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3:48:27

정형 전투

배수지전에서 넘어옴
<colbgcolor=#C0C0FF,#2f2f52> 정형 전투
井陘之戰
Battle of Jingxing
시기 기원전 204년 10월 #출처
장소 중국 허베이 성 스좌장 시 징싱 현
원인 팽성전투 이후 한(漢)군의 반격
교전국 한漢 조趙
지휘관 한신
장이
장창
조헐
진여
이좌거
병력 30,000명 이상 20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지휘부 붕괴
결과 조나라 멸망
영향 한신의 하북 진출 성공. 초한전쟁의 전황 급변

1. 개요2. 배경
2.1. 진나라의 멸망과 장이와 진여의 대립2.2. 쫓겨나는 유방과 한신의 만남2.3. 조나라의 상황2.4. 한군의 진격과 팽성대전의 대패
3. 한신의 북벌4. 정형 전투
4.1. 이좌거의 제안과 진여의 교만4.2. 한신의 대응4.3. 1차 교전4.4. 배수지전(背水之战), 2차 교전4.5. 3차 교전, 한군의 승리
5. 결과6. 평가7.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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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를 건너 위왕을 사로잡았으며, 하열을 연여(알여)에서 사로잡았습니다. 단번에 정형을 내려와 하루아침에 조나라 20만 대군을 깨뜨리고, 성안군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 이름이 온 나라에 들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떨쳤습니다. 농부들도 나라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농사를 그치고 쟁기를 내버린 채 아름다운 옷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장군의 명령[1]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중국 초한쟁패기 시절 벌어진 한나라(漢)와 조나라(趙)의 전투.

당시 한나라군은 역외 원정이라는 핸디캡에다가 병력도 일부 차출돼 나가는 등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조나라군은 수십만을 일컫을 정도로 병력 숫자로도 여유가 있었으며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유리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조나라의 공세적 전략과 양측 지휘관의 역량 차이로 인해 대패하고 말았고 조나라 자체가 한나라에 복속되었다.

이 승리를 이용해 한신(韓信)은 제나라(齊), 연나라(燕) 등 여타 북방의 나라들을 복속시켰고, 초한전쟁의 팽팽한 형세는 대번에 초나라(楚)가 밀리는 형세가 되었다. 즉 초한전쟁에서 한군이 초군을 압도하기 시작한 계기를 마련한 전투.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장인 한신이 거둔 최대의 군사적 성공이자 초한전쟁의 향방을 가른 상당히 의미가 있는 혈전이었다. 또 장이진여에게 복수를 한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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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 전투 약도

2. 배경

2.1. 진나라의 멸망과 장이와 진여의 대립

BC 209년 벌어진 진승·오광의 난(陳勝吳廣─亂)은 통일제국 진나라에 치명타를 가져왔다. 이 반란 자체는 한때 함양이 함락될 수도 있었던 위기에서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의 활약으로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으나, 이틈을 타 과거 진나라에 멸망당했던 전국시대(戰國時代) 육국(六國)의 후예들은 재빨리 나라를 부활시키거나, 혹은 야망을 가진 인물들이 들고 일어나서 과거 육국의 왕족들을 얼굴마담으로 내놓고 봉기하는 등 천하에 난리가 벌어졌다. 개중에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단연 항량(項梁)으로, 명문가의 후예였던 그는 과거 진나라에 맞서는 최강의 열국이었던 초나라를 부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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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項羽)
하지만 장한은 저력을 발휘해 항량을 참살했고, 이후 북으로 진군하여 조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조나라는 진승의 부장이었던 무신(武臣)이 하북을 평정하고 독립을 한 상태였는데, 장한은 무신의 부하였던 이량(李良)의 도움을 받아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무신을 살해했다.

이에 조나라의 중신이었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황급히 조헐(趙歇)이라는 인물을 새로운 조나라 왕으로 세운 뒤, 거록(巨鹿)으로 도주했다. 이에 장한은 수하 장수 왕리(王離)[2]을 보내 거록을 포위토록 하여, 조나라는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당시 장이는 조헐을 데리고 거록으로 들어갔지만, 진여는 따로 성 밖으로 나가 북쪽으로 가서 수만의 군세를 수습해서 남하했으나, 워낙 진나라군의 기세가 강력하여 함부로 달려들지를 못했다. 이에 반해 거록 내부에서는 양식이 바닥나고 있었고, 병사들의 숫자도 많지 못했기에 대단히 위급한 상황이었다.

워낙 성 내부에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이 등은 성 밖의 진여에게 수차례 사람을 보내 SOS 사인을 보냈지만, 답이 없기는 진여도 마찬가지였기에 뭘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악이 바친 장이는 "니가 그러고도 친구냐?" 하며 성을 내었고, 이에 진여는 어쩔 수 없이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이라는 인물에게 5천 명을 주어 한번 돌격하게 해보았지만, 5천 명은 진나라 군에 접근하기가 무섭게 녹아내리고,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 절망적인 형세에서 곧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항량의 조카였던 항우(項羽)는 송의(宋義)를 쳐죽이고 군대를 탈취한 후, 북상하여 경포(黥布) 등과 함께 전투에 나섰다. 이 거록전투(巨鹿之战)에서 항우는 대승리를 거두며 천하최강의 제후가 되었고, 장한은 절망적인 형세에 빠졌다. 이후 항우는 장한과 협상을 하여 그를 항복시켰고, 이 시점에서 진나라의 멸망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이로서 조나라는 진나라 부대의 압력에서 벗어났고, 몇개월 동안 거록 내부에서 벌벌 떨며 지내던 조왕 헐과 장이는 성 밖으로 나와 기뻐하며 모든 제후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데, 장이는 진여를 만나자 진여가 자기를 구하지 않았다고 깠고, 진여는 진여대로 열이 받아 둘이 말 다툼을 벌였다. 다툼 도중 진여를 따르던 장수 몇이 보이지 않는 걸 두고 기어이 장이는 걔들이 나 구하자고 그러니까 니가 숙청한 거 아냐?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이 말에 진여도 화가 치밀어서 '걔들 너 구하자고 나갔다가 다 죽은 거다. 내가 이깟 장군 직이 아까울 것 같냐?'라고 일갈하며 인수를 그자리에 놓고 자리를 떴다. 장이도 약간 찜찜함을 느꼈지만 결국 악감정이 앞섰기에 진여를 달래지 않고 그대로 인수를 회수했고, 크게 실망한 진여도 장이를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다. 결국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사이였던 장이와 진여는 이로 인해 완전히 서로간의 관계를 파탄내고 말았다.

