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6 21:42:52

헬무트 바이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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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666> 헬무트 오토 루트비히 바이틀링
Helmuth Otto Ludwig Weidling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83-028-05,_Helmuth_Weidling.jpg
출생 1891년 11월 2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할베르슈타트
(現 독일 작센안할트주 하르츠군 할베르슈타트)
사망 1955년 11월 17일 (향년 64세)
소련 러시아 SFSR 블라디미르주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블라디미르주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
복무 독일 제국 육군
1911년 ~ 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육군
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육군
1933년 ~ 1945년
최종 계급 포병대장 (독일 국방군 육군)
주요 참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베를린 전투
주요 지휘 86보병사단
40기갑군단
41기갑군단
56기갑군단
베를린 방어 사령부
서훈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1. 개요2. 생애
2.1. 1차대전 ~ 2차대전2.2. 젤로 고지 전투2.3. 베를린 방어전2.4. 전후
3.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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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대전 독일 국방군 육군장군. 최종 계급은 육군 포병대장. 베를린 전투의 마지막 사령관으로써 소련군에 대항하여 방어전을 펼치다가 항복하였다.

2. 생애

2.1. 1차대전 ~ 2차대전

1891년 할베르스타트에서 출생하였으며 임관 후 1911년에 중위로 진급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전후에 군에 계속 재직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포병장교로써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초기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여하였다.이후 1942년엔 동부전선의 86보병사단장으로 참전하였다.

파일:16273265772_5795421d70_b.jpg

▲ 1943년 동부전선의 육군 86보병사단에서의 바이틀링

이후 1943년 10월, 바이틀링은 41기갑군단을 맡았고 1945년까지 지휘하였다. 1944년에 잠시 지휘권을 놓았던 시점에 바그라티온 작전 중 9군에 속했던 41기갑군단의 전력이 큰 손실을 입었고, 바이틀링이 다시 41기갑군단장에 복귀하였을 때는 4군으로 재편되었다.

2.2. 젤로 고지 전투

이후 바이틀링은 1945년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이끄는 비스툴라 집단군(바이흐젤 집단군)에 속한 56기갑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베를린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오데르-나이사 작전에 대항하여 바이틀링은 젤로 고지 전투에서 자신이 이끄는 56기갑군단을 중앙으로 101군단, 11 SS 기갑사단과 함께 고트하르트 하인리치의 명령에 따라 방어전을 펼쳤다. 당시 베를린을 먼저 점령하고자 조급했던 주코프의 제 1 벨라루스 전선군을 어느 정도 저지하였으나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가 이끄는 중부집단군이 4월 19일 무너지면서 비스툴라 집단군도 후퇴한다.

2.3. 베를린 방어전

4월 22일, 히틀러는 바이틀링이 소련군으로부터 퇴각한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를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었으나, 바이틀링 장군은 이를 듣고 해명하기 위해서 퓌러붕커를 직접 찾았고 그와 대면한 히틀러는 총살 명령을 취하했다. 대신에 하루 뒤인 23일 바이틀링을 헬무트 레이만 중장과 히틀러 본인을 대신하여 베를린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1] 히틀러는 바이틀링에게 베를린의 수비를 명령하면서 특히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항전할 것을 강조했다.

베를린 방어군의 병력은 국방군 병력 일부와 무장친위대 병력을 포함한 4만 5천여명이 있었지만 보급상황이 심각하였으며, 그 외에도 경찰, 히틀러 유겐트, 국민돌격대 등 4만 여 명이 베를린 방어에 투입되었다. 그 밖에도 빌헬름 몽케가 지휘하는 총통경호대(LSSAH) 병력 800여명을 포함한 2000여명의 중앙 정부 구역을 수비하는 부대가 있었다. 베를린 함락 이후 소련군은 수비병력의 수를 18만명 정도였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포로의 수를 통해서 추산한 것으로 다수의 민간인이 포함된 추산치기 때문이다.

바이틀링은 8개의 방위구역을 설정하여 각 지휘관을 배정하였으나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는 장교, 장군이었다. 서쪽의 구역은 20기갑사단, 북쪽은 9공수사단, 북동쪽은 뮌헤베르크 기갑사단, 남동쪽에는 11 SS 기갑사단을 배치하였고 베를린의 중심부에는 바이틀링이 이끄는 18기갑사단이 있었다. 또 방공시설이 갖추어진 이전 육군의 사령부였던 벤들러블록에 베를린 방어 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부대의 지휘체계를 정비하였다. 한편 바이틀링은 히틀러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당연히 거절당하였고 하던 방어나 마저 계속하라는 대답만이 돌아 왔다.

