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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모두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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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후계자 시절2. 황제
2.1. 즉위2.2. 안정적인 첫 2년2.3. 누나 루킬라암살 시도흑화2.4. 근위대장 페렌니스2.5. 간신 클레안데르(클레안드로스)2.6. 검투사 황제
3. 암살

1. 출생과 후계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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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는 서기 161년, 로마 근교의 도시 라누비움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자녀 14명 중 열 번째로 태어났다. 로마 최상류층 내에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이후 오랜 만에 태어난 남자 일란성 쌍둥이 형제 가운데 하나였다.

콤모도스의 남자 형제들은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는데, 그의 쌍둥이 형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안토니누스도 4살 때 요절했다. 8살 아래의 남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있긴 했지만, 나이와 능력상 이 당시 콤모두스는 지극히 멀쩡하고 재능도 있던 터라 결점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제위에 있을 때에 태어나 황제의 직위를 물려받은 유일한 황제가 되는 코스를 그대로 밞아나갔다. 물론 티투스 황제와 도미티아누스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그들은 아버지가 황제가 되기 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어머니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 매형이자 양숙부는 루키우스 베루스, 외할아버지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였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혈통상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지어준 이름은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의 프라이노멘과 그의 혈통적 친가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가문에서 따온 이름이다. 기록에 따르면 황제로 있는 동안 워낙 막장인 탓에 악의적인 이야기가 많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부모와 삼촌 등 황실 식구들의 사랑을 받으며 예정된 후계자로 자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콤모두스는 금가루를 뿌린 듯한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남자답게 키도 크고 외모가 상당히 잘생긴 미남이었다고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죽은 후 콤모두스가 제위에 있은 12년 동안 그가 행한 포악한 행위 때문에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그를 후계자로 삼는 데 주저했다고도 하며,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년)에서처럼 다른 인물을 후계자로 점찍었다고 전해지는 얘기들이 있지만, 상술했듯 마르쿠스 황제는 일찍부터 아들을 후계자로 기르는 수순을 밟아왔고 원로원 역시 콤모두스가 가진 인품과 재능을 높이 샀기 때문에 콤모두스를 밀어줬다. 이런 배경 때문에 콤모두스는 이미 다섯 살 때인 166년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고, 이 해에 남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당시 3세)와 나란히 차기황제이자 공동황태자로 공인받았다. 여기에 더해 콤모두스는 이 해에 아버지, 동생과 함께 축제를 주관했는데, 이는 형식상 공화국이었던 로마 원수정 체제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에서의 모습과 달리 명예로운 경력에 따른 제왕교육 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실제 콤모두스와 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는 굳이 관직에 오르지 않고도 제왕교육을 받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원로원에게 차기황제로 일찌감치 공인받았다.

그런데 콤모두스의 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가 귀에 난 악성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직후, 수술합병증으로 7살의 나이에 급사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소 파우스티나 부부는 평소 막내 아들을 무척 아끼고 있었고, 콤모두스 역시 어린 동생을 무척 사랑했던 터라 황실 식구들은 초상집 분위기였는데, 하필이면 콤모두스 남동생이 요절한 날이 로마 제국의 국가적 축제 기간 중 하나인 유피테르 신을 기리는 국가 축제 중이었다. 그래서 황제와 원로원은 어린 황태자의 장례식 기간을 국가적 애도기간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런 속사정으로 주변에서는(심지어 원로원 의원들과 민중들까지) 침울한 상태에서도 슬픔을 억제하며 국가축제를 주최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상중인데 축제를 주관하시면 (저희들이 황제께) 민폐가 되니 주관행사를 중단해달라"고 요청한 일도 벌어졌다. 그럼에도 마르쿠스 황제는 평소부터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면서, 국가적 축제를 개인적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중단은 없다며 거절했으며 끝까지 국가행사를 모두 치른 다음에야 어린 막내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1][2]

따라서 169년 이후부터 콤모두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였고, 예정대로 제왕교육을 받았다. 이때 콤모두스를 가르친 인물들 역시 2세기 당시 로마 제국 전역에서 알아주는 오네시크리투스, 피톨라우스, 티투스 아이우스 상투스[3] 같은 각 분야 최고의 학자 혹은 원로원 의원들이었다고 한다. 이어 콤모두스는 과거 로마 제국의 남자 황족들처럼 본격적으로 군생활도 시작하면서,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자질 교육도 아주 어린 나이부터 병영에서 경험하게 됐다. 이는 그가 171년 '게르마니쿠스'라는 아버지의 칭호를 사용하기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과거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의 전례 이상으로 빠른 군무교육이었다. 따라서 콤모두스는 다른 황족들과 달리 171년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군대를 사열한 가운데 사용했고, 동방 순행을 마친 직후인 176년 가을, 로마에서 아버지와 함께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177년에는 공동 황제의 직위에 올랐으며, 아버지와 원로원으로부터 제호까지 받은 뒤 그해 첫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콤모두스가 첫 집정관에 올랐던 17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원로원은 어린 콤모두스를 위해 특별히 법까지 완화해 콤모두스를 도왔다.

175년 이전부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건강은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4] 콤모두스의 부친 마르쿠스 황제는 즉위 전부터 오랜 격무에 시달린 탓에 몸상태가 심각히 악화된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그는 편치 못한 몸으로 병사들과 함께 다누비우스 전선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제는 로마군 병사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분위기에도 마르쿠스 황제는 콤모두스가 성년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이고 아내까지 몸상태가 좋지 않은 까닭에 이를 크게 걱정했다. 따라서 마르코만니 전쟁 기간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경우를 걱정해 일찌감치 여러가지 대비를 했다. 이는 모후 파우스티나 역시 비슷했는데, 그녀는 로마 안에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며 어린 콤모두스의 안위에 최대한 신경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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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모두스의 매형 폼페이아누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군부와 원로원에게 두루 신망받고 있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일찌감치 어린 아들을 도울 인물로 지목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예 폼페이아누스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부여하고, 이름까지 폼페이아누스 카이사르로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장인의 결정에 대해 폼페이아누스는 어린 콤모두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결정이라며, 이 조치를 한사코 거절했다. 따라서 카이사르 칭호 결정은 실제 결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런 조치 외에도 황제와 황후는 자신들이 부재할 경우, 나이가 어리고 천성이 착한 콤모두스를 걱정해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진심으로 아들을 위해 헌신할 이를 선정하려고 했다. 이때 소 파우스티나 황후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부 모두 상당히 신뢰한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콤모두스의 또 다른 조력자로 염두에 뒀다. 그런데 175년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이런 믿음에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반란을 일으켰고, 이 사건으로 소 파우스티나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만일의 오해 여지를 차단할 목적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해 콤모두스와 소 파우스티나를 급히 자신의 곁으로 오게 했다[5]. 다행히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은 몇개월 만에 진압됐지만, 이때의 일은 로마를 떠나 동방 순행에 나선 황후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따라서 175년 콤모두스의 어머니 소 파우스티나는 오늘날의 터키 카파도키아의 로마군 동방기지가 있던 할랄라에서 사망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내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는데, 콤모두스 역시 사춘기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큰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누나, 매부들에게 의지했는데, 이때 폼페이아누스를 포함한 안토니누스 황족들은 여린 성격의 콤모두스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폼페이아누스는 장인 생전부터 늘 콤모두스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로 도움을 줬고, 둘째 누나 부부는 콤모두스를 위해 사저에서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물심양면으로 지켜줬다고 한다.

