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262626><colcolor=#fff> 알 보울리 Al Bowlly | |
| 파일:al_bowlly_profile.png | |
| 본명 | 앨버트 앨릭 볼리 Albert Allick Bowlly |
| 출생 | 1899년 1월 7일 |
| 포르투갈령 모잠비크 마푸투 | |
| 사망 | 1941년 4월 17일 (향년 42세)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밴드리더 |
| 장르 | 재즈, 성악 |
| 활동 | 1927년 ~ 1941년 |
| 신체 | 172cm |
| 배우자 | 프레다 로버츠 (1931년 ~ 1934년, 이혼) 마가렛 페어리스 (1934년 ~ 1937년, 별거)[1] |
| 종교 | 가톨릭 → 정교회[2] |
1. 개요
알 보울리는 1920, 30년대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음악가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유행했던 크룬[3] 창법으로 노래하는 '크루너'였으며, 이 창법의 최초 창안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댄스 밴드 시대'로 일컬어지는 영국 음악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가수 중 하나였으며, 흔히 "Ambassador Of Song"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BBC에서 선정한 'Voice Of The 20th Century'에서 그는 54위를 차지했다.2. 생애
2.1. 남아공 시절
알 보울리[4]는 1899년 1월 7일, 당시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 그리스인과 레바논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장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보냈다.| |
| 1905년 가족 사진, 가장 왼쪽이 알 보울리이다 |
14세가 되던 해,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형제들이 운영하는 이발소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자신의 이발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발보다는 음악에 더 관심이 있었고, 퇴근 후에는 작은 음악 공연을 통해 돈을 벌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노래하는 이발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본격적인 음악 경력은 2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는 지역의 작은 음악 그룹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파트타임 보컬리스트로 활동했다.
1922년에는 요하네스버그의 주요 댄스 밴드였던 에드가 아델러(Edgar Adeler) 밴드에 입단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우연히 보울리가 운영하는 이발소에 방문한 아델러가 문득 가게 뒤편에서 들려오는 보울리의 노랫소리를 듣고 그에게 밴드 멤버가 될 것을 제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입단 즉시 그는 즉시 밴드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 밴드 리더였던 아델러는 알 보울리의 재능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적인 음악적 재능"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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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가 아델러(Edgar Adeler) |
아델러의 밴드는 일대에서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델러는 밴드가 남아공에서 이룰 수 있는 모든 성취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밴드 멤버들을 이끌고 남아공을 벗어나 수에즈 운하를 타고 영국까지 가는 6개월간의 투어를 제언했다. 알 보울리는 이미 1921년에 여권을 발급 받고 영국 시민권을 획득한 상태였고, 그 투어는 더 넓은 세계로 나가고 싶은 그의 야망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2.2. 더 넓은 세계로
밴드는 1923년 7월 요하네스버그를 떠났다. 하지만 밴드가 로디지아에 도착해서 체류하고 있을 때, 두 가지 일이 발생했다. 하나는 밴드에서 기타와 밴조를 연주하던 렌 필리스(Len Fillis)라는 멤버가 약혼녀와의 결혼을 위해 밴드에서 탈퇴한 것이다. 그는 영국으로 먼저 돌아갔고, 그의 탈퇴를 계기로 알 보울리는 밴조 연주법을 배웠다. 또 다른 하나는 아델러 밴드가 극동 지방으로부터 1년의 계약을 제안받은 것이다. 이에 아델러 밴드는 서쪽으로 향하던 길을 동쪽으로 돌리게 된다.아델러 밴드는 인도, 싱가포르 등에서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밴드는 곧 말레이 반도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밴드의 성공과는 별개로 알 보울리와 아델러 사이에서는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한 갈등에 대해 아델러가 회고하길,
"우리는 이중 구조의 렌트 하우스에서 1층 방을 빌려 사용 중이었으며, 저와 아버지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알 보울리가 자신의 세탁물을 망친 세탁부에게 불만을 표출하며 큰 소리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렌트 하우스 전체에 울려 퍼져 저희를 깨웠습니다. 저는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아버지가 보울리에게 ‘닥쳐!’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보울리는 ‘너나 닥쳐, 이 늙은 새끼야!’라고 되받아쳤습니다. 저는 그들 사이에 끼어 있었고, 보울리는 쇼의 핵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저는 집에서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그와 논쟁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는 매우 화가 났지만 입술을 깨물고, 제 자존심을 삼키며 애써 잠든 척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고,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이 일은 제 무의식 속 깊이 남아 있었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이었다. 자카르타에서도 밴드는 공연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어느 날 공연 중, 알 보울리와 아델러 사이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아델러는 다시 회고한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어느 공연장에서 공연 중이었고 모두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특히 알 보울리가 훌륭했습니다. 제 솔로 파트는 후반부에 있었고, 저는 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보울리가 객석에서 제게 쿠션을 던졌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웃으면서 넘겼겠지만, 말레이 반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며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무대를 떠나 보울리를 향해 갔습니다. 그는 저보다 덩치가 작았지만, 저 역시 싸움꾼은 아니었기 때문에 곧 우리 둘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침내 사람들이 우리를 말리기 전까지, 우리는 서로를 바닥에 눕히려 애썼습니다. 저는 화를 참을 수 없어서 그에게 '너는 해고야'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6시, 저는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제가 처음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보울리가 이미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열차의 지정 좌석에 편안히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 단호히 열차에서 내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순순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알 보울리가 아델러 밴드에서 해고당한 것은 1924년 9월의 일이었다. 밴드의 핵심 멤버였던 알 보울리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밴드는 계속해서 투어를 이어나갔다. 밴드가 기차를 타고 자바섬의 수라바야에 도착했을 때, 아델러의 눈 앞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수라바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연주하기로 약속된 클럽에 등록한 후, 시내로 나가 즐기기로 했습니다. 수백 명의 손님을 수용할 수 있는 최고급 카페에서, 놀랍게도 10인조 필리핀 재즈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보컬리스트가 누구였는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알 보울리였습니다. 밴드 멤버들은 저에게 그를 용서하고 잊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저는 단호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라바야를 떠나기 전에, 우리는 화해했고 다시 말을 섞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미래를 위해 행운이 함께하길 진심으로 기원했습니다."
아델러 밴드와 헤어졌지만 상기했듯이 보울리는 금방 그곳에서 직업을 구했다. 그는 최고급 카페에서 밴드의 보컬리스트와 밴조이스트로 일했고, 곧 그 일대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그는 캘커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공연할 수 있는 1년 계약을 제안받았다. 이 계약으로 보울리는 매우 좋은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보울리는 이 직업마저도 잃게 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그가 상습적인 도박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유혹을 결코 뿌리치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다혈질의 싸움꾼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이런 두 가지 성향은 서로 맞물려서, 그는 도박판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항상 너클을 소지하고 다녔고, 이런저런 싸움에 자주 휘말렸다.
결국 그가 쌈박질로 인해 일자리를 잃었을 때, 그에게는 모아놓은 돈도 많지 않았다. 이 1925년의 짧은 시기, 그는 잠시 음악계에서 벗어나 경마에 크게 관심을 가졌다. 보울리는 스스로 기수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경마로 돈을 좀 벌어보려고 시도했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는 경마장에서 정지 신호판을 가져다가 말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1926년 4월, 지미 르큄(Jimmy Lequime)이 이끄는 호화로운 재즈 오케스트라가 캘커타에 도착했다. 지미 르큄의 밴드는 이미 상하이의 나이트클럽에서 큰 성공을 거둔 뒤였고, 이제 캘커타의 그랜드 호텔 무도회장에서 공연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은 젊은 기수, 혹은 청년 백수였던 알 보울리의 귀에도 들어갔다. 지미 르큄 오케스트라의 피아니스트였던 모니아 리터(Monia Liter)는 이렇게 회상한다.
"한 젊은 남자가 우리가 연습 중인 무도회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지만 체격이 다부졌습니다. 그가 독특했던 점은, 기수(jockey)처럼 옷을 입고 있었고 채찍 대신 밴조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밴조를 든 기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놀랐습니다.
우리가 연습을 멈췄을 때, 그는 무대로 올라와 오케스트라의 리더에게 말했습니다. Jimmy가 무대에서 내려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Jimmy는 오케스트라로 돌아와 말했습니다. "Whisperin'[5]의 코드를 맞춰보세요."
그는 의자에 앉아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정말 잘했습니다! 그때 Lequime은 말했습니다, "합격." 그리고 그것이 내가 처음 알 보울리를 만난 방식입니다."
우리가 연습을 멈췄을 때, 그는 무대로 올라와 오케스트라의 리더에게 말했습니다. Jimmy가 무대에서 내려와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Jimmy는 오케스트라로 돌아와 말했습니다. "Whisperin'[5]의 코드를 맞춰보세요."
그는 의자에 앉아 밴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정말 잘했습니다! 그때 Lequime은 말했습니다, "합격." 그리고 그것이 내가 처음 알 보울리를 만난 방식입니다."
오디션에서 보울리의 밴조 연주는 호평을 받았지만 의외로 노래 실력에 대해서는 시시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밴드에서 보울리는 밴조 연주만 맡았지만 가끔은 공연에서 노래를 할 기회를 얻기도 했다. 르큄 밴드는 곧 캘커타와 주변 일대에서 몹시 유명해졌다. 이 시기 르큄 밴드는 녹음실에서 2곡의 음반을 녹음했는데, 이 음반은 인도 최초의 재즈 음반으로 여겨진다. 음반에는 보컬 대신 밴조 연주만 녹음되었으나, 이것은 보울리가 생애 최초로 참가한 녹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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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캘커타 동물원에서의 지미 르큄 밴드 |
이후 르큄 밴드는 싱가폴의 명성 있는 래플스 호텔에서 영구적인 계약을 제안받았다. 지미 르큄은 그 계약을 수락했고 밴드는 싱가폴로 이동했다. 그런데 래플스 호텔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밴드에서는 해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모니아 리터는 보울리에게 유럽으로 가볼 것을 권유했다. 두 사람은 이미 절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으므로 보울리는 모니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때는 1927년이었다. 알 보울리는 이미 유럽에 있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 누군가는 바로 에드가 아델러였다.
