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21:58:01

삼전도의 굴욕

삼전도의 치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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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황제공덕비[1]

1. 개요2.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3. 인조의 환복4. 결과5.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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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被擄子女望見, 號哭皆曰: "吾君、吾君, 捨我而去乎?" 挾路啼號者, 以萬數。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청으로 인질, 노예 등으로 끌려가는 사람을 이름)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1637년 2월 24일(인조 15년 음력 1월 30일) 청나라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한다. 그러나,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강화조약을 맺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실록의 기록(효종실록, 현종실록 등)을 보면, 정축년 정월(1월)에 에서 내려왔다는 의미로 단순히 정축하성(丁丑)이라고만 표기했는데, "인조가 정축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왔다" 정도로 써놓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실록에는 이렇게 기재되긴 했지만 병자호란 전후의 사정을 바라보고 이 표현을 곱씹는다면 실제보다 굉장히 순화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검열삭제해서 쓰인 편이다.

본 문서의 제목인 '삼전도의 굴욕'으로 본 사건 표기가 정착된 정확한 때는 알기 어렵다. 민간에서 이미 "삼전도에서 당했던 욕(辱)"이라고 에둘러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1945년 해방 이후 전근대 역사를 정돈하며, 또는 역사문학이 성행하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보기도 한다.

삼전도(三田渡)는 현재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였다. 지금 그곳은 개천을 메워 섬이 아니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적어둔 비석인 삼전도비가 원래 세워진 위치와는 다른 위치에 남아있었는데 2007년 페인트 또는 스프레이로 테러가 있은 후 2010년 복원하여 원래 있었던 위치인 롯데월드 석촌호수 근처로 돌아갔다.

한낱 번국 오랑캐라며 무시한 여진족에게 만인지상의 임금이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했기 때문에 당대에도 1910년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조선왕조 역사상 최대의 굴욕적인 사건' 으로 취급되었다.

2.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라는 뜻.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라고도 칭해진다. 무릎 1번 꿇을 때마다 3번 조아려서 총 9번.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절하면서 머리를 바닥에 마구 찧어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거나, 인조가 머리를 찧는 소리가 단 위의 청 태종에게 제대로 들릴 때까지 절을 계속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삼궤구고두례가 당시 조선에서 생소한 예법이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식 예법은 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이다. 그리고 이 삼궤구고두례를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온 오해에 가깝다. 즉 '3*9=27번 머리통 박치기(...)로 피가 철철 났더라'는 식의 후일담은 사료상의 근거가 없다. 청나라 때 예법을 보면 저렇게 쓸데없이 길고 격하게 27번이나 했다기보단 1번 절하면 3번 머리를 조아리고 하는 것을 3회 반복하는 것 정도가 거의 확실하기 때문.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선통제)의 등극 장면에서도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을 봐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장수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 : 의식 순서를 소리내어 읽는 것)하게 하였다. 상이 삼궤구고두의 예를 행하였다.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일단 '삼궤구고두례'라는 이름의 항복 예를 치른 것은 분명하지만, 청나라의 예절 방식이라 이 때 처음 언급될 정도로 조선에 생소한 방식인데다가, 왕이 겨울에 맨바닥에서 오랑캐에게 절한다는 치욕스러운 장면이라 그런지 '삼궤구고두례를 했다.'는 언급만 있고 그 장면에 대한 서술은 실록에도 실려 있지 않다. 따라서 지금으로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절을 했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단이 없다.
예부의 관원이…이종의 반차(班次)[2]에 대해 주청하자, 상이 말씀하시길, "위세로써 그를 떨게 하는 것은 덕(德)으로써 그를 품는 것만 못하다. 조선의 왕은 비록 병세에 몰려서 내귀하였지만, 역시 한 나라의 왕이다." 명을 내려 앞으로 다가와 좌측에 앉도록 했다. 예부의 관원이 의장 바깥으로부터 왕을 안내하여 북측을 향하면서 들어오게 하였고, 단 아래에 이르러 동쪽에 앉아 서쪽을 향하게 하였다. 그다음으로 좌측에는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등의 순서로 앉았고, 이종의 장자 이왕이 버아러의 아래에 앉았다. 우측은 호쇼이 친왕, 도로이 군왕, 도로이 버이러 등의 순서로 앉았고, 이종의 차자 이호3자 이요 역시 버이러의 아래에 앉았다.
《청태종실록》 33권 숭덕 2년 정월 30일 1번째 기사