2.2. 쫓겨나는 유방과 한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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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연(鴻門宴)

항우가 북진하여 조나라를 구원하고 장한을 항복시킬 동안, 유방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진나라를 돌파, 함양에 먼저 이르렀다. 이렇게 유방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문제는 이후 항우 역시 함양으로 진군해 왔다는 것이다. 함양으로 오는 도중 신안대학살같은 만행을 저지른 항우였지만 그 세력은 천하 제후들을 복종시켜 대단히 막강했고, 유방의 군세는 이에 비하여 상당히 미약해서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었다.

결국 유방은 항백(項伯)의 도움을 바탕으로 항우에게 항복했고, 이후 벌어진 홍문의 회(鴻門之會)에서 자신을 죽이려 하는 범증(范增)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목숨만은 건진 유방이었지만, 이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파촉(巴蜀)의 벽지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항우는 삼진(三秦)을 설치하여 유방을 견제하였다.

헌데, 힘없이 파촉으로 들어가는 한나라군의 뒤로 한신이 따라붙었다. 본래 항우의 부하였던 한신은 초나라에서 낭중(郎中)의 지위에 있었으나, 항우로부터 개무시만 당하던 신세였기에 귀순해온 것. 당초에 한신은 유방의 군대에서도 별볼일 없던 위치였고 죽을 지경에 처했으나, 하후영(夏侯嬰) 덕분에 목숨을 건진 후 소하(蕭何)의 눈에 들어 단번에 대장군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

2.3. 조나라의 상황

유방이 파촉에서 한신을 얻고 반격을 시작할 무렵, 장이는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 공훈이 인정되어 조나라 땅을 나누어 따로 상산왕(常山王)이 되었다. 헌데 본래 장이와 비슷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진여를 항우는 공이 없다고 생각했기에 남피 주변의 3개 현을 조금 떼어주는 정도에서 끝나게 되었다. 이때문에 열이 받은 진여는 제나라의 전영(田榮)이 항우에게 대항할 때, 그 군사를 빌려 장이를 날려버렸다.

이후 진여는 항우의 분봉에서 대(代) 왕으로 쫓겨난 과거의 조나라 왕 조헐을 다시 불러들여 조나라 왕으로 삼고, 자신은 대나라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조나라에 머물면서 조나라의 실세 역할을 했고, 대나라에서는 진여의 수하였던 하열이 자리를 잡고 정치를 하게 되었다.

2.4. 한군의 진격과 팽성대전의 대패

그런 사정이 있을 때 유방은 한신의 계책에 따라 옛날의 길을 이용해 진격하여 반격에 나섰다. 마침 제나라의 전영을 상대하고 있던 항우는 이에 대응하기 힘들었고, 유방은 옹왕 장한을 비롯하여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 등을 모조리 무찌르고 파죽지세로 진격해 나갔다.

이때 유방에게 장이가 합류해왔다. 진여의 기습으로 근거지를 잃은 장이는 본래 왕 자리도 받았던 만큼 항우에게 갈 생각도 있었지만 이때는 누가 판단해도 유방의 세가 우세해보였기에 유방 쪽에 귀의했고. 건달 시절에 친분이 있었던[3] 유방은 장이를 잘 대접해주었다. 그런데 유방은 이때 진여의 도움도 구하고 있었다. 항우의 분봉 과정에서 원한을 가져 일어났다는 점에서 유방과 공통되는 부분이 있었던 진여 또한 도와줄 의사는 있었지만, 다만 그 조건으로 원수인 장이의 목을 요구했다. 진여와 장이의 가치는 비교할 것도 없이 명백했지만 유방은 장이를 죽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목을 적당히 썩혀 장이의 것이라고 뻥을 쳐서 진여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세력을 모은 유방은 어려움 없이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彭城)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이후 벌어진 팽성전투(彭城之戰)에서 분노한 항우가 끌고온 3만 군대는 유방의 제후 연합군 56만을 미친 듯이 두들겨 패며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렸다. 이 싸움으로 유방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도주하여 형양(滎陽)을 근거지로 하여 자리를 잡고 나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으며, 천하에는 다시한번 서초패왕의 이름이 울려퍼졌다. 잠시나마 유방이 승산이 있었다고 생각했던 제후들은 모두 혼비백산 정신이 달아나 항우에게 귀의 했는데, 심지어 위왕 위표는 어머니 병문안을 간다고 구라를 치고 도망쳐버렸다(…)

한나라를 도왔던 진여도 그런 분위기는 느끼고 있었을 텐데, 여기에 더해 사실 장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정보까지 얻게 되었다. 유방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진여는 분노하여 한나라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해 버렸고, 이렇게 대나라, 조나라는 유방과 적대관계가 되었다.[4]

3. 한신의 북벌

3.1. 위표 격파와 한나라 별동대의 출발

형양 등을 기점으로 항우의 엄청난 공세를 견디고 있는 유방에게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팽성에서의 패배 이후 배신하고 이탈해버린 다른 제후들을 제압하는 일이었다. 일단 한군이 항우가 지휘하는 파죽지세의 초군과 단독으로 싸워서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한 실정에서 정면승부보단 '이길 수 있는 세력' 을 먼저 제압하는 것이 훨씬 나은 전략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눈에 거슬리는 건 한군을 배신한 위표였다. 유방으로서는 이런 세력이 하나라도 아쉬웠기에 우선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회유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다지 진전이 있진 않았다. 이에 유방은 무력으로 위표를 제압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한신을 파견하여 공격에 나섰다.

