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14:42:56

삼한습유

1. 소개2. 내용
2.1. 초반부(券之一)2.2. 중반부(券之二)2.3. 후반부(券之三)
3. 기타

1. 소개

조선 후기 순조시절인 1814년. 죽계거사 김소행(金紹行, 1765~1859)[1]이 지은 고전소설. 총 2권 2책. 속제목은 의열녀전, 향랑전으로 되어있다.

조선 숙종 때 경상북도 선산(현재 구미시에 통합.)에 살던 향랑이란 여인의 고사를 모티브로 삼되 배경을 한국의 삼국시대로 바꾸고 향랑의 활약을 그린 여성 주인공 소설이다.[2] 대부분 고전소설들이 중국 또는 조선을 배경으로 두는 것과 달리 드물게 삼국시대를 시대로 삼은 작품이기도 하다.[3]

폭넓은 역사적 조망과 고전문헌을 오르내리는 작자의 박식함에서 오는 소재의 확장과 문체의 현란함과 서사적 편폭의 호한함이 돋보이는 장쾌한 스케일의 열녀전을 빙자한 먼치킨 대전이다. 실제로 내용을 보면 도저히 이걸 열녀전이라고 부를수 없다 독특한 한문 장편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향랑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환생하여 생전 마음에 두었던 효렴이란 남자와 재혼를 하는데, 이 소설속에선 천군과 마군의 싸움, 향랑이 여자의 몸으로 신라, 백제, 고구려 싸움에 뛰어들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는 상당히 발칙한 내용과 함께 유불선의 사상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중국에 수출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갑술년(1814) 봄에 비오는 어느 날, 죽계의 지인 무태거사가 김소행에게 향랑의 이야기로 소설을 지어달라고 하자 그냥 붓을 잡아 한나절 동안 뚝딱 이 책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이 소설을 보고 벼슬을 하는 문사들도[4] 대문장이라 했다고 한다.존잘니뮤ㅠㅠㅠㅠ 중국에 사행가는 사신들도 이 책을 가지고 가서 봤던 모양인데 당시 중국 문단에서 명성을 날리던 문인들이 보고는 이 책을 '천하문장’이라고 찬탄하고는 도합 은전 3백을 치르고서 사가지고 갔다고 한다.19세기 판 한류

2009년 3월 고3 모의고사에 한번 출제되었고 EBS 2020 수능특강에도 실렸었다. 3월 모의고사는 초반부의 향랑과 효렴이 처음으로 만난 부분을, 수능특강은 후반부의 향랑이 백제 적룡을 퇴치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부분을 실었다.

2. 내용

2.1. 초반부(券之一)

때는 삼국시대, 신라 일선군의 향랑(香娘)은 패향옥녀의 환생으로, 태어나자 방 안에 향기가 가득하든가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총명과 작문 실력을 보이는 등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향랑이 19세가 될 적에 같은 고을의 두 명에게서 혼인 신청을 받았는데, 한쪽은 그 마을 동쪽에 살던, 가난했지만 행실이 떳떳한 효렴(孝廉)[5]이란 사람이고 다른 쪽은 내세울 만한 게 없던 부자였다. 향랑은 효렴과 결혼하고 싶었지만 어머니의 강요로 부자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원래부터 마음에도 없던 결혼이었고 시댁에서도 향랑을 가난한 집안 딸이라고 박대하여 괴로운 시집살이를 보냈다. 결국 어느 한낮에 남편이 술에 취한 채 잠자리를 요구하자 향랑이 거절하고, 시댁은 향랑을 쫓아냈다. 향랑은 친정으로 돌아가나 1년 후에 부모 모두 돌아가시자 외숙모댁에 지내고, 이때 조씨 남자[6]가 자기 가문의 권세로 향랑과 가족들을 협박하고 혼인을 강요한다. 향랑은 수용하는 척하면서 혼인 전날에 산유화(山有花)를 짓고는 오태지 못에서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야 만다. 이 때, 마을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벼락이 쳐 불이 나는 등 괴현상이 벌어졌고 조씨 남자는 고전소설 클리셰인 권선징악에 따라 몸에 피를 흘리며 죽었다.

