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전제3. 칼뱅주의 5대교리
3.1. 전적 무능력3.2. 무조건적 선택
4. 철학계에서5. 여담3.2.1. 성경적 근거3.2.2. 이성적 근거3.2.3. 선택의 결과와 증거3.2.4. 하나님의 영원한 유기3.2.5. 타락 후 선택설과 타락 전 선택설3.2.6. 다자 피택3.2.7. 영아 구원 문제
3.3. 제한적 속죄3.3.1. 그리스도 속죄의 무한한 가치3.3.2. 제한받는 속죄3.3.3. 율법의 완성3.3.4. 대속물3.3.5. 하나님의 목적3.3.6. 유기된 자의 제외3.3.7. 예지론3.3.8. 인류 전반에 미치는 은총
3.4. 불가항력적 은혜3.5. 성도의 견인1. 개요
칼뱅주의(개혁주의) 예정론 / Predestination in Calvinism(Reformed Theology)이중예정론 / Double Predestination
칼뱅주의(개혁주의) 예정론 또는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목적이란 절대 무조건적인 것으로서 유한한 피조물에 관계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따라 작정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결정은 영원불변하고, 거룩하며, 주권적이다. 이 결정은 단순히 자연계의 운행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로부터 심판에 이르기까지 인류 역사의 전체 사건에 미치며 또한 성도와 천사, 사악한 자와 악마의 전 활동까지 포괄한다. 이 결정은 그 원인 조건 지속 및 관계에 있어서 일찍이 있었고, 또한 장래에 있을 일체의 사건을 동시에 포괄하며, 시간과 영원 안에서 일어나는 피조물의 전 활동범위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제정(이것에 의하여 그가 인간 각 개인에게 어떻게 행하실는지는 그 자신 안에 결정하셨다)을 우리는 예정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인류는 모두 동일한 운명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혹자는 영생을 얻기로, 혹자는 멸망을 받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 개인은 이 목적 혹은 저 목적으로 각기 다르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역시 영생 아니면 멸망으로 예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장 칼뱅, 『기독교 강요 3권』, Ch 21, sec.5.
장 칼뱅, 『기독교 강요 3권』, Ch 21, sec.5.
후술할 내용은 전형적인 이중예정론을 다루며, 장로회(개혁교회) 신자에 따라 웨슬리의 예지예정설[1]이나 바르트의 만인은총론을 섞어서 믿는 경우도 꽤 많다. 이중예정론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에 오해할 수 있으나, 아무리 장로회 신자라도 자유의지와 전도 및 선행을 극도로 과소평가하는 경우는 잘 없다는 것.
2. 전제
2.1.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므로 그의 계획도 지극히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주도면밀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든 일에 대하여 계획도 없이 우주를 창조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가 우주 만사에 주도면밀하게 미치는 것과 같이 그의 계획도 또한 포괄적임을 가르친다. 즉, 하나님이 절대적 계획을 세우고 또한 만사를 그 계획대로 진행시킨다는 것은 그의 완전성의 한 면을 말함이 된다. 그가 우주에 실현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정함은, 곧 예정론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만일 하나님이 사건의 전과정을 예정하지 않고, 다만 어떤 미확정적 조건들의 성취를 기다리는 것이라면, 그가 처음 정한 것은 영원도 불변도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오류가 없고, 또한 뜻밖의 방해로 인해 혼란을 당하시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의 전역에 있어서 매사를 포함해야 한다.
칼뱅주의자는 하나님이 모든 시대의 모든 사건을 포함하는 특정적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신이시고, 모든 인간적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의 행위가 목적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같지만, 그 계획이 전지하고 그 실행이 전능하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같지 않은 인격적 존재자임을 칼뱅주의자는 인정한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연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의 절대적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가 이런 세계를 창조하고자 했을 때, 그는 이 세계 질서 안에 포함될 온갖 종류의 사건들을 완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계 안에서 발생할 모든 사건을 명확히 예정하였다. 따라서 그 계획의 결정을 '하나님의 예정' 혹은 '예지'라고 말한다.
인간의 범죄들도 이 계획에 포함되었으나, 이 범죄들은 예지된 동시에 허용되었고, 또한 그 정확한 위치에 있다. 이 범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리되고 처리된다. 만일 그리스도의 속죄적 희생사역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포함되었다면, 이 희생을 필연적으로 있게 만든 아담의 타락과 기타 죄과들이 비록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 계획 중에 원시로부터 포함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인류 역사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전개하는데 불과하다. 하나님의 모든 제정들은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계속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의 전포괄적 계획을 형성하는 각 부분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전에 생각하지 않았던 계획을 새로 내놓은다거나, 또는 어떤 불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떤 한 목적이 이미 성취된 다른 한 목적의 성과, 혹은 인간 행위의 부산물인 것처럼 보여지는 묘사를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예정론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통속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라도 문구 상에는 그런 것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후회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이미 행한 어떤 과오를 뉘우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 행위의 과정을 인간의 견지에서 볼 때 마치 그가 뉘우치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의미이다.
2.2. 하나님의 주권
역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이자 통치자로서 피조물 가운데서 발견되는 모든 능력의 궁극적 원천임을 인정해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떠나서는 아무 일도 발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악한 행동 역시 그의 허용 아래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타의적 허용이 아니고, 자의적 허용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든 일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것에 반드시 일치한다.성경 저자들은 "비가 온다"와 같은 표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비를 주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우연이나 요행의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다. 심지어 제비를 뽑는 일까지도 하나님의 결정을 얻어내기 위해 지정된 방법이었다. 모든 일은 예외 없이 하나님으로 인해 배치되고, 하나님의 뜻이 발생되는 모든 일의 궁극적 이유이다. 자연도, 국가도, 각 개인의 운명도 그 전체의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주권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이지만, 그저 맹목적인 힘의 주권이 아니고 무한한 예지와 성결 및 사랑이 결합된 주권이다. 우주의 만물은 아름다운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목적에 의하여 되어 나가는 것이다.
