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 때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건너가 1년 반 정도 생활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냈다. 이후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귀국하여 서울용산초등학교[11]에 입학한 후 5학년까지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완전히 이주했다.
▲ 어린 시절 모습
이후 코헹가 초등학교(Cahuenga Elementary School), 존 버로우스 중학교(John Burroughs Middle School), 다우니 고등학교(Downey High School)를 졸업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초등학생 때 피아노를 시작했고, 중학교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배우며 음악적인 감각을 키웠다. 타고난 음성이 맑고 고와서[12] 1986년부터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KBS 어린이 합창단에서 소프라노 파트로 활동했다. 이후 1987년 미국으로 완전히 이주한 후에는 Angels 합창단에서 활동했다.
1990년부터 자신의 신체적 장점을 살려 미국에서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시아계 모델이 드물어서 희소성이 있었고, 가수 데뷔를 위한 이미지 연출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활동했다고 한다. Bean X Model Agency에 소속되어 'Milo Print' CF 모델과 의류 브랜드 GAP(갭), ESPRIT(에스프리), Levi's(리바이스), Calvin Klein(캘빈 클라인) 등의 모델로 활동했다.
▲ 미국에서의 모델 활동 당시 프로필 사진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3년, 미국로스앤젤레스에서 미주 중앙일보, 미주 한인 방송국, 한국 음반사가 주최한 공개 오디션에서 1,000:1[13]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당시 성적 우수자로 고등학교 조기 졸업 예정이었고 이미 UC 버클리 심리학과에 고교 성적 우수자 특례 입학을 앞두고 있었으나, 오디션 합격을 이유로 대학 진학은 잠시 미루고 고교 졸업 직후인 1993년12월에 가족의 품을 떠나 홀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우여곡절[14] 끝에 소속사 옴니뮤직에 발탁되어 작곡가 안진우에게 4개월 동안 노래 지도를 받은 뒤, 3개월 동안 초스피드 녹음을 마치고[15]1994년10월, 1집 앨범 《Seo Ji Won》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12월에 SBS 프로그램 <순간포착 당신이 특종>[16]으로 데뷔했다.
▲ SBS <순간포착 당신이 특종> 데뷔 무대
한국에서 잡지 모델로 활동하는 동안 이미 팬들이 있었지만 정식 데뷔 후, 당시에는 비교적 드물었던 10대 가수[17]라는 점이 이목을 끌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팬덤이 형성되었다. 또한 방송 데뷔 불과 3개월 만에 SBS 예능 프로그램 <점프챔프>[18]의 메인 MC를 맡았고, 프로그램 내 미니드라마 '남녀공학'과 '라이벌'에서 남자 주인공 역할로 연기도 선보였다. 이 외에도 KBS <출발 토요 대행진>, <토요일 7시가 좋다> 등 여러 방송사 프로그램의 고정 진행을 맡았으며, 가수로서 노래뿐 아니라 작사, 작곡, 모델, MC, 연기 등 다방면에 뛰어난 면모를 보이며 단숨에 인기 스타 대열에 올랐다.
이러한 분위기를 증명하듯 데뷔곡인 <또 다른 시작>은 1995년 한 해 동안 젊은 층을 중심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는데, KBS <가요톱10> 9위, SBS <TV가요 20>에서는 6위까지 랭크됐다. 역대급으로 순위 경쟁이 치열했던 시기[19]의 데뷔곡임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
1995년 늦가을 발매 예정이었던 2집 앨범은 건강 문제로 한 번, 음반 심의 기간이 길어지며 또 한 번 발매가 늦어졌고, 결국 2집 앨범 발표는 해를 넘겨 1996년 1월 중순으로 미뤄졌다.
그러나 1996년 1월 1일,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돌연 세상을 떠나면서 2집 앨범은 유작이 되었다. 정재형이 작곡한 2집 앨범 타이틀곡인 <내 눈물 모아>는 KBS <가요톱10>,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 SBS <TV가요 20> 등 방송 3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며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명곡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1위의 주인공으로서 피날레 무대를 장식해야 할 가수는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 노래할 수 없었기에 마무리 공연은 뮤직비디오로 대체되었다.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1위를 했을 때는 어머니와 동료가 대리 수상하였고, KBS <가요톱10>에서 1위를 했을 때는 정재형이 속해 있는 그룹 베이시스가 대신 공연했다.
