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08:55:23

전국철거민연합

전철연에서 넘어옴
파일:전철연 로고.png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006861_STD.jpg

1. 개요2. 결성 경위3. 문제점4. 의혹5. 비판6. 경찰특공대 논란7. 사례8. 생각해볼 점

1. 개요

전국철거민연합(全國撤去民聯合). 이하 전철연.

홈페이지. 원래는 도메인이 'http://poverty.jinbo.net'이었으나 2017년부터 org 도메인을 쓰기 시작하였다.

1993년 6월 결성된 전국철거민협의회(전철협)의 온건노선에 반대하여 1994년 6월 독립한 급진파 철거민 생존권 투쟁조직이다.

결성 초기 민중세력과 연대를 표방해 철거민을 사회개혁의 주체로 치켜세우면서 독려했다.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의장 및 연사국, 조직국 등 4국 10여명으로 구성된 중앙본부를 중심으로 서울, 경기, 인천, 부산의 4개 지역철거민연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재건축 지역 등을 순회하며 전철연 가입을 권유하는 철거지역 발굴투쟁 지원책과 의식화 교육을 담당하는 이념교육책도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재정은 가입비와 월 회비 1만원, 협상 타결 시 사례금 명목으로 보상금의 상당액을 수수하는 등으로 운영한다.

재개발지역을 순회하며 기존 보상비를 초월하는 보상책과 철거기간 중 주거, 영업공간 마련, 완공 후 10년간 무상 임대 등을 내세워 세입자들을 현혹해 가입을 권유하고 민중투쟁 의식 향상과 투쟁방법 등을 회원들에게 교육한다.

소위 '골리앗 투쟁'이라고 말하는 망루 투쟁으로 유명하며 철제 새총으로 벽돌, 화염병, 골프공, 염산병을 투척하거나 LPG를 이용한 화염방사기, 쇠파이프에 화약 넣고 발사하는 사제총포 및 사제박격포(…) 등 자체제작한 시위 도구를 이용하는 극렬 시위방법을 애용하며 망루 및 시위 도구 제작 비용은 회원들에게서 각출하고 고물상 등지에서 나름의 훈련까지 한다.

용역들의 폭력이 극렬투쟁의 좋은 빌미가 되기도 하지만 철거민연합의 시위과정에서 주변 상가와 민간인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더욱 크다.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당시에도 버스정거장과 인근 상가에 화염병을 마구 투척해 경찰 측에서 경찰특공대를 성급하게 투입하는 과잉대응의 빌미를 제공했고 이는 곧 엄청난 참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망루를 최후의 보루로 인식해 내부를 미로 형식으로 개조하거나 부비트랩 형식의 장애물 설치, 층계를 만들어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등 진입이 어렵도록 설계한다.

2010년 12월 의장인 남경남이 항소심에서 징역 5년에 벌금 10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2015년 1월 11일 출소할 때까지 옥중에서 전철연 간부와 회원들에게 지휘를 내리면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2. 결성 경위

"저는 전철연과 함께 하면서 자본과 노동자는 피할 수 없는 대립 관계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거민이란 대부분이 이주 능력이 없는 가난한 노동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개발은 건설자본이 이윤을 극대화 하려는데 그 본질이 있습니다. 따라서 철거민들이 쟁취하려는 주거생존권과 이윤을 보장 받으려는 건설자본은 현실에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 판교 철거민 대책위원회 위원장 장 모 씨 (장서훈 씨로 추정)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의 결성은 198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알다시피 개발독재가 끝나갈 무렵이고 1983년 토지 소유주-건설사가 공동 주체가 된 합동재개발 방식의 상업적 철거 도입, 1986 서울 아시안 게임1988 서울 올림픽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재개발에 대한 무자비한 강제철거가 큰 사회 문제였다. 건설업자들의 개발을 위한 당국과의 유착, 재개발조합의 가담 등은 철거민들에게 엄청난 폭압으로 다가왔고 이는 철거민들이 하루아침에 생존권을 박탈당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 철거라고 하는 게 돈 몇푼 주고 살던 곳에서 쫓아내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대책이 없었으며 새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조차 언제나 돈 있는 중산층들의 몫이었다. 1971년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이나 1984년 서울 신정/목동 철거민 투쟁 같은 도시빈민들의 봉기가 벌어지기도 했고 조세희 작가의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도 다루어졌다.

