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선의용군은 조선의용대제 2구대와 3구대가 갈라져 나온 군대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라고 불렀고 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그대로 조선의용군 개편된 것이다.2. 조선의용군도 한국광복군인가?
하지만 김승곤지사와 이현희와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다.
중화민국 군사위원회에서도 지시가 있었어요.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이 합하라는....1942년 4월 16일인가 20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결의에 의하여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했습니다. 임정에서는 제 1지대를 조선의용대에 주기 싫었지만, 1이 있으므로써 2가 있고 2가 있으면 3이 있는 것 아닙니까? 조선의용대가 그만큼 활동사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한국광복군에 부사령제도를 두어야겠다고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부사령제도를 두어가지고조선의용대 대장을 지낸 김원봉을 부사령 겸 제 1지대장으로 겸임시키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것이 여러 가지 준비가 안되어 7월에야 조선의용대 성명서가 나갔고, 김원봉 부사령관은 12월 5일 정식으로 취임하였습니다....(중략)...
옌안으로 간 사람도 전부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법적으로 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조선의용대 명칭으로 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러니까 정식 명단에는 못들어갔지만 김원봉씨는 그것을 한국광복군으로 간주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충칭에서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 것은 지금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지만, 약 100여 명 정도가 됩니다. 그때 한국광복군 제 1지대 본부는 충칭에다 두었습니다. 제 1구대가 후베이성 라오허커우(老河口)[1]에 나가 있었고 제 2구대는 저장성(浙江省) 찐화(金華)[2]에 나가 있었습니다. 라오허커우 1구대는 5개 공작반을 조직하여 공작을 참 많이 했습니다.[3]
옌안으로 간 사람도 전부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편입되었습니다. 법적으로 다 그렇게 되어있지요. 조선의용대 명칭으로 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그러니까 정식 명단에는 못들어갔지만 김원봉씨는 그것을 한국광복군으로 간주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충칭에서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된 것은 지금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지만, 약 100여 명 정도가 됩니다. 그때 한국광복군 제 1지대 본부는 충칭에다 두었습니다. 제 1구대가 후베이성 라오허커우(老河口)[1]에 나가 있었고 제 2구대는 저장성(浙江省) 찐화(金華)[2]에 나가 있었습니다. 라오허커우 1구대는 5개 공작반을 조직하여 공작을 참 많이 했습니다.[3]
이는 다른 한국광복군 대원으로 활동한 정영호 지사가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도 알려져있다.
정영호 : 우리의 공작지구는 혼전지대였어요. 일본군과 장제스(蔣介石)의 중앙군(中央軍)이 있으며 마오쩌둥(毛澤東)의 신사군(新四軍)이 있었지요. 광복군도 중앙군과 신사군 두 갈래로 속해있었죠. 우리는 중앙군 산하의 50명 한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일본군의 괴뢰군도 있고 민병대격인 대도회(大刀會)도 있었습니다.[4]
또 김승곤지사는 이현희와 인터뷰에서 적법하게 황허 도강증을 가지고 조선의용군이 건너갔다고 말을 한다.
조선의용대 3구대가 충칭으로 와서 동북삼성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제스씨에게 동북삼성 진출을 요청했습니다. 장제스씨가 쾌히 승락을 했죠. 당시 중국군 마잔산(馬占山) 장군이 동북삼성 정진군사령관으로 임명을 받고 쑤이위안성(綏遠省) 우위안(五原)에 대기하고 있어서 거기서 조선의용대와 합류하게 되었죠. 그런데 황허를 도하하려면 장제스씨의 명의와 도하증이 있어야 하므로 군사위원회에서 도하증을 받고 그리고 우위안으로 가려면 중공군 구역을 경유하게 되므로 충칭 중공군 판사처에서 통행증도 받아가지고 1941년 초 허난성 뤄양에서 황하를 건넜지요. 당시 중공군 판사처 주임이 저우언라이입니다. 조선의용대 3구대는 중조산 일부를 경유해서 중공군 구역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중공 측에서 행선지를 물어서 동삼성으로 간다고 하니까 중공군 측에서 "왜적을 물리치고 주권을 찾는 것이 당신들의 목적이며 당신들 눈 앞에 일본군이 도사리고 있고 적 후방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는데 하필 동삼성까지 갈 필요가 있느냐?" 하면서 "우리가 최대한 적극 지원을 해주겠으니 여기서 같이 항쟁을 하자"고 우위안에서 보내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중공군 지역에서 광복 때까지 항쟁을 하게 되었습니다.[5]
황허를 도강하려면 장제스명의의 도하증이 있어야 했고 초기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그렇게 공산주의 색채를 띄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동북삼성을 통해 군내로 진격하기로 되어있었는데 팔로군사령관 측에서 막은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1941년 환남사변이 발생해서 1942년에 국민혁명군과 팔로군사이에 분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을 생각하면 중국의 사건으로 양 진영이 갈라졌던 것으로 보인다.