그의 활동 당시부터 사후까지 소속사 옴니뮤직의 행실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자세한 사항은 후술하는 문서에서 참고.
2021년, 옴니뮤직 사장은 서지원의 유가족과 아무런 협의도 없이 무단으로 그의 1, 2집 앨범을 LP와 CD 형식으로 재발매했다. 일각에서는 가요계의 도의를 벗어난 행동이라며 비판하고 있다.[20]
"당시 쏟아져 나오던 아이돌과 달리 가수와 뮤지션의 경계에 있던 친구… 노래 전반의 곡 해석이 탁월해 정말 좋은 노래구나…. 하고 감탄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가수가 노래할 때 기교에만 신경을 쓰면 노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치는데, 서지원은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마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유영석-
남자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의 맑고 고운 미성, 화려한 기교 없이 담백하게 노래하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몰입하게 하는 뛰어난 표현력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2집 앨범부터 보컬의 변화와 함께 느껴지는 성숙한 남자의 모습과 1집 앨범에서 보여주었던 치기 어린 소년의 감성이 공존하는 것 또한 그의 음악적 매력이다.
<내 눈물 모아>의 마치 울고 난 뒤 부른 듯한 애절한 보컬은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의 노래를 들어도 쉽게 감정에 동화되게 할 정도로 곡의 감정을 한층 더 고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노래할 때 곡의 분위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목소리에 담아내는 표현력이 탁월했다고 평가받는다.
글쓰기도 좋아해서 본인의 앨범 수록곡 작사도 했는데 <이별만은 아름답도록>, <너와 함께 할 거야>, <사랑, 그리고 무관심(공동)>의 가사를 썼다. 특히 <이별만은 아름답도록>은 곡은 같고 가사만 다른 버전인 <사진의 미소>가 있는데 그가 작사한 버전 또한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활동 당시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나이와 앳된 외모만 보고 음악을 들어보기도 전에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평가절하하는 분위기가 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여 '서지원' 하면 슬픈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그는 밝은 성격이 인기 요인으로 꼽혔을 정도로 활달했으며 한편으로는 나이에 비해 사려깊고 성숙했다고 한다. 또한 주변 사람들을 세심하게 잘 챙겨 동료들에게도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본인이 밝힌 자신의 성격
서지원: 활발하고 사교성이 좋으며 솔직하고, 대담한 편이다. 이런 성격이 좋게 말하면 장점이고 나쁘게 말하면 수다스럽고, 생각 없고, 푼수 같다는 단점으로 바뀐다. 이왕이면 많은 분들이 이런 나의 특성을 좋게 봐주셨으면… -뮤직라이프 1995년 5월호 「스타탐험 귀여운 율동, 깔끔한 이미지로 인기 상종가 서지원 ⓟ143」-
성격: 활발하고 명랑한 편이에요. 사람들은 제 외모를 보고 여성적이고 섬세할 거라고 상상하시는데 다 내숭이니까 속지 마세요. -스타채널 1995년호 「프라이버시 A to Z」-
기자가 본 서지원
나이에 비해 침착하고 어른스런 성격을 지닌 탓에 같은 또래들로부터는 오히려 '건방지다'는 소릴 듣기도 한다는 서지원. 그래서 그는 토크쇼에 나가면 일부러 오버도 하고 보다 활달하고 격의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쓴다. -노래마당 5월호 「여림 속에 강인함 간직한 보이스카웃 ⓟ152」-
서지원은 외향적이고 거침이 없다. 천성적으로 밝고 쾌활한 서지원은 미국에서 중・고교를 다니던 시절 학교행사가 있으면 여러 차례 사회를 맡아 봤을 정도로 발표력이 뛰어나다. 이런 점이 자기 표현력이 강한 신세대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요소이다. 또한 미국에서 모델 활동을 하며 사교성을 체득해서인지 어느 자리에서든 당당하고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인다. -TV 가이드 1995-06-01 「이름 같은 가수: 서지원·박지원 매력탐구 핸섬가이 vs 캔디 보이 ⓟ20」-
