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69778><colcolor=#fff> 왕조현 王祖賢 | Joey Wong | |
출생 | 1967년 1월 31일 ([age(1967-01-31)]세) |
타이베이시 | |
국적 | [[대만| ]][[틀:국기| ]][[틀:국기| ]][1] |
영주권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2] |
신체 | 172cm, 53kg[3], O형 |
가족 | 부모님, 언니, 오빠 |
학력 | 대만예술학교 |
종교 | 불교 |
데뷔 | 1982년 CF Adida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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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 출신의 홍콩 배우. 홍콩에서 활약해서 국내에선 홍콩 배우로 알려진 편이다. 1984년 대만에서 홍콩으로 건너와 배우 생활을 하다 1987년 천녀유혼의 섭소천 역으로 대박이 터지며, 당시 동아시아권에서 센세이션한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1980년대 후반 당대 국내 중고생들의 외국인 책받침 여신 중 한명이기도 했다.[4] 지금도 임청하와 함께 20세기 중화권을 대표하는 미녀 배우로 인식되고 있다.2. 생애
(농구 선수 시절의 왕조현)
(1986년 영화 심동(연애일기) 한 장면.)
증조부 왕인봉(王仁峰, 1887~1967)은 쑨원과 같이 국민혁명을 하던 혁명가였고[5], 할아버지 왕국번은 국민당의 악명높은 특무-정보기관인 조사통계국에 있었다. 하지만 대륙이 공산당에 넘어가자 대만으로 도피해 왔다. 이렇게 대만의 명문가 집안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농구선수였고, 왕조현은 아버지로부터 큰 키를 물려받았다.
타이베이현 숭광여중(崇光女中), 타이베이시 회생중(懷生國民中學)으로 전학(그때 농구부 가입), 다시 타이베이국광예고(臺北國光藝校)로 전학, 수료하였다.
청소년기에는 비교적 큰 키인 172cm였기 때문에 농구를 했다고 하며, 이 때문에 대만 청소년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으나 실은 아버지가 대만 청소년 국가대표 출신이었던 것이 와전되었다고 한다. 중학생 때 아버지의 권유로 잠깐 시작했다가, 2년 뒤 길거리 캐스팅으로 데뷔한 케이스라 대표로 뽑힐 만큼 엄청난 실력은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운동으로 몸은 비교적 잘 다져져서 이후에 액션연기를 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 것 같다. 본인 스스로도 진짜 무술은 배운 건 아니지만, 여러 무협 영화에서의 액션 장면은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길거리 캐스팅 후 15살때 첫 광고로 아디다스운동화(愛迪達球鞋)를 찍었고, 16살 국광예고 재학시 타이완에서 첫 영화 '금년 호숫가는 아주 추울 것 같아'(今年的湖畔會很冷)을 촬영하였다. 그리고 이 영화가 금마장(金馬獎) 영화제에서 세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며, 당시 홍콩 쇼브라더스(香港邵氏電影公司) 대표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왕조현과 계약하며 이후 홍콩으로 가서 활동하게 된다. 1984년 '올해에 호반은 추울 것이다'(금년호반회흔랭)란 영화로 홍콩 데뷔하였다.[6] 이후 여러 영화에 출연한다.
출세작은 1987년 장국영과 함께 출연한 '천녀유혼'. 이 영화가 국내외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7] 당시 한국에도 그녀의 다른 출연작들이 많이 수입되었는데, 주윤발과 함께 찍은 '대장부일기', '장단각지연' 같은 가벼운 분위기의 홍콩식 코미디 영화는 물론 '의개운천' 같은 영화도 왕조현의 이름을 제법 내세울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다. 의개운천은 1986년 왕조현이 천녀유혼으로 뜨기 전 에스케이프걸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개봉되었으나, 천녀유혼으로 왕조현의 인기가 커지자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4글자 한자 제목인 원제 의개운천으로 바꾸어 다시 소개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한국에 알려진 작품으로는 '천녀유혼 1,2,3', '정전자', '신유성호접검', '동방불패2', '청사', '살수호접몽' 등이 있다.
