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02 20:50:40

초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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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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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 초(楚)나라 21대 왕
회왕
懷王
미(羋)
웅(熊)
괴(槐)
아버지 초위왕(楚威王) 웅상(熊商)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96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28년 ~ 기원전 299년

1. 개요2. 재위 초기3. 합종책4. 장의에게 끌려다니다5. 장의가 떠난 이후6. 최후7. 평가8.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전국시대 초나라의 37대 군주, 21대 . 경양왕의 아버지다.[1] 유세가 장의(張儀)에게 놀아나 아버지 위왕이 쌓아 놓은 국력을 기울게 만든 암군이다.

2. 재위 초기

초 위왕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초 회왕 원년(기원전 328년), 위나라(魏)에서 초나라에게 잃은 땅을 수복하려고 왔다.[2] 그때 초나라의 경산을 치려 했으나 초나라 측에서는 반격하지 못했다.

초 회왕 6년(기원전 323년), 주국[3] 소양(昭陽)에게 명령해 위나라를 침략해 양릉의 8개 성을 얻었다. 초 회왕은 그 기세를 타고 제나라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제위왕은 진진을 보내 설득하여 제나라를 치는 일이 백지화되었다.[4]

3. 합종책

초 회왕 10년(기원전 319년), 공손연의 합종책을 받아들여 제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조나라, 연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초 회왕 11년(기원전 318년), 회왕은 제나라,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연나라 등의 추대로 종약장[5]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진(秦)나라의 함곡관으로 진격했으나 서로간의 이해관계 탓에 돌파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4. 장의에게 끌려다니다

초 회왕 16년(기원전 313년), 초나라는 제나라와 함께 진(秦)나라의 곡옥(曲沃) 땅을 쳤으나[6] 진나라의 반격으로 그 계책은 실패했다. 그리고 진나라가 장의를 보내 상오의 600리의 땅을 주겠으니 제나라와 우호를 끊으라고 했는데, 초 회왕은 제나라 사람인 진진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장의의 말을 그대로 믿으며, 제나라 왕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면서까지 우호를 끊었다. 그러나 장의는 나중에 입을 쓱 닦고 "저는 600리 땅을 주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제 봉토 6리라도 가져가시겠습니까?"라고 하여 초 회왕을 열받게 했다. 그 후 초 회왕은 분을 삭이지 못해 진나라와의 우호를 끊고 침공하려고 했다.

초 회왕 17년(기원전 312년), 결국 진나라의 반격을 받게 되었다. 초나라는 단양에서 패하고, 한중 땅을 잃었으며 남전에서 보낸 초군도 진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초 회왕 18년(기원전 311년), 진나라에게 초나라의 소릉 땅까지 뺏기는 등 고난은 계속 이어졌다. 같은 해에 진 혜문왕은 한중의 절반을 나누자고 했는데, 초 회왕의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장의 그놈을 원한다! "

그래서 진 혜문왕은 머뜩치 않은 대로 장의를 보냈다. 그러자 초 회왕은 장의를 죽이기 위해 날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장의는 미리 초 회왕의 측근인 근상과 왕의 정실이자 총애하는 부인인 정수를 매수해 그들의 힘으로 살아 돌아왔다. 이것을 안 굴원은 탄식해마지 않으며 장의를 잡아 죽이라고 했다. 이에 마음이 변한 초 회왕이 장의를 추격하게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5. 장의가 떠난 이후

초 회왕 23년(기원전 306년), 월나라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제나라와 힘을 합해 월왕으로 추대된 무강을 죽였다.

초 회왕 24년(기원전 305년), 제나라가 초나라와의 동맹을 끊고 진나라와 손을 잡았다.

초 회왕 25년(기원전 304년), 진나라의 소왕과 황극 땅에서 맹약을 맺고 상용 땅을 돌려받았다.

초 회왕 26년(기원전 303년), 제나라가 한나라 및 위나라와 연합해 초나라를 치니 초나라는 진나라에 태자 웅횡을 인질을 보내고, 진의 구원군으로 이를 막아냈다.

초 회왕 27년(기원전 302년), 진나라에 인질로 간 태자 웅횡이 진의 대부와 사사로이 싸우다가 그를 죽이자 초나라로 도망쳤다.

초 회왕 28년(기원전 301년), 진나라가 작년의 일을 보복하기 위해서 제나라,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초나라를 쳐서 초의 중구를 빼앗았다.

초 회왕 29년(기원전 300년), 진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쳐서 초의 장수 경결을 죽이자 결국 제나라에 태자인 웅횡을 보내면서 화친했다.

6. 최후

초 회왕 30년(기원전 299년), 진 소양왕이 초나라의 성 8개를 취하고 맹약을 맺자는 이유로 불렀다. 초 회왕은 처음에는 소저의 의견을 듣고 의심하여 가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은 왕자 웅자란의 설득으로 군대를 거느리고 갔다.[7] 그러나 송양공과는 달리 군대를 끌고 갔지만 진나라는 회왕을 마치 신하처럼 다루었고, 무와 검중 땅을 내놓으면 화친하겠다고 했다.

