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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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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3. 구도장원공4. 관료 시기5. 말년

1. 개요

이이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유년기

1536년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부친 이원수와 모친 평산 신씨 신사임당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외가인 강릉에서 자라 강을 낀 산천을 보며 심신을 수양하였다고 한다. 6살 때 모계 집안인 강릉[1]을 떠나 부계 집안으로 이사했는데 이이 본인의 고향은 강릉이지만 본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2]라는 곳에 있었고 이이의 아호인 '율곡'도 파주 '율곡리'에서 본뜬 것이다.

가문이 중요시되던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고향은 '나 자신'이 아니라 '집안'이 연원을 둔 곳을 의미했는데,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율곡의 고향은 탄생지인 강릉이 아니라 친가가 위치한 파주가 된다. 다만 실질적인 본거지는 파주가 아닌 강릉인데, 이원수가 신사임당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인물이기 때문이다.[3] 강릉에는 외할아버지 신명화와 그 윗대로 이어지는 고리가 있고 집안 재산의 절대 다수가 있는 반면에 파주에는 진짜 아무 것도 없는데 유일한 장점은 근기(서울)에서 가깝다는 것뿐이다.

아버지인 이원수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하다. 이이가 남긴 기록 중 아버지에 관한 별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이이와 형제들은 아버지와 자주 다투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원수 때만 해도 가세가 좋지 않아 자기들보다 가세가 강했던 집안의 신사임당과 결혼했는데, 신사임당이 엄청난 인물이었던 데다가 아들까지 아버지의 능력을 한참 뛰어넘는 인물이었으니 이원수가 소외감을 느껴서 그랬을 듯하다.[4]

1548년 13세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해 조광조의 문인인 백인걸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16세 때인 1551년 어머니 신사임당이 사망하였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18세(1553년)에 관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었으나 모친을 잊지 못하였으며 봉은사에서 불서를 읽고 나서 감명하여 속세를 떠날 결심을 했다. 19세(1554년)에 친구들에게 편지로 이별하며 절에 들어갔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시점에서 불가에 회의를 느끼고 하산하여 이후 유학에 전심했다.[5]

22세(1557년)에 성주 목사 노경린(盧慶麟, 1516-68)의 딸인 곡산 노씨와 혼인했다.[6] 당대로서는 만혼이었는데 한창 결혼해야 할 나이에 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데다 삼년상 이후 불도를 익힌다고 산에 틀어박혀 있었던 탓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죽자 정신적 충격을 받고는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불법(佛法)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가 삭발을 했었는지는 불분명하나 의암(義庵)이라는 법명을 받기는 했다.[7][8] 그 때도 두문불출하며 온갖 불경들을 읽어내어 주변 스님들이 생불이 나타났다며 감탄해했다고 전한다. 머리가 좋은 것은 유교에서만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 부분은 훗날 그를 공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은 불교를 증오하다시피 했다. 천원권에 이황이 쓴 복건도 이황은 중이 쓰는 두건과 비슷하다고 하여 싫어했을 정도인데, 이이가 한때 불교에 심취했으며 법명까지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유학자들에게는 충분한 비난거리였다.[9] 이이는 성균관에서 노골적으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하며 신입 벼슬아치들이 당하는 면신례도 심하게 당했는지, 그는 바로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고 이를 비판했다고 한다. 다만 면신례는 본래 대상을 불문하고 혹독했는데 심지어 정몽주의 증손자도 과거에 급제하고 난 뒤 치른 면신례에서 괴롭힘을 당하다가 숨졌다. 사대부들이 극진히 모신 정몽주 집안 사람이 이 정도였다면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 출신이었던 이이를 어찌 대했을지는 뻔하다.