삼궤구고두례가 패자가 승자에게 올리는 의식으로서, 사실 항복 의식 자체로만 봤을 때 딱히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은 아니었다. 삼궤구고두례는 어디까지나 청나라에서 평범한 '신하가 황제에게 바치는 예의를 차리는 것'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한 나라의 왕으로 대우를 받은 인조의 석차는 호쇼이 친왕보다 높은 황제 바로 아래였다. 따라서 청나라 측은 명나라를 버리고 "패자면 패자답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라"가 아니라 "황제 폐하께서 친히 이곳으로 행차 하셨으니, 지금이라도 너희들이 신하로서 예를 올려라." 정도의 의미였다.

다시 말해, 황제가 직접 왔으니 신하의 예를 갖추라는 퍼포먼스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입장에서는 왕이 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면서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굴욕적인 일이었겠지만, 청나라 입장에서는 매일 신하한테 받는 인사도 삼궤구고두례였고 전쟁 영웅이 황제 앞에서 축하받을 때도 하던 예가 삼궤구고두례였다. 즉, 그냥 황제를 알현할 때 행하는 일반적인 인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사에 관심 있거나 삼국지 등을 즐겨 읽은 사람이라면, 진짜 패자가 치르는 항복 의식을 대강 알 것이다. 초한전쟁 당시 진왕 자영의 항복 의식이나 삼국지 중에 촉한의 후주 유선의 항복 장면을 보면 나라의 인장을 바침과 아울러 스스로 염을 하고 머리를 풀어헤친 후 관짝을 들고 항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를 함벽여츤(銜璧輿櫬; 옥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지다)이라고 하는데# 머리를 풀어헤쳤다는 것은 죄인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관짝을 들었다는 것은 "패자인 나를 죽이든 살리든 너희들이 마음대로 해라" 라는 의미다. 이게 바로 중국 전통의 진짜 항복 의식이다. 이에 비하면 인조의 항복 의식은 항복 의식이라기보단 번국의 왕이 종주국의 황제를 만날 때 취하는 예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중국 사극에서 봐도 시간 분량상 많이 나오진 않지만, 삼궤구고두례는 말 그대로 3번 절하고 9번 조아리는 뜻으로 일단 행위만 본다면 딱히 치욕스러운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나 어른에게 하는 예를 단지 몇 번 더 반복할 뿐이므로, 황제 앞에선 황제의 형이나 숙부 같은 황실 내의 사적인 서열로는 위인 황족들도 공적으로는 신하로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해야 했다. 또한, 황제뿐만 아닌 황태자 앞에서도 손윗 항렬, 백부, 숙부나 형제들이나 종친, 친왕이라 할지라도 삼궤구고두례보단 한 단계 낮은 이궤육고두례(二跪六叩頭禮)의 예를 올려야 했다.[3]