동방 순행을 마치고 176년 가을, 로마로 돌아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이어 그는 콤모두스가 16살이 되던 해인 178년 결혼시켰다. 신부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함께 도나우 강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과의 전투에 참전한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의 딸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였다. 그런데 이 결혼은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허례허식 없이 평범한 결혼식으로 진행시켰으며, 결혼 직후 새신랑은 로마를 떠나 본국 이탈리아의 북부 국경으로 향했다고 한다.

2. 황제

2.1. 즉위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178년과 179년에 도나우 전선에서 함께 싸웠고 180년으로 계획된 원정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같은 해 3월에 제위에 올랐다. 그렇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진중에서 죽은 후 콤모두스는 로마 제국황제가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온갖 악평에도 불구하고 콤모두스는 19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를 때까지 아버지가 굳이 다른 사람을 후계자로 선택해야 할 만큼 심각한 결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콤모두스가 아버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체육이나 검투사 경기를 좋아하는 소년기를 보냈다는 것이 흠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지만, 이것은 황제로서의 자질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적성과 취향의 차이였다. 검투사 경기는 좀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공부보다 체육을 좋아했다는 것이 로마 상류층에서도 딱히 흠이 될 만한 것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권장되기도 했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아버지와 원로원에게 콤모두스는 5살때부터 학습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예의가 없다는 등의 결점을 지적받지 않고 인정받은 후계자였다. 쉽게 말하면, 아버지가 서거하기 직전까지도 준비된 후계자였던 셈이다.

이런 이유로 콤모두스는 180년 3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한 후, 이에 대해 군사들에게 연설을 했는데 매우 진지하고 솔직했다고 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장군,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의 아버지는 천상으로 올라가 신들과 나란히 앉아 있다. 우리는 인간사에 관심을 갖고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

즉위 후 다 이겨가던[6] 게르만 부족과의 전쟁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단독황제에 오른 콤모두스가 마르코만니 전쟁을 중단시키고 휴전회담을 결정하기 전, 로마군 장군들은 이 결정을 반대했다. 특히 아버지 생전부터 보호자였던 폼페이아누스도 "선황께서 성공적으로 추진해 온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과의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하니, 갓 스물을 넘은 콤모두스 입장에선 마르코만니 전쟁을 끝내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치세에 로마는 태평성대가 아니라 갈수록 쇠퇴하고 있는 판국이었던 차에, 내부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상황에서 게르만족과 전쟁을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로마에겐 득보다는 실이 컸던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몇 년 후 콤모두스가 막장행각을 벌인 것을 생각해보면, (하드리아누스[7]처럼 이후 내치에 전념했으면 모를까) 이후 행적을 봤을 때 도나우 강 건너편의 오지에서 갑옷 입고 군막 생활하는 게 귀찮아서 그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그때 콤모두스는 지금 나이로 치면 영락없는 대학교 1학년 정도의 철없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며, 후대 로마인들 역시 콤모두스가 단지 놀고 싶고 전쟁터가 따분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휴전 결정은 그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가 최악인 것을 감안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가 폭군이라는 결과론적 입장을 배제하자면) 이는 꽤 합리적인 결정이었는데, 여러 연구자들의 공통된 주장처럼 콤모두스는 16살 이후, 5여년간 부친과 함께 마르코만니 전쟁에 참전하면서 두 눈으로 당시 상황을 지켜본 상태였다. 당시 서방 일대의 로마군, 속주 상황이 심각했고 전쟁 지속시 재정적 부담과 인적, 물적 피해가 커질 상황이었다. 그 예로 마르코만니 전쟁은 이미 제국의 재정에 큰 부담을 주고 있었고, 로마군 내부는 전염병으로 인해 전력이 약해지고 있어 전쟁을 끝마치고 예정대로 엘베 강과 가르파티아 산맥을 거점으로 한 새로운 국경선을 확보한다면 제국 보급로는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기존의 레누스-다누비우스(라인강-다뉴브강) 라인에 비해 전략적 이점이 있다고 해도, 군수품 보급 시간과 재정적 부담, 많은 병력이 필요한 점 등은 로마 입장에서 부담이 될 상황이었다. 안그래도 10년 넘는 총력전 체제 동안 전국에 전시특별세 부과, 방위성금 헌납, 전시국채 의무 구입에 사치 및 유흥 통제까지 걸려있던 것과 마찬가지라 후방의 무의식적 불만이 엄청났으나 단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성군이라서 터져나오지 않았을 뿐이었으므로 평범한 콤모두스는 자신이라면 계속 후방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게르마니아에 기약없이 밑빠진 독에 물 붓듯 예산을 투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중에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이 생각을 안하고 게르마니아 전쟁으로 돈 펑펑쓰다가 반란을 당해서 비참하게 죽었기도 하고.

그래서 콤모두스는 매부 폼페이아누스와 장군들의 강력한 전쟁 지속 요청에도, 다른 분야의 재정, 행정 고문들의 조언을 들은 뒤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이 모인 회의에서 이 요청을 단호히 기각시켰다. 콤모두스는 단순히 휴전을 맺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문들과 원로원의 고견을 듣고 잘 확립된 휴전 조약의 선례를 참고토록 한 다음 휴전협상을 진행시켰다. 따라서 로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정복 구도를 포기하면서, 적어도 수십년 간 다뉴브 강 일대의 안정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모습은 콤모두스가 폭군이자 암군이라는 평가를 생각해볼 때 놀라운 일인데, 실제 콤모두스는 서기 182년 초에 암살 기도를 당하기 전까지는 의의로 배짱도 두둑하고 군왕의 권위도 있었던 황제였다. 즉위 당시의 모습과 결정들을 생각해보면 콤모두스는 무난한 황제였으며, 설령 콤모두스가 완전히 업무를 내팽겨치더라도 주변에게 실무를 맡긴다면 크게 문제될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콤모두스를 보필하던 관료들과 고문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통치했을 시절부터 오랫동안 정계에 몸을 담아 관록과 정치 감각이 있는 인재들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그를 교육한 스승들 역시 상투스처럼 진심을 다해 콤모두스를 보필할 거물들이 수두룩했다. 따라서 콤모두스가 평소처럼 그들의 조언을 받으면 아버지보다는 못하더라도 나름대로 로마를 무난하게 통치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제 아무리 콤모두스가 무난한 후계자였고, 여건상 긍정적 가능성이 많아도, 콤모두스가 로마로 귀환하는 직후부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2.2. 안정적인 첫 2년

콤모두스의 첫 2년은 고대 기록의 악평, 부실한 2년간 기록 부재 속에서도 매우 안정적이었음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로마 귀환 후, 콤모두스가 재위 2년간 가장 힘을 썼고, 본인이 관심 있어 하면서 벌인 조치는 부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군자금, 전시체제 명목으로 데나리우스 평가절하 조치를 내린 것을 수정해, 안정적으로 국고가 돌아가게 한 것이었다. 이 조치로 잠시 데나리우스 은 순도는 79%에서 76%로 낮아지긴 했다. 그러나 단계적 검토 후 상향 및 유지 조치를 명한 콤모두스 아래 로마 국고는 평시체제 아래에서 안정됐고, 평균 은 순도 조정 아래 귀금속 소비량을 절약하면서, 영리하게 물가를 빠르게 정상화시켰다. 이런 방법은 이전의 안토니누스 피우스, 이후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콘스탄티누스 1세 등이 활용한 형태와 똑같았는데, 콤모두스는 이 부분에서는 암살 직전까지 태업 속에서도 본인 인기 유지 비결 재능으로 평할 정도로 매우 영리했다.[8]

이런 조치와 함께 콤모두스는 첫 2년 동안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에게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기부금, 보급품을 시혜하고, 그들을 위문했다. 콤모두스의 이런 기부와 시혜는 일시적이지 않고, 암살 직전까지 계속되어, 그가 암살된 뒤 다섯 황제의 해 당시 페르티낙스가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인기를 끌지 못한 이유까지 됐다.

