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0:41:22

발터 벵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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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치 독일 국장(화이트).svg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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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벵크프사.jpg
이름 Walther Wenck
발터 벵크
출생 1900년 9월 18일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독일 제국 작센주 비텐베르크
사망 1982년 5월 1일 (향년 81세)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리트 임 인크라이스
복무 국가방위군(1921년 ~ 1933년)
독일 국방군(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파일:Si_4b.png 육군 기갑대장
(General der Panzertruppe)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겨울폭풍 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베를린 공방전
주요
서훈
기사 철십자 훈장
독일 십자훈장
서명 파일:벵크서명(수정).png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도서 및 매체에서6. 보직 내역7. 진급 내역8. 서훈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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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국방군의 장성이다. 최종계급은 육군 병과대장(기갑) 이다. 1900년생으로 독일 국방군의 가장 어린 병과대장 중 하나였으며[1] 동안인 외모 덕에 '소년 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 말기 서부전선을 방어하는 유일한 독일군세였던 제12군의 사령관이었으며, 히틀러의 요구대로 베를린의 포위를 해제하기보다는 베를린에 갇힌 민간인을 빼내 미군 점령지로 대피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그런 이유로 양심적인 군인이라고도 평가된다. 동시에 유능한 지휘관으로도 평가받는데, 스타르가르드 전투 당시 한물간 자신의 병력으로 소련군을 돌파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군생활

1900년 비텐베르크에서 장교 막시밀리안 벵크 중위(1867-1943)와 헬레네 기벨러(1871-1934)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난 발터 벵크는 1911년에 나움부르크 사관학교에 생도로 입학한다. 벵크의 두 형도 모두 군인이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896년생 큰형 헬무트는 1915년 러시아에서, 1898년생 작은형 한스울리히는 1918년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파일:벵크(생도).jpg
생도 시절의 발터 벵크

생도 벵크는 지속적으로 교관들에게 주의를 받는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일과 중에도 주의력이 떨어져 멍청한 실수를 해대며 체력도 약해서 체육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성적은 진급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노력하면 더 잘 할 텐데 노력을 하지 않고, 학업에 관심 자체가 없어 보이며 또래들과 스포츠 활동만 즐긴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가서에는 반복적으로 라틴어와 영어 실력이 매우 좋지 않으며 작문도 잘 못한다는 내용이 써 있다. 결국 몇 차례의 유급 끝에 가까스로 베를린의 그로스 리히터펠데 사관학교로 진급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일 11월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상급학년으로 진급하는 대신 동기 몇몇과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자유군단에 합류한다. 당시 그는 라인하르트 자유군단에 속해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진압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으며 하사로 진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미 전쟁에서 장남과 차남을 잃은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그를 찾다 부대로 찾아온다. 마침 보초를 서던 벵크는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을 막으며 실랑이를 벌이다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 다른 장교에게 '이 신사 분께서 제 아버지라고 주장하시는데, 신분증이 없어서 못 들여보내겠다'라고 말한다. 전쟁 동안 중령으로 진급한 아버지는 대대장을 찾아가 아들을 끌고 나온다. 벵크는 사관학교로 다시 끌려간다. 아버지는 중대장에게 '당장 이놈 가둬놓고 학교 졸업부터 시켜!'라고 소리쳤고, 그는 탈영죄로 체포되어 5시간짜리 징계를 받게 되었다. 하지만 징계실로 끌려가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하사에게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선언하고는 창문을 넘어 다시 도망친다.[Bradley(1981)_p.41]
파일:벵크(1919).jpg
자유군단에 들어간 벵크

다시 라인하르트 군단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벵크는 빌헬름 폰 오펜의 군단으로 옮겨 가서 활동을 계속한다.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오펜 대령은 벵크에게 받아줄 테니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으시게 집에 다녀오라고 명령한다. 아버지는 아비투어도 없는 아들이 백수가 될 것을 염려하며 은행원 등의 일자리를 권유하지만, 그는 다시 부대로 돌아간다. 복귀하자마자 연대 부관에게 보병학교 입학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을 듣고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더 이상 일자리 알아보지 마세요. 전 군인 할 거예요!'라고 편지를 써서 보낸다.[Bradley(1981)_p.42]

2.2. 전간기

1921년 1월 벵크는 바이마르 공화국 국가방위군에 정식으로 입대한다. 1923년 2월까지 뮌헨의 중앙 보병학교[4]에서 교육받은 그는 졸업과 함께 제9보병연대 3대대에 소위로 임관하고 중위를 달 때까지 같은 부대에서 부관으로 근무한다.
파일:벵크(1926).jpg
1926년의 발터 벵크 소위

1928년 가을, 차량수송 전술교관으로 있던 하인츠 구데리안은 차량수송부대 교육참모부 소속 슈토트마이스터 대령의 부탁으로 전차 전술 수업을 진행한다. 차량수송부대와 진행한 모형전차훈련에 부슈 중령은 자신이 대대장으로 있던 제9보병연대의 3대대를 참여시켰다. 당시 부슈의 부관이었던 벵크와 구데리안의 첫만남이었다.
파일:벵크 중위.jpg
제9보병연대 3대대 부관 발터 벵크 중위. 옆에 있는 사람은 대대장 쿠르트 리제 중령.

1928년 10월 3일에는 1905년생 이름가르트 베넬트와 결혼하고 1930년 8월 1일에 쌍둥이 남매 헬무트와 지그리트의 아버지가 된다. 이름가르트의 아버지는 베를린 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던 아르투르 베넬트였다. 부부는 벵크의 군인 월급에 더해 본가와 처가에서 매달 200제국마르크의 용돈을 받았다.[BArch_PERS6/391] 얼마 후에는 차량화전투부대에서 근무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정식 기갑부대를 창설할 수 없었던 군부에서 이름만 바꿔 만든 부대였다. 1933년 5월 1일에는 제3차량수송대대에 배치된다. 당시 차량수송총감부 참모장이었던 하인츠 구데리안 중령의 입김이 작용한 인사였다. 벵크는 보병연대에서 계속 근무하고 싶어했으나 해당 부대의 전 대대장이었던 구데리안은 부슈를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그를 쟁취한다.

