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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도미이치/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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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계 입문 이전3. 정계 입문 이후4. 총리 재임 시절
4.1. 무라야마 담화4.2. 1994년 김일성 조전 논란4.3. 한일합방에 대한 발언 논란4.4. 평가
5. 정계 은퇴 이후

1. 개요

일본국 제81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의 생애에 대해 다룬 문서.

2. 정계 입문 이전

1924년, 규슈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어부의 11남매 중 6째로 태어났다. 오이타에서 고등소학교(오늘날의 중학교)를 졸업 후 1938년 도쿄로 상경해 도쿄시립상업학교 야간학부를 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1943년에 메이지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지만, 1944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동원령이 떨어져 도쿄의 이시카와섬 조선소(石川島造船所, 현재 주식회사IHI[1]의 일부)로 동원되었다.

동원된 해와 같은 해인 1944년에는 징병검사를 받고 일본 제국 육군 병사로 징집되어 이등병 신분으로 제23보병연대로 배속되었다. 2015년 8월 인터뷰에 따르면, 이때 전황의 악화와 상관의 부정으로 인해 배급받는 식량이 터무니없어 부실하여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물자부족으로 실총이 아닌 목총으로 훈련하였다는 증언은 덤. 또한 직접 일본군에 있으면서 미군의 폭격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혹한 교육훈련과 부정에도 불구하고 절대복종이 상식이었던 상황에서 초년병 무라야마는 감히 이를 거역할 상상도 못하였다고 한다. 1945년에는 간부후보생 신분인 동시에 육군 군조(중사)계급으로 종전을 맞이하였다. 상관에게 절대복종하고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던 무라야마는 종전을 계기로 이것이 과연 옳았던 것인가라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1946년에 메이지대학을 졸업했다.

3. 정계 입문 이후

1955년일본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 시의원과 현의원을 거쳐 1972년 첫 중의원 당선을 시작으로 내리 8선을 했다. 중의원 임기 중 일본 정계에서 복지와 보건 문제에서 1인자로 꼽혔으며 관련하여 자민당 주도 내각에 늘 날카로운 비판을 날리기도 했다. 그덕에 이름값을 높여 1991년 일본사회당의 요직인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자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신생당, 호소카와 모리히로일본신당, 이시다 코시로의 공명당, 오우치 케이고의 민사당, 다케무라 마사요시신당 사키가케, 에다 사쓰키사회민주연합과 연합하여 전후 최초의 비자민·비공산 7당 연립정권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은 신생당,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 등의 자민당 탈당파들이 만든 신당에게 표를 잠식당하면서 의석 수가 기존 136석에서 70석으로 줄어드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 때문에 연립정권 내에서도 가장 많은 의석수를 가지고도 총리직을 일본신당 소속의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넘겨줄수밖에 없었던것은 물론이고 각료 배분에서 고작 7자리만을 얻는[2] 심한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야마하나 사다오 중앙집행위원장이 물러나면서 2인자인 무라야마가 중앙집행위원장 자리를 넘겨받게 되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가 사가와 규빈 사건으로 퇴진한 후에는 오자와의 신생당, 이시다 위원장의 공명당과 대립하면서 연립에서 이탈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같은 구성으로 하타 내각 참여에 합의했다. 그러나 총리 지명 이후 연립 여당의 일원이었던 민사당이 일본사회당을 제외한 여당에 통일 회파의 결성을 호소하자[3] 이에 분노한 무라야마와 일본사회당은 하타 내각에서의 이탈을 선언했다. 결국 소수 여당으로 하타 정권은 2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총리 재임 시절

1994년 6월 오자와 이치로가 조종하는 연립여당은 자민당의 카이후 토시키 전 총리를 수반으로 옹립해 자민당의 분열을 통한 정권 유지를 도모한다. 그러나 자민당은 일본사회당의 무라야마 중앙집행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권의 수립을 결정하고, 여기에 오자와의 노선과 대립하던 신당 사키가케가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가 연립한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당시만 해도 자민당은 미야자와 기이치, 고노 요헤이 등의 평화헌법을 지지하는 온건 보수 세력이 주도하는 상황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오자와의 신당 세력보다 더 진보적인 부분도 있었다.[4]

무라야마는 총리로 취임한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기존 일본사회당의 당론인 비무장 중립정책을 폐기하면서 미일 안보조약의 긍정을 표명했다. 이 노선전환은 당시 자민당과의 연립과정에서 일본사회당 내부의 충분한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고 발표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일본사회당은 무라야마 내각 출범 초기부터 내분에 휩싸여 분당이나 해산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995년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크게 패하면서 당내 지도력을 상실한 무라야마는 결국 1996년 1월 11일에 내각 총사퇴를 발표하고 정계에서 물러난다.

