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클럽 경력
2.1. 남미 시절
모국 아르헨티나의 명문 구단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19살에 선수 생활을 시작해, 약 10여 년을 남미 리그에서만 커리어를 쌓았다. 1947년 30경기 27득점을 기록해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948년에는 리그 2위에 그쳤지만 현재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전신인 남아메리카 클럽 챔피언십에 출전하여 6경기 4골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팀은 1점 차로 CR 바스쿠 다 가마에 우승을 내주었다. 다음 해인 1947년엔 다시 리그 우승에 성공했고 그 후 1949년 콜롬비아의 CD 로스 미요나리오스로 이적하여 4시즌 동안 3회의 우승과 1회의 준우승을 경험하며 두차례 득점왕을 차지하였고 292경기 267골을 넣었다고 전해진다.그가 남미에서 쌓은 스탯을 보면 친선전을 제외하고 공식 경기만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66경기 49골, CA 우라칸에서 25경기 10골,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101경기 90골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괴수급이지 않을까 싶지만 본편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1952년 3월 31일, 미요나리오스와 레알 마드리드는 마드리드에서 한 차례의 경기를 더 가진 바 있는데 이 원정 경기에서 디 스테파노는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의 4-2 승리를 이끈다. 이 경기를 통해 미요나리오스는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세계 최강 팀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남미 대륙 내 활약을 눈여겨보고있던 스페인에서 그에게 러브 콜을 날리기에 이른다.
2.2. 디 스테파노 사태
결과부터 말해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흰 유니폼을 입고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그런데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보면 이렇다.우선 디 스테파노의 남미 시절 계약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디 스테파노는 CA 리버 플레이트에 소속된 선수였다.[1] 하지만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혼란에 직면했고, 선수들의 주급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디 스테파노도 예외는 아니었고, 주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리버 플레이트를 탈퇴했다.
그때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것이 한참 경제 성장과 군사 정권의 지지와 함께 선수를 끌어모으고 있던 콜롬비아 리그의 CD 로스 미요나리오스였다. 단, 계약이 완전히 깨진 것도 아니고 로스 미요나리오스 이적 과정에서 이적료가 지불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리버 플레이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적어도 상당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로스 미요나리오스 이적 과정을 임대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둘 모두에게 확실한 권리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중 계약이고, 좋게 말하면 양쪽 모두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디 스테파노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맹활약을 했고, 심지어 콜롬비아 축구 협회의 요청으로 콜롬비아의 국적을 취득해 콜롬비아 국가 대표로까지 발탁되었다. 하지만, 콜롬비아 축구 협회는 FIFA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고, 공식적인 A매치에서 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콜롬비아 리그는 급하게 형성된 것인 만큼 급격하게 몰락했다. 1950년대 초반 콜롬비아의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로스 미요나리오스도 유럽 순회를 하면서 돈벌이를 하러 다녀야 했다. 디 스테파노 본인도 콜롬비아를 떠날 생각이 들었다. 그때 로스 미요나리오스가 앵벌이를 다닌 곳 중 하나가 스페인이었고, 디 스테파노의 활약은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모두의 눈에 확실히 들어왔다.[2] 당시 라리가의 상황은 라슬로 쿠발라라는 슈퍼 스타를 등에 업은 바르셀로나가 독주하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디 스테파노까지 바르셀로나에 영입되면 독주 체제가 굳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양쪽 모두에게 있었다.
이때 바르셀로나는 남미 상황에 정통했던 변호사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카탈루냐인 라몬 트리아스 파르가스를 리버 플레이트에 파견하여 이적 협상을 완료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의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트리아스 파르가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 협상이 깨진 것은 바르셀로나의 내부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역시 콜롬비아에 파견되었던 바르셀로나의 이사 주제프 사미티에르[3]는 당시 콜롬비아에 있던 카탈루냐인이자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라이벌 구단 '산타 페'의 임원이었던 후안 부스케츠 바로의 도움을 얻었는데, 바로는 협상을 진행하는 것보다 방해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후안 부스케츠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의 협상을 거의 하지 않았고, 로스 미요나리오스에게는 통보도 없이 디 스테파노를 스페인으로 데려와 버렸다. 이 사건은 당연히 로스 미요나리오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협상은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여하튼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와 담판을 지었고, 일단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던 디 스테파노는 무작정 스페인으로 날아왔다. 문제는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한 리버 플레이트 역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으면 허용함'이라는 조항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협상을 허락한 FIFA 역시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모르고 허락을 한 것이다. 로스 미요나리오스는 이런 상황 전개에서 당연히 반발하였다.