당시에는 시대도 시대인 만큼 충분히 폭력투쟁에 대비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털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위는 폭력진압이 일반적이었고 재개발지역에는 구청 철거반과 용역깡패들이 상주하며 주민들을 위협했으며 투기꾼들이 불량주택까지 사들여 주민들을 쫓아냈다. 철거반을 빙자하여 각목, 쇠파이프 등을 동원한 폭력이 횡행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투쟁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게다가 한국의 대부분의 투쟁이 그러하듯 가방끈 긴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주목하지만 서민이나 노동자가 죽어나가면 눈 깜짝 안 하는 세태도 이러한 상황을 부채질했다. 근데 솔직히 2023년 10월 기준 현재도 그렇다는 사실.

이런 와중에 철거민들은 스스로 단결하여 투쟁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983~1985년 목동 철거 반대투쟁, 1986~1987년 상계동 철거민 투쟁 등을 계기로 점차 경험이 쌓여 1987년 7월 17일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서철협)가 먼저 결성되었다. 결성을 전후해 사당3동, 오금동, 신당동, 사당2동, 돈암동 등에서 철거민 투쟁이 확대되고 1988년에는 서초동 꽃마을, 홍은동, 도화동, 신정동, 전농동, 석촌동 등에도 확대되자 1989년 정부가 영구임대아파트 제도를 도입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93년에는 전국단위 조직 전국철거민협의회(전철협)가 출범하였다.

전철협은 지역철거민을 가능한 빨리 대책을 세워 생업으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만든 단체다. 전철협의 출범 당시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서철협)의 세력들은 도시 빈민해방운동으로 계급적 관점으로 철거민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며 논의구조에서 이탈해 전철협에서 제명된 남경남을 비롯한 서철협과 도시빈민 해방투쟁세력들이 1994년에 전철연을 결성했다. 전철연은 결성과 동시에 생존권투쟁과 주거투쟁을 계급투쟁의 일환으로 여겼고 철거민 투쟁은 곧 프롤레타리아 투쟁이며 사회변혁의 중요한 열쇠로 인식하고 있었다. 철거민을 노동자로 보고 계급적 연대에 기초한 투쟁과 빈민운동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점점 변화하기 시작했고 주택임대차 보호법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가임대차 보호법의 문제가 사회 전반에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상가건물 재개발을 둘러싸고 아무래도 세입자가 상대적 약자이다 보니 이를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개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주요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전철연은 이때 이를 놓고 내부에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결국 전철연은 상가세입자들도 똑같이 철거문제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상가세입자 문제에도 관여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전철연이 이권싸움에 끼어드는 결과가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거대 건설자본이 영세 소상공업자를 압박하고 있는 상황에 이들을 돕지 않으면 투쟁의 대오는 더더욱 약해질거라는 지적 앞에 현재도 상가세입자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턱없이 부족한 보상금 문제를 둘러싸고 세입자와 건물주간의 싸움은 더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바 상가세입자 문제에서 전철연의 입장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참고로 전철협 측에서는 전철연의 결성 당시부터 폭력투쟁, 특히 골리앗 망루투쟁은 철거민의 희생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철연이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온건적 투쟁노선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전철협에 비해 '투쟁없이 투쟁없다 투쟁으로 쟁취하자'는 뜻으로 폭력적 투쟁방식으로 거두는 성과가 막대하고 이를 미끼로 철거민들의 가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전철협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철연 투쟁은 부상당하고 구속당하고 그렇게 힘든 투쟁해서 몇사람 주거권 쟁취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전철연은 철거민 투쟁하다 중간에 투쟁을 접고 이사가는 사람들도 전철협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실제 투쟁의 성과물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전철연은 개발이 완료되어 입주할 때까지 우선 거주할 수 있는 임시 주거단지와 쫒겨 나지 않고 계속 살 수 있는 철거민 입장에 적합한 임대주택, 영세한 상가의 생계대책으로 임대상가와 임시상가 등 공증문건으로 보관된 승리 지역이 50~ 60군데나 됩니다. 물론 이 승리 지역중에 구속이 되었던 지역이 1/3에 육박했다는 사실을 확인 했으면서도 저는 구속을 두려워 하지않고 주거권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는 투쟁없이 아무것도 쟁취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 판교 철거민 대책위원회 위원장 장 모 씨