1990년대에도 꾸준히 영화에 출연은 했으나, 비슷한 역할의 다작 출연으로 이미지 소모가 심했고[8] 연기력도 특출난 수준까진 아니라 예전만큼의 인기를 얻진 못했다. 어떻게 보면 천녀유혼으로 이미지가 고정된 데다가, 예쁜 외모가 오히려 배역 선택에 일정부분 장애가 된 이유도 있었다.[9] 사실 왕조현의 연기력이 그렇게 형편 없었던 것도 아니라, 일부 작품에선 좋은 연기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나 대중들은 왕조현의 외모에만 집중해 그녀의 연기력은 미처 발견해내지 못한 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유부남이었던 임건악과의 스캔들은 그녀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10] 그녀가 1994년에 은퇴 선언을 한 것은 유부남과의 스캔들로 인한 대중들의 비난도 한몫했다.
1994년 은퇴를 선언했으나 연기자 욕심이 남아 있었는지[11] 1997년에 복귀하여 일본영화 북경원인에도 출연했다. 덕분에 일본 진출설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자신의 재능을 더 키워줄 작품을 만나지 못했는지, 2002년 '미려상해'(개봉은 2004년) 촬영을 끝으로 돌연 캐나다 밴쿠버로 떠났고, 이후부턴 거기서 독신으로 조용히 생활 중이다.
3. 여담
한국에서는 광고시장 개방을 계기로 여러 외국 연예인들이 한국 광고에 출연하던 시기, 크리미라는 탄산음료의 광고 모델로 기용된 적이 있었다. 캐치프레이즈는 "안녕하세요! 왕조현입니다~".[12][13]
1993년에 방한했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했던 사진.
한복을 입은 왕조현. 일밤에 출연했을 당시 모습이다.
별명으로 長腿姐姐(롱다리 아가씨)가 있다고 한다.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에 캐스팅 되었으나 정작 완성된 동사서독에는 왕조현이 나오지 않았다. 동사서독의 제작이 지연되는 도중 왕조현이 유부남이었던 임건악과의 스캔들을 일으켜 연예계에서 일시적으로 은퇴했기 때문. 그래서 동사서독 제작이 늦어지는 동안 동사서독 출연진을 데려다가 만든(...) 유진위 감독의 '동성서취'에는 왕조현이 출연했다. 참고로 한국의 여배우 심혜진도 왕가위 영화를 촬영하러 갔다가 왕가위 감독 특유의 즉흥적이면서도 시간 끄는 제작 방식 때문에 결국 하차한 적이 있었다. 이후 그녀가 맡을 배역은 당시 대만의 신예 스타였던 양채니가 맡았다.
1990년대 영화 홍보차 내한하여 SBS 주병진쇼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사족으로 왕조현 외에도 임청하, 이연걸 등이 출연한 바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주윤발이라고 한다. 참고로 주윤발과는 공처2인방, 의개운천, 대장부일기, 장단각지연에서 커플로 연을 맺었다. 도신처럼 커플은 아니지만 같이 출연한 영화는 더 있다.
2002~2003년에는 벤쿠버 다운타운에 거주하였고, 버나비의 한 ELS 학교에 다녔다. 당시 다운타운의 슈퍼에서 왕조현을 마주친 한국 유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왕조현은 여전한 미모로 사인도 흔쾌히 해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2004년 왕조현이 엄청나게 뚱뚱해진 모습으로 거리를 걷던 모습이 파파라치에게 찍힌 뒤에 '절친했던 장국영의 자살 후 충격 탓에 우울증으로 인한 약물 과다 복용 후유증 때문이다.' '연예계를 떠난 후 캐나다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고 있어서 그렇다.', '영화 복귀를 준비 중이며 이를 위해 억지로 몸집을 불린 것이다.' 등의 소문이 무성했었으나 결국 정확한 사실을 밝히진 못했고, 그 모습을 보고는 "나의 섭소천은 저렇지 않아!"라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2010년에는 다시 예전의 날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측근의 증언으로는 왕조현이 단 것을 좋아하며, 살이 쉽게 찌고 쉽게 빠지는 체질이라고.
