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1:10:03

바둑/국가별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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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
2.1. 바둑 인구 감소와 반전2.2. 바둑 스포츠토토 도입?
3. 중국4. 일본5. 대만6. 기타 국가의 바둑
6.1. 미국6.2. 유럽6.3. 북한6.4. 태국
7. 바둑 랭킹
7.1. 세계 랭킹7.2. 한국 랭킹

1. 개요

바둑은 중국에서 유래해[1] 한국, 일본 등에 전해진 이후로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오랫동안 즐겨 온 반상유희다.

현대 바둑의 본격적인 역사는 제도적으로 바둑을 발달시켜 왔던 일본이 선두 주자로 나서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린 일본이 2009~2011년에 자국 주최의 메이저 국제 기전들을 모두 폐지한 이후부터는 한국과 중국이 세계 바둑계를 주도하고 있다.

2.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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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KBS 바둑왕전. 이창호 九단(좌) - 이세돌 九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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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GS칼텍스배. 신진서 九단(좌) - 이세돌 九단(우)

한국 바둑의 경우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흥했지만, 현대로 들어오면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진 국제적으로 찬밥 신세였다. 이 시기에는 조남철을 필두로 한 일본 유학파들이 주축이 되어 국내 바둑의 기틀을 닦았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조훈현과 그의 내제자 이창호, 그 외 서봉수, 유창혁 등 이른바 4천왕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기세를 폭발시키며 세계 바둑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1988년 세계 최대 규모로 탄생한 국제 대회인 응씨배에서 한국 대표로 유일하게 출전했던 조훈현 九단이 깜짝 우승한 이래, 한국 기사들은 우승을 밥먹듯이 해왔으며 1993년에는 모든 메이저 국제 대회 우승을 한국 기사들이 독차지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후에도 이런 일은 꽤 반복되었다. 1997년에는 서봉수 九단이 진로배에서 다섯 명의 한국 대표팀의 2장으로 출전하여 중국과 일본 대표 9명을 상대로 9연승을 거두며 우승을 결정지었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은 국제 대회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23연속으로 우승하였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시대부터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한 한국 바둑은 이후 최철한, 박영훈, 이세돌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더욱 입지를 굳혔다.

다만 2010년대 이후부턴 한국 기사들이 세계 대회 결승은 꾸준히 올라가고 있지만 이제 결승에 올라가더라도 중국의 젊고 유망한 신예들이 많아서 이전처럼 매우 높은 확률의 우승을 장담할 순 없는 상황이다. 2013년 세계 대회에서 한국이 단체 기전은 전부 우승을 차지했으나, 개인전에서는 우승에 실패했다. 한국도 기전 규모도 상당히 축소되고 정상급 기사의 평균 연령층이 올라가는 등 인프라가 많이 약화되었고 중국 바둑의 약진으로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기세는 덜하다. 그래도 해외 보급을 부단히 해서 그런지 미국과 유럽의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들은 여전히 한국을 바둑 성지로 생각한다고 한다. 한상대 세계바둑사 시리즈.

2.1. 바둑 인구 감소와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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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갤럽에서 조사한 여론조사. 출처.

한국 바둑 인프라 저하 요소로는 바둑 인구 자체가 줄어드는 원인이 일단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한때 한국 바둑계는 初단이 九단이 되는 것보다 아마추어가 입단하는 게 더 어렵다는 말도 돌 정도로 각 지역 기원마다 은거고수가 있었지만, 21세기 들어선 밑바닥 바둑 인구가 바닥을 찍어 바둑 기전이 여럿 없어지는 와중에 한국기원대한바둑협회도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져있기도 했다. 사실 이는 현재 진행형으로 많은 개혁이 필요한 부분.

국내에서 바둑을 둘 줄 안다고 응답한 바둑 인구는 조사를 시작한 1992년 이후 꾸준히 줄어들어 2004년에는 바닥(20%)을 찍었다. 때문에 위기론이 심각하게 돌기도 했는데, 덕분인지 2013년 여론조사에선 25%로 살짝 반등했다. 바둑에 관심 있다는 응답도 20%로 반등. 문제는 청년층이 바둑을 모르는 현상이 심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둑계 자체의 문제도 있겠지만, 컴퓨터 게임의 발달 등으로 바둑 외 즐길거리가 많이 늘었다는 점도 한몫할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젊은 세대들은 이창호, 유창혁 등에 익숙했지만 스타크래프트나 롤 흥행 이후부턴 임요환이나 페이커에 익숙한 세대(80년대생 이후 소위 MZ세대)가 된 것이다. 바둑 인구가 증가해야 기업들이 다시 바둑 대회를 후원해서 기전이 늘어나고 관심을 받을 수 있을텐데, 환경상 쉽지가 않은 것.

