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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일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운일
鄭雲馹[1]
로 기재한 자료도 있다고 한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순익(舜翼) / 춘주(春洲)
본관 연일 정씨[2]
출생 1884년 1월 1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상면 신전리[3]
(현 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1가)[4]
사망 1956년 2월 5일[5] (향년 72세)
경상북도 대구시
(현 대구광역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19호
가족 배우자 김복이[6]
종교 천도교[7]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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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의 전신인 교남학원(嶠南學院)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정운기(鄭雲騏, 1887.6.26 ~ ?)[8]는 그의 첫째 남동생이다.[9]

2. 생애

1884년 1월 16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동상면 신전리[10]에서 아버지 정시원(鄭時源, 1860.5.15 ~ ?)[11]과 어머니 청주 한씨(1860 ~ ?)[12]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시원은 1902년 함경북도 관찰부 주사(觀察府主事)를 역임했다.[13] 이후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남중동[14]으로 이주하여 본적지를 두었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경상북도 대구부 봉산정[15] 37번지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908년 9월 5일 대구부 명치정2정목[16]에서 이근우(李根雨)·김용선(金容璇) 등이 달성친목회를 창립하자, 이에 참여하여 임원을 맡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인해 본회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되었으나, 1913년 9월 21일 서상일중화민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서 대구부로 돌아와 조선인 청년단체가 사라진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다시 이근우·서창규(徐昌圭)·서기수(徐琦洙) 등과 함께 달성친목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이후 임원으로서 1916년 봄에 해산될 때까지 활동하였다.[17] 이후 서상일·서창규·홍주일(洪宙一)·박영모(朴永模)·이시영(李始榮)[18]·김재열(金在烈)·서병룡(徐丙龍) 등과 함께 주로 교류하였고, 1915년 이들의 권유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였다.

1916년 8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의 명령으로 이시영·홍주일·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瑀)·최병규(崔丙圭)·임병일(林炳日)·최준명(崔俊明)·윤병하(尹炳夏)·권국필(權國弼) 등과 함께 김진만의 장인이자 대구부 부호였던 회곡(檜谷) 서우순(徐祐淳, 1857 ~ 1927.3.5)[19]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는 계획에 참여하게 되었다.[20] 이때 박상진과 김재열이 일전에 중화민국 봉천성 안동현(安東縣)[21]에서 가지고 온 권총 4정을 이시영과 최준명에게 각각 2정씩 맡겼는데, 김진우가 이 중 3정을 가지고 서우순의 집에 갔다. 이후 정운일은 김진만·김진우·최병규 등 세 사람과 함께 대구부 남문 안 장동(長洞) 서우순의 집[22]에 잠입하였으나, 서우순과 그 집의 머슴 우도길(禹道吉)에 발각되어 격투가 벌어졌고, 이 와중에 김진우가 우도길에게 권총을 발사함으로써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자 일행은 일단 피신하였다. 이후 김진우는 자신이 소지하던 권총 3정을 정운일에게 맡겼다.

그러나 곧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1917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상해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규칙 위반, 범인은닉 등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23] 이후 공소를 제기했으나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고, 7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가출옥하였다. 이후에는 대구부에서 은거하였다.

8.15 광복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미군정청 경상북도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앞서 경상북도 선거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임되었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경상북도 위원장 및 조사관을 역임했다.[24]

1956년 2월 5일 경상북도 대구시[25]에서 사망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본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오리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1] 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 따르면, 鄭[2] 문정공파(文貞公派)-강화공파(江華公派) 24세 운(雲) 항렬.[3] 1919년 6월 28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신문조서[4] 1905년 대구전도에서 신전리동(薪田里洞)의 위치를 보면, 1911년 대구시가약도에서 원정1정목(元町一丁目)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원정1정목은 현재의 북성로1가이다.[5]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2월 1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6] 김해 김씨로, 김무홍(金武弘)의 딸이다. 1883년 6월 9일에 태어나 1954년 7월 5일 사망했다.[7] 1919년 6월 28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 신문조서[8] 독립유공자에 서훈된 정운기와는 동명이인이다.[9] 출생 이후 작은아버지 정형원(鄭亨源, 1867.9.18 ~ 1892.9.1)에 입양되었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는 4촌 동생이다.[10]대구광역시 중구 북성로1가[11] 자는 자범(子範)[12] 한시유(韓始愈)의 딸이다.[13] #[14]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15]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16]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17] 서상호탄원서[18]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과는 동명이인이다.[19] 달성 서씨 학유공파(學諭公派) 23세 순(淳) 항렬로, 달성서씨세보 권11 488쪽에는 徐淳으로 등재되어 있다. 초명은 서형수(徐亨洙)였고, 1899년부터 1902년까지 경상북도 관찰부 주사, 외부 참서관 등으로 관직 생활을 할 당시에는 서필우(徐必佑)라는 이름을 썼다. 자는 덕후(德厚)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남일동 142번지에 있는 대구화교협회 건물의 원소유주 서병국(徐丙國)은 바로 이 서우순의 장손자이다.[20] 1919년 6월 28일 참고인 김진만 신문조서를 보면, 김진만은 당초 손아랫처남인 서상준(徐相俊, 1887 ~ 1918.7.19)[28]이 일본인 키무라 쇼타로(木村升太郞)에게서 유흥비로 쓸 3,500엔을 빌렸을 때 보증인으로 서 주었다. 그러나 서상준은 이를 전혀 갚을 길이 없었으나, 다만 자기 아버지 서우순이 소실에게 빠져 많은 액수의 돈을 소실의 집에 두었으니 그 돈이 있는 곳을 알려줄테니 이 돈을 찾아 키무라 쇼타로에게 대신 갚아달라 청하였다. 김진만은 이 사실을 듣고 동생 김진우를 통해 박상진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21]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단둥시[22] 1919년 7월 10일 정진영(鄭震泳) 신문조서[23] 구의견서(求意見書)[24] 당시 배중혁(裵重赫) 봉화군 국회의원(대동청년단)의 반대가 있었으나, 조헌영 영양군 국회의원(한국민주당)의 변호에 힘입어 79 대 19로 가결되었다고 한다.#[25]대구광역시[26] 셋째 아들 정인택(鄭仁澤, 1912.1.24 ~ 1973.1.11)이 인천 이씨 이경희의 장녀 이인원(李仁媛, 1916.5.5 ~ ?)과 결혼하였다.[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