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5 13:55:04

이석채(독립운동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박탁(朴鐸)
경필(卿弼)
본관 여주 이씨[1]
출생 1892년[2] 5월 26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양좌동
(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125번지)[3][4]
사망 1948년 3월 16일[5]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 임경대 부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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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이석채는 1892년 5월 26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양좌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125번지)에서 아버지 이상구(李庠久, 1875. 4. 14 ~ 1931. 10. 3)와 어머니 밀양 박씨(1873. 1. 2 ~ 1942. 2. 3)[6]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석채는 1919년 12월 28일 경상남도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의 김천여관에서 동래면 칠산동(현 동래구 칠산동)에 사는 이정약(李丁若)에게 벼 100석을 1석당 20원으로 하여 팔겠다며 열흘 뒤에 벼를 넘겨 주겠다고 했다. 그 뒤 12월 31일 김천여관에서 돈 1,600원을 받았고, 이듬해 1월 8일에는 부산여관에서 돈 400원을 받는 등 총 2,000원을 받아냈다.

이석채는 이를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해줄 목적으로 이튿날인 1920년 1월 9일, 동래군 동래면 온천리를 출발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했고, 1월 17일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유하현(柳河縣)[7]에 도착했다. 이석채는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원인 노백린을 만나 1,000원을 임시정부 자금으로 전달하였다. 그 뒤 그 또한 임시정부의 외무원에 선임되었고, 조선 국내의 민정을 시찰하고 임시정부 요원을 모집, 권유하기 위해 귀국했다.

1920년 2월 4, 5일경에 경기도 경성부로 돌아온 이석채는 이후 함경남도 원산부로 가서 기선을 타고 강원도 강릉군 신리면(현 강릉시 주문진읍) 주문진항에 도착하였다. 이후 며칠간 주변에 머물다가 박탁(朴鐸)이라는 가명으로 강릉군 덕방면 두산리(현 강릉시 두산동)에 거주하는 최명일(崔命一)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으로 가담하도록 권유했고, 2월 19일에는 삼척군 삼척면 읍상리(현 삼척시 읍상동)에 거주하는 김동석(金東錫)을 만나 임시정부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임시정부 요원으로 가담할 것을 권유했다.

이 일로 이석채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4월 22일[8] 대구지방법원 울진지청[9]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10] 위반 및 사기,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11]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48년 3월 16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 여담

  • 부인 영양 남씨(1892. 12. 23 ~ 1968. 11. 19)[12]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이 때문에 호적상으로도 후손이 없다. 다만, 족보상으로는 첫째 남동생 이석기(李錫圻, 1901. 6. 16 ~ ?)의 장남 이원준(李源準, 1933. 3. 20 ~ )을 입양한 것으로 되어 있다.
  • 훈장증 등 이석채의 유품은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강동리 양동민속마을 강학당에 소장되어 있다.

[1] 여강경주파(驪江慶州派)-수졸당파(守拙堂派) 24세 석(錫) 광(光) 근(根) 현(鉉) 항렬.[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기준. 여주(여강)이씨족보 권2 1279쪽에는 189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인근의 안계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이한구·이인석, 정치인 이원준도 이 마을 출신이다.[4] 1913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3년 당시 양동리 125번지는 이석채의 아버지 이상구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5]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기준. 여주(여강)이씨족보 권2 1279쪽에는 1947년 11월 4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6] 박기우(朴起羽)의 딸이다.[7]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柳河縣).[8] 1920년 6월 8일 형사사건부에는 1920년 6월 8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9] 1920년 4월 20일 형사사건부1920년 6월 8일 형사사건부 모두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1심이 열린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10] '정치에 관한 죄'라고도 한다.[11] 1920년 4월 20일 형사사건부에는 6년 미만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12] 남조와(南朝洼)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