그래도 한국기원2016년 3월 이세돌 - 알파고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로 바둑계가 더 알려지기를 기대했고, 실제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이후 추세 반전에 성공해서, 이후 바둑 인구와 바둑에 대한 우호도는 상대적으로 높아지는 추세이다.

한국은, 정부에서 인정하는 제도권 안의 정규 학교에서 바둑을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한국바둑고등학교명지대학교 바둑학과, 세한대학교 스포츠건강관리학과 바둑 전공이 그것이다. 학부뿐만 아니라, 석/박사 과정까지 있다. 허나 2022년 12월 6일 명지대학교명지전문대학과의 통폐합을 추진하면서 바둑학과를 구조조정할 예정임을 밝혔다.# 때문에 빠르면 2025년 입시부터 모집중단할 예정이라고 한다. 당연히 바둑계에서는 반발이 상당하다. 학부 뿐만 아니라 대학원 과정까지 개설된 바둑학과는 명지대가 유일하며, 세한대 바둑 전공은 바둑만 배우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2] 결국 명지대가 바둑학과를 폐지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사이버대학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학교가 바둑학과를 신설하고 2025학년도부터 신입생을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출처

2.2. 바둑 스포츠토토 도입?

이전부터 바둑은 도박성이 강한 스포츠였다. 그래서 스포츠토토 도입하면 좋지 않을까라는 의견은 계속 있었다. 이에 스포츠토토 도입 관련해 2012년 공청회도 열었다. 허나 2013년에 와서는 흐지부지 된 듯하다. 스포츠토토 바둑 적용의 제일 큰 문제는 바둑은 승부조작이 너무나 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로 사설토토는 바둑 쪽으로도 범람해서 문제가 된다. 승부조작의 마수가 언제든 뻗칠 수 있는 것이다.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가 2017년, 대한바둑협회한국기원이 다른 데에서는 반목을 하다가도(...) 바둑토토 추진에는 유소년 바둑인구 증가를 위한 예산 마련을 위해서란 명분으로 서로 합의했다. 이에 2018년 한국기원 프로기사회에서 기사회 총투표를 시행하여, 찬성 101 vs 반대 59로 가결시켰다. 찬성의견, 반대의견, 투표결과. 한국기원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거쳐서 문화체육관광부에 의견이 전달되면 실제로 바둑토토를 발행하게 된다. 근데 2019년 발행 예정이라고 하던 바둑토토가 무슨 이유에선지 2023년까지도 소식이 없다.

3.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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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중국 아함동산배. 구리 九단(좌) - 미위팅 九단(우)

기본적으로 바둑 인구가 많고 현재는 정부나 중국기원 차원에서의 관리도 충실한 편이라[3], 2020년대 기준 실력으론 한국과 엇비슷하거나 저변상으론 우위에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정상급 기사들의 실력은 백중지세지만 기사층의 두터움, 바둑 인구, 인프라의 충실함 등은 중국이 한 수 위라고 보면 될 듯.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랭킹 10위권까지는 한국이 우세, 10위권 밖으로는 중국이 우세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턴 최상위권도 중국 기사들이 근소 우위를 점하고 있다.[4] 2010년 사이버오로 기사에 의하면 2000년 이후 입단한 한국 기사들의 vs 중국전 승률이 40%에 못 미친다고 한다.#

2024년 2월 기준으론 신진서 9단이 격차가 제법 큰 세계랭킹 1위를 고수하는 가운데, 박정환, 변상일 기사 등이 최상위권에 있어 국제 기전 우승횟수 등 겉보기엔 백중세에 가까우나, 30위 내로 따져보면 중국 기사들이 두터움 측면에선 압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Go Ratings.[5]

4.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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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대)기성전. 이야마 유타 九단(좌) - 이치리키 료 八단(우)