3. 창설
화북으로 이동한 다수 대원들은 김원봉이 임명한 제1,3 혼성지대 의열단계열 지대장 박효삼과 민족혁명당 계열 간부들의 인솔하에 북상했다.김승곤지사와 김행복의 인터뷰[6]를 확인해보면
조선의용대 제 2구대는 허헌의 딸, 허정숙, 최창익, 한빈(韓斌)등이 있었는데, 공산주의 계통의 부대로 원래 김원봉대장이 친일파를 제외한 자유주의, 민족주의, 공산주의 다 끌어모았다고 진술한다. 창사 제 2차 전투 이후 라오허커우(老河口)에 도달할때 뤄양(洛陽)으로 간다고 폭행을 당해서 의열단계열인 조선의용대 제 1구대를 끌고 가려 했다고 한다.
이들은 최창익의 지도하에 이미 연안에 자리하고 있던 화북조선독립동맹원 인도 하에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 관할 구역 태항산으로 향하게 된다.[7]
이후 화북조선청년연합회와 국민당 지구에서 활동하던 조선 의용군의 주력부대가 모여 1941년 7월 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었다. 지대장은 박효삼이었고 그 뒤 화북지대는 타이항 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1942년 7월 10일에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팔로군 산하에서 활동할 당시 이들의 병력은 최대 8,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8][9] 일제 강점기 동안 존재했던 수많은 조선인 무장 부대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10]
4. 활동
조선 의용군은 화베이 지역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팔로군과 협력해 일본군 점령 지구에 잠입하거나 전선에 접근해 선전⋅첩보활동을 했다.조선의용대 통신에 따르면 손일봉 · 최철호 · 박철동 · 이정순 호가장 전투의 영웅들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제 2지대(현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3구대) 第二支隊(現 韓國光復軍 第1支隊 第3區隊) 대장 (隊長) 김세광(金世光) 이하(以下) 삼십여 동지(三十餘 同志)는 평한선(平漢線) 스좌장(石家莊) 이남(以南) 백여리(百餘里) 되는 위안쓰현(元氏縣)에서부터 싱타이(邢臺) 일대(一帶)에 무장선전공작(武裝宣傳工作)을 맡아(擔任)하고 작년 11월昨年 十一月[11]부터 공작(工作)을 전개(展開)하여 오는 바, 해당每黨에 공작工作은 순리順理로 개시展開되엿다. 그리하여 11월 4일十一月 四日부터는 적 敵과 약간 접촉이 있어 우리대대동지 我隊同志들도 전부全部 무장武裝하야 경계警戒하여 오던 다음 11일 정오次 十一日 正午에는 2백여명 적二百餘 敵과 조우 遭遇하야 맹렬猛烈한 실력實力으로 적敵을 격퇴出退하고 그날 밤同 夜적 보루敵堡壘를 포위包圍하고 김세광 대장 동지金隊長 世光同志가 20분간二十分間 중국어中語로 국제정세國際情勢에 관關한 대적연설對敵演說을 하고, 김학철 동지金學鐵同志가 다시 일본어日語로 15분간十五分間 반전연설反戰演說을 하엿다. 그래도 적진영敵營에서는 아모(아무) 반응反應이 없음으로 조소경 동지趙少卿同志가 반전노래反戰唱歌를 하엿으나, 역시亦是 하등下等의 반응反應이 無없해서 도라오고 말엇다. 다음 날 翌日은 그곳을 떠나 잔황현贊皇縣으로 가기로 약속約束허고 그날 밤의 경계警戒는 지방地方 자위대自衛隊에게 일임一任하고 연일連日 전투戰鬪의 지친疫困한 몸을 휴식休息하기 위爲하야 하로 밤 잘-자기로 하엿다.