이때, 한신은 위표가 주숙(周叔)이라는 자를 장수로 삼으면 성가실거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역이기에게서 백직(栢直)이라는 자가 주숙 대신 장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 놈은 젓비린내 나는 더벅머리일 뿐임." 하며 좋아했다.

이때, 위표는 포판(蒲坂)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임진(臨晉)쪽으로 한신이 강을 건너 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한신은 일부러 임진 쪽으로 도강하려는듯한 제스처를 강하게 보여주고, 실질적인 주력은 더욱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가게 하여 강을 건너서 위나라의 수도 안읍(安邑)을 공격했다.

위표는 경악해서 군대를 돌려 안읍으로 돌아가자, 임진 쪽에서 적의 주의를 끌던 한나라 군이 위나라 군의 뒤를 쳤고, 안읍으로 갔던 병력 역시 위표를 공격, 앞뒤에서 적을 공격하자 위나라군은 단박에 무너지고 위표는 사로잡혔다.

안읍 전투에서 간단하게 하동을 평정한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원컨대 3만 병사를 더해주시면, 신이 북으로 연(燕)‧조를 잡고, 동으로 제를 치고, 남으로는 초의 보급로를 끊은 후, 서쪽에서 대왕과 형양에서 만나기를 청합니다."(願益兵三萬人,臣請以北舉燕、趙,東擊齊,南絕楚之糧道,西與大王會於滎陽.)

이 대전략이 누구 생각에서 나왔는지는 식견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꽤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는데, 사기의 회음후 열전에서는 유방이 사자를 파견해 한신이 움직이도록 했다고 나오고, 고조본기에서도 마찬가지이이다. 그런데 위의 언급이 나오는 한서의 한신전을 비롯하여 고제기에서도 '한신이 청하여' 움직였다고 나오는데, 즉 사마천과 반고가 기술하는 정황이 좀 다르다. 만일 한신을 북상시키는 전략의 주체가 유방이라면 유방의 큰 전략적 식견을 칭찬할 수 있겠고, 한신이라면 반대로 한신을 칭찬할 수 있다.

다만 반대로 해석한다면 본인도 경색 전투 이후 간신이 항우를 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려 3만의 병사를 내준 한서의 서술은 유방을 높이는 해석으로, 딱히 3만을 보냈다는 언급이 보이지 않는 사기의 기록은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일단 사마광자치통감에서 한신이 유방에게 요청했다는 한서의 서술을 따랐다.

여하간에 유방은 장이와 더불어 한신이 말한 3만가량의 병력을 보내 주었다. 이에 한신은 장이, 조참 등과 함께 북상을 시작했다.

3.2. 대나라 평정

파일:rDeBC8G.jpg중국의 동북으로 북상하던 한신은 곧 대나라 지역을 지나게 되었다. 이 지역은 현재 조왕의 측근으로 있는 진여의 땅이었으며, 진여가 조왕의 옆에 있어 부재하고 있었기에 대신 진여의 부하 하열이 지키고 있었다. 한신은 대나라 군을 격파하고 하열을 알여(閼與, 연여)[5]에서 무찌르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자세한 싸움의 과정은 전해지지 않으나 이좌거(李左車)의 말에 따르면 "알여를 피로 물들였다." 고 하니 상당한 혈전이었거나 혹은 한군의 일방적인 살육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타 기록에서는 단순히 하열을 사로잡았다고 나오지만, 사기 조상국세가에 따르면 하열은 전사했다고 나온다.

알여를 공략하고 대나라를 멸망시킨 한신은 진여의 세력을 하나 꺾음과 동시에 북으로 올라가는데 방해가 되는 위협요소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한신은 정형(井陘)으로 진격해 남하하면서 조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가졌다.

4. 정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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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초한전기의 한신.

4.1. 이좌거의 제안과 진여의 교만

한신의 공격 소식을 들은 조나라 왕 조헐과 성안군 진여는 정형구(井陘口)에 군사를 모아 수비 준비를 갖추었다. 이곳은 정형관(井陘關)으로써 하북성 정형현 북쪽에 있는 지역인데, 형(陘)이란 산맥이 돌연 끊겨서 두 산 사이가 아주 좁아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험지를 말한다. 이 태행산맥(太行山脈)에는 이러한 곳이 8군데가 있었는데, 정형은 그중에 다섯 번째의 험지였다. 특히나 정형관은 당대에 쓰여진 여씨춘추에서도 전 중국 최고의 요새 9개 중 하나로 언급될 정도였다.