벵크는 곧 대위로 진급한다. 구데리안은 그가 훌륭한 참모가 될 거라고 믿고 전쟁대학에 보낼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미 제9보병연대 시절 시험을 한 번 어영부영 보고 떨어진 전적이 있던 벵크는 시험을 다시 칠 생각이 없었다. 구데리안은 시험을 접수해 놓고 부하를 잘 어르고 달래서 시험을 치게 한다. 결국 벵크는 시험에 붙고 1934년부터 1936년까지 베를린 전쟁대학에서 일반참모 교육과정을 듣는다.[6] 훗날 만슈타인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때를 언급하며 벵크 같은 훌륭한 참모장교가 설득 끝에 친 두 번째 시험에서야 전쟁대학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묘하다고 말한다.[Manstein(1955)_p.533]

전쟁대학 교육을 마친 벵크는 베를린 총참모본부에서 기갑부대 관련 업무를 수행하고 한스 폰 젝트의 부관을 지내기도 한다. 1938년 11월 10일에는 아이제나흐에 주둔한 제2기갑연대 1대대장이 되고, 이듬해 3월 1일에 소령으로 진급한 뒤 8월 18일부터는 제1기갑사단 참모로 근무를 시작한다.

2.3. 폴란드 전역

제1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의 제19기갑군단에 속해 폴란드 전역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 덕분에 벵크는 9월 18일에 2급 철십자 훈장을, 2주 뒤인 10월 4일에는 1급 철십자 훈장을 받는다. 이때 사단 부관으로 근무하던 베른트 프라이탁 폰 로링호펜과 친분을 쌓는다.[8] 당시 벵크는 출전 명령을 사단에 전달하며 'Auf los geht's los — Los!'[9]라는 말로 명령을 맺었는데, 이 말이 사단 내에서 유행하면서 결국엔 제1기갑사단의 좌우명이 된다.
파일:벵크 소령.jpg
발터 벵크 소령

벵크는 프랑스 전역에도 제1기갑사단 작전과장으로 참전해 활약한다. 작전 개시 명령이 급하게 떨어진 1940년 5월 9일에는 휴가를 나가 있던 탓에 로링호펜이 그를 급하게 불러들여야 했다.

5월 14일, 사단장 키르히너 장군과 함께 있는데 구데리안이 앞으로의 사단 이동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왔다. 전 사단을 서쪽으로 돌릴지, 측면 방어를 위해 일부 병력을 아르덴 운하 동쪽에 배치할지를 고민하는 그와 사단장의 대화 벵크는 대뜸 끼어들어 한 마디를 던진다. "분산하지 말고 집중하라!" 평소 구데리안이 기갑장교들에게 말하던 시그니처 대사를 던진 것이다. 구데리안은 그의 발언을 듣더니 전 사단을 동시에 움직이기로 결정한다. 이후 제1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진격하며 여러 지역을 점령한다.[Guderian(1951)_p.95]

5월 17일, 구데리안이 일시적으로 해임당하고 우아즈 강을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벵크는 놀라서 수아즈의 군단 사령부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있던 제12군 사령관 빌헬름 리스트를 설득해 진격을 재개 허가를 받아내고 리스트가 룬트슈테트를 대신해 구데리안의 지휘권을 돌려줄 수 있도록 한다. 단 이미 최고사령부에서 내려온 명령은 이행해야 했기 때문에 군단 사령부만은 옮기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은 허락이었다. 물론 군단장 구데리안은 후방에 머무를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장 전선으로 향했고, 구데리안의 실제 사령부와 후방에 남은 군단 사령부 사이에 통신선을 연결함으로써 상부에서 모르도록 했다.

수아즈에서 출발해 이미 진격 중인 사단을 뒤쫓아가던 벵크는 몽코르네에서 프랑스 기갑부대에게 공격받고 경상을 입는다. 그는 부상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라 뇌빌르-보스몽의 사단 사령부로 복귀해 환영받는다. 사단장 키르히너 장군은 작전과장이 다친 것을 보고 기뻐한다. 이틀 전 잠깐 낮잠을 자기 위해 들판에 드러누웠다가 지휘차량이 앞바퀴로 그의 무릎을 밟아서 부상을 입었고, 작전지도 옆에 임시 침대를 두고 누워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상당한 장교가 자신뿐이 아니라는 사실이 기뻤던 것이다.[Bradley(1981)_p.143] 벵크는 이때의 부상으로 전상장 훈장을 받는다.

5월 28일, 히틀러가 구데리안에게 1개 기갑집단을 편성하라고 명령하면서 편제가 바뀌었다. 구데리안이 군단장으로 있던 제19기갑군단에 직접 속했던 제1기갑사단은 루돌프 슈미트 중장의 제39군단 휘하로 제2기갑사단, 제29차량화보병사단과 함께 들어왔다.

제1기갑사단은 6월 18일 자정쯤에 제39군단에서 지시한 목적지였던 몽벨리아르에 도착한다. 전차에 연료가 남아서 진군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군단장과 연락이 되지 않아 곤란하던 찰나, 벵크는 기갑집단장이 된 구데리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벨포르로 계속 진격해도 되냐고 묻는다. 구데리안은 당연히 허락했고, 제1기갑사단은 몇 시간 후 벨포르 요새를 점령한다. 드 파리 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대기하던 벵크는 새벽부터 찾아온 구데리안에게 왜 이렇게 빨리 오셨냐며 놀라서 인사했고, 두 사람은 목욕을 하러 사라진 사단장을 기다리며 준비되어 있던 고급진 아침 식사를 즐긴다. 이 식사의 원 주인은 독일군이 벌써부터 쳐들어올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요새의 프랑스 장교들이었다.[Guderian(1951)_p.119]