내정 관리에서 콤모두스는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의 부실한 기록 아래에서도 평균 이상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원로원 고문들에게 의견을 들어 이를 반영하고, 자문회의 기능의 내각화를 추진해 호평을 받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고위 고문단 중 마르코만니 전쟁 지속을 주장했던 군부 쪽을 설득해 그들의 불만을 빠르게 잠재웠고, 프라이펙투스 우르비에 지명된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와 함께 물가 조절, 치안 유지 역시 성공했다.

황실 내부 교통정리 역시 빠르게 해결했다. 콤모두스는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네 명의 여자 자매 중 맏누이 루킬라와 맏매형 폼페이아누스의 지위를 다른 누이 부부들보다 높게 하고, 루킬라에게 아내보다 상석의 선배 아우구스타 지위를 차지하게 했다.

2.3. 누나 루킬라암살 시도흑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는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는 주인공을 어찌어찌 도와줘서 황제로 등극시키려고 하다가, 동생이 아버지를 죽이고 제위를 잇자 주인공을 도와 폭군이 된 동생을 죽이고 로마를 구원한 히로인으로 나오는데 실상은 그 반대였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본다면 그녀가 일으킨 암살 미수 사건 하나가 이 당시에는 무능해도 나름 국정에 열의를 가지고 있고, 자기 절제도 상당했던 동생 콤모두스의 치세와 인생, 그리고 로마 제국의 운명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따라서 동시대 사람으로 콤모두스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디오 카시우스는 루킬라가 일으킨 이 사건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면서, 콤모두스의 천성이 착하고 자질이 훌륭했음에도 주변으로 인해 불행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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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

루킬라는 164년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해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됐지만, 베루스는 게르만족과의 전쟁 후 로마로 귀환하다가 쓰러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루킬라는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이마저도 딸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얼마 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믿음직한 충신이었던,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와 루킬라를 강제로 재혼시켰다. 두번째 남편 폼페이아누스는 외모도 괜찮고 성격이 겸손하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 오늘날의 터키 안티오키아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모, 능력, 성격과 별개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시민권을 얻은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이었고 본인 대에야 비로소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였다. 따라서 본래부터 황후로서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했던 루킬라는 신분의 격을 이유로 44살에 접어든[9] 새남편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고, 재혼 직전까지 새남편을 거절할 정도로 불쾌해했다. 그래서 부부 사이는 자연스레 굉장히 나빴는데,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낳았다.

어머니 파우스티나가 병으로 사망한 이후, 루킬라는 사실상 유일한 아우구스타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아버지가 외치에 전념하는 동안 로마 내정에 간섭해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여장부였고, 어머니 생전부터 실권을 행사할 정도로 자신의 혈통과 지위에 대한 자존심과 야망도 상당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말년부터는 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월권을 행사했고 그 영향력을 키웠으며, 아버지가 죽고 2년 동안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며, 음모를 꾸몄다. 반면, 사춘기 때 어머니 파우스티나를 여읜 콤모두스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을 엄마처럼 의지하고 따랐다고 한다. 특히 맏누나 루킬라와 큰매형 폼페이아누스에게 심정적으로 많이 의지했는데, 정작 친누나 루킬라는 그 반대였다. 이때 루킬라는 황제가 된 친동생 콤모두스를 질투하고, 그 원한이 갈수록 커졌다. 또 루킬라는 자신의 유일한 지위라고 생각된 아우구스타 자리를 공유하게 될 콤모두스의 황후이자 올케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에게 불만을 품었다. 루킬라는 자신의 자리가 되었어야 됐던 황후 자리를 차지한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피나를 미워했는데, 결국 어처구니없는 악감정으로 182년 두 번째 남편의 조카, 루킬라와 내연관계였던 애인들, 콤모두스의 장인, 다른 여동생들의 남편들과 음모를 꾸몄다. 안토니누스 일가 여성들과 친인척, 근위대장, 원로원 등이 대거 참여한 루킬라의 황제 시해미수 사건은 콤모두스의 모든 것을 180도 바꿔버리면서, 그의 치세를 그야말로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사실 로마 귀환 직후, 콤모두스는 180년 10월 22일 정식 개선식을 올렸는데, 자신이 총애한 시종 사오테루스를 자신의 황제 마차에 태우고 개선행렬이 거행될 동안 수시로 사오테루스에게 키스를 하는 애정행각을 공개적으로 보인 행동 외에는 아직 폭군으로서의 광기, 피에 굶주린 과대망상적인 폭군으로서의 언행을 크게 일으키지는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로마인들에게 콤모두스는 "행동이 참 경박하다", “나이답지 않게 철이 없고 유순해보인다”는 비난 듣는 정도 외에는 큰 비판거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맏누나 루킬라는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티나가 현직 황제의 황후가 되면서 자신이 점차 허울뿐인 아우구스타 지위를 갖게 된 것에 대해 상당한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루킬라는 자신이 스스로 콤모두스 암살 계획을 주도해, 182년 암살을 계획했다.

그녀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Claudius pompeianus Quninitianus)가 이때 완력이 상당하고 건장한 콤모두스 암살을 담당했고, 콤모두스 암살 시도는 콜로세움에서 결행되기로 결정났다. 그래서 그는 옷에 단도를 감추고 콤모두스가 콜로세움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가 가까이 오자 그는 숨어 있던 곳에서 급히 달려 나오며 단도를 휘둘렀는데, 바로 황제를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라고 중2병스러운 대사를 외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이 말을 하는 사이에 그는 즉각 호위병에게 칼을 빼앗기고 붙잡혔다. 콤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가 암살되자[10] 그는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두 차례의 암살 사건으로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조사 결과까지 알게 되자 완전히 사람이 변하더니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정상생활조차 힘들어 할 정도로 사람이 변해버렸다.