2013년 홍콩에서 찍힌 파파라치를 보면 보톡스를 맞기라도 한건지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부어있어서 많은 팬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본인도 이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나중에 캐나다로 돌아가기 위해 홍콩 공항에 도착했을 땐 아이패드로 최대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도 했다. 게다가 대만,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언론에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왕조현이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 차원에서 성형을 했다는 루머까지 돌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루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는지, 아예 왕조현 본인이 이에 대해 해명하며 자신은 교통사고도 당한 적도 없고 무탈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셀프카메라를 공개하기도 했다.
2016년 1월 3일, SNS를 통해서 사진과 함께 새해 인사를 올렸다.
비록 영화계에서는 완전히 은퇴하고, 캐나다에서 은퇴생활을 보내며 연예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거의 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2010년대 이후부터는 SNS를 통해서 팬들과의 소통은 꾸준히 하면서 근황 사진을 올리고 있는데 . 2021년에도 여전한 미모를 자랑한다.
한때 비구니로 출가했다는 루머가 돌았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사생아 출산설도 한 때 이슈였으나 후속 기사가 안 뜨는 것으로 보아 역시나 루머 같다. 다만, 2017년 새해 인사에는 '아미타불'이 적혀 있는 걸로 봐서는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보인다. 비구니로 출가했다는 루머도 왕조현이 불교 신자가 되면서 생겼을 수도 있겠다. 원래 왕조현 본인은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하다. 캐나다로 이민간지 한참 되었음에도 자신의 본국인 대만에 대규모 불교 집회가 열리면 그곳에 참석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기도 하고, 심지어 2015년에는 육도관음(六度觀音) 불교 음반을 직접 녹음하여 발매하기까지도 했다. 왕조현이 살고 있는 캐나다 밴쿠버쪽 교민들 증언에 의하면 왕조현은 가끔 밴쿠버 리치먼드[14]에 있는 중국식 절에 나타날 때가 있다고 한다.
법호 : 行覺(행각)
캐나다 靈嚴山寺(영암산사-정토종)
주소 : 0060 No.5 Rd., Richmond, BC
왕조현이 2015년 대만에서 발매한 육도관음(六度觀音) 음반.
1987년 마이클 잭슨이 앨범 Bad를 발매 전 홍콩에 방문했을 때 사진을 같이 찍은 적이 있다.
왕조현 명의의 인스타에 위구르 관련 신장 면화를 지지한다는 포스트가 올라왔으나, 이후 왕조현 본인이 자신은 인스타를 사용하지 않으며 해당 계정은 사칭이라고 해명하였다.
2023년 10월 18일 중국 난징을 방문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불교 관련 행사 참석을 위해 방문한 걸로 추정.
4. 필모그래피
[ 1980년대 ]1984년 今年的湖畔會很冷, 天地玄門
1985년 再見七日情, 打工皇帝
1986년 義蓋雲天, 心動, 俾鬼捉
1987년 標錯參, 殺妻二人組[15], 偶然, 旗袍裡的秘密, 芳草碧連天, 衛斯理傳奇, 殺手蝴蝶夢, 倩女幽魂
1988년 大飯店(金裝大酒店), 畫中仙, 霹靂大喇叭, 城市特警,長短腳之戀, 夢過界
1989년 法中情, 潘金蓮之前世今生, 大丈夫日記, 合家歡, 打工狂想曲(蝸年上班族), 都市獵人, 驚魂記, 阿群, 賭神, 飛越陰陽界
[ 1990년대 ]
1990년 最佳戰友(中日南北和), 血洗洪花亭(黑幫輓歌), 無名家族(決死英雄戰), 千年女妖, 倩女幽魂Ⅱ:人間道, 摩登如來神掌, 青春奇俠, 浪漫殺手自由人, 絕橋智多星(龍虎大老千), 殺手無名(都市煞星), 東方老虎, 阿嬰
1991년 追日, 倩女幽魂Ⅲ:道道道, 鬼幹部(魔中仙), 千人斬,豪門夜宴, 天地玄門(穿梭時空五百年), 香港教父(衝擊天子門生), 靈狐, 隔世情(魔畫情)
1992년 畫皮之陰陽法王, 廟街十二少, 賭城大亨之新哥傳奇,賭城大亨II之至尊無敵, 城市獵人
1993년 芝士火腿, 水滸傳之英雄本色, 射鵰英雄傳之東成西就,東方不敗之風雲再起, 新流星蝴蝶劍, 青蛇
1994년 東邪西毒 (역할분 편집, 삭제)
1998년 北京原人
[ 2000년대 ]
2001년 遊園驚夢
2004년 美麗上海
5. 디스코그래피
- 1992년 싱글 '永遠に抱きしめて'
- 1997년 싱글 'Who are you?'