주변인이 본 서지원
피아노 두드리면서 노래도 부르고 어렸을 땐 목소리가 참 예뻤거든요. 부끄러워하지도 않아요. 나서는 것도 좋아하죠. 보여줄 수 있는 거,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은 뭐든지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지원이를 무지 사랑했죠. -MBC 라이프 <히스토리 후> 방송 中 서지원의 아버지 인터뷰-
처음 지원이를 알게 된 건 단순히 곡을 주고받는 작곡자, 가수로서지만 그전에 지원이가 만든 Demo Tape를 먼저 건네받았었습니다. 물론 마음에 들어서 그 후로 곡을 주게 되었고요. 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 사진보다도 훨씬 앳된 티가 나서 조금은 걱정이 됐습니다. 그렇게 되면 노래 실력보다는 용모에 호감을 느끼는 어린 친구들에게만 반응이 전해져 실제 가창력이 가려질 우려가 있으니까요. (예상이 조금은 맞았음) 지원이 팬 여러분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이상입니다. 녹음과정을 지나오며 특히 이번 제 곡 'I miss you'를 녹음하면서 1집 때와는 또 다른 커다란 매력을 보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느낌인지, 그 사이 노력을 한 결과인지도 궁금했고요. 물론 두 가지 이유가 다라고 결국 생각을 했습니다. 하여튼 R&B나 SOUL에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그 바쁜 와중에도 스스로와의 경쟁에도 게을러지지 않은 모습이 기특할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만나 그때의 겸손하고 예의 바른 선한 모습이 바래지 않아 기뻤습니다. 그러기 어려운 곳이거든요. 그 연예계란 곳이. 그 몇 가지만 봐도 지원의 앞날을 짐작하겠죠. (중략) -팬클럽 푸르매 회지 中 오태호 인터뷰-
지원이는 적극적이고 사교성도 밝거든요. 또 가수로서도, 하나의 인간으로서도 잘 해내잖아요. 하지만 너무 여러 사람들과 친하니까 자기 관리를 못할 때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그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다 챙겨주다가 자기 일은 언제 해요? 가뜩이나 몸도 안 좋은데 정말 걱정이에요. 나는 지원이가 최소한 나하고 있을 때만이라도 아무 근심 없이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Premium)View 1995년 8월호 「따로 또 같이: 강태석 & 서지원의 신세대식 우정나누기 ⓟ216」 中 강태석 인터뷰-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인기가 많았으며 특히 소녀 팬들이 많았다.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예쁘장한 얼굴과 선한 눈망울은 소녀 팬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고, 183cm의 큰 키와 모델 체형은 수수한 무대 의상을 입고 댄서들 사이에 있어도 쉽게 눈에 띄었다.
얼굴엔 아직도 유아기적 모습이 어려 있지만 목소리는 깊고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멀뚱하게 키만 큰 남동생 같은 서지원. …(중략) -노래동네 1994년 12월호 「노래동네 새 얼굴, 미국생활 청산하고 '또 다른 시작' 감행한 귀염둥이 서지원 ⓟ150」-
서지원은 '캔디 보이'를 연상케한다. 신세대가 선호하는 외적 조건에 딱 맞아떨어지는 인물이다. '머리가 문 틈에 들어가야 한다'는 요즘 세대의 신체사이즈 규격에 걸맞게 얼굴은 주먹 만하고, 키는 크고, 다리는 롱~롱 다리이다. 미남형이기보다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귀여운 마스크로 사랑을 받고 있다. -TV 가이드 1995-06-01 「이름 같은 가수: 서지원·박지원 매력탐구 핸섬가이 vs 캔디보이 ⓟ20」-
1994년 정식 데뷔 후 빠르게 팬덤이 형성됐는데 주로 그와 또래인 중・고등학생 팬이 많았으며, 공식 팬클럽 창단식은 1995년 7월 16일에 열렸다. 팬클럽 이름은 만화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남자 주인공 서지원의 또 다른 이름인 '푸르매'로 지었다.