전투 개시戰鬪의 開始
12일十二日 날이 밝을 무렵拂曉, 밤 사이夜間 우리 부대我隊를 포위包圍하여 노코, 날이 밝이를 기다리던 적 敵은 먼동이 틀때 지붕위 屋頂上에서 보초放哨하고 있는 우리군我隊 조관 동지 曺寬同志를 향向하야 발사射出하엿다. 이리하야 깊은 안개 속에서 고요히 잠자든 깊은 안개充凉한 산촌山村은 갑자기 격렬激烈한 전장戰場으로 변變하엿다.
조관 동지曺寬同志는 적敵의 총銃소리를 듯고, 급急히 김대장金隊長에게 보고報告할 때 지방자위대 대장地方自衛隊隊長도 와서 보고報告하기를 "적敵이 2리二里(약 800m)밖에서 아군我軍을 포위包圍 진공進攻하고 있으니 속速히 준비準備하라"고 하엿다.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익숙習慣된 준비공작準備工作을 재빨리瞬間에 맟이고, 대문大門을 나가랴 할때 적 기관총敵 機關槍의 화력火力은 우리 대문大門에 집중集中하엿다. 그럼으로 대문大門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집지붕屋頂에다 기관총機關槍을 걸고 환격(반격)還擊하였다 적敵의 화력火力은 다시 집옥상屋頂으로 집중集中하엿다. 이틈을 탄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속速히 대문大門을 나가 서쪽 산골짜리西便山끝로 퇴각退하랴 할때 적敵의 화력火力은 또 사면에서 우리 부대我隊를 향向하야 집중集中 공격攻擊하엿다.
그때마참 적敵은 「敵は何處に居るか?(敵은 어데 있느냐?)」하고 소리첫다. 이것을 들은 우리我 김대장金隊長은 조용從容 침착沈着하게 「敵は南の方へ逃がたぞ(적敵은 남南쪽으로 도망逃亡쳣다)」 하고 답答하엿다. 적 敵은 이 소리를 듯고 남쪽방향南方으로 병력兵力과 화력火力을 집중集中하엿다. 이 틈을 탄 우리我 동지同志들은 급속急速히 서부고지西部高地를 점령占領하고 「이리 오시요!」 「이리 오시요!」 소리 찔너 혼란混亂한 우리 동지同志들을 집중集中식히며 일면一面 전투戰鬪를 계속繼續하엿다.
적敵은 아군我軍을 향向하야 난사亂射, 김대장金隊長은 지휘 중指揮 中 처음으로 「다리」를 맞엇다. 이여서 복부腹部를 또 마젓다. 탄을 맞은中彈한 대장隊長은 벌서 신기神氣를 상실喪失하고 지휘指揮 소리는 점점漸漸 약弱하야지엿다.
이것을 본 곁에 있든 조관 동지(신참 동지)曺寬同志(新同志)는 「대장 隊長 동무 고려정신高麗精神을 발휘發揮하시요!」하고 외쳣다. 대장隊長은 이에 감동感動되여 다시 정신精神을 차리고 기관총機關銃을 손에 잡고 쏘랴할 때 적敵의 탄환彈丸은 또 김세광 동지金世光同志의 왼편 손목을 명중命中하엿다. 하는 수 없이 총銃을 두고 다른 동지同志의 구원救援을 받게 되엿다.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다시 그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사격射擊하야 할때 역시亦是 두발二發을 맞게 되엿다. 탄에 맞은中彈한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10보十步를 다닐行할 수 없어 최후最後의 결심決心을 하고 적敵 오기를 기다리든 차次 김흠동지 金鑫同志가 지나며 그 광경光景을 보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없고 안전지대眼前地帶에 탈출退出하랴 하엿다. 「기관총機關槍은 우리 부대대全隊의 생명生命이다, 나를 신경쓰지關心 말고 속速히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가라」하고 조동지趙同志는 소리쳣다.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그래도 동지同志를 구救하라고 하엿으나 조열광 동지趙光烈同志는 두번 세번 거절再三拒絶함으로 하는 수 없이 총槍을 메고 가랴할 때 조관 동지曺寬同志가 지나게 되여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기관총機關槍을 조관 동지曺寬同志게 맡기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업고 하루 사이一日間을 적敵의 포위包圍를 피避하여 안전지대安全地帶에 도착倒着하엿다. 신도 버선도 없이 山길을 달린 까닭에 「발껌지」와 「살」은 모도다 떠러지고 뼈밧게 남지 않엇다.