심문 이후 모든 진실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은 젊은 황제는 보복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냉정하고 무자비했다. 암살범이 본인 앞에서 현장체포되는 순간 원로원을 대놓고 언급했기에 이미 증거는 명확했다. 이는 암살범 심문에서 더 확실해진 탓에 로마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아버지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까지 반역죄에 죄다 엮여 조사받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콤모두스 치세는 피로 얼룩졌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암살미수범 퀸티아누스는 심문 후 처형되었고, 심문 중 암살 주동자가 황제의 맏누나 루킬라, 루킬라가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콤모두스의 조카) 루킬라 플라우티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질녀 부부 등이라고 불어버린 탓에 심문 보고를 들은 콤모두스는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든 조사가 끝나고 반역죄 처벌이 벌어진 순간, 암살음모 주동자들인 황실 직방계 황족들, 원로원, 군대, 근위대 등등 로마 각 분야 인사들이 죄다 처형되거나 연좌죄로 추방되는 대형 사건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별개의 암살 사건이 벌어져 콤모두스의 최측근이자 친구 사오테루스가 살해된 사건에, 근위대장 타루티에누스 파테르누스(Taruttienus Paternus) 가 연루되어 있던 것이 밝혀지면서 콤모두스의 충격은 한층 배가됐다. 그런데 이때 콤모두스는 죽은 친구를 위한 복수 때문인지 몰라도, 파테르누스를 그냥 죽이지 않고 사고로 살해당한 것처럼 위장해 살해했다. 앞서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를 파테르누스와 함께 공동 지휘관으로 임명한 탓에, 정상적이라면 파테르누스 후임을 임명해야 됐지만 이미 제 정신이 아닌 콤모두스는 후임자를 정하지 않고 페렌니스에게 근위대를 단독으로 맡겼다. 따라서 이때부터 페렌니스가 과거의 세야누스, 마크로 사레처럼 제국의 전반적인 통치권까지 황제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

다만 심문과정과 조사 과정에서 루킬라의 남편이었던 폼페이아누스[11]는 모든 암살 사건과는 무관한 것이 드러났다. 따라서 폼페이아누스는 암살범인 친조카, 주동자인 아내와 수양딸과 전혀 관련도 없어 숙청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사위로 삼을 만큼 전폭적으로 신뢰했고 큰누나와의 내외간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으며, 콤모두스 본인 역시 이 사람을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무척 신뢰하고 따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루킬라와 공모했던 5명의 누이들의 남편 - 매형, 매제 - 들 중 3명은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의 공모자로 체포돼 살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다행히 콤모두스의 바로 위 누나인 코르니피키아 파우스티나는 사이가 안 좋은 남편만 암살 음모에 개입해 목숨을 건졌다. 이는 애당초 코르니피키아가 여러 여자 형제 중 콤모두스와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도 영향이 컸는데, 콤모두스는 코르니피키아가 이 음모와 무관하자 크게 안도했다. 반면 바로 아래 여동생 비비아 아우렐리아 사비나는 본인은 오빠 암살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남편이 깊숙이 이 암살에 개입되었던 까닭에, 시댁이 있는 아프리카 속주의 북아프리카 해안 도시로 일시 추방되는 선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반면 루킬라 못지 않게 콤모두스가 따른 둘째누나 파딜라와 남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 그 밑의 누이 안니아 갈레이아 파우스티나 내외는 부부 모두 루킬라가 벌인 음모와 무관했다. 특히, 둘째 누나 부부는 선황 부부의 유지대로 콤모두스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정도로 헌신한 터라 폼페이아누스, 코르니피키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콤모두스에게 신임을 받았다. 아울러 어린 시절부터 그를 교육한 스승들 역시 암살미수 사건과 무관한 터라, 상투스 사례처럼 여전히 신임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 콤모두스는 스토아 철학자로서 평생 일부일처로 절제된 생활을 한 아버지와 전혀 달라지게 됐다. 가장 믿고 엄마처럼 따랐던 맏누나에게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콤모두스는 완전히 자제력을 상실해버렸고, 주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안증세에 시달렸다. 따라서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부터는 의심이 많아지고 정치에 대해 그나마 관심있던 의욕도 잃어버린 데다, 애첩과의 결혼을 위해 조강지처인 황후 브루티아 크리스피나를 간통죄의 누명을 씌워 카프리 섬에 유배했고 며칠 후 자객을 보내 암살하는 파렴치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콤모두스는 본래 또래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쾌활한 사람이었고 꼼꼼했지만,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더 이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피했고 모든 일을 내팽겨치거나 무시했다. 또 그는 낯선 사람을 극도로 경계했고, 신변강화를 위해 주변에 경호를 항상 배치케했다.

그 결과, 콤모두스는 모든 사항을 페렌니스를 통해 전달하면서 자발적 은둔통치를 시작했다. 페렌니스는 통치권을 잡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당연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콤모두스를 사치와 향략에 빠지게끔 했다. 그 결과, 고대 기록에 의하면 루킬라 사건 이후부터 콤모두스는 술에 취해 궁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으며, 수시로 온천을 즐기면서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3백 명에 달하는 첩들과 함께 놀았으며 3백 명의 어린 소년들을 사들여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한 명씩 골라내며 하렘 같은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2.4. 근위대장 페렌니스

페렌니스는 오늘날까지 클레안데르와 함께 약간의 갱생이라도 가능했던 콤모두스를 완전히 망쳐버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그는 후임자 클레안데르와 비교해 능력만 뛰어났을 뿐 그 폐해는 훨씬 심각했고 실제 평도 나쁘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콤모두스를 정치에서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네로에게 헬레니즘 군주다운 모습도 괜찮다고 하면서, 음악과 시, 그리스 문화에 심취케한 세네카, 부루스과에 가까운 케이스였기 때문에, 최악의 간신 세야누스 같은 부류보다 낫다고 볼 수도 있는데 알고보면 콤모두스를 더 심하게 망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왜냐하면 페렌니스가 있던 동안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삶을 보낸 콤모두스는 비슷한 환경을 보장할 인사를 찾고 클레안데르라는 희대의 간신을 기용해 그에게도 똑같이 일처리를 하도록 방치했기 때문이다.

큰누나 루킬라 주도의 암살시도 실패 이후, 급부상하게 된 근위대장 티기디우스 페렌니스는 이탈리아 사람으로, 프라이토리아니를 지휘하는 동안 세야누스, 마크로 같은 악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의 암살을 경험하면서 완전히 멘붕 상태에 빠진 젊은 황제가 새로운 공동지휘관 대신 자신만 믿어준 것을 기회로 삼아, 과거 세네카와 부루스처럼 콤모두스의 통치를 도왔다.

182년 루킬라 주도의 콜로세움 암살미수 사건 이후, 페렌니스가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를 통솔하면서 전반적인 제국 통치권까지 전담하게 된 이후, 페렌니스의 섭정통치는 과거 세네카, 부루스의 사례처럼 적당하게 나라를 돌아가게 일은 잘하면서도,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재산을 축적하고 그 돈을 가지고 황제의 타락한 생활을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운영됐다. 그래서 그는 루킬라에게 죽을 뻔한 암살 시건 경험 후 후유증에 시달리는 황제에게 관심있는 부분에 몰두케하거나 매일같이 파티를 열어주는 등 콤모두스가 정상적으로 통치에 끼여들 생각도 가지지 못하게 했다. 이때 그는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의원 자리까지도 공공연하게 판매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도모하고 황제에게는 그 돈으로 온갖 유흥을 제공해 그 과실을 함께 취하게끔 했다. 아울러 그는 콤모두스를 위해 제국 각지의 미소년 300명, 미녀 300명을 선발해 콤모두스가 사는 황궁에 공급하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따라서 콤모두스는 세간에 얼굴을 비추기 보다는 시끌벅쩍한 파티와 양성과의 난교 등에 빠져 지내기 시작했으며, 재위 기간 내내 정사는 전혀 돌보지 않고 평소 좋아하던 검투사 경기에 매몰돼 검투사들에게 심취했다. 그리고 이런 증세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콤모두스의 검투사 경기 중독 증세로 발전했다.

