것도 한산도 대첩의 나비효과라고 보기에는 매우 무리한 접목이며, 견당사 폐지 이후 역대 다른 막부가 실시했던 정책과 비교하여 특히 심한 쇄국이라고 할 수준도 아니었다. 오히려 에도 시대 일본은 네덜란드를 필두로 유럽 문명과 교류하고 자포네스크 문화를 알리면서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방대한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이 당대 조선이나 청나라의 외교상황과 비교하여 특별히 더 쇄국적이라 할 수는 없다.

간간히 명량 해전을 집어넣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실 명량 해전기에 접어들면 일본도 대륙정복 희망은 접어놓고 "조선 하3도 확보"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떡밥의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7]

한국의 한 군사 잡지에서는 예전에 함포의 발달사에 대한 기사를 다루면서 살라미스 해전, 한산도 대첩, 트라팔가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을 세계 4대 해전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선정의 이유는 살라미스 해전은 해전이 전쟁의 향방을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 한산도 해전은 함포가 해전의 주역으로 등장한 사례, 트라팔가르 해전은 함포전의 절정에 달한 사례, 미드웨이 해전은 함포가 해전의 주역에서 퇴장하고 항공기가 새 주역에 등극한 사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8][9]

헐버트 박사의 한국사라는 책에서는 한산도 대첩에 대해서 '넬슨 제독이 스페인 무적 함대를 살라미스에서 물리친 격'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는데, 이를 인용해 4대 해전을 만든 것 같다.

딴지일보에서 세계 4대 해전에 대해 검색해보려고 했는데 어떠한 결과도 안나오고 세계 10대 해전을 묻는 투표 밖에 안나와 결국 리그베다위키를 참조 했다고 한다. # 어디를 찾아봐도 나무위키 말고는 세계 4대 해전을 찾는일이 쉽지 않다.

3. 진실

2016년 12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쟁사 학술지 <군사>(軍史)지의 제101호에 실린 "‘세계 4대 해전’의 근거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은, 그동안 국내에서 알려져 온 '세계 4대 해전론과 한산도 대첩의 포함 여부'에 대해 처음으로 학술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논문의 결론은 세계 4대 해전 논쟁의 담론 자체가 오해와 와전의 산물일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해당 논문의 저자인 석영달(해군사관학교 군사전략학과 조교수)은 국내에서 이순신과 관련하여 '4대 해전'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호러스 호튼 언더우드[10]가 1933년에 쓴 <한국의 배와 함정들>(Korean Boats and Ships)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언더우드는 한산도 대첩을 비롯한 임진왜란기의 4대 해전들(즉, 옥포, 당포, 부산)을 동시기 영국-스페인 무적함대의 칼레 해전과 비교하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 말해 언더우드가 말한 '4대 해전'은 모두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이 지휘, 승리했던 해전을 가리킨 것이었고, 칼레 해전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해전(예: 넬슨의 트라팔가 해전)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번역한 최재수(당시 한국해양대학교 교수) 씨가 언더우드의 4개의 큰 규모의 해전이라는 표현을 '4대(大) 해전'이라고 번역하였고, 이것이 곧 와전되어 대중들에게 한산도 해전이 세계 '4대 해전'에 포함되는지를 따지는 논란의 빌미를 던져주었다는 것이다.

간추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세계 4대 해전의 정확한 출처는 어디에도 없다.
원 출처는 리즈시절 영국해군에서 가르치던 해전사에 등장하는 세계 3대 해전이다. 이는 각기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이며, 이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또 국가에 따라 4대 해전(한국, 미국, 독일 등), 5대 해전(일본) 등으로 [11]확장하기도 한다.
2. 근거가 있다고 해도 지극히 영국적인 편견의 산물이며, 어떤 해전을 가리키는지는 국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이게 생각난다.

요약하자면 이른바 '세계 4대 해전'은 실질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는 것. 연연할 필요가 없다.
세계 3대 진미의 영국버전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애당초에 사대천왕과 같은 ~대...의 대는 클 대자이다. 따라서 사대/천왕이 아니라 사/대천왕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언제부터 4대/천왕, 7대/불가사의 이런 식으로 쓰였는지는 불분명하다.