2.3. 유럽으로
To Eddie from Al, 9. 4. 1927
이렇게 편지를 마치며, 알 보울리는 자신의 사진까지 동봉해서 보냈다. 그는 아델러에게 정중하게 접근했고, 둘 사이를 멀어지게 했던 자신의 옛 태도에 대해 반성했다.보울리가 편지를 썼을 때, 아델러는 독일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마침 3개월동안 뮌헨의 호텔에서 공연할 7인조 밴드를 구성 중이었다. 이미 여섯 사람은 구해진 상태였고, 나머지 한 사람의 역할은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가 될 예정이었다. 이때 마침 알 보울리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그는 보컬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능숙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다.
따라서 아델러는 보울리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밴드의 첫 공연은 같은 해 5월 15일에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는 즉시 전보를 보내 보울리에게 지금 바로 싱가폴을 떠나 뮌헨의 밴드에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아델러는 추가적으로 편지를 보내 배편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세부사항들을 적어놓고, 여비 10파운드[6]를 동봉했다.
하지만 약속된 날짜가 됐음에도 보울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델러는 다시 한 번 크게 실망했고, 결국 밴드는 멤버 하나가 빠진 채로 공연을 해야 했다.
밴드가 공연을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델러는 길거리에서 한 부랑자를 마주치게 된다. 그는 몹시 지쳐보았고 오랫동안 굶주린 것 같았다. 부랑자가 그를 바라보았을 때, 아델러는 너무 놀라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결국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자 보울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마르세유에 도착했지만, 우편국에서 당신의 편지를 찾을 수 없었어요. 여러 번 철저한 검색을 거듭한 끝에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당신에게 전달된 편지가 없습니다!'"[7]
나머지 이야기는 이렇다. 돈 한푼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땅에 남겨진 보울리는 남아프리카 대사관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다행히도 파리로 향하는 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파리에 도착한 후 뮌헨까지 가는 동안은 히치하이킹을 해야 했다. 물론 그 과정은 개고생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것이었다.
아델러는 즉시 보울리에게 새 옷을 장만해주고, 그를 밴드 리허설에 데리고 갔다. 그 자리에서 아델러는 보울리의 실력이 지난 3년간 매우 발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알 보울리의 유럽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1923년에 남아공을 떠난 후 4년간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떠돌다가 드디어 유럽에 안착한 것이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보울리의 아버지는 1927년 6월 24일,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같은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였던 돈 바리고(Don Barrigo)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날 밤 무대에서는 웃음도, 즐거움도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 알을 위해 어느 정도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연습 시간 내내 계속 흘러내렸고, 저는 그에게 그날은 재즈를 연주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보울리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연주하세요. 제가 곁에 있을게요.' 그의 눈물은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 일부 합창곡에서 그를 위해 연주했고, 그의 감정이 느껴지면서 제 상상력은 그야말로 폭발했습니다."
뮌헨 밴드는 약속된 3개월의 계약 기간이 끝난 후 8월에 해체되었다. 보울리와 돈 바리고는 그동안 같은 방을 쓰면서 친해졌고, 아델러를 따라서 베를린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1927년 8월 18일, 보울리는 아델러가 베를린에서 구성한 작은 밴드와 함께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Blue Skies'와 'Say Mister! (Have You Met Rosie?)'를 녹음했다. 이는 알 보울리의 보컬이 녹음된 최초의 음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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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울리와 아델러, 베를린에서 |
이후 그는 아델러가 아닌 다른 밴드와도 음반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동안 그는 여러 곡을 녹음했고, 보울리의 명성은 베를린에서 점차 높아져갔다.
한편 이 시기, 아델러는 다시 전보 한통을 받았다. 그것은 인도 캘커타의 유명한 레스토랑 Firpo's에서 온 것이었는데 내용인즉, 7인조 밴드와 1년 계약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델러는 그 제안을 매력적이라고 생각했고 '알 보울리를 데려가겠다'고 회신을 보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다.
보울리를 데려오지 마시오(Don't Bring Bowlly)
이는 캘커타에서 보울리의 평판이 여전히 좋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하지만 아델러에게 그 제안은 거부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결국 1927년 12월 캘커타로 떠난다. 이로서 보울리와 아델러는 또 다시 각자의 갈길을 떠났다.
보울리는 1928년에도 베를린에 남아 있었다. 베를린에서 그는 떠오르는 재즈 스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1928년 초, 그는 영국으로부터 옛 친구인 렌 필리스(Len Fillis)의 편지를 받았다. 여기서 잠깐. 렌 필리스가 누구였더라? 혹시 1923년 아델러 밴드가 남아공을 떠나 투어를 시작했을 때, 약혼녀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던 그 친구 아닌가? 맞다. 렌 필리스는 1923년 영국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기타리스트로서 경력을 쌓으며 이미 유명한 기타리스트로 실력을 인정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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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렌 필리스 |
옛 친구의 편지는 보울리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만한 것이었다. 편지에서는 런던의 사보이 호텔(Savoy Hotel)[8]의 밴드리더 프레드 엘리잘데(Fred Elizalde)가 밴드에 가수를 필요로 한다고 적혀 있었다. 렌 필리스는 이에 덧붙여, 만약 보울리가 사보이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 직업을 얻는다면, 그의 모든 꿈이 실현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고, 보울리는 사보이의 밴드리더 엘리자데에게 보낼 자신의 오디션 음반으로 <Muddy Water>를 선택했다.
이 음반을 들은 엘리자데는 보울리에게 주급 14파운드를 제안하며 그를 고용할 의사를 비쳐왔다. 그런데 14파운드는 사실 그가 베를린에서 버는 주급보다 낮은 것이었다. 따라서 보울리는 본연의 도박사적 기질을 좀 발휘해보기로 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엘리자데에게 주급을 더 높여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다행히도 엘리자데는 이를 수긍했고, 심지어 보울리에게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올 경비 20파운드를 선급금으로 지불했다.[9]
2.4. 영국으로 향하다
알 보울리가 프레드 엘리자데와 최초로 녹음한 곡은 <Just Imagine>이었다.[10] 이 음반에 대해 음악 매거진 <Melody Maker>에서는 이렇게 호평했다.
Al Bowlly는 진정한 스타입니다. 그는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부드러운 레가토 리듬 스타일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그가 '핫'하게 노래를 부를 때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엘리자드 밴드와 함께 그는 그의 첫 영국 녹음을 막 마쳤습니다.
프레드 엘리자데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의 수재였고, 재즈에 관해서라면 한마디로 천재였다. 따라서 그의 밴드는 당시 영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밴드였고, 구성원들 또한 영국에서 가장 촉망받는 인재들이었다. 이러한 밴드의 일원으로서 알 보울리는 여러 권위 있는 장소에서 공연을 하며 경력을 쌓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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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드 엘리잘데 밴드, 하프 뒤의 알 보울리 |
또한 BBC 라디오를 통해 라이브로 청중들에게 다가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 방송에서는 당시의 음질 문제로 알 보울리의 보컬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당시의 한 잡지에서는 이를 두고,
Al Bowlly는 방송에서 끔찍하게 들린다. 이를 표현할 다른 말은 없다. 그의 음정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리며, 마치 입에 뜨거운 자두를 가득 물고 있는 것 같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이것은 방송 음질의 문제로 인한 것이었고, 그의 보컬 재능은 다른 밴드리더들에게도 인정을 받아서 미국의 밴드리더 반 필립스(Van Phillips)는 그를 컬럼비아 레코드로 초청해 함께 음반을 내기도 했다. 이때 녹음된 곡 <Sometimes>는 탁월한 음질을 바탕으로 보울리의 목소리를 잘 담아내, 그의 자질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곡에 대한 당시 잡지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그를 라디오를 통해서만 들은 사람들은 그를 형편없는 보컬리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는 훌륭한 가수이며, 당신이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이 음반을 들어보라.
1928년이 끝나고 1929년이 시작되자 밴드에서는 변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윤곽은 같은 해 여름이 되자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성격이 급한 프레드 엘리자데는 사보이 호텔 경영진과 음악 스타일 문제로 자주 충돌했다. 엘리잘데는 주로 템포가 빠른 핫뮤직(Hot Music)을 선호했으나, 사보이 측에서는 부드러운 음악(Sweet Music)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영국 노동부가 미국 색소폰 연주자 Fud Livingstone의 작업 허가증 갱신을 거부한 점도 문제가 되었다. 밴드의 다른 미국인 구성원들의 허가증도 연말까지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사보이 경영진은 더 이상 엘리자데의 지시에 따르길 원치 않았다. 결국 엘리자데와 사보이 호텔의 계약은 1929년 7월 31일 만료되었으며, 갱신되지 않았다.
엘리자데와 사보이 간의 계약이 끝난 후에도 밴드는 몇 개월간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었으나, 간헐적인 투어를 제외하고는 별 다른 활동이 없었다. 특히 1929년에 들어서 음반 녹음은 4월 이후로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연말이 되자 엘리자데는 자신의 다른 사업을 위해 밴드를 해산하고 멤버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엘리자데 밴드와 알 보울리는 1929년 12월 4일, 함께 마지막으로 <After The Sun Kissed The World Good-Bye>를 녹음했다.