2.3.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의 활동이란 그의 피조물과 그 일체의 행동을 가장 거룩하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능력 있게 보존하시고 지배하시는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1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1답
성경은 전체를 통하여 자연 법칙과 역사의 과정과 또한 개인의 모든 운명을 항상 하나님의 섭리적 관할에 귀속시킨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사와 자연의 운행에 있어서 아주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교적 환경 아래서 믿음으로 구원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타종교나 무신론의 환경 아래서 믿지 않는 가운데 멸망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처럼 개인의 선택의 결과가 아닌 외부적 요인이 사람의 생애와 영원한 운명을 상당히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과 인류의 일상적 경험은 하나님이 어떤 이들에게는 주지 않는 것을 다른 이에게는 준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이유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예수가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2]라고 말한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어떤 영적 선물이나 지상의 선물을 받는 자는 순전히 은혜에 의해서 그것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것을 주기 꺼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에게는 그것을 반드시 부여할 의무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든 민족, 평화와 풍년, 부와 행복 혹은 전쟁, 흉년, 질병의 황폐 등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다. 그는 우주의 단순한 방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섭리적 지배가 보편적이고, 능력이 있고, 지혜롭고, 성결하다고 반복해서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 섭리적 지배가 어떻게 해서 인간의 자유행동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통치한다는 것과 그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가 창조물의 성질을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순결함과 우월함에 일치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외부적 유인(誘因) 수단을 주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면서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행하게 된다.
2.4.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의 예지는 그 성질상 예정되어 있는 것과 같이 확정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예정이 인간의 자유행동과 모순된다면, 예지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정은 사건들을 확정시키는 것이고, 예지는 사건이 확정적인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만일 미래의 사건이 하나님에게 예지되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과 반대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이성이 유한하므로 일시에 몇몇 부분밖에 깨달아 알지 못하고, 또한 그 사이에 있는 관계 중 겨우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적 피조자이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은 인간처럼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과거', '현재', '미래'로 생각되는 것이 하나님의 심경에는 모두 현재와 같다. 즉 역사의 전 과정이 '영원의 지금'이다. 그러므로 시간 안에서 생기는 사건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지정하시고, 또한 자신 앞에 제정하여 놓아 두었던 것이다. '시간'은 유한한 피조물의 특성일 뿐, 하나님과는 상관없다. 하나님은 시간을 볼 수 있지만,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예지와 예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이다. 예지는 예정을 전제로 하지만, 예지 그 자체가 예정은 아니다. 자유행동자인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예지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예정되어 확실히 일어날 것이므로 예지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는 완전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처음부터 개개인의 운명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예지란, 다만 현세에서 사람이 무엇을 하기로 작정하기 전에 그것을 미리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 이전부터 인간의 운명을 안다. 그러므로 분명히 구원받을 자나 멸망 당할 자나 다 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교리는 하나님의 예정 교리도 증명해 준다. 어떤 사건이 예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은 불변적이고 확정적인 사건이다. 영구적 결정의 제1원인인 하나님의 원함이 아니면, 아무것도 역사의 사건들을 고정하거나 확정시킬 수 없다. 문제는 자유행동자의 행동이 확정되어 있다고 하는 점에 있으나, 이 확정성은 예정과 마찬가지로 예지에 있어서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이다.
2.5. 최종 권위인 성경
칼뱅주의에서 성경은 모든 교리들의 시비에 관하여 최고이자 최종의 법정이다. 따라서 모든 교리를 성경 앞으로 가져 가서 성경으로 음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신념의 진위는 하나님이 영감된 말씀을 통하여 준 무오한 계시에서 설명되는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혹은 차이가 나는가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다. 따라서 칼뱅주의에 대한 시비의 결정도 이 규준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이 유일한 권위서이며, 동시에 성경적 근거가 없는 교리는 무엇이든 참되지도 않고, 본질적이지도 않다.3. 칼뱅주의 5대교리
칼뱅주의 체계는 다섯 가지의 명확한 교리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칼뱅주의 5대교리'로 알려져 있다. 이 5대교리는 칼뱅주의 체계를 받쳐주고 있는 주요 기둥과 같다. 또한 이 다섯 가지 교리는 각각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단일하고 균형 잡히며, 일관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교리들 중 하나가 참되다는 것이 증명되면, 그 나머지 교리들도 필연적으로 증명되고, 이 교리들 중 어느 하나가 오류인 것이 입증되면, 그 전체계는 버림받게 된다.이 5대교리는 전적 무능력[3]Total Inabil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이다. 이 5대교리의 영어 첫자만 모으면 T, U, L, I, P이기에 '튤립교리'라고도 부른다.
3.1. 전적 무능력
인간은 타락하여 죄의 상태에 있으므로, 구원에 수반하는 영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래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전적으로 싫어하고,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또는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할 수가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9-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9-3.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등은 전인류가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사실과 아무도 핑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특히 바울은 인간이 허물과 죄로 죽었으니,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살 수 없는 자리에 빠졌던 자라고 여러 번 말하였다.
3.1.1. 원죄의 범위와 결과
'전적 무능력'이 의미하는 것은 타락 이래로 모든 인간은 죄의 저주 아래 있게 되었고, 그릇된 원리에 따라 활동하게 되었으며, 전혀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아무 일도 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타락 이래 모든 선에 대하여 부적당하고 무능력하며 반대하는 자가 되어 전적으로 악으로만 경주하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고정된 편벽성을 가지고 있어 본능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악으로만 향하게 되었다. 인간의 무능력은 자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수행할 수 없는 무능력을 말한다. 실질을 잃어버린 자유의지란 공허한 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결국 잃어버린 자유는 자유라고 할 수 없다는 루터의 말도 이 사실을 의미한다. 타락한 인간은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선한 어떤 행동들을 할 수 있는 생득적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 동기가 전적으로 그릇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행동 또한 할 수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인간은 자유행동자이지만,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하지는 못한다. 이는 인간의 의지는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인간이 멸망하는 이유는 주로 그 자신의 사악한 의지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다가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할 능력을 갖고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 또한 갖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있어서 강제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로 죄를 범하고, 또한 그것을 기뻐한다. 인간의 성향과 원초적 욕망이 그렇게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진하여 의식적으로, 또 의지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악한 것을 천성적으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의 특질이다. 그런데 인간의 '전적 무능력'은 단순히 부패한 도덕적 성질에서 뿐만 아니라, 무지에서도 생긴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의 인간으로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 자를 주권적으로 선택한다.