그래도 근위대장 페렌니스는 나름 유능했고 꽤 일처리를 잘해냈고, 로마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그래서 콤모두스를 망치는 가운데에서도 제국이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하면서, 권력을 지켰다. 하지만 185년 페렌니스는 브리타니아에서 벌어진 병사들의 파업이 터지고, 이때 잠시 정신을 차린 콤모두스가 여기에 개입하면서 몰락하게 됐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진 그가 콤모두스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페렌니스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군단이 장정 대표 1500명을 로마로 보내 황제에게 위험을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기록 외에도 브리타니아 군단이 시위를 한 실제 이유는 페렌니스의 정부가 부패해서였거나 또는 페렌니스가 그해에 일찍이 브리타니아 내의 로마군 사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가혹했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고, 콤모두스는 이 사건 직후 페렌니스와 그의 아들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2.5. 간신 클레안데르(클레안드로스)

콤모두스가 페렌니스의 반란 음모가 사실이어서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의심병과 간신배의 농간에 넘어가 오히려 자신의 충신(?) 페렌니스를 처형했는지 반란의 사실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찌됐던 콤모두스는 브리타니아 장병들의 징계와 탄압을 필요이상으로 한 월권행위, 페렌니스가 부친 생전부터 활약한 페르티낙스 등과의 갈등과 그로 인한 인사상 보복조치 같은 부분이 문제가 있다며 개입한 일은 결국 페렌니스와 그의 아들들의 몰락으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콤모두스는 친정 대신 페렌니스가 맡았던 일을 고스란히 자신의 새 침실 시종인 탐욕스러운 해방노예 출신 관료 클레안드로스(클레안데르)에게 내렸다.

프리지아(프리기아) 출신의 클레안드로스는 노예로 고향에서 로마로 팔려왔다가 황실로 들어가, 황궁 안에서 뛰어난 머리와 눈치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승진하여 최고 관직에 올랐다. 클레안드로스는 어디에서 음모를 꾸미는 악인이 아니었고, 유능했다. 하지만 그는 페렌니스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며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부패했어도 유능한 전임자 시절보다 신임 근위대장 클레안드로스가 실권을 쥔 뒤에도 로마는 계속 막장으로 치달았는데, 문제는 이 인물의 경우에는 그래도 눈치는 보면서 매관매직을 본 전임자와 달리 노골적이고 아첨꾼 그 자체라서 로마 제국에 끼친 폐해는 심각했다.

페렌니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력 역시 황제를 원하는 방식대로 살게 해줄 수 있는 능력 여부에 달려있었기 때문에, 클레안드로스는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자리를 공공연히 판매하는 매관매직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행위로 인해 어느 해에는 무려 25명을 집정관직에 임명하면서 막장통치는 극에 달했다. 또 클레안드로스는 벌어들인 수입의 많은 부분을 자신이 가졌지만, 상당한 몫을 콤모두스에게 주는 방식으로 일처리를 했다.

이 무렵 콤모두스를 노리는 세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주동자는 궁정 관료가 아니라 완전히 외부인으로, 군대를 이탈하고 산적 두목이 되어 갈리아 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마테르누스(Maternus)였다. 그는 187년 3월에 로마에서 열리는 키벨레[12] 축제 기간에 황제를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음모 사실이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고 축제 기간 전에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미 암살사건을 세 번이나 경험한 콤모두스는 182년 초의 첫 암살사건 때 처음 얻은 두려움과 강박증세, 분노조절, 의심 등 정신적 불안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더욱 강하고 많은 수의 호위병을 곁에 두었고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자신의 황실 사유지나 자신이 무척 편안해하던 퀸틸리 빌라[13] 같이 신변보호가 보장된 교외 지역에서 보냈다. 또 그는 무책임했어도 그나마 하는 시늉이라도 하던 재판과 황제의 업무를 피하면서 불안감을 호소하고 신변 보호를 더 철저히 했다.

이런 콤모두스와 클레안데르 공존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서기 190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클레안드로스의 정적들이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클레안드로스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살 수 있는 모든 곡식들을 사들여 인위적인 곡물 부족을 초래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제 주범은 곡물 담당관인 파피리우스 디오니시우스(Papirius Dionysius)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여러 차례의 재난에 이어 전염병과 기근으로 초래된 곡물 부족 상황을 악화시키는 조치들을 취한 후에 그 책임을 클레안드로스에게 뒤집어 씌웠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의 의도대로 로마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대전차 경기장에서는 성난 군중들이 남쪽으로 아피아 가도를 지나 로마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퀸틸리 빌라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클레안드로스의 처형을 요구했다. 클레안드로스는 기병대에게 군중들을 로마로 쫓아 보내라고 명령했지만, 군중들이 밀고 들어오자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옥상에서 공격을 당했고 수도 경찰대마저 민중의 편에 섰다.

시민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야 콤모두스는 사태를 깨닫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는 모든 이들의 표적이 된 클레안드로스를 참수하고 시민들에게 수급을 던져주는 걸로 봉기를 가라앉혔다. 이에 군중들은 기뻐하며 몰락한 권신 클레안드로스의 시신을 마구 다룬 후에 그의 목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환호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았다.

이 사태 이후, 콤모두스는 클레안드로스 같은 사람을 재상에 두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권력을 모조리 장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190년 전부터 둘째 누나 파딜라와 둘째 매형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여러 번에 걸쳐 "클레안데르를 옆에 두면 안 된다"며 경고한 것을 경험하면서 내린 결론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콤모두스의 상태는 여전히 엉망이었고, 황제 업무에 대한 열의도 없어 장악만 할 뿐 매우 무책임했고 일처리도 건성이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고대 로마 황제들은 자주 속주의 총독이나 국경의 군대 지휘관과 서신을 교환했는데, 제국 전역에 부임한 총독이나 지휘관의 수를 합하면 그 수가 실로 어마어마하다보니 보통 황제들이 일일이 서신을 쓰기보다는 몇가지 지침만 내려주면 그걸 가지고 서신을 작성하는 관료들이 살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콤모두스의 숙청극으로 이런 관료들이 아예 공직에서 쫓겨난 데다가, 콤모두스 본인도 통치에 관심도 없다보니 황제가 보내온 편지에는 늘 Vale[14] 하나만 달랑 적혀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희망은 조금이라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먼저 콤모두스의 막장행보는 아직 암살 전처럼 심각한 과대망상 증세를 공개적으로 보이지 않은 터라서 덜 알려졌다. 또 콤모두스의 매형 폼페이아누스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원로원에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과 군대는 확고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콤모두스를 버리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위들인 두 사람은 루킬라의 암살계획 당시 개입하지 않은 이들이었기 때문에, 콤모두스는 맛이 가버린 이후에도 이들의 말을 잘 따르고 신뢰를 계속 보냈다.