1929년의 겨울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유난히도 추웠던 겨울로 기억된다. 알 보울리에게 돈이란 쉽게 왔다가 쉽게 가는 것이었다. 위에서 계속 언급했듯이 그는 절제할 수 없는 도박광이었고, 그의 인생 모토는 '오늘을 살자'였다.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와의 동행이 끝났을 때, 놀랍게도 그에게는 모아둔 돈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한동안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며 행인들의 적선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1938년의 인터뷰에서 알 보울리는 이 시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매일 아침 모퉁이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부드럽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때때로 동정의 한마디가 동전 한두 푼과 함께 주어지곤 했죠. 하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봐 내가 코트 깃을 귀 위까지 여몄기 때문이죠."
1929년의 상황에 대해 한가지 더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가 휘청거리기 시작하는 동안에도 보울리는 어쨌든 계속 음반을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친구 렌 필리스 덕분이었다. 뛰어난 기타리스트였던 필리스는 1929년이 되자 엘리자데 밴드에서 나와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었다. 그것은 단지 기타 둘에 바이올린 하나, 혹은 거기에 피아노만 추가된 소규모 밴드였지만 필리스는 계속 보울리를 포함시켰다. 결과적으로 1929년에 보울리가 낸 음반의 절대 다수는 렌 필리스와의 협업에서 나온 것이었다. 영국 활동 초기 보울리의 진정한 구원자는 오랜 친구 렌 필리스였던 것이다.
2.5. 듀엣 활동
1930년대가 시작되었을 때도 여전히 보울리의 주요 일자리는 렌 필리스와의 협업이었다. 이 시기 필리스에게는 두 가지 관심사가 있었는데, 하나는 자신의 경력을 색다른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알 보울리의 목소리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법을 찾는 것이었다.전자의 이유로 필리스는 'The Blue Boys'라는 이름의 그룹을 결성했다. 그룹의 주요 목적은 뮤지컬 공연이었다. 당연하게도, 필리스는 이 그룹에 알 보울리를 포함시켰고, 자신의 동료였던 알 스타리타(Al Starita)도 초청했다. 또한 피아니스트 한 명도 영입했는데, 그는 바로 최근에 런던에 도착한 에드가 아델러였다. 이렇게 해서 4인조가 결성되었다. 이 그룹의 결성에 대해 음악 잡지 Melody Maker는 이렇게 보도했다.
"공정한 기회를 주면 Al은 노래를 부를 수 있다" (AL CAN SING, given a fair opportunity)
이 문장은 비록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에서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당시 알 보울리보다는 그룹의 다른 멤버였던 렌 필리스와 알 스타리타가 더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The Blue Boys'는 비록 폭발적인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성공적이었고, 몇 편의 단편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때도 기사에서는,
"알 스타리타는 그의 '소년들'의 도움을 받아 두 개의 작품에 등장합니다."
라고 보도하며 멤버들 중 알 스타리타의 이름을 유일하게 강조했다.
'The Blue Boys'의 활동은 약 한 달 정도 지속되었고, 이후 불미스러운 일로 해체되었다. 그 상황에 대해 에드가 아델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알 스타리타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었고, 알 보울리는 레바논 혈통의 남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약간의 대륙성의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죠. 이러한 두 극단적인 인물이 충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두 개의 분장실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는 보울리와 저를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타리타와 필리스를 위한 것이었죠. 이는 마법처럼 잘 작동했지만, 결국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공연에서, 렌 필리스가 급히 분장실로 뛰어들며 이렇게 말했죠. '에드가, 빨리 와! 두 Al 사이에 문제가 있어!' 그리고 우리는 알 스타리타가 소다수병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보울리가 나이프로 상대의 목을 노리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그들을 떼어놓았지만, 그 사건으로 Blue Boys는 끝났습니다.
어느 날 공연에서, 렌 필리스가 급히 분장실로 뛰어들며 이렇게 말했죠. '에드가, 빨리 와! 두 Al 사이에 문제가 있어!' 그리고 우리는 알 스타리타가 소다수병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보울리가 나이프로 상대의 목을 노리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간신히 그들을 떼어놓았지만, 그 사건으로 Blue Boys는 끝났습니다.
'The Blue Boys'는 끝장났고, 에드가 아델러는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필리스는 여전히 보울리와 함께 일했다. 뮤지컬 그룹이 끝장난 것과는 별개로, 필리스는 자신의 밴드에서 보울리의 목소리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는데 바로 보울리를 캐나다 출신의 음악가 레스 알렌(Les Allen)과 듀엣으로 붙이는 것이었다. 레스 알렌은 원래 알프레도(Alfredo) 밴드와 해리 허드슨(Harry Hudson) 밴드의 색소폰 연주자였지만, 보컬리스트로서도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필리스는 둘의 목소리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즉시 레스 알렌을 밴드로 초청해 알 보울리와 함께 노래하게 했다.
이는 두 사람에게도 윈윈이었다. 이로써 알렌은 원하던 바 보컬리스트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힐 수 있게 되었고, 보울리 역시 알렌이 소속되어 있던 밴드들과 함께 녹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폴 화이트먼(Paul Whiteman) 밴드의 '리듬 보이즈'[11]가 성공을 거두면서 영국에서도 남성 보컬의 화음이 유행을 타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듀엣 활동은 유행에도 부합하는 일이었다.
이 해에 보울리는 다른 댄스 밴드들에서도 프리랜서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성공적인 활동은 레스 알렌과의 듀엣이었다. 두 사람의 협업은 1931년 중반까지 계속되었다.[12]
2.6. 전성기의 서막
렌 필리스, 그리고 레스 알렌과의 활동은 보울리에게 많은 일거리를 제공했지만 큰 돈벌이가 되지는 못했다. 더구나 상기했다시피 그의 '오늘만 사는' 성격 탓에 그는 만성적인 경제적 부족에 시달렸다. 실제로 그해 8월, 보울리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선물을 살 여유가 없었다. 대신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 그는 밴드 스탠드에 올라가 리셉션에서 몇 곡을 불렀다.그러던 중 그에게 색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HMV, 데카, 컬럼비아 레코드 같은 유명 음반사들은 아프리카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는데, 특히 HMV에서는 현지인들을 사로잡는 인기 음반 시리즈를 새롭게 출시하기로 결정했다. 모잠비크 마푸투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알 보울리는 이 일의 적임자 중의 적임자로 보였다.
HMV는 보울리와 계약을 맺었고, 그해 6월에 음반 녹음을 진행했다. 결론적으로 음반은 망해도 폭삭 망했다. 보울리에게 지급된 로열티를 계산했을 때, 각 음반은 200장 이하로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HMV는 프로젝트를 다른 가수와 진행하기로 했다.
이 일은 그때까지 보울리가 음악적으로 겪은 가장 실망스러운 실패였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관계자들 중 몇 사람은 보울리의 능력에 대해서 여전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아프리카 음반의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았던 인물이었고, 동시에 HMV 하우스 밴드의 감독이기도 했다. 따라서 다음 달인 7월에 그는 알 보울리를 데리고, 아프리카와는 상관없는 3곡을 새로 녹음했다. 하지만 HMV에서는 또 다시 이 작업물들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그는 또 다시 보울리를 자신의 오케스트라로 초청해 2곡을 더 녹음했다. 곡의 제목은 각각 <I'm Telling The World She's Mine>과 <How Could I Be Lonely?>였다. 다행히 이번 녹음은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물은 HMV는 물론 그에게 계속 기회를 주었던 밴드리더, 레이 노블(Ray Noble)에게도 큰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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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 노블(Ray Noble) |
이 음반에 대해 음악 잡지 Melody Maker에서는 이렇게 평가했다.
...Al Bowlly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나라 최고의 스타일 가수임을 증명합니다. 그의 프레이징, 발음, 억양은 탁월하며, 그의 해석에 담긴 개성이 정말 놀랍습니다.
역사가 말해주듯, 이후 알 보울리와 레이 노블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영혼의 단짝이 되었다. 커리어를 통틀어 두 사람은 함께 500여 곡 정도를 녹음했는데, <I'm Telling The World She's Mine>은 이 음악사에 길이 남을 듀오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적인 최초의 곡이었으며, 동시에 보울리의 전성기를 여는 서막이기도 했다.
레이 노블과의 성공적인 녹음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이번에 일거리를 물고 온 것은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드러머 빌 하티(Bill Harty)였다. 그는 당시 로이 폭스(Roy Fox) 밴드에서도 일하고 있었는데, 로이 폭스는 영국에 건너온 지 몇 개월 되지 않은 미국 출신의 밴드리더였다. 레이 노블의 오케스트라가 단지 스튜디오 녹음만을 위해 결성된 그룹이었던 반면, 로이 폭스는 자신의 밴드를 스튜디오 녹음은 물론 저녁마다 무대에서 정규적으로 공연하는 밴드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다.