결국 바르셀로나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협상의 방해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바르셀로나 회장인 엔리크 마르티 카레토였다. 카레토는 디 스테파노 이적에 필요한 자금에 제약을 걸기 시작했다. 파르가스에 의하면 이 협상 과정에서 카레토 회장이 미요나리오스에 지불할 의사가 있었던 돈은 1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 돈은 바르셀로나의 보드진이 허용한 2만 달러의 절반이었으며, 로스 미요나리오스가 요구한 이적료 4만 달러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게다가 디 스테파노가 개인적으로 지고 있던 빚 5천 달러도 있었다.[5] 파르가스는 이 차이를 1만 달러와 옵션(친선 경기 개최 수익금 등)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카레토는 1만 달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면서 카레토를 비판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외부 압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한편 그러는 사이에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협상을 해서 이적 동의를 받아내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이중 계약이 된 것이다.
이제 공은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으로 넘어갔다. 당시 축구 협회였던 스페인 축구 연합과 정부의 국민 스포츠 당은 일단 더 이상의 외국인 협상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 상황에서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레알 마드리드가 리버 플레이트와 협상을 하게 된다면 디 스테파노는 완벽한 이중 계약이 되고, 그 이후 전개는 누구도 해결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디 스테파노와 바르셀로나 사이에 이루어진 개인 계약을 무효로 처리했다. 바르셀로나와 디 스테파노의 계약을 인정한다는 것은 디 스테파노가 리버 플레이트 소속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건 복잡하게 꼬여 있는 계약을 결론 내린다는 것이었는데 국민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연합이 모두 이걸 거부한 것이다. 이러면 디 스테파노 영입을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모두 못하게 되는 것인데, 당연히 두 팀 모두 반발하고 나섰다.
이제 다시 상황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스페인 축구 협회와 정부의 국민 스포츠 당, 리버 플레이트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그리고 FIFA와 콜롬비아 축구 협회가 뒤엉킨 어처구니없이 복잡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더구나 갑자기 잘만 뛰던 디 스테파노가 복잡한 상황에 자기도 당황했는지 좀 애매한 플레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비밀 협정을 맺고 태업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되지만,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 팬들 사이에서는 디 스테파노를 자신들의 슈퍼 스타 쿠발라와 비교를 하면서 굳이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불평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 상황에서 국제적 판단이 2개 나왔는데 리버 플레이트가 소속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가 바르셀로나가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승인한 사건과, 그제서야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FIFA가 이전의 결정을 파기하고 모든 책임을 스페인 축구 협회로 떠넘긴 것이다.
이렇게 꼬인 상황이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협정을 맺었는데, 그 협정이 뭐냐 하면, '디 스테파노를 유벤투스로 이적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다시 화들짝 놀란 것이 국민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협회였다. 앞의 전개를 생각해보자. 당시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에서 맹활약을 해서 국가 대표로 활동하다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활동하면서 콜롬비아 국적을 따고 콜롬비아 국가 대표로 활동한 세계 최고의 선수이다. 당시는 이런 식의 국적 이동과 대표팀 출장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월드컵에 좋은 선수는 안 내보내려고 난리를 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디 스테파노가 뛰던 시절의 아르헨티나가 이 짓을 했다. 그러고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콜롬비아로 이동했지만. 따라서 디 스테파노가 유벤투스 선수가 된다면, 스페인 입장에서는 굴러 들어온 국가 대표 스트라이커를 이탈리아에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전대미문의 판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4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소유권을 공유하고, 각각 1년씩 번갈아 가면서 뛴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반발한 것은 바르셀로나, 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의 팬들이었다. 바르셀로나 팬들은 이 협정을 프랑코 정권의 모략으로 보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모독으로 인식했다. 또한 디 스테파노의 활약 역시 기대에 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협상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고, 바르셀로나는 돈을 받고 디 스테파노에 대한 권한을 레알 마드리드에 넘겨주었으며 카레토 회장을 포함한 임원들은 전원 사임했다. 카레토 회장이 디 스테파노를 마드리드에 보내고 사임했는지, 카레토 회장이 사임을 빙자한 파면이 된 다음에 결성된 임시 이사회가 디 스테파노를 마드리드에 이적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매체마다 다르다. 여튼 거의 동시인 것은 확실하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 바르셀로나에 이어서 리버 플레이트에도 이적료를 지불하면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이적 소동은 겨우 마무리된다.
