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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성과 번성의 위치. 한수가 자연 해자를 이루고 번성과 양양성은 부교로 이어져 있었다.
1. 개요
13세기 몽골 제국과 남송이 양양의 지배권을 놓고 맞붙은 전투. 총 4차례 벌어진 공방전 끝에 몽골 제국이 승리하면서, 남송의 패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2. 배경
양양은 중국 중부 후베이성의 지급시로, 남양 분지의 남방 창구격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은 한중에서 발원한 한수가 산시성 남부와 후베이성 서북방을 흘러가다가 거의 직각으로 남방의 영주로 흘러가는 지점에 위치하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양양 고성'의 북쪽으로 한수가 흘러 성을 끼고 남방으로 굽어지고, 성의 남쪽으로는 현산 산계가 둘러싸고 있다. 성의 서쪽 10리에는 만산이 장벽 역할을 하며, 남쪽으로 7리에는 현산이 위치했다. 한수의 남안에 본성인 양양성이 있고, 북안에는 번성이 있었다.양양은 이렇듯 수비하기에 수월한 곳이어서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했고, 한수가 통과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로도 중요했다. 중국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강은 드물기 때문에 한중에서 발원해 양양과 강릉을 거쳐 무한에서 장강과 합류하는 한수는 중요했다. 후한 말기 유표가 양양에 들어가서 형주의 주도로 삼은 이래 삼국시대 형주의 주도로 기능했고, 육조시대 이래 양쯔강 이남 한족 왕조들의 핵심 방어선인 형주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서, 북방민족의 침략을 전면에서 방어하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정강의 변 이후 양쯔강 이남에서 새롭게 시작한 남송 역시 이곳을 중요하게 여겼다. 악비는 양양을 가리켜 "중원을 회복하는 근간"이라고 평가했으며, 홍자기(洪咨夔)는 "천하의 대세는 사천이 머리이고 회남이 꼬리이다. 그 척추에 해당하는 지역이 양양이다."라고 주장했다. 남송은 이렇듯 중요한 곳으로 평가되는 양양의 수비를 중신에게 맡기고 정예병을 항상 배치했다.
1234년, 남송은 몽골 제국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협공한 끝에 멸망시켰다. 송나라 명장 맹공은 애종의 두개골을 지니고 개선하여 이종을 알현하였고, 이종은 애종의 두개골을 종묘에 모셔진 휘종, 흠종의 초상화 앞에 바치고 그들의 영령을 위로했다. 이후 몽골 제국에 대해 어찌 대처할 지를 놓고 신중론자들과 적극론자들의 격론이 오간 끝에, 몽골군이 본국으로 귀환한 틈을 타 금나라에게 빼앗겼던 화북지방 영토를 되찾기로 했다. 이리하여 송나라 군은 북벌을 단행하니, 이를 단평의 입락이라고 한다.
그러나 낙양과 개봉을 탈환한지 2개월도 안 되어 몽골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강남(중국)으로 퇴각해야 했다. 몽골 제국의 오고타이 칸은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왕공들과 논의한 끝에, 이참에 남송까지 멸망시키기로 하고, 1235년부터 대대적인 침략을 단행했다. 이리하여 양양 공방전의 막이 올랐다.
3. 제1차 양양 공방전
서기 1235년, 몽골, 여진, 서하, 발해 등 각 부족에서 차출한 부대와 투항한 한족 부대까지 합쳐 50만 명 이상의 대군이 편성되어 남송을 향한 침략을 개시했다. 몽골군은 3군으로 나뉘어져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으로 진격했다. 서로군은 사천으로, 중로군은 양양으로, 동로군은 회남 일대로 진군했다. 이중 중로군의 지휘관은 오고타이 칸의 3남 쿠추(曲出)로, 양양을 공략한 뒤 사천 일대를 점령한 서로군이 한수를 따라 내려올 때 합류한 후, 다시 동로군과 만나 남송의 수도 임안으로 진격하기로 했다.당시 양양성의 수비대장은 경호선무제치사 조범(赵范)이었다. 그는 매일 술에 취해 지내며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했다. 이때 금나라의 장병이었다가 송나라에 귀순한 '극적군(克敌军)'이 양양성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몽골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줬다. 이리하여 몽골군은 1236년 3월 양양성을 별다른 피해 없이 공략했고, 조범은 양양에서 도주했다. 이날 수만 명의 양민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30만 섬의 식량과 무기 창고 24점이 몽골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중로군은 여세를 이어가 호북성 황주까지 공격하였으나, 1236년 가을 쿠추가 갑자가 중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해 11월 쿠추를 대신하여 중로군 지휘를 맡은 테무테이(特穆爾岱)가 강릉을 공격했으나, 맹공이 막아냈다. 이후 맹공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하여 몽골군을 몰아붙였고, 1239년 3월 몽골군이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서 거의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양양성을 탈환했다. 그러나 몽골군이 양양을 심하게 파괴했기 때문에 수비를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 했다. 이후 맹공은 사천 일대를 탈환하고 몽골군과의 전선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지만, 양양 일대는 공백지로 남겨뒀다.
