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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로저스(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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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로저스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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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74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8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79 MLB 올스타전 로고.gif파일:1982 MLB 올스타전 로고.png파일:1983 MLB 올스타전 로고.gif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74 1978 1979 1982 1983

파일:MLB 내셔널 리그 로고.svg 1982년 메이저 리그 내셔널 리그 평균자책점왕
놀란 라이언
(휴스턴 애스트로스)
스티브 로저스
(몬트리올 엑스포스)
애틀리 햄메이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보유 기록
MLB 데뷔 이후 최다 연속 경기 QS 16경기[1]

몬트리올 엑스포스 등번호 45번
팀 창단[2] 스티브 로저스
(1973~1985)
존 칸델라리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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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teve Rogers.jpg
스티브 로저스
Steve Rogers
본명 스티븐 더글라스 로저스
Stephen Douglas Rogers
출생 1949년 10월 26일 ([age(1949-10-26)]세)
미주리 주 제퍼슨시티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글렌데일 고등학교 - 털사 대학교
신체 188cm / 79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7년 드래프트 60라운드 (전체 925번, NYY)
1971년 2차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4번, MON)
소속팀 몬트리올 엑스포스 (1973~1985)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2.2.1. 1973~1977 시즌2.2.2. 1978~1983 시즌2.2.3. 1984~1985 시즌
2.3. 방출 이후, 그리고 은퇴
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이모저모6. 연도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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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야구 선수로,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선발 투수였다.

파일:Steve Rogers 개요.jpg
몬트리올 엑스포스 - 워싱턴 내셔널스 프랜차이즈 통산 투수 WAR, 선발 출장, 완투, 완봉, 승리, 이닝 등 누적 기록에서 1위를 점하고 있는 엑스포스 - 내셔널스의 투수이다. 별명은 "Cy(사이)."

통산 성적은 13시즌 동안 399경기 393선발 129완투 37완봉, 158승 152패 2세이브, ERA 3.17, 2837⅔이닝, 1621탈삼진, K/9 5.14, BB/9 2.78, K/BB 1.85, HR/9 0.48.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미주리 주 제퍼슨 시티에서 치과의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이후 스프링필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한 로저스는 글렌데일 고등학교(Glendale High School)에 진학하는데, 1학년 때는 그리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다가 2학년 후반기부터 제 실력을 찾으며 팀을 주 대회 준결승까지 올려놓는 등 활약한다. 이런 그의 활약을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 톰 그린웨이드(Tom Greenwade)[3]가 눈여겨보았고, 1967년 드래프트에서 로저스를 60라운드 전체 925번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로저스의 아버지는 그린웨이드에게 '아직 프로 무대에 설 만한 준비가 안 됐다'며 지명을 완곡히 거절했고, 로저스 본인도 이에 동의하면서 털사 대학교로 진학한다. 이 털사 대학교로의 진학에는 그린웨이드가 당시 털사 대학교 야구부의 코치였던 진 셸(Gene Shell)에게 로저스를 추천해준 것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정작 진 셸 코치가 로저스를 구경하러 온 날에는 로저스가 부진한 투구를 보이면서 그린웨이드에게 전화를 걸어 '사람 제대로 본 거 맞느냐'고 따졌다.

이런 진 셸 코치의 걱정과는 다르게, 로저스는 털사 대학교에 들어온 후 나날이 실력이 늘면서 팀을 대학 리그 준우승으로 이끌며 좋은 모습을 보인다. 덕분에 그의 위상은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몇 단계는 위로 올라가 있었고, 1971년 2차 신인 드래프트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1라운드 전체 4번으로 지명되어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2.2.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2.2.1. 1973~1977 시즌

입단 직후에는 1라운더의 명성에 걸맞게 바로 트리플 A에 배속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고, 첫 두 시즌은 다소 애매한 성적[4]을 거뒀지만 입단 3년차인 1973년부터 본색을 드러내며 마이너리그를 차근차근 정복해나갔고, 7월 18일 애스트로돔에서 열린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등판하며 메이저 데뷔전을 치른다. 이 경기에서 8이닝 4피안타 2실점으로 호투하며 감을 잡은 로저스는 데뷔 시즌 제대로 사고를 친다. 17경기에 선발 등판해 (7번의 완투와 3번의 완봉 포함) 134이닝 동안 ERA 1.54, 10승 5패라는 성적을 거두며 단숨에 엑스포스의 에이스로 거듭난 것.[5] 이 시즌 그가 첫 14번의 선발 등판에서 기록한 ERA 1.31은 역대 MLB에서 갓 데뷔한 투수가 첫 14번의 등판에서 거둔 가장 낮은 ERA[6]였고, 신인왕 수상도 노려봄직한 성적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게리 매튜스[7]에 밀려 아쉽게 2위에 만족해야 했다.

