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06 10:31:47

김자지

파일:조선 어기 문장.svg 정미갑계(丁未甲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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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왕 정미갑계 어제시(太宗大王 丁未 甲稧 御製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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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甲, ruby= 갑)][ruby(契, ruby=계)][ruby(案, ruby=안)]
太宗大王
丁未 五月十六日
정안군(靖安君) 이방원
5월16일
李仲卿
正月十六日 陜川人
예조판서 이중경
1월16일 협천인
李伯含
正月二十日 完山人
완산군(完山君) 이백함
1월20일 완산인
李陟
三月二十九日 茂州人
직제학 이척
3월29일 무주인
閔壽山
四月二十六日 驪興人
돈령 민수산
4월26일 여흥인
張允和
六月初一日 丹陽人
증 호조판서 장윤화
6월초1일 단양인
黃允正
六月十一日 鐵原人
감사 황윤정
6월11일 철원인
曺致
七月初一日 昌寧人
필선 조치
7월초1일 창녕인
朴礎
七月十三日 咸陽人
이조판서 박초
7월13일 함양인
權希達
八月初六日安東人
지중추원사 위려공(威戾公) 권희달
8월초6일 안동인
李揚
八月十三日 德水人
증 공조판서 이양
8월13일 덕수인
李伯有
八月十九日 全陵人
양후공(良厚公)
완성군(完城君) 이백유
8월19일 전능인
卓愼
九月十三日 光州人
참찬 문정공(文貞公) 탁신
9월13일 광주인
朴翶
九月十七日 竹山人
참판 박고
9월17일 죽산인
柳善
九月二十五日 文化人
감찰 류선
9월25일 문화인
朴實
十月初三日 咸揚人
병조판서 정효공(靖孝公) 박실
10월초3일 함양인
柳濱
十月二十七日 全州人
교리 류빈
10월27일 전주인
金素
十一月二十一日 彦陽人
감사 김소
11월21일 언양인
徐選
十二月十四日 利川人
한성판윤 공도공(恭度公) 서선
12월14일 이천인
金自知
十二月十七日 延安人
형조판서 문정공(文靖公) 김자지
12월17일 연안인
林滌
十二月二十日 羅州人
어사 임척
12월20일 나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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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형조판서
문정공(文靖公)
김자지
金自知
<colbgcolor=#c00d45><colcolor=#c0c0c0> 출생 1367년 12월 17일(고려 공민왕 16)[음력][2]
사망 1435년 2월 23일(조선 세종 17)[음력], (향년 69세)[4]
본관 연안(延安)
원명(元明)[5]
일계(逸溪)
시호 문정(文靖)[6]
부모 아버지 김도(金濤 ? ~ 1397)[7]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 安氏)[8]
형제 4남 중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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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 3명
첫째 동생 김여지(金汝知)[9]
둘째 동생 김치지(金致知)[10]
막내 동생 김학지(金學知)
자녀 9남 1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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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김위(金偉)[11]
차남 김경(金俓)[12]
3남 김잉(金仍)[13][14]
4남 김유(金攸)[15]
5남 김하(金何, ?~1462)[16]
6남 김해(金侅)[17][18]
7남 김비(金備)[19]
8남 김수(金脩) - 이조참판[20]
9남 김구(金俱)
장녀 김씨[21]
1. 개요2. 생애3. 여담
3.1. 이름

1. 개요

여말선초의 문관. 본관(本貫)은 연안(延安)[22], 자(字)는 원명(元明), 호는 일계(逸溪).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2. 생애

1367년 아버지 김도(金濤)와 어머니 죽산 안씨(竹山 安氏) 안수제(安受禔)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385년(고려 우왕 11) 19세의 나이로 문과 을축방(乙丑榜)에 동진사(同進士) 9위로 급제했다.#

조선 건국 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랐으며 음양, 천문, 지리, 의약 분야에서 전문가이다. 이쯤이면 만능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조선 시대 때에는 세종 때까지 벼슬자리에 있었으며 한 때 판결을 잘못 내려 파직을 겪었으나 뒷날 재기용되었다. 태종, 세종 때 형조 참의, 형조 참판, 호조 참판, 형조판서 등 제법 품계가 높은 벼슬에 여러 번 올랐다.

대사헌 재직 중에는 방자한 세도 공신들을 탄핵하려 5번이나 상소를 올려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유능한 신하인데다가 박학한 학자이니 교과서에 나올 법한 인물이지만 교과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아 김자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도 교과서에 실리는 인물은 얼마 안 된다. 한 시대를 풍미하거나 역사의 흐름을 바꾸거나 교과서에 사건을 서술하기 위해서 등장해야 하는 인물이 아니면 소개되지 않거나 간략하게만 소개한다. 물론 김자지는 당대에 출중한 문인이지만 교과서에 실릴 사건을 일으킨 것이 아니므로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만약 김자지가 교과서 등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다면, 본명 대신에 자를 써서 김원명 선생으로 소개될 가능성도 크다.

