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5:13:59

방각본

파일:Chunhyangjeon-Korean_Love_Story.jpg
1. 개요2. 역사
2.1. 방각본 출현의 배경2.2. 방각본의 출현2.3. 방각본의 시대2.4. 식민지 시대의 변화와 소멸
3. 발행처에 따른 판본 구분
3.1. 경판본
3.1.1. 경판본 글씨
3.2. 완판본
3.2.1. 완판본 글씨3.2.2. 태인본3.2.3. 고전소설
3.3. 안성 (안성판본)
3.3.1. 안성 (위치적 관점)3.3.2. 안성 (문화적 관점)3.3.3. 안성판본 (역서)3.3.4. 안성지역 방각소와 방각본 인출 현황
4. 서목
4.1. 유학서4.2. 실용서4.3. 소설4.4. 역서
5. 참고 문헌6. 같이 보기

1. 개요



조선 중후기 이래로 민간에서 상업적인 목적으로 출판된 목판본 서적을 말한다. 민간에서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관판본과, 영리를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사각본과, 목판이라는 점에서 활자본과 구분된다. [1]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여 18~19세기에 크게 확산되었으며, 일제강점기까지도 출판되었다. 방각본은 관찬본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인쇄의 품질이나 종이의 질이 떨어졌고, 값도 훨씬 저렴했다. 방각본의 유통은 독서 문화가 사대부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그보다 아래의 중하층 서민들에게 확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들 방각본이라고 하면 서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한글 소설류를 떠올리지만 그뿐만 아니라 역서, 옥편과 같은 실용서나 논어와 같은 유교의 경서 역시 출판되었다. 서울, 안성, 전주 등 상업이 발달하였고 종이를 구하기 쉬운 도회를 중심으로 간행되었다.

2. 역사

2.1. 방각본 출현의 배경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이전부터 서적의 인쇄와 보급이 오랫동안 이루어졌다. 신라고려를 뒤이은 조선에서도 서적의 보급은 중대한 문제였다. 조선 전기에는 왕명으로 간행된 책을 반사(頒賜)하거나, 교서관(校書館)에서 간행한 책을 민간에 공급하는 등 관의 주도로 서적 보급이 이루어졌다. 교서관은 그러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라고 할 수 있다. 교서관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수의 관찬서가 간행되었고, 심지어는 개인의 시문집을 간행하는 등 민간의 서적 수요에도 기민하게 대응하였다. 한편으로 교서관이 민간의 출판을 대행했다는 것은 그 정도로 출판 수요가 충족될 정도로 민간의 서적 요구가 크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렇듯 중앙이 통제하는 서적 보급 체계는 적어도 성종 시기까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그런데 중종 대에 와서는 이러한 상황이 슬슬 바뀌기 시작한다. 중앙 관청의 개입 없이 지방 관아에서 자체적으로 서적을 간행·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종실록에 실린 기사를 보자.
"신이 보니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인(刊印)해서 그 지방의 연소한 선비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비들이 모두 시비(是非)와 호오(好惡)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소민(小民)들도 모두 악한 짓을 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서 ‘아무개는 부모에게 불효하다.’ ‘아무개는 그 형에게 불공하다.’ 하면서 배척하여 동류에 끼워주기를 싫어합니다. 신이 고로(古老)에게 물으니 ‘예전에는 조정에서 「방금 선도(善道)를 흥기시킨다.」고 말한 경우에도 그 효과를 본 일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조정에서 한 일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감사(監司)가 또 한 고을에서 추앙받는 노숙(老宿)을 뽑아 도약정(都約正)·부약정(副約正)을 삼고 그 고을을 교화(敎化)하게 하고 있는데, 풍속을 선도하고 백성을 바로잡는 데는 이보다 더 좋은 법이 없습니다. 신이 시골에서 아이들이 읽는 《향약(鄕約)》을 보니 곧 김안국(金安國)이 교정(校正)한 언해본(諺解本)이었습니다. 이것을 널리 인출하여 팔도(八道)에 반포하는 것이 가합니다."
중종실록 33권, 중종 13년 6월 19일 정해 2번째기사 (#)