이후 향랑은 후토부인의 시녀로 지내다가 전 남편의 사형 소식을 듣고는[7] 그 마을 태수에게 태수의 두 아들 수명 연장을 조건으로 전 남편의 형을 면하게 해준다.[8] 이후 자신의 묘에 효렴이 제문을 지어 추모한 걸 보자 감동하여 밤중에 그에게 가서 귀신의 존재, 천체의 원리 등을 이야기하다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다.

이후에 향랑이 후토부인에게 부탁하여 인간으로서 환생을 요구하나 천상이 이 부탁으로 소란한 가운데[9], 천상회의에서 선불계의 신령과 위대한 인물들의 의견이 향랑에게 유리하게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공자의 판결로[10] 상제가 결제하였다.

이후 향랑은 효렴의 이웃인 십녀모의 딸로 태어나 일주일만에 성인으로 자라 일리천(一利川)[11]에서 혼인식을 준비한다.[12] 그러나, 여기까지 끝이 아니었으니...

2.2. 중반부(券之二)

동섬부에 사는 구천십지 귀마왕(鬼魔王)이 향랑의 혼인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오래 살면서 사람이 부활하고 큰 축하를 받으며 결혼한 일은 들어본 적 없다며, 이런 호화로운 일을 망치기 위해 자신의 아내 구자마모(九子魔母)[13][14]와 아들들과 함께 향랑의 혼인장을 쳐들어가 천마대전이 펼처진다.

마군의 보스 귀마왕은 세상 모든 악의 근본인 대마왕으로, 모든 자연재해나 사건사고, 심지어 역사 속 인물들과 성인들이 겪은 고난은 전부 이 귀마왕과 그의 부하들이 저질렀다고 한다.[15][16] 여의봉으로 조는 아들도 패는 먼치킨이다.[17][18] 천계에선 나타태자, 이천왕 등을 보내지만 마군이 우세하여 소용이 없었다.

이에 천계에서 아무래도 잔뜩 원한이 쌓였을 듯한 초패왕 항우[19][20]와 춘추전국시대의 오자서, 삼국지의 오호대장군들, 제갈공명, 여포 등 명장들을 서번트지원군으로 부르자 천하의 마군도 밀리기 시작한다.페이트 X까! 우리는 이미 19세기에 써먹은 소재라고!

결국 마왕이 천군에게 크게 패하고 도망칠 때, 마군 최종병기 마모가 자신의 여섯 폭 붉은 비단치마(紅錦裳)를 찢어서 고유결계(?) 천라지망(天羅地網)를 펼쳐 약 천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덮어버렸고, 병사들은 여색과 쾌락에 빠져 전의를 상실, 그 자리에 누워버린다.달기 경세원양은 그냥 찜쩌먹을 포스 그나마 항우와 몇몇이 치마에서 나왔다.[21][22]
여기서 이천왕이 홍금상을 없앨 방법은 오직 불(佛)밖에 없다고 말하자, 항우가 직접 이런 욕망에서 해탈했으며 작중 귀마왕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인[23] 석가여래에게 부탁한다. 처음에 항우가 부탁할 때 여래는 거절하며 관음보살을 추천했다. 그러나 관음보살은 알몸인 사내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남녀의 신체와 정, 왜 병사들이 홍금상에서 나체로 있는가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는데 듣고 있던 불도들이 오히려 인간고해가 극락이라며 가버렸다. 항우와 여래, 보살은 전부 당황.그리고 지옥이 생기는 건 다 이런 무리들 때문이라며 무안해하는 여래.