쇠르너가 베를린 외곽에서 계속 싸웠지만 29일, 소련군에 의해서 베를린이 완전히 포위되었다. 주코프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이 남쪽으로 베를린을 압박해오는 한편 이반 코네프가 이끄는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북쪽에서 압박을 가했다. 인원, 탄약 등의 기본적인 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물량으로나 질적으로나 소련군을 이길수는 없었기 때문에 당일 저녁에는 사령부 바로 앞까지 전선이 좁혀졌고 사실상 베를린 전체가 소련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바이틀링은 퓌러붕커로 찾아가 히틀러에게 포위를 뚫고 탈출구를 찾을 것을 건의하였지만 히틀러는 답이 없었다가 바이틀링이 다시 사령부로 돌아가고 오후 1시가 되어서야 금일 야간을 기해 탈출할 것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히틀러는 자살하였고 바이틀링은 다시 벙커로 갔다가 괴벨스와 보어만, 크랩스 장군에게 히틀러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5월 1일에 괴벨스한스 크렙스 장군을 통해서 추이코프에게 항복 협상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괴벨스의 자살 때문에 하루가 늦춰져서 5월 2일이 되어서야 바이틀링이 추이코프에게 정식으로 항복하게 되면서 베를린 전투가 종언을 맞게 된다.

파일:Berlin32.jpg

▲ 항복 직후 포로가 된 모습. 바이틀링은 좌측의 인물.

바이틀링이 추이코프에게 전달한 항복문서.
1945년 4월 30일, 총통께서 자살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의 곁을 버렸다. 독일 제군은 총통께 충성을 바쳤고 제한된 탄약공급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계속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 즉시 교전을 중단할 것을 명령한다. 매 시간 전투가 계속될 때마다 베를린 시민들과 부상자들의 고통은 늘어날 뿐이다. 소련군 최고사령부과의 협정으로 지금 즉시 전투를 멈추기를 명한다.
전 베를린 방어 사령관 포병대장 바이틀링.

이 항복 연설은 베를린의 여인다운폴에서도 나온다.

2.4. 전후

전후 바이틀링은 소련 군사법원으로 회부되어 소련으로 송환되었고, 그의 명령을 받은 16군의 환자들에 대한 대량학살 및 소련 시민의 학살 등의 전쟁범죄로 기소되어 수감되었다. 1955년에 수감 도중 고문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소련이 무너진 뒤 복권 논란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소련 군사법원의 판결은 정당한 것으로 판단되었고 그는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3. 미디어에서

  • 영화 다운폴에서 여러 전선에서 공을 세운 베테랑 장군으로써 전선에서 싸우고 있던 도중 지휘부는 바이틀링이 히틀러의 지시를 어기고 후방으로 진지를 옮겼냐는 말에 아니라고 계속 해명하지만 현장 본부까지 날아온 포탄에 의해 통신이 망가진다. 자신이 처형당할 수도 있기에 퓌러붕커에 찾아가 히틀러에게 해명을 하기 위해 대면을 요청한다. 대면을 기다리는 동안 작전참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히틀러의 작전에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못 만나고 카이텔로부터 바이틀링의 보고에 깊은 감명을 받은 히틀러가 자신을 베를린 수비대장으로 임명한다는 말을 듣자 이때 대사가 "차라리 절 처형했더라면 좋았을텐데요"[2] 하고 말하고 어떻게든 소련군의 진격속도를 저지시키기 위해 싸우지만 전황은 계속 안 좋아지고 수비대장으로써 베를린을 포기하고 탈출을 권한다며 요구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무시, 망상에 빠진 작전에만 집착하고 참모들은 아무런 제지도 안 하자 답답하다며 나가는 모습도 나온다. 이후 히틀러 사후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거란 괴벨스에게 시민들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반대하기도 했다. 마지막엔 라디오로 항복선언을 하고 실신함으로써 끝난다.
  • 베를린의 여인 - 항복 문서를 낭독한 뒤 소련군이 제공한 차량을 타고 퇴장한다.


[1] 영화 몰락에서는 차라리 총살되는 게 나았다고 말한다.[2] 항복 이후 10년동안 감옥에서 고생하다 죽었으니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