군대를 끌고 가도 진나라의 땅에서 억류당하는 데는 어쩔 수 없어서 결국 초 회왕은 송 양공보다도 처참한 꼴을 당했는데, 결국 진나라에서 나오지 못하고 끝내 다시 돌아가 초나라의 왕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초나라 측에서는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진 태자 웅횡을 귀국시켜 그를 왕위에 올리니 경양왕이다.

초 경양왕 1년 (기원전 298년) 초 회왕을 붙잡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데 분노한 진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해서 50,000명의 병력을 죽이고 15개의 성을 빼았았다.

초 경양왕 2년(기원전 297년), 간신히 진나라를 빠져 나갔으나 조나라에서 억류되었고, 다시 위나라로 달아났으나 거기에 진나라의 추격군이 있어 결국 잡히고 말았다. 이로 인해 초 회왕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초 경양왕 3년(기원전 296년), 초 회왕이 함양에서 죽고 말자 진나라는 그의 시신을 초나라에 돌려주었다. 초나라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안타깝게 여겼고, 진나라와 초나라가 절교했다. 이 일을 본 열국의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를 정직하지 않다고 여기었다.

7. 평가

초 회왕은 국제관계에 있어 신의가 없었으며 말 뒤집기를 밥먹듯이 했으므로 다른 국가에게 신뢰를 잃었다. 진 효공이 상앙의 변법을 통해 진나라를 강대국으로 변모시킨 반면, 회왕은 초나라라는 배를 이끌기에 그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자존심을 지키다 진나라 땅에서 비참하게 객사했으므로 초나라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훗날 항량초의제를 왕으로 추대할 때 그를 회왕이라 칭했는데, 이는 전국시대에 망한 초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정치적 정당성을 부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8. 대중매체에서

8.1. 미월전

초 위왕이 제나라와 월나라를 공격하러 나간 사이 국정을 살핀다. 위왕이 돌아온 후 향비가 내쳐졌다가 돌아오고 향비의 덫에 걸린 왕후가 폐위될 위기에 놓이자 아버지인 위왕을 찾아가 어머니를 용서해 달라며 빈다. 하지만 이게 독이 되어 위왕이 그런 사악한 여자를 용서해 달라는 거냐며 태자를 비난하고 태자에게 능력이 없고 미색만 밝힌다며 쌍욕을 한다. 태자는 화가 나서 나가버리고 굴원이 들어와 위왕에게 태자 문제를 거론한다.

다음 날 위왕은 향비 사건의 충격과 출정 당시의 부상, 그리고 태자의 어그로로 술을 마시다가 쇼크가 와서 갑자기 죽는다. 이 사건으로 어머니가 폐위되지 않았으며 태자가 무사히 왕위에 오른다. 위후가 된 어머니는 자신의 꿈에 위왕이 나와 미월과 미융이 보고 싶다고 했다며 순장 명단에 넣을 것을 요구한다. 회왕은 자신의 형제들을 순장시킬 수 없다고 말하나 위후의 위세에 눌려 허락한다. 거희의 희생으로 미월과 미융 남매는 간신히 살아나고 묘지기로 쫓겨난다. 이후 후궁들을 뽑는 간택에서 자신의 액취증으로 인하여 하나같이 후보자들이 대놓고 코를 막는 등의 행위를 하자 불쾌해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정수는 태자의 액취증을 잘 둘러대고 기분 좋게 말하여 총애받는 후궁이 된다. 정수와 위후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선왕의 제사를 갔다가 정수가 뱀에 물리게 되는데 미월이 등장하여 구해주자 고마워하여 정수는 회왕에게 언제까지 공주와 왕자를 밖에서 키울 거냐며 궁으로 불러들이라 하고 미월 남매 모두가 궁으로 가게 된다.

화씨벽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는 장의를 규고가 구해주고 장의는 회왕을 만나 자기가 미인에 대해 엄청 잘 안다고 말해 정수를 언짢게 한다. 정수는 장의와 거래를 하고 장의는 회왕앞에서 정수를 보더니 연기를 하며 자기는 지금까지 이런 미인을 본 적이 없다며 세 치 혀를 놀리고 회왕은 절세 미인이 자신의 후궁이라 좋아한다.

