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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웨이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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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웨이궈
蔣緯國(장위국) | Chiang Wei-kuo
파일:장웨이궈.jpg
<colcolor=#ffffff><colbgcolor=#000000> 출생 1916년 10월 6일
일본 제국 도쿄부
사망 1997년 9월 22일 (향년 80세)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종교 불교개신교
경력 제3대 육군지휘참모대학 총장 (1963~1968)
제2대 삼군대학 총장 (1975~1980)
제12대 중화민국 연합군 총사령관 (1980~1984)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iang_Wei-kuo_Nazi_2.jpg
파일:nn2.jpg
<colcolor=#ffffff> 독일 국방군 복무 시절 <colcolor=#ffffff> 삼군대학 총장 재임 시절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 일단 공식적으로는 장제스의 아들이며 장징궈의 이복동생이다.

2. 생애

1916년 10월 6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독일 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했고 안슐루스에 참여하기도 했다. 독일 국방군에서도 복무하여 중위까지 진급했다. 폴란드 침공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중국과 독일의 관계가 미묘해지면서 본국의 소환 명령에 따라 1940년 귀국했다. 귀국 후 중화민국 국군에서 복무하였고 후쭝난 휘하에서 국공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계모이며 적모가 되는 쑹메이링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장징궈를 견제하기 위해 장웨이궈를 총애하였다. 두 사람은 1955년 이후로 굉장히 죽이 잘 맞아 장웨이궈가 늘 북교의 저택에 거주하는 쑹메이링에게 문안인사를 하곤 했는데, 둘이서 장징궈를 '이세민', '모스크바에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은 빨갱이 새끼'(...)라고 욕하곤 했다고 한다. 쑹메이링은 장웨이궈를 장제스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수차례 공작을 취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국 대사관 참사관을 납치하고 1955년 쌍십절에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안전부의 수장 장징궈를 난처하게 만들고자 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장징궈가 장웨이궈의 소행임을 죄다 간파해버렸기 때문에, 장웨이궈는 장제스에게 불려가서 크게 질책을 들었다. 이때 장웨이궈가 자신이 독일에서 배운 것보다 장징궈가 모스크바에서 배운 특공수단이 더 대단하니 나치가 소련에게 진 것이 당연하다고(...) 한탄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장징궈의 견제 속에 1986년 중화민국 육군 2급상장(한국의 대장)으로 전역하였다. 주로 교육기관 등 후방에서 근무했고 육군사령이나 참모총장은 맡지 못했는데 이것도 장징궈의 견제로 추정된다.

전역 후 장징궈로부터 정계 진출을 허락받아 국민당 상무위원회 위원, 국가안전회의 비서장을 지냈으며, 중일전쟁사를 연구하여 관련 저작을 남기기도 했다.

장징궈 사후에는 국민당 주석이 된 리덩후이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1990년 총통 선거에서 보수파가 리덩후이의 총통 출마를 막기 위해 린양강을 총통 후보로 내세울 때 러닝메이트로 지명될 예정이었으나 막판에 린양강이 출마를 포기함으로써 무산되었다. 1992년 입법원 선거에서 중국국민당이 패배하자 이를 구실로 하오보춘 행정원장과 함께 리덩후이 총통에게 숙청당해서 정계에서 물러났다.

1997년 9월 22일, 투병 중이던 당뇨병과 이로 인해 발생한 신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장웨이궈 본인은 본토에 묻히길 원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대신 대만 시즈구 오지산에 위치한 오지산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3. 가족관계

어머니는 일본인이라는 게 정설이지만, 아버지는 장제스란 설과 장제스의 맹우인 다이지타오란 설이 양립하고 있다. 공식적인 아버지 장제스는 장웨이궈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출신을 밝히지 않았다. 일단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다이지타오가 친부이며 장제스가 양부라고 서술되어 있다.

