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연대 미상
1. 개요
초한전쟁 시기 조나라의 광무군(廣武君). 조헐을 조왕으로 옹립하여 광무군에 봉해졌다. 조나라의 명장 이목(李牧)의 손자라고 전해진다.[1]한신의 북벌과 관련하여 그 일화가 전해지는 인물이다.
2. 활약
2.1. 정형 전투: 받아들여지지 못한 청야전술
기원전 204년(한왕 3년), 한신과 장이가 군사를 조나라로 돌리자, 이좌거는 조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진여에게 자신의 계책을 진언했다.들리는 바로는 한나라의 장군 한신은 서하(西河)를 건너서 위왕 표를 사로잡고, 하열(夏說)을 사로잡아, 연여를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장이의 도움을 받아 우리 조나라를 항복시키려고 의논하고 있다니, 승세를 타고 고국을 떠나 멀리서 싸우는 그들의 예봉을 막아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는 천리 밖에서 군량미를 보내면 운송이 곤란하므로 병사들에게 주린 빛이 돈다고 합니다. 더욱이 땔나무를 하고 풀을 베어야 밥을 지을 수 있게 되므로 군사들이 저녁밥을 배불리 먹어도 아침까지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정형의 길이 좁아서 두 대의 수레가 함께 지나갈 수 없으며, 기병도 줄을 지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가야 할 곳이 수백 리나 됩니다. 이렇다면 사세로 보아 군량미는 반드시 그 후 방에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족하(足下)께서 신에게 기습 병사 3만 명만 빌려주신다면, 지름길로 가서 그들의 군량미 수송대를 끊어놓겠습니다. 군께서는 물길을 깊이 파고 누벽을 높이 쌓고 진영을 굳게 지켜, 한나라 군대와 어울려 싸우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적군은 전진해서 싸울 수가 없고, 후퇴하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때 우리 기습 병사가 적의 뒤를 끊고 들판에서 적이 약탈할 만한 식량을 치워버리면, 열흘도 못 되어서 적의 두 장군인 한신과 장이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습니다. 군께서는 신의 계책에 유의해주십시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적의 두 장군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즉, 일종의 청야전술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진여는 이 계책을 채용하지 않았다. 사실 진여로서도 이를 거부할 합리적인 이유는 있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시 한신 군에 비해 조나라군은 질적, 양적인 면에서 모두 우세했다. 또한 이 시점에서 한신은 이미 진여의 본진 격인 대나라를 정벌한 상태였고 한신 군과 유방의 본군이 합류할 가능성도 있었다.[2] 진여로선 우월한 전력을 이용한 정공법으로 단기결전을 택하는게 더 합리적인 방법으로 여긴 것. 하지만 상대는 한신이었다. 한신은 배수진으로 유명한 정형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를 대파했다.
기록에 따르면 진여가 이좌거의 제안을 따르지 않고 정공법을 결정하자, 한신은 매우 기뻐(大喜)하였다.
2.2. 연나라 평정: 싸우지 않고 이기다
한신은 군중에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 그를 사로잡아 오는 자에게는 천금(千金)을 내리겠다 하였다. 그러자 누군가가 광무군을 포박해 데리고 왔는데 한신이 직접 광무군의 포박을 풀어주며 동쪽을 향해 앉게 하고 자신은 서쪽을 향한 채[3] 광무군을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허나 광무군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신이 들으니 '패배한 군대의 장수는 무용(武勇)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나라를 존속하는 일을 도모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신은 패망한 나라의 포로인데 어찌 큰 일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한신이 광무군을 설득하고자 말했다.
"내가 들으니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었지만 우나라는 망했고, 그가 진(秦)나라에 있을 때에는 진나라가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다가 진나라에 있을 때에는 현명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임금이 그를 등용했는지 안했는지, 그의 계책을 들었는지 듣지 않았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성안군(진여)이 그대의 계책[4]을 들었다면 나와 같은 자는 벌써 포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허나 그대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대를 모실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래도 광무군이 주저하자 한신이 강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진심으로 그대의 계책에 따르겠으니 더이상 사양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한신이 진심으로 부탁하자 광무군이 말했다.
"신이 들으니 '슬기로운 사람도 천 번 생각하다 한 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번은 맞을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5] 그래서 '미치광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가려서 듣는다'라고 했습니다. 신의 계책이 반드시 채용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래도 충심껏 아뢰겠습니다."
그리고 이좌거는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며 한신에게 계책을 올렸다.
"원래 저 성안군 진여는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단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군사는 호성(鄗城)에서 패하고 그의 몸은 저수(泜水) 강안에서 죽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서하에서 하수를 건너 위왕 표(豹)를 사로잡고, 북쪽으로 진격하여 연여(閼與)를 피로 물들이며 대(代)나라의 상국 하열(夏說)을 포로로 삼았습니다. 계속 진격하여 일거에 정형(井陘)의 관문을 떨어뜨리고 오전도 미처 다 가기 전에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그 대장 성안군 진여를 죽였습니다."
