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30:09

원도심(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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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인천광역시 휘장_White.svg 인천광역시의 지역 구분
원도심
남인천
북인천
서인천
해안도서
동인천 (인천 원도심)
東仁川 (原都心)
Dongincheon (Original Downtown)
파일:인천 원도심 (동인천).svg
<colbgcolor=#0079c1><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인천광역시
기초자치단체 중구·동구[1]
인구 64,914명[기준]
면적 7.84㎢
인구밀도 8,279.85명/㎢
1. 개요2. 역사3.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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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천 원도심은 중구의 내륙 지역[3]동구 전역을 이르는 명칭이다. 원도심에서도 가장 중심지에 있던 전철역인 동인천역에서 따와 동인천이라고도 부르며, 이 명칭이 대내외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4]

이 지역은 1990년대 초반까지 명실상부 인천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였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도심 공동화 현상을 겪고 인구가 대거 유출되면서 도시가 다소 쇠락했다.[5]

유정복 인천광역시장이 추진하고 있는 행정체제 개편 작업이 모두 실현되면 이 지역은 '제물포구'라는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합쳐진다.

2. 역사

구한말 이전 조선시대까지 오늘날의 중구 원도심 일대인 제물포 지역은 그저 별 볼일 없던 서해안의 작은 포구였다. 이 당시 제물포는 외부로 열리지 않은 포구였고 조수 간만의 차가 큰데다 수심까지 얕아서 작은 고깃배가 드나드는 것에 불과했다. 사실 조선 때까지만 해도 인천의 중심은 인천도호부 관아가 있던 관교동문학동 일대였다. 지도상 인천부의 영역을 보면 제물포는 서쪽 끝 동네였고 관교·문학동이 중심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제물포가 일약 인천의 중심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 이후부터다. 조선과 일본의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에 의해 부산 초량항 외에 2개 지역을 추가로 개항해야 했는데 한성과 가까운 제물포항, 러시아와 가까운 원산항이 추가 개항지로 낙점됐다. 물론 이 당시에도 제물포는 수심이 얕고 조수 간만의 차가 극심해서 무역항으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로 개항을 강행했다. 1876년과 1880년 각각 개항한 부산항, 원산항에 이어 1883년 조선의 세 번째 개항 항구로 문을 연 제물포항 주변에는 일본인과 청나라인 등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의 거류지가 형성됐고 일본 정부가 조계지 내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한 영사관을 응봉산 기슭에 설치했다.

도시 팽창의 기폭제가 된 것은 1899년 개통한 경인선 철도와 1900년대 중반 이후 가설된 경인수도였다. 경인선은 조선의 수부도시인 한성과 제물포항 입구를 직결하는 교통로의 역할을 했고 한강물을 제물포까지 끌어오는 경인수도는 제물포항 주변에 거주하던 외국인 거류민들의 식수와 생활용수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 항구가 외국으로 열리고 서울과 교통로와 식수 관로까지 연결되자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근대 도시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오늘날의 중구와 동구 일대가 인천부로 조정되고 이때부터 명실상부 인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32년 응봉산 기슭에 인천부청을 새로 지으면서 이 지역은 인천의 행정·정치·사회·문화·경제의 중심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특히 인천부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면서 신포동과 인현동 일대가 인천의 경제 중심으로 번영할 수 있었다. 개항로로 일컬어지는 배다리~신포동 거리에 은행 점포가 유독 많았던 것[6] 역시 이와 연관이 있다.

이 지역은 인천의 최서단에 있으면서도 인천의 관문 역할을 했는데 경인선의 종점인 인천역과 가장 많은 승객이 타고 내리던 동인천역은 서울과 부천에서 오는 승객으로 넘쳐났고 인천IC 인근 인천시외버스터미널[7]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또한 바닷길로는 연안부두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육지와 섬을 오갔다.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고 직할시로 승격한 직후인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인천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 인천시청을 비롯해 인천의 주요 행정·정치·경제·사회·문화 관련 기관이 중구에 있었기 때문에 인천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각종 일처리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중구를 방문해야 했고 도심의 관문이 되는 동인천역 일대는 인파로 늘 북적였다. 그러나 1985년 남동구 구월동으로 인천시청 청사가 이전하고, 이후 주안역 일대와 부평역 일대가 인천의 새로운 부도심으로 성장하면서 이 지역의 영광은 조금씩 저물기 시작한다.

'인천의 명동'으로 불리며 1990년대 중반까지도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았던 인천 원도심은 도심 공동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1997년 외환 위기 봉착 직후 악몽처럼 터진 인현동 화재 참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하게 된다. 1995년만 해도 17만명에 달했던 이 지역 인구는 30여년 뒤에는 10만명이 되었다. 특히 학령 인구의 지속적 감소로 인해 지역에 있던 학교들이 원도심을 떠나 연수구로 학교를 옮기며 자연스레 이 지역을 찾는 젊은 사람들도 줄어들게 되었다.[8]

2010년대 후반부터 '개항로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이 지역의 폐건물들을 카페, 음식점, 기념품샵 등으로 재생하는 사업을 진행한다.

3. 미디어

도심의 이전으로 인해 사실상 지역 전체가 옛 모습 그대로 방치됐으나 오히려 이 부분이 옛 동네의 모습을 그대로 품는 효과를 내면서 동인천 지역은 많은 작품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이 지역이 주요 배경인 작품은 볼드체 처리.
[1] 2026년 제물포구로 통합 예정[기준] 2023년 2월 기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통계[3] 중구 관할구역 중 도서지역인 영종도, 용유도, 무의도 등을 제외한 곳. 간척을 통해 육지와 연결된 월미도도 동인천 지역으로 본다.[4] 인스타그램에 이 지역을 이르는 다른 명칭인 '#상인천'이라는 태그를 검색하면 121개밖에 뜨지 않으나, '#동인천'을 검색하면 카페나 맛집 등 관련 게시물까지 합쳐 60.6만개개의 게시물이 뜬다.[5] 이 풍경은 인천 원도심과 비슷한 과정으로 도시가 형성됐던 부산광역시의 원도심에서도 똑같이 벌어진 바 있다.[6] 20세기 대한민국 빅5 은행으로 꼽히는 조흥은행-상업은행-제일은행-한일은행-서울신탁은행 중 서울신탁은행과 한일은행을 제외하고는 개항로 위에 모두 점포가 있었다. 신탁은행과 한일은행 역시 개항로에서 멀지 않은 동인천역 인근에 점포를 뒀다. 특히 옛 상업은행 인천지점과 조흥은행 인천지점은 일제강점기부터 같은 자리에서 영업을 해왔으나 2000년대 초 나란히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7] 터미널의 위치는 남구 용현동이지만 횡단보도만 건너면 중구 신흥동이었고 터미널에서 내린 이들은 대부분 동인천 등 시가지로 향했다.[8] 원도심의 남녀 명문 고교로 이름을 높이던 제물포고등학교인일여자고등학교도 나란히 원도심을 떠나고자 계획을 세웠다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며 원도심에 잔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