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00:19:39

모하마드 오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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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최고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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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 2001
초대
오마르
2021 ~
<rowcolor=#ffffff> 권한대행
아훈드자다
두라니 왕조 ·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 아프가니스탄 왕국 ·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 ·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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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창시자

모하마드 오마르
محمد عمر[1]
Muḥammad 'U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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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629194704809.jpg
출생 1960년 1월 3일[추정]
아프가니스탄 왕국 칸다하르
사망 2013년 4월 23일 (향년 53세)
파키스탄 카라치
종교 이슬람 (데오반드파)
신장 198cm
재임기간 아프가니스탄 최고평의회 수좌
1996년 9월 27일 ~ 2001년 11월 13일
탈레반 최고지도자
1994년 ~ 2013년

1. 개요2. 생애
2.1. 투사로 떠오르다2.2. 잔혹한 학정2.3. 말년
3. 여담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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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47414361-9950443-Pictured_Mullah_Omar_the_original_founder_of_the_Taliban_His_son-a-156_1630580765381.jpg
젊은 시절 (1978년)

파슈토어: ملا محمد عمر (몰라 모하마드 오마르)
페르시아어: ملا عمر (몰라 오마르)
영어: Mullah Mohammed Omar

'물라'[3] 모하마드 오마르(1960년 1월 3일[추정] ~ 2013년 4월 23일)는 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의 전 국가원수이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초대 최고지도자(امیرالمؤمنین, Amir al-Mu'minin)이다.

1차 탈레반 정권인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의 수장을 역임하며 5년간 아프가니스탄이슬람 근본주의를 명목으로 극단적인 억압통치를 저질러 세계적인 지탄을 받은 장본인이다.

2. 생애

1960년 1월 3일, 칸다하르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사실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며, 측근들의 주장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62년까지 다양하다. 출생지도 칸다하르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며, 우루즈간이나 데흐라우드라는 설도 있다. 애초에 여러모로 비밀스러운 인간답게 출생에 관한 사실조차도 알 길이 없다.

가난한 파슈툰인 집안에서 태어나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훗날 하미드 카르자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오마르의 아버지는 마을에서 종교 지도자로 일했다고 하나, 엘리트 집안 출신이 아닌 탓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하며, 오마르가 어렸을 때 이미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 오마르 본인이 말하기를 자신이 3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며, 삼촌의 손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2.1. 투사로 떠오르다

그러던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침공하였고, 오마르의 집안은 비교적 소련의 영향력이 적은 우루즈간으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종교 선생님으로서 잠시 일했으나,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즉각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소위 무자헤딘이라고 불리는 투쟁을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소련 측과의 충돌로 수차례 다치곤 했었다. 이 와중에 한쪽 눈을 다쳐 애꾸가 되었다.

하지만 오마르는 지도력을 발휘해 어마어마한 세력들을 키우면서 한순간에 범인민적인 영웅으로 급부상했다. 이 때 그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났는데, 처음에는 그의 감명을 받은 뒤 투쟁의 강도를 높였고, 1988년에 소련은 철수한다.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해방과 민주화를 쟁취했지만, 새로 집권한 부르하누딘 라바니 정부는 막강한 기반이 없었고, 소련에 맞서던 무자헤딘 세력들은 토호화 되어 내전의 여파를 수습해서 나라를 안정화시키기보다 서로 권력다툼을 하기 바빴다.

이 때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종교선생을 하고 있는데, 마을 소녀 두명이 군벌들에게 잡혀가 강간을 당하고 머리털까지 밀려서 돌아오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자헤딘 경험이 있던 오마르는 즉시 휘하 제자들을 모아 군벌의 진지를 습격해 전멸시켰으며 범인들은 전차 포신에 메달아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탈레반의 시작이 된다.

온 인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던 오마르는 탈레반을 결성했고, 탈레반은 온 인민의 지지 속에서 1996년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수립해 새로 권력을 쥔다. 새로운 지도자에 오른 오마르는 불과 36세의 나이에 무려 60%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며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을 건설할 줄만 알았다.

2.2. 잔혹한 학정

그러나 집권 이후 오마르는 남아시아민주 캄푸치아로 불릴 정도로 심각한 이슬람 극단주의반지성주의 정책을 펼쳤으며 이로 인하여 아프가니스탄은 세계 최악의 파탄국가 중 하나로 떨어지게 되었다.