구데리안은 키르히너의 심정을 이해하니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벵크는 장군을 불러내겠다며 갑자기 호텔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지나가던 아흐트-아흐트 대공포를 붙잡고 호텔 바로 앞에서 아직 점령하지 않은 프랑스군 요새 방향으로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식사를 하던 구데리안이 포격음에 화들짝 놀라 두리번거리는 사이, 적군의 포격인 줄 알고 목욕 도중 뛰쳐나온 키르히너가 구데리안 앞에 나타난다. 쫄딱 젖은 채 옷도 입지 못한 사단장의 모습에 구데리안을 포함한 그 자리의 장교 모두가 실컷 웃어댔다고.[Mellenthin(1977)_p.257]

벵크는 벨포르 점령 공로로 중령으로 진급한다. 구데리안은 훗날 회고록에 당시의 일을 두고 제1기갑사단은 '기갑부대는 '종착역까지 가는 차표로 무장해야 한다'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다'며 뿌듯해 한다.[Guderian(1951)_p.119]

2.4. 스탈린그라드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까지 제1기갑사단에서 같은 보직을 맡고 일하던 벵크는 1942년 1월 26일 독일 십자훈장을 수훈하고 대령으로 진급한다. 같은 해 6월 1일부터는 베를린에서 3개월간 참모교육과정 교관을 맡아 장교 교육을 담당하고, 9월 3일에는 제57기갑군단 참모장으로 부임한다.

11월에 그는 제3루마니아 왕국군 사령관 두미트레스쿠의 참모장이 된다. 말이 참모장이었지 사실상 천왕성 작전으로 와해되어 패주 중이던 루마니아군을 수습하라는 의미였다. 부대가 존재하지 않다시피 하는 상황에서, 벵크는 11월 27일에 갓 돈 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만슈타인에게 보고하기 위해 노보체르카스크로 간다.
만슈타인: 벵크, 자네라면 자네 군 쪽의 소련군이 로스토프로 돌파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네. 돈-치르 전선을 사수해야 해. 아니면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뿐만 아니라 코카서스의 A집단군 전체를 잃고 말 거야.
벵크: 무슨 병력으로요, 원수 각하?
만슈타인: 그건 나도 모르지. 자네가 알아서 잘 할 걸세.
명령을 받은 벵크는 병력을 긁어모으기 위해 각종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한다. 한 번은 제6군에 소속되어 있던 선전부대를 발견하자 주요 합류점에 그들을 배치하고 촬영한 영상을 상영하도록 한다. 지나가던 군인들이 멈춰 서서 상영물을 보고 있으면 그들을 그 자리에서 거둬들여 무기를 들려주고는 전선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또 그렇게 긁어모은 장병들을 수송할 차량이 모자란 상황에서 버려진 연료 보급점을 발견하자 부하들을 시켜 길가에 '연료 보급 지점으로 가는 길'이라는 팻말을 꽂아 놓는다. 그리고는 연료 보급을 위해 다가오는 군용 트럭과 지휘차량을 정비 명목으로 남겨 활용한다. 게다가 헤르만 호트의 부대로 가던 멀쩡한 전차 몇 대의 상태가 불량하다고 주장하며 빼앗아 전차 10여 대를 확보한다.[Bradley(1981)_p.243]

벵크는 그렇게 수습한 부대를 활용해 A집단군과 돈 집단군의 간극을 메운다. 존재할 리가 없는 병력이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만슈타인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벵크를 불러낸다.
만슈타인: 자네 군은 무슨 기갑여단으로 상황을 수습했나? 서류상으로는 보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벵크: 원수님께서 로스토프를 사수하라고 명령하시고 제가 무슨 병력으로 그러냐고 여쭤 봤을 때 아무것도 없으니 알아서 잘 해 보라는 말을 들었는데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절 군사재판에 회부하셔도 좋습니다.
만슈타인: 자네 상황은 이해하네. 하지만 도둑질은 당장 그만둬![Bradley(1981)_p.245]
훗날 만슈타인은 자신의 회고록에 당시 벵크의 행보를 칭찬하며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적는다.[Manstein(1955)_p.533] 얼마 후 벵크는 12월 26일에는 홀리트 파견군 참모장으로 부임하고, 12월 28일에는 기사 철십자장을 수훈한다.
파일:벵크(1943).jpg
1943년의 발터 벵크 대령

1943년 3월 1일에 소장으로 진급한 벵크는 3월 15일에 제1기갑군 참모장으로 부임한다. 당시 사령관은 에버하르트 폰 마켄젠이었다.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도 참전하며, 이후 1944년 3월 24일 A집단군 참모장이 되고 4월 1일에 중장으로 진급한다.
파일:벵크(마켄젠).jpg
마켄젠의 참모장 시절 벵크
파일:벵크(만슈&후베).jpg
1944년의 발터 벵크, 한스팔렌틴 후베, 에리히 폰 만슈타인

2.5. 1944년 7월 20일 이후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신경쇠약으로 일을 내려놓은 차이츨러와 그의 대리로 근무하다 폭발에 휘말려 부상을 입은 아돌프 호이징거 대신 육군 참모총장이 된 구데리안은 벵크를 작전과장으로 불러들였다가 이내 참모차장으로 삼는다. 작전과장 보기슬라프 폰 보닌 대령과 업무 스타일이 잘 맞아서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또한 이때 작전과 외에도 훗날 '겔렌 조직'으로 알려질 라인하르트 겔렌 소장의 '동부전선 해외군' 정보과 지휘권을 인수한다.
파일:벵크(구데리안).jpg
1944년의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 왼쪽부터 발터 벵크 중장, 베른트 프라이탁 폰 로링호펜 소령, 헝가리군 참모총장 야노스 뵈뢰슈 상급대장,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 한스 폰 그라이펜베르크 보병대장.