4.1. 무라야마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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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994년 김일성 조전 논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는데 그는 일본사회당 명의로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조전을 보냈다.#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일본사회당조선로동당과의 오랜 우호관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일본 특유의 국익을 위한 남과 북에 대한 줄다리기식 외교라고 분석했다.

그는 조전을 통해 "'위대한 지도자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에 가슴깊이 우러나오는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고 밝혔다.[5][6][7] 이 조전이 논란이 되자 14일에 일본 정부 측은 총리 혹은 각료의 명의로 김일성을 조문하거나 조전을 보내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각국 재외공관에 이를 통보했다.

4.3. 한일합방에 대한 발언 논란

1995년 8월, 무라야마 총리는 한일합병은 합법적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는데, 자민당 인사도 아닌 사회당 같은 야당 출신이 종래의 일본국 정부 입장을 답습하며 발언했다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줬다.(연합뉴스 기사) 이에 대해 외무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해 국민들의 거센 질타를 받았으며(MBC 기사) 이에 따라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양국간 정상회담마저 무산되면서 한일 관계가 일시적으로 싸늘해졌다.(KBS 기사)

무라야마 총리는 또 일본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이는 정치적 도의적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내각총리대신이 공식석상에서 한일합방을 합법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지난 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줄곧 한일합방조약은 합법이라고 주장해왔으며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최근의 예로는 95년 6월 와타나베 전 외무대신이 지방에서의 강연을 통해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된 것이 아니며 합법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단편적으로 들으면 오해를 사겠지만 의사록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아직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8]

무라야마 총리는 17일에도 한일합병조약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 이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거듭 강조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오늘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합방조약의 형식과 정치적도의적 견해는 별개라고 밝혔다. 무라야마 총리는 그러나 정치적 도의적 실태 론으로 판단하면 한일합방조약이 대등하고 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 지배가 현실적으로 있었던 만큼 사실을 직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라야마 총리는 그러나 지난 5일 한일합방조약과 관련한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9]

그러나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10][11][12]

4.4. 평가

한국에서는 무라야마 담화를 통해 과거사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 내에서의 평가는 한국의 사고 공화국 시절에 필적할만한 대형 사건사고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에 대한 대응에 실패한 점 때문에 다소 부정적이다.

과거사를 반성하는 담화를 발표했지만 위에 서술한대로 1995년 한일합방과 관련된 발언 논란에 휩싸였고, 의석수와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기존 자민당의 노선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었다.[13] 무라야마의 재임기간은 1년 6개월 남짓으로 아주 길지도 또 짧지도 않은 편이었으나, 이 기간 동안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여러모로 우여곡절이 많았다.[14] 1995년 1월에는 토호쿠 대지진 이전까지 전후 최대규모의 피해를 낳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고, 불과 석 달 뒤인 3월에는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내 민심이 극도로 불안해졌다. 특히 고베 대지진에서 일본 정부의 늑장 대처로 피해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이 일어나면서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으며 이후 1년동안 무라야마 내각은 낮은 지지율로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실 무라야마 본인도 개인은 파벌에 좌우되지 않는 청렴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의지가 약해서 재임 초반부터 사의를 밝히면 다른 각료들이 만류하는 식으로 간신히 내각을 이끌었으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선전환을 둘러싼 당 내분에 재임기간 내내 시달렸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1995년 8월 15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명기한 총리 담화(무라야마 담화) 발표, 피폭자 구제법 성립, 미나마타병 미확인 환자에 대한 전면 구제 등의 업적으로 나름 사회당 정권다운 모습을 조금은 보여주었다.