오마르는 이슬람을 빙자한 사이비 사상으로 여성들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시행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여성들은 무조건 몸을 가려야 했으며, 남편의 동의 없이 외출할 수도 없었고, 사회활동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했다. 만약에 여성이 이러한 악법들을 어기면 투석형을 처하게 하는 무시무시함을 보여줬다. 거기에다가 남성을 상대로도 무조건 수염을 기르게 했고 안 기르거나 면도할 경우 채찍형으로 다스리거나 최대 사형에 처하고, 머리카락을 단정치 않으면 채찍형에 처하게 하는데다가 TV와 음악, 춤 같은 모든 문화생활을 금지시키는 것을 넘어 심지어는 아이들이 하늘에 연을 날렸다고 처형시키고[5] 축구장을 처형장으로 쓰는 등 다른 이슬람국가에서도 경악을 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내에는 시크교와 사업차 체류하던 힌두교도들도 살고 있었는데 오마르는 그들에게 구별된 복식을 강요하여(물론 차별과 박해가 목적이다.) 인도와 심각한 외교 스캔들을 일으켰다. 종교적 소수자들(시아파와 시크교도, 힌두교인 등등)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 시작해, 축출되기 전 시점에는 기독교와 힌두교인이 사실상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전쟁 직후라 과부들이 많았으나 오마르는 이들에게 사실상 구걸이나 매춘 외에 대부분의 직업을 봉쇄하였다. 경제정책에서 예전 정부와 다를 거 없이 무능하다보니 빈곤한 아프간의 현실을 개선하지도 못한 데다 지나친 문화업악과 폭정으로 오마르에 환멸을 느낀 아프간 인민들은 오마르에게서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영웅 중 한 명이긴 했으나 궁극적으로 그가 집권한 뒤의 현실은 소련 시절만도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도회지에서는 원래 이슬람권으로서는 드물게 높은 권리를 누렸다. 불행히도 현재는 오히려 아프가니스탄의 옆나라인 이란 여성들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보다 그나마 나은 삶을 살고 있으니 격세지감 그 자체다.

탈레반의 시대착오적 광신도적 만행이 이어지자 국제사회의 규탄이 이리저리 이어졌지만, 이 작자들은 들은 척도 안 했다. 끝내는 국제사회의 경고를 뿌리치고 바미안 석불까지 폭파시켜 온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쯤 되면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관대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전자는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왕조 및 수니파 왕조 문화재를 파괴하는 짓은 안 했으며, 후자 또한 오스만 제국 시절에 모스크였던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되돌리는 정도에 그쳤을 뿐 아야 소피아를 파괴하지는 않았고 그 외에 튀르키예에 남아있는 기독교·유대교·비수니파 이슬람 문화재 또한 절대 파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외세로부터 무슬림 토착민들을 해방시킨 것까지는 좋았으나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막장통치로 오히려 무슬림 토착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점에서 야쿱 벡의 후배격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야쿱 벡의 경우 위구르족이 현재까지 계속 중국의 지배를 받는 결과를 야기한 점만 보면 모하마드 오마르보다 더욱 질이 나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모하마드 오마르 집권 이후의 아프가니스탄도 단지 외세의 식민지가 되지만 않았을 뿐 충분히 답이 없는 상황이라서 도긴개긴이다.

2.3. 말년

나중에는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주고 그를 넘기라는 미국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분노한 미국이 개입하면서 축출되었고, 정권은 종말을 맞이했다. 쫓겨난 오마르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는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이후 오마르는 공식적인 활동을 거의 접은 것은 물론[6] 체포될 것이 두려워 외출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은거 생활을 했기에 사실상 실종된 상황이나 다름 없었을 정도였다. 나중에 측근이 밝힌 바 그가 파키스탄에서 잠적하고 있다고 했으나, 객관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사실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던 2011년 5월 23일에 아프가니스탄에서 그가 동년 5월 21일에 ISI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익명의 소식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으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결국 오마르의 근황에 대해서는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5년 7월 29일에 아프가니스탄 국가안보국 대변인에 의해 오마르는 2013년 4월 23일에 파키스탄 카라치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후 오마르의 시신은 자불 지방에 매장되었다. 익명의 탈레반 지도부 요원[7]의 말에 따르면 오마르의 사인은 결핵이었다고 한다.

다만 탈레반 내부의 한 분파인 '피다이 마하즈'는 오마르가 수하의 탈레반 지휘관들이던 악타르 무함마드 만수르와 굴 아가 측에 의해 2013년 7월 피살됐다고 주장했고, # 파키스탄 국방부 장관은 공식 성명을 통해 오마르는 죽지 않았다고까지 주장했으나,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실은 오마르가 카라치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신뢰할 수 있는 정보'임을 확인했다.

3. 여담

키가 199cm에 달하는 엄청난 장신이었다.

