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6 14:54:58

모리스 드 삭스

<colbgcolor=#BDE9FF><colcolor=#000> 작센 백작
모리스 드 삭스
Maurice de Saxe
파일:609970-1464356265.jpg
이름 독일어 헤르만 모리츠 폰 작센
(Hermann Moritz von Sachsen)
프랑스어 모리스 드 삭스
(Maurice de Saxe)
출생 1696년 10월 28일
신성 로마 제국 고슬라어
사망 1750년 11월 20일 (향년 54세)
프랑스 왕국 샹보르 성
배우자 요하나 빅토리아 폰 뢰벤 (1714년 결혼 / 1721년 이혼)
자녀 아우구스트 아돌프, 마리 오로르(사생아)
아버지 아우구스트 2세
어머니 마리아 아우로라 폰 쾨니히스마르크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황제군2.3. 프랑스군2.4.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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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세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활약한 프랑스 왕국명장. 프랑스군 역사상 단 6명 밖에 없는 프랑스 대원수(maréchal général des camps et armées du roi)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696년 10월 28일 작센 선제후국 고슬라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였고 어머니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의 정부이자 스웨덴 쾨니히스마르크 백작가의 영애 아우로라(Aurora Königsmarck 1662~1728)[1]였다.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누나였던 브란덴부르크바이로이트 변경백비 빌헬미네[2]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352명의 서자를 두었다고 하는데 그 중 8명만 적자로 인정했고 모리스는 그렇게 인정받은 사생아들 중 맏이었다.

1698년 아우로라는 2살 난 아들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된 아우구스트 2세가 새로 거주하게 된 바르샤바로 보냈다. 그러나 아우구스트 2세는 대북방전쟁을 일으켜 스웨덴을 선제공격했다가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게 먼지나게 털리고 작센으로 도망가는 등 수난을 겪고 있었다. 불안한 정세로 인해 아우구스트 2세는 모리스를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폴란드와 독일 국경 지대에 머무르게 했다. 부모님과 오랫동안 분리되어 생활한 어린 시절의 성장 배경은 그에게 자립심을 심어주었고, 이는 그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2.2. 황제군

불과 12살의 나이에 그는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제국군[3]에 배속되어 투르네몽스 요새에 주둔한 부대에서 복무했고 말플라케 전투를 참관하기도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날 즈음, 스페인령 네덜란드브뤼셀에 있는 예수회 대학 입학 제안을 받았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이후 대북방전쟁에 참전하여 루스 차르국 표트르 1세루스 차르국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스웨덴군을 상대했다. 아우구스트 2세는 모리스에게 백작 작위를 하사했고, 부친과 함께 스웨덴령 포메른으로 가서 1712년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4세와 함께 가데부슈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전했다. 이듬해인 1713년 17세의 나이에 자신만의 작센군 연대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모리스는 성장하면서 점점 아버지를 닮아갔고 당대 기록에 따르면 '강건왕(August II Mocny)'이라는 별칭을 가졌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약력이 매우 강해 손으로 말발굽을 구부릴 수 있을 수준이었다고 한다. 1714년 3월 12일, 아우구스트 2세는 모리스를 자신의 신하중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던 뢰벤 백작의 딸 요한나 빅토리아 투겐드리히(Johanna Victoria Tugendreich von Löben 1699~1747)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낭비벽이 심했던 모리스는 아내의 재산을 너무 빠르게 탕진시켰고 결국 막대한 빚을 졌다. 이듬해 아들을 얻었으나 몇 시간만에 요절했고, 남편의 낭비벽에 자신의 재산이 바닥나는 것에 지친 요한나는 모리스와 심각한 불화를 빚은 끝에 1721년 3월 혼인 무효에 동의해 서로 결별했다.

이후 제6차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여 카를 6세를 섬겼고,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전쟁이 끝나자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 왕국 파리로 유학길에 올랐다. 1720년 프랑스군 야전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25년 자신에게 구혼한 안나 이바노브나의 후원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봉신국이었던 쿠를란트-젬갈렌 공작 후보에 들었고 이듬해 쿠를란트 공작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 황제 표트르 2세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되었다. 모리스는 프랑스 여배우이자 애인이었던 아드리엔 르쿠브뢰르(Adrienne Lecouvreur 1692~1730)에게 약 백만 프랑을 빌려 자신의 사병을 양성해 1727년까지 쿠를란트 공국을 지키려했으나, 러시아 귀족들과 마찰을 빚으면서 더 이상 러시아에 있기 어려워지자 파리로 돌아왔다.[4]