그의 사후에도 팬클럽은 회지를 발행하고 영상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갔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온라인으로 옮겨갔다. 활동 시기도 2년 남짓으로 길지 않고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이 지지를 보내는 당시의 팬들과, 그의 사후에 인터넷 매체 등으로 그를 알게 된 새로운 팬들이 어우러져 여전히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여러분들이 항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배려하는 맘을 가진 따뜻한 사람이길 바라요. 살면서 지쳐 있을 땐 그만큼 큰 위로는 없으니까요.
미국에서 살다 왔으니 더 튀는 것이 아니라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TV 프로그램에서 튀는 제스처를 요구해도 되도록 차분하려고 노력해요. 자칫 건방져 보일까 걱정이 돼서요. -경향신문 1995년 3월 17일 「가수 되려고 故國에 돌아왔어요 가수 서지원」-
음악이란 그런 것 같아요. 듣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이 하나가 되어 느낄 수 있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는 도구 같아요.
제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X세대니 신세대니 하는 말이에요. 단지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모든 사람을 개성 없는 하나의 집단으로 정의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아요?[21]
부모님이 보고 싶을 때를 묻자, "아무리 힘이 들어도 부모님을 보고 싶거나 하지는 않아요, 정말이에요. 그런데, 정말로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함께 기뻐하고 싶거든요." 기쁜 일을 함께 하고 싶다는 서지원씨의 맑은 심성이 도드라진다. -에꼴 1995년 -월호 「혼자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전화' ⓟ131」-
처음 데뷔할 때는 연예계를 얕봤던 것 같아요. 나 혼자만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죠. 하지만 생각지도 않았던 부분에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더라구요. 재미있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면서 항상 배워야 한다는 것을 실감나게 느끼죠. -(Premium)View 1995년 3월호 「남자의 방 훔쳐보기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귀염둥이의 밀실 탐험: 서지원 ⓟ230」-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다 X세대는 아니죠. 저는 무슨 세대로 묶이기보다 그냥 제 나이에 맞춰 살려고 해요. -스타채널 1995년 4월 11일 「프라이버시 A to Z: 가수 서지원 ⓟ24」-
매사에 최선을 다하되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자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수긍할 것은 수긍하더라도 자기 주관이 뚜렷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연예활동을 하면서는 자존심을 잃으면 절대 안 될 것 같다. -MUSIC LIFE 1995년 5월호 「서지원: A to Z으로 알아본 스타 매력탐험 ⓟ140」-
누구와 약속을 하면 늘 일찍 나가서 기다리는 편이에요. 그런데 만약 친구가 늦는다. 그럼 걔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저랑 만날 때에는 늦게 나타나려면 차라리 안 나오는 게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에요. -스타채널 1995년 4월 11일 「프라이버시 A to Z: 가수 서지원 ⓟ24」-
1집을 만들 때는 떨리는 마음만으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려서부터 꾸어온 꿈을 마침내 이루었다는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오는 동안 이 세상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슬픈 이야기와 노래들이 있으며 그것과 비교해서 내가 불러온 노래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집을 만들면서 내가 가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고 지금은 그 결과를 조심스레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항상 날 사랑해주는 모든 이에게 따뜻한 음악을 선사하는 가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스타채널 1995년 12월 16일 「스타 줌-인: 2집 앨범 준비 서지원 ⓟ54」-
영혼이 깃든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주로 10대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는데 한 세대에 편중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영혼이 깃든 음악으로 폭넓은 팬을 갖고 싶습니다. 혼자 좋아하는 음악은 생명이 없으므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가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톱10 「노래 위해 태평양 횡단해 온 서지원 ⓟ130」-
이름을 밝혀주지 않아서 슬비라고 부르는 거야. 너와 푸르매 친구들, 그리고 날 아껴주는 귀여운 숙녀에겐 슬비[22]라고 부르고 싶어. 왜냐구? 내가 서지원이니까 -팬클럽 회지 속 서지원이 쓴 편지 中-[23]
고등학교 1학년 때 서부의 끝인 LA에서 동부의 끝인 뉴욕까지 혼자 로드트립을 떠났는데, 끝까지 못 가고 중간 지점인 텍사스에서 돌아왔던 적이 있다. 돈도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낯선 황야를 혼자 지나가다 보니 외롭고, 무섭고, 사고[26]라도 나면 어쩌나 점점 걱정되어 결국 중간에 돌아왔다고 한다.