병사하기 전까지 미군기지 근처에서 살았으며, 미군이 은신처를 뒤지고도 체포에 실패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에게 선풍기는 서구의 사악한 발명품이라며 쓰지 못하게 하고선 정작 자기 집에는 에어컨(???)과 하이파이 스테레오 오디오 시스템[8]을 갖다놓고, 자기 집 마당 축사에는 선풍기를 설치해놓는 희대의 내로남불을 보여주었다. 탈레반 정권이 전복된 직후 북부동맹 병사가 외신 기자와의 오마르의 축사 앞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오마르는 국민들에게 우물물이나 퍼다 쓰게 하고 선풍기조차 못 쓰게 금지해놓고, 정작 자기 소들한테는 축사에 자동급수장치와 선풍기를 달아줬습니다. 우리한테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했습니다."라며 황당해하는 모습이 나왔다.

물론 선풍기를 금지한다는 황당한 율법해석이 제대로 된 근거가 있을리는 없고...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발전소가 제대로 복구되지 않아 전기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던 상황이라 사람들이 '더운데 선풍기 돌릴 전기도 없다니'라고 정부에 불만을 표출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탈레반 정부가 "불만을 가지거나 표현할 생각조차 하지마라."라는 뜻에서 '선풍기는 사탄의 작품'이라는 억지 파트와[9]를 발표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래놓고 정작 탈레반 유력자들 사는 집에는 일제 가전제품[10]을 잔뜩 갖다놓고 비싼 돈 주고 자가 발전기를 돌린 것은 물론이다.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은 취미로 샹들리에 수집이 있었는데, 본인은 오두막집에서 검소하게 산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오마르가 살던 저택에는 샹들리에가 수십개가 넘게 걸려 있었다 한다. 훗날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무아트 알 카사스베를 처참하게 불태워 죽인 것처럼[11],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내로남불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람 후배들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은 마찬가지인지 탈레반 간부들이 카타르에서 호화저택을 짓고 사는 모습이 목격되어 비판을 받았다. #

파일:탈레반 모하마드 오마르 흑벽돌집.jpg

카불 점령과 미군 철수 이후 탈레반에서 모하마드 오마르의 그의 선전용 흙벽돌 오두막집 생가를 기념관으로 삼으려는 등 아프가니스탄 내에서 그를 복권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진에 자세히 보면 모하마드 오마르가 서구 사탄의 발명품이라고 금지했던 현대식 치약과 칫솔이 보인다.[12]

그의 아들 중 물라 모하마드 야쿠브는 탈레반 과도정부 하의 국방부 장관에 내정됐다.

2022년, 그가 미군의 추적을 피해 도망다닐 때 사용했던 토요타 코롤라[13]발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식통에 따르면 탈레반 지도부가 매우 감격했다고 하는데, 발굴한 코롤라는 국립박물관으로 보낼 예정이라고 한다.

현 탈레반 과도정부는 물라 오마르를 열심히 띄우고 있는데, 2022년 11월 6일에 그동안 훼손을 염려하며 비공개로 뒀던 무덤 사진도 공개하며 성역화가 이뤄지고 있다.#

4. 관련 문서


[1] 파슈토어[추정] 1949년~1962년까지 매우 다양한 주장들이 있으나, 공식적인 출생년도는 1960년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3] 아랍어 '물라(مُلَّا‎, mullā)' 또는 페르시아어 '몰라(ملا, mollâ)'는 이슬람교에서 교리에 정통한 사람을 가리키는 칭호이다.[추정] [5] 처형한 이유도 '알라의 하늘을 더럽힌다'였다고 한다.[6] 다만 적어도 2007년까지는 간간이 전화 인터뷰를 하거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7] 1차 탈레반 정권 당시에 장관직을 역임했다고 한다.[8] 정작 아프간 국민들에게는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는 자체를 금지시켰다.[9] "파트와"는 이슬람 율법 해석을 의미한다.[10] 지금이야 전자제품은 삼성LG가 꽉 잡고 있고 중국제 전제품이 뒤를 바짝 쫒고 있지만, 2000년도 초반까지는 파나소닉이나 소니 등의 일제 백색가전제품이 세계 각지에서 부의 상징이자 선망의 대상이었다.[11] 쿠란에 따르면 사람을 불로 심판할 수 있는 존재는 알라밖에 없다. 때문에 이슬람권에서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건 굉장히 터부시된다. 와하브파의 세가 강한 사우디가 죄수에게 참수형을 가하면서도 고통 없이 최대한 빠르게 절명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도저히 교화할 수 없다면 차선책으로 최대한 빨리 알라 앞에 보내서 심판을 받게 하자는 취지인 것.[12] 독실한 무슬림은 보통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용했다는 Miswak 나무의 나뭇가지로 양치를 하기 때문.[13] 상세사양은 E100계, 하얀색 왜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