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08:25:49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유럽의 주요 관현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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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nzerthausorchester Berlin

1. 개요2. 연혁3. 역대 수석 지휘자4. 특징

1. 개요

콘체르트하우스 홈페이지의 악단 소개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본거지로 하는 관현악단. 1952년 동베를린을 연고로 하여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Berliner Sinfonie-Orchester)로 창설되어 활동하다가 2006년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2. 연혁

2차대전 패전 후 미국, 소련, 영국프랑스 4개국이 독일 영토와 베를린을 공동 점령하게 되자, 독일 음악계에서도 비나치화(또는 탈나치화)와 함께 점령 구역의 소속과 배치 문제로 상당히 치열한 밥그릇 싸움이 시작되었다. 특히 독일 승전 4개국에게 분할된 베를린에서 이런 음악가들의 이합집산이 매우 심했다. 베를린에 있던 관현악단 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였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경우 원래 공연장이었던 필하모니(Philharmonie)가 서베를린 쪽에 있었기 때문에 서독 소속의 관현악단이 되었다.[1]

물론 동독의 수도가 된 동베를린도 소련 점령지에 있던 국립오페라극장에 본거지를 둔 베를린 국립가극장(베를린 슈타츠카펠레) 같은 걸출한 악단을 자기 몫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다만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경우 오페라 등 무대 작품 반주가 본업이었기 때문에, 콘서트 전문 악단이었던 베를린 필에 비하면 활동의 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베를린 시청에서는 서베를린의 베를린 필에 대항하는 콘서트 전문 명문 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기치 아래 1952년에 콘서트 전문 관현악단을 창단했다. 악단의 명칭은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였고, 초대 수석 지휘자로 헤르만 힐데브란트가 영입되었다. 힐데브란트는 갓 창단된 악단을 능숙하게 조련해서 서독 비평가들도 찬사를 보낼 정도로 급성장시켰지만, 냉전이 격화되면서 서독 국적을 갖고 있던 것이 문제가 되자 결국 1959년에 계약 연장을 포기하고 사임했다.

힐데브란트가 서독으로 돌아간 뒤에는 약 1년 동안 체코의 바츨라프 스메타첵이 제1객원 지휘자로 활동하며 임시로 공백을 메꿨고, 1960년에 소련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부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던 쿠르트 잔데를링이 수석 지휘자로 부임했다. 잔데를링은 기본적인 독일계 레퍼토리 뿐 아니라 러시아/소련 작곡가들의 작품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또 소련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 연줄을 이용해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에밀 길렐스 같은 소련의 쟁쟁한 연주자들을 자주 동베를린으로 데려와 협연하는 등 악단의 활동 폭을 상당히 넓혔다.

잔데를링이 1977년에 퇴임한 뒤에는 드레스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수석 지휘자를 맡고 있었던 귄터 헤르비히가 뒤를 이었다. 헤르비히도 잔데를링과 마찬가지로 음반 녹음 활동을 활발히 진행했고, 냉전 완화라는 시기를 잘 타 악단을 이끌고 서방에서 공연을 하는 등 동독과 동유럽, 소련 쪽에 국한되어 있던 악단의 명성을 자유 진영에도 알리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헤르비히는 1984년에 자신의 국외 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던 동독 정부와 대판 싸우고 미국으로 이주해 버렸고, 후임으로 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있던 클라우스 페터 플로어가 영입되었다. 플로어도 헤르비히와 마찬가지로 국내외 활동을 균형있게 소화했고, 이 시기에 훗날 악단의 상주 공연장이 될 샤우슈필하우스(1998년 이후에는 콘체르트하우스로 개칭)에서 정기적으로 콘서트를 갖기 시작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독일이 통일되자, 악단이 소속된 동베를린 시청이 해체되고 재정 지원도 끊기면서 악단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악단 정기 회원들이 급히 재정 지원에 나서고 악단 존속을 위해 새롭게 설치된 통합 베를린 시청과 교섭하면서 해체까지 가지는 않았고, 1992년에 창단 이래 최초의 외국인 지휘자인 덴마크의 미하엘 쇤반트를 4대 수석 지휘자로 영입하면서 이미지 개선을 꾀했다.

쇤반트 재임기에 악단은 샤우슈필하우스의 상주 악단 자격을 공식적으로 갖게 되면서 통독 후 흔들리던 기반을 다시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쇤반트의 후임으로 부임한 이스라엘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은 세계 각지에서 젊은 세대 연주가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해 악단의 세대 교체를 준비했다.