이제는 중앙에서 서적을 지방에 보급해주는 것을 넘어, 타 지역에서 간행된 서적이 다시 다른 지방에서 간행되고, 또 이를 보고 국가에서 인출을 결정할 정도가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명종 대에 이르러서는 재지사족이 주도하여 자신들이 필요한 서적을 지방관아나 향교, 서원에서 간행하고, 그것을 사적인 교유망을 통해 보급하는 사례도 잦아진다. 반관반민의 서적 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성리학이 체제교학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재지사족이 성장하면서 서적의 수요가 자연스럽게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16세기는 이렇듯 지방에서 서적이 간행되고, 중국 서적이 대량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서적 유통이 이전과는 딴판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본격적으로 서적 판매를 중개하는 업자도 등장했다. 민간 상업출판이 등장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2.2. 방각본의 출현

그렇다면 과연 언제 어디서 우리가 '방각본'이라고 하는 상업출판이 시작된 것일까? 방각본 출현의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왕설래가 있지만, 16세기 후반에 방각본 출판이 서울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서지학계의 정설이다.

그 구체적인 근거로, 1576년에 간인되었다는 간기가 부록되어 있는 『고사촬요』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려 있다.
萬曆四年七月日 水標橋下北邊二第里門入 河漢水家刻板買者尋來

만력 4년 7월 수표교 아래 북변 이제리 수문 입구에 사는 하한수 집에서 각판하였으니 살 사람은 찾아오라

고사촬요는 1554년부터 서명응이 1771년 고사신서로 대폭 개정하기까지 무려 200년 동안 간행된 실용 상식 대백과였다. [2] 원래 고사촬요는 교서관 감교관을 지낸 바 있는 어숙권이 만든 책으로, 교서관에서 간행하던 책인데 이십년도 지나지 않아 해적판 방각본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인 선조 10년에는 민간 인쇄 조보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3개월간 유통되었다가 선조의 분노를 사 금지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얼핏 보기에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이 두 사건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민간에서 목판을 판각해서 찍어낼 만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민간인 출판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이 상업적인 출판을 위해 책을 방각할만큼 당시 서적, 출판물 수요가 상당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민간인 대상의 조보 발행을 위해 사헌부 같은 높으신 분들과 협의할 정도로 이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이 시대에 간행된 서적들은 주로 사대부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서민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은 등장하지 않은 상태였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도 있는 법인데, 민간 경제가 잘 발달하지 않고 서민의 서적 수요가 크지 않았던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사례들은 분명히 '방각본'이라고 부를만한 민간 상업출판이지만, 아직 그 출판이 본격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후 방각본으로 출판된 서적이 한동안 매우 드물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허다한 판목과 활자들이 약탈되고 파손되면서 한동안 서적 보급 자체가 위축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3]

2.3. 방각본의 시대

그런데 이렇게 침체되어 있던 민간 출판은 17세기 중반에 다시 호남 지역에서 재흥하게 된다. 후술하다시피 호남 지역에서는 이미 지방 관아와 사찰을 중심으로 한 출판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판각 기술을 가진 각수들이 존재했고, 책을 출판하는데 필요한 종이가 풍부하게 생산되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판본이 원활하게 유통될 수 있었던 서울이 아니라 호남에서 다시 방각본이 재흥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으로 출판업자와 서사(書肆), 독자의 관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첫 사례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전이채·박치유가 태인에서 간행한 방각본들이 있다.[4] 이들이 간행한 방각본은 당시 민간에서 인기 있는 실용적인 서적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고문 학습의 기본서이던 상설고문진보대전을 비롯하여 공자의 가계(家系) 및 행적을 엮은 《신간소왕사기(新刊素王事紀)》, 시문 창작과 과거 시험 준비에 필수적이었던 《사문유취초(事文類聚抄)》, 농사일의 지침이 되는 농가집성, 《구황촬요(救荒撮要)》 등이 포함되어 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에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지방에서도 다시 민간 출판이 재개되는데, 현존하는 유물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한글로 된 《임경업전》이 있다. 그 뒤로 동몽선습이나 천자문과 같은 서당 교재 몇 편이 간행되었다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경판 방각본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850년대에서 1860년대까지 현존하는 경판 방각본 대부분이 판각되었던 것이다. 1870년대 이후의 경판 방각본은 기존에 판각한 것을 수리하거나 복각, 아니면 부분적으로 개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때 출판된 것들은 주로 고전소설들로, 세책가에서 책을 빌려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독서 문화가 중하층으로 확대된 현실을 여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방각본은 흥선대원군의 시대를 거쳐 대한제국 시대에도 계속해서 활발하게 출판되었다. 이때 방각본의 판각과 유통의 중심에는 개인이 창업한 서포가 있었다. 서포의 창업주들은 주로 이전에 상업에 종사한 이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이전에 판각되었던 판목들을 수집하여 다시 인출하기도 하고, 더러는 새롭게 방각본을 간행하기도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기존 상업 계층 출신의 인물이 경영한 서포에서 방각본이 계속 판매되었다는 사실은 방각본 출판의 전통이 상인계층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4. 식민지 시대의 변화와 소멸