이렇게 혜성같이 등장한 에이스의 활약에 많은 이들이 다음 시즌엔 로저스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정작 2년차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겪으며 부진[8]했고, 여기에 팔꿈치에 뼛조각이 돌아다니던 통에 제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저스는 38경기에 선발 등판하며 253⅔이닝을 소화했지만, ERA는 전년도의 3배에 가까운 4.47에 달했고, 15승을 거두긴 했지만 무려 22패를 기록하며 리그 패전 1위의 멍에를 써야 했다. 그래도 이 시즌 커리어 첫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9] 아주 소득이 없었던 시즌은 아니었다.

그나마 1975년에는 어느 정도 원래 모습을 되찾으며 251⅔이닝을 소화함과 동시에 ERA를 3.29까지 떨어뜨렸고, 1976년에는 타격을 하다 손에 골절상을 입는 등 부상에 신음하면서도 230이닝 ERA 3.21을 기록하며 신인 시절만큼은 아니더라도 준수한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엑스포스는 워낙 약체였던 탓[10]에 승운은 없어서, 1975년에는 11승 12패로 5할 승률을 넘기지 못했고, 1976년에는 7승 17패로 또 리그 패전 1위를 먹었다.

1977년 시즌을 앞두고 엑스포스는 홈구장을 기존의 파르크 자리(Parc Jarry)에서 투수 친화적인 스타드 올랭피크(Stade Olympique)로 옮겼고[11], 로저스는 이곳에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40경기에 선발 등판해 커리어 처음이자 유일한 300이닝 이상 투구를 했고 17승 16패, ERA 3.10으로 승수에서도 드디어 에이스다운 모습을 보이며 엑스포스의 부동의 1선발로 자리매김한다.

2.2.2. 1978~1983 시즌

이어진 1978년에는 커리어 첫 2점대 ERA(2.47)을 찍으며 순항했고, 4년 만에 올스타에도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지만 그를 계속해서 괴롭혀왔던 팔꿈치 뼛조각 문제가 더 악화되고 말았고, 결국 8월 말 시즌을 조기 마감한 뒤 수술을 받으며 아쉬운 마무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부상 악령만이 아니었다. 이 시절 단장이던 찰리 폭스가 선수 기용과 관련해 불만을 표시하자[12] 선수단의 대표격이었던 로저스가 반 강제적으로 중재에 참여[13]했고, 이 과정에서 그와 언쟁을 벌이다 주먹다짐까지 가는 등 프런트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이라도 중간에서 중재를 해 줬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로저스는 감독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당시 감독이던 딕 윌리엄스는 로저스를 "팀이 잘 나가지 않는, 부담감이 없는 시기에만 최선을 다하고 정작 팀이 필요로 할 때에는 도움이 안 되는 선수"라며 '사기꾼(a froud)'이라고 비난했고, 틈만 나면 언론에 로저스의 흉을 보기 일쑤였다. 이런 성향이 잘 드러난 것이 1979년 7월 12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로, 4회 말 1사 만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로저스가 3-0 카운트에서 뜬금없이 스윙을 했다가 병살타로 이닝이 종료되는 일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로저스가 기다리라는 사인을 놓쳤다고 하자 윌리엄스는 격노해 "천하의 베이브 루스도 그냥 공을 지켜볼 때가 있었는데 네가 뭐라고 그 상황에서 스윙을 하냐"는 식으로 작심하고 비판하기도 했다.[14] 이렇게 자기를 고깝게 보는 윌리엄스 감독이 마음에 안 들기는 로저스도 마찬가지여서[15] 1979년 윌리엄스가 올해의 감독상 후보에 오르자 "만일 그가 감독상을 수상한다면 부정적인 행적으로 긍정적인 상을 받게 되는 것은 이번 일이 처음일 것"라고 디스를 할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수술 후 돌아온 로저스는 1979년 248⅔이닝에 ERA 3.00, 13승 12패를 기록하며 건재함을 보였지만, 시즌 말미인 9월 26일 지구 우승 경쟁팀[16]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를 앞두고 윌리엄스 감독이 "다른 좋은 투수를 파이리츠와의 경기에 등판시키고 싶었지만 로저스와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는 요지의 인터뷰로 로저스에게 은근한 압박을 주었고, 로저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한 채 4이닝 3실점으로 무너지며 체면을 구겨야 했다. 당연히 몬트리올 언론들은 난리가 났고, 모 언론사는 그를 두고 '패배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까기도 했다. 여기에 그 동안의 뛰어난 성적에 가려져 있었던 그의 독불장군같은 행보들이 동료 선수들의 증언[17]에 의해 속속 드러났고, 구단은 이런 그를 트레이드 매물로 올려놓는 등 야구 외적으로 바람 잘 날 없는 한 해를 보냈다.