엉망진창이 된 전황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일하던 벵크는 직속 상관인 구데리안과 히틀러의 기싸움에 휘말리고 만다. 구데리안은 히틀러와 회의에서 허구한 날 싸워댔고, 히틀러가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면 반항의 의미로 회의에 직접 출석하지 않고 벵크를 대신 보냈다. 벵크는 매번 성실하게 회의에 참석해 구데리안이 시킨 대로 일을 처리했다. 또한 OKW와 OKH가 경쟁 관계에 있다는 인식과 달리 구데리안은 OKW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벵크 역시 요들의 보좌관 빈터 장군과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두 사람이 의견 차이로 언쟁을 벌인 적은 몇 차례 있지만 구데리안치고는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려고 노력한 편이었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이후 구데리안의 명령에 따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지휘하는 비스툴라 집단군의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그가 참모장으로 지휘하던 퀴스트린 해방 작전이 2월 15일부터 17일까지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2월 17일 저녁에 히틀러가 벵크를 호출한다. 그러나 그를 불러 놓고 만나 주지 않았던 탓에 새벽 4시까지 히틀러 사령부에서 밤을 지새우다 겨우 면담을 마치고 집단군 사령부로 향한다. 이틀간 한숨도 못 잔 운전병이 좀 쉬었다 가자고 했지만, 벵크는 빨리 전선으로 돌아가야 한다며 그냥 이동하기를 택한다. 한 시간쯤 차를 몰던 운전병은 더는 못 가겠다고 말하고, 벵크는 자신이 대신 운전대를 잡겠다며 나선다. 문제는 벵크 역시 과로에 시달려 온 데다 운전병이나 마찬가지로 이틀간 잠을 못 잔 상태였다. 담배를 씹어가며 졸음을 쫓으려고 노력하던 그는 결국 졸음운전을 하다가 교각 난간에 들이박고 만다. 동승했던 부관과 운전병은 차에서 튕겨나왔지만 벵크는 그대로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정신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중상을 입은 운전병은 차에 불이 붙어 폭발하기 직전 상관을 끌어내고 도로에 굴려서 옷에 붙은 불을 끈 뒤 두개골과 늑골에 골절상을 입은 장군을 급히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결국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은 벵크는 참모차장 및 참모장 업무에서 손을 떼야 했고, 한스 크렙스가 그의 후임 참모차장이 된다.

2.6. 제12군과 베를린 공방전

2주간 입원해 있다 퇴원하고 요양 중이던 벵크는 4월 6일에 부르크도르프의 연락을 받는다. 제12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들은 벵크는 제12군이 없지 않냐고 묻고, 부르크도르프는 이제 막 만들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곧장 베를린으로 가 총통 벙커에서 상황을 설명받은 벵크는 참모장으로 귄터 라이히헬름 대령을 고른다. 루르에 갇혀 있다 베를린으로 오라는 명령을 받고 탈출한 라이히헬름은 벵크를 만나고 한때 유쾌했던 그가 심적 부담과 부상 때문에 초췌해진 모습에 크게 충격받는다.[Zumbro(2006)_p.495]

베를린 서쪽에 주둔해 서부전선을 담당하던 벵크의 제12군은 루르에서 포위당한 발터 모델의 B집단군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4월 22일, 급작스럽게 부세의 제9군과 합류해 베를린으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전일 이미 펠릭스 슈타이너의 분견군에 게오르기 주코프의 부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지만, 슈타이너의 부대는 제대로 된 전력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상 제12군이 유일하게 남은 제대로 된 부대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상대적인 수준이었다. 4월 23일 오전, 육군 참모총장 크렙스는 명령 전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제12군을 방문한다. 열성적인 히틀러유겐트 단원들로 구성된 3개 사단이 있었지만 그 밖에는 여기저기서 긁어 모아 간신히 재편성한 부대가 전부였다.[Loringhoven(2007)_p.153] 어쨌든 벵크는 명령에 따라 공세를 개시하지만 극심한 전력 격차로 베를린 서쪽의 포츠담 외곽 지역에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 같은 시각 홀스테 장군과 부세 장군도 베를린으로 향하는 데에 실패한다.

그럼에도 벵크는 브란덴부르크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 진격을 다시 시도한다. 3개 사단을 가지고 베를린에서 2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페르히까지 진격하는 데에 성공한 벵크는 히틀러에게 희망을 안겨 준다.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보란 듯이 고함을 치는 히틀러에게 크렙스는 '페르히는 베를린이 아니지 않냐'며 일갈한다.[Loringhoven(2007)_p.167] 4월 27일에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하자, 히틀러는 카이텔을 통해 벵크에게 재차 베를린으로 진입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벵크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다. 대신 제12군과 제20군단은 퇴각할 것이며, 제9군의 지원도 기대하지 말라고 통보한다.

애초에 벵크는 베를린으로 진격해 히틀러를 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는 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과 계속해서 교전하며 포위망을 느슨하게 만들어 베를린에 주변부에 갇힌 군인과 민간인들이 도망칠 틈을 만든다.

이후 벵크는 할베에서 포위당한 3만여 명의 제9군 병사들과 민간인을 흡수해 엘베 강에 주둔한 미군에게 닿을 때까지 후퇴한다. 얼마 남지 않은 전력이 엘베 강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동안, 5월 3일 정오부터 막시밀리안 폰 에델스하임 장군이 벵크를 대신해 슈텐달에 주둔한 미군 9군 사령부 참모들과 협상을 시작한다. 항복할 테니 군인들을 미군에 인도하고 민간인들이 미군 점령지로 피난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군 측에서는 독일 민간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탕거뮌데 인근의 엘베 교와 보트를 이용할 것을 허락해주고, 5월 5일부터 독일인들은 엘베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교각은 반쯤 파괴되었고 보트도 몇 척 없었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교각 잔해에 매달리거나 직접 헤엄을 쳐서, 또는 잔해로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야 했다. 벵크와 그의 참모들은 맨 마지막에 건너갔는데, 강을 건너던 도중 그가 타고 있던 보트가 소련 육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아 벵크 본인은 무사했으나 동승한 장교 몇 명이 총상을 입었을 만큼 급박하게 진행된 철수였다.[Wenck(1965)]

이후인 미군은 강을 건너 온 독일 포로 1만여 명을 다시 엘베 강 건너로 수송해 소련군에게 넘긴다.