다만 사회당 내에서는 무라야마가 총리가 되고 싶어서 여기 저기 기웃거려서 사회당이 결국 망한거라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는 모양이다. 실제 지지율도 낮았던데다가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물러난 이후 일본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기는 했지만 되려 구 사회당 의원과 당원, 노조 등의 조직의 상당수가 사민당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서 신당 사키가케 탈당파 의원들[15]과 합세해서 구 민주당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16] 1996년 총선에서 고작 15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그 이후로는 1998년 참의원 선거와 2000년 중의원 선거를 제외하면 중의원에서 10석도 못얻는 군소야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불과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당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정당인 일본공산당이 야당 중 늘 1당 역할을 맡아왔던 사회당을 추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결국 현재에는 사민당보다 규모가 월등히 큰 정당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정치인으로서 받는 비판은 어쩔 수 없으나, 일본사회당 몰락의 책임을 전부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전가할 수는 없다. 단독내각도 압도적 다수의 연립내각도 아닌 상황에서 당의,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사회당의 당세는 1960년대 이후로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과 도이 다카코 위원장 시절을 제외하면 꾸준히 정체, 혹은 하락세였고 자민당에 밀려 정권을 잡은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수권능력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경제성장률이 1991년 이후 최고치인 2.7%를 기록하며 뚜렷하게 반등하기 시작하는 등의 공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집권기간 동안 대형사고의 임팩트가 큰데다가 후임인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소비세 인상을 시작으로 잃어버린 10년의 서막을 연 탓에 경기침체가 장기화되어 재평가받을 여지를 줄인 것도 큰 원인이기는 했다.

무라야마 총리 시절 사회당은 그동안 거듭해왔던 비현실적인 정책 일부[17]를 수정하여 사회당의 중도화를 꾀하는 등 나름 사회당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무라야마의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그나마 사회당에 남아있던 유권자들마저 사회당의 불분명한 색체에 회의감을 느끼고 지지 정당을 옮기게 되었다는 재반박도 존재한다.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꾼지도 꽤 되었고, 아무래도 현재의 사회민주당은 오키나와현을 벗어나면 전혀 영향력이 없는 정치 단체급의 군소 정당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가 총리 시절 일으켰던 실책들은 점점 잊혀가고 대신 최장수 총리로서의 모습이 부각되는 추세이다. 소위 '정치'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넘어갔다는 평. 그래서 현재 들어서 무라야마 총리에 대한 일반적인 일본인들의 평가는 "정책 방향이 옳은 것은 아니었지만 겸손했고 인품이 좋았던 사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5. 정계 은퇴 이후

2000년 정계 은퇴 이후에는 고향 오이타시도쿄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원을 목적으로 창설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18]의 이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에서 몇 안되는 혁신계 출신 전임 총리로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70살에 총리가 되었는데, 최고령이나 최장수는 아니지만 90살까지도 정정하게 활동하는 것은 보기 드문 모습이다.

2013년아베 신조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를 파기하느냐 계승하느냐로 말이 많은 가운데, 무라야마는 니혼게이자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력으로 타국에 들어가면 그게 침략인 건데 뭐가 다른가?"라고 일갈했다. 또한 무라야마 담화고노 담화의 폐기 또는 수정 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또한 한국의 JTBC와의 인터뷰에서도 아베 신조 총리의 발언은 국제적 고립만 심화시킬 뿐이라고 비판했다.

2013년 8월에는 아베 정권의 개헌시도에 맞서서 호헌을 기치로 야권세력이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호헌을 기치로 한 야권재편은 쉽지 않은 상황인데, 애초에 개헌에 반대하는 세력이 민주당, 일본공산당, 사민당 등에 퍼져있는데다 이들이 호헌만을 가지고 뭉치기에는 너무 성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민당에도 우경화에 반발하는 온건 보수본류 정치인이 제법 있고, 반대로 야권에도 개헌에 찬성하는 강경 우파 정치인이 상당수 있다.[19] 다만 무라야마 전 총리는 사민당에 대해서 야권 재편과정에서 해체될수도 있다고 말해 사민당 중심이 아닌것을 분명히 했다.

2014년 2월 11일,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 한일관계 관련 논의를 위해 방문하였으며, 위안부 피해자들과의 만남을 갖기도 했다. 청와대를 방문해 박 대통령과의 면담을 고려하였으나, 일정 상 성사되지는 않았고 대신 정홍원 국무총리와 면담하였다.

2015년 8월 3일, 평화헌법 개헌과 집단자위권을 주장하는 아베 신조 총리를 매섭게 비판하고 나섰다.

