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cc800><tablebgcolor=#fcc800>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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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타카스 카즈오 (1938~1940) | 2대 미타니 하치로 (1941~1942) | 3대 카토 키사쿠 (1942) | 4대 타카다 카츠오 (1943) | 5대 카토 키사쿠 (1943~1944) | |
6대 츠루오카 카즈토 (1946~1965) ★★★★★ ★★★★★ | 7대 카게야마 카즈오 (1965) | 8대 츠루오카 카즈토 (1966~1968) ★ | 9대 이이다 토쿠지 (1969) | 10대 노무라 카츠야 (1970~1977) ★ | |
11대 히로세 요시노리 (1978~1980) | 12대 돈 블레이싱게임 (1981~1982) | 13대 아나부키 요시오 (1983~1985) | 14대 스기우라 타다시 (1986~1989) | 15대 타부치 코이치 (1990~1992) | |
16대 네모토 리쿠오 (1993~1994) | 17대 오 사다하루 (1995~2008) ★★★ | 18대 아키야마 코지 (2009~2014) ★★ | 19대 쿠도 키미야스 (2015~2021) ★★★★★ | 20대 후지모토 히로시 (2022~2023) | |
21대 코쿠보 히로키 (2024~) ★ | |||||
★: 단일리그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 / ★: 퍼시픽리그 우승 7대 감독인 카게야마 카즈오는 취임 4일 후 급사하여 정식 감독으로써 지휘한 적은 없다. |
이름 | 츠루오카 카즈토(鶴岡 一人)[1] |
출생 | 1916년 7월 27일 |
사망 | 2000년 3월 7일 (향년 83세) |
국적 | 일본 |
출신지 | 히로시마현 구레시[2] |
포지션 | 3루수, 2루수, 1루수, 외야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경력 | 난카이 호크스 (1939~1952) |
지도자 경력 | 난카이 호크스 감독 (1946~1968) |
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선수, 야구 지도자, 해설가. 프로 입문부터 감독 경력을 전부 난카이 호크스 에서 보낸 인물로, 별명은 오야붕(두목), 돈 츠루오카[3], 미스터 호크스.1944년 결혼하여 처가의 성을 따라 한때 야마모토 카즈토 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적도 있으나, 1958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재혼하면서 1959년 다시 본래의 성인 츠루오카로 돌아왔다.
2. 선수 시절
히로시마 상업학교 시절 유격수와 4번타자로 맹활약하며 학교를 고시엔 대회 제패로 이끌었고, 우승학교에 주는 특전으로 미국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호세이 대학 시절에도 츠루오카는 3루수로 화려한 수비와 빼어난 타격을 자랑했다.
1939년 대학 졸업 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 그 해 홈런 10개를 치며 홈런왕을 차지했지만, 이듬해 곧바로 군에 징집되어 5년간 복무하였다. 종전 후 1946년 난카이에 복귀, 선수 겸 감독으로 팀을 이끌며 1946년 시즌 타점왕을 수상하는 등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다.
1952년 시즌을 끝으로 츠루오카는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8시즌간 통산 성적은 790안타, 61홈런, 467타점, 143도루, 타율 0.295.
3. 감독 시절
1953년부터 전임 감독으로 임명되어 1968년까지 선수 겸 감독시절 포함 무려 23시즌 동안 난카이를 지휘하였다. 연습생이던 노무라 카츠야를 주전 포수로 성장시키고 그 외 오카모토 이사미, 히로세 요시노리 등의 무명 선수를 스타로 등극시키는 등 선수 지도능력이 탁월했으며 그 외 아마시절 부터 유망주였던 카게야마 카즈오, 오사와 케이지, 아나부키 요시오 등과 외국인 투수 조 스탠카를 적절히 활용하며 팀을 1959년, 1964년 일본시리즈 제패로 이끌었다. 리그 우승 경력도 11회나 된다.
또한 마이니치 신문 기자 출신인 오와리 히사츠구를 구단 전속 기록원으로 채용, 당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에서도 유래가 없던 데이터 야구를 도입한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츠루오카의 제자였던 노무라 카츠야의 ID 야구는 스승에게서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23년 난카이 감독생활 동안 팀이 B클래스로 떨어진 적은 1967년 단 1시즌(4위) 뿐이었고,[4][5] 그 외 시즌은 거의 리그 우승 내지는 2위로 이끌 정도로 명감독이었다.
1965년을 끝으로 난카이 감독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한 츠루오카는 그 해 시즌 종료 후 예정대로 구단에 사의를 표명했고 곧바로 도쿄 오리온즈와 산케이 아톰즈 양 구단으로 부터 차기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츠루오카의 후임 감독인 카게야마 카즈오가 취임 4일 만에 급사[6]하는 사태가 터지면서 난카이의 분위기는 풍비박산났고 결국 구단과 선수단의 복귀 요청을 받은 츠루오카는 이를 승낙하면서 양 구단의 제의를 사양하고 다시 난카이 감독으로 복귀하여 3시즌을 더 지휘하였다.