비록 레이 노블에게서 계속 기회를 받긴 했지만 여전히 그것은 프리랜서 작업이었기에 보울리에게는 정규적인 일자리가 필요했다. 빌 하티의 주선으로 로이 폭스와 만난 자리에서 보울리는 몇 주 전 레이 노블과 성공적으로 녹음했던 음반을 건네며 이것을 들어달라고 요청했다. 폭스는 음반의 양쪽 면을 듣고 난 후 다시 연락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보울리는 폭스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겨주고 싶었고, 몇 푼 남지 않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근처 레스토랑에서 로이 폭스 부부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도 그는 밴드의 연습 장소까지 따라갔고, 그곳에서 밴드 멤버들과 즉석에서 재즈 몇 곡을 공연했다. 이후 그가 자리로 돌아왔을 때 폭스는 말했다. "좋아, 당신은 일자리를 얻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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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이 폭스 오케스트라, 중앙에 기타를 들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알 보울리 |
폭스와 보울리의 첫 녹음은 다음 해인 1931년 1월 5일에 이루어졌다. 곡명은 <Memories Of You>, <You're Lucky To Me> 그리고 <Thank Your Father>. 비록 처음 계획과 달리 로이 폭스는 그해 봄이 될 때까지도 밴드가 정규적으로 연주할 무대를 찾지 못했지만, 곧 피카델리의 고급 레스토랑 <몽시뇨르(The Monseigneur)>와 정규 계약을 맺게 되었다. 이제 몽시뇨르 레스토랑의 밴드 리더가 된 로이 폭스는 알 보울리에게 밴드 계약과는 별개의 개인적인 6개월의 계약을 제안했는데, 6개월 단위로 연장할 수 있는 이 계약은 로이 폭스가 알 보울리를 자신의 귀중한 자원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알 보울리의 전성기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몽시뇨르 레스토랑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주인이 친구들을 접대하기 위해 열었던 곳이었다. 따라서 인테리어는 매우 화려했고,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스토랑의 주인은 최고의 아티스트와 음악가들을 고용했으며, 환대는 호화로웠다.
| 몽시뇨르 레스토랑 |
이에 부응하듯 폭스 역시 최고의 음악가들만을 고용했다. 곧 몽시뇨르 레스토랑은 로이 폭스 밴드와 함께 런던 밤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당시 폭스의 밴드에 소속되어 있던 많은 음악가들이 이후 자신만의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13] 밴드 연주의 뛰어난 퀄리티는 그곳에 춤을 추러 온 사람들을 매료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단연 알 보울리였다.
당시에 대해 로이 폭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당시 밴드리더들은 영화 배우와 비견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클럽에서 가장 큰 매력이었고, 춤을 추며 지나가는 여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밴드리더에게 끌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 알 보울리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두 번의 흘긋거림만으로도 말이죠. 사실, 밴드리더와 보컬리스트 중 누가 더 주목받는지 선택해야 했다면, 대부분의 경우 알이 승리했을 겁니다! 그는 잘생겼고, 멋진 미소와 좋은 치아, 그리고 매우 좋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성들과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밴드는 점점 유명해졌고, 로이 폭스는 밴드의 활동을 몽시뇨르 레스토랑을 넘어 확장시키길 원했다. 곧 밴드는 매주 화요일 밤마다 정기적으로 BBC 라디오에 출연했고, 다른 공연장에서 투어를 갖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알 보울리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더욱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제 알 보울리는 정규적인 일자리를 갖게 되었으며, 로이 폭스 밴드에서 활동이 없을 때면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나 그의 보컬을 녹음하길 원하는 다른 밴드들과 함께 프리랜서로 일했다. 결론적으로, 1931년은 보울리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음반 녹음을 기록한 해로 남았다. 이 해에 그는 약 200곡 이상을 녹음했다. 동시에, 그는 영국 최고의 밴드 가수 중 하나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2.7. 분쟁들
1931년 11월, 로이 폭스는 흉막염에 걸렸고, 의사는 그에게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로이 폭스는 다음 해 봄까지 스위스에서 요양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류 스톤(Lew Stone)에게 그동안 밴드의 지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류 스톤은 로이 폭스 밴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주요 편곡자로서 밴드 멤버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었을 뿐 아니라, 평론가들로부터도 밴드를 발전시킨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
| 류 스톤(Lew Stone) |
류 스톤 임시 체제 하에서도 밴드는 잘 돌아갔다. 몽시뇨르 레스토랑에서의 공연이 끝나면 밴드 멤버들은 각자 어울려 늦은 새벽까지도 영업을 하는 클럽이나 카페로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12월의 어느 밤에도 보울리는 그런 식으로 멤버들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그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고,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보울리는 자신의 동료 냇 고넬라에게 그 여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고넬라는 대답했다. "소개해줄까?"
그 여자의 이름은 프레다 로버츠(Freda Roberts)였고, 19세의 무도회장 접대부였다. 고넬라는 물론 밴드 멤버들 중 그 누구도 보울리가 그녀와 진지한 관계를 이어나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의 인기로 따졌을 때, 그는 얼마든지 좋은 여자를 골라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보울리는 프레다에게 푹 빠졌고, 첫 만남으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밴드 멤버들에게 그녀와 결혼했음을 발표했다. 당연히, 모든 밴드 멤버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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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다 로버츠와 알 보울리, 결혼 당일에 |
그러나 결혼 생활은 얼마 지속되지 못했다. 결혼 얼마 뒤 보울리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발견한 것은 그의 어린 신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었다. 이 일은 보울리 본인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부부는 즉시 별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혼 절차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1년여 뒤였다.
이혼 소송은 1932년 11월에 시작되었는데, 놀랍게도 상대방을 간통 혐의로 고소한 것은 보울리가 아닌 프레다였다. 프레다는 공동피고인[14]으로 마가릿 페어리스(Magret Fairless)[15]를 지목하며, 별거 기간동안 보울리가 그녀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고 주장했다. 소송은 1934년 1월에야 마무리 되었다.
다시 1932년으로 돌아가자. 그해 봄, 스위스로 요양을 떠났던 로이 폭스가 밴드로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멤버들은 그를 크게 그리워하지 않았다. 왜냐면 류 스톤은 친근하고 편안한 성격 덕분에 밴드 멤버들과 허물없이 지낸 반면 로이 폭스는 언제나 멤버들과 거리감을 유지하는 차가운 보스였기 때문이다. 로이 폭스가 자리를 비운 사이 류 스톤과 멤버들 사이에서는 전에 없던 유대감이 피어나고 있었다.
긴 휴식에서 돌아온 로이 폭스는 열의에 가득 차 있었고, 전보다 더 열심히 일했으며,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가 시도한 것들 중 하나는 보드빌 공연이었다. 그것은 성공적이었지만, 몬시뇨르 레스토랑의 주인은 폭스가 이른바 외도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밴드의 공연에도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스 역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몬시뇨르와 폭스 밴드 사이의 계약은 갱신되지 않았다. 이제 몬시느료 레스토랑은 새로운 밴드를 찾기 시작했는데, 그 지역의 모든 밴드를 뒤져보다가 유일한 적임자를 발견했으니 다름 아닌 류 스톤이었다. 스톤은 약간 머뭇거렸으나 곧 그 제안에 응했다. 대신 다른 멤버들은(알 보울리를 포함) 여전히 로이 폭스와의 계약에 묶여 있었기에 그들을 대신할 새로운 멤버들을 구해야 했다.
류 스톤은 밴드 멤버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떠나게 되었음을 밝혔다. 그러자 로이 폭스 밴드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보울리를 포함한 밴드 멤버들은 스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매우 선호했기에, 그를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폭스가 자신들을 법정에 세운다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밴드 멤버들 중 여전히 로이 폭스를 따르겠다고 말한 멤버는 한 명밖에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폭스는 당연하게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은 자신이 밴드를 잃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양보하지 못할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알 보울리였다. 다른 멤버들과 달리 보울리는 로이 폭스와 개인 계약으로도 묶여 있는 상태였다.
곧 보울리와 폭스 사이의 법적 분쟁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폭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1932년 10월 22일, 보울리에게 "로이 폭스와의 계약 기간 동안 폭스의 지시 없이 어떤 시설에서도 연주하거나 공연하는 것을 금지"하는 임시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이틀 뒤인 10월 24일, 류 스톤 밴드가 몽시뇨르 레스토랑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 보울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하루 뒤인 10월 25일에 로이 폭스가 법원에 신청한 임시 명령의 연장은 다른 판사에 의해 기각되었다. 기각의 이유는 '폭스와 보울리 간의 계약은 몽시뇨르 레스토랑이라는 특정한 공연장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폭스는 항소했고 사건은 상급심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상급심에서 폭스 측은 오케스트라의 다른 연주자는 대체할 수 있어도 보울리의 독특한 목소리는 대체할 수 없기에 사람들이 폭스의 이름을 들으면 보울리를 떠올리고, 보울리의 이름을 들으면 폭스를 기대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둘 사이의 계약에서 공연 장소를 결정하는 권한이 폭스에게 있기에 만약 폭스가 몽시뇨르 공연장을 떠나게 되면 보울리 역시 공연장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종 판결은 11월 1일까지 미뤄졌고, 그동안 보울리는 류 스톤 밴드와 함께 공연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결국 11월 1일에 법원은 폭스의 금지 명령 연장 요청을 공식적으로 기각했다. 법원은 계약이 몽시뇨르에 국한되었고, 폭스가 더 이상 해당 공연장과 관련이 없으므로 계약은 무효가 된다고 판결했다.
2.8. 영국의 빙 크로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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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 스톤 밴드, 중앙의 기타리스트가 알 보울리 |
1932년 10월 25일부터 보울리는 몬시뇨르 레스토랑에서 류 스톤 밴드와 함께 공연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듯 류 스톤은 로이 폭스의 휘하에 있었을 때부터 뛰어난 편곡자였으며,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류 스톤 밴드의 분위기는 학교 친구들이 만든 것처럼 화기애애했으나 수준은 여전히 일류급이었다.