진여의 참모였던 광무군(廣武君) 이좌거의 말에 따르자면 이 정형이란 지역은 "수레가 나란히 갈 수도 없고, 기병대도 열을 이룰 수가 없을 만큼 좁은 지역"이라 방어하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좌거는 성안군 진여에게 다음과 같은 전략을 내놓았다.
"들리는 바로는 한나라의 장군 한신은 서하(西河)를 건너서 위왕 표를 사로잡고, 하열(夏說)을 사로잡아, 알여(연여)를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장이의 도움을 받아 우리 조나라를 항복시키려고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고국을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을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천리 밖에서 군량미를 보내면 운송이 곤란하므로 병사들에게 주린 빛이 돈다고 합니다. 더욱이 땔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야 밥을 지을 수 있게 되므로 군사들이 저녁밥을 배불리 먹어도 아침까지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정형의 길이 좁아서 두 대의 수레가 함께 지나갈 수 없으며, 기병도 줄을 지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야 할 곳이 수백 리나 됩니다. 이렇다면 사세로 보아 군량미는 반드시 그 후방에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족하(足下)께서 신에게 기습 병사 3만 명만 빌려주신다면, 지름길로 가서 그들의 군량미 수송대를 끊어놓겠습니다. 군께서는 물길을 깊이 파고 누벽을 높이 쌓고 진영을 굳게 지켜, 한나라 군대와 어울려 싸우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적군은 전진해서 싸울 수가 없고, 후퇴하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 우리 기습 병사가 적의 뒤를 끊고 들판에서 적이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못 되어서 적의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군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즉 한신이 싸움을 걸어도 이에 응하지 않고 정형관의 위력을 믿으며 수비만 하고, 별동대를 뽑아 적의 보급을 교란시키면 승리할 수 있다는 계책이다. 이렇게 되면 원정군인 한나라군은 오도가도 못하고 굶어죽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별동대라고 해도 3만이라는 규모면 한군과 비슷한 수준이니 한나라군으로서는 그 별동대도 돌파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여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진여가 이좌거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가 걸작인데, 유가였던 진여는 "싸움이란 당연히 정정당당하게 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군대는 의로운 군대로 여기고 기습 작전을 벌이려고 하지 않았다. 사기에서는 成安君, 儒者也, 常稱義兵不用詐謀奇計. 라고 하여 진여가 유학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데,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는 진여가 유가라는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유학의 거두였던 사마광으로서는 이런 사실을 쓰게 된다면 유학자 망신은 다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물론 진여가 정당한 승부만을 생각해서 거절했다면 송양공(宋襄公)을 뛰어넘는 정신병자로 평가받았겠지만, 진여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내가 들으니 병법에 아군이 적군의 열 배가 되면 포위하고, 두 배가 되면 싸우라고 했소. 지금 한신의 병력이 수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수천에 지나지 않소. 게다가 천리 먼 곳에 와서 우리를 치는 것이니, 역시 벌써 아주 지쳤을 것이오. 지금 이런 적을 피하고 치지 않는다면 나중에 대군이 쳐들어올 때에는 어떻게 싸우겠소? 그렇게 되면 제후들이 우리를 비겁하게 여기고 함부로 쳐들어올 것이오."

즉 한신은 원정군이니 그 병력이 지쳤을 것이며, 이쪽이 병력에서 압도적인 우위가 있는 만큼 전면전으로 임팩트 있게 격파해야 제후들 사이에서 호구 취급을 안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진여의 논리였다. 진여가 인용한 병법의 내용은 손자병법 모공편에도 실제로 나와 있는 구절이다. 사실 조나라군은 무려 20만 이라고 일컬을 만큼 상당한 대군이었다. 호왈이라고 하여 실제로 20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왈 20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면 최소 10만은 넘는 숫자라는 것이고, 이미 그 숫자만으로도 역시 호왈로도 수만에 불과한 한군을 압도하는 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쯤되면 그냥 간단하게 수적 우세로 밀어버리는 것도 효과적인 전법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대군(大軍)에는 병법이 필요없다고 한 것이 결코 빈말이 아니다.

특히나 일단 시작된 전쟁은 속전속결이 으뜸이라는 것은 고금을 막론하고 전략의 진리다.[6] 지구전으로 들어갈 경우 공격하는 쪽도 피곤하지만 수비하는 쪽에서도 이만저만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닌 데다가, 어쨌든 전쟁 자체가 하루에도 억만금을 잡아먹는 사업이니 오래 끌면 끌수록 결국 이겨도 그 피해는 늘어나기 마련이다. 괜히 손자병법에서 '병문졸속(兵聞拙速: 전쟁은 졸렬해도 신속해야 한다)'을 말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근흡 열전에 따르면 근흡과 유방이 한신이 뚫어놓은 길로 들어와 조나라 성들을 공격해 함락시킨 적이 있는데, 정형전투 이후론 항우를 막느라 바빴던 유방이 조나라로 따로 원정할 짬을 냈다는 것은 이상하므로 정형전투보다 앞서서 한 것으로 보면 당장 조나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냥 밀어붙이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압도적인 병력 우세를 지녔던 조나라가, 굳이 (당시 상황에는)이상적인 속전속결을 외면하고 자기들까지 기력을 소모하는 지구전으로 물고늘어져야 할 분명한 까닭이 없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좌거가 이런 진여의 주장에 재반론을 하지 못한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던 것. 말하자면 이좌거의 주장대로 우주방어와 보급로 차단작전을 펴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속전속결이었던 것 적어도 당시엔 그렇게 여겨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여의 본진인 대나라가 이미 한신에게 털린 상황이고, 진여 자신은 엄연히 조나라의 신하에 불과하니 서둘러 한군을 섬멸시키고 어서 대나라를 회복시켜야 했을 것이다. 우세한 병력으로 재빨리 실지를 회복해야 하는 상황이니 단기결전에 나서는 게 사실 정상이다. 극적으로 패했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것일 뿐.

4.2. 한신의 대응

사실 조나라군과 싸워야 하는 한신의 상황은 그리 좋은 편이 못 되었다. 일단 당초에 가지고 있던 병력도 3만여 명 정도로 조나라군에 비하면 열세였다. 설사 조나라군의 20만이라는 규모가 있는대로 부풀린 규모라 절반 이하로 줄인다고 해도, 7~8만여 정도가 되어 한나라군에 비해서는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문제는 이미 규모에서도 뒤지고 있는데, 거기서 또 정예병들이 이탈했다는 점이다. 한신이 대나라를 격파하고 북진하려던 무렵, 유방은 사자를 한신에게 보내 한신의 부대 중 정예병들을 형양으로 이동, 초나라군과 교전하게 했다. 유방의 입장에서야 초나라군이 가장 큰 적이니 급하면 다른 곳에서 빼와서 가장 중요한 지역에 배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수는 있었으나,[7][8] 당장 20만 대군을 상대해야 하는 한신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본래 병력도 그리 많지 않은데 그나마 쓸 만한 군사들을 빼갔기 때문이다.