결국 여래가 가기로 승낙하자, 이를 염탐하던 마왕은 놀라고 마모는 남편을 달래며 500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찰마공주에게 도움을 청할 테니 걱정말라고 장담한다.[24] 그러나 삼한습유 세계관 최강의 마왕인 찰마공주는 남녀의 혼사가 무슨 해가 돼서 큰 전쟁까지 일으키냐고, 자기 이름 팔지 마라며 거절했다. 찰마공주의 조카딸, 만다니도 당장 안 나가면 마군 소굴을 엎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마모는 무서워하며 어쩔 수 없이 나오고 생각하다 '공작이 동남쪽으로 날며 오 리를 배회하네'(孔雀東南飛 五里一徘徊)를 중얼거리더니[25] 시로써 가문이 흥한다는 공자 말이 옳다며[26] 급한대로 설산에 가서 또 다른 인맥인 불모대명왕보살을 데려온다.

그러나 공작은 석가여래가 어머니처럼 예의를 갖추는 것일 뿐 힘으로 석가여래를 압도한 건 아니고[27][28] 때문에 작중에서 불모공작이 모자관계를 들먹이며 항복을 요구하나 여래는 "부모가 악행을 하려는데 그걸 그대로 따르는 건 효가 아니다" 라며 쿨하게 무시, 천라지망을 해제한다. 그런 상황에 공작은 분을 못 참고 부들부들거리다 그냥 날아가고, 이에 천군은 마군을 격파하면서 천마대전은 천군의 승리로 끝난다.[29][30] 무슨 사람 하나 환생해서 혼인하는데 전쟁 스케일이 우주급으로 커진다 정작 당사자인 향랑과 효렴은 이 부분에선 공기가 된다.

2.3. 후반부(券之三)

결국 향랑은 천계와 김유신(!)의 도움으로[31] 효렴과 드디어 결혼에 성공한다.

혼인 이후 자부대선이란 선인이 효렴을 찾아와 두 사람의 사정을 알려주는데,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은 향랑이 자결하기 전에 이루어졌어야 했다 하고 이 두 사람의 전생 사연을 알려준다.

향랑의 전신이던 패향옥녀는 중추월(추석) 때 월궁에서 향주머니에 넣을 계수나무 꽃을 담고 있던 중, 나무 위에 있던 천년 묵은 여우가 향주머니를 탐해서 그녀를 습격했다. 한밤중에 패향옥녀는 난데 없이 그 여우와 싸우다, 지나가던 효렴의 전생인 관화동자가 옥녀를 도와주고 날이 새자 여우는 도망갔다. 이때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해서 천부의 법대로 옥녀와 동자의 이름이 선적에 지워지는 대신 인간세상에 향랑과 효렴으로 환생해 행복하게 살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 여우는 앙심을 품고 향랑의 어머니, 남편과 시어머니, 그리고 조씨 남자에게 붙어 향랑를 괴롭히고 결국 자결하도록 했다.[32] 이 이야기를 마치곤 자부대선은 김유신에게 문제의 여우를 주고 김유신은 여우의 천적인 개를 이용해 죽인다.

이 사건이 김흠운이 주달해 신라 조정에도 알려져 왕은 효렴에게 대아찬[33] 직위를 주고 향랑은 부인 칭호를 얻는다. 그러다 향랑의 청으로 효렴은 가야산에 들어가 은거한다.

그러던 중 대야성 전투가 일어나 신라가 위기에 처하자 향랑은 효렴에게 당에게 원병을 청해 나라를 구하라고 설득하고 효렴이 표를 올리니 조정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김유신, 장보고[34] 등이 찬성해 효렴이 당나라 사신으로 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게 된다.[35]