이 당시, 고령의 폼페이아누스는 선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든 고명대신이었고 당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불손한 움직임이 나오기 직전 상황에서도 끝까지 안토니누스 왕조와 콤모두스에 대한 신뢰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 그는 이 시기동안 세 차례나 제위를 제안받았음에도 모두 거절했으며 그때마다 마르쿠스와 콤모두스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언급했다. 따라서 의외로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의 막장극에 질린 나머지 나이와 눈병으로 인한 이유를 들어 은퇴해버리고 교외의 시골별장으로 들어가버렸다고 한다.[15] 반면, 누나 파딜라의 남편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복점관과 원로원 의원을 지내면서 끝까지 로마에 남아 장인의 유지에 따라 콤모두스를 도우려고 했던 고문으로 있었다. 또 둘째누나 파딜라 부부는 콤모두스를 돕기 위해 카파톨리노 언덕의 황궁 일부에 거주했다고 한다.

2.6. 검투사 황제

20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인 190년 직전부터 콤모두스의 부도덕하고 광적인 행동은 정신불안으로 점차 심해졌다. 특히 과대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클레안드로스가 죽고 난 뒤였는데, 이때 콤모두스는 애첩 마르키아, 새로운 침실 하인이 된 그리스인 해방노예 에클렉투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레토를 형식적인 친정체제에서 신뢰했다.

오늘날 콤모두스의 과대망상 증상은 계속되는 암살 시도와 시민들의 봉기로 인해 목숨에 불안을 느낀 불안감 때문에 정신이 불안해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따라서 콤모두스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데도 신격화를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황제의 아들 콤모두스가 아니라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라고 불러 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러한 요구를 한 이유는 병약했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건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아버지를 경멸한 것이 이유로 추정된다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아마도 계속 암살에 시달린 탓에 스스로를 불사신이자 가장 강한 힘을 가진 헤라클레스로 스스로를 대입시켰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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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를 흉내낸 콤모두스를 묘사한 흉상

친정과 동시에 콤모두스는 마침내 자신을 강인함과 용기의 대명사로 불리는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사자 가죽을 자기 머리에 두르고 곤봉을 들어 헤라클레스를 흉내낸 자신의 조각상을 남기게 했다. 위에 보이는 저 조각상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콤모두스는 헤라클레스의 환생을 자칭한 뒤로, 직접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과 싸우기도 하는 등 다양한 기행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검투 시합을 예행연습한 장소로 추정되는 미니 콜로세움까지 발견됐다.

검투사로서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실제로 엄청난 완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매 싸움마다 전승무패였다. 물론 전승무패의 기록 자체는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곤봉과 칼에 희생당한 자들은 검투사들보다는 주로 본인이 스스로 조달하게 한 범죄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문 검투사들과 싸운 경기의 승리는 반드시 상대의 항복으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와 대결한 검투사들은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베스티아리로서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검투사들 쪽에서 먼저 죽고 싶지 않아 항복했을지언정, 그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서 억지로 상대를 지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그의 무서운 힘과 기술은 베스티아리로서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기린, 얼룩말을 포획하고, 코끼리 3마리를 제압했으며,[16] 하루에 100마리의 사자을 때려죽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 외 각종 맹수들을 무대에서 죽이곤 했다고 전해진다. 황제 폐하 축지법 쓰신다 다만, 이런 베스티아리로서 기록도 곧이 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얼마든지 기술적으로 동물들의 건강 상태를 악화시키거나 여러 장치를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단순히 완력이 셌을 뿐만 아니라 잘 훈련된 전투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궁술에 능했다고 한다. Augustan History에 따르면 전력질주하는 타조도 활로 쏴 죽였다고 하는데, 타조의 속도는 최대 70 ~ 90 km/h 가량이다.

콤모두스는 192년 11월에 열린 플레부스의 경기가 있는 동안 투기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묘기를 보여주었다. 디오 카시우스와 헤로디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그 장면을 적었다.
첫날 그는 난간에서 활을 쏘고 ...(중략)... 혼자 힘으로 100마리의 곰을 모두 죽였다. 다른 날들은 위층 자신의 자리에서 투기장 바닥으로 내려와 자신에게 다가오는 가축들을 모두 베어버렸으며 ...(중략)... 그는 또한 호랑이, 하마, 코끼리도 제압을 했다. 그는 이러한 묘기를 보여주고 난 뒤에는 물러났다가, 다시 점심식사 후에 검투사가 되어 격투를 벌였다. 그의 격투 방법과 입은 갑옷은 '세쿠토레'의 것이였고 ...(중략)... 그는 오른손으로 방패를 잡고 왼손으로는 나무 검을 쥐었으며,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사뭇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 디오 카시우스, 73. 18-19
그의 사격술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것에는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고 ...(중략)... 한번은 그가 끝이 초승달 모양인 화살로 미우레타니아의 타조들을 쏘았는데, ...(중략)... 콤모두스가 화살로 타조들의 목 맨 윗부분을 맞추어 쓰러뜨렸더니, 새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다녔다.
- 헤로디아누스, 1. 15

콤모두스는 천성적으로 순하지만 단순했고, 나르시시즘이 강하고 겁이 많았다. 그래서 디오의 주장처럼 사치스럽고 편안한 생활에 젖었던 클레안데르 시대 이후부터는 음란하고 잔인한 습관에 빠져 이것이 제2의 천성이 되었는데, 이 시기부터는 여러 사람들을 죽이거나 그들을 시기하고 증오했다. 따라서 총독 율리아누스, 곡물 감독관 디오니시우스는 콤모두스 명령으로 피살됐고, 시리아 출신인 율리우스 알렉산데르는 다른 사람이 죽여야 할 사자를 창을 던져 먼저 죽인 죄목으로 처형됐다. 더군다나 이 시기부터 콤모두스는 검투사 활동 외에도 프로 전차 경주 기수로도 활동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프로 이종격투기 선수 활동을 한 것을 넘어, F1 선수이면서 프로 축구, 야구 선수와 같은 인기를 누린 전차 기수로도 활동한 것이다. 콤모두스는 검투사 실력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그는 프로 전차기수로도 그 능력이 상당해, 30대의 전차들과 2시간동안 레이스를 펼치더라도 제 기량을 보일 정도로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대부분 귀족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팀이나 전차기수를 후원했지만,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명문귀족의 자제, 원로원 의원, 장군 중 전차기수로 활동한 이들이 있긴 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의 황녀 대 안토니아의 남편인, 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운 명장이자,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및 제국 동부 외교 분야의 실력자임에도 젊은 시절부터 전차기수로 활약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조카사위로 낙점되기 전부터, 뛰어난 헌신과 인내심을 전차기수로서 증명해 인기와 명성을 누린 슈퍼스타였다. 비텔리우스의 아버지의 예처럼, 원로원 의원이나 황족, 관료 중 전차 경주 분석과 해설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은 교양 부분에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어 입신양명의 한 가지 재능으로 인정받았다. 황제나 집정관들 역시 비슷했다. 유흥 문화 후원을 통해 적당히 평민들의 환심을 산 아우구스투스는 잔혹한 검투사 경기보다는 전차경주를 더 선호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로마인들에게 신화 속의 쌍둥이 카스토르와 폴룩스 형제로 찬사받은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는 전차경주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들의 이름으로 여러 번에 걸쳐 전차경주를 개최했다. 유흥 문화와 연회라면 코빼기도 안 비춘 티베리우스 역시 가문 홍보를 위해 벌인 전차경기에는 한 두 번은 얼굴만 살짝 비출 정도였다. 플라비우스 왕조 황제들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콤모두스 선대 황제들 역시 전차 경주에 열광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개인후원했다. 그러나 콤모두스나 네로의 예처럼 황제가 선수로 나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이는 실력이 뛰어났다고 해도 면죄부를 받기 어려웠다. 콤모두스가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은 또 있었다. 그는 황제로서 중립을 지킨 아버지, 숙부와 달리 중립을 지키지 않고 늘 녹색당을 열렬히 응원하고 녹색당 유니폼을 입고 돌아다녔다. 황제의 하루 일과 역시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일상과 비슷했다. 아침에 일어나 검투사들이 받는 운동 스케줄을 소화하고, 마사지를 받은 뒤 휴식을 취했다가 스파링을 하거나, 야간 추가 훈련을 하고 다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한 말인데, 그 외의 시간에는 황제가 마땅히 해야 할 업무를 측근들에게 맡겨두고,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겼다.