원죄 교리는 타락한 인간은 부패한 본성의 영향으로 악마가 갖는 것과 같은 종류, 같은 정도의 죄를 범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과 영광 중에 있는 성도와 천사들은 거룩한 성질의 영향으로 의롭게 행동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을 단정한다. 즉, 인간이나 천사나 다 자기 성품대로 행동하는 것이며, 타락한 인간과 악마의 성질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른 동기를 가지고 행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자력으로는 결코 자신을 정결하게 할 수 없다. 인간이 갱생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인간 자신의 마음이 변화하는 것인데, 이는 성령의 주권적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 변화의 결과로 인해 인간은 진리를 알게 되고, 그 진리를 기쁘게 수용하게 된다. 인간은 결코 자력으로 거듭나는 능력을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내적 변화가 생기기 전에는 아무리 많은 외적 증거가 있을지라도, 인간은 복음의 진리를 확신하지 못한다.
3.1.2. 인간 덕행의 결점
거듭나지 못한 인간도 일반은총[4]을 받아서 선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덕 또는 선행의 일체는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있지 않다는 결점을 갖는다. 이 결점은 인간이 가진 어떠한 선의 요소도 모두 가릴만큼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하나님과 화해하지 않는 한, 그가 행하는 어떠한 일도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질만한 성질의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또한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그 본성이 아직 변화되지 않았으므로 그 선행도 견고한 근거를 갖지 못한다.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인 행동을 한다 해도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인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신앙이 모든 덕행의 기초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당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 수납될 수 없다.
3.1.3. 인간의 타락
인류의 타락은 칼뱅주의 체계의 근거이며 성경에 나타난 구속 계획의 근거이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들은 광의의 의미에 있어서의 '사망'이란 말에 모두 포함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영적 사망'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영원한 분리이며, 육체적 사망은 최초의 결과 혹은 보다 덜 중요한 결과들 중의 하나이다.아담의 사탄의 간계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심사숙고해본 후 스스로 결정하여 죄를 범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의식했을 뿐 아니라, 그 행위에 따르는 결과까지도 알면서 하와의 불순종한 행위를 같이 따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인간의 죄의 흉악성은 이처럼 심사숙고한 후 스스로 죄를 짓기로 결정한다는 점에 있다.
3.1.4. 대표의 원리
아담은 단순히 전인류의 시조일 뿐 아니라 전인류의 대표자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를 믿는 자에게 귀속됨과 같이 아담의 죄는 그 후손들에게도 전가된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하는 것 같이 아담의 후예도 개인적으로 아담의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인간은 인간 자신이 아담의 죄를 범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아담의 죄벌을 받는다. 이는 아담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이 범죄하게 된 공동 담보의 죄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적, 영적 생명을 지지하고 지도할 성령의 감화를 모두 박탈당하여 선천적으로 범죄할 수밖에 없는 성품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난다.
3.2. 무조건적 선택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
칼뱅주의는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이 영원히 작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작정은 아담 안에서 구원을 얻을 기회를 가졌었으나, 그 기회를 상실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들은 부패하였고,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 자비를 요청할 권리도 모두 잃었다. 그러나 인간들 중 택함 받은 자들은 이 죄벌에서 구원되어 행복과 성결의 자리로 인도되고,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의 본래 멸망의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그들의 죄로 인해 정죄 받는다.
칼뱅은, 하나님은 구별없이 아무에게나 구원의 소망을 주지 않으며, 영원선택의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전에는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칼뱅은 이 교리가 누군가의 마음에는 매우 복잡한 의구심을 일으키는 일이 있음을 시인한다.
3.2.1. 성경적 근거
사실상 바울 서신 이외에는 선택에 대한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성경이 영감서로서, 예언자와 사도들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기록하였으므로 무오하다는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이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증거로써 충분하다. 성경은 선택교리에 대하여 여러 가지를 설명하지 않은 채 놓아두었지만, 선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매우 명료하게 표시하였다.칼뱅주의자는 하나님이 인류를 총괄적으로 다룰 뿐 아니라 영생을 주기 위해 특수한 개인들을 선택하였고, 그들이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모든 방편까지도 선택하였다는 것을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민족적 선택과 외부적 특권에 대한 선택만을 가르치는 성경 구절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오직 영생을 주기 위해 개인들을 선택하였다는 것만을 가르치는 구절도 많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선택은 천사들에게도 관계가 있다. 천사들도 피조물의 일부분이고 하나님의 관할 아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천사들은 거룩하고, 어떤 천사들은 악한 천사들로서 비참한 자리에 있다. 거룩한 천사들은 천계에 있으며, 범죄한 천사들은 천계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3.2.2. 이성적 근거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나 원죄 교리가 용인된다면, 논리적으로 무조건적 선택 교리 또한 이끌어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타락의 상태에 있어 자력구원이나 구원에 대한 요청이 전혀 불가능함에도 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다면,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어야 한다.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말하면서 선택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자가당착의 모순이다. 성경 저자들은 '선택'이 공로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절대 주권이라는 것을 전달한다. 우주의 통치자인 하나님은 선한 뜻대로 죄인들의 세상을 다룰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한다 해도 그의 공의에는 위배되지 않는다. 본래 모든 사람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자비를 베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권한과 자유가 있다.