전철연과 전철협의 관계와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짤막한 글

3. 문제점

"전철연 지도부가 지역 철거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하는 말이 뭐냐면, 평생 살 집을 만들어줄테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럼 사람들이 생계가 막막해지니까 절반 정도 떨어져나가. 남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 다른 지역 집회에 쫓아다니라고 하거든. 그럼 사람들이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또 절반 정도 떨어져나간다고. 그 과정을 거치면 철대위에 남는 사람들은 5~10 가구밖에 안 돼. 거기서 이제 골리앗을 만들어야 하니까 돈을 걷자고 한다고."
- 전 안암동 재개발지구 철대위원장 이 모 씨

즉 부양할 가족이 있는 가장들의 수입을 막은 채 연대투쟁을 강요하는 것은 활동기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전철연에서 발을 빼기 어렵게 만들고 이는 극렬투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고립시킨다.

보통 철거민들도 대부분 철거협상이 늘어지니까 그만두고 나가 버리는데 이미 막대한 돈을 연합에 지급한 철거민들은 끝까지 남아서 전철연의 지도 하에 재개발 지역마다 들러붙어 극렬시위에 동참하도록 반 강제로 요청받게 된다.

용산 참사 당시에도 세입자의 87%가 이미 협상 후 떠난 상태였으며 당시 시위로 구속된 세입자 28명 가운데 21명이 전철연 소속으로 실제 거주지 세입자는 7명뿐이었다. 사망자 5명 가운데서도 거주지 세입자는 2명, 전철연은 3명이었다. 또 재개발 사실이 확정된 이후 들어온 전철연측 세입자가 20명이었으며 철거 확정 지역이니 사실상의 권리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증금 또한 세입자들의 주장과는 달랐는데 보증금 8천만원이라고 주장한 집은 2004년에 5천만원, 2006년 재계약 때 2천 3백만원이었다. 5천만원의 보상금을 제시받았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며 실제로는 8천만원 이상의 보상금을 제시받았으며 이 와중에도 전철연측 세입자들은 2천만원 이상의 임대료가 체납되고 있는 상태였다. 추가로 임대차계약서에는 철거가 시작되면 바로 가게를 비우고, 수리를 하지 말며, 굳이 한다면 그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특약 조항과 각서까지 작성했다. 철거될 가게인 걸 뻔히 알고 들어와선 주인이 말리는데도 굳이 수리를 한 것은 바로 재개발지구에서 보상금을 노리고 빈번하게 행해지는 "알박기"다.

이렇게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성실하게 따르다 보면 생계를 포기한 주민들은 수천만원씩 빚이 쌓인다. 참고로 골리앗이라고 부르는 망루를 제작하는 데만 1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 들어간다. 이 비용은 앞서 말했듯 당연히 회원들이 카드빚을 내 갹출한다. 물론 가는 곳마다 골리앗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연대행동을 강요하기 때문에 직업을 그만두게 되고 그 와중에 간부 도피자금 및 운영자금 명목으로 계속해서 회비를 갹출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빚이 쌓이며 곳곳에서 휘두른 폭력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투쟁에 더 매몰될 수밖에 없고 점점 전철연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지경이 된다. 결국 철거민들은 전철연에 철저히 이용당하는 희생자인 것.