많은 사람들에게 의외이겠지만 일제강점기 초반까지도 방각본 출판은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경판본은 이 시대에 이미 쇠락했지만, 완판본의 경우 1910년대까지 서적 발행이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1909년 출판법의 발효로 인해, 모든 서적에는 판권을 표시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 이 조치는 방각본의 경우에도 적용되어 이 시대의 방각본은 다가서포, 서계서포 등의 방각소 판권지가 붙어 있다. 이는 주로 신활자본으로 간행되던 신소설이나 교과서 등이 애국적이고 계몽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일제의 검열로 출판이 어려웠던 것과 달리, 방각본으로 출판되는 책들은 체제를 반대하는 '불온한'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제의 엄격한 출판 검열이 시작되면서 신활자본으로 주로 교과서를 인쇄하던 인쇄소들은 춘향전, 소대성전, 유충렬전과 같은 고전 소설이나 유교 경전 등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기상대에서도 민간에서 사용하기 위한 역서를 간행하여 배포하기 시작했다. 목판으로 인쇄되던 종목들이 이제는 신활자본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최남선이 출판한 육전소설도 바로 이때 출판되었다. 그렇게 질로나 양으로나 방각본보다 월등히 뛰어난 신활자본이 시장을 점령하였다. 결국 1920년대와 1930년대를 거치면서 방각본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3. 발행처에 따른 판본 구분

3.1. 경판본

파일:홍길동경판본한구229.jpg
소설을 비롯한 각종 국문본과 천자문·운서(韻書)·규장전운(奎章全韻) 등 각종 한문본을 판각, 출판하였다. 서울이 모든 분야에서 나라의 중심이었듯이 방각본 출판에서도 서울이 전국을 주도하였다. 서울을 제외한 경기 지방의 출판물 역시 경판본으로 분류하고 있다.

경판본 소설로는 1780년에 나온 ⟨임경업전⟩이 그 중 오래 되었다. 방각본은 당초 광통교 부근에서 시작해 을지로 입구 일대, 남대문, 서소문 밖, 명륜동, 창신동 등지로 전전하며 출간, 유통되었다. 그러나 개화의 물결을 타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방각본은 육전 소설에 이어 활판 딱지본에 밀려 마침내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3.1.1. 경판본 글씨

경판본 소설의 글씨는 궁체 기반의 흘림체로, 획의 굵기, 글자의 크기, 자간 등이 일정한 편이다. 경판본의 독자는 중인 및 서리층과 사대부가의 여성이어서 궁체를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균제미는 상층 문화에 경도된 한양의 중인층의 지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대체로 ㅇ은 둥근 모양이고, ㅌ은 ㄷ 위에 가로 획을 덧댄 형태이며, ㅔ는 두 세로 획이 길이가 다르다.