칼뱅주의는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한 일이라고 답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선택의 은총에 참여하도록 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영원히 찬양될 일종의 신비이다. 그 신비 중의 신비는, 하나님이 인류 전체를 버린 것이 아니라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로 선택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로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에게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모순되기 때문인데, 그것이 왜 그의 공의에 모순되는지는 인간의 입장에서 알 방법이 없다.
3.2.3. 선택의 결과와 증거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들이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그들이 이미 받은 은혜 이외에도 그들 안에서 역사하여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그들로 하여금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바로 그 성령의 실제적인 감화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없으면 아무런 의무도 실천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여 나태에 빠져서는 안 되며,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써 불일듯하게 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3.
예견된 신앙과 선행은 결코 하나님의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그것들은 도리어 선택의 결과 또는 증거이다. 그것들은 그 사람이 택함을 받고 거듭난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선행을 선택의 근거로 간주하는 것은 인류를 다시 행위언약 속으로 집어넣는 일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영원'보다 오히려 '시간' 속에 속박시키는 일과 같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았다는 말은 인간에게 택함 받을만한 미덕이 있었을 것이라는 어떠한 생각도 완전히 배격한다.
칼뱅주의자들은 선택이란, 인간이 행하는 어떠한 선행(善行)보다 선행(先行)하는 것이지 그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선택 교리의 진수는 구속사업에 있어서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대상이 갖고 있는 미덕이나 공로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의 방편인 신앙과 회개가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준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자들은 그들의 선행에 비례하여 보상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선행 때문에 구원이라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회개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을 미리 보기 전에 그의 주권적 행위로써 회개할 마음도 주고, 성령도 주며, 감추어진 것들을 알게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택이 예견된 믿음에 근거한다는 말은 우리가 믿기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반대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사람들은 모두 신도가 되었다"[5]고 말한다.
선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 또는 증거로서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본질적인 것이며, 믿음에 의해 당연히 산출되는 것이다.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의롭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선행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이란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엄밀한 의미에서 믿음이 없는 곳에는 선행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진실로 구원받은 자는 선행을 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본래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구원받은 자에게 있어서 선행은 마치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3.2.4. 하나님의 영원한 유기
선택 교리에 있어서 중요 난제는 두말할 나위 없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에 관한 것이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유기 교리를 취급하는 모든 개혁주의 신조에서는 이것이 예정 교리의 본질적 부분으로 논의되어 왔다.선택 교리를 지지하면서 유기 교리를 부인하면, 그 이론이 모순되어 버린다. 선택을 긍정하면서 유기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을 비논리적이며 불균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3.2.4.1. 칼뱅
칼뱅은 구원받을 자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멸망당할 자의 유기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명확하게 주장했다. 칼뱅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으로 구원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을 긍정했고, 따라서 그 반대인 유기가 없는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칼뱅은 유기 교리가 난관을 일으킨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이 교리만이 무조건적 선택에 대한 유일한 지성적, 성경적 설명이라고 주장했다.3.2.4.2. 루터
루터는 칼뱅과 마찬가지로 악한 자들의 멸망과 의인들의 영원한 구원을 모두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완고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선량한 인간을 찾아내서 그를 사악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자가 하나님의 감화 아래서 선량해지기는 커녕 도리어 반동적으로 점점 더 악해진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루터는 말한다. 결국 루터의 입장에서 '누가 영생을 얻을 것인지', '누가 믿지 않을 것인지', '누가 완고해질 것인지'와 같은 문제들은 모두 하나님의 제정에서 결정된 것이다.3.2.4.3. 성경적 근거
유기 교리는 분명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교리이다. 그럼에도 이 교리는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며, 동시에 선택 교리의 이면이다.바울은 멸망받을 자에 대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시어 거짓된 것을 믿도록 하셨습니다"[6]라고 말하고, 요한은 "그들이 믿을 수가 없었던 이유를 이사야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눈을 가지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여 끝내 나에게로 돌아오지 못하고 나한테 온전히 고쳐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7]라고 말하였다. 또한 예수가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8]고 한 마지막 때의 명령은 유기의 제정이 있음을 가장 강하게 뒷받침해준다.
물론 사악한 자의 마음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완고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어떤 자가 그 마음에 기존해 있는 악한 충돌을 따르도록 허락할 뿐이고,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선택으로 더 완고해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도 했으며, 또한 파라오가 자기 마음을 스스로 완고하게 했다고도 했다. 이것은 하나는 하나님의 견지에서, 다른 하나는 인간의 견지에서 서술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강경하게 되도록 허락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에게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다. 성경 저자는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것의 직접적 원인이요 능동적 원인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
유기 교리는 가혹하지만 성경적이다. 성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칼뱅주의자는 이것에 대해 조금도 반대할 수 없다. 또 자연이나 성경은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로 둘러싸여있다. 철학자는 이러한 사실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듯이, 신학자도 하나님의 계시로써 족하게 여기는 수밖에 없다.
3.2.4.4. 원죄라는 근거
유기 교리에 대한 변증은 원죄 혹은 전적 무능력이라는 전제 교리를 근거로 한다. 하나님은 전인류를 받아 마땅한 영벌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고, 은혜롭게도 일부의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데, 그것은 아무도 항거할 수 없는 순수한 자비와 은혜의 행위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간과되는 것이지 부당한 해를 받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아무도 이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만일 그 작정이 무고한 인간에 대한 처사라면, 일부를 따로 갈라서 정죄받게 한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원죄 상태에 있는 인류를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불공평한 처사가 아니다. 이미 정죄된 세상은 다시 더 정죄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유죄한 인간은 권리를 상실했고, 그의 생사는 하나님의 뜻 아래 놓이게 된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어떤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때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처사를 부당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우주 통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것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예정의 작정은 인류를 영원히 멸망할 하나의 무리로 보고, 그 중에서 일부만 멸망하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이 된다. 전인류가 사전에 처형을 받아 마땅했는데, 그 중 일부 사람들이 사전에 처형된다는 것은 전혀 부당하지 않다. 만일 이것을 부당하다고 하면 정당한 형의 집행을 부당하다고 하는 모순된 말이 되고 만다.