- 1998년 일본 1집 'Angelus' (에이벡스) 발매
- 1998년 여세격절 '與世隔絕' (유니버설 뮤직 타이완 (上華唱片)) 발매
- 2015년 육도관음 '六度觀音' [16]
[1] 캐나다로 이민을 간 지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파파라치에 의해 공항에서 녹색의 대만 여권이 손에 들려져있는게 포착이 된 걸 보았을 때 대만 국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캐나다 국적도 이중국적으로 취득을 했는지, 단순히 영주권만 소유하고 있는지는 불명. 중국어 위키피디아에서는 대만, 캐나다 이중국적이라고 표기되어있지만 아직까지 공항에서 남색 캐나다 여권을 소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 적은 없다.[2] 2004년 영화 <미려상해>를 끝으로 연예계에서 은퇴하여 캐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갔다.[3] 네이버 프로필 기준[4] 나머지는 소피 마르소, 피비 케이츠, 브룩 실즈 등. (국내의 경우 강수연, 김혜수, 이미연, 이상아 등.) 다만 이 셋은 1980년대가 리즈였고, 왕조현은 80년대 후반~90년대가 리즈로 시기가 좀 다르긴 했다.[5] 다만 국부천대 당시 대만으로 넘어오지는 않고 중화인민공화국 치하의 중국 대륙에 머물렀다. 신해혁명 후 장제스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교육자로 헌신했기 때문에 공산당 치하에서도 존경을 받으며 국회의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대표직을 역임했다.[6] 국내에선 90년도에 왕조현의 '사랑이야기'란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었다.[7] 이 때 그녀의 나이가 한국 기준으로 고작 21세였다. 1월생이라 빠른 67년이라 쳐도 22세.[8] 당시 홍콩 영화의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물론 세월이 지나서 보면 웬만한 망작 아닌 딴에야 리즈 시절 작품이 많다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만.[9] 이는 또 다른 책받침 여신이었던 브룩 실즈나 피비 케이츠도 마찬가지로, 연기력 없는 외모는 나이가 들면 사그라든다는 어찌보면 평범한 진리를 확인해 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책받침 여신이었지만 연기력이 받쳐줬던 소피 마르소가 오랫동안 활약한 것과 대조된다.[10] 1993년 방한했을 때 인연이 생기면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던 적도 있었는데, 꽤 슬픈 상황이 되었다.[11] 사족으로 당시 홍콩 탑 여배우들은 정점에서 결혼하고 아예 연예계를 은퇴하는 것도 제법 흔한 루트였는데 임청하, 호혜중, 종초홍, 이가흔, 서자기 등이 그랬다.[12] 사족으로 이때 왕조현이 촬영 스탭에 대한 비매너로 구설수에 올랐다는 식의 일부 주간지 가쉽 기사가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 가쉽 기사들이 흔히 그렇듯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시절 한국의 황색언론 주간지들은 여러 스타의 구설수를 기사화하고는 이른바 카더라라며 아니면 말고 식으로 보도하는 것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13] 한국측이 적반하장신데 중간에서 그녀의 개런티의 일부를 가로챘다는 사실이 훗날 알려지게 된다[14] 밴쿠버에서 중국계들이 가장 많이 모여살고 있는 동네이다.[15] 1986년작이다. 중화권 사이트에서 그대로 뽑아온거 같은데, 뭔가 착각이 있는듯하다.[16]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불교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