100m를 11.8초에 뛰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인생 경험이라 생각하고 햄버거 가게, 세차장, 통신회사 등 다양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한다.[27]
팬들을 세심하게 잘 챙겼다. 몇 시간 동안 방송 시작을 기다리던 팬들을 위해 "얘들아... 배고프지? 이거 먹어."라며 품 안에 넣어온 과자를 나눠준 적이 있으며, 녹화장에서 스태프에게 카메라를 빼앗길 뻔한 팬에게 "이리 줘... 내가 갖구 있다가 이따가 줄게…."라며 카메라를 맡아줬던 일화가 있다.
만약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미국에서 계속 공부해 심리학자나 비즈니스 사업가[29]가 됐을 것 같다고 밝혔다.
원색 계열 색을 좋아했으며 좋아하는 색은 노란색이었다.
귀걸이, 반지, 목걸이 등 다양한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귀걸이를 착용하는 남자가 드물었던 1995년도 당시에 이미 귀걸이에다 귓바퀴 피어싱도 하고 다녔다. 이것이 눈에 띄었는지 그가 실린 기사에는 귀걸이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별난 가수 서지원, 귀걸이 4개 '뉴 패션' 연출
서지원의 왼쪽 귀를 살펴보면 귓불에 있는 세 개의 구멍 말고도 특이하게도 위쪽 부분에까지 한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파격적인 패션을 과시하는 여타의 연예인도 감히 생각해내지 못한 도합 네 개의 귀걸이라는 '뉴 패션'을 구사하고 있는 것.
'미국에서 90년부터 모델 일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귀걸이를 했어요. 위쪽 부분까지 뚫은 건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걸 함으로써 돋보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신기해해요' 간혹 쇼 프로그램 출연 시 보수적인 방송사에서 '네 개나 되는 귀걸이 문제'를 제기할 경우 얼른 빼기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자랑스럽다는 게 서지원의 솔직한 마음이다.
잘 때 두건을 쓰고 자야 잠이 잘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일어나 보면 벗겨져 있었다고 한다.
향수를 즐겨 사용했고 다양한 향수를 수집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향수는 캘빈 클라인의 CK ONE, 랄프 로렌, Samba Skin Eau de Toilette Spray for Men, 다비도프 쿨 워터 포 맨, 폴로 스포츠[30]였다.
믿거나 말거나,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IQ가 183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잰 결과라고 한다.
질문: 아이큐가 183이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지원: 그건 미국에서 고등학교 때 심리학 시간에 잰 결과예요. 물론 찍기도 많이 했지만... 한국이랑 기준이 같은지는 잘 모르겠구요.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냥 결과는 그렇게 나왔어요.
예명인 서지원은 이미라가 그린 순정만화의 남자 주인공 이름에 영감을 얻어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미라 작가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가 연재되고 있던 저학년 타겟 순정지 《나나》에서 이미라와 함께하는 대담 형식 인터뷰가 기획되기도 했다.
▲ 이미라 작가와 함께 진행된 인터뷰
1집 활동 당시에 소녀 팬들 중에서도 특히 가깝게 지냈던 여학생들 몇 명에게 밥을 사준 적이 있었는데, 다 같이 밥을 먹던 중 두부조림을 집었더니 그 아래에 죽은 바퀴벌레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본 팬들은 기겁하며 난리를 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괜찮아, 이거 먹는다고 안 죽어.'라고 하면서 태연하게 그 두부를 계속 먹어 팬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소탈하고 무던한 성격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듯하다.