그 후後 3개월간三個月間 치료治療하고 처음 것게 되엿다. 그리하야 대부 동지大部 同志는 안전지대安全地帶로 퇴출退出하 격전激戰하고 미처 퇴출退出하지 못하고 적敵에게 포위당包圍當하야 희생犧牲한 4 동지四同志의 전투戰鬪는 특特히 비장悲壯하엿다. 점령佔領한 고지高地에서 우리 동지我同志가 적敵에게 포위包圍되여 단독 분전單獨奮戰하며, 육肉박하는 것을 반히 보면서 구救할 수 없이 그대로 희생犧牲싴이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의 심정心情이 어찌如何하엿을가?
손일봉 동지孫一峯同志는 처음 적敵과 보총步槍으로 싸우다 다시 접근接近된 적敵에게 수류탄手榴彈을 던저 많은 적敵을 죽이엿다. 수류탄手榴彈까지 다 쓰게 되여 탄환彈丸이 다 떨어져盡함에 손 동지孫同志를 사로 잡으라는 적敵과 육肉박이 시작始作되엿다. 이 육肉박 격투格鬪를 목도目睹하는 우리부대 동지我隊同志는 하는 수 없이 그를 향向하야 기관총機關槍을 소사掃射하엿다. 도저到底히 사로 잡어갈 수 없음을 안 적敵은 최후最後의 방법方法으로 각도刻刀로 손 동지孫同志의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왕현순 동지王現淳同志는 대문大門을 나와서 뒤담에다 은신隱身을 하고 적敵과 격전激戰하다가 가지고 있는所有의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고便用하고 부당不幸히 적敵의 탄환彈丸이 데징大腦에 명중命中하야 소장小腦를 둘고 나가게 되여 즉사卽死하엿다.
최철호 동지崔鐵鎬同志는 집 지붕屋頂에서 격전激戰하다 하는 수 없이 뒤담을 뛰여서 넘어 가다 국부局部를 명중命中 당當하야 신음呻吟하다 죽엇다.
박철동동지朴喆東同志는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用盡하고 사로잡으려는 2명 적二敵과 잡히여 가지 않으려고 육박격투肉博格鬪하여 언덕에서 골창으로 굴너가며 악전고투惡戰苦鬪하다가 적敵은 하는 수 없음을 알고 속력刺力로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사체死體를 발견發見할때 동지同志는 두 눈을 드고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자기自己 옷 가슴을 혓치고 꿀어 안즌 채로 죽엇다. 동지同志의 장렬壯烈한 죽엄을 전 화북全華北 방방곡곡坊坊谷谷에 가장 영英용한 고차故事로 전傳해지고 있다.
적과 아군敵我의 격렬激烈한 전투戰鬪가 두 시간時間 반半을 경經한 후後 우방군友軍의 지원군援軍이 도착到着되자 적敵은 허겁지겁慌하야 격퇴擊退하엿다. 이 다음此後에 백여명百餘 적敵을 격폐擊斃고 무수無數한 전리품戰利品을 확취獲取하엿다. 우리 군我軍은 손일봉孫一峰 · 왕현순王現淳 · 최철호崔鐵鎬 · 박철동朴喆東 4 동지四同志가 비장悲壯히 희생犧牲되고 김세광金世光 · 조열광趙烈光 · 황통삼黃通三 동지同志가 부상을 입음受傷하엿다. -끝-[12]
전투 개시戰鬪의 開始
12일十二日 날이 밝을 무렵拂曉, 밤 사이夜間 우리 부대我隊를 포위包圍하여 노코, 날이 밝이를 기다리던 적 敵은 먼동이 틀때 지붕위 屋頂上에서 보초放哨하고 있는 우리군我隊 조관 동지 曺寬同志를 향向하야 발사射出하엿다. 이리하야 깊은 안개 속에서 고요히 잠자든 깊은 안개充凉한 산촌山村은 갑자기 격렬激烈한 전장戰場으로 변變하엿다.