하지만 1980년 스프링캠프에서 딕 윌리엄스 감독과 화해하며 마침내 기나긴 불화에 마침표를 찍었고, 트레이드 루머도 잦아들면서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은 로저스는 1980년 281이닝을 소화하며 리그 최다 완투인 14완투를 기록했고, ERA 2.98에 16승을 거두며 엑스포스의 에이스 자리를 탈환한다. 사이 영 상 투표에서도 1점을 얻은 건 덤. 여기에 엑스포스는 전년도에 이어 또 한 번 지구 우승 경쟁에 뛰어들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상황이었는데, 로저스는 순위 경쟁이 가장 치열했던 8월 25일부터 시즌 종료 때까지 9경기에 등판해 완투승 5개를 포함, 5승 2패에 ERA 2.18로 맹활약하며 팀이 필요로 할 때에도 도움이 되는 모습을 보이며 윌리엄스 감독의 판단이 틀렸음을 몸소 보여줬다.

이어지는 1981년에는 선수노조 파업이 진행되며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로저스는 여전히 에이스 노릇을 했고, 팀도 창단 12년 만에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그렇게 올라간 포스트시즌에서 로저스는 NLDS에서 2승, NLCS에서 1승을 거두며 에이스다운 면모를 이어갔지만, 팀의 탈락을 막기 위해 3차전 완투승 후 이틀밖에 쉬지 못하고 구원 등판한 NLCS 5차전에서 9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릭 먼데이에게 역전 솔로 홈런을 얻어맞으며 월드 시리즈행 티켓을 다저스에게 내줘야만 했다. 마침 이 홈런을 맞은 날이 월요일이었던 터라, 엑스포스 팬들은 이 날을 블루 먼데이(Blue Monday)[18]라고 기억하곤 한다. 그리고 이것이 로저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포스트시즌 경력이 되고 말았다.

포스트시즌에서 클러치 홈런을 맞은 후유증이 있지 않을까 걱정했던 이들의 우려를 뒤로 한 채, 로저스는 1982년 시즌을 자신의 커리어 하이로 만들며 그러한 우려들을 불식시킨다. 커리어 최저인 ERA 2.40을 기록하며 생애 유일한 개인 타이틀(리그 ERA 1위)을 획득했고, 역시 개인 최다인 19승을 올리며 슈퍼 에이스로 거듭났다. 여기에 올스타전이 엑스포스의 홈구장인 스타드 올랭피크에서 열리면서 올스타전에 선발 투수로 출장하는 영광을 누렸고, 사이 영 상 투표에서도 2위에 오르며 그야말로 최고의 해를 보냈다. 이어지는 1983년에도 리그 최다인 5완봉을 기록하면서 273이닝에 ERA 3.23, 17승 12패를 기록하며 여전히 자신이 엑스포스의 에이스임을 증명했다. 올스타에도 다시 한 번 선정되었고, 사이 영 상 투표에도 자신의 이름을 계속 올리며 전성기를 이어가는 듯 했다.

2.2.3. 1984~1985 시즌

하지만 이미 지난 11년 간 2630⅓이닝을 던진 그의 몸은 무리한 상태였고, 이번에는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팔꿈치가 아닌 어깨를 다치며 투수로서 치명상을 입게 된다. 1984년 어깨 부상으로 제대로 된 공을 뿌릴 수 없었던[19] 로저스는 169⅓이닝을 던지는 데 그치며 단축시즌이었던 1981년을 제외하면 1973년 이후 처음으로 200이닝 미만의 투구를 했고, BB/9도 처음으로 4를 넘기며 컨트롤까지 문제를 겪기 시작한다. ERA 상승도 당연한 수순이었다(3.23 → 4.31).