택함 받지 못한 자의 유기 혹은 간과는 단지 그들이 계속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한 예견만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모두 죄인으로 예견되었으므로 유기는 모든 인간의 운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도 유기를 당한 자가 영생을 얻은 자보다 더 사악한 죄인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성경은 항상 믿음과 회개를 하나님의 기쁜 뜻과 성령의 특별한 은혜의 역사로 돌린다. 이처럼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얻는 것이며, 멸망은 오직 인류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오지 않기 때문에 멸망한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오려고 하는 의지를 갖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속에서 그 의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선택의 은혜가 그러한 의지를 일으키며, 또한 그것을 끝까지 견지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자들을 그들의 출생 후에 구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일 수 있다면, 그들의 출생 전 혹은 영원 전에 그러한 목적을 정하는 것도 정당하다.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는 전능하기에 이 의지는 저지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결코 인류가 모두 구원받도록 뜻하지도 않았고, 현재도 그러하다. 만일 인류가 모두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도 그 뜻에 항거할 수 없으므로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의 필수 유효적 수단을 모든 인간에게 다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과 인간의 경험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보면 보편적 구원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목적도 아니고, 하나님의 결정적 의지도 아니라는 것이 된다.
3.2.4.5. 이방인의 상태
또한 기독교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수가 없으며, 그들이 본성의 빛과 그들이 신봉하는 종교의 계율에 따라서 그들의 생활을 열심히 꾸려나간다고 할지라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단언하며 주장하는 것은 아주 유해하며 가증된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4.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나 다른 은총의 수단을 받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는 사실은 결국 칼뱅주의 예정론에서 나타난 원리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여러 시대를 통하여 인류의 대부분이 은총의 외적 수단조차 받지 못한 채 그저 유기되어 왔음을 잘 알 수 있다.
사실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멸망한다는 신념은 해외선교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논란거리 중의 하나였다. 만일 그들의 종교가 그들을 구원할만한 빛과 진리를 충분히 갖고 있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성은 상당히 경감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한다면 이방인들도 같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은 수단이 있든 없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구원을 얻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은총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은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서도 선택된 자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지만, 보통은 복음이 전해진 곳으로부터 선택된 자들을 불러 모은다.
3.2.5. 타락 후 선택설과 타락 전 선택설
칼뱅주의자들도 하나님의 계획의 순서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다르다. 선택과 유기 결정의 대상을 '부패하고 유죄한 인간으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단순히 하나님이 창조한 그대로의 인간으로 생각하느냐'가 그 문제이다.- 타락 후 선택설에 따르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창조하고,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고, 타락한 인류 가운데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고, 선택된 자들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고, 성령을 보냈다.
- 타락 전 선택설에 따르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고, 창조하고, 인간의 타락을 허락하고, 선택된 자들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고, 성령을 보냈다.
타락 전 선택설의 유력한 근거 중 하나는 '차별' 관념을 강조하여 이 관념을 하나님이 인간을 처리하는 전반에 관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 전 선택설은 이 '차별' 사상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다. '차별' 관념은 그 성질상 모순없이 실행될 수 없는데, 예를 들면 창조에 있어서 그리고 타락에 있어서 그렇다. 창조하기로 결정된 대상은 일부분의 인간이 아니라 전 인류였다. 타락 전 선택설은 보편구원론과는 정반대 되는 경우다. 따라서 타락 후 선택설이 앞뒤가 맞고 또 다른 사실들과도 모순없이 일치한다.
무고한 인간, 즉 죄인으로 생각되지 않는 인간이 사망과 영벌로 예정된다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성경적 신관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통치는 제 멋대로 하는 통치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다른 속성들 특히 공의, 거룩함, 지혜와 조화를 이루는 통치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선택 교리를 주장한 사람들 중 대다수는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다. 개혁주의 신앙고백 가운데에는 타락 전 선택설을 가르치는 신앙고백은 없고, 타락 후 선택설의 견해를 가르치는 것은 많이 있어서 칼뱅주의의 전형적 양식을 나타낸다.
3.2.6. 다자 피택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는 만큼 피택자를 선택한다. 칼뱅주의자들은 무한히 자비로운 하나님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 구원할 것이라고 추측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리스도는 전능하므로 그 수효에 있어서까지도 악마가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칼뱅주의자들이 선택 교리를 주장할 때, 그 강조점은 하나님이 인간을 일괄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각 개인의 영혼을 개별적으로 취급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원받을 자들과 구원받지 못할 자들 사이의 비율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선택 교리는 택함 받은 자들과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의 궁극적인 비율에 대해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는다. 유일한 제한이 있다면, 그것은 전 인류가 다 구원받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과 개인적 구원에 대하여 칼뱅주의자가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모두 다 구원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실제로 어떤 칼뱅주의자들은 이 견해를 지지한다.
3.2.7. 영아 구원 문제
대부분의 칼뱅주의 신학자들은 영아기에 죽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불신자의 자녀로서 도덕적 책임 연령에 도달하기 전에 죽은 어린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현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일에 두루 미친다는 사실에 유념하여, 최대한으로 확대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 영아들은 스스로 어떤 실제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으니 원죄에서 사함을 받아 온전히 복음적 원리에 의해 구원받으리라는 관대한 희망을 품는다.물론 칼뱅주의자들은 성인과 마찬가지로 영아에게도 원죄 교리가 해당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다른 모든 아담의 자손들과 같이 영아들도 이 원죄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으며, 그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영아들의 구원은 실제적이다. 그들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성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공로없이 받는 구원이다. 칼뱅주의자들은 영아들의 구원을 주장함에 있어서 그들의 공로 없음과 원죄로 인한 벌을 과소평가하기 보다, 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확대한다.