23세(1558년)에 퇴계를 만나기 위해 도산으로 갔고 이후에도 서찰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학문을 보완하게 된다. 퇴계를 만난 율곡은 자신이 불가에 들어갔던 사실을 이야기했는지 퇴계가 편지에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10]

26세(1561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3년상을 치렀다. 이후 출사 준비를 마친 이이는 29세인(1564년)에 생원시[11], 진사시[12]를 거쳐 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정6품 호조정랑으로 등용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예조와 청요직인 이조좌랑, 사간원과 사헌부를 거쳤고 선조 재위 1년에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와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당시 율곡은 상소하여 하직하며 '어릴 때에 선학(禪學)에 물든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감히 논사(論思)의 책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고 하자 선조는 '예전부터 아무리 호걸스러운 선비라도 불씨(佛氏)에게 빠져들어 간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전에 선문(禪門)에 종사(從事)했다는 작은 실수를 가지고, 옥당(玉堂)의 논사(論思)하는 중대한 직책을 경솔하게 체차할 수는 없다. 또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진 그 뜻이 가상하다.' 비답하였다. 이것이 이들의 첫 만남이었다.

3. 구도장원공

가장 유명한 일화로 과거시험에서 장원만 9번을 해서 당시에는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과거는 생원과 / 진사과(소과) 초시 → 생원과 / 진사과 복시 → 문과(대과) 초시 → 문과 복시 → 문과 전시의 5번을 거치게 되는데 이이의 경우는 생원과와 진사과 모두 장원으로 통과, 문과 전 시험 장원으로 통과, 거기에 특별 시험인 별시[13]에서도 장원, 진사과 초시에서도 장원을 한 번 더 해서 총 9번의 장원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시, 외시, 행시 고등고시의 1차, 2차, 3차 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인 셈. [14]

실제로 당시 이 부분은 정적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미 합격해서 안 쳐도 되는 시험까지 억지로 중복 응시를 감행하는 행동이 장원이라는 타이틀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이가 장원을 한 시험과 시간은 다음과 같다.
  • 생원과 초시: 29세
  • 생원과 복시: 29세
  • 진사과 초시: 13세, 29세
  • 진사과 복시: 21세 (29세에도 응시했으나 장원은 못 하고 합격)
  • 대과 초시: 29세
  • 대과 복시: 29세
  • 대과 전시: 29세
  • 별시 초시: 23세

이이가 장원을 많이 했지만 시험에 떨어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23세 때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별시 초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러나 정작 대과에서는 낙방하였다.[15]
“그런데 사람은 천지의 마음이니,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順)하면 천지의 기도 순하다. 그렇다면 이의 상(常)과 이의 변(變)을 어찌 한결같이 천도에 맡길 수 있겠는가? …… 성왕(成王)이 한번 잘못 생각하매 대풍(大風)이 벼를 쓰러뜨렸고, 주공(周公)이 수년을 교화하매 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았으니, 그 기가 그렇도록 시킨 것도 또한 사람의 일(人事)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 아아, 일기(一氣)의 운행 변화가 흩어져 만수(萬殊)[16]가 되나, 나누어서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각 일기(一氣)이지만, 합하여 이를 말하면 천지만상이 같은 일기(一氣)이다. …… 이로써 본다면 천지가 제자리에 위치하고 만물이 육성되는 것이 어찌 임금 한 사람의 수덕(修德)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
율곡 이이의 과거시험 답안지 천도책(天道策)의 마지막 부분 출처