1995년 10월 25일자 가족오락관에 출연하여 2집 앨범을 준비 중이라면서 기대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개월여 후에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방송사 중에서도 유독 SBS 프로그램에 많이 출연했는데 예능 프로그램 <점프챔프>의 메인 MC를 맡았던 것[34]은 물론,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 <기쁜 우리 토요일>, <좋은 친구들>에도 자주 출연했다. 당시 <좋은 친구들>의 코너 중 하나였던 '사랑학 개론'에 출연했었는데, 사망 한 달 전이었던 1995년 12월에 미리 촬영된 에피소드가 사후에 공개되었다.[35]
▲ 생전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
정재형은 JTBC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에 출연하여 <내 눈물 모아>를 녹음할 당시 후렴구에 나오는 '내→게↘로↑↘↗↘~ Ho↗↘'의 가성은 서지원이 가성을 내지 못해서 자신이 대신 부른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가성이 고와지는 데는 타고난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가성을 위한 발성법을 따로 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한데, 실제로 그의 노래를 들어보면 가성으로 넘어가는 부분에서도 음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편이다.
한 잡지 인터뷰에서 데뷔 앨범을 준비하며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아 가성을 내는 데 애를 먹었고, 방음 시설이 미비한 곳에서 연습하다가 주민의 신고로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풀려났던 경험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로도 가성을 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 고생한 듯하나, 후에 녹음한 다른 곡 <그때가 좋았어>에서는 결국 가성을 제대로 낼 수 있게 됐다.
가수 김수근의 데뷔곡인 <어떤 약속>은 원래 박선주가 서지원에게 주려고 만들었던 곡이었고, 그가 부르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김수근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tvN <응답하라 1994> 16화에서 1996년 5월 KBS <가요톱10> 자료화면으로 출연했으며 성동일, 이일화, 성나정, 쓰레기 모두 안타까움에 눈물을 글썽였다.
▲ tvN <응답하라 1994> 16화 방영 장면
2015년 9월 28일 방송된 SBS 추석특집 프로그램 <심폐소생송>에서 서지원과 생전 절친했던 작곡가 박선주가 그의 2집 앨범 수록곡이자 그와의 듀엣곡인 <76-70=♡>의 심폐소생을 의뢰하는 작곡가로 출연했다.[36] 또 생전 그와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절친한 사이였던 강태석[37]도 오랜만에 방송에 출연하여 그와의 추억을 나눴다.
25주기를 맞아 그의 유가족과 공식 팬클럽이 함께 뜻을 모아 한 달간 추모 광고를 진행했다.
아날로그 방송 시절에 활동했던 가수여서 2024년 현재 방송사 홈페이지에서는 방송 출연 영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방송사 측에서 아예 폐기하여 영영 볼 수 없게 된 자료도 많다.
팬들의 요청으로 방송사 유튜브 채널에서 그가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영상을 종종 올려주고 있지만 아직은 개수가 많지 않다. 팬들이 녹화본으로 보관했다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은 대부분 저화질이어서, 활동 당시 영상을 고화질로 보고 싶다면 직접 각 방송사에 문의하여 DVD를 구매한 후 시청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단, 구매를 원하는 프로그램 관련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38]해당 블로그에 자세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으니 DVD 구매를 원할 때 참고하면 된다. DVD 구매 가격이 부담된다면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 열람실에서 일부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방법도 있다.[39]