4. 제2차 양양 공방전
1251년, 경호선무제치사 이증백(李曾伯)은 조정에 양양 일대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1만 5천 명의 병력을 증원해준다면 양양을 수복하고 성채를 재건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조정은 그에게 8천 명을 파견하여 지원하고, 군사비로 천만 냥을 지출했다. 이증백은 그해 4월 형호군 2만 1천명을 편성한 뒤 북상하여 양양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군을 격파하고 양양성과 번성을 탈환했다. 이후 수개월간 양양에 머물며 양양성과 번성의 재건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렇게 해서 보강된 양양성의 둘레는 9리, 번성은 약 4리 반으로, 방어력이 크게 강화되었다.1252년 봄, 이증백은 영전 시행, 둔전 장려, 식량 수송, 성곽 수축, 양양 일대의 면세, 병력 지원 등 6가지 안건을 조정에 건의했다.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둔전 100만 관을 하달하고, 거액의 군자금을 지급했으며, 양양 일대의 세금을 3년간 면제했다. 그해 상반기 이증백이 사천선무사를 맡아 사천 일대로 자리를 옮겼을 때, 양양에는 6276가구가 이주하면서 텅빈 곳이나 다름없던 양양의 활력이 살아났다. 당시 몽골 제국은 심각한 내란에 시달리고 있어서 남송의 이같은 움직임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여기서 고달이 이증백의 밑에서 활약한다.[1]
5. 제3차 양양 공방전
1257년, 몽케 칸은 남송 정벌을 단행했다. 그는 오고타이 칸 때처럼 군대를 세 갈래로 나눴지만, 전략 배치는 다소 조정했다. 주력군은 사천 일대로 진군했고, 쿠빌라이의 동로군은 양자강 중류의 악주를 쳤으며, 운남의 대리를 거쳐 안남을 공격하고 있던 우량카다이의 별동대가 운남에서 북상하여 남송을 공격하기로 했다. 몽케 칸의 서로군이 사천 일대를 정복한 후 한수를 따라 이동하여 악주에서 쿠빌라이의 중로군과 합세한 뒤 강남(중국)으로 진격하고, 우량카다이는 별동대를 맡아 적의 후미를 치는 역할을 맡았다.쿠빌라이가 이끄는 중로군은 1258년 11월 남진하기 시작하여 하북과 산동, 하남 일대를 거쳐 이듬해 여름 양자강 북쪽 기슭에 이르렀다. 이때 그의 군대는 강력한 수비력을 갖춘 양양을 굳이 치지 않고 우회하기로 하였는데, 다만 양양의 송군이 출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는 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양양성과 대치하게 했다. 이후 몽케 칸이 조어성을 공격하다가 진중에서 사망하면서 서로군이 철수했고, 쿠빌라이가 몽케 칸 붕어 소식을 들은 후에도 "전공을 세우고 나서 돌아가겠다"며 악주를 공격하다가 여의치 않자 가사도와 밀약을 맺고 철수하면서, 양양성 공방전은 별다른 희생 없이 마무리되었다.