또한 싸움에 앞서 한신은 따로 조참에게 군사를 맡겨 회군케 해서, 오성(鄔城)에 주둔한 조나라의 별장 척장군(戚將軍)을 공격케 했다.[9] 따라서 이 무렵의 한신은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이 두 군데나 빠진 상태였으며, 그나마 있는 부대가 무슨 야만 전사들을 상대하는 로마 군단병 수준이라면 모르되 정예병도 빠졌으니 질적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숫자, 경험, 지리, 그리고 원정군이라는 점 등 모든 면에서 한신은 매우 불리했다.

이때 한신은 첩자를 통해 진여가 이좌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자 대단히 기뻐했다.[10] 만일 이좌거의 제안대로 되었다면 한신이건 나폴레옹이건 정말 갑갑한 상황이 되었을 텐데,[11] 진여가 얌전히 수비만 하고 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으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사태파악이 끝난 한신은 진군을 계속하여[12] 정형의 30여 리 앞, 대략 10km 정도의 앞에서 멈춰서고 진영을 꾸렸다. 대략 새벽 정도가 되자 한신은 따로 몸을 가볍게 한 경기병 2천여 명을 뽑아 한 사람마다 깃발을 하나 씩 들게 하여[13] 가지고 있게 하고, 샛길로 산으로 들어가서 조나라군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명령을 내렸다.
"조나라 군사는 내가 싸우다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벽을 비우고 나를 쫓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때 재빨리 조군의 성벽에 들어가서 조나라의 깃발을 뽑고, 우리 한의 붉은 깃발을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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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비장(裨將)을 시켜 출발하는 병사들이 가벼운 음식을 먹고 출발하게 하면서, "오늘 조나라를 깨트리고 모여서 식사를 할 것이다!" 는 실로 패기 넘치는 발언을 했다. 출발하는 장수들이라고 "① 병력 후달림 ② 정형관이 견고함 ③ 아군 전력이 형편없음" 이라는 요소를 모르지는 않았기에 전투에 앞서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하는 말 정도로 이해하고 그저 건성으로 "예, 예." 라고만 대답했을 뿐이다.

그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한신은 이미 부족한 병력을 또 1만이나 나누는 괴이한 작전을 실시했다. 한신은 이 1만 명을 먼저 앞서게 해서 면만수(綿曼水) 강가를 뒤로 하여 진지를 구축하게 하는 그 유명한 배수진을 실시했다.

이미 춘추전국시대에서 수많은 전쟁병기, 명장들과 손무(孫武), 오기(吳起). 사마양저(司馬穰苴) 같은 뛰어난 전쟁 이론가들이 활동했던 당대 중국에서 강을 뒤로 하면 퇴각하기 힘들어 절대 기피해야 한다는 전쟁의 기본 원칙을 장수라고 하는 작자들이 모를리 없었다. 조나라에서는 이 모습을 보고 "저 멍청한 놈 ㅎㅎ" 하고 비웃었다.[14]

이 배수진은 둘째치고, 병력을 이렇게 분산시켰을 시점에 조나라 군대가 공격해 오면 붕괴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한신은 한 군리(軍吏)에게 이렇게 말하며 조나라군이 먼저 공격해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조나라 군대는 우리보다 먼저 편리한 지점을 골라서 누벽을 구축했다. 또 저들은 우리 대장의 깃발과 북을 보기 전에는 우리의 선봉을 공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좁고 험한 곳에 부딪쳐 돌아가 버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대장기가 올린 본대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조나라 군대는 한나라군이 겁 좀 주면 달아날까 염려하여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 조나라 군대는 한신의 1만 병력이 따로 움직여도 비웃기만 할 뿐 나가서 싸우지 않았다. 조나라에서는 한신을 과소평가하며 비웃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신의 의도대로 모든 그림이 흘러가고 있었다.

4.3. 1차 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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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을 무렵, 한신은 장이와 함께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치게 하면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형구를 향해 나아갔다.[15] 한신의 군대 1만이 따로 움직일 때는 공격하지 않던 조나라군은 과연 한군이 대장기를 세우고 오자 한신의 본대를 격파하기 위해 성벽의 문을 열고 나와 공격해서 싸웠다. 애시당초 병력의 차이가 적지 않았던 만큼 이 싸움에서 한신이 재미를 보긴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군과 조군은 오랫동안 크게 싸웠다(大戦良久)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측이 전력차를 생각하면 상당히 분전했다고 볼 수 있다. 전투라는 게 기세를 타는 만큼 적의 대군에 조금이라도 기세를 내주게 된다면 순식간에 전열이 붕괴되어 초토화되고 기껏 준비한 계책을 제대로 써볼 수도 없었을 텐데, 한신은 불리한 상황에서 잘 버텨내고 있었다.

이후 군대가 한계에 달하기 전, 한신은 가지고 온 깃발과 북을 거짓으로 버리고 장이와 함께 마치 힘에 부쳐 달아나는 듯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앞서 치열하게 싸운 만큼 이 연기는 굉장히 리얼하게 보였을 것이다. 조군은 이에 넘어가 한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4.4. 배수지전(背水之战), 2차 교전

급하게 퇴각해 온 한신과 장이를 보고 물가에 진지를 친 병사들은 서둘러 진의 문을 열어 그들을 들어오게 했다. 한편 승세를 탔다고 생각한 조나라군은 누벽을 비워놓고 주력군인 한신을 추격했는데, 일단 한신과 장이가 진에 들어서게 되자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던 기세가 크게 둔화됐다.