본문에 적힌 과정도, 파르가스의 주장, 관련된 매체, 각 언어별 위키피디아, 소개되는 책자마다 조금씩 다 다르고, 도대체 중앙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협회의 압박이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극렬 카탈루냐 민족주의자인 파르가스는 협상 단계에서 바르셀로나 회장과 이사까지 방해만 했고 전 과정에서 압박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하고 있지만 당사자의 주장이라서 좀 애매하다. 주장을 보면 '난 완벽하게 협상을 다 했는데 주변에서 방해만 해서 실패했다'는 전개이고, '악의 근원은 프랑코 정권'라는 식이다. 극렬 바르셀로나 팬들 중에서는 이 주장을 긍정하는 이들이 꽤 많지만 아무리 봐도 자기 실드 냄새가 강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부족하다. 한편 바르셀로나와는 거리가 먼 측, 혹은 대놓고 레알 마드리드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이적 초기 디 스테파노의 활약이 기대에 못 미쳐서 디 스테파노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후 디 스테파노 사태가 FC 바르셀로나에 대한 프랑코 정권의 훼방의 증거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쟁점화된 것도 있으니, 논란이 끊이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참조해보기 좋은 글
2.3. 레알 마드리드 CF
한바탕 난리를 친 끝에 메렝게스의 흰 유니폼만을 입는 것이 확정된 디 스테파노는 적응기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29골을 몰아치며 데뷔 시즌 피치치를 가져감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의 3연패를 저지하고 트로피를 마드리드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해에 '칸타브리아의 광풍' 프란시스코 헨토를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주도 아래 차곡차곡 스타 플레이어를 더해 주기 시작, 이른바 '저승사자 군단'을 결집시킨다. 1956년에는 '나폴레옹' 레몽 코파를 영입했고, 1957년에는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센터백 호세 산타마리아가 들어왔으며, 결정타로 1958년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파트너로 '폭주하는 소령' 페렌츠 푸스카스를 영입했다. 이들은 죄다 당대 최고로 꼽히던 전설적인 선수들이다. 단적으로 레프트 윙 헨토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을 정도로 스페인에서 제일 가는 드리블러였고, 코파는 1958년 발롱도르를 챙겨 갔다.이렇게 되자 스페인 땅에 레알 마드리드를, 아니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라는 악마의 조합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6] 그 두 명을 최전방에 내세운 마드리드는 라리가 우승 8회[7]를 거두었고, 디 스테파노는 그 와중에 피치치 5회[8], 발롱도르 2회[9]를 달성했다.[10] MVP 4회는 그저 부록일 뿐이다.
그렇게 1964년까지 마드리드의 모든 영광을 함께 하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가 찾아오자 37살에 RCD 에스파뇰로 이적한다. 그리고 말년 중 말년에도 47경기 11골이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후, 그 영광스러웠던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참고로 하필이면 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인 에스파뇰로 이적해서 바르셀로나에 안 좋은 감정이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에스파뇰에서 라리가 초기의 라이벌이자 아주 잠깐 팀 동료이기도 했던 라슬로 쿠발라와 재회했다. 그래서 이 부분이나, 애초에 에스파뇰 창단을 바르셀로나 쪽 인사들이 카탈루냐 축구 협회의 지원 형태로 후원한 것과 관련해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구도가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적 대립 문제라는 이야기가 현대에 와서 과장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마르카는 2007-08 시즌부터 디 스테파노를 기리고자 시즌 최우수 선수에게 그의 이름을 딴 '트로페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수여하고 있다. 최초 수상자는 라울 곤살레스이며 최다 수상자는 7회 수상의 리오넬 메시이다.
3. 국가대표 경력
디 스테파노의 국가대표 커리어 골과 어시스트[11] |
1947년 21세의 나이에 현재의 코파 아메리카의 전신인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출전해 6경기 6골 3어시스트로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다음 대회인 1949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과 1950년 월드컵은 브라질에게 유치 경쟁에서 패한 아르헨티나가 불참을 선언하는 바람에 나가지 못했다.
이후 디스테파노는 콜롬비아로 국적을 변경했지만 1954년 월드컵은 피파에서 참가를 막았다. 그렇게 거의 10년 만인 1957년 디스테파노는 스페인으로 국적을 변경했고 1958년 월드컵 예선전을 뛰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한수 아래로 여겨진 스코틀랜드에 잡히는 바람에 예선 탈락했다.
1960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이 창설되고 예선에서 디스테파노의 스페인은 폴란드와 대결했다. 폴란드를 상대로 2경기 3골을 넣으며 팀을 최종 예선까지 이끌었고 경기에서 스페인은 최종 예선에서 소련과 대결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이 소련 원정경기를 거부하면서 결국 유로 1960 본선행 티켓은 소련이 가져갔고, 이것이 스노우볼이 되어 소련은 유로 초대 챔피언까지 올랐다.