조관 동지曺寬同志는 적敵의 총銃소리를 듯고, 급急히 김대장金隊長에게 보고報告할 때 지방자위대 대장地方自衛隊隊長도 와서 보고報告하기를 "적敵이 2리二里(약 800m)밖에서 아군我軍을 포위包圍 진공進攻하고 있으니 속速히 준비準備하라"고 하엿다.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익숙習慣된 준비공작準備工作을 재빨리瞬間에 맟이고, 대문大門을 나가랴 할때 적 기관총敵 機關槍의 화력火力은 우리 대문大門에 집중集中하엿다. 그럼으로 대문大門으로 나갈 수 없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집지붕屋頂에다 기관총機關槍을 걸고 환격(반격)還擊하였다 적敵의 화력火力은 다시 집옥상屋頂으로 집중集中하엿다. 이틈을 탄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은 속速히 대문大門을 나가 서쪽 산골짜리西便山끝로 퇴각退하랴 할때 적敵의 화력火力은 또 사면에서 우리 부대我隊를 향向하야 집중集中 공격攻擊하엿다.
그때마참 적敵은 「敵は何處に居るか?(敵은 어데 있느냐?)」하고 소리첫다. 이것을 들은 우리我 김대장金隊長은 조용從容 침착沈着하게 「敵は南の方へ逃がたぞ(적敵은 남南쪽으로 도망逃亡쳣다)」 하고 답答하엿다. 적 敵은 이 소리를 듯고 남쪽방향南方으로 병력兵力과 화력火力을 집중集中하엿다. 이 틈을 탄 우리我 동지同志들은 급속急速히 서부고지西部高地를 점령占領하고 「이리 오시요!」 「이리 오시요!」 소리 찔너 혼란混亂한 우리 동지同志들을 집중集中식히며 일면一面 전투戰鬪를 계속繼續하엿다.
적敵은 아군我軍을 향向하야 난사亂射, 김대장金隊長은 지휘 중指揮 中 처음으로 「다리」를 맞엇다. 이여서 복부腹部를 또 마젓다. 탄을 맞은中彈한 대장隊長은 벌서 신기神氣를 상실喪失하고 지휘指揮 소리는 점점漸漸 약弱하야지엿다.
이것을 본 곁에 있든 조관 동지(신참 동지)曺寬同志(新同志)는 「대장 隊長 동무 고려정신高麗精神을 발휘發揮하시요!」하고 외쳣다. 대장隊長은 이에 감동感動되여 다시 정신精神을 차리고 기관총機關銃을 손에 잡고 쏘랴할 때 적敵의 탄환彈丸은 또 김세광 동지金世光同志의 왼편 손목을 명중命中하엿다. 하는 수 없이 총銃을 두고 다른 동지同志의 구원救援을 받게 되엿다.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다시 그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사격射擊하야 할때 역시亦是 두발二發을 맞게 되엿다. 탄에 맞은中彈한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는 10보十步를 다닐行할 수 없어 최후最後의 결심決心을 하고 적敵 오기를 기다리든 차次 김흠동지 金鑫同志가 지나며 그 광경光景을 보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없고 안전지대眼前地帶에 탈출退出하랴 하엿다. 「기관총機關槍은 우리 부대대全隊의 생명生命이다, 나를 신경쓰지關心 말고 속速히 기관총機關槍을 가지고 가라」하고 조동지趙同志는 소리쳣다.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그래도 동지同志를 구救하라고 하엿으나 조열광 동지趙光烈同志는 두번 세번 거절再三拒絶함으로 하는 수 없이 총槍을 메고 가랴할 때 조관 동지曺寬同志가 지나게 되여 김흠 동지金鑫同志는 기관총機關槍을 조관 동지曺寬同志게 맡기고 조열광 동지趙烈光同志를 등에 업고 하루 사이一日間을 적敵의 포위包圍를 피避하여 안전지대安全地帶에 도착倒着하엿다. 신도 버선도 없이 山길을 달린 까닭에 「발껌지」와 「살」은 모도다 떠러지고 뼈밧게 남지 않엇다.