이후 원역사대로 황산벌 전투 후 신라군이 사비성까지 오는데, 의자왕은 하라는 방어책 논의는 안 하고 강의 신, 적룡에게 제사만 지내고 방탕한 생활을 한다. 이 적룡이 군대가 강을 건너려 할 때마다 막아서, 소정방이 거북이로 점을 치니 향랑에게 물으란 계시가 나오고, 이에 효렴이 향랑에게 가 이 용을 잡을 방법을 묻는다. 향랑은 이 용의 내력과 퇴치법[36][37] 소정방의 백마를 미끼로 용을 잡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이 용을 구워 먹다가 식중독에 걸려버린다. 이에 또 다시 효렴이 향랑을 찾아가고, 향랑은 당 군사들은 욕심이 많다고 비웃곤 지렁이를 이용한 해독법을 알려줘 그들을 구제한다. 그리고 백제는 멸망하고 왕이 향랑을 '부여국부인'으로 봉하려 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38][39]

다음해, 천개소문(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당에게 투항하자, 향랑은 효렴에게 다시금 삼국의 다툼 역사, 온달 설화, 당 태종이 일으킨 고당전쟁[40]를 예로 들며 지금이 좋은 기회라며 다시 당병을 청하라고 한다. 그러하여 결국 3차 고당전쟁이 일어나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서술자는 통일이 향랑의 공이라 하며 삼한의 역사와 뛰어난 인물들에 대한 평을 한다.

이후 향랑과 효렴은 가야산에 들어가 살다가, 후에 향랑은 병이 들어 먼저 죽고 효렴 또한 노환으로 그 뒤를 따라간다.[41]후에 사람들은 절기마다 향량의 묘에 제사를 지냈고 그녀의 산유화가는 마을 부녀자들에게 두루 불려졌다고 한다.

3. 기타

보면 알겠지만 요즘 유행하는 이세계 환생물, 대체역사 라이트 노벨와 그 구조가 상당히 비슷하다.(...)

이 작품의 후기인 지작기를 보면 이 소설의 창작을 의열녀(향랑을 말함)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이는 작가 김소행이 스스로도 인정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났으나 서얼이란 출신으로 결국 기회를 얻지 못하여 그에 대한 우울함을 위로하기 위해 작품을 지은 동기로, 주인공 향랑은 결국 작가의 분신격이란 이야기이다. 그리고 항우, 오자서, 제갈공명 등 역사적 위인들은 전부 생전에 울분을 가지고 죽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점, 그리고 그런 그들이 활약을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작가의 배경에 비롯되었다.

19세기에 첫 등장한 한문소설임에도 후에 나온 옥루몽 등은 한글완역본이나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과 달리, 삼한습유는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었다. 아무래도 전문 한자으로 인한 진입장벽 외에 소설에 직,간접적으로 인용, 차용되는 시경, 사기(역사책) 등은 결국 한문학을 알아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온 찰마공주는 가히 한국 고전소설계 마왕중에는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는 존재로 석가여래태상노군도 그녀를 이기지 못해 마음대로 하지 못하며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악행을 저지르는 일반 3류 마왕과는 다른 포스를 지니고 있다. 작중 마모가 석가여래의 지원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보통 권선징악형 소설이라면 이런 캐릭터는 정의의 심판(?)을 받겠지만, 작중에서 거의 세계관 최강자급이라 싸우는 모습이 나오지 않고 그녀를 감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없고 나름대로 마도에 대한 철학도 있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단칼에 거절. 찰마공주의 작중 유일한 발화이자마도 설명은 아래와 같다.
(전략)...사람마다 자기가 들은 바를 존중하고 자기가 아는 바를 행하기는 하지만 내 문호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나를 지목하여 ‘마도(魔道)’라 한 것이다. 마도라는 것은 사람들의 도(道)와는 다른 것이니 우뚝 서서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이른다. (중략)... 그러나 나는 남과 경쟁하지 않고, 배우기를 원하는 자에 대해서는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은 뒤쫓아 붙잡지 않을 따름이다. 인간세상에서 명예와 이익을 쫓아 마음이 분주한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 하나 소원을 이루어주는데, 오로지 덕과 은혜로 남을 이롭게 하여서 원대로 들어주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제후와 왕, 장군과 재상, 후비, 궁녀는 모두 내가 나누어서 그 아름다움을 이루어 준 자들이다. 지금 네가 내 이름을 도적질하여 내 집을 어지럽히는구나. 남녀의 혼사가 네게 무슨 해가 된다고 군대를 일으켜 천지를 원수로 삼느냐?... 너는 내 무리가 아니다. 내 어찌 너를 도와 잔학한 일을 하겠느냐?”[42]

