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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론토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이다. 북아메리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크, 런던 등 영국식 지명과 비교해 상당히 이질적인 이름을 갖고 있는데, 토론토의 역사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깊은 관계를 알면 이해가 될 것이다.2. 연혁
2.1. 17세기 유럽인의 도래
본격적인 토론토의 역사는 17세기부터 시작되지만, 사실 이전부터 토론토를 비롯한 온타리오 남부 지역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의 지명인 토론토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 토착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유력한 어원은 이로쿼이 연맹의 모호크 족 어휘 '트카론토(Tkaronto)'이다. 트카론토는 '물 속에 서 있는 나무'(Trees standing in the water)라는 뜻으로, 오늘날 토론토 북부의 쿠치칭 호(Lake Couchiching)와 심코 호(Lake Simcoe) 사이의 좁은 물길을 부르는 단어였다. 일각에서는 휴런 족(Huron)의 단어인 '토론톤(Toronton),' 곧 '만남의 장소'가 토론토의 어원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수 세기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착지였던 토론토 일대는, 프랑스인 탐험가 에틴 브룰리(Etienne Brule)가 지금의 토론토 땅에 발을 딛으며 외부인들에게 알려진다. 브룰리는 퀘벡의 개척자였던 사무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의 지시로 1615년 배를 타고 오대호 일대를 돌아보던 중 우연히 토론토 지역을 밟게 되고, 당시 원주민들이 지역을 부르던 이름인 '트카론토'를 자신의 일지에 기록한다.[1] 브룰리의 방문 이후 이로쿼이 원주민들에 의해 마을 몇 개가 더 세워지지만, 1701년 앨곤퀸 족(Algonquin)의 일부인 애니쉬나비 족(Anishinaabe) 사람들이 토론토 일대를 침략하며 이로쿼이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빼앗는다.
2.2. 영국령 캐나다
<colbgcolor=#1c4595> 1793년 완공된 포트 요크 |
<colbgcolor=#1c4595> 1834년 토론토 시의 승인을 축하하는 시민들 |
2.3. 캐나다의 독립과 산업화
1867년에 캐나다 연방이 성립되며 정식으로 수도를 지정할 필요가 생겼고, 당연히 그때까지 영국령 캐나다의 수도였던 토론토가 유력 후보에 오른다. 당시 수도 선정 과정에서 프랑스계 인구가 많이 사는 몬트리올과 영국계 인구가 많이 사는 토론토[4]가 옥신각신했지만, 연방정부는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 중간에 위치한 마을 하나에 깃발을 꽂고 수도라고 선언해버린다. 새 수도는 인구 2만이 채 될까말까 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예산을 들이부으며 심시티를 벌인 덕에 금세 버젓한 도시가 되었다. 이게 지금의 오타와다.[5] 나름 지못미 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영-불 갈등 이외에도 오타와 강의 상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오타와가 미국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빅토리아 여왕의 전략적 판단도 한 몫을 했다.[6]<colbgcolor=#1c4595> 1858년 토론토 유니언 역의 승강장 |
2.4. 현대
<colbgcolor=#1c4595> 토론토 6개 구(區) 출처 |
<colbgcolor=#1c4595> CN 타워와 토론토의 스카이라인 출처 |
[1] 브룰리 일행은 트카론토를 'Lac Taronto'로 기록했었고, 이걸 영어로 음차하면서 'Lake Toronto'로 바뀌게 되었다.[2] 동시기 아일랜드 대기근이 찾아오며 고향 땅을 떠나 북아메리카로 향한 아일랜드인들이 정말 많았다.[3] 대부분 노예 출신이었으며, 영국계 충성파들도 드물게 찾아볼 수 있었다.[4] 프랑스어 사용자는 토론토 인구의 1.5%에 불과하다. 참고로 몬트리올의 영어 사용 인구는 18.5%[5] 시드니와 멜버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캔버라를 세운 호주과도 유사하다. 아니 캔버라가 오타와를 본받았다고 보아야 할 듯.[6] 미국 독립전쟁과 영미전쟁 당시 토론토와 몬트리올이 공격받은 경험도 있었고, 사실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캐나다의 주적은 다름아닌 미국이었다. 심지어 캐나다군의 작계상에서는 영일동맹을 근거로 일본-캐나다-호주-영국이 미국을 상대로 세계대전을 벌이는 시나리오가 엄연히 존재했다. 이건 미군도 마찬가지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캐나다 침공 계획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한다.[7] 당시 주민 투표 결과 찬:반 비율이 거의 1:3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캐나다 정치 구조상 주민 투표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해리스는 반대 세력을 무시한 채(...) 통합을 강행한다.[8] 캐나다 그 자체라고 불리던 몬트리올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의 실패, 그보다 좀 이전인 1960년대 영어 금지령 이후 대다수 대기업들의 탈출 등 연달아 자살골을 넣은 이후 토론토에 밀려나 버렸다. 심지어는 몬트리올 은행(BMO, Bank of Montreal)의 본사마저 법적으로만 몬트리올에 있을뿐 사실상 토론토로 이전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