영아구원의 교리는 칼뱅주의 체계에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의 구원은 틀림없이 실제적 혹은 예견된 어떤 신앙이나 회개나 선행 등에 상관없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뱅주의는 세례로 거듭난다는 것을 배척하며,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이 받는 세례를 헛된 의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구원의 은총만큼은 유형교회의 영역 밖으로까지 확대시킨다. 만일 영아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는 것이 진실이라면, 오늘날까지 인류의 반 이상이 택함 받은 자들 중에 속할 것이다. 칼뱅주의자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성인 구원의 유일한 필수조건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유형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을 구원의 필수조건이나 보증으로 삼지 않는다. 칼뱅주의자들은 유형교회와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도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칼뱅은 택함 받은 자들 가운데 어려서 죽는 자들이 있고, 그들은 어린 아이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 유기된 영아들이 있다는 것도 가르쳤다. 이는 유기도 선택과 마찬가지로 영원부터 있다는 것과 택함 받지 못한 자는 유기된 자로서 세상에 출생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칼뱅은 영아기에 죽는 자들이 모두 유기된 자들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칼뱅은 유기된 영아들이 있고 또 그들은 결과적으로 멸망한다고 가르치긴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 유기된 자들이 영아로서 죽는다든지, 영아기에 죽어 멸망한다고 가르치지는 않았다. 또 그는 모든 유기된 자들은 그들 스스로의 악한 행동으로 인해 파멸을 자초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유기된 아이는 영아기에 죽을 수 없고, 반드시 도덕적 책임 연령에 이르기까지 생육하여 원죄를 실제적인 죄로 나타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3.3. 제한적 속죄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 때를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이처럼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6.
칼뱅주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과 계획 아래 선택된 자만을 위해 죽었고, 선택된 자 이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그들이 일반은총에 참여하는 자라는 범위 안에서 부수적인 관계를 가질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죄는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효력의 적용으로 실제 구원받는 사람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제한적 속죄 교리는 선택 교리의 결과로 도출된다. 하나님이 인류의 일부는 구원하고, 나머지는 구원하지 않기로 예정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가 선택된 자를 위함과 같이 유기된 자들을 위해서도 죽을 것으로 보내졌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3.3.1. 그리스도 속죄의 무한한 가치
제한적 속죄 교리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속죄의 가치와 능력에 어떤 제한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속죄의 가치는 만일 전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전 인류를 구원할 수도 있을 만큼 무한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특수한 사람들을 위해 의도되었고 적용된다는 의미, 즉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제한되는 것이다.칼뱅주의자들은 설사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구원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오직 한 사람의 영혼만 구원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모든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똑같은 수고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본래 죄인은 하나님에게 범죄하고 영원히 고통을 받도록 선고된 자들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를 지닌 희생만이 죄인을 대속할 수 있다.
3.3.2. 제한받는 속죄
속죄의 가치는 전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나, 선택된 자만을 유효적으로 구원한다. 속죄는 어느 누구의 구원에나 차별없이 균등하게 적용되어 객관적으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한 일을 인지하는 것에 대한 죄인의 무능력에서 오는 주관적 곤란 때문에, 성령으로 인해 거듭난 자들만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은총을 전 인류에게 적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계시되어 있지 않다.구속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은 구속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전 인류의 구원을 목표로 한다면, 구속 계획에 들어있는 자들 중에는 멸망할 자들도 들어 있으므로 결국 그리스도의 속죄가 객관적으로는 전 인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되고 만다.
3.3.3. 율법의 완성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명령한 완전한 순종의 율법은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거나 경감시킬 필요가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어떠한 일도 결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칼뱅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한 필요 조건은 영원히 '완전한 순종'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구원의 유일한 근거라는 것,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입음으로써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지 인간의 것이라고 말할만한 공로는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은총, 즉 순수한 은혜는 구원을 얻는데 필요한 율법 완수의 조건을 경감시켜준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켰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신하여 율법 앞에 서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행하여 구원을 받게 해준 것이다. 율법은 지금까지 조금도 경멸되거나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 탁월성을 나타낸다. 구원받을 자에게나 영벌을 받을 자에게나 율법은 강제되고 수행되는 것이다.3.3.4. 대속물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마태 20장 28절(공동번역)
마태 20장 28절(공동번역)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대속물이 되었다.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라고 했지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고 하지 않은 것에 주의해야 한다. 대속물은 그것이 지불되고 승인되었을 때, 이를 위하여 지불된 자들을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해준다. 만일 그리스도의 수난이 선택된 자들만이 아닌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그 공로는 전 인류에게 적용되어 아무도 영벌을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입게 해주었지만, 그들에게 아직도 벌할 것이 남아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공의에 어긋나는 처사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전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구성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3.3.5.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사업은 헛수고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부가 택한 자들이 성자를 통해 구속되고, 또한 성령으로 인해 성화되니 선택, 구속, 성화는 언제나 동일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 즉 선택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 구속에 새로이 뛰어들거나, 선택되었던 사람이 구속에서 빠지는 일은 없는 법이다. 이상의 세 가지 과정을 동일인에게 적용하지 않으면, 삼위일체 내에 있는 완전한 조화는 파괴된다. 그러므로 보편적 구속이 옳다면,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위하여 죽었다면 전 인류가 반드시 구속되어야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요한과 같은 그의 양들을 위해 죽은 것이지 파라오나 유다와 같은 자들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다.그리스도가 자기 교회를 위하여, 또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죽었다면 그가 유기된 자들을 위하여 죽었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자녀들을 위해 수고하며 자기의 건강과 힘을 희생하는데, 그의 수고의 동기가 사회봉사에 있다거나 박애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위해 죽은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었다는 것은 부정하는 것이 된다.
3.3.6. 유기된 자의 제외
하나님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보내고, 고난과 죽음을 겪게 한 그 사랑은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그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의 선택된 자들만을 위한 특별하고 신비한 절대적인 사랑이다.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를 서로 원수되게 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9]라고 함으로써 이 후손을 곧 그리스도만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마귀의 자손이라는 말도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택함 받지 못한 자들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란, 인류의 두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전자는 선택된 자들을, 후자는 유기된 자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쳤다. 이때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12지파만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도 세상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백성만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대제사장의 기도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축복만을 확증해준 것으로서 다른 모든 민족은 그 축복에서 제외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기도는 그의 백성에 한에서만 해당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이 무한하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예외없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악마와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의 목적 밖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는 무수한 택자들을 영원한 죄와 비참으로부터 영복 가운데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무한하다는 뜻이다.