4. 관료 시기

선조대에 시작된 붕당 간의 싸움에서 그는 중립을 지켰다. 서로를 그르다고 주장하며 분열한 사림에게 양쪽 다 옳고 그르다고 하자 사림들이 양시양비론이 어디 있냐고 반발하니, 이에 전국시대 군주들의 전쟁은 다 그른 것이고 주 무왕주왕을 정벌한 것이나 백이숙제가 말린 것은 다 옳은 일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초년의 이이는 붕당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붕당이란 것이 풍문ㆍ명목으로 존재하여도 그들은 모두 군자당이므로 결국 공존하고 화합하지 계파가 나눠 대립한다는 생각부터를 않으려 했다. 붕당의 문제를 인정하여 훈구에게 반격할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언에선 붕당의 문제를 직접 거론하며 특히 이이를 한 축으로 지목하기까지 한 이준경을 '말이 사악하다'라고 비난했고, 죽은 이준경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을 정도였다. 이 문제는 류성룡 등의 동인이 반대해서 무산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유언으로 말미암은 이 이슈 또한 동서 분당의 무수한 전개 과정 중 하나로 작용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림이 자기들끼리 분열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훈구의 정치적 수명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고, 실제 역사에서도 붕당의 문제와 대립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 현실을 자각한 이이도 자신의 생각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양파의 화합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이때 이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건이 바로 1575년 (선조 8년)에 있었던 을해당론(乙亥黨論).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며 슬슬 붕당이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김효원과 심의겸을 모두 지방관으로 좌천시켜 버린 것.

당대 집권층인 동인은 이이를 맹렬히 규탄했는데,[17] 이는 나중에 이이의 제자들이 성장하여 서인의 주된 세력을 형성하여 본래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던 이이가 서인의 종주로 세워지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처음에는 심의겸의 파벌을 서인이라 부르다가 어느새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을 서인이라 부른다고 나온다. 당시 심의겸은 자신의 학파를 형성하기는커녕 이이에게 보호를 받는 처지였기 때문에 붕당을 주도하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이황, 조식 등 높은 학문적 성과를 이룬 거물급 유학자들의 제자인 신진 사림 동인에게는, 독학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룬 이이가 배척의 대상이었던 반면 훈구들에게 우호적이던 기존의 권세가들에게 맞설 만한 거물이 없었던 서인들은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구도장원공의 문제 등 이이의 성격과 행동은 당대 조정의 비난 대상이었다. 29세로 젊은 나이에 한참 명성을 날리던 이이가 이미 합격을 해놓고도 계속 장원 자리를 노리며 불필요한 과거시험에 중복응시까지 감행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이이의 성격은 "교만하고 일처리를 멋대로 한다"라며 삼사의 탄핵 사유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실록을 보면 이이는 어전에서 이황이나 서경덕의 학문을 비판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서 그 제자들이 이이를 역공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박시백의 의견이 흥미로운데, 정리하면 이이는 이황이나 조식, 서경덕 등의 시대가 끝나면서 막 그들의 학파가 정립이 된 상황에서 그들의 영향과는 별개의 학술적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말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 선배 학자들의 계보를 잇는 사람들과는 필연적으로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선조 초년에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며 <경연일기>를 남겼는데,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에게 있어서 이황, 이언적[18], 권벌, 이준경, 기대승은 다 비난 대상이었고, 특히 기대승이나 이준경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이준경은 자신의 스승인 조광조가 위훈 삭제를 하려다 벌어진 기묘사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훈 삭제 문제에 대해 매우 강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자 이이는 이준경의 면전에서 "대신의 말이 애매모호하다."고 말하며 대놓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건 이준경과 이이의 환경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기는 그렇다. 그리고 이준경이 죽으면서 붕당을 경계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그 말이 악하다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자신을 추천하고 동네방네 자랑하던 백인걸 역시 예외없이 비판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 평을 요구받은 이이는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 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가령 이황의 제자였던 김성일과 동석한 어전에서 이이는 "이황의 학문은 좋은데, 자풍이나 정신은 옛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다"고 발언했다. 이를 들은 김성일은 발끈하여 "이황의 학문은 하늘의 해와 같은데 어찌 언론이나 세간의 평판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박하였고, 이황의 또 다른 제자인 류성룡은 이이에 대해 "다 좋은데 뭐든지 따지고 고치려 드는 성품이 흠이다"고 말하기도 했다.[19]

또한 서경덕이 죽고 나서는 우의정 추증에 찬성했을지라도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도에 너무 치우쳤다"라고 비판했는데, 조선 시대에 멀쩡한 유학자를 도교불교에 엮는 것은 대놓고 조롱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이도 한 때 불교 심취한적이 있다. 이렇게 서경덕을 비판한 것은 제자이자 허난설헌허균의 부친이기도 한 허엽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20]