2006년에는 그 동안 옛 서베를린을 거점으로 하던 민간 악단인 또 다른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Berliner Symphoniker)과 명칭 혼동을 막기 위해 악단 명칭에 상주 공연장을 넣은 현재의 것으로 바꾸었다. 인발의 뒤를 이어 수석 지휘자가 된 로타 차그로세크는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레퍼토리에 반영했고, 연주회 형식의 오페라 상연도 시도해 콘서트 전문 악단이라는 정체성에 변화를 주었다. 차그로세크가 2011년 퇴임한 뒤에는 헝가리의 피셔 이반이 후임자로 계약했고, 피셔는 2012/13년 시즌부터 수석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3. 역대 수석 지휘자

  • 헤르만 힐데브란트 (Hermann Hildebrandt, 재임 기간 1952-1959)
  • 쿠르트 잔데를링 (Kurt Sanderling, 재임 기간 1960–1977. 퇴임 후 명예 지휘자 호칭 수여)
  • 귄터 헤르비히 (Günther Herbig, 재임 기간 1977–1984)
  • 클라우스 페터 플로어 (Claus Peter Flor, 재임 기간 1984–1992)
  • 미하엘 쇤반트 (Michael Schønwandt, 재임 기간 1992–1998)
  • 엘리아후 인발 (Eliahu Inbal, 재임 기간 2001–2006)
  • 로타 차그로세크 (Lothar Zagrosek, 재임 기간 2006–2011)
  • 이반 피셔 (Iván Fischer, 재임 기간 2012-)

이외에 드미트리 키타옌코가 제1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4. 특징

활동 초중반에는 동독 관현악단이다 보니 서방 악단의 화려함이나 다채로움 보다는 전통에 기반한 우직한 음악을 뽑아내는 단체로 여겨졌다. 하지만 잔데를링 시절에 서독에서는 이념과 여타 어른의 사정으로 연주가 그리 활발하지 못했던 쇼스타코비치교향곡들을 비롯한 소련 음악도 적극적으로 공연했고, 귄터 코한을 비롯한 동독 현대 작곡가들의 관현악곡도 숱하게 초연하는 등 공연 곡목까지 협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연과 음반 제작이 모두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상 주로 자국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방 청중이나 음악 애호가들은 이 악단의 연주를 듣기가 힘들었고, 그런 핸디캡 때문인지 베를린 필에 다소 발리는 콩라인 이미지를 떨치지 못했다. 그나마 1970년대 후반부터 오이로디스크라는 음반사를 통해 자신들의 녹음을 서방에도 유통시킬 수 있었고, 통독 후에는 미국의 RCA나 영국의 EMI 같은 메이저 음반사들에서 음반을 제작하는 등 동독 출신 뜨내기 악단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는 동독 체제 하에서 음악을 배우고 연주자 생활을 했던 노년층 단원들이 대부분 은퇴하면서 악단의 체질도 점차 현대적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여타 베를린 소속 악단들처럼 딱히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단원들도 독일인에 국한되었던 동독 시절과 달리 세계 각지에서 영입하고 있고, 러시아헝가리, 스페인, 프랑스유럽 국가들 외에 일본이나 중국, 한국아시아 국가 출신 단원들도 어렵잖게 단원 명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를린 필을 본떠 악단 자체적으로 젊은 연주자들의 관현악단 단원 교육을 위해 관현악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으며, 청소년들을 위해 저렴한 가격 또는 무료로 공연 직전의 리허설을 참관할 수 있도록 하거나 기존 음악을 식상하게 여기는 젊은 청중들을 위해 현대음악 공연 비중을 늘리는 등 젊은 청중과 연주자를 끌어모으는 기획을 계속 내놓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오랫동안 잡히지 않아서 메트로폴 극장이나 폴크스뷰네, 알렉산더 광장의 콩그레스할레(회의장) 등을 돌아다니며 공연해야 했지만, 상술한 대로 1984년 이후로는 2차대전 당시 파괴되었다가 전후 재건된 콘체르트하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내부는 베를린 필의 상주 공연장인 필하모니보다 좁은 편이지만, 건물 자체가 19세기 독일의 유명 건축가였던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의 설계로 만들어진 국보급 문화재고 세심한 재건 과정을 거친 덕에 음향 상태가 우수한 편이라 계속 사용하고 있다. 베를린 필도 1992년~1993년 동안 필하모니홀을 대폭 리모델링할 때 이 곳에 잠시 세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2010년에 남아공 월드컵으로 부부젤라가 명성(과 악명)을 얻게 되자, 독일 유명 일간지인 차이트의 온라인판에서 이 악단 트럼펫트롬본 주자들이 부부젤라로 브람스교향곡 1번 4악장 트롬본 코랄과 라벨볼레로를 연주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화제가 된 바 있다. 유튜브 동영상

2017년 10월 11일 플루티스트 김유빈 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최연소 종신 플루트 제 1수석 단원으로 임명되어 활동중이다. #

2017년 5월 4일,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연이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악장에 임명되었다. #

[1] 장벽으로부터 불과 200미터 가량 떨어진 베른부르거 슈트라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