로저스는 1985년 시즌을 앞두고 명예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하지만, 이미 그의 어깨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집 나간 제구력은 돌아오지 않으면서 8경기에서 ERA 5.68에 2승만을 거두는 부진에 빠지게 된다. 결국 엑스포스 구단은 5월 21일 그를 방출하며 그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린다.

2.3. 방출 이후, 그리고 은퇴

엑스포스에서 방출된 후 로저스는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와 계약을 맺었으나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한 달 만에 다시 방출당했고, 그로부터 또 한 달여가 지난 뒤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며 메이저 무대 재진입을 노렸지만 이미 35세의 노장이었던 로저스에게 메이저 콜업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고, 시즌 후 은퇴를 선언하며 메이저 커리어를 끝마친다.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대학 시절의 전공을 살려[20] 털사로 돌아와 석유 회사를 차렸지만, 하필 이 시기는 2차 오일 쇼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가 역대급 석유 치킨 게임을 벌이던 1986년이였다. 안 그래도 고점을 찍고 내려와 있던 유가가 바닥을 찍을 기세로 떨어지는 탓에, 결국 문자 그대로 쫄딱 망해버렸다.

그렇게 야인으로 지내던 그에게, 1981년 선수 노조 파업 당시 그의 활동을 눈여겨봤던[21] MLB 선수 노조가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1987년부터 선수 연금 문제 관련 외부 컨설턴트로서 일하며 야구계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이후 1999년부터는 아예 선수 노조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2012년부터는 노조 이사 특별 보좌관으로 일하며 선수들의 권익 신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

한편 1991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자로 올랐으나 1표도 못 받고 떨어졌다. 안 그래도 누적 성적 등이 딸려서 표 받기가 쉽지 않았는데 특유의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기자들과도 그닥 사이가 안 좋았으니 표가 나올 리가 없다.
파일:Steve Rogers After Retires.jpg
2018년 3월 27일 스타드 올랭피크에서 열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토론토 블루제이스 간의 시범경기 전 엑스포스 기념 행사에 참석한 로저스[22]
그래도 2005년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나름대로 공로를 인정받았고, 엑스포스 관련 행사가 있을 때면 레전드 대우를 받으며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4. 플레이 스타일

현역 시절 투구 영상.
부드럽고 간결한 투구폼을 바탕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전형적인 이닝 이터 유형의 투수였다. 통산 399경기에 등판해 2,837⅔이닝을 소화했는데, 경기당 소화 이닝이 7.11이닝에 달할 정도로 끝내주는 이닝 소화력을 가지고 있었고, 완투 능력 또한 대단해(통산 129완투)[23] 거의 매 해 두 자릿수 완투를 거르지 않고 달성했을 정도로 팀 입장에서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카드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이닝 이팅을 1970년대에는 3일 휴식(4일이 아니다!)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기록했다는 점. 이런 안정적인 경기 운영이 가능했던 데에는 준수한 제구력(통산 BB/9 2.78) 또한 한 몫 했다.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은 시속 90마일 정도[24]로, 무브먼트가 좋은 유형에 속해 삼진은 많이 잡지 못하더라도(통산 K/9 5.14) 타자들의 범타를 유도해내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로저스의 진짜 주 무기는 예리하게 꺾이는 슬라이더로, 비록 동시대에 활약했던 스티브 칼튼의 그것만큼은 아니었지만 뉴욕 메츠의 전설 톰 시버가 그의 슬라이더를 보고 'MLB에서 가장 강력한 구종 중 하나(one of the most devastating)'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이외에도 커브체인지업도 자주 구사했는데, 이들 역시 평균급 이상 피치는 되는 나름대로 팔색조 유형의 투수이기도 했다.

또한 포스트시즌에서도 굉장히 강했다. 비록 소속팀이었던 엑스포스가 강팀은 아니었던 탓에 포스트시즌 무대는 1981년 딱 한 번 경험해봤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NLDS에서는 1차전 8⅔이닝 1실점, 5차전 9이닝 무실점 완봉승으로 2승을 거두며 맹활약했고, 이어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NLCS에서도 3차전에서 9이닝 1실점 완투승으로 에이스의 품격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이틀 휴식 후 구원 등판해 뼈아픈 역전 홈런을 맞았다.