특히 이이와 허엽은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는 사이였는데,[21] 향약의 시행을 두고 허엽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허엽은 이이를 가리켜 "예절과 근본도 모르는 인간"이라고 비판하며 그를 혐오하였으며 이이는 허엽을 평하며 "이론에 모순된 점이 많고 문의에 어둡다"고 비판했다. 또한 허엽의 아들인 허봉은 이이를 탄핵한 '계미삼찬'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허봉은 이이를 탄핵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서 파직당했고 귀양에서 풀려난 직후 병사한다. 결과적으로 붕당 정치의 최종 승리자는 이이와 그의 문파였다.

이런 여러 이야기들을 볼 때 이이가 주변인들의 어그로를 잘 끄는 성격이기는 했던 모양.[22]

대동법의 프로토타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제시하여 임진왜란기 적용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동법선조(조선) 문서 참고.

5. 말년

1581년에 그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였고 이와 더불어 군사훈련 등을 주창했으나, 선조와 대신들의 반대와 거부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탄핵으로 인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후 그는 다시 조정의 호출을 받아 이조판서와 판돈령부사를 지냈다. 그는 1584년에 47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 사저(舍邸)[23]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산에 있는데, 아주 가까운 위치에 그를 배향한 서원인 자운서원이 있어서 지금은 율곡 유적지-라는 형태로 한 동선에서 관람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묘역은 이이과 부인 노씨의 묘 이외에도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 이이의 형 이선의 묘, 이이의 장남 이경림의 묘, 장손 이제의 묘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가족묘이다.

실록의 율곡 졸기는 다음과 같다.#

물론 이 졸기는 『선조수정실록』에 있는 졸기로 서인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고 있는 졸기이다. 참고로 원래 『선조실록』에는 그냥 '졸하였다' 한 줄만 쓰여져 있다. 다만 이이와 같은 명망 있는 신료의 죽음에 사관이 평을 안 했을리가 없고, 아무래도 『선조실록』을 편찬했던 북인이 이이와 대척점에 서있던 동인 계열 중에서 강경파였다는 점에서 일부러 졸기의 내용을 뺐을 가능성이 높거나 이이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중 일부가 소실되었는데, 그 때 사관이 쓴 이이의 졸기도 소실되면서 빠졌을 가능성도 있다.