이미 한군의 패색이 짙었으나 도망칠 곳도 없는 만큼, 필사적으로 싸웠으므로 조군은 이를 깨트릴 수 없었다(軍皆殊死戦, 不可敗). 바로 이것이야말로 한신이 배수진을 선택한 이유였는데, 잘 훈련된 군사들이 아니고, 그나마 있던 정예병도 사라진 한신으로서는 시장바닥에 있던 사람들을 쓸어모아 전쟁터로 내모는 정도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엉망인 부대는 조금만 전투가 어려워도 정신없이 달아날 것이 틀림없었고, 이런 상태에서 만약 도망칠 구멍이 있다면 너나 할 것없이 개미새끼처럼 빠져나갔을 것이 자명했다. 그렇게 일부라도 흩어져 부대의 전열에 균열이 생기게 되면 그후에 짓이겨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하지만 한신은 완전히 이들을 사지로 몰아버림으로써 치열하게 버틸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중에 한신은 이때의 일에 대해서 "병법서에 '죽을 곳에 빠진 뒤에야 살게 할 수 있고, 망할 곳에 있어야 생존하게 할 수 있다.' (陥之死地而後生, 置之亡地而後存) 라고 다 나와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필사적으로 싸워서 이긴다는 것도 어느 정도 전력차를 좁힐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 아무리 치열하게 싸운다고 해도 패배해버리면 배수진은 도망갈 수 없는 만큼 전멸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형세이다. 어차피 고대의 전투에서 사상율은 제한되어 있는 편이고, 패배한다고 해도 병력을 규합하면 어느정도 보존할 수 있지만 배수진은 그럴 수가 없다. 팽성대전에서 한군이 괴멸당한 이유도 수수 강가로 몰린 탓이 컸다.

만약 한신이 여기서 전술을 끝냈다면, 설사 한차례 적의 공세를 막아냈다 해도 요행수를 썼을 뿐이라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배수진은 어디까지나 미끼에 불과했다. 한신의 목표는 따로 있었다.

4.5. 3차 교전, 한군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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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때, 한신이 준비해 놓았던 2천여 경기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력 수에서 워낙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한신이 리얼하게 지는 장면을 연출했고, 어차피 한군은 도망칠 곳도 없으니 승리가 눈 앞에 있어 보였으므로 전리품을 탐낸 조나라 병사들은 자기들 직무는 내팽겨치고 정신없이 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튀어나와 정형관의 수비는 말할 것도 없이 허약해져 있었다. 이미 앞쪽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으므로 이곳을 수비해야 한다는 경계심마저 없어졌을 수도 있다. 이 틈을 타 2천여 명의 경기병들은 폭풍처럼 내달려 정형관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하고, 앞에 있던 조나라의 깃발들을 모조리 뽑아 버리며 가져온 2천여 개의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만약 수 만이나 되는 조나라 군사 중에서 약간의 예비대가 남아 있었다면 이 작전은 실패했을 수 있다.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호왈 20만의 조나라 군사 중 최소 몇천명 조차의 병력도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한신을 잡으러 갔다는 쪽이 더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만약 그럴 경우, 정형관 내에 남아 있던 병력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2천여 경기병의 특공(特攻)에 가까운 공격을 받자 일순간 모랄빵에 걸려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을 수 있다.

한편, 생각보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한신과 장이 때문에 물러나던 조나라 병사들은 한군의 붉은색 깃발이 정형관에서 펄럭이는 것을 보고 경악에 빠졌다. 생각을 해보자. 압도적인 전력으로 손쉽게 이길 것이라고 여긴 싸움에서 생각보다 적의 반격이 너무나 거세 별 재미도 못보고 풀이 죽어 귀환하는데, 출발할 때만 해도 멀쩡하던 아군의 진지에 적의 깃발 수천개가 휘날리는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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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나라 병사들은 격한 반응을 보이며 혼란에 빠져 탈주를 시작했고, 붕괴되는 군대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모를 리 없던 조나라 장수들도 미친듯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직접 찔러 죽이면서 군대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이미 전군이 전의를 상실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사실 진영에 있던 한군은 고작 2천여 명에 불과하고, 앞서 말했듯이 수비군이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제대로 수습한 후 다시 전투에 나섰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겠지만 조나라군의 혼란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고, 승리의 기회를 잡은 한신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았다. 혼란에 빠진 조나라 군사들이 수습도 되기 이전, 한신은 장이와 함께 재빠르게 조나라군의 뒤를 급습했다. 그리고 동시에 정형관 안에 있던 2천여 경기병도 공격을 시작하여 조나라군은 급격한 혼란 + 한신, 장이의 공격 + 기병들의 공세라는 협격을 당하며 처참하게 무너져 완전히 패망하였다.

결국 조군은 모조리 괴멸되었고, 성안군 진여는 난중에 목이 베어졌으며, 조왕 조헐은 포로가 되었다고 하는데 사기 장이진여열전에 따르면 한나라군이 양국(襄國)까지 추격해서 죽였다고 한다. 이렇게 한군은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한신은 그 와중에 자신을 죽일뻔한 광무군 이좌거를 죽이지 말고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천금[16]을 주겠다고 공언했고, 누군가가 이좌거를 포박하여 데려오자 한신은 이좌거의 결박을 풀어주고 이좌거를 상석인 동쪽에 앉게 하고는 스승으로 모셨다.

5. 결과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벌어진 축하 이후, 한군의 부장들은 "본래 병법에는 '산릉(山陵)을 오른편으로 해 등지고, 수택(水澤)을 앞으로 해 왼편으로 한다.' 고 나와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물을 등지는 배수진을 하고도 이겼으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고 물었고, 한신이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해주자 감탄했다고 한다.