"장군의 이름은 해내에 멀리 퍼지고, 그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이에 병화가 머지않아 자기 몸에 이르리라고 생각한 농부들은 농기구를 손에 놓아 밭 갈기를 멈추고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언제나 동원령이 내릴지를 알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정세는 장군에게는 매우 이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백성들은 과로에 시달리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있어 사실은 전투에 동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장군께서 피로에 지친 군사들을 다시 일으켜 연나라로 진격하여 그 견고한 도성 밑에 진을 치고 비록 싸우려고 하신다 할지라도 장시간의 공격에도 그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한군의 피폐한 실상만 드러나고, 군대의 기세는 꺾이어 결국은 시일만 오래 끌게 되어 군량미만 다하게 될 것입니다."
"약한 연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제나라는 필시 국경의 경비를 강화하여 전력을 다해 한군에 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연(燕)과 제(齊)는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며 서로 양쪽에서 버티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로써 한(漢)과 초(楚)의 싸움은 승부가 분명하게 되지 않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 천하의 정세는 장군에게 불리하게 변하게 됩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연제(燕齊) 두 나라를 공격하려는 장군의 계획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고로 용병에 능한 자는 자기의 단점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공격하지 않으며, 자기의 장점으로 상대방의 단점을 공격합니다."
즉, 사실 이미 한신의 군대는 한계에 봉착했고, 연나라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게 된다면 그 어려운 실상을 드러내게 되는 꼴이니 그렇게 되면 결국 연나라도, 제나라도 항복하지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으론 정형전투의 승리와 조나라 평정으로 인해 지금 한신의 명성이 절정에 오르고, 모두가 한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이좌거는 굳이 싸움 할 필요없이, 적당한 사람을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면 저쪽에서 항복할것이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신은 이좌거의 계책이 옳다고 여겨 그 계책에 따라 연나라에 사람을 보냈고, 연나라의 왕 장도(臧荼)와 신하들은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3. 평가
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아 당대 조나라 세력에서 대단한 인물이었음은 분명해 보이지만, 생몰년도가 불확실하고 한신과 관련하여 2번의 계책을 쓴 것 이외에는 다른 일화도 전해지지 않아서 여러모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6]그래서 몇몇 초한쟁패 관련 2차 창작물에서는 연나라 정벌 이후에도 참여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범증의 빈자리를 노리고 사항계를 통해 항우를 해하까지 유인한다든가.
신비한 인물이다보니 중국에는 허베이 성, 산둥성 각지 약 10여 곳이 이좌거의 묘지라고 전해지며 다양한 민간 전설이 남아 있다고 한다. 물론 저 부근이 초한지나 삼국지에서 가상 인물까지 다 끌어들여 가짜 관광지를 만드는 것으로 악명 높은 동네긴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설이 있는데 거열형에 처해져 시신이 찢어져서 무덤이 여러 개라는 설이다. 수레라는 뜻의 車자를 성이 아닌 이름으로 쓰는 것도 흔치 않을 뿐더러, 손빈, 경포와 같이 자기가 받은 형벌이 이름이 된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 개국공신인 주창의 후손 이름 중에도 좌거가 있어 그냥 좀 흔치 않은 이름 중 하나라는 반론도 있다.
4. 미디어 믹스
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 유방전의 우군으로 나온다. 클래스는 도사. 패현전투 2에서만 등장하며 한신에게 조언하고, 항우에게 매복의 독을 거는 모습으로 나와 유방과 함께 일부러 항우를 조롱해서 유인한다. 초상화는 사마휘와 돌려쓰는 공용 초상화.
[1] 이목은 당시 조나라 왕이었던 조유목왕에게 사형당했는데 어떻게 손자가 멀쩡히 살아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겠지만, 조나라는 이목이 처형당하고 3개월 후에 나라 자체가 망해버렸다. 그동안 처형을 피해 이목의 가족들이 도망다니다가 조나라가 망해버려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2] 다만 이 때는 항우가 한참 형양과 성고를 공략하고 있던 중이라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3] 자리를 동서 방향으로 배치할때, 동쪽은 해가 뜨는 방향이라 양이고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라 음으로 쳐서 동쪽을 상석, 서쪽을 하석으로 여겼다. 또한 당시 자리 배치에 대한 상식에서 동에서 西面을 하는 자는 主人, 서에서 東面하는 자는 客이였다. 이는 한신이 이미 조나라를 평정하였기에 主人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이좌거는 이미 포로이기에 北面하여야 하지만, 손님으로 대우한다는 표현으로 생각된다.참고로 북에서 南面하는 자는 君主이고, 남에서 北面하는 자는 臣의 자리이다.[4] 위 항목에 언급한 청야전술을 말한다.[5] 이것이 천려일실 천려일득(千慮一失 千慮一得)이라는 고사의 유래다.[6] 이후 고제의 명령으로 한신 밑에서 떠나서 다른 일에 종사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