2.7. 전후

항복 후 미군 수용소에 갇혀 있었으나, 전후 처리 과정에서 미군이 해당 지역을 영국군에게 넘기고 철수하며 영국군 포로 신분이 되었다. 다른 참모장교들과 함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파데르보른 인근의 에젤하이데 수용소로 옮겨졌고, 이후 벨기에 오스텐드의 수용소로 호송되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던 로링호펜 소령도 그와 같은 수용소에서 포로로 생활했다.[Loringhoven(2007)_p.185][23]

1947년 크리스마스에 출소한 벵크는 앓아눕는다. 위궤양으로 인한 극심한 위출혈을 겪으면서도 은행 계좌는 압류당했으며 연금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결국 병원에 실려간 그를 한 의사가 돈을 받지 않고 받아준다. 거의 6개월을 입원해서 누워 지내던 벵크는 상태가 조금이나마 나아지자마자 1948년 9월부터 파이프관 설치 회사인 후베르트 슐테 유한회사에 상무직원으로 취직한다. 위궤양 때문에 출근할 때마다 보온병에 오트밀을 담아 가 한 시간마다 한 숟갈씩 떠 먹어야 했다. 이 회사는 Dr. C. Otto & Comp.의 계열사로, 벵크는 1954년에 본사로 이동해 집행위원회에 임명되고 1955년에는 위원회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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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의 벵크

새로 창설된 서독 연방군은 회사 일에 집중하던 벵크에게 수뇌부 직책을 주기 위해 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벵크는 정부에서 제안한 연방군 총감찰관의 보직명을 총사령관으로 바꿔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연방군이 정책상의 마찰로 퇴역한 보기슬라프 폰 보닌 대령을 정식으로 다시 쓴다는 조건을 달았다.[Spiegel_23/1955] 또한 그는 연방군 수뇌부에서 나치 논란이 불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사 위원회가 군 복무 기록을 검토해야만 한다는 말을 듣자 군인으로서의 명예에 대한 훼손이라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 사업에 이미 발을 들여놓고 있던 벵크는 총감직을 포기하고, 초대 연방군 총감찰관은 아돌프 호이징거에게 돌아간다.

1960년부터는 딜 디펜스의 뉘른베르크 지부 본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해외 각국 정부를 상대로 주요 계약을 따 내기도 했으며, 대부분의 구 국방군 장성들과 달리 군부에서 독립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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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 디펜스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벵크

1966년에 은퇴한 그는 서독 니더작센 주의 바트 로텐펠데에 거주한다. 전쟁 때 친분을 쌓은 테오도어 부세, 지크프리트 베스트팔과 함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을 자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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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슈타인과 벵크, 부세 만슈타인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벵크, 부세, 베스트팔

그 밖에도 여러 서독군 및 서독 정부 인사들, 그리고 옛 동료들과 꾸준히 교류했다. 현역 시절만큼이나 좋은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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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크의 75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온 귄터 라이히헬름

1982년 5월 1일, 벵크는 오스트리아에 휴가차 방문했다 잘츠부르크 북부 리트 인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81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운전하던 차량이 젖은 도로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나무에 들이박아 즉사했다고 한다.[ChicagoTribune_1982.05.08] 묘지는 바트 로텐펠데의 공동묘지에 아내와 함께 자리한다.

3. 평가

여러 유명한 장성들 휘하에서 근무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어지간한 주요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체로 전면에 나설 일이 드문 참모장교 신분이었기 때문에 선전 매체를 통해 유명세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와 함께 일한 모든 장교가 그를 칭찬하며 좋아했다. 수년간 여러 상관들에게 받은 장교 성과 평가서에는 '유능하며 논리적이고 성실한 데다 전쟁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라는 평가가 가득하다. 장교의 4가지 유형 분류 기준과 함께 놓고 보면 그야말로 참모장교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인 셈이다.

벵크의 업무상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 그의 성격 또한 수많은 장교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장교 평가서에는 '유쾌하고 긍정적이며 부하들을 잘 다룰 줄 알아 인기가 좋은 장교'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젝트, 클라이스트, 만슈타인, 구데리안과 같이 계급이 어마무시하게 높거나 성격이 까다로운 상관들과도 마찰하지 않고 부관이나 참모로 근무하며 좋은 평가를 받았음을 생각하면 그의 붙임성과 친화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하급장교 시절부터 안면이 있었던 구데리안은 그를 아들처럼 아끼다시피 했고, 만슈타인은 그를 '상사조(Sonnenvogel)'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전후에도 꾸준히 교류를 이어 나갔다.[Manstein(1955)_p.533]

또한 벵크는 베를린 공방전 당시 민간인 구출에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당시 벵크가 제12군으로 소련군을 제대로 공격했더라면 나치 독일의 패망이 약간 늦춰졌을지도 모른다.

