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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슬람 공화국 제4대 대통령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اکبر هاشمی رفسنجانی | Akbar Hashemi Rafsanjani | |||
<colbgcolor=#303A3B><colcolor=#ffffff> 본명 | 악바르 하셰미 바흐라마니 اکبر هاشمی بهرمانی Akbar Hashemi Bahramani | ||
출생 | 1934년 8월 25일 | ||
이란 제국 케르만주 라프산잔군 누크 구역 바흐레만 | |||
사망 | 2017년 1월 8일 (향년 82세) | ||
이란 테헤란주 셰미라나트군 타지리쉬 | |||
묘지 | 루홀라 호메이니 영묘 | ||
재임기간 | 제4대 대통령 | ||
1989년 8월 16일 ~ 1997년 8월 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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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녀 파테메 하셰미 라프산자니 장남 모흐센 하셰미 라프산자니 차녀 파제 하셰미 라프산자니 차남 메흐디 하셰미 라프산자니 삼남 야세르 하셰미 라프산자니 | ||
종교 | 이슬람교(시아파) | ||
소속 파벌 | [[개혁파| 개혁파 ]] | ||
소속 정당 | [[건설당 간부들| 건설당 간부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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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اکبر هاشمی رفسنجانی(1934. 8. 25 ~ 2017. 1. 8)
이란의 정치인. 제4대 대통령을 지냈으며, 1979년 현행 헌법 치하에서 최초로 재선에 성공한 개혁파 출신 대통령이다.
2. 생애
바흐레만에서 "악바르 하셰미 바흐라마니"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이후 성씨가 "라프산자니"로 바뀌었는데, 바뀐 계기는 불명.[1] 부친은 피스타치오 장사꾼이었다.14세 때 쿰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만난 루홀라 호메이니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을 따라 호메이니의 반(反) 체제 운동에 가담했으며, 호메이니가 해외로 망명하자 이란에 남은 라프산자니가 그를 대신해 반(反) 체제 운동을 이끌었다. 당연히 구속 크리를 피하지 못 했는데, 1960년부터 1979년까지 무려 7번이나 구속되었다고. 물론 구속 사유가 이 뿐만은 아니고, 그가 하산 알리 만수르 총리 암살과 연관이 깊은 이슬람연합당과의 인연이 있던 것도 정작 그가 구속된 원인이었다.
1979년 혁명 이후 내무장관 대행을 거쳐 198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곧바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어 최고지도자가 된 호메이니 밑에서 승승장구했다. 전투직 성직자회를 설립한 28인 중 한 명이며, 동시에 혁명 세력이 꾸린 이슬람공화당의 창당 발기인 중 하나이다. 동시에 내분에 휩싸인 이슬람공화당을 해체한 장본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2]
1989년 호메이니의 사후 알리 하메네이 대통령이 최고지도자직을 승계하면서 대통령직을 사퇴하자, 라프산자니는 이에 치러진 조기 대선에 출마, 무려 96.1%의 유례 없는 득표율로 제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라프산자니가 당시 갈등 속에 있던 하메네이 대통령과 미르호세인 무사비 총리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고, 둘이 싸우는 꼴을 보기 싫었던 국민들이 라프산자니에게 지지를 보내주었기 때문.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외교·경제적으로는 유연한 입장을 취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호메이니의 신임을 받은 것과는 달리 의외의 개혁 행보 탓에 보수파들의 눈 밖에 났고, 이 때문인지 1993년 대선 때는 단 64%의 득표율로 승리했는데, 표면 상으로는 초압승이었지만 4년 전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은 것에 비하면 여지 없는 참패였다. 결정적으로 초기 그를 지지하던 보수층이 등을 돌린 게 원인이었던 것. 다만 이렇게 되면서 이란은 개혁파(중도파)와 원칙파(보수파)의 실질적인 양당제로 굳어지기 시작했고, 제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란 민주주의 향상에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하게 된다.
연임 제한으로 1997년에는 출마하지 않고 퇴임했고, 본인이 지원한 개혁파 모하마드 하타미가 당선되면서 개혁파는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이후에는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مجلس خبرگان رهبر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앙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난 듯 싶었지만,[3] 하타미가 연임 제한에 걸린 2005년 대선을 앞두고 개혁파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다시금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본인도 이 여세를 몰아 대통령직 복귀를 시도한다.[4] 개혁파, 보수파 둘 다 파편화된 1차 투표에서 21.13%의 득표율로 1위를 기록했으며, 개혁파 득표율 총합이 무려 56.64%가 나오면서 대통령직 복귀가 유력한 듯 싶었지만, 2차 투표 결과 단 35.93% 밖에 득표하지 못 하면서 당선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참고로 당선자는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다만 이후에도 정계에서 아주 발을 뺀 것은 아니고, 아마디네자드를 비판하고 2013년 대선 때는 개혁파 하산 로하니를 지지하는 등, 은연에 영향력을 발휘했다.[5] 이후 로하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러한 행보 덕인지 이코노미스트가 그를 "베테랑 킹메이커(veteran kingmaker)"라고 칭했을 정도.