3.2. 완판본

파일:화용도_PS0100343000100001800000_0.jpg
전주는 조선시대에 전라도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이 위치했던 곳이다. 또한 전국적으로 최상품 한지를 생산하면서 그 한지를 통해 수많은 책을 출판해 낸 곳이기도 하다. 전라감영 내에는 한지를 만들던 지소, 책판을 인쇄하고 책을 만들던 인출방이 있었다. 또한 닥나무를 재배하여 각종 한지를 만들었으며 전국 최고의 품질과 최고의 생산량을 가지고 있었다. 전라감영에서는 동의보감을 비롯한 60여 종의 책을 출간하게 되었으며 이때 발달한 한지, 각수, 목수, 인쇄시설 등은 전주 지역의 출판문화 활성화로 이어졌다.
전주는 전라감영의 인쇄문화의 영향으로 사간본이 250여 종류가 출간되었고, 이어서 방각본이 발간되어 조선 후기 가장 왕성한 출판문화를 갖게 되었다. 전주에서는 19세기 초부터 판매용 한글 고전소설을 찍어내기 시작하여 무려 130여 년간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등 한글 고전소설 23종을 유통 보급하였다.
<완판본의 특징>
*대중적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방각본 성행
*전라도 지방의 어휘를 풍부하게 담고 있음
*인용구, 각설, 흑색 배경 등 편집기호 사용
*판소리를 책으로 출간한 판소리 계열 소설의 성행
*내용이 세밀하고 유머가 풍부하여 문학적 형상화가 잘 되어있음
<전주 지역 방각본의 내용적 특성>
*첫째, 유학 분야의 강조이다. 유학 관련 서적 즉, 유학 경전의 언해본과 주석서를 13종이나 출판하였다.
*둘째, 유학서와 함께 소설의 출판도 병행했다. 소설 발행종수는 많지 않지만, 가장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드러난 조웅전을 >비롯하여 심청전, 퇴별가 같은 판소리 계열의 작품이 주요한 내용을 이루었다.
*셋째,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아동 교육서가 나왔다. 동몽선습과 아희원람이 모두 전주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전주 지역의 문화적 풍토에서 빚어진 것으로 교육의 선진화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전주의 방각소들은 주로 남문시장을 중심으로, 전주성의 남쪽과 서쪽에 많이 분포하였다. 거의 대부분의 완판본들은 그 간기에 전주에서 방각되었다는 뜻으로 '完'이라는 표시가 있는데, 서점의 위치에 따라 '完西', '完南'이라는 표기도 보인다.
파일:하경룡장판논언간기.jpg
  • 전주에서는 일찍부터 사서삼경을 아주 많이 찍어냈다.

3.2.1. 완판본 글씨

완판본 소설의 글씨는 1850년대까지는 초서체가, 1889~1902년에는 행서체가, 1902년 이후에는 해서체가 쓰였다. 같은 춘향전이라도 인쇄 시기가 이른 별춘향전의 글씨는 흘림체에 가깝고, 보다 늦은 열녀춘향수절가의 글씨는 정자체에 가깝다. 완판본의 독자가 초기의 서리층에서 점차 농민층으로 이동하면서, 궁체를 판독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가로 획은 굵기의 변화가 없으며 얇고, 세로 획은 굵기의 변화가 있으며 두꺼운 편이다.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자간도 불규칙하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발랄하고 생동하는 전주의 민중층의 지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완판본 글씨의 전형인 해서체는 ㅇ은 삼각형에 가깝고, ㅌ은 세 가로 획이 세로 획과 모두 붙어 있으며, ㅔ는 두 세로 획이 길이가 같다.

3.2.2. 태인본

  • 전북 태인은 서울을 제외하고 지방에서는 아주 일찍이 판매용 책을 대량으로 찍어낸 지역이다. 판매용 책을 찍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태인의 여러환경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종합적으로 발전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태인의 방각본은 지방의 상업적 출판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다양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책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는 큰 역할을 했다.
< 태인본 특징 >
*첫째,공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한 서적이많았다. 공자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방각본은 <孔⼦家語>, <孔⼦通紀>, <新刊素王事紀> 등이다.
*둘째, 유교적 교양이나 교화를 강조하는 내용의 서적을 출판하여 <明⼼寶鑑抄>,<孝經⼤義>,어린이 교육용 도서인<童⼦習>등이 출판되었다
*셋째, 실용성을 가진 방각본을 출판하였다. 농사 기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農家集成>과 굶주림을 구제하기위해만든<新刊救荒撮要>가 있고, 당시의 백과사전인 <事⽂類聚>,초학자들을 위한 문장 백과사전인 <古⽂眞寶⼤全> 등이 발간되었다.