4. 여담

  • 다양한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제9보병연대 시절에는 '베베(Wewe)'라는 애칭으로 불렸고, 동료들과 말을 타고 경주할 때 1등으로 목적지에 도착한 후엔 '배드애쓰 베베(Wewe den Schlimmen)'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Bradley(1981)_p.81] 부하 장교나 병사들, 전쟁대학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은 그를 '벵크 아빠(Pappi Wenck)'라고 불렀다. 햇살 같은 긍정적 성격 덕분에 상술한 바와 같이 '상사조(Sonnenvogel)'라는 별명도 있었다.
  • 1922년 제9보병연대 제3대대장 막스 폰 피반 대위는 양을 키웠다. 제3대대 부관으로서 대대 예산 업무도 맡았던 벵크는 대대장의 양떼에서 나온 우유와 양털을 팔아 돈을 모으고 수영장을 매입했다. 주로 연대에서 사용했지만 때로는 일반인들에게 개방하기도 했다. 이후 벵크는 수영장 입장료에서 얻은 수입으로 사이드카가 달린 오토바이와 대대장 전용 차량을 구입할 수 있었다.[Bradley(1981)_p.76]
  • 젝트의 부관으로 있던 당시,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젝트가 선물로 받은 연미복을 꺼내 입은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상급대장 각하께서 그 옷을 입으시면 옆에 있는 다른 연미복 차려입은 남자들은 여자들한테 말도 못 붙이겠어요!'는 감탄이 마음에 들었던지, 젝트는 웃으며 그렇게 옷이 마음에 들면 자신이 죽고 나서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실제로 젝트는 유언장에 연미복을 벵크에게 주라고 적었고, 벵크는 죽을 때까지도 그 옷을 잘 보관해 두었다.[Bradley(1981)_p.392]
  • 전쟁대학에 다니던 1935년, 오토바이를 타고 과속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학교 측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군사재판에 넘겨질 뻔했으나, 다행히 인명 피해나 심각한 기물 파손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징계는 무마되었다.[BArch_PERS6/391] 1945년에도 교통사고를 내 6주 동안 업무에서 손을 떼야 했고 결국 교통사고로 죽은 것을 보면 묘하게 느껴진다. 사주에 교통사고가 있나
  • 프랑스 전역 때 벨포르 요새를 점령하러 가는 길에 어둠 속에서 불이 켜진 한 오두막을 발견한 벵크는 독일군이 이미 점령한 곳인가 싶어 지휘 차량에서 내려 문을 열어 보았다. 오두막은 사령부가 아니라 술집이었고, 안에는 술에 취한 프랑스 장교들이 드글드글했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벵크는 신분이 노출되기 전에 봉수아(Bonsoir)!라고 소리를 지르고 문을 쾅 닫은 뒤 차량에 황급히 올라타서 운전병에게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Bradley(1981)_p.159]
  • 오토바이를 정말 좋아했다. 제9보병연대 3대대 부관 시절, 대대장이었던 부슈를 사이드카가 달린 오토바이로 모시러 나간 적도 있을 정도다. 참모차장으로 부임하고 며칠 후에는 구데리안에게 '상급대장 각하! 오토바이가 없는 보직은 이번이 처음이에요.'라고 말하자 구데리안은 '그러면 안 되지. 당장 해결해 보자. 여길 지나가는 교통편은 많으니 전격 수송으로 받아오면 돼.'라고 말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벵크에게 꽃과 함께 새 오토바이를 선물했다. 신난 벵크는 즉시 새 바이크를 몰고 총통 사령부까지 달렸다.[32]
    신나게 달리던 벵크를 총통 사령부 보초병이 막아섰다. 여긴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갈 수 없다고 말하자, 벵크는 바이크 코트를 열어 중장 계급장을 보여주며 '얼른 비켜, 청년.'이라고 말하고는 다시 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저만치에 차를 대고 걸어서 사령부까지 이동하던 장교 무리가 앞길을 막았다. 벵크는 멈추는 대신 경적을 요란하게 울렸고, 화들짝 놀란 카이텔, 요들, 되니츠, 괴링이 옆으로 비키자 속도를 줄이지 않을 수 있었다. 사령부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바이크를 댄 벵크에게 괴링이 달려와 말했다. '자네가 정신을 놓았나? 우린 다 저 멀리에 주차하고 걸어오는데 그 요란한 걸 타고 여기까지 온다고? 총통께서 자넬 찢어죽일 거야. 내 말 잘 새겨듣게.' 그러나 그때 나타난 히틀러는 벵크에게 '오토바이를 탄 장군이라니, 살면서 본 광경 중 가장 아름답군!'이라고 감탄했고,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벵크는 '총통 각하! 그럼 매일 타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Bradley(1981)_p.308]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도 바이크를 타고 로드트립을 하는 것을 즐겼다.
  • 참모차장으로 부임한 벵크는 히틀러의 앞에서 상황을 처음 설명할 때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했다.
    "총통 각하, 동부전선 전체가 스위스 치즈 같은 게 보이십니까? 전선에 구멍이 너무 많죠."

    그렇게 발언하자 카이텔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고개를 저었고 요들과 되니츠는 그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벵크가 회의실에서 나오자마자 카이텔이 그를 집무실로 불러내더니 말투에 대해 훈계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총통 앞에서 그런 말투로 상황을 설명하냐는 것이었다. 벵크는 '원수 각하! 전 항상 사령관께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즉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거든요. 물론 원하신다면 다음부터는 다른 식으로 말해보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다음날부터 사흘간 진중한 말투로 보고를 하던 벵크에게 히틀러가 왜 생기를 잃었냐고 물었다. 벵크는 명령 때문이라고 말했고, 누구의 명령이냐고 묻는 총통에게 카이텔 원수라고 답하며 그와 나눈 대화에 대해 설명했다.고자질 히틀러는 그의 직설적 화법이 좋았다고 말했고, 벵크는 '그 친구는 내일 돌아올 겁니다!'라고 답했다. 다음날부터 말투를 원래대로 했더니 카이텔이 그를 노려보았고, 벵크는 회의가 끝난 후 방 반대편에 있던 카이텔에게 다가가서 '총통 허가를 받았습니다, 원수님!'이라고 말했다.[Bradley(1981)_p.307]
  • 어느 날 참모차장으로서 상황 보고를 마친 벵크는 총통 벙커를 구경하러 갔다. 히틀러가 평소에 그에게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경비병들이 선뜻 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구석에 앉은 여자 비서 둘과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여기 참 이상한 시간대에만 오는 것 같아요, 그쵸? 오전 3시 아니면 오후 3시에요.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파이가 자두 파이(Pflaumenkuchen)[35]인데 마침 있네요?"