본작에서 그녀가 개입했다면 소설 전개 자체가 바뀔 수도 있을 만한데 쪼잔하게 남의 결혼식 같은거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 천명하고 마군들(정확히는 마모)의 악행을 보고 이를 꾸짖는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인다. 찰마공주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강한데 그녀에게는 작중 설정상 천지를 먼지로 만들 수 있는 만다니란 조카딸이자 제자가 있으며 이끌고 있는 무리도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찰마공주는 딱히 인간을 먼저 공격하거나 습격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면 덕과 은혜로 도와주고, 천마전쟁에서도 찰마공주와 만다니 둘이서 마모에게 선을 긋고 내쫓은 것.

도현신 작가의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에선 서유기의 마왕들이 대개 신들의 하인이었다가 도망쳐 나온 것에 비해 찰마공주는 격이 다른 존재이며 아수라의 조카라는 것에서 아수라가 고대 인도의 신이었고,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면모에서 요괴보다는 신적인 존재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1] 김상헌의 6세손이나 증조부가 서출이었다. 그래서 살아생전 출세하지 못했고 후에 95세까지 장수하여 첨지중추(僉知中樞)란 명분상 직위만 받았을 뿐이었다.[2] 원소재인 향랑 고사는 다음과 같다. 상형곡에 거주했던 양인 박자신의 딸 향랑이 있었는데, 계모의 성질이 불량하여 향랑을 늘 박대했다. 17세에 같은 마을에 살던 임천순의 14세 된 아들 임칠봉과 결혼하는데 나이차나 성격 차이로 향랑을 미워하였다. 그러다 결국 남편에게 쫓겨나 친가로 갔으나 계모가 향랑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외숙부 댁에 의탁했는데 숙부가 개가를 권하자, 향랑은 산유화가(山有花歌)를 부르고 오태지에서 자결했다. 이상 내용은 당시 선산 부사였던 조구상의 향랑전의 내용이다.[3] 또 다른 삼국시대 배경 고소설로는 신라와 당나라 배경인 육미당기, 고구려를 배경으로 하는 김취경전이 있다.[4] 대표적으로 당시 높은 관직을 맡았던 연천 홍석주, 항해 홍길주 형제가 있으며, 이들은 생전에 김소행과도 가까이 지냈다.[5] 이땐 바로 이름이 나오지 않고 마을 동쪽에 산다고 해서 동가지자(東家之子)라 나왔다.[6] 실제 향랑 사건엔 없던 허구인물로, 이안중이 쓴 향랑전에 나온다. 향랑전에서도 소박맞은 향랑에게 청혼하긴 하지만 삼한습유에서처럼 협박하진 않는다.[7] 시어머니가 오래된 그릇을 잃어버려서 자기 집 종을 의심해 태형을 치다 죽여서 향랑의 전 남편도 이 일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다.[8] 이때 그 남편이 향랑을 보곤 미안하다며 사당을 짓겠다고 하자, 향랑은 자기를 내쫓은 건 언제고 이제와서 부부 타령이냐고 화내며 절연하곤 떠났다.[9] 염라대왕을 포함한 시왕들은 물론 관세음보살, 금속여래, 양주(전국시대), 묵자, 태상노군(노자) 등 유명한 인물들이 향랑의 환생 문제를 가지고 의논한다. 죽은 이가 부활한다는 거 자체가 심각한 일이라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데 그 예로 관음보살은 진귀한 몸을 왜 다시 인간으로 바꾸려 하냐고 걱정하고 무염귀왕(無厭鬼王)은 아예 효렴을 저승에 데려와서 데릴사위로 삼는 게 어떻냐고 말한다. 