6. 제4차 양양 공방전
악주 수비를 맡았던 가사도는 앞으로 몽골 제국에 칭신하고 매년 막대한 물자를 제공할 테니 돌아가라는 밀약을 맺었다. 쿠빌라이는 이를 수용하고 돌아간 뒤, 아리크부카와 대칸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끝에 승리했다. 이후 1260년 4월 남송에 사신 학경(郝經)을 보내 약속대로 하라고 요구했으나, 가사도는 사신 일행을 구금하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쿠빌라이 칸은 수차례 사자를 보내 학경의 구금을 힐책하였으나, 남송은 아무런 답변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벌을 결의했다.1261년 몽골 제국에 투항한 남송의 장수 유정(劉整)[2]은 1267년 쿠빌라이 칸에게 "남송 정복은 양양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양양이 함락되면 나머지 지역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진언했다. 그는 양양을 공격할 때 견마지로를 바치겠다고 덧붙였다. 쿠빌라이는 이를 받아들여 그와 아주(阿朮)를 도원수에 임명하고, 10만 대군을 편성한 뒤 1268년 9월 양양 공격에 착수했다.
몽골군은 양양을 포위하는 동시에 송나라 구원군을 차단하기 위해 외곽 지역에 봉쇄망을 구축했다. 그들은 번성의 동쪽을 통해 한수와 합류하는 백하의 어귀, 양양성 서쪽에 위치한 만산, 나방의 호두산 등을 장악한 뒤 외부인의 통행을 엄격히 금지했다. 사서에 따르면, 당시 몽골군의 포위망이 워낙 견고하여 "성채가 꿴 구슬과 같이 연결되어 사방 수십 리가 통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500척이 넘는 함선이 새로 건조되어 유정의 지휘하에 양양 주변의 하천과 수로를 통제했다.
몽골군은 양양성의 방어력이 강고해 섣불리 공격했다간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을 예상하고, 직접적인 교전은 자제한 채 포위망을 견고하게 다졌다. 해자를 파고 성채를 쌓았으며, 곳곳에는 파수 용 돈대가 세워졌고, 양양과 근처의 번성까지 한꺼번에 에워싸는 환성(環城)이라는 이름의 토성이 세워졌다. 이렇게 해서 구축된 포위망은 사방 100리에 달했다고 한다.
경호선무제치부사 겸 양양지부 여문환(呂文煥)은 몇 차례 출격하여 포위망을 뚫어보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는 상관이자 자신의 형인 경호제치사 여문덕(呂文德)에게 알렸고, 여문덕은 조정에 급보를 전했다. 이에 조정은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하귀(夏貴)를 연강제치부사로 임명하고, 장세걸을 경호도통으로 임명하여 구원군을 조직하게 하였다. 1269년 12월 여문덕이 병사하자 1270년 정월 이정지(李庭芝)를 경호제치사로 임명하였으며, 1270년에는 전전부지휘사 범문호(范文虎)를 파견하여 전전사 및 회남 일대의 군대를 총지휘하게 했다.
하지만 송군의 구원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1269년 3월 장세걸이 먼저 양양으로 진격하여 양양 동남쪽 한수 강변에서 몽골군과 맞붙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어쩔 수 없이 퇴각했다. 뒤이어 도착한 하귀는 한수의 수위가 오르자 군선을 동원하여 양양성에 의복과 식량을 공급했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장홍범(張洪范)의 진언을 받아들여 한수의 남방에 목책을 부설하여 더 이상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후 하귀가 그해 7월 전선 3천 척과 5만 병력을 이끌고 양양을 구원하려 했지만, 보루에 주둔한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도로 후퇴해야 했다.
몽골군이 송군의 구원 시도를 모조리 무찌르고 강에 목책을 부설하여 물자 지원이 오지 않게 막았지만, 송군은 어떻게 해서든 양양성에 갇힌 수비대에게 물자를 보급하려 애썼다. 1271년 5, 6월 사이 한수의 수위가 올라가 몽골군이 설치한 목책과 보루 등이 물에 잠기자, 이정지가 전선 수십척을 급파하여 수비대에게 의복과 소금, 미곡 등을 양양성에 보급했다. 하귀 역시 식량 수천 석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후로는 어떠한 보급물자도 전달되지 못했고, 많은 송나라 전선들이 물자를 지원하려 했다가 몽골군에 의해 격침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남송이 양양에 집중 지원하는 걸 훼방놓기 위해 각 방면의 군대로 하여금 남송을 치게 했다. 이리하여 중경, 가정, 노주, 여주 등지에서 몽골군이 쳐들어와서 상당한 피해를 안겼고, 남송은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분산시켜야 했다. 또한 쿠빌라이 칸은 일 칸국으로부터 포장(炮匠)이라는 기술자를 모셔와서 회회포를 개발하여 양양성 공략전에 투입시켰다. 그렇지만 양양성의 식량이 10년은 버틸 수 있을 정도로 풍족했고, 여문환을 위시한 수비대가 사력을 다해 맞섰기 때문에 좀처럼 공략되지 않았다.