류 스톤은 다른 밴드리더들에 비해 보울리를 여러모로 배려해주었는데, 곡을 편곡할 때면 최대한 보울리의 음역대를 고려하여 편곡했고, 음반 녹음을 할 때는 보울리가 보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원래는 그가 병행하던 기타 연주를 다른 멤버에게 배정했다.
그 결과, 보울리의 크루너로서의 역량과 명성은 절정에 다다랐다. 로이 폭스 밴드 시절에도 이미 영국 최고의 가수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류 스톤 밴드와의 활동이 무르익은 1933년 즈음부터 그는 최고 중 하나를 넘어 독보적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33년 2월 27일자 News Chronicle은 보울리에 대해 ‘이 나라(영국) 최고의 크루너’라고 평가했다.
밴드가 순회공연을 다닐 때면 광고문에 가장 크게 적힌 이름은 알 보울리였으며, 그가 무대에 등장하면 공연장은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특히 그가 자신의 대표곡들을 부를 때면 흥분한 관중들로 인해 쇼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1933년 9월에는 첫 단독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1933년 9월 11일 월요일 밤, Holborn Empire가 문을 닫고 30분이 지난 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약 100명 이상의 사람들, 대부분 여성이 Al Bowlly의 사인을 받기 위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는 모래통 위에서 어쩔 수 없이 사인을 했습니다. 그는 방금 무대에서 개인적인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처음으로 솔로 공연 아티스트로 출연했습니다.
영국에서의 경력이 절정에 이르자, 보울리의 라이벌로 이제는 당시 미국 최고의 가수였던 빙 크로스비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1933년 12월 2일 Daily Mirror에 실린 광고에서는 보울리를 ‘영국의 빙 크로스비’라고 소개했으며, 같은 해에 제작된 <America Calling>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보울리는 ‘Bing Crosby'를 패러디한 ‘Bang Horseby'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이 시기의 보울리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빙 크로스비에 대한 영국의 대답’이었는데, 이는 우리도 이제 빙 크로스비 못지않은 스타를 가지게 되었다는 영국의 음악 애호가들의 자부심이 담긴 표현이었다.
이러한 영국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보울리는 남아공에 있던 어머니를 영국에 초대할 수 있었으며, 이혼의 아픔으로부터도 벗어나 아름답고 젊은 애인과 다시 사귀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 친구와도 재회하게 되었다. 그 친구란 보울리가 싱가폴에 있었던 시절 그에게 영국으로 갈 것을 조언했던 피아니스트 모니아 리터(Monia Liter)였다. 이번에는 보울리의 제안에 의해 모니아가 영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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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니아 리터(Monia Liter) |
모니아는 보울리가 단독 공연을 가졌을 때 옆에서 피아노 반주를 넣기도 했고, 그와 함께 다수의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모니아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는 일관적이었다. 매우 재능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 하지만 모니아가 보울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그가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이기에 앞서 보울리의 몇 없는 진정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2.9. 미국으로 향하다
언급해둬야 할 중요한 사실은 레이 노블과의 작업은 1930년 이래 꾸준히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계약상의 조건 때문에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음반에는 보울리의 이름이 적히지 않았고, 단지 Vocal Refrain(보컬 후렴 포함)으로 표시되었기 때문에 영국 대중들에게 알 보울리는 레이 노블보다는 류 스톤 밴드의 보컬리스트로서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음악 비평가들이나 애호가들은 이미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보컬리스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영국 내수용으로 최강이던 류 스톤 밴드와 달리,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음반은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인도, 나아가 미국에서도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이미 1931년 <Lady Of Spain>이 미국 음반 차트에서 5위를 기록하였고, 다음해에는 3곡[16]이 나란히 5위에 올랐다. 1933년에는 마침내 <Love Is the Sweetest Thing>과 <The Old Spinning Wheel> 두 곡이 차트 1위를 기록하더니, 1934년에는 <Isle Of Capri>와 <The Very Thought Of You>가 차트 1위에, 앞의 두 곡을 포함해 총 9곡이 차트 내에 올랐다.
이렇게 레이 노블의 이름이 미국에 알려지고 있을 때, 뉴욕에서는 커다란 사업 하나가 진행되고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있는 록펠러 센터 건물 65층 꼭대기에 초대형 나이트클럽이 문을 열기로 한 것이다. 이 나이트클럽은 어디 길거리 레스토랑이나 나이트클럽이 아니라 정말 격식 있는 상류층 손님들을 대상으로 영업하고자 하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할 밴드도 그에 걸맞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야 했다. 점잖은 이미지를 가졌으며, 연주하는 음악도 품격 있고, 웬만하면 상업적 명성에 너무 물들지도 않은 다소 신비스러운... 그런 밴드를 찾으라는 까다로운 특명이 에이전시에게 내려졌다. 그런 그들에게 키 크고 호리호리한 금발의 영국 신사 레이 노블은 마치 신이 보내준 선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다 떠나서 그의 이름부터가 노블(Noble)이었다.
1934년 8월, 에이전시에서는 바로 노블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넣었다. 그 제안이란,
1. 클럽 고정 출연: 레인보우 룸의 간판 스타 자리를 보장.
2. 전국구 라디오 방송: 록펠러 센터 안에 있던 NBC 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오케스트라 연주 방송
3. 메이저 음반 계약: RCA-빅터와도 계약
이었다.2. 전국구 라디오 방송: 록펠러 센터 안에 있던 NBC 방송국을 통해 전국에 오케스트라 연주 방송
3. 메이저 음반 계약: RCA-빅터와도 계약
레이 노블은 자신이 지금 인생 최고의 제안을 받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곧장 미국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의 미국 진출 계획에는 알 보울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두말할 것 없이 알 보울리는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알파와 오메가였기 때문이다. 레이 노블은 미국 진출 계획에 대해 알 보울리에게 알렸고, 알 보울리는 자신이 지금 인생 최고의 제안을 받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보울리는 바로 류 스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스톤은 2년 전에 로이 폭스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자신도 보울리를 잃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 보울리가 미국에 간다는 소식이 퍼지자 런던의 매거진들은 일제히 이 사실을 보도했다. 그 중 모리스 앨윈이라는 인물이 '리듬'이라는 잡지에 게시한 글을 싣자면,
"알 보울리가 미국에 간다는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사실, 잠재적인 흥행 거물을 영국 연예계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게 놔두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스코틀랜드인 특유의 가치관으로 볼 때, 알 보울리를 잃는 것은 훌륭한 사업 기회를 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알을 스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단언컨대 그는 이 나라에서 한 번도 제대로 활용된 적이 없다. BBC는 그를 그저 루 스톤과 함께 노래하는 친구, 즉 '크루너(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아티스트로서 BBC는 자신들과 알 보울리의 공동 이익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우리나라 모든 크루너 중 가장 인기 있는 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진정한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다. BBC는 그가 노래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의심스럽다. 우리 '비즈니스' 연예계 인사 중 누구도, 이미 수백만 명의 팬을 확보하고 매력과 개성이 넘치는 준비된 스타인 알 보울리가 큰돈이 될 것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라디오, 무대, 영화에 딱 맞는 방식으로 다뤄지기만을 기다리는 알이 여기 있었는데, 너무 늦을 때까지 아무도 큰돈을 벌 기회를 보지 못했다.
내가 정말 강조해서 말하건대, 나한테 그럴 돈만 있었다면 절대 알 보울리를 미국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국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활용해서 돈을 벌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제대로 연출만 되었다면 보울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것이다. 그의 평소 몸가짐과 외모는 특히 이런 유형의 작업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를 만나면 절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놀란다. 알의 큰 매력은 어린아이 같은 진솔함에 있다. 때로는 다루기 힘든 상대일 수 있지만, 그는 항상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 그는 다툼을 혐오하며 친구들에게는 애정을 아끼지 않는다. 보울리는 몽상가이지만,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종류의 몽상가이며, 그것이 바로 그가 미국으로 가는 이유다. 영국이 알 보울리를 인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스타덤'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내가 정말 강조해서 말하건대, 나한테 그럴 돈만 있었다면 절대 알 보울리를 미국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영국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활용해서 돈을 벌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제대로 연출만 되었다면 보울리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을 것이다. 그의 평소 몸가짐과 외모는 특히 이런 유형의 작업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팬들은 그를 만나면 절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분 좋게 놀란다. 알의 큰 매력은 어린아이 같은 진솔함에 있다. 때로는 다루기 힘든 상대일 수 있지만, 그는 항상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 그는 다툼을 혐오하며 친구들에게는 애정을 아끼지 않는다. 보울리는 몽상가이지만, 그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종류의 몽상가이며, 그것이 바로 그가 미국으로 가는 이유다. 영국이 알 보울리를 인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스타덤'을 찾기 위해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일이 좀 순조롭게 진행되려나 했더니,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바로 '미국 음악가 연맹(AFM)'에서 이 계약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레이 노블은 급하게 자신의 드러머이자 오른팔 빌 하티를 미국으로 보내 그들의 얘기를 좀 들어보기로 했다.
그들의 주장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미국에도 좋은 밴드들 많은데 왜 외국인 쓰냐'라는 것이었다. AFM에서는 우선 레이 노블이 영국에서 자신의 오케스트라 멤버들을 '통째로' 이끌고 미국에 진출하는 것을 반대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노블도 어느 정도 예상을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AFM에서는 더 나아가 레이 노블, 즉 외국인이 미국에서 음악가들을 고용하는 '밴드 리더'로 활동하는 것조차 반대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나이트클럽은 10월 개장을 목표로 매우 빠르게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록펠러 부자(父子)가 종종 직접 찾아와 공사 상황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클럽측에서는 불확실성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그해 9월 9일에 이런 보도가 실렸다.