2018년 9월 24일에는 자신의 건강 비결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하였다. 건강 비결은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런 기분으로 사는 것이라고. 해당 강연회를 소개하는 기사에 따르면, 무라야마 전 총리는 비가 오지 않는 한 동네를 산책하고 라디오 체조를 하는 것을 일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종전 75주년 맞아 '신(新) 무라야마 담화'를 공개했다. 이날 무라야마 전 총리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작성하던 때를 회고하며 이 담화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0년 에다노 유키오 주도로 벌어진 야권재편 국면에서 사민당이 분열되고, 입헌민주당에 참여하는가 참여하지 않는가로 당이 갈린 상태에서, 무라야마 전 총리는 힘 합쳐 정치이념실천을 지향이라는 발언으로 입헌민주당 참여의 의향을 표했다.* 그래도 최종적으로는 탈당을 하지 않고 당적을 유지하기는 했지만 고령을 이유로 명예 당수와 고문 직에서는 사임했다.#

명예당수직과 고문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사민당의 최고 원로로서 당에 대한 응원과 지원은 계속하고 있는 듯 하다.2021년 9월 20일 후쿠시마 미즈호 당수를 맞이한 무라야마 전 총리

2023년 4월 2일, 제20회 통일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었는데 99세 나이로 후쿠시마 미즈호 대표와 만남을 가지고 당을 응원했다.#

2024년 3월 3일 생일을 맞이하여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이어 3번째로 100세를 맞이한 일본 총리가 되었다.


[1] 일본의 중공업 회사로 이시카와섬-하리마 중공업을 뜻하는 영문명의 이니셜이다. 일본어 위키피디아 IHI[2] 운수대신, 건설대신,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 국토청 장관, 경제산업청 장관, 무임소대신[20][3] 오자와 이치로가 일본사회당을 배제한 정계재편을 위해 민사당을 배후에서 움직였다는 것이 정설이다.[4] 오자와는 2003년 민주당 합류 이후로는 큰 정부, 혁신 성향, 역사반성주의 색채를 짙게 나타냈지만 이 당시까지만 해도 작은 정부, 신자유주의, 우익적 성향을 다분히 드러냈다.[5] 일 총리 북측에 애도 전문 동아일보[6] 무라야마 북한에 조전 한겨레[7] 일 총리 사회당 명의로 북한 조전 경향신문[8] 일본 무라야마 총리 망언 KBS 1995[9] 무라야마 일본 총리 "합병 합법" 되풀이 kbs 1995[10] 발언'잘못 시인 1995.11.13 한겨레[11] "日(일)은 과거역사 바로봐야"金(김)대통령 "韓國民(한국민)고통에 깊이사과 1995.11.19 매일경제[12] 韓(한)-日(일) 정상회담「과거사妄言(망언) 갈등」일단 봉합 1995.11.19 경향신문[13] 연립 내각을 구성한 정당 중 자민당이 절대 다수당이었기 때문에 고노 요헤이 부총리 겸 외무대신을 비롯해 자민당 소속 의원들이 내각 내 요직을 독점한 수준이었기 때문.[14] 여담으로 김일성이 죽은 사건이 총리에 오른 직후에 터졌다.[15]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마에하라 세이지, 에다노 유키오, 겐바 고이치로, 아라이 사토시, 오자와 사키히토, 이시이 코키 등 15명[16] 사실 도이 위원장과 더불어 무라야마 자신도 민주당에 입당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당권을 잡고 있던 간 나오토하토야마 유키오는 이들의 입당을 거부했는데, 도이와 무라야마의 이미지가 너무 나빠서(...) 민주당이 구식 정당으로 보일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17] 과한 친북 성향, 자위대 해체 주장 등[18] 무라야마 전 총리는 아직도 속죄금이라는 의미의 "츠구나이킨"이 위로금이라는 의미로 잘못 전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고 한다.[19] 예를 들어 2011년 민주당 정권의 마지막 총리를 지낸 노다 요시히코는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자민당보다 훨씬 강경하며, 반대로 자민당 내 우파인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또 반대로 대내 정책에 있어서 상당한 개혁파였는데 심지어 여성 천황 즉위까지 주창하면서 관련법의 개정을 은근슬쩍 떠봤을 정도. 여전히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가 무의식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아시아에서 그것도 천황 일가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일본의 총리가 저런 주장을 한 것은 여간 개혁적인게 아니면 불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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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한국으로 치면 무임소장관에 해당되는 국무대신으로, 당시 야마하나 사다오 중앙집행위원장이 정치개혁 담당 무임소대신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