그럼에도 철거민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연합에서 제명당하는 것이다. 특히 아직 투쟁이 계속되는 지역의 경우 제명을 당하면 철거민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협상이 잘 끝나면 살 집과 약간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민사상의 고소, 고발 사건이 모두 유야무야되지만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는 상황에서 제명을 당하면 철거민들은 수천만 원의 빚을 떠안은 채 범죄자로 전국을 떠돌아야 한다.

제명당하지 않아도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전철연이 재개발 지역에 세입자들은 그들에게 투쟁 비용을 차입할 수밖에 없는데 세입자들이 받은 최종 보상금에서 전철연에 납부하는 투쟁 비용을 제외하면 남는 건 결국 본전치기이거나 오히려 손해를 본다. 하지만 전철연은 투쟁 비용에다 시공사와 철거업체 등에서 플러스 알파를 더 받게 된다. 이럼에도 전철연 측은 "우리는 소외당한 도시빈민을 대표하는 단체"라며 "시위 참가자 전원이 지역 철거민"이라고 주장한다. 자세한 건 한겨레 21 기사로 이동할 것.

4. 의혹

"규찰 못 서면 벌점 10점, 집회에 안 나오면 벌점 30점, 이런 식으로 벌점이 어느정도 되면 회원을 제명토록 한다. 먹고살기 힘든 철거민들이 어떻게 매번 집회에 참가할 수 있나? 결국 전철연을 개처럼 따르는 몇 명만 남겨둔 상태에서 건설회사측과 손쉽게 합의를 보고 우리가 승리했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 지금 전철연에 속한 지역들 중에 다섯 가구 이상 남은지역이 거의 없다. 이건 건설회사가 원하는 숫자 아닌가."
- 전 안암동 재개발지구 철대위원장 이 모 씨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운동을 진행하다 보면, 건설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는 건설자본들이 돈을 미끼로 협상을 제안해옵니다. 여기에 굴복하면 운동이 끝나는 거고, 이겨내더라도 주민들 사이에 분란이 생깁니다. 전철연도 중앙에서 나온 2~3명의 핵심간부가 건설회사나 재건축 조합과 밀실협상을 합니다. 돈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밝혀내기는 불가능합니다."
- 익명의 옛 철거단체 활동가

이같은 전철연의 행태로 인해 그들이 건설업체와의 합의 과정에서 망루 철거를 조건으로 수천만원을 받아 일부만 철거민들에게 주고 나머지를 착복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된 바 있다. 망루를 세우고 철거민들을 비타협적인 전면 투쟁으로 이끌어 건설회사 또는 시행사와의 협상을 차단하고 전철연이 농성시위를 좌지우지하면서 결과적으로 사업주체가 전철연과 협상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참고로 전철연 간부 중에는 최소 18억 가량의 재산을 소유한 사람도 있다.
서울중앙지검 정병두 1차장검사는 3일 수사 브리핑에서 일부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 회원의 재산과 관련해 “한 라디오 방송에서 ‘농성자들이 모두 살 집이 없는 이들’이라고 표현했는데 신중하게 말해 달라”고 밝혔다. 그는 “농성자 중 재산이 많은 사람들도 있다. 기본적으로 철거민 대책위 등에는 거주민뿐 아니라 상인도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정 차장은 “본인이 그런 재산 있는 것을 다른 농성자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구속자 6명 중에는 재산을 좀 가진 사람이 있지만 대부분은 별로 없는 편”이라고 말했다.
경찰 측에서도 지난달 20일 서울 용산의 재개발 농성자 사망 사건 때 현장에서 연행된 일부 전철연 회원들 중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이 있다고 밝혔다. 경기도 분당에 아파트를 가진 강모(48)씨가 그중 하나다. 그는 야탑동에 아파트 한 채(전용면적 131.4㎡·48평형)를 소유하고 있다. 지난해 말 기준시가는 6억2000만원이었다. 강씨는 전철연 회원으로, 용산 재개발 4구역 소속의 세입자는 아니다. 경찰 측은 그가 용인시 신갈 철거민대책위에서 활동해 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강씨는 2002년 초에 이 아파트를 샀다.