"음악에 관해서, 클럽은 저급한 살롱들과 엮여 이미지가 흐려지지 않은 음악 감독을 찾고 있었다. 마침내 런던의 레이 노블이 선택되었지만, 미국 밴드 멤버들의 항의로 계약이 취소되었다. 12년간 런던에서 활동했던 미국인 루드비히 글루스킨이 그 자리를 맡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마음에 한 번 꿈이 새겨진 이상 그것을 포기하기란 정말 힘든 일이다. 이렇게 된 이상 레이 노블은 끝까지 부딪혀보겠다고 결심했고, 자신이 직접 미국으로 와이프와 함께 넘어가기로 했다. 부부는 9월 19일에 뉴욕에 도착했다.
사정은 알 보울리에게도 마찬가지였고, 그는 9월 25일 뉴욕에 도착했다. 자신의 여자친구인 '마지'에게 모든 일이 확실해질 때까지는 런던에 남아 있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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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으로 가는 알 보울리를 배웅하는 '마지'와 친구들 |
2.10. 미국 생활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보울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뉴욕의 물가였다. 뉴욕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렇게 썼다.도착한 지 열흘 만에, 나는 내가 버는 것보다 일주일에 60달러를 더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출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월말에는 40달러가 부족했다. 뉴욕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세상 어디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높은 물가다. 모두가 멋지게 차려입고, 멋지게 산다. 전부 빚내서 말이다.
레이 노블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보울리도 나름대로 스스로 뉴욕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해 시도하고 있었다. 우선 보울리는 뉴욕의 라디오 쇼 '인티메이트 레뷰'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또한 마침 미국에서 영국 데카 음반사의 자회사로 새롭게 출범한 미국 데카와도 짧은 계약을 맺고 음반 4개를 녹음했다. <When Love Comes Swinging Along>은 그 중 한 곡이었다. 이때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밴드리더는 훗날 영화음악계의 거물이 되는 빅터 영(Victor Young)이었는데 그는 당시 데카의 음악 감독이기도 했다. 이는 데카 측에서 보울리의 음반에 꽤나 신경을 기울였다는 증거이다.
레이 노블과 AFM 사이의 문제는 결국 노블이 초강수를 두면서 해결되었다. 바로 미국 시민권을 따기로 한 것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 영국에서는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시민권을 부여하는 과정에서 충성서약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따라서 미국 시민권을 딴다는 것은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완전한 미국인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렇게 나오니 AFM 측에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레이 노블이 밴드 리더로서 미국인 연주자들만 고용한다는 전제 하에 활동이 허용되었다. 드러머 빌 하티와 알 보울리만이 예외였다. 빌 하티의 경우는 레이 노블이 얘 내 오른팔이라고 어떻게든 쇼부를 쳐서 특별 허가를 받아낸 케이스였고, 보울리는 연주자도 아닐 뿐더러 이미 미국에서 독립적으로 음반을 낸 가수였다. 다시 말해, 보울리와 레이 노블은 고용 관계가 아니라 동업 관계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래서 새로운 밴드 멤버들로 누구를 고용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레이 노블이나 빌 하티나 보울리나 이쪽 동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노블은 우연히 뉴욕 음악씬에 빠삭한 편곡자 겸 트롬본 연주자 한 사람을 소개받게 되었는데, 그는 도시 브라더스(Dorsey Brothers) 오케스트라에서 일했으나 지미 도시랑 타미 도시 형제 맨날 싸우는 거 말리다가 질려서 때려친 상태였다. 이름은 글렌 밀러였다.
빌 하티의 감시 아래서 밀러는 새 오케스트라의 멤버를 뽑기 시작했고, 11월이 되자 멤버 구성이 끝났다. 찰리 스피박(Charlie Spivak), 버드 프리먼(Bud Freeman), 피 위 어윈("Pee Wee" Erwin), 윌 브래들리(Will Bradley), 클로드 손힐(Claude Thornhill) 같은 탑급 뮤지션들이 합류했고, 글렌 밀러 본인도 밴드에서 트롬본을 불기로 했다.
밴드 구성이 끝나자 알 보울리도 '인티메이트 레뷰'에 출연하던 거 때려치고 레이 노블의 새 밴드 리허설에 합류했다. 이때 보울리의 라디오에서의 활약을 눈여겨보던 RCA 빅터에서는 12월 5일에 보울리에게 독점 솔로 계약을 제시했다. 계약 조건은 한 곡당 75달러[17]를 받고 로열티도 5% 받는 조건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가자 그제야 보울리도 여자친구 '마지'를 뉴욕으로 불렀다. 두 사람은 1934년 12월 18일에 결혼했는데, 공교롭게도 전처 프레다랑 결혼한지 3주년 되는 날이었다. 레이 노블과 빌 하티가 증인을 섰는데, 두 사람은 보울리가 법원 공무원한테 자기 초혼이라고 거짓말 칠 때 모르는 척 해주었다.
1935년이 되자마자 1월에 보울리는 빅터 녹음 스튜디오에서 레이 노블의 새 밴드를 등에 업고 자신의 솔로 음반 녹음을 시작했다. 이 날 보울리는 네 곡을 녹음했는데 그 중 하나가 보울리의 커리어 최고 명곡 중 하나로 꼽히는 <Blue Moon>이었다. 음반 위에는 당연히 보울리의 이름이 메인으로 인쇄되었고 그 뒤를 이어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이름이 작게 인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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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부터는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도 RCA 빅터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물론 보컬은 알 보울리였다. 둘은 음반사와 각자 독립적으로 계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한 세트처럼 움직였다. 다만 당연하게도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음반에는 레이 노블의 이름이 메인으로 크게 인쇄되었고 보울리의 이름은 작게 표시되었다.
한편 노블-보울리 듀오는 라디오 방송에도 계속 출연했는데, 그 중 화장품 회사 '코티(Coty)'가 후원하는 라디오 쇼가 초대박을 쳤다. 이 방송은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으로 송출되면서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와 알 보울리의 명성을 미국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둘의 인기가 너무 많아지자 3월부터 NBC에서는 토요일 밤 황금 시간대에 '라디오 시티 파티'라는 쇼를 하나 더 맡겼는데 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스폰서는 무려 코카콜라였다. 언론에서는 알 보울리를 "새로운 보컬의 발견"이라며 띄워줬고, 보울리와 레이 노블 듀오는 명실상부한 라디오 스타가 되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5월 말, 드디어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는 록펠러 센터 최상층에 있는 최고급 나이트클럽 '레인보우 룸'에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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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레인보우 룸에서 빌 하티, 레이 노블, 알 보울리와 보스웰 시스터즈[18] |
이 '라디오 스타' 시기에 대해 보울리가 조금 허풍을 섞어 회고하길,
나를 가장 먼저 놀라게 한 것은 미국 라디오의 엄청난 영향력이었다. 루디 발레가 방송 후에 자신이 받은 편지들을 나에게 보여주었는데 그에게 있어 매 방송 후 무려 75,000통에 달하는 팬레터를 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매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그의 팬들로부터 빗발치는 전화가 걸려왔다. 루디가 라디오 팬들을 전담하기 위해 운영하는 잘 조직된 사무실을 보여주었을 때 나는 부러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레인보우 룸(Rainbow Room)에서 공연을 시작하고 네트워크 라디오로 방송한 지 열흘도 안 되어, 나는 똑같은 종류의 팬레터 담당 직원들과 전화 교환원들이 '새로운 영국인 가수'에 대한 쇄도하는 문의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광경을 보게 되는 기쁜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한가지 있었으니, 라디오와 공연을 통해 만나는 관객들은 하나같이 열광을 하고,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음반도 잘 팔리는데 이상하게도 보울리의 솔로 음반만은 잘 팔리지 않는 것이었다. 1월에 <Blue Moon>을 포함한 네곡을 녹음한 것에 이어 3월에도 <You Opened My Eyes>를 포함해 네곡을 더 녹음했으나 판매량은 여전히 실망스러웠고 결국 예정되었던 솔로 녹음들은 보류되었다.
그러던 중 그해 여름에 기회가 하나 찾아왔다. 파라마운트사에서 제작하는 영화 <The Big Broadcast Of 1936>에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도 출연하게 된 것이다. <The Big Broadcast Of...> 시리즈는 말하자면 인기 있는 놈들 불러놓고 하나씩 장기자랑 시키는 쇼케이스식 영화였는데 이미 빙 크로스비가 1932년에 출연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고, 이번 해에도 출연할 예정이었다.
라디오니 무대니 해도 결국 당시 대중들에게 이름을 각인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영화였다. 7월 20일,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는 빅터 레코드에서 영화에 넣을 노래 4곡을 녹음했는데, 그 중 3곡을 보울리가 불렀고 그 중 <Why Stars Come Out At Night>라는 곡은 레이 노블이 보울리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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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The Big Broadcast Of 1936> 촬영 중인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 사진 가장 왼쪽에 알 보울리도 앉아 있다.] |
촬영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영화 개봉은 9월 예정이었다. 그런데 개봉을 앞두고 파라마운트 프로듀서라는 놈 머릿속에 갑자기 '음악 파트 다 없애고 대신 저질 코미디 분량을 늘리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는 곧장 그렇게 했다. 무자비한 칼질 속에서 파라마운트 소속 대스타 빙 크로스비의 분량은 살아남았으나,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분량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수준으로 편집됐고, 노래는 다른 씬의 배경음악으로만 깔렸으며 그마저도 보울리의 목소리 파트는 아예 삭제되었다.