김자지 묘는 양평에 있으며 현재 양평군 향토 유적 30호로 지정했다. 동생들의 묘도 같은 있다. 가족 묘로 조성해서 친할아버지 김광후(金光厚)[23], 아버지 김도와 어머니 죽산 안씨의 묘도 같은 곳에 모셨다. 또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김자지는 연흥부원군 김제남, 인목왕후의 선조이기도 한데, 김제남(6대손)의 손자 김군석(8대손)과 그의 아내 청송 심씨의 묘도 여기에 있다.

3. 여담

아들만 9명이었다고 한다.

중종 대의 권신으로 유명한 김안로가 김자지 선생의 직계 후손[24]인데, 안 좋은 방향이기는 하지만 현대인에게는 한국사 과목과 드라마 여인천하의 영향으로 김안로의 인지도가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김자지가 김안로의 고조부이므로, 김자지에게 김안로는 현손이 되겠다. 한편 김제남의 부계 6대조, 즉 인목왕후의 부계 7대조이기도[25] 하다.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왕창리에 김자지 묘가 있다. 정부인 평양 조씨와 나란히 묻힌 쌍분 형태다. #

3.1. 이름

현대에는 독특한 이름 때문에 호기심으로 김자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김자지가 관직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알 지(知)의 발음은 '알 디'이므로 당시의 발음대로 읽으면 김자디. 음경을 지칭하는 속어와 발음이 달랐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알 지의 '디'가 '지'로 변화한 이유는 근대 시기에 대대적으로 발생한 구개음화. 참고로 김자지의 남동생들은 김여지(金汝知), 김치지(金致知), 김학지(金學知). 김자지부터 남동생들까지 이름의 뜻을 살펴보면 나를 알다, 너를 알다, 앎에 이르다, 배움을 안다. 아버지 김도는 깊은 뜻을 담아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다.
본 항목의 인물만큼 인자도가 높지는 않지만 항목의 인물 외에도 성이 김, 이름이 자지인 인물이 있다. 김자지(金子祉). 증손인 김통(金統)이 세종(조선) 때 관직에 나아갔으니 고려 시대를 살다 간 인물로 보인다. 이 사람은 의성 김씨다.증손주 김통의 문과 방목


[음력] [2] 이방원과 동갑이다. 두 사람은 동갑례도 치렀다.[음력] [4] 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 2월 23일 을축 3번째 기사 개성부 유후 김자지의 졸기 : '(전략) 나이 69세였다.'[5] 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 2월 23일 을축 3번째 기사 개성부 유후 김자지의 졸기 : '(전략) 자지의 자(字)는 원명(元明)이니, (후략)'[6] 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 2월 23일 을축 3번째 기사 개성부 유후 김자지의 졸기 : '(전략) 문정(文靖)이라 시호를 내리었다.'[7]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공민왕 임인년(1362)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제과(制科)에 급제했다. 이에 왕이 '김도장원나복산인(金濤長源蘿葍山人)'이라는 8자를 손수 써 내렸다. 벼슬이 우사의(右司議), 좌부대언(左副代言),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르렀으나, 1379년 가노가 연경궁(延慶宮) 옛 터의 돌을 훔치다 걸린 일로 그를 미워하던 이인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었고, 같은 해 7월에 양백연(楊伯淵)의 옥사에 연루되어 효수되었다. 고려사절요 31권 신우2(辛禑二) 우왕(禑王) 5년 7월(음력 1379년 07월) 양백연과 그 당여가 모반죄로 처형되다 고려사 111권 열전 제24권 김도 명실록 『태조고황제실록』62권 고려에서 과거에 응시하러 온 3인을 돌려보내다 목은집 「상찰찬(上札讚)」[8] 구 죽산 안씨(舊 竹山 安氏) 안수제(安受禔)의 딸[9] 판한성부사[10] 예빈시[11] 현령[12] 강화부사[13] 지재령군사[14] 슬하에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성삼문의 계취 김차산(次山)이다. 성삼문의 사후 종이 되어 딸 효옥(孝玉)과 함께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주어졌다가 성종 때에 풀려났다.[15] 예빈시윤[16] 판중추원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 시호는 정선(靖宣). 세조실록 27권 판중추원사 김하의 졸기.[17] 토산현감[18] 김안로의 증조부.[19] 원종공신, 행 정[26][20] 이조참판, 황해도관찰사 등을 역임.[21] 남양 홍씨 홍징(洪陟)의 처[22] 7세, 대장군공계. 아들 위, 경, 잉, 유, 하, 해, 비, 수, 구가 각각 경시서령공파, 관찰사공파, 재령군수공파, 중추부사공파, 정선공파, 내자시윤공파, 사정공파, 도관찰사공파, 좌군사정공파의 파조이다.[23] 원래 개성에 있었다.[24] 자지(自知)-해(侅, 8세)-우신(友臣, 9세)-흔(訢, 10세)-안로(安老, 11세)로 이어진다.[25] 자지(自知, 연안김씨 7세)-해(侅, 내자시윤공파 파조, 8세)-우신(友臣, 9세)-전(詮, 10세)-안도(安道, 11세)-오(祦, 12세)-제남(悌男, 13세)-인목왕후(14세)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