그는 경기도 오산시 두곡동에 3058㎡짜리 땅도 갖고 있다고 경찰 관계자는 전했다. 택지개발 공고 예정지로 지난해 말 공시지가 기준으로 7억4000만원 상당이다. 강씨는 이 밖에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동에 1000㎡가 넘는 땅을 소유하는 등 여러 개의 부동산을 추가로 보유하고 있다. 이 중엔 상속으로 받은 것도 있다. 경찰 측은 강씨 소유의 부동산 가치가 공시지가·기준시가 기준으로 최소 18억원가량이라고 밝혔다. 경찰 측에 따르면 강씨의 부인은 용인시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재산과 관련해 강씨 측 얘기를 직접 듣기 위해 부인의 점포와 전철연 등에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용산 범국민대책위원회의 홍석만 대변인은 “전철연 회원 중엔 재산이 어느정도 있는 사람도 있다. 재개발 지역의 세입자도 있지만, 상가를 직접 소유한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유산과 명의 이전으로 재산이 생긴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재산 규모와 전철연 회원이 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공직자가 아닌 이상 재산 문제는 사생활의 영역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5. 비판

극렬한 시위 방법으로 인해 매 시위 때마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 게다가 당사자들(경찰관, 용역직원, 시위대)의 문제뿐 아니라 주변에 끼치는 민폐도 상당하여 이미 진보 진영에서도 등을 돌려 진보, 보수 양 진영 모두에서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전철연 자체가 그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반정부 단체임이 명백해지면서 더욱 신뢰를 잃었다.

참고로 이 항목에서 전철연을 비판하는 내용의 출처는 대부분 조중동도 아닌 한겨레21 기사다. 제목은 <철거탑은 흉기인가>. 이에 본 단체 측은 반발해 같은 잡지에 기고문을 냈다.

어쨌건 간에 아무리 철거민이 억울하다고 할지라도 전철연의 도를 넘는 막장성과 패악질은 보수는 물론이고 상식적인 진보라면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철연의 막장행각에 도매금으로 싸잡혀 비난받은 진보진영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팀킬.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007096_STD.jpg
파일:external/img.hani.co.kr/021005000120050503558_64.jpg

6. 경찰특공대 논란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이후 2009년 7월 경찰특공대에서 실시된 대테러 종합전술훈련 중 일부 훈련이 용산 참사와 유사한 상황재연을 보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에 용산 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은 "경찰관들이 유족들에 사과는커녕, 생존권을 요구하는 철거민을 테러리스트로 본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셈.”이라고 말했고 서울경찰특공대 관계자는 "당시 훈련은 90분 중에 고작 3~4분의 훈련이었다."고 하며 "특히 용산 참사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는데 실제로 전철연의 역대 사례를 보면 용산참사 역시 가장 전형적인 그들의 시위 형태를 답습했음을 알 수 있다.