그 후에도 2016년 전문가 회의원 재선에 성공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다가, 2017년 1월 8일 타즈리시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향년 82세.[6] 정부는 3일 간 애도기간 겸 휴일을 선포했고, 유해는 루홀라 호메이니 영묘에 안장되었다. 사후에도 각종 시설들이 그의 이름을 따 개명되었고,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 로하니가 재선에 성공하는 등 추모 열기는 뜨거웠으며, 현재까지도 이란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손꼽히고 있다.
3. 여담
여담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은 팔라비 왕조에 맞서 싸웠지만, 의외로 미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 것도 한 곳이 아닌 무려 20개 주를 다녔다.[7]사진에서 보다시피 이란 성직자 출신임에도 수염이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란 대통령들은 비성직자 출신인 1, 2, 6, 9대 대통령을 제외하면 다들 수염이 풍성한 편이다. 물론 라프산자니도 그렇고 이들 역시 수염이 빈약하기만 할 뿐 있어서 이란의 모든 대통령들은 전부 수염을 기른 인물이다.
역대 이란 대통령 중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첫 대통령이다. 초대 아볼하산 바니사드르와 2대 모하마드알리 라자이는 각각 탄핵, 암살로 임기를 마쳤고, 3대이자 전임 대통령 알리 하메네이는 임기를 거의 채우기는 했지만 임기 만료 직전에 루홀라 호메이니가 사망하여 후임 라흐바르로 선출되면서 사퇴했기 때문이다.
사망한 이란 대통령 중 3번째로 단명했으며, 암살당한 모하마드알리 라자이와 헬기 추락사고로 사망한 에브라힘 라이시를 제외하면 자연사한 대통령 중 가장 단명했다.[8] 물론 현 이란 이슬람체제가 세워진 지 40여년 밖에 안된데다 역대 이란 대통령 8명 중 사망자가 4명밖에 안되는지라 유의미한 통계는 아니다. 단 그의 전임 대통령이자 현 최고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대통령들은 아직 사망 당시 라프산자니의 나이보다 어리므로 이들 중 한명이라도 라프산자니의 나이보다 젊은 나이에 병사하면 기록이 깨진다.
4. 소속 정당
<rowcolor=#fff> 소속 | 기간 | 비고 |
[[이슬람공화당| 이슬람공화당 ]] | 1979 ~ 1987 | 정계 입문[9] |
[[전투적 성직자회| 전투적 성직자회 ]] | 1987 ~ 1996 | 창당 |
[[건설당 간부들| 건설당 간부들 ]] | 1996 ~ 2017 | 창당 사망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89 | 이란 대통령 선거 | 이란 | [[전투적 성직자회| 전투적 성직자회 ]] | 15,537,394 (94.51%) | 당선 (1위) | 초선 |
1993 | 이란 대통령 선거 | 10,449,933 (64.00%) | 재선 | |||
2005 | 이란 대통령 선거 | 10,046,701 (35.93%) | 낙선 (2위) | [결] |
[1] 바흐레만은 라프산자니가 태어난 도시이고 그 도시가 속한 군이 라프산잔군이다. 페르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고정된 성이 없었으며 주로 태어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성으로 사용했다.[2] 다른 하나는 알리 하메네이 당시 대통령.[3] 왜냐하면 이슬람 율법 전문가 회의는 율법 문제를 다루지, 정치와 깊숙히 연관된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는 않기 때문이다.[4] 이란 대통령은 3연임만 금지되어 있고, 중임 횟수는 제한이 없어 연임 후 한번 이상 건너뛰어 다시 출마하는 것은 가능하다. 때문에 연임 후 건너뛰어 재출마하거나 재출마를 시도한 대통령이 있지만, 아직까지 3선에 성공한 대통령은 없다.[5] 사실 2013년에도 출마를 시도했는데, 선관위의 퇴짜를 맞아 불발되었다.[6] 그런데 부검 결과, 보통의 10배에 달하는 폴로늄이 검출되었다고 한다.[7] 사실 반미주의는 보통 정치적인 성향이 강해서, 평범한 여행의 경우는 좀 다른 케이스다. 다만 이란은 문화적으로도 꽤 반미 성향이 강해서 나름 의외라고 할 수 있다.[8] 다만 2015~2020년 사이 이란의 남성 평균수명이 70세 정도였으므로, 그다지 단명했다고 볼 수는 없고 오히려 평균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9] 1979년 혁명을 주도한 인사들이 혁명 성공 직후 호메이니의 지시에 따라 이슬람공화당을 창당했고,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이 아무것도 얻지 못하자 내분이 일어나 해체됐다.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를 위시한 지도부는 전투적 성직자회라는 정당을 창당했다.[결] 결선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