*전북 정읍의 태인본은 1799년부터 1844년까지 발간되었으며 그 중에서 일부의 책판이 전주의 서점으로 임대되어 전주에서 방각본으로 다시 간행한 책은 孔子家語(공자가어),增刪濂洛風雅(증산염락풍아),詳說古文眞寶大全(상설고문진보대전),新刊救荒撮要(신간구황촬요),大明律詩(대명율시)등이고,대구에서는 孝經大義(효경대의)가 재간행되었다. 1910년 무렵에 서울에 광고를 낸,태인에 있던 普明書館(보명서관)은 전주와 서울과 책을 유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2.3. 고전소설

19세기 후반부터는 소설 독자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면서 방각본 소설이 활발하게 출판되었는데 완판본 고전소설은 목판본과 필사본을 포함하여 상당한 양이 출판되었다. 완판본 방각본 소설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판본은 한문 고전소설인 구운몽이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숙종 때 서포 김만중이 지은 고전소설로 '숭정후삼도계해'의 간기를 가진다. 한문고전소설은 구운몽을 필두로 전등신화, 삼국지 등이 간행되었다.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의 최고본은 「별월봉기(하권, 48장본)」로 ‘도광삼년(道光三年, 1823) 사월일석구곡개판(四月日石龜谷開板)’이라는 간기를 가지고 있다. 현존하는 완판본 한글고전소설의 종류는 23가지이다. 이 가운데 판소리계 소설이 열여춘향수절가, 심청가, 심청전, 화룡도, 토별가 등 5종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영웅소설이다. 판본이 다른 종류를 합치면 약 50여 종류가 된다.

3.3. 안성 (안성판본)

3.3.1. 안성 (위치적 관점)

  • 과거부터 기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안성은 입지적인 요인으로 인해 하삼도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로 인해 전국의 물산이 집산했던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런 까닭에 안성지역에는 장시를 배경으로 상업활동이 활발했고, 한지, 유기, 연죽,유혜 등을 중심으로 한 전통수공업도 성행했다. 이런 경제적,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이후 기전의 대읍을 이루며 중부 내륙의 요지로 자리 잡았다.

3.3.2. 안성 (문화적 관점)

  • 서지전적의 간행과 관현한 문화지형으로 보면 조선시대에 정부에서 시헌력 인쇄를 해오던 역사 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안성은 인쇄출판의 변경이자 고도나 다름없는 곳이다. 안성지역은 경판방각본을 찍어낸 서울이나 완판의 전주, 달판의 대구와 달리, 서책의 간인 전통이나 경험이 많지 않은 탓에 방각본이 생산될 환경과 기반이 매우 취약한 곳이다. 다른 자리에서 논한 소략한 실물 자료들처럼 안성지역에서 산출한 혹간의 산물을 고려하면 완전한 불모지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이것들은 사찰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생산된 것일 뿐더러 모두 조선 중기 이전의 전통에 속한다.
  • 과거 조정에서 경서,농서,정법서,병서 등 행정과 일상생활에 필요한 서책을 널리 반포할 때 대개 감영이나 관아에서 복각으로 인출한 사례가 많지만 안성지역은 관찬본을 판각해 인쇄한 경우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문풍이 성해, 서원, 정사, 강당 심지어 서당에서까지 서원본을 찍어냈고, 문중이나 개인이 다투어 사각한 서책들이 널리 간인되었던 대구나 전주 지역과 달리, 개인문집의 사가판 간행도 안성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사정을 고려하면 조선 중기 이후 사실상 인쇄출판과는 거리가 먼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조선 후기 들어서 춘향전을 위시한 십수 종의 고전소설들을 방각본으로 찍어냄으로써 비롯된 출판문화가 안성지역에서 화려하게 만개한 것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막에서 장미꽃이 피어난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19세기 후반 어간에 이르러 고전소설들을 방각하기 시작했는지, 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지금까지 전혀 규명된 바가 없다. 상리에 밝은 중상주의적 기풍과 수공업이 훙융한 안성지역의 문화전통이 작용한 점을 부인할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 방각본의 출현을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게 분명하다. 안성판방각본의 개판기원으로써 역서의 인출 전통을 추적한 것은 그런 의문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3.3.3. 안성판본 (역서)