3.3.7. 예지론
하나님의 마음은 무한하며, 그 지혜는 완전하다. 하나님은 구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예지하기 때문에 멸망할 자가 누구인지도 예지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멸망이 예견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칼뱅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고 말했다.3.3.8. 인류 전반에 미치는 은총
결론적으로 칼뱅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혜택을 인류 전체가 받은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아담의 범죄로 전 인류가 받을 뻔한 벌이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저지되었다는 사실을 칼뱅주의자들은 인정한다. 즉, 그것이 복음 선포를 위한 근거를 형성해주며, 이로 인해 도덕이 증진되고 악의 영향력이 저지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특정적 구속이나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는 자는 전 인류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어떤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결실인 축복을 전 인류에게 미치게 한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속죄와 화해를 전 인류에게 미치게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많은 축복이 전 인류에게 미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이며 곁달아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전 인류를 위하여 죽었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칼뱅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 속죄적 성질에 있어서 전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견해는 배격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택된 자들에게는 그들의 구원에 효력을 미치는 특별한 관계를 갖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 미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구속 문제에 한해서만 그렇다는 뜻이다.
3.4. 불가항력적 은혜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하시며,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불러내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에로 인도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영적으로, 그리고 구원에 관하여 깨우쳐서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들을 새롭게 하시고,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것을 결심하게 하시며,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렇지만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나아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 이 부름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 또한 이 부르심 가운데서 제공되며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1, 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1, 2.
불가항력적 은혜란 하나님이 하는 일로써 그 일로 인하여 인간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인간의 의지를 새롭게 함으로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그리스도를 능숙히 받게 되는 것이다.
3.4.1. 변화의 필연성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그 본래의 상태에서는 절대 자력으로 거룩해질 수 없다. 인간은 타락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그 본래의 상태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이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으려면, 먼저 거듭나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적 사역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거듭남은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다. 이러한 재창조 사역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거듭남의 은총은 선한 것을 소유한 자들로 예견된 어떤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거듭나기 전에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의 인간은 자신의 철저한 절망 상태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3.4.2. 내적 변화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부활시킬 때 그 안에서 역사한 것과 같은 큰 능력에 의하여 행해진 영적 부활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이며, 성경은 이처럼 변화된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이 변화는 새로운 생명의 원천인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불가항력적이고, 영구적이다.영혼의 거듭남은 인간 안에서 행해지는 어떤 일이지, 인간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는 아니다. 이것은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이르는 돌연적인 변화이다. 또한 거듭남은 인간의 성품이 본질적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변화의 결과로 인간은 연구나 논증에 의하지 않고, 내적 경험에 의해 불신앙 상태에서 구원적 신앙 상태로 옮겨간다. 이 영적 출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동의조차 구하는 일 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해 발생한다. 다만 인간이 육체적으로 태어난 후 육체적 생명을 살아가듯이 인간이 거듭난 후에는 구원을 성취해가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거듭남이다. 이 사역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거듭나게 할 자는 거듭나고, 내버려둘 자는 그대로 남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거듭나게 했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이 믿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반드시 은총을 주어야 할 의무가 전혀 없다. 선택된 자들은 복음을 듣고 믿으나, 복음을 들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정한 때에 비로소 듣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기된 자들은 복음을 들으나, 믿지 않는다. 이는 복음의 증거가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내적 성품이 하나님의 거룩함에 반역하기 때문이다.
3.4.3. 내적 변화의 결과
본성을 죄로부터 깨끗이 씻어주는 내적 변화가 즉시 나타내는 중대한 효력은 의를 사랑하게 되고,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이다. 내적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 성품이 죄에 속해 있었으나, 이후부터는 성결하게 되며, 죄를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된다. 이 은총은 인간으로부터 죄를 좋아하는 욕망을 제거시켜 죄와 단절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의지를 사랑하게 만든다.그러나 사람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인간 안에는 옛 본성의 잔재들이 달라붙어 있다. 그래서 자주 유혹을 받으며 범죄한다. 그러나 그러한 죄는 결국 죽게 될 옛 성품의 최후의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들도 고통, 질병, 낙심, 죽음을 겪지만, 완전한 구원을 향해 꾸준히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거듭남과 성화(聖化)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거듭남은 하나님이 하는 일로서 영적 생명의 새 원리를 인간 영혼 속에 심어주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이다. 이것은 초자연적 능력으로 순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한편 성화는 외부 생활에 나타나는 죄의 잔재를 점진적으로 제거시켜 죄에 대해서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해서는 점점 더 살아가는 과정이다. 성화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의 연대 사업이며,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악에 대해 새로운 성품이 점점 승리해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완전한 의를 보게 되었으니, 이제 그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성화는 모든 죄의 흔적이 사라지고, 죄를 범할 가능성마저 사라지는 죽음의 시간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3.4.4. 인간의 자유의지
거듭나게 하는 능력은 외부의 강제 능력이 아니다.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 인간의 영혼을 억압하는 것이 아님은 교훈이 이성을, 설득이 마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님과 같다. 인간은 절대 노예처럼 취급되어, 그 의지에 반하여 강제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에 계시를 받아 하나님, 자신, 그리고 자신의 죄에 관한 모든 것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어 영원히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찬미하게끔 인간을 감화시킨다. 거듭난 자는 자신이 새로운 동기와 욕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전에는 미워하던 것을 이후에는 좋아하고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어떤 외부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혼 안에 창조된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시킨다는 것이 인간에게 그것을 행할 능력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들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친다.