5. 이모저모

  • 유난히 타선의 지원을 못 받는 선수이기도 했다. 통산 393번의 선발 등판에서 타선이 3점 이하로 득점 지원을 한 경기가 절반이 넘는 207경기(52.7%)에 이를 정도. 때문에 통산 ERA는 3.17로 굉장히 준수하지만 승수는 158승에 그쳤고, 통산 승률도 5할을 겨우 넘기는 수준에 그쳤다. 이건 엑스포스의 팀 컬러 자체가 강력한 타선을 토대로 한 공격야구보다는 홈구장의 넓은 외야를 활용한 물 샐 틈 없는 투수진과 발야구 등으로 점수를 짜내는 스몰볼에 가까웠던 탓도 있다.[26] MLB에서 이 정도로 타선 지원을 못 받은 선수는 '킹 펠릭스' 펠릭스 에르난데스가 그나마 명함을 내밀만한 정도.
  • 메이저 리그에 데뷔 시즌이던 1973년, 메이저 콜업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캐나다로 향하던 도중 국경지대에서 한 세관원을 만났는데, 이 세관원이 워낙 원칙주의자였던 터라 그가 야구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야구선수임을 증명할 수 있는 계약 문서가 없으면 입국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고, 당연히 계약서를 가지고 다닐 리 없었던 로저스는 미국으로 차를 돌려야 했던 일화가 있다. 다행히 미국 측 세관 직원의 도움으로 다음 날 입국에 성공했다고.
  • 선수 경력 문단에 적혀있는 감독/단장과 벌였던 화끈한 설전에서 알 수 있듯이 꽤나 직설적인 성격의 소유자로도 유명했다. 다만 이런 직설적인 화법 탓에 지역 기자들 사이에서 그다지 평은 좋지 못했기에, 은퇴 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몬트리올 지역 기자단들에게마저 외면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 직설적인 성격에 걸맞게 자존심 또한 강한 편[27]이었는데, 이게 프로 초년병 시절에는 좀 안 좋은 방향으로 작용해서 마이너 시절 구단이 자신을 바로 메이저로 보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28] 약간 태업성 플레이를 하다가 승격 테스트 경기에서 깨지고 나서야 마음을 독하게 먹기도 했고, 메이저 입성 후에도 마운드 위에서 플레이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한 탓에 팀 동료들의 심기를 건드린 적도 있었다. 본인도 이 시절의 행동이 다소 후회스러웠는지 은퇴 후 인터뷰에서 "만일 내가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더 나은 모습을 보였을 것"이라며 시간을 돌려서 바꾸고 싶은 게 있다면 그 시절의 자신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도 감독과의 불화를 겪으며 호되게 당하고 나서는 많이 누그러져서 철이 들었다.

6. 연도별 기록

파일:MLB 로고.svg 스티브 로저스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W L S HLD IP ERA H HR BB HBP SO WHIP ERA+ fWAR bWAR
1973 MON 17 10 5 0 0 134 1.54 93 5 49 1 64 1.060 245 2.6 5.0
1974 38 15 22 0 0 253⅔ 4.47 255 19 80 5 154 1.321 86 4.0 0.2
1975 35 11 12 0 0 251⅔ 3.29 248 13 88 4 137 1.335 117 4.2 4.5
1976 33 7 17 1 0 230 3.21 212 10 69 4 150 1.222 116 4.8 4.7
1977 40 17 16 0 0 301⅔ 3.10 272 16 81 5 206 1.170 123 7.0 4.7
1978 30 13 10 1 0 219 2.47 186 12 64 2 126 1.142 143 3.7 4.9
1979 37 13 12 0 0 248⅔ 3.00 232 14 78 4 143 1.247 122 4.2 3.8
1980 37 16 11 0 0 281 2.98 247 16 85 3 147 1.181 120 4.0 5.9
1981 22 12 8 0 0 160⅔ 3.42 149 7 41 2 87 1.183 102 3.0 1.4
1982 35 19 8 0 0 277 2.40 245 12 65 6 179 1.119 152 6.4 7.6
1983 36 17 12 0 0 273 3.23 258 14 78 5 146 1.231 110 4.9 3.6
1984 31 6 15 0 0 169⅓ 4.31 171 12 78 2 64 1.470 80 0.5 -0.8
1985 8 2 4 0 0 38 5.68 51 1 20 0 18 1.868 61 0.4 -0.4
MLB 통산
(13시즌)
399 158 152 2 0 2837⅔ 3.17 2619 151 876 43 1621 1.232 116 49.8 45.1