여담으로 츠루오카는 난카이로 복귀하기 전 어느 구단으로 이적하려 했는지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침묵했지만, 1985년 도쿄 오리온즈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가 사망했을 당시 취재진에게 "그 분(나가타)의 신세를 질 생각이었다"라고 언급하며 오리온즈 감독에 취임할 예정이었음을 밝혔다.
1968년 시즌을 끝으로 츠루오카는 감독직을 사퇴하고 난카이를 떠났으며, 한신 타이거스, 킨테츠 버팔로즈 등 다른 팀의 뜨거운 러브콜을 거부한 채 난카이 출신으로 남았다.
감독으로서 1,773승 1,140패 81무승부 승률 0.609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2019년 현재까지 일본야구 사상 감독으로서의 통산 승리 수 1위이며(2위 미하라 오사무 1,687승), 1,000승 이상 감독 중 유일하게 승률 6할이 넘는 감독이기도 하다(2위 미즈하라 시게루 0.585).
한편으로 츠루오카는 제자인 노무라 카츠야와 불화설이 돈 적이 있다. 노무라가 현역으로 뛰던 시절 츠루오카가 그를 칭찬한 적은 단 두 번[7]일 정도로 엄격하게 대했고 1965년 양대 리그 분리 후 최초로 삼관왕을 달성한 노무라에게 한 마디의 칭찬도 없었을 정도 였으며, 노무라는 츠루오카가 2000년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 조문은 커녕 화환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노무라는 츠루오카를 스승님으로서 존경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밝혔고 장례식에 오지 않은 것도 두 번째 아내인 사치요가 난카이의 코치, 선수들을 상대로 전횡과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어 이를 조정하기 위해 장례식에 올 수 없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노무라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다른 팀 선수들의 칭찬은 잘 한 반면 같은 팀 제자들에겐 호평이 인색했다.
4. 이후
1969년부터 죽기 전까지 NHK와 스포츠 닛폰의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유소년 야구 육성과 국제간 교류에 진력을 쏟으며 야구계 발전에 큰 힘을 보태었다. 감독 재임중이던 1965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으며, 1991년엔 야구 발전의 공로를 치하하여 프로야구인 으로는 최초로 훈 4등급 욱일장 훈장을 수상하기도 하였다.2000년 3월 7일 지병으로 인해 향년 83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10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리며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고.
5. 김성근과의 인연
츠루오카가 난카이 감독으로 재임 중이던 1961년, 난카이의 동계훈련 캠프에 사회인 야구 출신의 19세 청년이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왔다. 그의 이름은 바로 가네바야시 세이콘. 그렇다. 여러분이 익히 아는 김성근이다.당시 김성근은 연습생으로 잠깐 츠루오카의 지도를 받았는데, 지금보다 좌완 투수가 희귀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인상적인 면은 없었는지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특이한 건 김성근 본인은 난카이 입단이 좌절된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본인의 유일한 프로 경력 이라면 프로 경력임에도 말이다.
덧붙여 이 때 김성근은 같은 교토 출신이자 당시 난카이 소속 투수로 뛰던 김영덕과 연을 맺었는데, 이 연줄이 나중에 KBO 리그 지도자 경력으로 이어질 줄은 그땐 전혀 몰랐을 것이다.[8]
[1] 카즌도 라고도 읽는다.[2] 후지무라 후미오와 동갑내기에 동향 출신. 학창시절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3] 대부의 주인공인 돈 콜레오네에서 따온 것.[4] 단일리그 마지막 해인 1949년 4위를 기록한 바 있으나 이 해엔 8팀이 참가해서 1~4위까지 A클래스였다. 이 해 성적은 135전 67승 67패 1무로 딱 5할 승률을 찍었다.[5] 츠루오카가 감독을 맡은 시즌 중 유일하게 5할 승률을 기록하지 못한 해가 이 해다. 당시 성적은 133전 64승 66패 3무. 승률은 0.492였다.[6] 38세의 젊은 나이에 감독에 오른 카게야마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시달렸고, 매일 밤 브랜디에 수면제를 복용하며 억지로 잠을 청하다가 급성 부신피질 기능부전 이란 듣도보도 못한 병으로 사망하였다.[7] 노무라가 입단 3년차이던 1956년 하와이 전지훈련 때 기자들에게 "노무라를 쓸만한 선수로 키운 것이 성과"라고 밝힌 것과, 이듬해인 1957년 커리어 첫 홈런왕을 획득한 노무라에게 "자네 잘 했어" 라고 격려한 것.[8] OB 베어스 초대 감독으로 내정된 김영덕이 구단 지시에 의해 김성근을 투수 코치로 받아 들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김영덕과 김성근은 이상하리만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불편한 관계가 후에 김영덕이 성적부진으로 OB 베어스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한(이것도 김성근이 자기 자리를 김영덕이 가로챘다고 주장했다) 후인 1984년 시즌 중 OB와 삼성 간의 피튀기는 신경전, 그리고 후기 리그 최후반에 삼성이 롯데에 져주기 게임이란 추태를 부리는 원인 중 하나가 된 바 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어떻게든 한국시리즈 제패를 원했던 삼성이 꽤나 상대하기 골치아픈 OB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길 원치 않아서 그나마 만만한 롯데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고른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