그 후後 3개월간三個月間 치료治療하고 처음 것게 되엿다. 그리하야 대부 동지大部 同志는 안전지대安全地帶로 퇴출退出하 격전激戰하고 미처 퇴출退出하지 못하고 적敵에게 포위당包圍當하야 희생犧牲한 4 동지四同志의 전투戰鬪는 특特히 비장悲壯하엿다. 점령佔領한 고지高地에서 우리 동지我同志가 적敵에게 포위包圍되여 단독 분전單獨奮戰하며, 육肉박하는 것을 반히 보면서 구救할 수 없이 그대로 희생犧牲싴이는 우리 부대我隊 동지同志들의 심정心情이 어찌如何하엿을가?
손일봉 동지孫一峯同志는 처음 적敵과 보총步槍으로 싸우다 다시 접근接近된 적敵에게 수류탄手榴彈을 던저 많은 적敵을 죽이엿다. 수류탄手榴彈까지 다 쓰게 되여 탄환彈丸이 다 떨어져盡함에 손 동지孫同志를 사로 잡으라는 적敵과 육肉박이 시작始作되엿다. 이 육肉박 격투格鬪를 목도目睹하는 우리부대 동지我隊同志는 하는 수 없이 그를 향向하야 기관총機關槍을 소사掃射하엿다. 도저到底히 사로 잡어갈 수 없음을 안 적敵은 최후最後의 방법方法으로 각도刻刀로 손 동지孫同志의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왕현순 동지王現淳同志는 대문大門을 나와서 뒤담에다 은신隱身을 하고 적敵과 격전激戰하다가 가지고 있는所有의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고便用하고 부당不幸히 적敵의 탄환彈丸이 데징大腦에 명중命中하야 소장小腦를 둘고 나가게 되여 즉사卽死하엿다.
최철호 동지崔鐵鎬同志는 집 지붕屋頂에서 격전激戰하다 하는 수 없이 뒤담을 뛰여서 넘어 가다 국부局部를 명중命中 당當하야 신음呻吟하다 죽엇다.
박철동동지朴喆東同志는 탄환彈丸을 다 써버리用盡하고 사로잡으려는 2명 적二敵과 잡히여 가지 않으려고 육박격투肉博格鬪하여 언덕에서 골창으로 굴너가며 악전고투惡戰苦鬪하다가 적敵은 하는 수 없음을 알고 속력刺力로 왼편 가삼을 찔너 죽엿다. 사체死體를 발견發見할때 동지同志는 두 눈을 드고 이를 악물고 두 손으로 자기自己 옷 가슴을 혓치고 꿀어 안즌 채로 죽엇다. 동지同志의 장렬壯烈한 죽엄을 전 화북全華北 방방곡곡坊坊谷谷에 가장 영英용한 고차故事로 전傳해지고 있다.
적과 아군敵我의 격렬激烈한 전투戰鬪가 두 시간時間 반半을 경經한 후後 우방군友軍의 지원군援軍이 도착到着되자 적敵은 허겁지겁慌하야 격퇴擊退하엿다. 이 다음此後에 백여명百餘 적敵을 격폐擊斃고 무수無數한 전리품戰利品을 확취獲取하엿다. 우리 군我軍은 손일봉孫一峰 · 왕현순王現淳 · 최철호崔鐵鎬 · 박철동朴喆東 4 동지四同志가 비장悲壯히 희생犧牲되고 김세광金世光 · 조열광趙烈光 · 황통삼黃通三 동지同志가 부상을 입음受傷하엿다. -끝-[12]
김승곤지사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군과 전투에서 많은 희생자가 났는데 최초의 전투에서 7명이 전사했어요. 일본놈들은 조선의용군을 생포하면 5000원, 사살하면 3000원씩 현상금을 걸었죠. 1943년 5월 중칭시 부자지식장(富子池式場)에서 7명에 대하여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해방동맹, 한국청년당 등 연합 추모식을 거행했습니다.[13]
또 중국인의 항전 의식을 일깨우는 전람회를 개최하고 민중의 팔로군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2년 11월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열어 군사⋅정치 교육을 실시하여 간부를 양성했고, 척박한 토지에 밭을 일궈 농산물을 자급자족하는 생산 활동도 전개했다.
