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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중(독립운동가)

파일:신현중(1931년)-1.png
1931년 10월 11일,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서
신현중 검거를 위해 입수한 사진.[1][2]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김일평(金一平)·신현중(愼鉉重)·신홍중(愼弘重)
위랑(韋郞), 두멧
본관 거창 신씨[3]
출생 1910년 8월 4일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관리[4][5]
사망 1980년 10월 17일
경상남도 충무시
가족 부친 신상재, 모친 김녕 김씨, 부인 박경란
학력 통영공립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예과 (6회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중퇴)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2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신현중은 1910년 8월 4일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관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신상재(愼詳縡, 1882. 1. 28. ~ 1957. 5. 28.)[6]와 어머니 김녕 김씨 김우상(金禹相)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상재는 1909년 하동군 주사(河東郡主事)를 지내다가 경술국치 후 1910년부터 1916년까지 하동군 서기(書記), 1917년부터 1919년까지 진주군 서기, 1920년 통영군 서기, 1921년부터 1928년까지 통영군 속(屬), 1928년 총독부 이사관(總督府理事官) 등을 역임했던 관료였다.#

출생 후 하동군 서기로 근무하던 아버지를 따라 군청이 있던 덕양면(현 하동읍) 읍내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고 살다가, 아버지가 1917년 진주군 서기로 전보되자 진주군으로 이사,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1920년 통영군 서기로 전보되자 통영군으로 이사하여 통영면 정량리(현 통영시 정량동)에 본적을 옮기고 살면서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내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에 본적을 옮기고 살면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제6회로 입학했다.

예과를 수료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로 진학하여 1학년 재학 중이던 1931년 4월, 그는 1년 선배인 의학부의 조규찬 등과 함께 당시 경기도 경성부 관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중화원에서 모임을 갖고 동교 1·2·3학년에 재학중인 독서회 소속 학생들을 포섭하여 반제부(反帝部)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 무렵 경성제국대학에서는 1929년경부터 조선인 학생간에 비밀결사의 성격을 띤 독서회 활동이 있었는데, 이러한 독서회를 발전시켜 반제부 활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후 이들은 경기도 경성부 내자동에 있는 신현중의 집에서 반제부 결성에 따른 구체적 활동방침을 정하고 항일결사 반제부를 조직하였다. 반제부는 사회주의적 방법에 의한 조국독립을 목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조직확대에 힘을 쏟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경성제2고등보통학교·경신학교·경성법학전문학교·황성기독교청년학관 등에 경성제국대학 반제부의 하부조직을 구성하였으며,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반제경성도시학생협의회(反帝京城都市學生協議會)를 결성하였다.

또한 그는 이형원(李亨遠)·안복산(安福山) 등을 주도하여 위의 별동단체의 성격을 갖는 적우회(赤友會)를 조직케 하였다. 그리고 출판노동조합을 지도하면서 성대독서회 뉴스, 반제학생신문 등의 지하출판물의 인쇄를 주도하였다. 특히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그는 곧장 "저 피로 물든 만주광야를 보라. 우리 동포들이 제국주의 총칼에 도륙이 되고 있는데……"로 시작하는 격문을 준비하여 열흘 뒤인 9월 28일 경성부내에 배포하였다.
파일:신현중(1931년)-2.png
1931년 10월 25일, 경성부 본정경찰서에서 촬영된 사진.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31년 10월 11일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검거되었고, 1932년 11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24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
파일:신현중(1932년).png
1932년 5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출옥 후에는 복학이 거부되어 모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신현중은 출소 후 불과 보름만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교정부 기자로 활동하다 사회부로 옮겼고, 기자로서 두각을 드러내어 1937년 1월 중 공로로 당시 방응모 사장으로부터 금일봉을 받기도 했다(참조). 그해 4월 통영읍 명정리(현 통영시 명정동)에 사는 박경련(1917년 6월 8일생)[7]과 혼인하였으며, 1939년 조선일보사를 퇴사한 뒤 통영군으로 귀향했다. 이때 퇴직금 800여 원을 투자했다가 사기를 당했고, 겨우 남은 돈으로 통영읍 봉평리(현 통영시 봉평동) 용화사(龍華寺) 부근 봉숫골에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아내와 함께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다.#