[1] "원래 제 이름은 박진원이었대요. 근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길을 가시다가 점쟁이한테 애가 있는데 점 좀 봐달라고 하셨대요. 그랬더니 점쟁이가 혹시 아들 아니냐고 그러더래요. 아버지는 신기해하면서 맞다고 했더니 이름을 박병철로 바꾸라고 하셔서 호적에는 박병철로 올리셨대요." -1995년 MUSIC LIFE 7월호 인터뷰 내용 中 P.194-[2] 미국에서 쓰던 이름[3] 미국 영주권자였으나 한국에서의 가수 활동을 위해 데뷔 후 포기했다고 한다.[4] 5학년까지 마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5] 예명인 서지원은 순정만화 <인어공주를 위하여>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자 이미라의 거의 모든 시리즈에서 남자 주인공을 담당하는 캐릭터의 이름이었는데, 그가 예명을 지을 당시 이미라의 만화를 재미있게 보았던 것을 떠올려 서지원으로 지었다고 한다. 이 만화 속 서지원의 또 다른 이름이 푸르매여서 그 역시 푸르매로 불리기도 했으며, 팬클럽 이름도 푸르매였다.[6] 마른 체형 때문에[7] 단순해 보이는 성격이라서[8] 키가 큰 편이어서[9] 노래할 때 얼굴이 잘 빨개져서[10]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만 18세 이전에 부모를 따라 이민 와 영주권자나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세대[11] 그가 재학할 당시에는 용산국민학교였다.[12] 어머니가 결혼 전 서울시립합창단에서 활동했는데 그의 맑은 음색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13] 정확히는 989:1[14]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는 문서에서 참조[15] 당시에는 미국 영주권자였기에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빠듯하게 앨범을 준비했다고 한다.[16] 당시 메인 MC는 이수만이었으며, 서지원은 박진영과 함께 보조 MC로 출연했다.[17] 물론 당시에도 10대의 나이에 연예 활동을 했던 가수들은 있었지만, 지금과는 달리 매우 드문 편이었다. 당시 최고 인기 스타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경우에도 서태지와 양현석은 20대 초반, 이주노는 20대 중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젊은 가수들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기 시작했는데, 서지원이 세상을 떠난 후 데뷔한 IDOL은 두 멤버 모두 10대였다.[18] 1995년 2월 9일~10월 12일까지 방영되었으며, 당시 신인 배우였던 채림도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었다.[19] 1995년~1996년 가요계[20] 그동안 옴니뮤직 사장이 진행했던 서지원 추모 사업은 1996년 3월 한 차례의 추모 콘서트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지원의 유가족은 철저히 배제한 채, 추모 사업을 앞세워 그의 모든 법적인 권리를 가져가 이용하며 수익을 얻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21] 2020년대 들어 MZ세대, 잘파세대 등 여러 세대 개념이 등장하고 이들 간 갈등이 심해지면서 이 말도 재조명되고 있다.[22] <인어공주를 위하여> 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서지원, 여자 주인공 이름은 이슬비였다.[23] 익명으로 보낸 편지에 회지를 통해 답장을 써줬다.[24] '1995년 5월 Figaro 패션이 보이는 두 남자: 가수 박지원 VS 서지원'에서 발췌[25] 할부금은 본인이 갚았고, 한국으로 오면서 팔았다고 한다.[26] 미국은 고속도로에 있는 모텔에서 사건 사고가 잦아, 잠도 자동차 안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27] 1995년 '김현철의 디스크쇼'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직접 밝혔다.[28]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이름에서 따와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사실 닌자 거북이 등장거북들의 이름이다.[29] 워낙 사교적이고 활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사업가가 되면 잘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30] 향이 짙어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31] 한때 우리나라에서 진로그룹과 합작으로 진출하여 카스를 처음 출시했던 그 회사 맞다. 당시 '쿠어스 엑스트라 골드'가 국내에서 판매 중이었으며 쿠어스는 지금도 편의점, 대형 마트에서 판매되고 있다.[32] 선한 이미지가 비슷한 느낌인 듯하다.[33] 여담으로 도영은 서지원이 세상을 떠난 해에 태어났다.[34] 프로그램 내 미니드라마 '남녀공학', '라이벌'에서 남자 주인공 연기도 했었다.[35] 코너 시작 전, 당시 MC였던 최양락, 정원관이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명복을 빌었다.[36] 실제 방송에서 심폐소생사로 나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른 두 명은 그룹 Red Velvet의 웬디와 메이트로 활동했던 정준일이었다.[37] 당시 서지원, 이세창과 함께 SBS <점프챔프>의 공동 MC를 맡기도 했으며 잠시 솔로 가수와 연기자로도 활동하다 군 전역 후에는 하늘의 <웃기네>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었다. 현재는 연예계를 떠나 회사원이 되었다고 한다.[38] 대략적인 출연 시기, 간단한 의상 정보 등[39] <점프챔프>, <좋은 친구들>, <맞수 TV 최강전> 등 출연했던 방송 자료를 일부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