[1] 당시 해전은 서로 배를 맞대고 병사들이 무기를 들고 적선으로 돌입해 백병전을 치러 육군과 다를 바 없었지만, 바다에 적응하고 흔들리는 배에서 적군과 싸울 정도로 숙련되는 게 금방 되는 일이 아니었다.[2]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음에도 전투직후 당시 연합국(스페인, 베네치아, 교황령 등)의 분열로 이 승리를 제대로 활용(직전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긴 키프로스를 탈환한다든가)하지 못했고 그 사이 오스만 제국은 제국이란 이름에 걸맞게 함대 규모 자체는 금방 복구했기 때문에 패한 오스만 제국도 위의 보충설명에도 나오듯 별로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치 않을 정도였다.[3] 레판토에서 함포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함포 위주의 전투는 아니었다. 레판토에서의 주된 전투방식은 여전히 갤리선들간에 이루어진 화약시대 이전의 무기, 즉 활과 석궁에 의한 원거리전 및 백병전이었다. 따라서 최초의 함포위주의 대규모 전투는 칼레 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4] 계몽주의 시대의 전쟁 문화는 당대의 이성적 세계관을 반영해 라인을 통해 화력을 미리 극대화하는 데 중점이 있었다. 육전에서 레드코트가 횡대를 이루어 정연한 총격을 가하는 것처럼 해전에서는 전열함이 전열(line)을 이루어 교전을 벌이고 양측 모두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전열을 갖추는 것을 우선시하던 해전의 양상이 중앙돌파에 이은 포위 공격처럼 매 순간순간의 변화에 맞추는 우연 효과를 노리는 낭만주의로 전환하였기에 소극적으로 서로의 소모만을 누리던 기존의 틀을 벗어나 결정적인 전투를 벌인다는 개념이 명확해졌다. 이렇게 기회를 포착하면 전열을 흐트러트리더라도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모험적 시도들이 전에도 있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그리고 극적인 지점이 트라팔가르에서 빅토리 함상의 넬슨이다.[5]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과 비교하여, 도고의 정자진이 주로 조명되다보니 대중적으로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쓰시마해전은 더마레스크를 통한 중앙통제 함포사격이 적용된 대규모해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영국은 중앙통제를 통한 일제사격 시스템을 일본 해군에 소개했고, 일본은 발틱함대를 기다리는 몇 달간 이를 적용함과 동시에 훈련하여, 높은 정확도의 포격으로 발틱함대를 압도했다. 쓰시마해전에서 실효성이 확인된 중앙통제 함포사격은 이후 드레드노트를 필두로 한 후대 전함들의 함포 교리의 기초가 된다[6] 이자성의 반란군이 북경을 점령할 때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고 이후 이자성과 부하들이 기고만장해져 북경의 관리들과 부자들을 핍박하는 와중에 산해관을 지키는 오삼계의 가족들이 살해되었고 이에 격분한 오삼계가 청과 협상해 산해관을 청에 넘겨주고 휘하 군대를 끌고 북경으로 진격해와 이자성의 반란군을 철저하게 토벌한 것이다.[7] 다만 일본이 당시 전략 목표를 하향조정 했다고 해서 명량해전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도 명량해전은 전세계에서 비슷한 예조차 찾을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차를 극복한 해전이고, 그로 인해 정유재란의 흐름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해전사적으로 보면 지휘관의 실력과 함선간 성능 격차는 수적 우위를 뒤집을 수 있다는 거의 최초의 사례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심각한 전력차이 때문에 재현은 커녕 다시 시도할 일 조차 거의 없으므로 다른 해전에 끼칠만한 영향력은 없었다.[8] 그러나 국내 최초의 함포 해전은 1380년 진포해전으로 한산도 해전과 200년 이상, 처음 함포가 해전에 동원되었던 백년 전쟁하고는 250년 이상 차이난다.[9]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자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투가 맞긴 하지만, '항공기가 함포를 밀어내고 해전의 주역이 된 전투'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침몰한 주력함은 모가미급 중순양함 미쿠마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항공모함이었으니 함포가 해전의 주역에서 퇴장했다고 보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있다. 항공기가 전함을 침몰시키고 주역이 된 전투만 봐도 진주만 공습부터 시작해서 말레이 해전, 비스마르크 추격전 등이 있다.[10] 구한말 선교사이자, 연세대학교의 창립자인 언더우드의 아들이다.[11] 쓰시마 해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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