당연히 이 말에 향랑은 효렴을 죽여서 결혼하지는 않겠다고 답한다.[10] 토론에 참여한 남화노선(장자)가 공자에게 물어보자고 권하며 자공이 가서 묻는데, 공자는 향랑의 환생이 예에 어긋나지 않다고 해 결론지었다.[11] 현 구미시 인동면에 위치한 낙동강의 지류로, 후삼국시대 일리천 전투의 그곳이 맞다. 향랑이 전생에 몸을 던지 오태지가 바로 이 강 지류에 있었다.[12] 이때 중국의 역대 이름을 남긴 여인들이 향랑의 결혼식에 참여하는데, 여후와 무후가 서로를 까는 장면이 참으로도 일품이다.[13] 구자마모란 이름은 마왕과의 사이에서 아홉 아들을 한꺼번에 낳아 불리는 별명으로, 본명은 구반다(鳩槃茶)이다. 아들들 앞에서 손자의 세편(勢篇)을 인용해서 승리의 전술에 대해 말하거나, 전투에 참여한 천군들의 신상을 설명하는 등 지략에 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첫 전투에서 검은 바람과 함께 지원군을 데려와 마왕을 돕거나 나타태자, 이천왕 등 천군 장수들과의 전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전장에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한다.[14] 참고로 구반다란 귀신은 못생긴 부인(醜婦)의 비유로 쓰였다. 그래서 이천왕도 자기는 비겁하게 속여서 마왕 목을 자르더니마모가 덤벼들 때 못생긴 할망구가 추하다고 놀렸다. 그래도 오히려 마모는 "(나같이) 늙고 추한 부인 없었으면 너같은 애가 어디로 나왔겠냐"라고 당당히 반박한다.[15] 항우가 천군의 사기를 복돋우려 소리치자 마왕이 비웃으며 말하길, 요순은 물론이요, 하의 우를 비롯해 춘추전국시대, 한, 위촉오의 인물들이 겪은 고난은 죄다 마왕이 저질렀다고 한다. 그러면서 죽이기를 좋아하며 복선화음과 반대되는 행위가 곧 마왕 자신의 도(道)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그 당사자들(제갈량, 유심 등)이 천군에 참여해 오히려 불리해졌다. 마모도 이날 밤에 제갈량까지 끌어들었으니 그를 어떻게 대처할 거냐고 말한다.[16] 공공, 궁기, 도올 등 중국 전설의 네임드급 마물들이 전부 조마왕(助魔王)이란 직속 부하들이고, 아홉 아들들을 구주(중국 전역, 더 나아가 전 세계를 의미한다)를 다스리게 하고 그곳의 마물들을 복종시켜 그 휘하의 무리 수가 작중에서 만물의 수에 별과 신명과 선선과 부처의 수를 더한 만큼 되었다고 명시된다. 흠좀무.[17] 첫 전투가 일어난 다음날, 마왕이 여덟 아들들과 마군들에게 팔문금쇄진을, 자신과 마모, 마독은 평지에 진을 세워 구궁진을 세워 그 밑에 여러 귀신들을 불러와 병력을 보충하거나 이천왕이 기습해 목을 베여도 차분히 머리를 붙이는 등 여러모로 뛰어난 신통력을 보여주는데 이 때 도적같은 짓을 했다며 너가 끊은 머리를 자신이 못 잇겠냐고 한다.[18] 오자서가 참전한 날, 큰아들 마독진군이 "오자서는 지가 항우보다 낫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온 것 같은데 우린 항우만 신경쓰죠?"라고 말하다 마왕이 어린애 소견이라고 맹자의 성선설을 말하는데, 아홉 아들이 다 졸자 화나서 여의봉으로 때리며 (魔王大怒 以如意擊之曰) "아버지 가르침을 귓등으로 듣곤 사람을 어떻게 다스릴 거냐!"라고 꾸짖는다.[19] 항우는 사실상 이 부분의 진주인공으로, 작중 상제나 기타 인물들이 유방과 비교하며 그의 신의 있음을 띄워주고, 후에 천하영웅들이 모였을 때, 대원수격인 천하상장군이 되어 천군을 이끌었다. 