일본은 현대 바둑 기전 시스템을 확립하고 현대 바둑의 룰과 기초를 정립하여[6] 1980년대 초반까진 세계 바둑을 주도하였다. Go rating을 봐도 일본기원의 기사들이 상위권을 독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이렇다 보니 세계 각지의 실력자는 일본기원에서 활동하거나 유학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7] 그렇다 보니 당시 일본바둑계를 주름잡았던 역사적인 기사들 중에선 외국 출신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현대바둑의 아버지라 불리는 우칭위안, 60~70년대에 활약했던 린하이펑, 80~90년대에 활약했던 조치훈 등이 대표적이다.[8]

그러나 1984년부터 시작된 중일 슈퍼 대항전에서 중국에서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이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을 상대로 11연승을 거두고,[9] 일본에서 바둑을 배워 온 조훈현이 제1회 응씨배에서 우승하는 등, 일본 바둑 천하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1990년 말까지는 요다 노리모토, 왕리청같은 톱기사들의 선전으로 그럭저럭 국제 경쟁력을 유지했지만 2000년대 이후부턴 뚜렷한 쇠퇴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한때는 국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한 지경까지 갔으나, 2010년대 후반부터 이치리키 료, 시바노 도라마루 등 신예 기사들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경쟁력을 회복해 나가고 있다. 나아가 이치리키는 2024년 응씨배 우승에도 성공했다.

일본은 2010년대 초만 해도 평균 6명 정도의 프로 기사를 배출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3명은 도쿄에 위치한 일본기원 본원에서 성적 상위 우수자(하계 1명, 동계 2명), 중부 지부 1명, 간사이 지부 1명, 여류 특별 채용 1명이었으나 바둑의 세계화와 홍보를 위해 일본, 중국, 한국, 대만, 북한을 제외한 외국 국적 일본기원 원생 혹은 원생 경험자를 특별 채용하는 외국 국적 특별 채용 제도를 실시하면서 바둑 후진국 출신 외국인들도 조금씩 입단하고 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상급 바둑 기사들의 연수입은 여전히 한중 정상급 바둑 기사들 못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일본 내 기전의 상금이 대체로 한국과 중국의 국내 기전 상금보다 많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상금이 많은 기전인 (대)기성전의 경우 현재 우승 상금이 무려 4300만엔(한화로 약 4억원 안팎)으로 응씨배를 제외한 메이저 세계 대회보다 많다,[11] 또 예선전에 참가해도 대국료가 꼬박꼬박 들어오고 바둑 강연회 등에서만 활동해도 수입이 되는 모양.[12]

반면 일본이 주최했던 메이저 세계 대회[13]들은 전부 폐지되어[14], 2024년 현재 일본이 주최하는 국제 메이저 세계 대회는 단 1개도 없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도 우물 안 개구리란 비판이 있는지 다시 메이저 세계 대회를 열어야 하는거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일본기원의 공식 입장은 "아직 메이저 개최 움직임은 없다. 계속 노력하겠다."이다.#

한편, 2016년 1월에는 일본에서도 중국과 한국처럼 바둑리그를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시행되지 못하고 결국 무산되었다. 그 후 2024년 4월 22일 일본기원은 창립 100주년을 맞아 한 팀당 3명씩 총 5개 팀으로 구성된 일본 여자바둑리그를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5.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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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기왕전. 린쥔옌 七단(좌) - 왕위안쥔 八단(우)

20세기 이후 일본, 한국, 중국이 세계 바둑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대만 바둑은 세계 바둑계의 중심에서 으레 비껴나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들 셋을 제외하면 대만 바둑이 가장 거론할만한 것도 사실이다.# 세계 최대의 국제 바둑 기전응씨배를 창설한 잉창치(應昌期 - 응창기)는 대만인이고, 1960~70년대 일본 바둑계 최정상권에서 활약했던 린하이펑(林海峰 - 임해봉)도 대만 출신이었다. 일본 여류 기전 최다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셰이민먀오리현 출신의 대만인이고, 2005년 LG배 우승자이자 2000년대 후반 일본 1인자였던 장쉬 역시 대만인이다. 그 외에 천스위안 九단은 한국기원에서 입단하여 활동하다 중화민국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대만으로 귀국해서 대만에서 최정상급 기사로 활약했고, 헤이자자위리쥔 등도 미녀 기사로 한국 바둑팬들에게 주목받았다.