7. 사례

투쟁기간은 괄호 안에 표시함.
  • 1995년 경기 용인시 수지택지개발사업지구(10개월): 망루 추락 철거민 1명 사망.
  • 1997년 7월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4구역 재개발(4개월): 철거민 1명 사망.
  • 1999년 2월 경기 수원시 권선4지구 택지개발 사업(6개월): 사제총포, 사제박격포 발사로 경찰관, 인부 2명 부상.
  • 2000년 6월 사제 화염방사기를 이용, 여의도 새천년민주당사 점거.
  • 2002년 7월 서울 동작구 노량진 상도동 재개발(22개월): 화염병, 돌, 염산, 사제총포 등의 발사로 용역직원 30여명 부상. 투척한 벽돌이 망루 바로 앞 초등학교로 떨어져 창문 파손. 확성기를 통해 수시로 장송곡 송출.
  • 2002년 8월 비판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월간 '말' 사무실에 전철연 소속 회원 40여명이 사무실을 점거. 직원 10여명을 감금하고 집기들을 파괴. 월간 '말'지는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기관지 형식으로 창간했으며 1989년 정기간행물로 등록된 진보적 성격의 월간지로 2009년 폐간되었다. 이미 이때부터 진보 진영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 2003년 3월 경기 고양시 일산구[1] 풍동 재개발(14개월): 돌, 골프공, 인분 1드럼(…), 시너, 금속파편물, 화염병 등으로 저항. 인근 파출소 방화. 그러나 파출소 방화 건은 전철연과 관계가 없다.
  • 2005년 4월 경기 오산시 세교 택지개발사업지구(2개월): 용역업체 직원 1명(26세) 사망, 6명 부상. 경찰관 3명 부상.
  • 2007년 12월 경기 용인시 기흥구 어정지구 재개발(1년 1개월): 새총을 이용한 골프공, 쇠구슬(베어링) 발사 방식으로 시위. 망루에 설치한 확성기를 이용해 1일 3회 장송곡을 송출하여 인근 주민들의 민원이 속출함(…).
  • 2009년 1월 서울 용산구 한강로(3일): 화염병으로 농성장 옆 상가건물 화재, 40분만에 진화. 경찰관들의 진입 과정에서 철거민들의 화염병에 의해 화재가 발생하여 망루가 붕괴. 철거민 5명 사망, 경찰관 1명 사망, 23명 부상.

8. 생각해볼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철연과 같은 위험한 불법집단이 생긴 이유는 분명히 있다. 실질적으로 철거민이 정당한 권리를 찾기에는 한국의 시스템이 개판이기 때문이다. 주택임대차 보호법의 개정으로 주택의 경우는 그나마 나아졌다고 하지만 상가의 경우 시대의 변화에 법 조항의 변화가 못 따라간 대표적인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 엄청난 돈을 투자해서 장사를 하던 가게에 단칼에 재개발의 손길이 스며들면 최소한의 이사 비용만 받고 하루아침에 쫓겨나야 하는 곳이 아직 한국에는 부지기수로 많다.

한국에서 가게를 열 때 너무나 당연시하게 통용되고 있는 권리금도 재개발이 될 때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나와야 한다. 물론 권리금은 법에서 보장하지 않는 돈이지만 실제로 가게를 거래할 때 권리금 안 주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다. 이 때문에 권리금을 합법화시키자는 소리도 나오는데 말은 좋지만 수학적으로 평가해내면 노벨 평화상 받는다고 할 정도의 난제다. 게다가 2010년 들어서는 멀쩡히 장사하고 있던 가게 주인을 내쫓고 주인이 직접 가게를 인수해서 장사하는 일종의 상권 강탈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미 국제사회에서도 강제철거 문제를 수없이 제기했는데 1993년 유엔 인권위원회 결의안 제77호, 1996년 제2차 세계주거회의 해비타트 의제, 1997년 마스트리히트 가이드라인 등에서 무리한 강제퇴거 및 강제철거를 금지하고 있으며 유엔 사회권규약위원회 역시 1995년 및 2001년에 한국 정부가 제출한 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에서도 강제철거로 인한 피해자 수와 발생 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고 유감을 표하며 주거대책 없는 철거 중단과 임시주거시설 제공을 권고했다. 2009년 용산 참사 후 국가인권위원회는 '강제철거 시 준수되어야 할 기본원칙'5개항을 제시해 이를 행정안전부, 국토해양부, 경찰청 등에 권고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부동산의 수요와 공급 그리고 건물주와 세입자의 재산권이 칡뿌리처럼 얽혀 있는거라 설령 국가라 해도 해결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앉아서 길바닥에 내몰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는 한국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점거투쟁이 흔하고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 건물주나 개발주체와 결탁한 사적 폭력에 대한 법적제재와 세입자 보호제도의 미비 등으로 투쟁은 자연스레 비참하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렇게 된 철거민/세입자들은 일단 법원을 찾게 된다. 그런데 법원에서는 이미 건물주가 바뀌었기 때문에 별 문제없다는 입장을 제시할 뿐이고 이제 세입자의 입장에서는 속터지는 일들이 벌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용역이라고 불리는 깡패들의 행패. 적정 수준의 보상을 하고 좋게 마무리지어도 원래 상권에서 쫓겨나서 속터지는 마당에 협상이 진행되긴커녕 깡패들이 가게로 쳐들어와서 깽판을 놓거나 가게 외벽에 낙서를 하고 도망간다. 심지어 퇴근하는 종업원이나 사장을 몰래 두들겨 패고 도망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상황이 신과함께의 이승편에 잘 나타나 있다.

