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노라 엘람 Norah Elam | |
본명 | 노라 도허티 Norah Doherty |
출생 | 1878년 5월 5일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더블린주 블랙록 | |
사망 | 1961년 3월 2일 (향년 82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존 도허티 어머니 샬롯 이사벨 언니 2명 남동생 6명 |
종교 | 개신교(아일랜드 교회) -> 무신론[출처] |
직업 | 여성운동가, 정치인 |
소속 | 영국 파시스트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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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이자 파시스트. 반해부론자이기도 하다.2. 생애
2.1. 초년기
노라 엘람은 1878년 5월 5일 더블린 주 블랙록에서 태어났다. 가족은 1888년 런던으로 이사했고, 존 도허티는 1929년 사망할 때까지 인쇄 사업을 운영했다. 노라의 회고록에 따르면, 도허티는 '폭군' 아버지이자 남편으로, 아들 중 한 명을 자살로 몰았고 여성을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 어렸을 때 그녀는 아버지가 채찍으로 자신의 반려견을 때릴 때 막으려 했고, 그러자 그는 그녀를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그 이후로 그녀는 동물 보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생체해부를 반대하게 되었다.2.2. 참정권 운동
노라는 1909년 5월 8일 미들섹스의 햄프턴 성공회 교회 교구에서 문구점 직원인 찰스 리처드 데이커 폭스(1876-1942)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머지않아 파탄나게 되는데 찰스와 노라 스스로도 노라 엘람이 불임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데다가 그녀가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의 과격한 참정권 운동에 두드러지게 참여한 이유 때문이었다.노라는 킹스턴 및 지역 비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리주에서 기금 모금 행사와 지부 회의를 조직하고, WSPU 주간지인 The Suffragette에 보고서를 작성했다. 1912년 11월부터 그녀는 런던, 켄트주, 서리주에서 주 3~5회 연설을 하며,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의 제안에 기초하여 자신의 연설문을 작성했다.
1914년 노라 엘람은 성공회 주교에게 참정권 운동 수감자에 대한 학대를 항의할 것을 촉구했으나 교회에서의 대응은 미적지근했다. 그녀는 얼스터에서 반란을 선동한 정치인들이 관대한 대우를 받은 것과 참정권 운동가들이 폭력 선동 혐의로 정기적으로 기소된 것을 대조하며 영국 정부를 맹비난했다.
1914년 5월, 노라와 동료 활동가 플로라 드러먼드는 첼시 타운홀에서 시위를 하던 중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웨스트민스터 경찰 법원에 소환되었으나 출석하지 않았고,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 노라와 플로라가 법정에 출석하지 않은 이유는 "랜즈다운 후작이랑 에드워드 카슨은 헛짓거리 해도 솜방망이 처벌만 받는데 우리도 그 사람들 집에서 시위하면 솜방망이 처벌만 받는거 아님?"이라는 발상으로 그들의 저택을 시위 장소로 정해서 시위를 하러 갔기 때문이다.
그 이후 노라 엘람은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시위에서 그녀는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단식 투쟁(5월 15일~19일) 이후 석방되었다. 7월 10일,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런던 주교가 설교하는 도중 이를 방해하다 다시 체포되었다. 또 한 번의 단식과 강제 음식 주유를 겪은 후, 7월 15일 재석방되었다. 7월 30일, 홈 룰(Home Rule)에 대한 절충안을 마련하기 위해 열린 초당적 회의 동안 버킹엄 궁전 밖에서 항의하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짧은 기간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1914년 8월, 그녀는 내무부 밖에서 항의하다가 다시 체포되었으나, 재수감되지는 않았다.
WSPU는 그녀에게 세 개의 막대가 달린 메달을 수여했다. 노라는 다른 여성 참정권론자들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왕의 사면 명령에 따라 홀로웨이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WSPU는 정부로부터 런던에서 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2,000파운드의 보조금을 받고 30,000명이 참석한 집회에서 노라는 에멀린과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와 함께 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의 대의를 지지하고, 산업 지역에서 연설 투어를 하며 여성의 전쟁 기여에 대한 더 큰 공식적 인정을 요구했다.
1915년 내내 노라는 에멀린 팽크허스트, 플로라 드러먼드, 애니 케니, 그레이스 로와 함께 여성들이 산업 현장에서 일하도록 독려하며 전쟁 노력에 기여하도록 힘썼다.
노라는 전쟁 이후에도 WSPU 지도부의 강력한 반독일 정책을 지지했으며,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노라는 독일 태생의 사람들은 영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메시지는 1918년 11월 선거 연설에도 반영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WSPU 지도부가 지원하는 여성당(Women’s Party)의 후보가 아닌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하면서 당시 팽크허스트 일가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 총선에서 노라는 리치먼드(서리주) 선거구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구는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조지 케이브 경이 출마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노라는 그가 외국인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여겼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노라의 출마는 그의 의석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직접적인 위협이든 우파 표를 분열시키는 방식이든 마찬가지였다. 노라는 20.4%의 득표율로 2위를 차지했지만, 47.4%를 득표한 보수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그녀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중단되기 전까지 반외국인 캠페인을 계속했다.