안성에서 역서를 찍었다면 찍어낸 책이 역서이니 만큼 간인지나 개판 주체를 표시한 판권지나 간기를 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실물 자료를 통해서 안성판 역서의 간행 내역을 확인할 방도가 없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성판방각본의 기원이 역서 인쇄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유력한 전거라 할 수 있다. 안성지역에서 유래한 여타의 사료나 전통과는 그 성격이 판이한 기좌리판 역서의 출판이 방각본 안성판본의 개판 기원에서 가장 유력하고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 배경으로 작용했음이 명약관화한 까닭이다.

3.3.4. 안성지역 방각소와 방각본 인출 현황

안성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방각본으로 박아낸 서책의 종류는 전통사회의 일상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필수 실용서인 책력이다. 역서가 안성지방판으로 안성 기좌리에서 방각된 시기를 서운관지(1818) 등의 기록을 상고할 때 개략적으로 18세기 중후반 무렵이었던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아울러 안성지방판으로 인출한 역서 또한 방각본의 개념에 부합하다는 점도 앞선 연구에서 논증한 바다.

안성판 역서의 방각이 고전소설을 중심으로 한 안성판방각본의 본격적인 등장을 위한 예비적 과정이었다고 할 때, 문제로 되는 것은 소대성전 등 무간기본들을 간인한 가칭 안성방각소는 물론이고 제마무전 등 '안셩동문이신판'을 개판한 동문이방각소의 실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실물 근거를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안성판방각본, 특히 고소설 판본들의 본격적 개판에서 동문이방각소가 중추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안성지역에서 판각 및 인출한 소설류 판본들의 기운을 헤아리는 일 또한 이 방각소가 처음 등장한 시점과 환경을 추적하는 데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4. 서목

4.1. 유학서

파일:논어언해하경룡장판3.jpg
방각본 유학서의 대표주자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이 있다. 1810년 전주의 출판업자 하경룡(河慶龍)이 간행하였으며, 교육용 교재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책의 판형 자체가 큰 것을 선호했다. 책의 판형이 클수록 종이 수요 또한 늘 수밖에 없었는데, 전주가 한지 생산지였기 때문에 종이의 수요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칠서방(七書房)에서 사서삼경과 그 언해서 간행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 전주지역에서 칠서방(七書房)을 운영한 출판업자 하경룡(河慶龍)이 간행한 상업용 책을 하경룡장판(河慶龍藏板)이라 일컫는다. 『논어집주대전(論語集註大全)』(20권 8책), 『논어언해(論語諺解)』(4권 4책), 『대학장구대전(大學章句大全)』, 『대학언해(大學諺解)』, 『중용장구대전(中庸章句大全)』, 『중용언해』, 『시전대전(詩傳大全)』(20권 10책), 『시경언해』(20권 7책), 『서전대전(書傳大全)』(10권 10책), 『서전언해』(5권 5책),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24권 14책), 『주역언해(周易諺解)』(9권 5책) 등이 그 예이다.

4.2. 실용서

파일:증보언간독-한구359.jpg
방각본으로 만들어진 실용서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관찰사의 행정 실무에 필요한 법의학서 '증수무원록언해'에 수록된 신체 모형 인쇄본, 교육용도서 '행곡본천자문’, ‘간독정요(簡牘精要)’·‘천기대요(天機大要)’ 등이 그 예다.

현재까지 확인된 최고(最古)의 방간 기록으로는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하였던 ‘고사촬요(攷事撮要)’이며, 이것은 일종의 백과전서이므로 서리(胥吏:말단 행정관리)는 물론 재야의 선비나 일반 서민들에게 수요가 많은 책이어서 방간본을 발행할 만한 책이었을 것이다.