2.3. 프랑스군

파리로 돌아온 모리스는 프랑스군에서 복무했고,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전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의 사생아인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휘하의 부대에 배정되었다. 그는 필립스부르크 공방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선보였고, 승전의 공로를 바탕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프로이센 왕국과 몰래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고, 모리스는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보헤미아 왕국으로 파견되어 프라하를 함락시켰고 30년 전쟁 당시 외증조할아버지 한스 크리스토프 쾨니히스마르크(Hans Christoff von Königsmarck 1600~1663)가 스웨덴군에서 활약하던 당시의 명성을 그대로 재현해 전 유럽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듬해 에거(Eger 현 체코 헤프.)를 점령한 그는 쿠를란트 공국을 되찾고자 러시아로 갔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프랑스군으로 복귀했다. 1743년 3월 26일 프랑스군 육군 원수로 승진한 그는 두 배나 많은 적을 상대로 모국인 작센 선제후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 1744년 덩케르크에서 자코바이트의 지도자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함께 영국에섹스로 상륙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대부분의 함선이 난파되었고 모리스 본인은 겨우 목숨을 건져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파견되어 퐁트누아 전투에서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막내 아들인 윌리엄 오거스터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투르네에 이어 브뤼허, 헨트 등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다. 영국군브리튼섬으로 철수하면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는 모리스 드 삭스를 저지할 세력이 남지 않았고, 1745년 공세를 재개해 브뤼셀, 안트베르펜까지 점령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대부분을 점령했다.

그의 활약에 감탄한 루이 15세는 샹보르 성을 수여했고, 모리스는 1746년 4월에 프랑스인으로 귀화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무리한 공세를 개시했다가 사르데냐 왕국에게 대패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되찾을 것을 명령했다. 모리스는 선제 공격을 감행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동생 카를 알렉산더 공자를 상대로 로쿠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제국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 전공으로 그는 1747년 1월 프랑스 대원수로 임명되었다. 이어 라우펠트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머쥐었고 마스트리히트까지 함락시켜 프랑스에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마무리되었고, 2년 뒤인 1750년 사망했다.

2.4. 말년

말년에 그는 마리 린토(Marie Rinteau 1728/1730~1775)라는 유부녀와 바람을 피웠는데 1748년 린토는 사생아 딸을 출산했다. 이 사생아는 할머니의 이름을 따 마리 오로라(Marie-Aurore de Saxe 1748~1821)로 불렸다.

마리 오로르는 이후 프랑스 전역에 자자한 모리스의 명성 덕분에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프랑스 왕실에서 거두어져 루이 15세의 며느리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5]의 양녀가 되어 왕족에 버금가는 교육을 받았다.

이 마리 오로르가 두번째 남편[6] 루이 클로드 뒤팽에게서 낳은 아들 모리스가 바로 프레데리크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의 아버지다.혈통이 참 복잡하다 즉, 모리스 드 삭스는 조르주의 증조할아버지.
[1] 여담으로 아우로라의 오빠 필리프는 영국 국왕 겸 하노버 선제후 조지 1세의 부인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와 바람을 피다가 살해당했다.[2] Wilhelmine von Preußen, 1709년 ~ 175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장녀다.[3]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명령으로 신성 로마 제국 전체에서 소집되는 군대. 18세기까지만 해도 제국 전체를 대표하는 군대의 성격을 띄었으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을 거치며 점차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대가 되어버렸다.[4] 르쿠브뢰르는 모리스에게 버림받았고 1730년 3월 15일, 볼테르의 희곡 작품 중 하나를 공연하던 중 기절해 집으로 실려갔으나 나흘 뒤 사망했다. 경쟁자인 부용 공작비 마리아 카롤리나 소비스에카(Maria Karolina Sobieska 1697~1740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손녀)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 당시 배우는 교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거부되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이 사건을 주제로 시를 썼다.[5]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의 4녀이자 프랑스의 루이 왕세자의 아내로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어머니다. 마리 오로르의 아버지 모리스 드 삭스와 마리아 요제파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3세가 이복형제이기 때문에 사촌이기도 했다.[6] 첫번째 남편은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가 마리 오로라의 앞길을 위해 그녀가 18세 때 정략결혼시킨 43세의 앙투안 드 호른 백작이었으나 사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