이 시기부터 그는 검투사 경기에 앞서 입장하기 전, 늘 금으로 장식된 새하얀 튜닉 망토를 두르고 인도에서 건너온 최고급 재질의 그리스식 의류에 헤르메스 지팡이 등을 패용했다. 그는 검투사 경기에 나가기 전, 무척 예민했다. 다행이라면 천성이나 제2의 천성 모두 악한 사람은 아니라서, 후일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카라칼라 등의 일부 황제들처럼 달리 황궁이나 사저에서 노예들을 폭행하거나, 칼을 들어 그들을 협박하지 않았다. 따라서 디오에 따르면,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보인 무용담 외에는 황궁, 사저, 원로원 회의장 같은 공간에서 콤모두스가 칼을 휘두르거나,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콤모두스의 행동은 갈수록 미친 사람과 비슷해졌고, 이는 그가 원로원과 사이도 최악이 되었던 이유가 됐다. 왜냐하면 원로원 역시 자신들을 포함한 계층 전체가 콤모두스의 막장행동 탓에 부도덕함과 잔인함의 동조자로 질타받고, 콤모두스의 과대망상적 행동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상술한 대로 콤모두스가 디오,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처럼 192년 11월 수많은 맹수들을 혼자 힘으로 다 죽이는 초인적인 능력을 공개할 당시, 황제는 원로원 의원들을 손수 초대해 관람하도록 명령했다. 따라서 콤모두스가 위에서 언급된 14일간의 콜로세움 검투사, 전차 경주에 선수로 직접 참여해 월등한 기량을 선보일 때, 세습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오 카시우스 등은 반강제로 이 경기를 모두 관전했다. 그런데 처남의 막장행각을 참다 못한 매형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는, 동서지간인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를 비롯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달리 유일하게 콜로세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표면상 이유는 건강상 문제였다고 하는데, 디오에 따르면 이건 핑계였다. 대신 그는 자신의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를 대리인 자격으로 내보낸 뒤, 아들을 통해 자신이 콤모두스의 안녕과 선전을 빈다고 의견을 밝혔다. 허나 폼페이아누스는 이 행동을 통해, 변해버린 처남 콤모두스에게 공개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폼페이아누스가 장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들고, 콤모두스를 지켜주겠다는 것만은 지켜주기 위해 아들을 보냈을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이보다 앞선 191년, 로마 시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반이 소실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많은 부유층 로마인들이 귀중품을 보관하는 곳이었던 팍스 로마나의 상징인 평화의 신전까지 불에 탔고,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에서 가져온 것으로 짐작되는 성상과 베스타 신전이 파괴되기도 했다. 도심의 많은 지역이 큰 타격을 입어 대대적인 복구 작업과 재건축이 필요했다. 다행인 건, 놀고 먹던 콤모두스가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지휘해 민중들의 불만이나 원로원의 지탄은 없었다. 그는 사치스럽고 정치에 무관심해도, 의외로 본인의 호주머니에서 많은 비용을 기부해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선행도 베풀었다. 하지만 로마 대화재가 진압되고, 사태가 수습되자 콤모두스는 자신이 제2의 로마를 창건했다며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이라고 이름을 짓고 달력에서 달의 이름을 자신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꾸라고 했다. '조국의 아버지', '인빅투스', '펠릭스', '헤르클레우스' 등의 온갖 칭호를 얻어낸 것도, 황제 본인이 명예로운 경력의 모든 관직과 호민관, 원로원, 근위대장, 관료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면서 본인을 현세에 내려온 불사신이자 헤라클레스의 환생 등으로 자처한 것도, 가장 유명한 본인의 조각상을 만들게 한 것도 바로 이때다. 대화재 이후 로마 교외에서 황금이 치렁치렁 장식된 말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수많은 경쟁자들과 전차기수로 2시간 동안 레이스를 펼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렇게 되니 콤모두스는 광기를 넘어, 통제불능의 저주가 됐다. 모든 로마인들은 콤모두스가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렸으며, 제국을 덮친 전염병과 함께 로마에 내려진 저주라고 생각했다.

3. 암살

치세 마지막 몇 년 동안 콤모두스는 점차 원로원 의원들에게 불안감을 느끼고 적대적이 되었다. 로마가 재건되었으나 황제는 신의 화신임을 자처했고, 많은 의원들이 파면되어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그나마 죽이지나 않은게 다행이었을 거다. 검투사 활동을 하면서 왼손으로 잘려나간 타조의 머리를 쥐고, 오른손으로는 피 묻은 검을 휘두르며 관중석의 원로원 의원들을 향해 걸어오면, 오락거리는 협박 그 자체가 되었을 테니. 그것은 타조에게 한 것처럼 의원들을 죽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의 광기는 192년 마지막 몇달 동안 절정에 이르렀다. 192년 11월의 시합들이 끝나고 콤모두스는 새해를 맞으며 신을 넘어 로마의 새로운 건국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로 재건한 것을 축하하고, 황제를 '로마의 건국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선출된 집정관 두 명을 모조리 죽이고, 다음 날 자신이 검투사 복장을 하고 스스로 검투사 집정관까지 되려고 했다는 도시괴담이 돌았던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와 이탈리아에는 피에 굶주린 흉흉한 분위기가 돌았고, 콤모두스의 측근과 첩실조차 황제의 광기에 불안감을 호소했다는 점이다. 로마에서는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으며, 정적들은 황제의 변덕에 벌벌 떨었다. 황제의 최측근들도 정신분열, 환각, 지나친 과대망상에 시달린 그에게 치를 떨며, 로마 시민들의 갑작스러운 분노가 폭발하여 불러올 수 있는 파멸을 미리 막아보기 위해 축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는 데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장한 채 지내는, 그것도 맨손으로 싸워도 인간병기였던 황제를 죽일 방법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음식에 독을 탔으며, 그가 독 때문에 욕실에서 토하고 괴로워하는 틈을 타서 그의 레슬링 교관이자 스파링 파트너 나르키수스를 보내서 목 졸라 죽이게 된다.[출처1-17][18]

어처구니 없게도 암살의 원인은 지독한 검투사 덕질 때문이었다. 그가 일도 안 하고 범죄자들과 맹수들을 경기장에 동원한 후 때려죽이며 스트레스를 푸는 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헤로디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콤모두스는 아예 검투사 숙소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검투사질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와 애첩 마르키아가 어이없어하며 이를 말렸다. 황제가 검투사 놀이를 하는건 둘째치고라도 신분상 천민인 검투사와 똑같이 숙소에서 살겠다는 건 황제의 체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측근들이 지극히 상식적인 만류를 했음에도 되려 콤모두스는 화가 나서 오히려 근위대장과 애첩을 처형하라는 명령서에 서명했고 이를 알게된 그들이 결국 살기 위해서 레슬링 교관과 짜고 콤모두스를 죽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사실 그와 별개로 콤모두스를 죽여서 다음 황제를 일찍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이 그전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정적들이 암살 계획을 보조했다.