마왕도 그를 처음 봤을 때 두려워서 큰 소리를 치지 못해 다만 초인목후이관만 중얼거렸다. 이러곤 전투 중 항우의 사자후에 마왕의 투구(頭盔)가 날라가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20] 또한 사기에서 항우는 눈동자가 두 개였고 순임금의 후손이었단 이야기가 있다고 서술했는데, 사마천은 이를 부정했지만 삼한습유에선 정말로 순임금의 손자로 나온다.[21] 그 이유가 항우는 최후의 결전에서 우미인을 놓고 떠나서, 조자룡은 젊을 적 공명을 세우지 못하면 아내가 없는 걸 걱정치 않겠다고 해서, 관우는 조조가 미인을 이용해 회유한 걸 끝까지 거절해서, 그리고 자서는 초나라에서 오나라로 도피할 때 아내를 두고 다시 보지 않아서. 그러곤 다들 오기는 아내를 죽였으니 끄떡없겠다며 웃는다.[22] 참고로 여포초주는 치마 안에 나오지 않았는데, 초주는 항복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말하다가 유심에게 침을 맞았다. 전생의 복수.[23]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서 해탈할 당시, 마왕이 모든 마군을 동원해 방해했는데도 그의 법력 때문에 쓰러트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4] 찰마공주는 아수라의 조카딸로, 외삼촌에게 배워 마도(魔道)를 이루었고, 예전에 여래와 태상노군이 그를 상대로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보곤 다신 그보다 낫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다. 여담으로 찰마공주 말로는 마도란 이름은 여래가 억지로 붙인 거라고.그리고 여래를 입버릇 좋지 못한 애라고 깔보는 건 덤.[25] 후한 시대의 악부 공작동남비의 첫 구절로, 이 악부는 이외에도 향랑이 조가자에게 결혼을 강요당할 때 자신의 심정을 난녀(공작동남비의 유난지를 말한다.)에 비유하거나 향랑의 혼인식에 난지가 직접 혼객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하게 인용, 차용된다. 사실 삼한습유 이전부터 사대부들이 '시가에서 쫓겨난 여인'이란 공통점으로 향랑 고사와 공작동남비를 엮기도 했다.[26] 논어에서 '시에서 일어나고 예에 서며 악에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란 구절을 인용했다.[27] 서유기에서 동명의 공작요괴가 석가모니를 잡아먹고 석가모니가 등을 뚫고 나와 이를 연으로 마야부인과는 별개의 모자(母子)의 인연이 되었다는 설정을 차용해왔다. 참고로 삼한습유에선 여래가 공작의 음호에서 나왔다.[28] 그래도 명분상으로 마모가 석가모니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요청했고, 마왕도 공작에게 절하며 깍듯이 대하는 등 불모로서 대접은 확실히 받는다. 항우 또한 공작을 쏘려고 했으나 범증이 '비록 가짜 어미라도 여래의 뜻을 상하게 할지도 모른다.'라며 말렸다.[29] 자세히는 항우군과 후토부인의 군사들이 합세하자 마군들이 사방으로 도망친 후, 마왕은 바로 후퇴하려 했지만 마모가 지금 도망치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니 끝까지 싸우거나 강화라도 맺으라고 말한다. 