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03:25:57

이미륵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미륵
李彌勒 | Mirok Li
파일:이미륵.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이의경(李儀景)[1]
본관 전주 이씨[2]
출생 1899년 3월 8일[3]
황해도 해주군 주내면 서외륙리·서외삼산리[4]
(現 황해남도 해주시 장춘동)
사망 1950년 3월 20일 (향년 51세)
학력 해주보통학교 (졸업)
경성의학전문학교 (제적)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의학 / 중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의학 / 중퇴)
뮌헨 대학교 (동물학 / 학석사)
뮌헨 대학교 대학원 (동물학 / 박사[5])
묘소 독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사이트 (사)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1. 개요2. 생애3. 사후4. 작품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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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독일에서 활동한 한국인 동물학자, 문필가. 본명은 이의경(李儀景)으로, 이미륵은 1935년 '수암과 미륵'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필명이다.[6]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군 주내면 서외륙리·서외삼산리(現 황해남도 해주시 장춘동)에서 아버지 이동빈과 어머니 청주 이씨 이성녀 사이에서 1남 3녀 중 막내이자 3대 독자로 태어났다. 해주군에서 상인으로 성공한 천석꾼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해주보통학교를 졸업했으나 당시 해주군에는 고등보통학교가 없었으므로, 강의록으로 독학하여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뒤 그해 5월 외교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지침으로 표방한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에 입단했고, 동지 포섭 및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힘을 쏟는 한편, 편집부장을 맡아 기관지 《외교시보(外交時報)》 등 선전물의 발간을 주도했다. 또한 1919년 8월 29일 경술국치 기념일에 벌일 만세시위를 위해 《경술국치 경고문》 등 선전물의 인쇄에 대한 책임을 맡았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중화민국 상하이시에 건의문과 독립운동 자금을 휴대해 납부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말 일본 제국 경찰에 활동정보가 노출되면서 핵심 인물들이 체포되자 이미륵 또한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중화민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적십자대에 들어갔고, 대원으로 간호사를 교육시키는 일을 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을 도왔다.

1920년 5월 안중근의 사촌 동생인 안봉근(安鳳根)과 요셉 빌헬름 선교사의 도움으로 독일로 건너갔다.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이른 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7] 독일에서 처음에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각각 의학을 공부했으나 모두 중퇴하고 1925년 뮌헨 대학교 동물학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뮌헨 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Egmont Palace)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김법린·이극로·황우일(黃祐日)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파견돼 21개국 174개 단체 대표단 앞에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성토하고 3.1 운동 당시의 기미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일제의 조약을 무효화하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는 결의안을 발표하는 등 활약했다. 이듬해인 1928년에는 뮌헨 대학교 대학원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파일:김법린(1927년).jpg
왼쪽부터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가타야마 센[8], 이미륵, 이극로.

학위 취득 후 본격적으로 습작활동을 시작하여 1931년 독일 문예지 'Die Dame'에 최초의 단편 'Nachts in einer koreanischen Gasse'(어느 날 밤 골목길에서)를 발표했다.

당시 이미륵과 교류를 많이 했던 인물 중에 쿠르트 후버 뮌헨 대학교 교수가 있었는데, 후버 교수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당시 유명하던 반 나치 저항활동단체인 백장미단 사건에 관계돼 반 나치 활동 혐의로 처형되었다. 후버 교수는 숄 남매를 비롯한 비롯한 백장미단 학생들을 지도하는 입장이었는데. 결국 악명 높은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인민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때 이미륵은 후버 교수를 깊이 이해했으면서도 그의 활동을 상당히 우려스럽게 바라본 모양이다. 결국 그가 처형당하자 이미륵은 이 시대의 가장 고귀한 사람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사건 이후 후버 교수의 가족들은 연좌제와 감시에 시달리며 전시 배급도 제대로 못 받았고, 지인들은 연루될까 두려워 이들과 연락을 끊었다. 그러나 이미륵은 자기가 배급받은 물건을 그들에게도 나눠주며 전쟁 끝까지 별 탈이 없도록 돌봐주었다. 그는 후버 교수 외에도 다른 반나치 지식인들과도 교류했는데, 그 중 한 명이 유명한 반나치 운동가이자 언어학자인 프란츠 티어펠더 교수로, 셋은 자주 모여서 나치를 비판하곤 했다.

이렇듯 이미륵은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양쪽의 지배를 모두 겪으면서도 그에 모두 반대했던 몇 안 되는 지식인이었다. 이 덕분에 2019년 뮌헨에 있는, 후버 교수의 이름을 딴 쿠르트 후버 거리에 이미륵의 기념 동판이 새겨졌다. 바로 옆에는 후버 교수의 동판이 자리한다. 동판에는 이미륵이 생전에 자주 하던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라는 명문이 있다.

1946년 피퍼출판사(Pipper)에서 독일어로 쓴 자전적 소설이자 자서전인 첫 작품 'Der Yalu fließt'(압록강은 흐른다)를 출간, '금년 독일어로 쓰인 가장 훌륭한 책'으로 선정되고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독일의 교과서에도 수록되었다.

1948년부터 뮌헨 대학교 동양학부에서 한국어와 동아시아문학사, 일본중세문학 등을 강의했다. 1950년 3월 20일 위암으로 독일 뮌헨 그레펠핑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사후 유고집으로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가 발간되었다.

3. 사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럼에도 17년 간 난항을 겪다가 그의 큰누나의 손자 이영래가 그를 대신하여 상을 수상했다.[9] 1994년에는 정규화 성신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1966년부터 모아 온 이미륵의 유품 및 자료, 사진 등 300여 점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4. 작품

  • 생전 간행
  • 유고집[10]
    • 1972년 Iyagi (이야기)
    • 1982년 Vom Yalu bis zur Isar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
    • 1984년 Der andere Dialekt (또 다른 방언)

5. 관련 문서



[1] 이 이름으로 독립유공자에 서훈되었다.이의경 독립유공자 공적정보義儆, 李義敬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2] #[3] 양력 4월 17일.[4] 1910년대 초 서외륙리와 서외삼산리 각 일부 지역을 분리해 서영리 신설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해주군 해주면 서영정 96번지 → 해주군 해주읍 서영정 → 1938년 해주부 서영정 → 1945년 8.15 광복 후 해주시 장춘동.[5] 박사 학위 논문: Regulative Erscheinungen bei der Planarienregeneration unter anormalen Bedingdungen(비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플라나리아재생에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들)[6] 아명이 미륵이라고도 알려져 있으나, 배꼽 밑에 우물 정() 모양이 있어서 아명은 '정쇠(井釗)'였다고 한다.[7] 이때 김마리아는 1920년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해로 망명한 상태였고, 안재홍은 검거돼 대구형무소에 복역했다.[8] 일본공산당 공동 창립자이다.[9] 이미륵은 슬하에 1남 1녀가 있었으나 자녀들은 모두 이미륵이 죽던 해 일어난 6.25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10] 이미륵은 죽기 전 자신이 쓴 작품 대부분을 불태웠기에 미륵 사후 사람들은 나머지를 찾는 것에 난항을 겪었다.[11] 한동안 이미륵 작가 문서가 존재하지 않아 대신 이 작품 문서에 이미륵 작가에 대한 정보를 많이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