황제의 시신은 콤모두스가 죽일 계획이었던 집정관 당선자 가운데 한 사람인 파비우스 킬로(Fabius Cilo)에게 넘겨져 밤 사이에 매장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은 시신을 파내 일반 죄수처럼 시내를 끌고 다녀야 한다고 맹렬히 주장했지만 그것까지는 이뤄지지 않았다.
"도미티아누스보다 더 야만적이고 네로보다 더 악랄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한 대로 그도 당하게 하라."[19]

그런데 콤모두스의 시신은 놀라울 정도로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유해는 한겨울이라서 그대로 매장되었다고 해도, 테베레 강에 던져지는 굴욕도 없었다. 제위에 오른 페르티낙스 황제[20]의 명령으로 콤모두스의 시신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영묘 내 부모와 숙부가 묻힌 곁으로 이장되었다. 다만 기록말살형은 그대로 집행됐는데 이마저도 196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자신과 장남 카라칼라의 정통성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철회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베루스와 콤모두스 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베루스는 콤모두스의 현역 황제시절이자 세베루스 자신이 군단장이었을 때 콤모두스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고, 또한 세베루스는 콤모두스가 황제로써 부적격자라는 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베루스가 콤모두스에 대한 기록말살형 철회를 명령한 까닭은, 단순히 정치적인 명분을 쌓고 경쟁자인 알비누스의 지지자가 다수 포진해있는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기록말살형 철회는 원로원 입장에서는 크나큰 굴욕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원로원의 반발을 일정부분 받아들여 신격화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이는 기록말살형 철회가 순수하게 정치적인 목적에서 이루어 졌다는 반증이 된다. 공인된 폭군을 황제 대우하는 걸 넘어 신격화까지 했다가는 역으로 세베루스 본인의 권위까지 떨어뜨리는 격이 되기 때문이었다.

[1]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의 요절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개인적인 일이라고 말했다고 해도, 엄연히 법적으로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어린 황태자의 죽음이자 국가 정부 인사 중 한명의 죽음이었다.[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당시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래서 평소 스토아 철학과 로마인들의 교육 방법에 따라 성장한 사람답게, 슬픔을 자제하며 참았다고. 그러나 어린 막내아들을 못 잊은 탓에 겉으로 밝히지만 않았을 뿐 개인적으로는 무척 슬퍼했다. 따라서 과거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가 대 드루수스 요절 후 그랬던 전례처럼 자신의 집무실과 황궁 곳곳에 어린 막내아들의 조각상들을 설치하고 조각들과 대화하면서 막내아들의 요절을 애써 참았다고 한다.[3] 콤모두스의 수사학 스승으로, 본국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 출신의 원로원 의원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때부터 중용된 핵심인사였다. 콤모두스가 완전히 폐인이 된 이후에도 관계가 좋았고, 콤모두스를 끝까지 갱생시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최근 발굴된 비문에서 드러나듯 그는 제자 콤모두스 치하에서도 180년 이집트 장관, 185년 집정관 등 주요 요직을 맡으며 정서적으로 불안한 콤모두스를 보필했다.[4]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거짓 정보를 듣고 확신을 가졌을 정도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몸상태는 언제 서거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이는 파우스티나 황후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녀를 대신해 로마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내정에 간섭한 황실여인은 길거리 내 떠도는 소문과 달리 콤모두스의 맏누이 루킬라였다고 한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건은 소 파우스티나의 이미지를 과거 악녀로 소문난 리비아 드루실라와 같은 황후로 만들고 말았으며 콤모두스가 폭군으로 단죄된 이후에는 온갖 뜬소문까지 결합되어 소 파우스티나는 악녀로 이미지가 굳어지게 됐다.[6] 게르만 부족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하면 정치적,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기에 로마군의 상대가 되기 힘들었다.[7] 트라야누스 황제가 파르티아를 반 죽여놓은 상태에서 죽은 후 파르티아와 화해했다.[8] 이런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듯, 고대 기록 중 콤모두스를 면담한 이들의 직간접적 경험에 따르면, 콤모두스는 완전히 악습에 젖은 상황에서도 귀찮아 하면서도 보고가 올라오면 그 맥락을 제대로 파악해 완전히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9] 폼페이아누스가 125년생이라는 가정 아래 예상된 나이로 44살이라는 것은 추정나이다. 실제 나이는 이보다 살짝 어린 30대 후반에서 40살 정도인 것으로 추측된다는 의견도 있다.[10] 별개의 싸움 중에 일어난 일이었을 것이다.[11] 누나의 연인관계(?)라는 설정 때문인지 이 시대를 다룬 2차 매체에서는 반드시 이 사람과 루킬라를 연상시키는 캐릭터가 등장한다.[12] 대지의 여신으로 가장 위대한 어머니로 숭배된다고 한다.[13] 퀸틸리 형제 소유의 고급빌라였지만, 콤모두스가 이들에게 빼앗아 차지한 대저택이다. 현재도 그 뼈대는 유적으로 남아있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14] 라틴어로 작별인사. 잘 지내라 혹은 안녕 정도의 의미.[15] 콤모두스가 암살된 이후, 폼페이아누스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원로원 의원으로 복귀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인 193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16] 흔히 대중들이 생각하는 사하라 사막 이남에 서식하는 거대한 아프리카코끼리(Loxodonta africana)가 아닌, 북아프리카산 난쟁이코끼리(Elephas falconeri)라고 어깨 높이 2미터쯤의 작은 종이다. 현재는 야생에서 멸종. 물론 현생 아프리카코끼리 등의 거대한 코끼리와 비교할 때나 작고 약하지 사람보다는 훨씬 더 강했을 것이다. 그리고 얼룩말은 초식동물이라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그 숱한 세월동안 인간이 길들이길 포기할 정도로 성격이 포악한 녀석이다. 하물며 기린은 현재로서도 전차급인 생물이고.[출처1-17] 황제사(Augustan History) 17.1[18] 이러한 기록으로 보자면 선술한 100마리 맹수 죽이기나 전승무패의 경력 또한, 다소의 조작이 들어가긴 했을지언정 실력이 어느 정도 받쳐줬기에 가능했던 경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즉,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 조작된 경력이지만 콤모두스 황제의 무력이 웬만한 무관을 압도하는 급이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19] 네로는 사치나 코르불로와 같은 장군들을 위협이 될 지 모른다며 자결을 강요한 것을 비롯해 원로원 측에서 깔 만한 거리가 많았던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그저 기득권인 원로원을 무시하고 로마가 공화정이 아닌 제정 국가가 되었음을 분명히 한 인물이었기에 야만적이라고 욕먹은 것일 뿐이다. 도미티아누스는 군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20]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의 누나 코르니피키아와 불륜 관계였고, 서로를 애뜻하게 여긴 연인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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