다이지타오의 생물학적 아들이지만 장제스가 양자로 받아들여 키웠다는 설이 상당히 오랫동안 정설로 통했다. 이 설에 따르면 일본 유학 시절 다이지타오가 일본 여자와 불륜을 통해 아들을 낳았는데, 역시나 혁명가인 무서운 성격 아내에게 혼날 것을 두려워 안절부절하고 있을 때 장제스가 그럼 자신이 키워주겠다며 장웨이궈를 맡아 길렀다는 것이다. 중화민국이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이동하기 전부터 이러한 소문이 있었으며 몇가지 수상쩍은 정황 때문에[1] 장제스가 죽을 시점에는 장웨이궈는 장씨가 아니라 다이씨라는 소문이 너무 파다해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웨이궈 본인도 장위국보도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 자신의 친부가 다이지타오였을 것이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장제스와 닮은데다가 장제스 본인이 일개 양자에 불과한 장웨이궈에게 자신의 항렬을 물려주고 끝까지 자신의 친자라 고집했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친자가 아니냐는 소리도 있다. 다이지타오도 장웨이궈가 당신이 내 아버지냐 라고 묻자 "네가 장제스를 닮았느냐? 나를 닮았느냐?" 라고 물었고 장웨이궈가 장제스와 닮았다니까 그럼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지 않느냐고 대답하면서 자신이 아버지라는 것을 부인했다. 때문에 최근에는 장제스의 친아들이 맞다는 설이 오히려 좀 더 유력하다.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정확한 결론이 나오겠지만 후손들에게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라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2]
파일:external/a2616998db1d9186817dc47593bb8f79bdf536037178e6f07451b7ef2298bc1e.jpg
장웨이궈와 스징이의 결혼식 사진

1943년 중국 갑부의 딸인 스징이(石靜宜, 석정의)와 결혼했는데, 스징이는 사치와 밀수와 국가 기밀 누설로 구설수에 올랐다. 한번은 장웨이궈의 미국 방문 때 뉴욕에서 쇼핑을 하고 싶어서 따라가게 해달라고 남편을 조르다가 장웨이궈가 들어주지 않자 장웨이궈의 여권을 찢어발기는 만행을 저질렀고 이 때문에 장웨이궈의 미국 방문이 무산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격노했는데, 스징이가 1953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애 대해 며느리의 비행을 좌시할 수 없었던 장제스의 명령에 따른 암살설이 매우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대만 대사를 지냈고 장제스 가문과 친했던 김신은 회고록에서 이를 아예 사실로 소개할 정도이며, 김신이 소개한 내용이 한국에서는 장제스가 부정부패를 저지른 며느리를 처형했다는 말의 출처가 된다. 실제로 1953년에 당시 돈으로 300만 미국 달러 어치의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었었다고 한다. 이후 1957년 독일 교포인 추아이룬(丘愛倫, 구애륜)과 재혼하여 1963년 아들 장샤오캉을 얻었다.

4. 여담

  • 본 문서에도 그렇고 대만 웹이나 구글에다 두들겨봐도 중년 이후 모습보다 청년기의 나치 독일 육군 장교복 모습이 많이 나온다(...) 대만으로 넘어가서는 견제를 받아 크게 활약을 못하기도 했었고, 뭣보다도 젊은 시절 장제스를 닮아 인물이 수려한 편인데 나치제복 수트빨까지 겹치니 젊은 시절 사진의 인기가 워낙 좋기 때문으로 추정.


[1] 가령 장웨이궈 혼자만 장제스와 장징궈와는 혈액형이 달랐고 장제스의 친자라면서 유독 승진운도 없었다. 그리고 다이지타오의 친아들인 다이안궈와는 혈액형이 같았다.[2] 장웨이궈는 생존해 있는 아들 장샤오캉(蔣孝剛, 장효강)의 DNA를 채취하면 되고 장징궈도 남자 후손이 몇 명 살아있으므로 그들 중 한 명의 DNA를 채취하면 가능하지만 다이지타오는 남자 후손이 없기에 다른 친척을 찾지 못한다면 무덤을 파야 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