    그렇게 커피와 파이를 얻어 먹은 벵크는 내일 또 와도 되겠냐고 물었고 당연히 와도 된다는 답을 받았다. 그러나 삼사일 후 갑자기 자두 파이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벵크는 비서들에게 이유를 물었고, 비서들은 총통이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은 만큼 본부에 지내는 사람들도 특혜를 누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답했다. 그러자 벵크는 말했다.
    "좋아요, 그럼 차라리 전선으로 돌아갈게요. 거기에선 모든 군인이 원하는 걸 모두 얻을 수 있거든요."

    • 비서들은 총통에게 그 말을 전달했고, 히틀러는 다음날 상황 보고를 하고 돌아가려던 벵크를 붙잡고 말했다.

    "벵크 장군, 저쪽으로 가시오. 자두 파이가 돌아왔소."

    벵크는 당황하며 왜 이러시냐고 물었고, 비서들의 말을 들은 히틀러가 '벵크 장군이 앞으로 매일 자두 케이크를 먹을 수 있도록 하시오. 단 여기 머물러야 해!'라고 명령했음을 알게 되었다.[Bradley(1981)_p.309]
  • 장난기 많은 성격답게 동부전선에서 복무하던 당시, 옆 부대 친구였던 요한 폰 킬만세크와 통신과 명령을 주고받으며 꼬박꼬박 라임을 넣기도 했다. 이 언어유희는 통신장교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시적인 통신이 지속적으로 오가자 소련군 측에서는 통신을 도청하고 해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 1944년 7월 21일 밤, 남부집단군 사령부에 있던 벵크는 부관과 라디오로 히틀러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새로 참모총장에 임명했다고 말하며 동부전선에서 검증된 장군을 그의 보좌로 붙였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벵크는 부관에게 '저런, 저 불쌍한 친구는 누구지?'라고 물었고, 부관은 '장군님일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벵크는 실제로 다음날 갑작스럽게 전선을 떠나 육군 최고사령부로 옮겨가게 된다.[Bradley(1981)_p.303]
  • 구데리안은 전후 리델 하트와 나눈 편지에서 서독 연방군의 수뇌부에 어울리는 인물들을 추천했는데, 벵크를 참모총장 2순위 후보로 언급했다. 1순위는 지크프리트 베스트팔이었고, 그 밖에도 호이징거와 폰 그롤만의 이름이 거론되었다.[BArch_N802/80][39]

5. 도서 및 매체에서

  • 커리어 내내 참모장교로 일했기 때문에 사령관에 비해 전면에 나설 일이 적어 자연스럽게 존재감도 적다. 게다가 전후에는 다른 장성들과 프란츠 할더 회고록을 내지도, 서독군 문제에 크게 관여하지도 않은 채 사업만 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받을 일이 적었다. 그렇기에 벵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은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만슈타인, 구데리안, 모델과 같은 네임드 장군들 아래에서 일한 기간이 길었고, 그들이 벵크의 참모장교로서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에 남의 회고록과 평전에서 심심찮게 보인다.
  • 몰락에서도 히틀러가 벵크를 애타게 찾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벵크의 제12군이 진격 중이며 부세의 제9군과 합류해 러시아군에게 마지막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거라고 행복회로를 돌리는 장면이다. 해당 부분 영상
  • 키에론 길렌의 코믹스 ≪Über≫에 등장한다. 나치의 비밀 군사 연구 프로젝트로 개발된 강화인간들이 전쟁 말에 등장하며 끝나가던 2차 세계대전의 판세를 뒤집고 전쟁의 장기화 및 각국의 강화인간 프로젝트 대결로 이어지는 내용의 만화로, 하인츠 구데리안알베르트 슈페어와 함께 독일군 장교로 등장한다.[스포일러] 구데리안이 그를 보더니 꼬맹이 같은 얼굴은 여전하다고 농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 보직 내역

  • 1919.02.12. : 라인하르트 자유군단
  • 1919.02.18.-1920.04.30. : 폰 오펜 자유군단
  • 1920.05.01.-1920.12.31. : 제5보병연대
  • 1923.02.01.-1932.10.31. : 제9보병연대
  • 1933.05.01.-1934.09.30. : 제3차량수송대대
  • 1934.10.01.-1936.10.05 : 베를린 전쟁대학 참모교육과정
  • 1935.10.06.-1938.11.09. : 기갑부대(38.02.04.에 제16차량화군단으로 개편) 참모
  • 1938.11.10.-1939.03.31. : 제2기갑연대 1대대장
  • 1939.04.11.-1942.02.04. : 제1기갑사단 참모장
  • 1942.02.05.-1942.02.19. : 예편
  • 1942.02.20.-1942.09.02. : 베를린 전쟁대학 참모과정 교관
  • 1942.09.02.-1942.11.25. : 제57기갑군단 참모장
  • 1942.11.26.-1942.12.26. : 제3루마니아 왕국군 참모장
  • 1942.12.27.-1943.03.10. : 홀리트 파견군 참모장 (43년 3월 5일 제6군으로 개편)
  • 1943.03.11.-1943.03.14. : 예편
  • 1943.03.15.-1944.03.12. : 제1기갑군 참모장
  • 1944.03.24.-1944.07.21. : A집단군(남우크라이나 집단군) 참모장
  • 1944.07.22.-1945.04.09. : 육군 참모차장
  • 1945.02.13.-1945.02.18. : 바이흐셀 집단군 참모장
  • 1945.02.18.-1945.04.07. : 요양
  • 1945.04.10.-1945.05.09. : 제12군 사령관

7. 진급 내역

  • 1919.07.26. : 상병 (Gefreiter)
  • 1919.08.27. : 하사 (Unteroffizier)
  • 1921.11.01. : 준위 (Fähnrich)
  • 1922.11.01. : 상급준위 (Oberfähnrich)
  • 1923.02.01. : 파일:Si_12c.jpg 소위(Leutnant)
  • 1928.02.01. : 파일:Si_11c.jpg 중위(Oberleutnant)
  • 1934.05.01. : 파일:Si_10c.jpg 대위(Hauptmann)
  • 1939.03.01. : 파일:Si_9b.jpg 소령(Major)
  • 1940.12.01. : 파일:Si_8b.jpg 중령(Oberstleutnant)
  • 1942.06.01. : 파일:Si_7b.jpg 대령(Oberst)
  • 1943.03.01. : 파일:Si_6a.png 소장(Generalmajor)[41]
  • 1944.04.01. : 파일:Si_5a.png 중장(Generalleutnant)
  • 1945.04.04. : 파일:Si_4b.png 기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42]