그나마 보울리 스스로도 큰 팬임을 자처했던 빙 크로스비와 친분을 쌓은 일이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훗날 빙 크로스비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 내가 꽤 잘 알던 영국인이 있었어요. 알 보울리라는 친구였죠. 그는 미국에 와서 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저는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또한 미국 최고의 가수를 뽑는 한 인기 투표에서는 심지어 빙 크로스비를 3위로 누르고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그러나 9월 18일 녹음한 솔로 음반 두 곡 역시 판매 성적이 좋지 않았고... 이것이 미국 활동 시절 그의 마지막 솔로 음반이 되었다. 이제 보울리가 어떤 역할에 집중해야 할지는 명백해졌다. 바로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목소리였다.
1936년이 되자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와 알 보울리는 전국 투어를 떠났다. 가는 곳마다 그들은 환영받았고, 특히 텍사스 시골 마을의 언론들은 그들의 방문과 일거수일투족을 매우 자세히 보도하며, 그들을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3대 밴드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이때도 보울리는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의 에이스 가수'로 묘사되었다.
긴 투어가 끝나고 8월, 보울리는 투어 이후 주어진 짧은 휴가 기간동안 다시 영국을 방문했다. 영국에서의 환대와 지인들과의 오랜만의 만남은 보울리에게 분명 어떤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오랜 친구 모니아 리터와 함께 자신의 가장 유명한 단편 영화 중 하나를 촬영했다.[19]
1936년 말이 되자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에서는 서서히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우선 레이 노블 오케스트라가 출연하던 NBC 라디오 방송의 최대 스폰서이던 코카콜라가 후원을 갱신하지 않기로 했다. 돈줄이 끊긴 라디오 프로그램은 곧 폐지되었다. 또한 글렌 밀러는 자신의 편곡이 과소평가 받는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레이 노블이 단원들의 재능을 잘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밴드의 재능 있는 뮤지션들에게 레인보우 룸에서의 정기적인 공연은 영혼 없는 노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레인보우 룸 공연마저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6년 11월 10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있던 보울리의 남동생 '미쉬'는 형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여권 있으면 바로 답장해라. 없으면 당장 만들어서 12월 첫 주에 런던으로 와라. 매우 급함. 2등석 뱃삯이랑 경비는 내가 다 댈 테니 걱정 말고. 엄마랑 모두에게 안부 전함.
2.11. 다시 영국으로
1936년 겨울, 보울리는 여전히 미국에 남아 있길 원하던 레이 노블과 결별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 갑작스러운 귀국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단순히 향수병 때문이라는 말도 있고, 보울리가 뉴욕에서 갱스터의 여자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설 외에도 미국에서 결국 솔로 가수로 성공하지 못했다는 좌절감 등등. 주변 증언에 따르면 미국 생활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보울리는 우울해보였으며 말을 아꼈다고 한다.| |
| 1937년, 영국의 선호하는 가수 순위 |
보울리가 자리를 비웠던 몇 년 사이 영국에서 그의 자리는 다른 가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샘 브라운[20]과 데니 데니스[21] 같은 경쟁자들에 의해 그는 더 이상 독보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영국으로 돌아올 때 보울리의 머릿속에는 확고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16년동안 얼굴도 못 본 고향의 남동생을 런던으로 부를 만큼 확고한 아이디어였다.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남동생 미쉬는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유망한 재즈 피아니스트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의 전보를 받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잘나가는 스타가 된 '알버트' 형은 이미 집안의 자랑이었으므로, 형의 전보를 받자마자 미쉬는 집이랑 살림살이 다 팔아치우고 한달음에 런던으로 달려왔다. 런던에 도착한 미쉬는 형 부부 집에 한동안 얹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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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쉬 보울리(Misch Bowlly) |
인기 가수 보울리가 돌아오자 BBC 라디오에서는 곧장 그를 위한 게스트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하지만 보울리의 진정한 야망은 '최고의 게스트'가 아니라 자기만의 쇼를 직접 꾸리는 것이었다. 빙 크로스비나 루디 발리, 하다 못해 닉 루카스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쇼의 주인공은 물론 자신이었다. 미국에서는 결국 레이 노블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운도 따르지 않아서 솔로로 성공하지 못했으나 자기 안방인 영국에서는 분명 다를 것이었다. 뉴욕에서 몇 년 구른 결과, 그에게는 자신만의 밴드 하나를 결성할 돈도 남아 있었다.
곧 보울리는 피아니스트인 남동생 미쉬를 포함해 그 외에도 좀 친다고 꺼드럭거리는 뮤지션 총 8명을 모아 '알 보울리의 라디오 시티 리듬 메이커즈 (Al Bowlly's Radio City Rhythm Makers)'라는 밴드를 구성했다. 이 밴드의 목표는 간단했는데 바로 '관객들에게 영국 최고의 쇼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뉴욕이라는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놀아본 알 보울리에게는 분명 자신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밴드는 정식 공연 전 7주간의 혹독한 리허설 과정을 거친 후 드디어 첫 공연에 나섰다. 버밍엄에서의 데뷔는 대성공이었이었고, 당시 음악 언론은 보울리가 축하 전보 200통을 받았으며, 이 공연이 오랫동안 보드빌 최고의 흥행 카드가 될 거라고 예측했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무조건 호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버밍엄 포스트에서는 무대 위에서 보울리가 속칭 '너무 나댄다'라고 평가했다. 미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여전히 무대의 주인공은 밴드였고, 밴드의 역할은 손님들 춤 출 때 반주 셔틀이었으며, 가수는 부속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아마 보울리는 무대에서 자신이 뉴욕에서 보고 따라한 빙 크로스비나 루디 발리의 능청스러운 스타일을 유지했을 것이다.
지방 언론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보울리의 밴드는 몇주간 투어를 계속했고, 가는 곳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어 밴드는 바다를 건너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가서 공연하기로 했다. 그런데 더블린 투어 첫날 밤 공연에서 보울리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을 일으키더니, 다음날부터는 완전히 나가버렸다. 결국 더블린에서의 남은 한주 동안 보울리가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사과하는 것뿐이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음악 잡지 멜로디메이커에서는 '알 보울리의 야망에 가해진 치명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 밴드 내에서의 모든 전말이 드러났다.
"알이 미국에서 돌아온 후 온갖 거창한 계획과 기대가 있었기에, 그가 새로운 무대로 대성공을 거두길 바랐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멤버들 사이에서 불만이 이미 터져나왔는데, 자기들이 보기엔 자신들이 있으나 마나 한 역할만 맡았기 때문이다."
가수는 노래를 못하고 밴드 내부에서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앞으로 몇 주 동안 일거리가 있을 전망도 안 보이자... 결국 에이전트가 극약 처방을 내리기로 하고 3월 말에 밴드를 그냥 공중분해 시켜버렸다. 이 일로 인해 보울리는 단숨에 빈털털이가 되었고, 미쉬를 포함해 다른 뮤지션들 역시 백수가 되었다.
2.12. 최악의 시기
그래도 아직 상황이 완전히 최악으로 치닫은 것은 아니었다. 알 보울리가 이제 망했다는 전망과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하자 보울리의 에이전트 측에서도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그들의 성명을 요약하자면 "우리 가수는 이미 목소리 회복했고, 앞으로 몇주간 스케줄로 빵빵하다. 밴드 멤버들이야 원래 백수였고 애초에 이번 투어도 단기 계약직이었으니 근본적인 피해가 없다."였다.실제로 보울리의 목소리는 금방 회복되었고, 이번에는 동생 미쉬(피아노)랑 기타리스트 한명만 대동하고 다시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의 공연에 대해서 한 기사에서는 언급하길,
알이 부른 'Melancholy Baby'와 'So Do I'는 어젯밤 관객들을 매우 감동시켰다. 크루너에 대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어떤 아줌마가 옆 사람한테 '어머, 근데 엄청 멋있다. 라디오에서 듣던 거랑 완전 다르네!'라고 하는 걸 엿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다시 보울리의 목소리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보울리가 공연 예정이던 장소에는 '몸이 좋지 않아서..'라는 문구가 내걸렸다.
이때쯤 솔로로 무대에서 성공하겠다는 보울리의 꿈이 박살났고, 두번째 부인이었던 마지와의 관계도 박살났다. 두 사람은 별거했으나, 끝내 이혼은 하지 않았다. 커리어와 가정이 박살나는 중에도 호색한 기질은 숨길 수가 없어서, 보울리는 곧바로 헬렌이라는 새 여자친구와 사귀기 시작했다. 헬렌에 따르면 이 시기 보울리는 스스로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해서 걱정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평소에는 술 한 방울 안 마시는 사람이었지만, 목구멍 가라앉히려고 포트 와인이랑 브랜디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보울리의 에이전트는 보울리가 어디까지 망하나 지켜보고 있던 HMV에게 접근해서 어떻게든 일거리를 구해왔다. 두 곡씩 녹음해보고, 시장 반응 괜찮으면 또 두 곡 녹음해보고 하는 식의 계약이었다. 당연히 이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 가수나 퇴물 가수에게나 제시될법한 조건이었기에 보울리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6월 19일,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로니 문로(Ronnie Munro)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Carelessly'와 'On A Little Dream Ranch'가 녹음되었다. 음반사에서는 판매량에 만족했고 7월 5일에 다시 새로운 두 곡, 'Blue Hawaii'와 'Sweet Is The Word For You'를 녹음했다.
그렇게 다시 두 곡 더, 또 다시 두 곡 더. 총 8곡을 녹음했을 때, 보울리의 목이 다시 문제를 일으켰다. 보울리의 멘탈은 완전히 박살났다.