한편, 송군은 어떻게든 양양성을 구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 번은 수영 잘하는 병사를 모집한 뒤, 병사의 상투 속에 작전 개요서를 숨겨서 강을 떠다니는 풀더미 속에 몸을 숨겨 성 안에 잠입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병사는 불행히 발각되고 말았고,[3] 몽골군의 감시망은 더욱 견고해졌다. 1271년 6월 범문호가 10만 수군을 이끌고 양양으로 진군했으나, 몽골군이 수천 척에 달하는 전선으로 막아서자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1272년 3월, 유정과 아릭카야(阿里海牙)가 이끄는 몽골군이 회회포로 인해 파괴된 번성의 외곽 토성을 점령하고 송군 2,000명을 주살했다. 이어 아주의 몽골군이 번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상황이 이처럼 다급해지자, 경호제치사 이정지는 적의 감시가 남방에 쏠려 있는 걸 이용하여 북방으로부터 극비리에 물자를 보급하기로 했다. 그는 건장한 민병 3,000명을 모집한 뒤, 장순(張順)과 장귀(張貴)를 총책임자로 삼아서 양양성에 물자를 보급하게 했다.
1272년 5월 22일, 한수의 수위가 높아지자 장순과 장귀가 이끄는 민병 3천 명이 군수 물자를 가득 싣고 양양 북방의 균주를 출발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원군 전선들을 향해 돌격하여 사투를 벌인 끝에 5월 25일 새벽에 양양성 아래에 도착했다. 그 과정에서 후미를 맡았던 장순이 전사했다. 장귀는 보급 물자를 전달한 뒤 즉시 남으로 뚫고 내려가 양양과 남방 사이의 통로를 열어두려 했지만, 여문환이 양양에서 같이 방어하자고 강권하자 어쩔 수 없이 양양성에 남았다.
그해 9월 몽골군의 공세가 급박하자, 장귀는 계획대로 밀어붙이기로 하고 하귀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계획을 통보했다. 하귀는 장귀의 군대가 적군의 포위방을 뚫고 내려오면 양양성 남방의 용미주에서 기다렸다가 엄호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러서 매를 맞았던 장귀의 부하 하나가 앙심을 품고 원군에 투항하여 모든 사실을 알리는 바람에 일이 틀어졌고, 장귀의 민병대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몽골군에게 궤멸되었다. 장귀는 가까스로 수 명만 이끌고 용미주에 도착했지만, 하귀는 이틀 전에 몽골군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돌아가버렸다. 결국 장귀 등은 몽골군에게 포위되어 전원 사살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양양성 앞에 내걸렸다.
1272년 말, 몽골군은 오랜 기간 공성을 벌이는 데도 양양성이 굳건히 버티자 방향을 선회하여 번성부터 함락시키기로 했다. 양양성과 번성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두 성 사이에는 부교가 부설되어 있었다. 군민들이 이를 통해 왕래하며 상호간 방어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몽골군은 부교를 파괴하여 번성을 양양성으로부터 단절시킨 뒤, 맹공을 퍼부었다. 1273년 1월 12일, 번성의 성벽이 회회포에 의해 무너졌고, 몽골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번성 수비대장 범천순은 몽골군이 몰려오는 광경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탄식했다.
"나는 송의 신하였으니, 마땅히 죽어서도 송의 귀신이 되리라!"
그는 곧바로 목을 메어 죽었다. 또다른 장수인 우부(牛富)는 700여 전사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끝내 버틸 수 없게 되자 기둥에 머리를 스스로 박은 뒤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이리하여 번성이 함락된 뒤, 몽골군은 회회포를 총동원하여 양양성을 향해 바위 세례를 퍼부었다. 양양성 수비대는 전의를 급격히 상실했고, 많은 부장이 몽골군에 투항했다. 양양지부 여문환은 매일 성벽을 순시하며 장병들을 격려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남방을 향해 통곡하곤 했다.