2007년에는 당시 대만 바둑 1인자였던 저우쥔쉰(周俊勳 - 주준훈)이 LG배에서 우승하며, 일본기원 출신이 아닌 대만에서 활동하는 기사로서는 처음으로 메이저 세계 대회 챔피언에 오르기도 했다. 저우쥔쉰은 얼굴에 있는 홍반 때문에 홍면기왕이라는 별명이 있으며, 대만국어 교과서에 저우쥔쉰이 어린 시절 홍반으로 인해 집단따돌림을 당할 때 쓴 일기가 실려있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대만 내부에서는 '대만기원'과 '해봉기원'의 주도권 싸움으로 인해 모든 바둑 대회가 아예 5~6년간 시행 중단되었던 흑역사가 있었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2000년 대만기원을 해산하고 신 대만기원을 만든 뒤에 구 대만기원과 해봉기원이 신 대만기원의 하부지구로 격하되면서 갈등을 봉합했다. 그 후에도 저우쥔쉰의 대만기원퇴출사건 등 갈등이 심심하면 터졌지만 2010년대 이후 기준으론 이런 갈등도 많이 줄었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 기업을 끌어들인 국제 바둑 대회 중환배(대만 중환그룹+미국 JP모건 체이스 2개국 합작 대회)를 개최하는 등 대만도 국제 대회 개최를 할 수 있는 바둑 기반 역량이 있으나, 가끔씩 보이는 수준이며, 중환배 폐지 이후 대만에서는 국제 바둑 기전을 개최하지 않고 있다. 2010년대 초반 대만 최대의 금융그룹인 푸본금융그룹[15]이 국제 바둑 기전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했지만, 소리 소문 없이 묻혔다.

대만 국내 바둑 기전 중에서 가장 큰 기전은 명인전이며 제한 시간은 3시간, 1분 초읽기 5회다. 또 다른 기전인 국수전은 제한 시간 2시간이다. 이렇듯 대만의 국내 바둑 기전은 보통 국제 바둑 기전과 대국 시간(2~3시간)이 비슷하다.

중국위기회응창기위기교육기금회가 주최하는 기전의 계가법은 응씨배에서 채택하고 있는 전만법(응씨룰)이다. 하지만 해봉기원이나 대만기원이 주최하는 기전에서는 일본식 계가법을 채택하고 있다. 대만 최대 기전 명인전도 해봉기원이 주최하므로 일본식 계가법(덤 6집 반)을 채택하고 있다.

대만바둑 기사들은 최정상급 기사들을 제외하면 보통 투잡을 뛴다. 대만 여성 기사들 중 가장 강한 편인 헤이자자 七단도 모델 활동을 겸하고 있을 정도로 대만 국내 바둑 대회 상금이 적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건 때문에 대만 국적 일부 기사들은 일본기원을 통해 입문하여 프로로 데뷔하기도 한다. 실제로 일본기원 단위별로 기재된 프로 기사 중 외국 국적자 비율에서 대만 국적자가 가장 많다.

6. 기타 국가의 바둑

6.1.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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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미국 바둑 콩그레스. 텍사스댈러스.

미국 바둑 협회.

미국 바둑 협회(AGA·American Go Association)가 1935년에 설립되긴 했지만 2000년대까지는 자체적인 프로 제도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인이 프로 기사가 되려면 일본기원에서 입단한 마이클 레드먼드 九단[16]처럼 프로 제도가 있는 일본이나 한국에 가서 입단하는 방법밖에 없었다.[17]

그러다가 2011년에 미국 바둑 협회가 프로 제도 창설을 공식 선언하고 2012년부터 매년 2명씩 프로 기사를 선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 바둑 협회가 프로 제도를 창설할 수 있었던 건 문화체육관광부의 해외 바둑 보급 사업의 일환으로 당시 미국에서 바둑 보급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로 기사 김명완의 중재 역할과 타이젬 바둑의 자금 지원 덕분이라고 한다.##[18]

6.2.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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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바둑 콩그레스. 영국 런던.

유럽 바둑 연맹. 영국 바둑 협회, 프랑스 바둑 연맹.