인조 초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현종실록


[1] 강릉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며 따라서 이이에게는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2] 그래서 파주시 곳곳에 가면 그를 기념하기 위해 율곡로, 율곡수목원, 율곡습지공원 등 시설명에 호를 붙였다.[3] 사실 이는 조선 전기에 일반적인 결혼 형태였다. 아들은 사돈 집에 들어가고 사위가 우리 집에 들어와 사는 것.[4] 신사임당의 부친인 신명화가 딸 신사임당을 편히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한미한 집안의 평범한 사람인 이원수와 혼인시켜 데릴사위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이원수는 평생 아내에게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했다고 한다.[5] '불씨(佛氏:부처님)가 그 제자에게, 생각을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라고 경계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개 그 학문은 별다르게 기묘한 것이 없다. 다만 이 마음이 내달리는 길을 끊어 정신을 집중시켜 정(靜)함이 지극하여 허명(虛明)한 경지로 나아가게 하고자 할 뿐이다. 화두(話頭)를 두고 거기에 매달려 공부하게 하는데, 또 그 사람이 미리 이런 뜻을 알면 선(禪) 공부가 알뜰하고 전일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이런 금법(禁法)을 만들어서 속이는 것이다.'[6] '선생의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노씨(盧氏)인데, 곡산(谷山)의 명망 있는 가문 출신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노중례(盧重禮)의 현손(玄孫)이다. 그 아버지 노경린(盧慶麟)은 종부시 정(宗簿寺正)이요,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선공감 정(繕工監正) 김한로(金漢老)의 딸이다. 부인은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나서 정사년(1557, 명종12)에 선생에게 시집왔다.' - 출처: 행장, 김장생 저, 링크[7] 이를 밝혀낸 인물이 바로 이병도이다. 실제로는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기보다 거사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이 숭유억불로 유명하지만 조선 전기만 해도 유학자들 중에서 불교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고 그 중에 법명을 가진 거사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루 술 3잔 설화로 유명한 손순효(칠휴거사).[8] 장유는 율곡을 직접 만났던 두 명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게 사실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링크[9] 조선 전기에 유학자들이 주변인의 사망에 충격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는 경우가 없진 않았다. 세종 또한 유학을 따랐지만 소헌왕후와 아들들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불교에 심취하게 되었다.[10] '지난날 남들이, 그대가 불교 서적을 읽고 꽤 중독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오랫동안 애석하게 여겼었는데, 일전에 나를 찾아와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그 잘못을 말하였으며, 이제 두 번 온 편지의 뜻이 또 이러함을 보니, 나는 그대가 도에 함께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11] 장원 급제[12] 12위 급제[13] 특히 별시 당시 내놓은 답안인 '천도책'(天道策)은 당시 그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에 학문적으로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나 이 시험은 몇 달 동안 출제자들이 고심하여 제출한 문제였는데, 이이는 단 세 시간 만에 답안지를 작성해서 제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확실히 천재는 천재인 듯.[14] 과거시험은 보통 9세부터 일평생을 바쳐 공부해야 한 번 될까 말까한 시험으로 문과 평균 합격자 나이가 35세였다.[15] <퇴계선생전서 권16 담이숙헌>에 퇴계가 '소년 등과는 불행'이라며 등과에 실패한 이이를 위로하는 구절이 있다. -> 앞글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퇴계선생문집 제14권'에 퇴계가 율곡에게 답하는 2개의 편지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런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링크[16] 모든 것이 여러 가지로 다 다름.[17] 왜냐하면 그들 생각에 심의겸은 외척 나부랭이로 허명을 얻었고, 김효원은 중망받는 사림인데, 이이의 해결책에서 심의겸은 조금 가깝고, 김효원은 멀리 간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지방의 거리까지 측정해서 똑같은 거리에 있는 곳으로 보내라는 것은 괴상하기 짝이 없다.[18] 율곡은 이언적이 을사사화 때 윤임파 사림을 취조한 일을 문제삼았다.[19] 류성룡이 좀 보수적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작 류성룡은 이이를 높이 평가했을 뿐 아니라 이이의 정책과 사상을 지지했던 서인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재상이 된 이후에 이이의 경장론과도 부합하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특히 류성룡은 이이가 제안했던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적극적으로 건의했는데, 이는 뒷날 대동법의 토대가 된다. 다만 이이 생전에는 이이의 개혁 정책에 반대했긴 류성룡도 마찬가지였다.[20] 흥미롭게도 허엽 - 허균 - 기자헌 등의 동인 인사도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한때 법명까지 받아가면서 불법을 공부했던 이이도 그렇고, 조선 성리학에 불교 냄새가 강한 것이 괜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성리학부터 주희가 유학에다 불교, 도교를 섞어서 만든 것이다.[21] 허엽의 별명이 묘지(卯地)였다. 토끼라는 게 아니라, 동서남북 네 방위를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열둘로 나눈 것인데, 이렇게 하면 묘지는 정동(正東)이 된다! 그야말로 타협 없는 동인이었다는 이야기다.[22] 이후의 그의 학통은 정계를 장악한 집단이 되면서 조선 후기 많은 잘못들을 저지르게 되지만, 이런 비판적인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후학들이 주체적으로 선배들의 학설을 연구하여 보다 옳은 것으로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되기도 하였다.[23] 지금의 인사동 관훈빌딩 언저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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