8.15 광복 후 상경하여 조선통신사에서 잠시 일하였으나, 언론을 단념하고 진주로 내려가 진주여자중학교(현 진주여자고등학교 포함) 교장으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0년 도남동) 데메마을 아랫땀으로 낙향하여 1950년 통영여자중학교, 1952년 통영중학교, 1956년 부산남중학교, 1962년 부산여자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또한 시인으로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 등과 친하게 어울렸다(참조).

이후 1980년 10월 17일 경상남도 충무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신현중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3년 10월 13일 본래 경상남도 통영시 도남동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3. 여담

파일:신현중 부부사진.png
좌측이 신현중, 우측이 박경련, 즉 백석이 짝사랑하던 난(蘭)이다.
생전에 조선일보 동료였던 백석과 절친했으나, 백석이 짝사랑했던 박경련과 신현중이 결혼하면서 둘의 사이는 갈라지게 된다.
파일:J7qBZ6p3OYI8zJaBB.jpg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시절 박경련(출처)
내막은 이렇다. 백석은 또다른 절친 허준(許俊)의 결혼 축하 회식에서 박경련을 첫눈에 보고 반했다. 백석이 1936년 2월 21일 조선일보에 투고한 수필 「편지」 속 '남쪽바다ㅅ가 어떤 날근 항구의 처녀하나'가 바로 박경련이다. 그런데 당시 박경련의 집안에서는 백석의 집이 가난하고,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또는 무당의 딸이라는 괴소문이 돌고 있었고[8], 이에 박경련의 어머니 대구 서씨는 백석에 대해 늘 궁금해하다가 친오빠인 서상호(徐相灝, 1888. 7. 25 ~ 1964. 12. 20)[9]에게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서상호는 고향 후배인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신현중은 이때 백석에 대해 상세히 말하면서 앞서 말한 소문들을 가지고 '백석이 박경련의 신랑감으로 부적당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서상호에게 뜻밖에 "어르신, 제가 하면 어떻겠습니까?"라며 박경련과 혼인하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1937년 4월 결국 결혼했다.
파일:riuGT5YA9dows8oz7SJwigP1lO2qZow.jpg
부산여자중학교 교장 시절의 신현중 내외(출처)
이후 백석은 1938년 잡지 《여성》 4월호에 발표한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서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라며 이루지 못한 사랑과 쓸쓸함을 노래했다.#
[1] #에서는 당시 동대문경찰서에서 '촬영'했다고 기재해놨지만, 경성제국대학 교복 차림인 것을 봤을 때 경성제대 학적부 혹은 졸업사진을 입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2] 이 밖에 1931년 9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신현중 검거를 위해 입수한 사진도 있다.#
파일:신현중(1931년).png
[3] 통례공파 34세 중(重) 항렬.[4] #. 독립유공자 신만중도 이 마을 출신인데, 신현중에게는 12촌 지간의 족제(族弟)가 된다.[5] 1931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의하면, 경기도 경성부 내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은 본적지 및 주소지이고 출생지는 통영군 통영면 정량리(현 통영시 정량동)이다. 193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면 읍내리로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6] 초명 신복재(愼福縡).[7] 밀양 박씨 박성숙(朴性淑)의 딸이다.[8] 물론 개소리다. 백석일제강점기일본 유학을 했던 사람이고, 심지어 현재도 아시아에서 학비가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전문부(구제대학에 부속된 구제전문학교 과정)를 졸업했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또한 백석의 어머니 단양 이씨 이봉우(李鳳宇)는 고종 때 종3품 인동도호부사를 지낸 이양실(李養實)의 딸로, 마찬가지로 명문가 집안 출신이다.[9] 통영군 유지로,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