유럽 바둑 연맹(EGF·European Go Federation)이 1957년에 설립되긴 했지만 유럽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까지는 자체적인 프로 제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2014년 유럽 바둑 연맹도 자체적인 프로 제도인 유럽 프로 바둑 시스템(EPS)을 출범시켰다. 2014년 선발 대회에서 슬로바키아의 파볼 리시가 입단한 이래 2023년까지 9명이 유럽 바둑 연맹에서 입단해서 프로 기사로 활동하고 있다. 유럽 바둑 연맹이 유럽 프로 바둑 시스템을 출범시킬 수 있었던 건 유럽 진출을 원하는 중국 투자자들로 구성된 중국유럽바둑(CEGO)이 지원해준 덕분이라고 한다.#

6.3. 북한

북한에서 바둑은 원래 조선체육협회 관할이었지만 2006년 김정일의 지시로 훈련 환경이 양호한 조선무도연맹에 편입됐다. 이후 바둑을 민족 체육으로 분류하고 태권도위원회에서 관장하고 있다. 또한 북한 각지의 학교에는 바둑부가 있고, 재능 있는 어린이들은 중국으로 바둑 유학을 보낸다고 한다. 기재가 특히 뛰어난 유망주는 국가 인재로 발탁해서 국가 차원에서 중점적으로 육성한다고 한다.

프로 제도는 없지만 북한에도 바둑을 사실상 프로 기사처럼 전문적으로 두는 기사들은 있다. 이들은 주로 아마추어 국제 대회에 출전하는데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다만 아직까지 세계 아마추어 바둑 선수권 대회 우승자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원길우 체육상 부상의 말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장기 잘 두는 사람보다 바둑 잘 두는 사람의 수준을 훨씬 높게 친다고 한다.

알파고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바둑 프로그램 강국이었지만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북한의 바둑 용어는 한자가 많은 한국의 바둑 용어와 달리 순한글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6.4. 태국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프로 바둑 제도가 있는 국가들을 제외하면 바둑 인프라가 가장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0년대에 이미 바둑 인구가 100만명을 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보도되기도 했다. 관련 기사

7. 바둑 랭킹

7.1. 세계 랭킹

현재 바둑계에는 축구의 FIFA 랭킹같은 공식 세계 랭킹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제 축구 연맹처럼 세계 프로 바둑계를 총괄할 수 있는 권한과 권위가 있는 단체가 없기 때문이다.[19]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둑 세계 랭킹은 Go Rating인데, 이건 프랑스의 레미 쿨롬 박사가 'WHR(Whole-History Rating·전체 기간 순위 측정)' 알고리즘을 적용해서 만든 자체 랭킹이다.# Go Ratings 사이트


역대 바둑 프로 기사들의 Go Rating을 보여주는 동영상. 일본의 초기 강세와 한국의 장기 집권, 2010년대 말까지의 중국의 강세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또 2010년대 중후반 알파고가 인간 프로 바둑 기사들의 레벨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수준이 된 이후부턴 Go Ratings 사이트에서는 알파고를 랭킹에서 삭제했다.

7.2. 한국 랭킹

한국기원에서도 Elo 레이팅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한국 랭킹을 매기고 있다. 1달에 한 번씩 그 달에 기사가 두었던 바둑들의 등급을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분류하고 상대방의 실력, 그리고 승패에 따라 승점과 감점 가중치를 달리 하여 계산하는 방식이다. 2010년에 한번 개정된 것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


역대 한국 랭킹 1~5위의 변화를 보여주는 동영상.