훗날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침대에 누워 울었고 계속 울었습니다.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 어떤 소리라도 내보려고, 나 자신에게 욕을 하면서, 어떻게든 발산하려고 애썼습니다. 아마도 나는 한 여성이 자신의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기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소리는 사라졌습니다 — 오,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을 여러분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말로는 부족합니다."
의사의 진단 결과 다행히 암은 아니었고, 대신 성대에 사마귀가 생겼는데, 영국에는 이걸 수술할 수 있는 의사가 없었다. 유일하게 가능한 의사는 미국에 있었는데, 그쪽에서도 성공 확률은 50대 50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은 수술하러 미국 가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여행 경비랑 수술비 때문에 큰돈이 필요했는데, 라디오 리듬 메이커스 밴드로 적자 본 지 얼마 안 됐고, 목소리 나가서 공연도 못하는 상황이라 돈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시기 보울리는 스트레스 때문에 몸무게가 30파운드(약 13kg)나 빠졌다고 한다.
보울리는 기존에 가입해두었던 보험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비용을 마련했다. 동생 미쉬도 돈을 조금 보탰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수술의 성공 가능성은 50대 50이었고, 결과를 보장할 수 없었기에 그는 수술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보울리는 유언장을 작성해서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엄마한테 모든 걸 남긴다고 썼다. 그해 8월 30일, 그는 뉴욕에 도착했다. 목소리를 평생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수술이었기에, 의사의 메스를 정확히 유도하기 위해 그는 수술 중에도 종종 소리를 내야 했다.
2.13. 재기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수술 전후 보울리의 음색은 미세하게 변했는데, 어떤 비평가들은 그의 목소리가 수술 이후 더욱 좋아졌다고 평가하며, 보울리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다.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된 일은 그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내가 이렇게 행복하고, 이렇게 명랑하며, 이렇게 만족스러운 마음 상태로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것을 찾았습니다. 신께 맹세하건대, 내 삶과 내 인생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렇게 행복했던 적은 없습니다."
그해 말까지 보울리는 뉴욕에 체류했고, 그 사이 RCA 빅터와 짧은 계약을 맺고 작은 밴드와 6곡을 녹음했다. 빅터의 이러한 제안은 여전히 뉴욕에서 보울리의 팬층이 두터웠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음반은 'Al Bowlly & His Orchestra'라는 이름으로 판매되었다.
1937년 11월, 보울리의 남동생 미쉬는 다시 남아공으로 돌아갔다.
1937년 12월 말, 보울리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했으나, 레이 노블이 없는 영국에서 그는 한 오케스트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 옮겨다녀야 했는데[22] 이 모습은 마치 커리어 초반의 본인과도 같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운이 영국, 더 나아가 전 유럽을 뒤덮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댄스 뮤직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브리티쉬 인베이전 이전 영국 음악의 황금기라 불리던 댄스 밴드 시절(British Dance Band Era)는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2.14. 죽음
모두가 예감했던대로 전세계가 전쟁에 휩싸였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군대로 끌려갈 때, 보울리는 나이가 많아서 징병되지는 않았다. 마침 지미 메세네(Jimmy Messene)라는 녀석도 마찬가지 입장이라 두 사람은 기타 듀오를 이루어 활동했다. 그러나 당시 알콜 중독에 빠져 있던 메세네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일이 종종 있어 파트너를 실망시키곤 하였다. 1941년 4월 2일, 보울리와 메세네는 히틀러를 비난하는 곡인 ’When That Man is Dead and Gone'을 녹음했다.그리고 약 2주 뒤인 1941년 4월 17일, 독일의 런던 공습 때 그는 목숨을 잃었다. 폭격이 끝난 후 아파트 관리인이 보울리의 방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폭격에 직격으로 당한건 아닌지라 외관상으론 멀쩡했으나, 폭발의 충격으로 침실문이 튕겨져나가 머리를 맞고 사망한 것이었다. 그의 시신은 다른 폭격 피해자들과 함께 공동 매장되었고, 장례식은 같은 달 26일에 치러졌다.
사망 당시 보울리의 계좌에는 3파운드 10실링 9펜스, 현재 가치로는 약 43만원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사망보험금에서 그가 쓰지 못할 돈 1억 정도가 나왔고, 세금과 각종 비용을 정산한 후 그의 유언장에 따라 약 8800만원 정도가 보울리의 어머니에게 전달되었다. 8년 후 보울리의 어머니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70년대 후반, 알 보울리의 음악이 재조명받으면서 재발매된 솔로 앨범들의 저작권료로 약 1000만원이 발생했다. 이때 보울리의 상속권은 여전히 남아공에 살아 있던 미쉬에게 있었다. 그 돈이 미쉬에게 전달됨으로서 보울리는 뒤늦게나마 마지막 빚을 다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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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보울리의 묘지, BOWLLY A.A. |
3. 대표곡
"Goodnight, Sweetheart" 1931년 2월 19일"Guilty" 1931년 12월 2일 [23]
"If Anything Happened To You" 1932년 1월 28일
"Love Is The Sweetest Thing" 1932년 9월 8일
"Midnight, The Stars and You" 1934년 2월 16일 [24]
"The Very Thought Of You" 1934년 5월 21일
"Deep In A Dream" 1939년 2월 3일
4. 여담
* 영화 샤이닝의 엔딩이기도 한 'midnight, the stars are you'가 있다.
* 알 보울리가 녹음한 적 있는 Al Hoffman 작곡, John Klenner 작사의 'Heartaches'는 2016년 더 케어테이커의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내 수록곡 'It's just a burning memory'로 샘플링된 바 있다.
* 영국의 원 맨 밴드인 화이트 타운의 1997년 곡인 'Your Woman'과 두아 리파의 2021년 곡인 'Love Again'에서 알 보울리의 곡인 'My Woman(1932)'의 도입 초반 기타 리프를 샘플링하였다.
[1] 이혼은 하지 않았다.[2] "Al Bowlly - Modern Greek Studies Association", mgsa.org[3] 암송아지의 울음소리처럼 부드러운 콧소리로 노래부르는 것을 말한다. 유명한 크루너로는 프랭크 시나트라, 페리 코모, 빙 크로스비, 마이클 부블레, 진 오스틴 등이 있다. 초기 재즈와 스탠다드 팝 장르를 다룬 당대 인기 가수들을 상징하는 창법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유행이 가라앉았다가 데이빗 보위와 짐 모리슨이 크루닝 창법을 이끌어들이면서 록 음악계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4] 보울리(Bowlly)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Paulos였는데, 이 그리스 이름을 영어로 자연스럽게 발음하기 위해 Pauli로 바꾸었고, 그러다가 귀화 과정에서 서류상의 실수로 Bowlly가 되었다.[5] 1920년에 발표된 초절정 히트곡. 폴 화이트먼 밴드가 연주한 버전은 당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미국 차트에서 11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2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6] 현재 가치로 대략 130만원[7] 이때 실종된 편지는 이후 아델러에게 반송되었다. 아델러는 이 편지를 직접 보울리 앞에서 펼쳐보이면서 혹시라도 남아 있었을 자그만한 오해조차 종식시켰다.[8] 지금도 전세계에 사보이 호텔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고 유명한 사보이 호텔은 바로 런던의 사보이 호텔이다. 사보이 호텔은 이탈리아 왕국의 통치 왕가였던 사보이아 가문에서 유래했다. 주인공은 사보이아 백국의 중앙집권제를 위해 노력했던 피에트로 2세.[9] 훗날 인터뷰에서 알 보울리는 이 20파운드 중 5파운드는 빚을 갚는데 썼고 나머지 15파운드는 경마에 걸었다가 다 날렸다고 밝혔다.[10] 음반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여전히 조악한 음질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나 이전 해 알 보울리가 베를린에서 녹음했던 음반들에 비교하면 음질이 좋다. 이는 프레드 엘리자데 밴드가 당시의 최첨단 녹음 시설에서 녹음할만큼 일류 밴드였다는 점을 시사한다.[11] 폴 화이트먼 밴드에서 활동한 보컬 트리오로서, 그 중 하나였던 빙 크로스비는 이후 엄청난 스타가 되었다.[12] 알렌은 나중에 보울리에 대해 무엇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은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보울리는 독신남이었기에, 직장 밖에서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고 답했다. 하지만 1936년 Radio Pictorial에 실린 기사에서 그는 보울리를 친구로 묘사하며 자신의 직업적 활동에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13] 대표적으로 류 스톤(Lew Stone), 스파이크 휴스(Spike Hughes), 그리고 냇 고넬라(Nat Gonella)가 있다.[14] 이혼 소송에서 한쪽 배우자가 불륜이나 부정을 이유로 이혼을 청구할 때, 배우자의 부정 행위에 연루된 제3자[15] 마지. 이후 보울리의 두번째 아내가 된다.[16] <Hold My Hand> <Lights of Paris> <Sailing on the Robert E. Lee>[17] 지금 가치로 약 1900달러, 260만원[18] 1930년대 초중반의 대표적인 여성 그룹으로 다음 세대의 앤드루스 시스터즈나 엘라 피츠제럴드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19] 유튜브 동영상 제목에는 1934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오류이다.[20] 1898~1972. 잭 힐튼 오케스트라와 앰브로스 밴드에서 주로 활약한 가수로서 보울리의 전성기 때도 보울리 못지 않게 인기가 많았다.[21] 1913~1993. 공교롭게도 로이 폭스가 알 보울리를 잃은 후 밴드에 영입한 가수였다.[22] 이 시기 함께 작업했던 지휘자 중에는 훗날 이지 리스닝의 거장이 되는 만토바니도 있었다.[23] 영화 아멜리에의 OST[24] 영화 샤이닝과 설국열차의 O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