즉, 당시 조선 입장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칙서를 반포하거나 연초에 망궐례를 할 때 북경 쪽으로 절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예는 계속 해오던 것이었다. 단지, 예를 올린 대상이 오랑캐라서 치욕이지, 삼궤구고두례라는 행위 자체가 비하의 목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일단 항복 자체는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시점에서 이미 신하를 칭하면서 공식적으로 했었다. 거기에 삼궤구고두례 자체도 조선에선 아예 안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성 안에서 제단을 쌓고 황제가 있는 북쪽 방향으로 원격으로 하면 안 되냐고 우겼는데, 이미 황제가 남한산성 바로 앞까지 친히 와있는 시점에서 그딴 억지가 먹힐 리는 없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은 조선 측의 이런 제안들을 전부 다 받아넘기면서, "황제 폐하께서 친히 이곳까지 행차하셨는데 네놈들이 예를 갖춰서 인사를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제대로 황제 앞에서 예를 올릴 것이지,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 라며 인조를 황제 코앞까지 끌고 나와서 인사하도록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처음부터 "까짓거 뭐 이런 게 대수랴" 하고 그냥 나가서 고분고분해준 게 아니라 이런 저런 이유로 우기면서 수십 일을 발악하다가 결국 논리로도 힘으로도 밀려서 강제로 한 셈이니 더더욱 굴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만약 이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조기에 쇠퇴했다면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리는 삼궤구고두례 행위가 한국사에서 치욕스러운 '항복 의식'으로 여겨질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예법이 크게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청나라조선 간의 군신 관계를 확정 지은 사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청사고나 실록을 보면, 애초에 청나라 측은 병자호란을 일으킬 즈음까지는 "조선은 형제의 나라이다."라고 동등한 동맹의 관계를 추구했던 반면, 조선은 "명나라는 조선의 아버지 국가인데 그런 명나라에게 덤비는 청나라 따위가 형제의 나라일 리가 없다."는 식으로 청나라의 제안을 싸그리 거절하며 "청나라와 그 황제보다는 명나라와 그 황제가 더 높은 직위에 있다" 라고 응수하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입장에선 나름대로 조선을 동생으로 대접해주려고 했다가 청나라의 황제 지위까지 부정당하는 모멸적인 대답을 들은 셈인데, 이런 점에서 삼궤구고두례로 신하가 천자(황제)에게 바치는 '청나라 고유의 예' 를 취하게 함으로서 군신 관계를 공식화한 것이 의미를 갖는다. 청나라가 명나라가 하던 국책을 바치라고 한 것이나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단, 황제 앞에선 황제의 친형도 친동생도 사적으로나 형제관계였고 공적으론 모두 황제의 '신하'의 위계이며, 정묘호란때 형제의 연을 맺은 것이 병자호란때 신하로 격하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가 몽골을 합병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면서 공적으로 "우리 여진족의 동생인 조선의 왕은 황제가 된 형 청나라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신하의 예를 올려라!" 라는 '위계변동'에 적응할 것을 종용한 것에 부합한다.

또한, 이 의식이 끝난 후에는 청나라에서도 연회를 열면서 조선 국왕 인조를 제대로 대접하게 되는데, 숭덕제"조선 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히도록 하라." 라고 명령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만주인 고관들이 주로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일들, 예친왕 도르곤과 인조가 서로 나눈 대화 등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상술한 연호를 따르게 하는 것이나 군신(君臣) 관계의 예우를 명나라에게 하던 시절과 거의 똑같이 한 것은 단지 조선을 신하로 만든 것만이 아닌, 명나라 시절과 같은 군신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청나라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옛날 삼전도비엔 인조가 무릎 꿇고 절하는 동판 부조가 있었는데, 그것은 1983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의 모습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고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하여 이미 철거했다. 2ch 같은 곳이 혐한의 재료로 노골적으로 써먹는 중이다. 또 문화재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부조가 당대에 나왔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어 문제가 많다. 헷갈리지 말자.

3. 인조의 환복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 임금이 삼궤구고두례를 마친 후 단에 올라 청 황제가 주는 차를 마셨으며, 잔치를 마친 후 용골대한테서 만주 의복인 초구[4]를 받아서 갈아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를 했다고 한다. 실제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참고로 '상(上)'[5]은 인조를 의미한다.
용골대 등이 상(上)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 :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6]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 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 잔을 올렸다. 한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 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들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 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본국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7]

청 왕자 및 제장(諸將)이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의 앞에 이르자 한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주었다. 상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內人)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상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를 가지고 와서 한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케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상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경오 2번째 기사