조나라를 정복한 한신은 이좌거를 칭찬하며 앞으로의 계책을 물었고, 이좌거는 "한군이 지금 대단한 기세긴 하지만, 바로 움직이기에는 너무 지쳤다. 만일 함부로 움직여서 성과를 못 낸다면 오히려 기세가 떨어질 테니, 차라리 지금의 기세를 살려 다른 나라에 겁을 주면 복속할 터이니 군사는 쉬게 하는 편이 좋다." 는 요지의 말을 했다.[17] 이 말을 들은 한신은 더 싸우기보다는 연나라에 사자를 보냈는데, 조나라의 20만 대군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연왕 장도(臧荼)는 항복을 선언하여 한나라에 귀의했다. 이렇게 되어 대번에 대 - 조 - 연나라가 무너졌고, 새로운 조나라 왕으로는 진여를 죽여 원수를 갚은 장이가 등극하였다.

6. 평가

이 싸움이 시작되기 전, 한신은 모든 면에서 적에게 단 한가지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북진을 시작했을 당시 3만에 불과하던 병력과 호왈 20만을 일컫던 조나라의 병력 차이는 조나라의 병력을 절반으로만 잡아도 3배는 차이가 났으며, 군대의 질적인 측면에서도 정예병력이 이탈하는 바람에 우위를 가질 수 없었다. 한신조차도 배수지전에서 싸운 병사들을 시정잡배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지리적인 면에서는 정형관이라는 요지를 장악하고 있는 진여를 무너뜨리기 힘들었으며, 지키는 입장인 조나라군에 비해 원정군인 한신은 계속해서 전투를 치르고 이동하느라 여러가지로 힘이 든 상태였다. 그러나 결과는 한나라의 완벽한 승리였다.

주목할 점은 이 전투에서 한신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전투의 기본 등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불리한 전력으로 적에게 승부를 건 일부터 해서 강을 등 뒤에 두고 진을 치는 배수진, 병력의 집중은커녕 전투 직전에 조참을 파견한 일에서부터 경기병대를 파견했던 일, 또 적군이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는 판국에 1만여 병력을 앞질러 보내 진을 만들게 했던 일 등, 거의 객기에 가까워 보였던 행적들이 있다.

그러나 대단한 것은 이러한 작전들이 될대로 되라고 질러보는 정도가 아니라, 적의 생각을 완전히 계산하고 벌인 작전이라는 점에 있다. 한신이 한 군리에게 '적이 공격해 오지 않을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한신은 적의 행동을 모두 예측한 상황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부대의 분할과 배수진, 이후 기습과 섬멸에서 '되면 좋고 아니면 끝장'이라는 식으로 질러 보고 마는 순간은 아무 것도 없었다. 전부 한신의 손에 짜여진 각본에 따라 순서대로 진행되었을 뿐이다.

패배를 당한 조나라군은 한신의 리얼한 연기에 당해 예비대를 잔뜩 남겨두지 않고 진격했다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막장 짓을 한 것도 없다. 정석대로 압도적인 대군을 이용해 한신을 공격했고, 한군이 물러나자 도망갈 곳도 없는 한군을 정석대로 밀어붙였을 뿐인데 대패를 당했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즐기는 유학자라 정면 승부를 했다는 진여에 대한 사서의 묘사가 병맛스럽기는 하나, 딱히 수비대신 전투를 선택한 진여가 정말 개막장 짓을 한 것도 아니었다. 이좌거의 계략대로 한군을 말려죽이는 작전으로 나갔다면 거의 무조건 이기거나 한신을 퇴각시켰을 가능성이 높긴 하나, 그냥 싸운다쳐도 조나라가 한군에 밀리는 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병력의 수와 질, 지리적 요건 등 모든 면에서 나으면 나았지 부족한 부분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수비전을 택했는데 생각만큼 쉽게 진행되지 않고 전투가 질질 이어지게 된다면, 한신도 괴롭겠지만 딱히 기반이 견고하다고 하기도 힘든 혼란기의 조나라 역시 썩 좋을 것도 없었을 것이다. 거의 조나라 왕이나 다름없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왕이 아니라 조왕 조헐의 신하였던 진여의 입지에도 문제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진여의 문제라고 한다면 한신과 싸웠다는 자체보다는 한신과 싸우게 했던 자만심이 문제였을 것이다. 한신의 병력이 형편없고 원정군이라 지쳤을 것이라고만 여기며 싸움에 나섰고, 1만 부대가 따로 움직일 때도 대장인 한신이 달아날까만을 염려하며 한번에 적의 대장을 물리치기 위해 싸움을 걸지 않았다. 또한 적의 기상천외한 배수진에 대해서도 조나라군은 비웃기만 할 뿐이었다. 이렇게 적을 과소평가하고 방심만 하고 있었으니 한군의 경기병들이 정형관을 급습할 때 이를 방비할 마땅한 수비병이 안 보였다는 점도 이해가 갈 만하다.

한신의 대단한 점은 적의 이러한 방심, 그리고 그 방심을 불러일으킨 자신의 열세를 오히려 무기로 사용해서 대역전을 일구었다는 점에 있다. 삼십육계(三十六計) 중에서는 패전계(敗戰計)라고 할만하다. 만일 한신의 군대가 더 강력했다면 일부러 수비작전 대신 정면승부를 하러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배수진을 꾸리기 위해 1만 명의 부대가 움직였을 때 조군이 그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도 않았을 테고, 적을 섬멸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정형관을 그렇게 비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신은 오히려 병력이 열세하고 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전투였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마지막 국면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도 포위 작전을 벌이며 적을 섬멸했다. 심지어 저수 강가에서 진여를 죽이고 조헐을 양국까지 추격해서 죽임으로써 승리를 이용하고 완성하는 추격전까지 벌이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그야말로 전투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국면을 만든 블록버스터 급 작품이었으며,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7.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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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자체만으로도 볼 만하지만, 이 전투의 진정한 의미는 팽팽한 초한전쟁에 있어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 있다. 당시 천하는 팽성대전 이후 항우와 유방이 치열하게 겨루고 있는 상황에서, 유방이 조금씩 눌리고 있던 처지였다. 하지만 유방은 팽성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경포 등을 회유하는 데 성공하고, 팽월과 공조를 유지하며 항우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한신이 위 - 대 - 조를 연이여 격파하고 연나라를 항복시키며 하북에서 세력을 잡았다는 것은 크다. 항우로서는 단기적으로는 불편한 세력이 북쪽에 똬리를 튼 것이고, 장기적으로 가면 갈수록 세력균형비는 완전히 유방에게 밀리게 되었다.