1943년 6월에는 팔로군과 함께 타이항 산 곳곳에서 일본군 침공에 대한 반격을 전개해 용맹을 떨쳤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윈터우디춘(운두저촌, 雲頭低村)에 남아있는 조선 의용대의 한글 구호이다.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오'라고 쓰여있다. |
'강제병 끌려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하여 쏘시오'라는 내용이다. 1940년대 초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 병사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며 곳곳에 한글 구호를 남겼다. |
조선의용군은 1943년 1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옌안 근교 뤄자핑에 머물렀다.
이후 1944년부터 화베이 지역의 도시와 농촌, 그리고 만주 일대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조직 결성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고, 그 결과 여러 도시에 독립 동맹의 거점이 마련되었다. 이리하여 의용군과 독립 동맹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의용군에 입대했다.
또 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944년 9월 화북조선청년군사정치간부학교, 10월 조선군정학교 산동분교, 1945년 2월 연안 조선군사정치학교[14] 등을 개교하여 독립운동의 간부를 양성하였는데, 1945년 5월에는 그 수가 총 850여 명에 달했다.
5. 해방 이후
1945년 8월 중국공산당은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무주공산이 된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팔로군을 만주로 진격시켰고 팔로군과 협력하던 조선의용군 역시 조선 해방을 위해 압록강으로 향했다.그러나 조선의용군이 압록강을 넘기 전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정은 압록강을 넘어온 조선의용군을 인정하지 않고 무장해제한 후 만주로 돌려보냈다.
김두봉, 최창익, 김무정 등 조선의용군 고위직은 1945년 12월 개인 자격으로 북한으로 귀국, 연안파라는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만주에 남은 조선의용군은 아예 중국공산당 휘하로 편입되어 현지 조선인 청년들을 충원, 중국 인민해방군 제164사단, 제166사단, 독립15사단으로 확대·개편되었다.
이후 이들은 제2차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국민혁명군과 교전하였다.
6. 6.25 전쟁에 참여
1948년 2월 조선인민군을 창설한 김일성은 남침을 위한 전력 증강을 위해 인민해방군 산하 조선인 부대의 귀국을 마오쩌둥에게 지속적으로 요청하였고, 국공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9년 5월 마오쩌둥은 인민해방군 산하 조선인 부대의 귀국을 허용한다.그리하여 1949년 10월부터 1950년 4월까지 위의 제164사단, 제166사단, 독립15사단의 3개 사단을 비롯해 선양 혼성단, 철도병단 조선족 부대,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생 등 약 50,000여 명의 조선인 병력이 북한에 입국,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주력으로 남침에 앞장섰으며 개전 당시 조선인민군 보병 21개 연대 중 10개 연대가 인민해방군 출신 조선인 부대였을 정도였다.
7. 6.25 전쟁 이후
그러나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연안파 세력은 모두 몰락하였으며, 남한에서도 당연히 동족상잔에 앞장선 빨갱이들로 버림받으면서 남북 모두에게 잊힌 존재가 되었다.[1]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1구대 김준[2]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 이소민[3] 이현희 대담,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4] 한국경제신문, 「식물학서 두 번 『극일(克日)』한 것이 보람」, 1989년 9월 17일자 11면[5] 이현희 대담,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6]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에 공개되어있다.[7] 참고로 이때는 2차 국공합작 시기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협력 관계였다.[8] 1938년 3월 15일 기준. 제1연대 1,301명 제2연대 1,709명 제3연대 1,608명 등을 포함하여 총 인원 8,274명. (출처: 특별연구 조선의용군, 염인호,1994)[9] 일제 패망할 당시에는 1,000명 정도 (출처: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 김광재, 2006)[10] 1920년대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끌었던 만주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러시아 연해주에서 창설했던 대한독립군단, 1929년 양세봉, 김학규 장군의 조선혁명군, 1930년대 김일성, 김책, 최용건 등이 이끌었던 동북항일연군 산하의 공산주의 계열 유격대, 1940년대 지청천, 이범석 장군이 이끌었던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 그 외 재미 교포들이 조직했던 박용만(1881)의 국민 군단 등등,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던 수많은 무장 부대들 중에서 이만한 규모의 조선인 군사 단체는 없었다. 참고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의 연이은 승전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들이 일제의 토벌을 피해서 러시아 연해주에 집결했을때 병력이 3,500여명이었다.[11] 12월 오타인듯하다.[12]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권, 임시의정원 Ⅱ, 우리 통신[13]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14] 교장은 김두봉, 부교장은 박일우, 학도대장은 박효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