이후 1962년 월드컵 예선에서 스페인은 웨일스를 만났고 디 스테파노는 2경기 1골을 기록하며 최종예선으로 스페인을 올렸다. 최종예선에서 스페인은 모로코[12][13]를 만났고 디스테파노는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스페인의 본선진출을 이끌었다.
당시 스페인은 카테나치오의 개발자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이끌며 여기에 페렌츠 푸스카스, 프란시스코 헨토 등이 뛰는 초호화 팀이었다. 그러나 디 스테파노는 대회를 앞두고 부상당하는 바람에 끝내 월드컵에는 단 한 번도 출전하지 못하는 비운의 선수가 되었다. 스페인은 이 대회에서 펠레가 빠진 브라질을 상대로 거의 일방적으로 몰아 붙이다 헨토의 골이 취소되는 오심으로 아깝게 떨어졌는데, 만약 디 스테파노가 스페인에 남았다면 1962 월드컵의 양상은 전혀 달라졌을지도 몰라 매우 아쉬움이 많은 대회로 남았다.
[1] CA 우라칸에서 뛴 것은 임대였다.[2]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스페인 투어 이전부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회장이 디 스테파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원래 베르나베우 회장이 영입하고 싶어했던 선수는 당시 데포르티보 칼리에서 뛰던 발레리아노 로페스였지만 그가 영입 제안을 거절하자 대신 관찰한 선수가 디 스테파노였다.[3] 이 사람의 행적도 아주 골 때린다. 원래 바르셀로나의 스타 플레이어였다가 레알 마드리드로 직접 이적해서 역시 선수로 뛰었다. 은퇴한 다음에는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사로 지내기도 했고, 결국은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죽었다. 덕분에 별명이 왕복 비행기였다.[4] 미국의 이탈리아계 미국인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를 상당히 많이 닮았는데, 젊을 때 뿐만 아니라 70대때 사진을 봐도 현재의 70대 드니로와 이목구비와 자주 짓는 표정까지 매우 닮았다. 둘다 조상이 라틴족 백인이기도 하지만, 전체 골격은 둘째치고 이목구비 자체가 많이 닮은 편.[5] 바르셀로나는 이 빚 5천 달러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했다. 디 스테파노는 자기는 빚이 없다고 주장해서 이 빚 문제도 복잡하게 만들었다.[6] 여담이고 풍문이지만 당시 푸스카스와는 서로들 콧대가 하늘을 찔러서 서로에게 절대 패스 안 하고 드리블 돌파해서 골을 넣곤 했다고 한다.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의 관계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둘의 경우는 루스가 마마보이라는 등 대인배 게릭에게 시비나 투정을 부린것이며 경기장에서 이들은 역사상 최고의 듀오였다. 푸스카스와 디 스테파노 또한 그런 풍문이 있을 뿐이지 정말 서로에게 악감정을 품고 경기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면 레알 마드리드는 당대 최고의 팀으로 군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아르센 벵거는 이 둘은 서로 말을 섞거나 인사도 나누지 않았지만 경기장에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며, 불화가 있던 투레와 갈라스를 같이 중앙 수비수로 세우길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한 바도 있었다.[7] 1953-54, 1954-55, 1956-57, 1957-58, 1960-61, 1961-62, 1962-63, 1963-64[8] 1953-54, 1955-56, 1956-57, 1957-58, 1958-59[9] 1957, 1959[10] 발롱도르는 1956년부터 제정되었는데, 첫 수상자는 47점을 획득한 40세 노장 스탠리 매튜스였고, 디 스테파노는 44점으로 2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첫 수상이라서 공로상 어드밴티지로 매튜스가 획득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담으로 1958년에는 팀 동료 레몽 코파가[14], 1960년에는 바르셀로나의 루이스 수아레스가 발롱도르를 챙겨갔다.[11] 디 스테파노의 도움 기록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빅사커 유저가 옛 신문을 뒤져가며 찾은 것이다. 해당 유저는 신문에서 골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들을 세세히 분석하며 찾으며[15] 디 스테파노의 어시스트 기록을 찾았다고 한다. 다만 묘사가 안 된 부분들도 상당히 있어 아래 수치는 최저 수치이고 실제로는 좀 더 많을 수도 있다고 한다.[12] 당시 월드컵 예선은 유럽 국가와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가 오늘날 플레이오프 형식으로 치르는 형식이었는데, 아시아의 한국은 유고슬라비아와, 아프리카의 모로코는 스페인과 대결했다.[13] 놀라운 사실은 스페인과 모로코는 인접국이면서 이 두 번의 경기를 끝으로 무려 57년 동안 대결한 적이 없었다. 2018 월드컵에서야 다시 만났고 이후 2022 월드컵에서도 재차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