맨 마지막 문단을 보면 청 황제에게 절할 때까지만 해도 원래 복장이었으나, 절이 끝나고 돌아갈 때 즈음에서야 타타라 잉굴다이에게서 청나라 갖옷을 받아 갈아입고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두고 어떤 사람은 조선을 모욕하기 위해 인조에게 강요해 청나라 갖옷을 입혔다고 본다. 조선 입장에서는 의복은 제도상 사대하던 명나라천자가 결정하여 제후와 신하, 백성들에게 내리는 것으로, 의복은 중국에서 천자의 나라에 속하는 인물들과 그 외 속국의 인물들까지 천자가 정한 제도에 따라 의식주가 관리되는 것으로 천자의 절대 권력을 알리는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에 민감했을 것이다. 조선의 사람들은 왕이든 백성이든 명나라가 정한 옷 말고 다른 나라 옷은 입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에서 그것도 왕이라는 사람이 명나라의 적인 청나라의 옷을 입었다는 건 매국과 다름없는 짓이었던 셈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청나라 담비 가죽옷 (즉 현대로 치면 밍크코트)은 사실 만주의 추위에서 고귀한 신분들이 입던 옷으로서 누르하치나 홍타이지[8]도 항상 입고 다녔고, 부하들에게 상이나 선물로 하사하던 것으로서 일설에서 주장하듯이 모욕을 주려던 의미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9] 게다가 가죽옷의 양식은 곤룡포나 관복과는 달리 대체로 엇비슷하기 때문에, 청나라나 명나라나 조선이나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10] 그러니까 조선을 모욕하기 위해 입게한 것이라기보다도 진짜로 선물로 준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차라리 복종의 의미로 의복을 입게 하라고 했으면, 청나라 관복을 입게하면 되었을 텐데, 방한복에 가까운 옷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청나라 초구는 소매가 넓은 조선 옷에는 잘 안 맞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본국의 의복 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는 삼전도 항복시에도 인조에게 군주로서의 용포나 신하로서의 단령 대신 평민이나 입는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출성하게 했다.[11] 이는 조선의 용포와 단령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의복이기에 명나라를 싫어하는 청나라 입장에선 수용할 수 없었고, 거기에 조선 국왕은 청나라에 거역한 죄인이란 의미에서도 복장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타타라 잉굴다이의 의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청나라 측은 이를 좀 더 굳히기 위해 항복 예가 끝나면 그대로 명나라에서 하사했던 고명과 의복, 장구류는 죄다 반납해라 했는데, 그 와중에 조선 측은 일말의 여지라도 챙기고 싶었는지 피난 중에 잃어버렸다며 핑계대고 보내지 않았다. 청의 목적은 조선이 명을 버리는 것이었고 실제로 이후 조선은 명을 적으로 돌렸으니까 청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도 모른체하며 여기까지는 문제삼진 않았다. 위에서 말한 인조에게 갖옷을 선물한 의도가 어쨋든지간에, 청나라는 자신들의 지배하의 한족과는 달리 조선에 변발이나 호복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법도대로라면 이 시점부터 인조는 명나라 제도인 익선관, 곤룡포를 버리고 청나라의 사발형 관모와 청나라 관복인 망수의를 입어야 했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조선 왕들은 그 후로도 나라가 망하고, 태황제 고종이 이태왕으로 강등되고, 다시 일본 제국이 망하고 이왕직이 폐지될 때까지 명나라식 익선관과 곤룡포를 유지했다. 이를 두고 청나라가 '못 본 척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신을 맞이할 때나 조공을 보낼 때나 그대로 명나라 식 사모관대를 하고 있었는데 척이든 아니든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12]

연암 박지원열하일기에서 "청 태종이 조선에게 청나라 의복을 강요하지 않은 것은, 기마전투에 편리한 청나라 의복을 조선이 사용하게 되면 무력을 길러 복수하려 들 것이니, 전투는커녕 일상 생활도 불편할 정도인 기존의 의복을 그대로 입게 하여 무력을 기르지 못하게 하려는 깊은 뜻이 있었다"고 해석했다.