문제는 이들은 전문적인 폭력집단이고 일반인들은 힘도 없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버틸려고 해도 버틸 수가 없게 되고 자신의 생활기반은 홀라당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피해자가 깡패들의 폭력문제로 경찰서를 찾아가면 대부분 대답은 좋게 해결 보시죠 정도다. 이게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서 전철연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더욱 철두철미한 법조항으로 권리금의 거래를 금지하고 개인의 재산과 삶의 기반을 보호해 주도록 시스템이 개정되었어야 하는 것이 먼저였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의 기반을 순식간에 망가뜨릴 수 있는 시스템 미비라는 괴물이 전철연과 같은 위험하고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괴물을 만들어 버린 셈이다. 결국 계속되는 악순환이 낳은 그늘이라고 볼 수 있다.

오죽하면 동아일보 기사에서도 이들을 다루면서 철거민들이 전철연 말고 의지할 데가 없다면서 기자들에게 하소연하고 심지어 욕설까지 한 적이 있다. 한 주민은 기자에게 "당신들은 늘 전철연 비난 기사만 싣지만 그래도 우리들이 의지할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현실에 일부 철거민들이 우리도 법 대신 주먹을 택하겠다고 하여 만든 "주먹"이 전철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 탓으로만 볼 수도 없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의 일이 아니면 신경쓰지 않는 데다 정작 철거민들은 사회적 소수자에 약자들이라... 국민의 관심도 상당히 저조하고 당연히 정부 입장에선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거꾸로 (물론 그들이 악용하기도 하는 논리이지만) 결국 건설업체와 재개발조합 측에서 용역깡패라는 법 대신 주먹 논리를 구사하니 결국 이쪽도 법대신 주먹으로 전철연이 나왔다는 논리가 된다. 피장파장이라면 피장파장의 오류겠으나 사람의 최소한의 생존기반에 해당하는 일자리와 주거 문제에 딸린 현실 상황에 무조건 논리학을 들이미는 게 올바른 것도 아니며 논리학적 오류가 무조건 현실의 오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래도 정부 역시 도시 재개발을 철거민들의 입장을 존중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09년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 개정되면서 휴업보상금을 3개월치에서 4개월치로 늘렸고 2013년 경비업법 개정에 따라 경비용역업체 설립요건을 까다롭게 하고 폭력/성범죄자 등 전과자를 취업서 배제토록 했으며, 같은 해 서울시도 '주거시설 등에 대한 행정대집행 인권 매뉴얼'을 마련하여 거주민 퇴거 완료 후 철거 실시, 겨울철 및 악천후 시 철거 금지 등을 못박았다.# 단 근본적 해결의 실마리가 될 '강제퇴거 제한에 관한 특별법(일명 강제퇴거금지법)'은 2012년 18대# 및 19대#, 2018년 20대 국회# 회기에 각각 발의되었으나 회기 만료로 전부 폐기되었다.

무엇보다 철거민들도 철거 이전에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장사하며 생계를 꾸리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희망을 놓지 않았던 사람들이지만 하루아침에 나앉게 생겼다면 어느 누구든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한국 사회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2003년에는 일산동구가 아니라 분구 이전의 일산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