노라는 1918년 선거 이후 의회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계속 유지했다. 1920년 4월 10일자 더 타임스에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프랑스의 안보와 위신에 곧 영국의 안보와 위신이 달려있는 셈이라며 프랑스를 약화시키는 정책은 곧 프랑스의 적이자 우리의 적인 독일을 강화하는 정책이라 주장했다.
1920년대 초반, 노라는 더들리 엘람과 혼외 관계를 맺었다. 더들리는 성공회 성직자에서 공무원과 개인 교사로 전향한 인물로, 두 자녀를 둔 기혼자였으며 독립적인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19일, 노라는 유일한 자녀인 아들 오브리(Aubrey, ‘토니’라는 이름으로 알려짐)를 출산했다. 노라는 이후 페미니스트적인 이유로 엘람과 결혼을 거부했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시행 중이던 과실책임 기반의 이혼법에 따라 그들 중 한 명 또는 양측 배우자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1928년, 노라는 법적 절차를 통해 성을 엘람(Elam)으로 변경했다. 그들의 관계는 불안정하고 때로는 양측 모두에서 폭력적이었으며, 노라가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노라와 그녀의 아들 사이의 관계는 심각하게 문제가 있었고, 양측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차있었다.
1929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노라는 한 자매와 함께 그의 인쇄 사업을 장악하며 형제들을 배제했다. 그러나 그 사업과 노라 개인 모두 1931년에 파산했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그녀의 부실 경영 때문이었다. 그녀는 1933년에 파산에서 면책되었다.
노라와 그녀의 아들이 더들리와 웨스트 서식스의 노스채플로 이사했을 무렵, 더들리는 공무원직에서 은퇴해 치체스터 보수당 지부의 의장이 되었다. 노라는 보수당에 가입했으며, 1934년까지 활동하다가, 둘 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British Union of Fascists, BUF)에 가입했다.
2.3. 파시스트 활동
노라의 정치와 오랜 경험 덕분에 오스왈드 모슬리가 세운 BU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핵심 그룹에 빠르게 합류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The Blackshirt를 비롯해 Fascist Quarterly와 같은 다른 파시스트 간행물에 "구 참정권 운동가"라는 필명으로 꾸준히 기고했다.노라는 서식스 지역의 여성 조직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정기적으로 윌리엄 조이스와 함께 대중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노라는 후일 조이스를 싫어했다고 밝히면서도, 그가 아일랜드인이므로 영국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36년, 그녀는 BUF의 노샘프턴 지역 잠재적 의회 후보로 선정되었다. BUF는 노라의 참정권 운동 경력을 잘 써먹어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려 한다는 비판에 대응했다.
노라는 BUF의 간행물에 모슬리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비교했다. 또한, 참정권 운동가들이 투표권을 얻은 후 더 넓은 사회 변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기존 정치 정당에 굴종하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정당 가입 이후 반유대주의 사상에도 감화되었는지 이러한 행보를 보이는 정당들을 반유대주의적 용어로 묘사하기도 했다.
노라는 한동안 모슬리 부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배리 돔빌이 세운 The Link와 Right Club나 같은 다른 극우 단체에도 관여했다.
노라는 1900년경 설립된 런던 및 지방 반(反)해부학회의 회원이었다. 1930년대에는 LPAVS의 후원으로 두 편의 소책자 “MRC: What it is and How it Works”와 “The Vitamin Survey”를 출간했다. 그녀는 생체 해부 행위를 극도로 혐오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영국 반생체해부연합(British Union Against Vivisection)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노라의 오랜 친구이자 WSPU 동료였던 메리 앨런을 포함한 다른 LPAVS 회원들도 파시스트였으며, 전쟁 발발 이후 노라는 모슬리의 권한 아래 BUF 자금을 몰수당하지 않기 위해 LPAVS를 이용해 이를 숨겼다. 생체실험에 대한 적대감은 정확하게는 의학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자연적 치료법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에블린 엘람은 1934년에 독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회원이 되었다. 1936년 11월, 노라는 BUF의 노샘프턴 의회 후보로 선정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계획이 중단되었다.
1940년 5월 23일, BUF 회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과정에서 노라와 더들리 엘람 부부도 체포되었다. 더들리는 고령이고 심장병을 앓고 있어 1940년 말에, 노라는 1942년 2월에 석방되었다. 이후 노라는 국방 규정 18B에 따라 구금된 BUF 회원들의 가족을 지원하는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감옥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노라와 모슬리의 아내 다이애나와의 우정을 강화했으며, 엘람 부부는 감옥에 갇힌 모슬리를 방문하기 위해 런던에 온 다이애나의 여동생 유니티 미트퍼드를 집에 머물게 했다. 그러나 모슬리는 엘람 부부를 자신에게 부담이 되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1945년 이후 자신의 운동을 재건하려는 시도에서 그들을 소외시켰다.
BUF는 1945년에 해체되었으나, 노라는 강력한 반유대주의적 견해를 계속 유지했다. 노라는 더 급진적인 파시스트이자 반유대주의자이며 홀로코스트 부정론자인 아놀드 리스와 가까워졌다. 1945년 이후 엘람 부부는 트위크넘으로 이사했으며, 더들리가 1948년 사망한 이후 그녀의 아들은 노라 엘람의 막장 부모적 행보로 인하여 서로 끊임 없이 갈등하다가 남은 생을 보냈다. 그녀는 1961년 3월 2일 미들섹스 병원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