청태종이 의복을 바꿔입게 한 것이 복종의 의미로 했다고 보는 측에서는 "옷을 가져왔다"고 하는 것은 의복을 하사하는 예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가져왔지만 제도가 다르므로 정의만 표하면 족하다"고 한 건 옷을 받는 복종의 의미가 충족되기만 하면 실제로 국가의 의복 제도를 바꿀 필요는 없다고 청태종이 직접 허락한 것이 된다. 인조는 안입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는 스스로 나서 입음으로써 청나라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4. 결과

삼전도의 굴욕을 계기로 조선은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게되어 심양으로 방물과 세폐를 조공하고 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이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당한 것으로, 외교권을 제한당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소현세자봉림대군이 볼모로, 세 정승(의정부)과 여섯 판서(6조)의 질자들이 잡혀가고, 삼학사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조공책봉관계가 성립되면서 조선은 청의 연호와 책력을 채택해야만 했는데, 인조는 숭덕 연호 채택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청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등 사대하기를 거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그들의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인조와 더불어 김류와 김자점은 각각 입관을 축하하는 사신에 중신을 보내자고 하거나, 임경업을 옥사시키고 압송의 은혜에 대해 사대의 도리로 별도의 사신단을 파견하자고 주장하는 등 상국으로부터 권력을 보전받고자 애썼다. 조선의 장병들은 가도 정벌과 명청전쟁 그리고 청-러시아 국경분쟁 등으로 인해 9차례나 징병되어 자의든 타의든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5. 매체

이것을 영상화한 MBC 사극 드라마 조선왕조실록에선 유인촌이 맡은 인조가 절하는데, 3번씩 3번 총 9번 절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다음 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왕조 500년은 일차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 다음해 인현왕후를 시작으로 후반기가 나왔다.


2017년 영화 남한산성의 장면. 여기서는 기록대로 인조가 일반 사대부의 남염의 복장을 하고 말을 타고 성을 나와 항복식장 앞에서 말에서 내려 숭덕제에게 걸어가며, 삼궤구고두례도 머리를 찧지 않고 절을 하는 모습으로 제대로 고증되었다.

2010년 KBS 드라마 추노에서는 회상 장면으로 짧게 등장한다. 고증을 지켜 인조가 남염의 차림으로 고개를 조아린다.

2013년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굉장히 치욕스럽게 그려지며, 고증을 완전히 무시해 청나라가 여러모로 인조를 욕보이는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남염의가 아닌 곤룡포를 입고 나오며 가마를 내리라고 청군이 칼과 활을 치켜세우는 모습 또한 정사와는 다르며, 삼궤구고두례를 할 때는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찍어서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른다.


2015년 MBC 드라마 화정. 여기서도 실제 역사와 달리, 인조가 위에서 언급한 함벽여츤을 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1] 당시 예문관제학이자 효종 대의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썼다. 당연히 청의 협박이나 다름없는 강제적 요구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쓴 것이다.[2] 국가 의례에 예모(禮貌)와 위엄을 갖추기 위한 것[3] 여담으로 이 '황태자'에 해당하는 인물은 청나라 시절에는 강희제 시절 37년 동안 재위하다 폐위된 2황자 윤잉이 유일하다.[4] 貂裘 : 담비의 가죽으로 만든 옷[5] 실록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상'이 당대 임금이라고 보면 된다. 주상, 금상(今上)과 같은 의미.[6] 유래는 몽골의 . 청 태조 누르하치가 몽골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칸을 칭하였다. 여기서는 청 태종을 가리킨다.[7] 유교의 6예 중 하나로 활 쏘기가 있었던 걸로 보면 정말로 문관이어서 활을 못 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두 활을 즐겨 쏘고 잘 쏘았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주 활과 국궁은 꽤나 차이가 있다. 어쩌면 조선측에서 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실력을 보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고, 이를 알고 청나라 쪽에서 망신을 주려고 일부러 시켰을지도...[8] 영화 남한산성에서 홍타이지가 입은 옷이다.[9] 송산 전투에서 패한 홍승주가 한동안 감방에 갇혀 있을 때, 추위에 떨자 홍타이지는 자신이 입던 초구를 내려 귀순을 설득했다.[10] 세종이 입던 초구를 집현전에서 잠든 신숙주에게 내렸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짐승 가죽으로 만든 방한복은 조선에서도 자주 입고 있었다.[11] 드라마 꽃들의 전쟁은 곤룡포를 입혀 고증을 어겼다. 추노, 남한산성에선 이런 부분까지 제대로 고증이 구현된 편.[12] 물론 자기네가 정복한 한족한테는 가차 없었다. 다만 도사들과 경극배우들은 명나라풍 옷차림이어도 단속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