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6 15:51:44

류식

송 빈
宋 賓
김득기
金得器
이대형
李大亨
류 식
柳 湜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wiki style="min-height: calc(1.5em + 5px); 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bgcolor=#C00D45,#01454F> 임진왜란 (일본군 대규모 상륙), 일본군 진격 시기
1592년 <colbgcolor=#C00D45,#01454F><colcolor=#f0ad73,white> 음력
4월
부산진 전투[日] · 다대포진성 전투[日] · 동래성 전투[日] · 김해성 전투[日] · 경상도 방어선 · 상주 전투[日] · 충주 탄금대 전투[日]
5월 한강 전투[日] · 기강 전투[朝] · 옥포 해전[朝]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朝] · 해유령 전투[朝] · 임진강 전투[日] · 정암진 전투[朝] · 사천 해전[朝]
6월 당포 해전[朝] · 제1차 당항포 해전[朝] · 용인 전투[日] · 무계 전투[日] · 율포 해전[朝] · 금화 전투[日] · 제1차 평양성 전투[日]
7월 웅치 전투[日] · 안덕원 전투[朝] · 이치 전투[朝] · 한산도 대첩[朝] · 제1차 금산 전투[日] · 안골포 해전[朝] · 우척현 전투[朝] · 제2차 평양성 전투[日] · 삭녕 전투[日] · 해정창 전투[日] · 영천성 전투[朝] · 지례 전투[朝]
8월 제3차 평양성 전투[日] · 청주 전투[朝] · 제1차 경주 전투[日] · 제2차 금산 전투[日] · 영원산성 전투[日] · 장림포 해전[朝]
9월 부산포 해전[朝] · 연안성 전투[朝] · 제2차 경주 전투[朝] · 북관 대첩[朝] · 노현 전투[日] · 창원성 전투[日]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길주성 전투[朝] · 독성산성 전투[朝]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3년 1월 제4차 평양성 전투[朝明] · 수원 전투[朝] · 성주성 전투[朝] · 벽제관 전투[日]
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전투/상주 전투[朝] · 행주 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전선 고착화 및 국지전 시기, 정유재란 (일본군 대규모 재상륙)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日]
1594년 3월 제2차 당항포 해전[朝]
7월 거제도 진공작전[朝]
1597년 2월 부산 진공작전[朝]
3월 기문포 해전[朝]
6월 가덕도 해전[朝]
7월 칠천량 해전[日]
일본군 진격 시기
1597년 8월 고령 전투[朝] · 남원성 전투[日] · 황석산성 전투[日] · 어란포 해전[朝]
9월 벽파진 해전[朝] · 직산 전투[明] · 명량 해전[朝] · 제1차 석주관 전투[日]
사로병진책, 조명연합군 진격 시기
1597년 11월 제2차 석주관 전투[日]
12월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제1차 울산성 전투[日]
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제2차 울산성 전투[日]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 ||
류 식
柳 湜
생몰 1552 ~ 1592
출생지 하동면 산선[1]
사망지 김해성 객사
서훈 가선대부 이조참판
가족 할아버지 류용[2]

1. 개요

류식(柳湜)1552~1592의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안양공(安襄公) 류수(柳洙), 증조할아버지는 도호부사를 지낸 류백손(柳伯孫), 할아버지는 수군절도사를 지낸 류용(柳墉)이다. 류용 때부터 김해로 이주하여 살았다. 아버지는 경산현령을 지낸 류서종(柳緖宗)이고, 어머니는 연안 김씨 김희수(金喜秀)의 딸이다. 부인은 상주 김씨로 목사 김명윤(金明胤)의 딸이다. 류식은 1552년 하동면 산산[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과거 공부를 하기도 하였지만,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오처사(樂吾處士)’라고 불렸다. 임진왜란으로 왜군이 월당진[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월촌리]으로 쳐들어오자, 류식은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앉아서 욕을 당하기를 기다리겠는가”라고 하며 집을 나섰다. 큰형 어모장군 류진(柳津)이 노비 수십 명을 내어주자, 집안 사람들과 노비를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류식은 송빈 등과 성을 사수할 계획을 마련하고 대중을 깨우쳐 두려워 말라고 하였다. 왜군이 호계천 상류를 막아서 성안에 물이 끊기자, 성안 사람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자고 하였다. 류식이 사람들을 꾸짖고 객관 앞의 땅을 파자 샘물이 솟아났다. 솟아난 샘물을 들어 왜군에게 보이자, 왜군은 신과 같은 사람이 반드시 성안에 있을 것이라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때 판 우물을 ‘유공정(柳公井)’이라고 불렀다. 1592년 4월 20일, 적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성 주위의 구덩이를 메우고 성안으로 들이닥쳤다. 류식은 짧은 칼로 적을 베고, 전패(殿牌) 앞에서 적을 꾸짖으며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묘소] 류식의 옷과 신발을 임진왜란 후 김해부의 남쪽 대야면 수참산[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미음마을]에 장례 지냈다. [상훈과 추모] 류식은 1600년에 통정대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1871년에는 다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김해성 안 우물을 팠던 자리에 후손들이 유공정비(柳公井碑)를 세웠는데, 비문은 주사(主事) 김종대(金鍾大)가 썼다. 김해부사 정현석이 삼충사(三忠祠)에서 류식이 빠진 것을 보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1871년 사충단을 설립하면서 배향되었다. 매년 4월 2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류식의 아내도 류식의 변고를 듣고 순절하였는데, 정부인으로 정려를 받았다. 부인은 김해부의 동쪽 자산[현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마산]에 묻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자세한 내용은 사충신 참조.


[1] 현재의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2] 수군절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