3.4.5. 일반 은총
선택된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특별 은총'과는 달리 '일반 은총'은 모든 인간에게 어느 정도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일반적 감화이다. 일반 은총은 모든 질서나 문화 및 일반적인 덕의 원천이므로, 그로 인해 마음과 양심에 진리에 대한 도덕적 능력이 증대되고 악에 대한 정열이 억제된다. 일반 은총은 구원을 얻게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지만, 죄의 효력이 다 발휘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그러나 일반 은총은 죄의 원천을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회심을 일으키지 못한다. 일반 은총은 양심을 통해, 특히 복음의 외부적 제시를 통해 인간에게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게 해주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못한다.일반 은총으로 인간이 변화한다 해도, 그것은 성화에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비록 인간이 외부적으로는 개선되었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의 내부적인 성질은 전혀 변하지 않아 하나님을 향한 사랑,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거룩한 애정이나 행동 등은 여전히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3.5. 성도의 견인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꾸준히 인내하여 머물러 있게 되며, 또한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7-1.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면, 두 번 다시는 완전히 타락하여 멸망하는 일이 없고, 비록 일시적으로 죄에 빠져들어 가는 일이 있다 해도 결국에는 다시 돌아와서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독자적으로 고립되어 있지 않고, 칼뱅주의 신학 체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부분이다. 선택 및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는 논리적으로 그와 같은 축복을 받은 자들의 확실한 구원을 뜻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절대적, 무조건적으로 영생하도록 선택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유효적으로 적용시킨다면, 그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앙과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이런 선물을 주는 것은 그것을 받은 자를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이것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였다는 것과 하나님은 분명 그 목적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선택된 자들을 하나님의 수중에서 빼앗을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은 그 안에 성령을 소유하게 된다. 이처럼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잠재적으로 거룩하다. 물론 그들은 많은 유혹과 시련을 견디며 성화를 거쳐야 하고, 미래의 실상을 명확히 알 수 없다.
거듭날 때 일어나는 변화의 성질살 부여된 생명의 항구성은 충분히 보증된다. 거듭남은 내적 성질의 근본적, 초자연적 변화인데 그로 인해 인간의 영혼은 영적으로 살게 된다. 이때 영혼에 부여된 새 생명은 불멸한다. 또한 이 변화는 내적 성질에서 이루어진 변화이므로 인간의 지배 영역 밖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속한 것이므로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그 성질의 근본 원리를 변화시킬 자유가 없다. 따라서 이 변화를 역전시켜 새 생명을 잃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초자연적 행동 외에는 없다. 즉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의 자녀 관계를 상실할 수 없는 것은 마치 자녀가 그 부모와의 본질적 관계를 상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3.5.1.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은 하나님의 실재만큼이나 불변한다. 또한 그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사랑으로 확실하게 인간을 붙잡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입장이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 구원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 인도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 은혜를 철회하고 그 조치의 방법을 변경하지 않는 한, 인간이 다시 율법 아래에 놓이지 않는 한 선택된 자는 멸망할 수 없다.하나님은 선택된 자에게 어떤 볼만한 것이나 공로가 있어서 거듭남의 은총을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후에 거듭난 자의 속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이 그 은총을 철회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 선택의 사랑을 죄인에게 주려고 작정한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믿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는 자의 마음이나 행위에 있는 어떤 것도 죄인을 구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다.
3.5.2. 일시적 타락
성도의 견인 교리는 신자가 잠시라도 범죄하는 일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도 일시적으로 타락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견인의 은총을 신자의 마음에 역사하게 함으로써 신자를 궁극적 배교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는 것은 자가당착의 큰 모순이다. 그러나 그들의 품성 안에 있는 기본 원리가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시적으로 넘어져 한동안 신앙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진실로 구원받은 자는 은총에서 완전히 떠날 수 없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지은 죄의 행실은 자신을 심하게 손상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시켰을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 개인의 구원에 한하여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5.3. 외적 고백은 보증이 아니다
외부적인 고백은 반드시 그 영혼이 구원되었음을 보증해 주는 표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진실되게 알지 못하지만, 종교적인 고백은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전혀 거듭남의 내적 체험을 경험한 바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의 본성이 나타나고 마음의 모든 비밀이 드러나게 될 때 참된 그리스도인처럼 보였던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배교도 증명할 수 없다.단순히 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고 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유형 교회에 속한 모든 교인이 무형 교회에 속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물론 양심을 밝혀주는 성령의 일반적인 감화가 선행과 외면상의 종교 생활을 만든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3.5.4. 배교에 대한 성경의 경고 목적
신자의 타락에 대한 성경 구절이 가르치는 첫째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진해서 하나님과 협력하게 하려는 것이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겸손하고 근면하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둘째, 이 경고는 신자에게 더 큰 믿음과 기도를 위한 자극제가 된다. 셋째,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보다는 의무를, 자신의 힘보다는 나약함을 깨닫게 한다. 넷째, 인간으로 하여금 성결의 필요성과 하나님에 대한 의존을 확실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 불신자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기 위함이다.4. 철학계에서
철학계에서는 기회원인론과 혼동당하는 일이 자주 빚어진다. 실제로 하이퍼 칼비니즘은 기회원인론과 꽤 가까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중예정론은 인간이 자유의지를 통해 악을 저지를 수 있음을 분명히 인정한다.5. 여담
- 현대 개혁주의에서는 복권에 대해서는 입장이 다양하다. 개신교 신자가 복권에 사실상 거의 낙첨되는 것까지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강경한 입장도 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도박과 확률의 무서움을 가르쳐주기위해 일부러 복권의 결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온건한 입장도 있으며, 복권은 하나님이 다루지 않는 영역이라는 매우 온건한 입장도 있다. 하나님도 때때로 확률에 맡길 때가 있거나 대부분의 당첨과 낙첨은 확률이지만 일부 신자들의 당첨과 낙첨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중도적인 입장도 있다.[10] 스포츠의 승부도 이와 비슷하게 다양한 입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도박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이 강하게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