8. 서훈 내역

  • 1934.날짜 미상. : 독일 체육훈장 동장, 은장
  • 1939.09.04. : 주데텐란트 합병 기념장
  • 1939.09.13. : 2급 철십자 훈장
  • 1939.10.04. : 1급 철십자 훈장
  • 1939.날짜 미상. : 2급 국방군 근속상 (18년 근속)
  • 1940.05.18. : 1939년 제정 전상장 흑장
  • 1942.01.26. : 독일 십자훈장 금장
  • 1942.08.01. : 1941/1942년 동부전선 동계 전역 기념장
  • 1942.09.21. : 3급 슬로바키아 전승십자훈장
  • 1942.12.28. : 기사철십자 훈장
  • 1943.03.12. : 사령관 성검 십자장 (루마니아 왕실)

[1] 최연소 병과대장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마찬가지로 종전 직전에 대장을 달았던 지크프리트 베스트팔이 1902년생으로 벵크보다 어리다.[Bradley(1981)_p.41]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radley(1981)_p.42]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4] 같은 해 11월 뮌헨에서 일어난 맥주홀 반란에 동원된 그 보병학교다.[BArch_PERS6/391] [6] 베를린 전쟁대학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폐교했다가 1934년에 재개교했다.[Manstein(1955)_p.533] Manstein, Erich von. Verlorene Siege. Athenäum, 1955. 영역판에서는 번역 과정에서 해당 부분이 아예 삭제되었다.[8] 기갑장교 로링호펜(1914~2007)은 꾸준히 야전에서 근무하다가 1944년 7월 20일 이후 구데리안의 제의로 육군 참모총장 보좌관을 맡는다. 1945년 3월에 해임당한 구데리안의 후임으로 들어온 한스 크렙스의 보좌관까지 맡았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히틀러의 벙커에서 지냈다. 전후에는 서독 연방군에서 군인 생활을 계속하며 죽기 직전 회고록 '히틀러와 벙커에서'를 출판한다.[9] #가보자고 같은 느낌으로 보면 된다.[Guderian(1951)_p.95] Guderian, Heinz. Erinnerungen eines Soldaten. Kurt Vowinckel, 1951.[Bradley(1981)_p.143]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Guderian(1951)_p.119] Guderian, Heinz. Erinnerungen eines Soldaten. Kurt Vowinckel, 1951.[Mellenthin(1977)_p.257] Mellenthin, Fredrich von. German Generals of World War II: As I Saw Them. Univ of Oklahoma, 1977.[Guderian(1951)_p.119] Guderian, Heinz. Erinnerungen eines Soldaten. Kurt Vowinckel, 1951.[Bradley(1981)_p.243]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radley(1981)_p.245]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Manstein(1955)_p.533] Manstein, Erich von. Verlorene Siege. Athenäum, 1955. 영역판에서는 번역 과정에서 해당 부분이 아예 삭제되었다.[Zumbro(2006)_p.495] Zumbro, Derek Stephen, "Battle for the Ruhr: The German Army's Final Defeat in the West" (2006). LSU Doctoral Dissertations. 2507.[Loringhoven(2007)_p.153] Loringhoven, Freytag von. In The Bunker With Hitler: 23 July 1944 - 29 April 1945. Pegasus, 2007[Loringhoven(2007)_p.167] Loringhoven, Freytag von. In The Bunker With Hitler: 23 July 1944 - 29 April 1945. Pegasus, 2007[Wenck(1965)] Wenck, Walther. Berlin war nicht mehr zu retten. in: Stern v. 18. April 1965[Loringhoven(2007)_p.185] Loringhoven, Freytag von. In The Bunker With Hitler: 23 July 1944 - 29 April 1945. Pegasus, 2007[23] 마지막까지 히틀러의 벙커에 크렙스의 부관으로 머무르던 로링호펜은 5월 초에 베를린을 탈출해 제12군에 합류했다.[Spiegel_23/1955] Walther Wenck, 1955.05.31.[ChicagoTribune_1982.05.08] Crash kills retired Gen. Wenck, who defied Hitler's suicidal order. Chicago Tribune, 1982.05.08. p.10.[Manstein(1955)_p.533] Manstein, Erich von. Verlorene Siege. Athenäum, 1955.[Bradley(1981)_p.81]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radley(1981)_p.76]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radley(1981)_p.392]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Arch_PERS6/391] [Bradley(1981)_p.159]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32] 육군 최고사령부가 초센으로 위치를 옮기는 것은 몇 달 후의 일이다. 히틀러가 늑대굴을 완전히 버릴 때까지 참모총장과 참모차장은 늑대굴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마므리 호수 옆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보통은 관용차나 셔틀을 타고 왕복했다. 참고로 만슈타인이 알몸으로 수영하다 롬멜을 만난 곳도 이곳이다.[Bradley(1981)_p.308]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radley(1981)_p.307]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35] 조각낸 자두를 반죽 위에 올려 굽는 독일식 파이.[Bradley(1981)_p.309]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radley(1981)_p.303] Bradley, Dermot. Walther Wenck: General der Panzertruppe. Biblio, 1981.[BArch_N802/80] [39] 단일 총사령관 후보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구데리안이 만슈타인의 군사적 재능을 얼마나 높이 사며 그를 아꼈는지가 보이는 지점.[스포일러]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베를린에서 내려오던 교전 명령을 무시하고 있었지만, 강화인간들이 교전해 전쟁을 기어코 연장시키는 모습을 보더니 절망하면서 권총을 물고 자살한다.[41] 서류상 진급일자 1943.08.01[42] 서류상 진급일자 1944.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