4.3. 소설

방각본 중 특히나 인기 있었던 항목이 ‘소설’이다. 이덕무의 영처잡고(嬰處雜稿)에 시골 훈장들이 소설을 짓고 판에 새겨 책방에 팔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방각본 소설은 18세기에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문 방각본 소설은 1725년 을사본 <구운몽>(나주 午門), 1803년 <구운몽>(전주)이 가장 이르며, 한글 방각본 소설은 1780년 <임경업전>(서울 京畿), 1847년 <전운치전>(서울 由谷), 1848년 <삼설기>(서울 由洞)가 가장 이르다. 1725년 을사본 <구운몽>을 제외하고 모두 서울에서 나온 경판본(京板本), 전주에서 나온 완판본(完板本), 안성에서 나온 안성판본(安城板本)이다.
방각본 인쇄 기술의 보급과 18세기 농업기술 및 상품경제의 발달로 인한 '유흥 문화'의 요구가 결합 되면서 '소설 읽기 붐'이 일어났다. 소설 열풍은 궁궐, 저잣거리 등 장소와 양반에서 중인, 천민 등의 계급을 가리지 않는 '국민 오락'이었다. 이를 걱정해 정조가 '소설 금지령'을 내리고 '문체반정'(중국 고문(古文)의 정통 문체로 돌아가자는 정책)을 일으킬 정도였다.
'근래에 부녀자들이 다투어 능사로 삼는 일은 오직 소설을 숭상하는 것뿐인데, 날이 갈수록 더 많아져서 천여 종에 이르렀다. (중략)부녀자들은 생각없이 비녀나 팔찌를 팔거나 혹은 빚을 내서라도 다투어 빌려가서 그것으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낸다. 음식 만들고 바느질해야 하는 책임도 잊어버린 채 이렇게 하기 일쑤다.' (체제공 '여사서' 중에서)

4.4. 역서

역서는 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 따위를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책으로, 전통사회에서 이것을 반포하는 일은 제왕이 가진 권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이를 넘보는 행위에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졌다.

경국대전의 근간이 된 대명률은 역서 위조죄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역서를 위조하는 자는 목을 베어 사형에 처한다고 했으며, 몰래 인쇄할 경우 위조인신율(僞造印信律)에 의거 처벌한다고 했다. 이처럼 엄격히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빈번하게, 다양한 형태로 역서의 위조가 이루어졌다.

이는 1799년 관상감 제조 정민시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주청한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역서를 사적으로 인쇄하는 일은 법으로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도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법의 뜻을 모르고 월력장(月曆張)을 사적으로 만들고 인쇄해서 판매하는 것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니 각별히 엄금하는 뜻으로 각 도의 감영에 단단히 타일러 경계(申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니 임금이 따랐다.

역서 인쇄는 소설의 방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역서를 인쇄하는 데 참여한 안성의 지장들이 역서 인출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살려, 조선 후기 널리 인기를 얻어 수요가 많았던 ‘이야기책(소설)’의 방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5. 참고 문헌

  • 유춘동. (2021). 한국의 방각본 연구를 위한 보완 테제(These)-황진위 저, 이윤석·가첩·최묘시 역, 『중국의 방각본: 중국 상업출판, 천년의 역사를 고찰하다』, 민속원, 2020. 민족문학사연구, 75, 427-436.
  • 이태영. (2014). 완판본에 나타난 刊記의 특징. 열상고전연구, 42, 321-350.
  • 류준경. (2005). 서민들의 상업출판, 방각본. 한국사 시민강좌, 37, 155-172.
  • 하경룡장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김한영. (2014). 안성판방각본 초기 방각 상황 재고 ‘동문이방각소’ 판 한글 고소설 판본들. 한국학, 37(1), 193-226.
  • 최영희. (2019). 한글소설 방각본 서체의 조형적 특징 연구 -경판본과 완판본을 중심으로-. 동양예술, 42, 299-331

6. 같이 보기


[1] 류준경. (2005). 서민들의 상업출판, 방각본. 한국사 시민강좌, 37, 155-172.[2] 쉽게 짐작이 안 간다면 6~70년대에 많이 나왔던 생활 대백과나 연감 같은 걸 생각하면 쉽다.[3] 임진왜란 때 약탈된 금속활자의 경우 이후 에도시대 인쇄술의 근간이 되었다.[4] 이들에 대해서는 뒤의 '태인 방각본' 단락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