몽골군은 여문환의 일가가 대대로 송나라의 중요 무직을 거쳐서, 여문환이 조정에서 누가 현명하고 누가 어리석은 지, 송의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견고하고 어느 것이 허술한지, 송군의 많고 적음과 허실, 남송 정치의 옳고 그름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게 없다고 인식했다. 그들은 여문환을 회유하기로 하고, 1273년 정월 여문환의 휘하에 있다가 투항한 당영견(唐永堅)[4]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여문환이 응하지 않자, 아릭카야가 몇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양양성 아래로 가서 말했다.
"그대는 실로 몇 년 동안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양양성을 지켰다. 이제는 나는 새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황제께서는 그대의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기고 계시다. 만일 투항한다면 필시 높은 관직을 내리실 것이다. 그대를 해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여문환이 머뭇거리자, 아릭카야[5]가 화살을 부러뜨리며 맹세했다. 곁에 있던 장정진(張庭珍)도 거들었다.
"우리 군대는 일찍이 공격하여 무너뜨리지 못한 곳이 없었다. 그대는 고립된 성에 갇혔고 탈출로도 끊겼다. 바깥으로는 지원군도 없다. 그대는 성을 지키다 죽었다는 헛된 공명을 바라고 있을지 모르나, 그렇다면 성내의 사람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여문환의 부하 장수들도 투항을 강력하게 권했다. 결국 여문환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이리하여 1268년 9월부터 1273년 1월까지 5년에 걸친 양양성 공방전은 몽골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남송은 양양 공략 이후에도 3년간 버텼지만, 끝내 1276년 정월 수도 임안이 바얀의 군대에게 공략되면서 사실상 멸망했다. 남송의 잔당은 이후에도 중국 남부 해안에서 버텼으나, 1279년 3월 19일 애산 전투에서 남송의 마지막 함대가 궤멸되면서 최종적으로 멸망한다.
7. 남송 측의 문제점
몽원 군대가 양번을 말려죽이기로 한 작전도 있었지만 남송군의 문제점도 많았다. 여문환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고달이 지원군으로 오는 것을 꺼렸다. 전투 중 양양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몽원 군대를 잘 막아내고 있다고 허위보고했고 또 여문덕의 사위인 범문호가 경호제치사 이정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등[6] 남송군의 분쟁도 있었다. 게다가 범문호는 군영에서 매일마다 예쁜 처첩들을 데리고 매일 술을 마시며 놀았고 어쩌다가 몽골군의 순찰 부대만을 막았다.[1] 이후 고달은 백하 전투에서 동문위를 격파하고 1259년 악주 전투에서 몽골군의 공언휘를 계략으로 주살한다.[2] 본디 북방 출신의 한인 무장으로, 맹공의 수하에서 군생활을 했으나, 여문덕의 무시와 유흥이 사천제치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으로 인해 자신이 지키던 노주(후일 여문덕이 탈환한다)를 몽골에 바치면서 몽골에 투항했다.[3] 다만 몽골군이 강을 떠다니는 풀더미까지 다 조사할 정도로 독종은 아니었다. 강에 풀더미 몇 개가 떠내려가는 걸 보고 '저거 건져다 말려서 땔감으로 쓰자'고 해서 건졌다가 발각된 것.[4] 유정과의 싸움에서 생포당한 그 당영견이다.[5] 위구르인 출신의 원나라 장수이다. 양양 및 악주 함락 뒤 한양에 주둔해 있다가 1275년 고세걸이 형호 지역에서 후방을 공격하려는 낌새가 보이자, 고세걸의 군대를 동정호에서 격파한 뒤 고세걸을 투항시킨다. 이후 사시진에서 사마몽구가 이끄는 군대를 대도살하고 이후 강릉을 지키던 호북제치부사 고달에게 투항을 권유해 고달을 투항시킨다. 이후 경서 지역과 형호 지역을 손에 넣었다.[6] 범문호는 가사도에게 자신이 몽원 군대를 잘 막아낼 수 있다고 했고 가사도는 범문호에게 이정지의 명령을 무시해도 좋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