이후 항우는 상황반전을 위하여 제나라에 용저(龍且)를 파견하지만 이마저도 유수 전투에서 격파당하며 한신을 하북에서 축출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분쇄되면서 사실상 패배를 예약하게 되었다.

이 한신의 하북진출과 제압이 초한전쟁을 결정지었다고 보면, 그 한신의 하북진출을 결정지은 전투가 바로 정형 전투다. 조 - 연 - 제를 복속시켰다고 하지만 연나라는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조나라를 이긴 기세를 이용해 이좌거의 제안에 따라 항복시킨 경우고, 제나라의 경우 이미 역이기에게 회유되어 굳이 싸울 필요도 없었던 것을 괴철(蒯徹)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한신이 제나라를 급습[18]하여 일어난 것이다. 어느 쪽이건 조나라에서 패배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또 그 싸움이 대단히 불리한 상황에서 진행되었기에 더욱 결정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정형 전투야 말로 초한쟁패기를 결정지은 가장 파급력이 큰 전투라고 볼 수 있다. 팽성대전은 규모에서는 어마어마했지만 한군을 팽성에서 축출하고 제후들을 이탈시키는 정도에서 끝나버려 결정적인 마무리를 만들지 못했고, 해하전투 역시 엄청난 규모의 전투였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천하의 주인이 유방이 된 상태였으며, 한군의 입장에서 피날레를 장식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후 형세를 살펴보자면, 유방이 형양 · 성고 전역에서 항우의 발을 붙잡고 있는 동안 벌어진 정형 전투야 말로 단번에 세력비를 바꿔버렸으며, 항우의 몰락으로 가는 신호탄을 쏘았다는 점, 그리고 이후 유방과 한신의 애증관계를 만든, 한신의 자립을 가능케 했던 전투라는 점에서 초한쟁패기에 벌어진 모든 전투 중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국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유방, 항우, 한신 세 영웅들의 씁쓸하고도 비장한 최후의 서막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이 장군은 한신이 아니라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라의 장군, 즉 연나라, 제나라 등을 뜻하는 것이다. 한신의 전공과 명성에, 이들 나라의 농부들조차 곧 전쟁을 예감하여 농사도 내팽개치고 군사 동원령이 언제 내릴지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다.[2] 진의 명장 왕전의 손자이자, 왕분의 아들이다.[3] 장이가 위나라에서 외황이라는 곳의 수령으로 지내던 시절, 당시 건달이던 유방이 그에게 몇 번 찾아와 몇 달 머물기도 했다.[4] 이렇듯 장이 하나로 인해 유방은 상당히 많은 수고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전쟁 종결 후 장이의 아들 장오는 유방에게 크게 감사하며 무례한 모욕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며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고 한다.[5] 태행산맥의 요충지중 한 곳으로 조나라의 조사가 "이런 좁은 곳에선 센 놈이 이기게 되어있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호양을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6] 당연하지만 상황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속전속결을 고집하라는 게 아니라, 속전속결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만 지구전 등 다른 방법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속전속결 또한 어디까지나 '전쟁 이외의 방법이 없을 때'의 최선책인 것이고, 손자가 생각한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외교적으로 이기는 것(부전승). 유수 전투에서 역이기가 이 부전승을 이룰 뻔 했으나 이번엔 한신이 태클을 놔서….[7] 또한 본거지인 관중 지역은 바로 작년인 BC 205년 큰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까지 자치통감에 있고, 이에 백성들을 촉, 한 지역으로 이동시켰을 정도이니 이쪽에서 보급을 받기도 힘든 시기였다.[8] 물론 유방에게는 다른 부하들도 많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제나라 근처에서 항우에게 유격전을 걸고 있었다. 여차하면 인간흉기 항우를 상대해야 하는 데다가 거리도 멀다보니 이들의 군사를 데려오기는 힘들었고 결국 한신의 군사를 빼가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었다.[9] 조참은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도망치는 척장군을 참살한 다음 유방에게 합류한다. 이후 한신이 제나라 공격에 나설 무렵 다시 하북으로 이동했다.[10] 원문 그대로 대희(大喜)했다.[11] 한신은 이후 이좌거에게 "만약 진여가 광무군의 계책을 따랐다면, 나는 틀림없이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이좌거를 추켜세우는 의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 한신으로서는 대처하기 힘들었을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12] 이좌거의 제안이 받아졌다면 정형 앞에 도착하기 전에 여기서 막히기 때문에 조나라랑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부터 혈투를 했을 것이다.[13] 한나라군의 깃발은 유방이 거병할 시점부터 붉은색이었으니, 적기(赤旗)를 들었을 것이다.[14] 원문을 보면 조나라의 제장들도 아니고, 그냥 조나라 군사들이 이 모습을 보고 비웃었다고 나온다(趙軍望見而大笑). 장수들까지 갈 것도 없고 병사들 눈으로 봐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15] 앞서 말했지만 부족했던 병력 중에서도 따로 1만을 빼놓은 상태였으니, 적군에 비해 심하게 열세인 전력이었다.[16] 2만 냥. 권중달 자치통감.[17] 자세한 내용은 이좌거란에서 참조.[18] 이때 역이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제나라 왕 전광(田廣)은 역하(歷下)에 있던 제나라 병사들의 경계를 풀어놓고 있었다. 역이기를 죽게 한 것은 한신인데 한신이 제나라를 공략할 수 있게 만든 사람이 역이기가 되는 것이다. 이 일들의 흑막은 바로 괴철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