[1] 바둑의 기원(起源)에 대해서는 인도 유래설 등 여러 설이 있지만, 고대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2] 게다가 세한대 역시 현재 스포츠건강관리학과의 세부 전공 항목에서 바둑이 제외된 상태다.#[3] 20세기 중후반 문화대혁명 당시 바둑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규정해 잠시 바둑산업이 개차반이 난 적이 있었다.[4] 2024년 기준 세계랭킹 10위 이내 한국 기사 3명, 중국 기사 7명.[5] 다만 30위권 밖에선 한국 기사들과 중국 기사들이 나름 엇비슷하긴 하다. 일본이나 대만 기사들도 제법 있고. 여성 바둑으로 따져도 최정 9단이 아직은 1위를 고수하고 있다.[6] 바둑에 ‘제한 시간’이라는 룰을 처음 도입한 것도 일본 바둑계였다. 근대 이전의 바둑에선 애초에 시간제한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초기 현대바둑에선 혼인보 슈사이기타니 미노루의 대국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사람당 40시간이라는, 사실상 시간제한이 없는 수준의 넉넉한 시간을 부여받았지만, 타이틀전이 생기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현대적인 감각에 맞게 제한시간이 줄어들게 되었다. 다만 제한시간을 점점 줄이고 있는 한국과 중국의 바둑 기전들과는 달리 일본의 국내 기전들은 지금도 제한시간을 넉넉하게 주는 편이다. 특히 일본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3대 기전(기성전, 명인전, 혼인보전)의 경우 본선 리그 제한시간은 5시간씩 주어지며, 타이틀전은 무려 8시간씩 주어진다. 때문에 많은 일본 프로 기사들은 제한시간이 짧은 대회에서 단련된 한국 및 중국 기사들과 붙을 경우 초읽기 등에 몰렸을 때 고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대로 한국에는 강동윤 九단처럼 제한시간이 긴 장고바둑에서 고전하는 정반대의 케이스도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도 국제 경쟁력 회복을 위해 천원전, 왕좌전, 십단전 등 일부 기전들의 제한시간은 3시간으로 줄였다.[7] 한국은 조남철, 김인, 조훈현 등이 대표적이었다. 즉, 80년대까지 국내 최정상급 기사들은 거의 유학파라고 봐야 했고 서봉수 정도만이 예외였는데, 그 서봉수도 조훈현보단 한수 아래로 평가받았다. 유창혁, 이창호, 이세돌 등 국내파들이 본격적으로 활개를 편건 1990년대 이후.[8] 물론 지금은 일본에 한중 프로 기사들이 가는 경우는 잘 없다. 그나마 국내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약한 대만 기사가 어느 정도 가는 편이다.[9] 이 공적으로 녜웨이핑은 중국 정부로부터 기성(棋聖) 칭호를 받기도 했다. 다만 녜웨이핑은 80년대 후반부터 열리기 시작한 메이저 세계 대회에서는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10] 2016년에는 핀란드 출신 안티 퇴르매넨이, 2020년에는 말레이시아 출신 창푸캉과 인도네시아 출신 라피프 시드키 피트라가 외국 국적 특별 채용으로 입단했다.#[11] 그래서 과거 기성전 6연패에 빛나는 후지사와 슈코 九단은 "나는 1년에 4판만 이긴다" 라는 말을 했는데 타이틀 보유자는 도전자에게 도전을 받는 입장이기에 결승전 직행이며 기성전 결승은 7전 4선승제이기 때문이다. 재밌는 사실은 후지사와가 기성전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뽐냈으나 그 외 나머지 기전에서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이를 두고 일본의 한 바둑 평론가는 "일본에는 2명의 슈코가 있다. 후지사와 슈코, 그리고 기성전 괴물 슈코"라는 평을 남긴 적이 있다.[12] 예전보다 바둑 인기가 줄어든 현재도 여전히 지역구 정치인들이 교양 과시를 위해 지도 바둑을 신청하는 경우가 있으며 지역에서 간혹 열리는 바둑을 홍보하는 장소에서 바둑 강연회를 하거나 어르신들이 모이는 센터에서 소정의 보수를 받고 바둑 강연회를 하는 경우가 있다.[13] 다만 메이저 세계 대회라는 개념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다. 일본과 중국은 세계 대회를 메이저와 마이너로 구분하지 않는다.[14] 세계 최초의 메이저 세계 대회 후지쯔배도 2011년에 폐지되었고, 2002년부터 개최되었던 메이저 세계 대회 도요타덴소배는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2009년에 폐지되었다.[15] 2018년 한국의 현대라이프생명을 인수하기도 했다.[16] 2024년 현재 유일한 서양인 九단이다.[17] 중국의 경우 중국기원의 공식 방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대만을 제외한 외국인 프로 지망생은 받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18] 사실 김명완이 미국에 바둑 보급 활동을 하러 가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기사마다 보도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다만 이에 대해 김명완 본인은 2020년에 더인디고라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해외 바둑 보급 사업의 일환으로 미국에 가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19] 국제 바둑 연맹이라는 단체가 있긴 하지만 이 단체는 국제 축구 연맹같은 권한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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