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메리 리처드슨 Mary Richardson | |
본명 | 메리 롤리 리처드슨 Mary Raleigh Richardson |
출생 | 1882년 11월 16일 |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주 벨빌 | |
사망 | 1961년 11월 7일 (향년 78세) |
영국 잉글랜드 동서식스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어머니 |
직업 | 여성운동가, 정치인 |
소속 | 영국 파시스트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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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가이자 파시스트. 로크비 비너스를 반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2. 생애
2.1. 유년기
그녀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벨빌에서 태어났다. 16살 때 영국 런던 블룸주버리에서 살았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이후 블룸주버리에 살면서 기자가 되었다.2.2. 여성 운동
메리 리처드슨은 1910년 11월 18일, 여성 사회 정치 연합 (WSPU)이 의회에 로비 활동을 벌였다. 그녀는 경찰이 여성들을 잔혹하게 공격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에멀린 팽크허스트가 세운 여성 사회 정치 연합(WSPU)에 가입했다. 그들은 사회의 관심을 여성 참정권 문제로 돌리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 운동의 대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투쟁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실, 그녀는 창문을 깨고 경찰관을 폭행하는 등 투쟁적인 시위로 이미 9번이나 체포되었던 적이 있었다. 1913년 7월 18일, 메리 리처드슨은 경찰서 창문에 잉크병을 던진 혐의로 한 달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단식 투쟁을 벌였고 5일 후 '고양이와 쥐 법'에 따라 풀려났다. 그러나 그녀는 풀려날 때마다 또 다른 폭력 행위를 저질렀고 결국 심심할 틈이 없이 수감생활을 계속하게 된다.여성 투표권 관련 청원서를 전달하기 위해 조지 5세의 마차에 뛰어드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1913년 WSPU 방화 캠페인이 확대되었고 기차역, 크리켓 파빌리온, 경마장 스탠드, 골프 클럽하우스가 불타기 시작했다. 여성 참정권을 지지하는 구호를 잘라내어 잔디밭에 태우기도 했다. 참정권 운동가들은 전화선을 자르고 우편함에 화학 물질을 부어 편지를 파괴했다. 책임을 져야 할 여성들은 꾸준히 잡혔지만 감옥에 갇히자 단식 투쟁을 벌였다. 리처드슨은 방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메리 리처드슨은 홀로웨이 교도소로 보내져 수감되었고, 그 과정에서 강제적으로 음식을 코로 주입받는 바람에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또한 맹장염이 재발하여 수술을 받게 된다.
강제 수유에 대한 메리 리처드슨의 성명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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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가장 유명한 저항 행위는 1914년 3월 10일 런던의 국립 미술관에 들어가 고기 도끼로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로케비 비너스를 베어버린 사건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도끼로 그림을 공격할 용기를 내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녀는 체포되기 전에 도끼로 그림을 6번이나 내려 쳤다.
찢어진 로크바이 비너스의 모습 |
법원을 떠나는 메리 리처드슨 |
2.3. 대전쟁 이후 정당 활동
1918년에 인민 대표법이 도입되어 30세 이상의 재산이 있는 여성은 투표권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완전한 평등이 도입된 것은 1928년이 되어서였다.리처드슨은 1919년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녀는 그 후 10년 동안 4번이나 의회 선거에 출마했다. 첫 번째는 1922년 11월 미들섹스 액튼에서 노동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보수당 후보에 비해 26.2%의 득표율을 얻은 것이고 두 번째로는 1924년 10월 그녀는 공식 노동당 후보에 비해 독립적인 사회주의자로서 같은 의석에 출마하여 7.6%의 득표율을 얻었다. 1926년 농촌 지역구인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의 잠재적인 의회 후보로 채택되었지만 1929년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1931년 그녀는 현직 국민 정부인 울머 경에 맞서 올더숏에서 마지막 순간 노동당 후보로 채택되었지만 크게 패하고 만다.
기존 정당에 환멸감을 느낀 그녀는 1934년 모슬리가 이끄는 영국 파시스트 연합에 가입하게 된다. 1934년 4월 리처드슨은 여성부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당시 조직에는 분명 많은 반페미니스트 남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BUF의 여성 회원들이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파시스트 행사에 두드러지게 등장한 여성들은 전체 회원의 4분의 1을 차지한다고 추산된다. 그들은 검은색 블라우스, 검은색 베레모, 회색 치마를 입었다. 하지만 그녀는 1935년, BUF를 떠나 정치에 등을 돌렸다. 리처드슨은 이스트 서식스주의 헤이스팅스로 이사했고, 1953년에 자서전인 "반항심을 비웃다"를 썼다.
1961년 11월 7일 심부전과 기관지염으로 78세의 나이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