그 와중에 진나라 혜문왕이 정실 왕후가 죽은 후 초나라로 오고 초 왕실의 공주를 왕후로 삼을 생각을 한다. 위후는 미주를 제나라로 시집보낼 생각이었고 회왕은 일부러 못생긴 수라간 궁녀에게 공주 옷을 입히고 진왕에게 자기 동생이라며 보여준다. 모든 대신들이 웃고 진왕은 덕이 많다고 하며 이미 미주를 본 적이 있기에 자신만만해 한다. 위나라에서 공주가 시집을 오는데 미인이라 회왕이 좋아한다. 위기감을 느낀 정수는 장의에게 해결책을 물어보고 일부러 위미인에게 친한 척을 하며 코가 못생겼으니 가리라고 하고 액취증이 있는 자신의 냄새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생각한 회왕은 위미인의 코를 잘라버리고 그때문에 위미인은 자살한다. 화친 문제에서 회왕이 진나라와의 결혼을 피하려다가 진왕이 칼을 들이대며 협박한다. 이후 소사명대제에서 미주 공주가 자기 여동생인데 이쁘고 춤 잘 춘다고 자랑했다가 나온 건 미월이라 당황해하나 정수가 잘 둘러대고 혜문왕도 미월을 칭찬한다. 미월과 황헐이 잘 어울리고 황헐이 결혼시켜 달라고 하자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위후가 방해한다.

미주가 진나라 왕후로 시집간 후 계속 편지를 주고 받는다. 회왕은 자기 좋은 말만 듣는 유약한 왕이라 간신배 근상을 총애하고 충신 굴원을 등한시한다. 미주가 시집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장의의 600리 사건으로 회왕이 진나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미주가 막아보려 하지만 혜문왕에게 욕만 듣고 진나라를 벌주려던 초나라는 오히려 진나라에 당하여 성을 빼앗긴다. 그 이후 미주는 이 사건으로 회왕이 자신에게 큰 실망을 했다며 화씨벽이 진나라에 들어오자 구입해서 회왕에게 선물을 주려 하다가 되려 자신이 폐위될 뻔 한다. 파촉과 한나라 사이의 전쟁에서 진나라는 파촉 정벌을 택하고 성공하자 초나라로 가는 길이 뚫려 미주에게 화를 내는 편지를 보낸다.

이후 미주의 아들 무왕이 죽고 정권이 미월에게 넘어가자 사신으로 근상을 보낸다. 미월이 근상에게 뒷돈을 주어 근상은 미월이 별 것 아니며 초왕에게 의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회왕은 의기양양해한다. 그리고 미월이 바란대로 미융을 보내고 소양왕과 초나라 공주와의 혼인, 태자와 진나라 공주의 혼인을 진행하기로 한다. 이때 정수가 자기 아들 미란은 아직 혼인도 못했다고 징징거려서 태자가 아닌 미란에게 진나라 공주를 시집보내기로 한다. 이 기세를 몰아 정수는 자기 아들이 태자가 되길 바라고 근상과 짜고 진나라 인질로 태자를 보내자고 한다. 하지만 이는 상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회왕은 생각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태자 미횡을 진나라 인질로 보낸다.

진나라 안에서 미주가 함양을 떠나 다른 곳에 있고 초나라로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는데 정수는 조용히 살 것이지 짜증나게 군다며 편지를 태워버리고 초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자 미주는 절규한다. 태자 미횡이 근상과 용예의 덫에 걸리고 진나라에서 사고를 친 것처럼 꾸며진다. 진나라와의 전쟁이 불리해지자 초 회왕은 직접 교섭을 위해 진나라로 향하고 용예의 덫에 걸려 진나라에 갇히게 된다. 초나라의 왕위가 비게 되자 정수는 선실전에 자리를 잡고 자기 아들 미란을 근상과 함께 적극 추천한다. 황헐은 새 왕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굴원과 소양이 태자 미횡을 제나라에서 데려오며 정수를 끌어내린다.

이런 사실을 모른 초 회왕은 진나라에서 주는 대로 밥 먹고 잠 자면서 생활하다가 태후 미월이 와서 알려준다. 초 회왕은 처음에 미월에게 서녀인 너 따위가 하면서 비난하고 미인을 주지 않는다며 화를 낸다. 그런 상황에서조차 미인 타령하는 찌질이 회왕 회왕은 자신들의 충신 근상과 소양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미월은 걔들이 니 아들 왕으로 올려서 너 선왕 되었다고 하자 회왕은 절규하며 불효 자식이라며 미횡을 욕한다. 자기를 초나라로 보내면 초나라 절반을 주겠다며 미월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나 미월은 손을 뿌리치며 아버지 위왕 때 초나라가 얼마나 강대국이었는데 간사한 후궁과 간신배 근상을 총애하여 초가 위상을 잃었다며 냉정하게 떼어버린다. 이후 몰래 진나라를 빠져나가려다가 실패하고 홧병이 나 죽는다.


[1] 아들인 초경양왕은 약칭 시호로는 초 양왕으로 불리기도 한다.[2] 초 도왕 이후 위나라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초나라가 위나라의 영토를 빼앗은 일이 있었다.[3] 사마라고도 한다.[4] 제위왕 대의 일이라는 것은 《죽서기년》을 바탕으로 수정한 것으로 《사기》에는 제선왕 때의 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5] 합종 동맹의 우두머리라는 의미다.[6] 위양왕 때 상앙의 계책으로 곡옥 땅이 진나라에게 넘어갔다.[7] 송양공이 군대를 데려가지 않아 초성왕에게 잡힌 고사 때문에 군대는 데리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