이에 마왕이 다시 천군과 대적하나 항우에게 겁먹어서 결국 그에게 왕조가 바뀔 때를 제외하면 인간세상에 장난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떠났다.[30] 강화를 맺을 때 마왕이 항우를 보며 "내 인생에 세상 뒤엎을 만한 영웅을 봤다"라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31] 초반부에 천계 장수의 부탁으로 효렴쪽의 혼인식을 준비시켰다. 천마전쟁 중에서도 효렴을 보호하며 마독진군이 효렴을 납치하려 오자 성안에 횃불을 올리고 사람들에게 놋그릇을 쳐 마군들이 인간계의 병력을 오판하게 만들고 후퇴시켰다.[32] 참고로 이 여우, 범상치 않은 게 향랑의 자결을 들은 상제가 조사를 통해 이 여우가 배후임을 알게 되곤 번개를 내리쳐 죽이려 했지만 족족 피했고, 자부대선이 신마대전에서 마군 무리에 여우가 숨어있는 걸 알고서야 잡을 수 있었다. 또 소지 마립간사금갑 사건도 이 여우가 꾸몄다고 한다.[33] 참고로 이 직위는 신라 진골만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왕족과 같은 직위이다. 6두품 이하로는 가질 수 없었는데, 그렇다고 효렴이 왕족이란 건 아니고 효렴이 신라 조정을 설득하거나 당나라 사신으로 가는 등 활약을 해야하기 위한 설정이다. 또한 작중 신라가 오히려 실제 역사와 달리 인재 등용에 적극적으로 그려진 점도 있다.[34] 삼한습유의 시간적 배경은 삼국시대인데, 남북국시대 인물인 장보고가 어찌 등장한 건가 싶은데, 사실 이외에도 시간으로 따지면 아직 고종의 황후일 무후가 자신이 국호를 바꾸어 다시 나라를 세웠다고 이야기하거나 향랑이 태어날 적엔 무열왕 7년이나 혼인 당시엔 신문왕 17년(신문왕은 재위 11년만에 죽었으므로 없는 시간대.)으로, 이후 향랑이 죽을 땐 진덕여왕이 등장하는 등 오류로 보이는 점들이 있다. 다만 일부러 현실과 다른 허구의 시간으로 설정했다는 의견도 있다.[35] 효렴의 당나라 외교 활동은 현실의 김인문의 행적에 덧입힌 것이다.[36] 이 용은 작중에서 백제 개국지 금마산의 신인 주사씨(朱蛇氏)로, 옛날 동명왕(東明王) 주씨의 후예라 한다. 주씨 언급이나 금와씨를 언급하는 걸로 보아 주몽의 후손으로 보이는데, 역사나 설화에서 주몽과 뱀, 용이 연관된 적은 없으나 백제 시조 온조왕과 관련해서 온조가 용으로 변해 한강과 금강을 살펴보았단 설화가 있긴 하다.[37] 참고로 인터넷에선 이 용이 백제 무왕이라 알려졌는데, 삼한습유의 적룡은 무왕이 아니다. 원소재인 조룡대 전설의 용이 무왕이거나 의자왕인데, 각각 백제부흥운동이나 나당군의 사비성 공격을 시간대로 두고 있다.[38] 그러나 백제 멸망 부분에 후삼국시대 신라가 이를 교훈 삼지 못하고 견훤후백제군에게 포석정에 공격을 받았단 서술이 이어진다.[39] 비록 현실에선 의자왕은 방탕하기만 한 암군은 아니었고 사비성이 함락해도 풍왕과 장수들, 그리고 남은 백성들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치열한 저항을 하지만 소설 속에선 그런거 없다. 취급이 영 좋지 못한 편.[40] 이때 신라인 설계두가 전사해 당 태종이 외국인인데도 목숨을 바쳐 싸웠다고 슬퍼해 장례를 성대히 했단 사실을 언급하는데, 그가 당나라로 떠난 이유는 생략했다. 아무래도 조선의 신분제 때문으로 추정된다.[41] 향랑은 80이 넘어도 젊은 모습을 유지했고, 효렴도 관을 확인하니 시신이 없었다. 그래서 세간엔 이 둘이 신선으로 돌아갔다고 전해졌다.[42] 인터넷 상에서 알려진 이 부분은 2003년 출판된 서신혜, 이승수 역주본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