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스 왕조 제8대 칼리파 알 무타심과 동로마 제국에서 끌려온 여노예 카라티스의 아들이다. 812년 4월 17일 메카 순례 도중에 태어났고, 할아버지 하룬 알 라시드의 이름을 따서 하룬이라고 명명되었다. 그는 알 마문이 붙여준 가정교사 하룬 이븐 지야드로부터 서예, 암송, 문학 등을 배웠다. 그는 당초 칼리파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보였지만, 아버지가 이복형 알 마문으로부터 칼리파를 물려받으면서 직위가 급상승했다.
알 무타심이 사마라를 새 수도로 삼기로 하고 바그다드를 떠난 뒤, 그는 바그다드에 남아서 통치를 대행했다. 838년 바박 호람딘 반란을 진압한 알 아프신 장군을 환영하는 사절의 일원으로서 참가했고, 838년 아모리온 원정 때 부친의 부관으로서 활약했다. 841년 아프신 장군이 반란자 마자르 이븐 카린과 내통하고 조로아스터교를 남몰래 믿은 혐의로 체포되어 특별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아프신을 동정하여 과일이 담긴 접시를 가져다 주었지만, 아프신은 과일에 독이 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받지 않고 칼리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알 무타심은 끝내 아프신을 처형했다.
842년 1월 5일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한 뒤 칼리파로 등극한 그는 843~844년에 아버지의 치세 때 권세를 누린 관료 일부를 체포하여 그동안 빼돌린 국고를 내놓을 때까지 고문을 가하고 직위해제시켰다. 그 빈자리엔 신진 관료를 임명했는데, 그 중엔 튀르크 출신 인사들도 있었다. 844~845년, 그는 튀르크 장군 중 한 명인 부그하 알 카비르에게 아라비아의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부그하는 즉시 아라비아로 출진해 반란군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했다. 또한 쿠르드족이 이스파한, 지발, 파르스에서 벌인 반란을 진압했다.
846년, 바그다드에서 아흐마드 이븐 나스르 이븐 말리크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븐 말리크는 오랫동안 아바스 왕조를 지지한 가문이었지만, 아흐마드는 알 마문, 알 무타심 처럼 알 와시크가 지원하는 무타잘리 학파에 반대했다. 그들은 846년 4월 4일 밤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신호를 보내야 할 이들이 날짜를 착각하여 하루 일찍 신호를 보내는 바람에 당국이 눈치채고 철저히 수사했고, 아흐마르는 곧 체포된 뒤 사마라로 끌려갔다. 칼리파는 그를 친히 심문했지만, 반란 계획보다는 종교적 신념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흐마드가 추종하는 한발리파가 너무도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이라서 따를 게 못 된다고 밝힌 뒤, 손수 삼사마(Samsama)라는 이름의 검을 사용하여 아흐마드의 목을 베었다.
같은 해 사마라의 궁정 금고에 도둑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42,000 디르함과 소량의 디나르를 훔치고 달아났다. 금고 책임자 야지드 알 후와니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해 모조리 체포했고, 도둑들은 전원 처형되었다. 846~847년, 그는 바누 누마이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부그하 알 카비르를 보냈다. 847년 2월 4일, 부그하는 알야마마에서 바누 누마이르와 교전했다. 초기에는 적의 강력한 공세로 인해 군대가 거의 붕괴될 뻔했다. 하지만 적의 후방으로 비밀리에 이동시켰던 별동대가 돌아와서 바누 누마이르의 후위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반란군은 괴멸되었고, 부그하는 아라비아 사막 지대를 종횡무진하며 2,200명이 넘는 베두인들을 체포한 뒤 847년 6월 또는 7월에 바스라로 귀환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알 무타심의 사망 후 크레타를 재탈환하려 노력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844년, 말라티아의 에미르 우마르가 이끄는 아바스군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역 깊숙히 침입하여 보스포로스 해안까지 이동했다. 이후 우마르는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받은 파울리키아파가 지도자 카르베아스의 인솔 하에 아바스 왕조에 망명했다. 그들은 아바스-동로마 국경 지대에서 테프리케 요새를 중심으로 파울리키아 공국을 세우고 아랍인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수시로 공격했다.
845년, 알 와시크는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하여 4,362명의 무슬림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것은 알 아민이 809년 또는 810년에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한 이래 30여 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해 3월 아모리온에서 포로로 잡힌 42명의 동로마 장교들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거부한 후 사마라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포로 교환을 위한 임시 휴전이 끝나자, 아바스 왕조의 타르수스 총독 아흐마드 이븐 사이드 이븐 살람은 845년 겨울 7,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러나 원정은 수많은 병사가 동사하거나 익사하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양국은 6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한편, 시칠리아에서는 아바스 왕조를 형식적이나마 종주국으로 받드는 아글라브 왕조가 메시나, 모디카, 레온티니를 점령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서서히 밀어냈다. 이들은 845년 또는 846년에 이탈리아 본토의 나폴리 인근 미시노를 점령했고, 티베르 강에 출몰하며 로마의 주변 일대를 약탈했다.
그는 아버지 알 무타심과는 달리 학문에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음악에 재능을 갖춰 1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했다. 기독교인, 특히 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과 유대인은 개방적인 지적 환경에서 계속 활약했고, 궁정에서 일하는 관료들 중에 이교도가 상당수 존재했다.
847년 8월 10일, 수종에 걸려 치료법으로 제안된 찜질을 하였는데 오히려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사후 이복 동생인 알 무타와킬이 칼리파로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