[1] 1973년 7월 18일~1973년 9월 25일 간 기록.[2] 로저스가 45번을 달기 전까지는 45번을 사용하는 선수가 없었다.[3] 미키 맨틀을 발굴하는 데 일조했던 사람이다.[4] 사실 ERA는 각각 3.97, 4.08로 준수했으나 팀 상태가 막장(...)이었던 관계로(첫 시즌 44승 96패/두 번째 시즌 56승 88패) 각각 3승, 2승밖에 거두지 못했다.[5] 특히 데뷔 첫 승을 그 스티브 칼튼을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기록했다.[6] 종전 기록은 1940년~1941년 뉴욕 양키스타이니 본햄이 기록한 1.67.[7]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서의 먹튀 행각으로 유명한 게리 매튜스 주니어의 아버지.[8] 사실 5월 초까지만 해도 소포모어 징크스같은 건 없다는 듯이 7경기에서 완투승 5번을 포함 6승 1패 ERA 3.20으로 좋은 활약을 했으나, 5월 18일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 3이닝 6실점으로 부진한 뒤로 영 감을 찾지 못하며 흔들렸다.[9] 다만 경기에 출장하지는 못했다.[10] 특히 1976년에는 무려 107패를 당했다. 이 시즌은 로저스가 100패 이상을 경험한 유일한 시즌이기도.[11] 다만 엑스포스 입장에서는 스타드 올랭피크로 옮기고 싶어서 옮긴 것은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12]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크리스 스파이어의 플레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13] 로저스 본인은 이 논쟁에 휘말린 것 자체가 영 내키지 않았는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이 일에 휘말린 게 선수단 대표로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동료 선수가 고통받고 있는 상황이라 개입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14] 윌리엄스는 이 사건이 어지간히 기억에 남았는지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서 로저스의 그 타격을 가장 어리석고 이기적이었던 플레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15] 로저스 본인이 회상하기를 자신과 윌리엄스 감독은 물과 불같은 관계였다고 할 정도였다. 즉 대놓고 상극.[16] 경기 전까지 파이리츠와의 경기 차는 0.5경기차로 이 경기만 잡는다면 지구 우승을 노려볼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17] 팀 동료들은 당시 그를 '너무 완벽주의 성향이 강했다', '모든 투구를 자기의 생사가 달린 듯 대했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플레이가 나오면 얼굴을 찡그리거나 한숨을 쉬기 일쑤였다'라고 촌평했다.[18] 'Blue'는 '슬픔'을 뜻하기도 한다. 반면 다저스 팬들도 이 날을 블루 먼데이라고 부르는데, 다름 아닌 다저스의 상징색이 푸른(=Blue)색이기 때문.[19] 패스트볼의 평균 구속이 4마일이나 줄어버렸다.[20] 석유공학과(Petroleum Engineering)를 졸업했다. 애초에 로저스가 졸업한 털사 대학교가 석유공학 분야로는 알아주는 학교인지라... 참고로 한국에서는 석유공학과는 워낙 수요가 적어 화학공학과에 통합하여 편제되지만, 미국에서는 이 둘을 분리하여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21] 파업 당시 로저스는 MLB 사무국과의 협상에 직접 참여한 4명의 선수 중 하나였다.[22]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와 드니 코드르 前 몬트리올 시장(임기 2013년~2017년)이 추진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프리시즌 2연전 경기가 2014년부터 치러지고 있는데, 이 행사에 몬트리올 엑스포스 출신 선수들이 시구자로 초청된다.[23] 단순 계산으로 3경기 중 1경기 꼴로 완투를 했다고 보면 된다.[24] 다만 이것은 1984년의 어깨 부상 이전에 한하며, 어깨 부상 이후로는 평균 구속이 4마일 정도 떨어졌다.[25] 기사 내용 자체도 MLB 선수 노조에서 연금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로저스가 1980년 이전에 은퇴한 선수들의 문제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고 있다며 까는 논조이다.[26] 몬트리올 엑스포스는 스타드 자리, 스타드 올랭피크의 광활한 외야 때문에 대대로 안드레 도슨, 래리 워커, 블라디미르 게레로 같은 툴플레이어나 팀 레인스, 마퀴스 그리솜 같은 발빠른 선수들을 선호했다.[27] 이런 그의 모습과 마운드에서의 싸움닭 기질을 가지고 지역 매체는 그를 '불독'에 비유하기도 했다.[28] 본인은 다 준비가 되어있다고 느꼈는데 계속 마이너에만 놔두는 구단이 다소 섭섭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