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난의 전반생
원래는 '마츠다이라(松平)' 성을 사용했으며, 기반이 되는 지역은 미카와국 오카자키(지금의 아이치현 동부의 오카자키시. 나고야시보다 조금 더 남동쪽에 있는 중핵시)이다. 아명은 타케치요(竹千代, 마츠다이라 가문의 후계자에게 대대로 주는 아명).관례를 올리면서 받은 이름은 마츠다이라 지로사부로 모토노부(松平次郎三郎元信).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 노부나가의 아버지)에서 한 글자씩 따 왔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원래 이마가와와 오다 사이에 낀 약소한 세력이었으며, 마츠다이라 가문은 미카와를 사이에 두고 다투는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온전히 독립된 영주로서 군림하지 못하는 처지였다.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이마가와 쪽 심기를 의식해서인지 노부(信)를 빼고 오다를 상대로 분전한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淸康)로부터 야스(康)를 따와 마츠다이라 구란도노스케 모토야스(松平藏人佐元康)로 개명한다. 후에 이마가와 가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난 뒤 모토(元)도 빼고 마츠다이라 구란도노스케 이에야스(松平藏人佐家康)로 개명한다.[1] 특히 이름을 여러 번 바꿨어도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야스(康)는 끝내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거나 등의 이유가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유약하던 아버지에 비해 할아버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는 미카와 일대에서 이름난 맹장이었고, 훗날 이에야스가 독립하였을 때 가신들과 영민들도 조부와 비견을 많이 했다.[2]
타케치요 시절에 동쪽의 이마가와 가문으로 인질로 가던 중에 새 외가인 도다 일족이 일행을 오다 가에 팔아넘겨 오다의 인질이 되는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 덕에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와 친분 관계를 갖게 되었다. 이후 이마가와군과 벌인 전투에서 포로가 된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 노부히로(? ~ 1574)와 맞교환되며 이마가와의 인질이 되었다.
대망 등 소설에서 이에야스가 인질 시절에 이마가와에게 학대받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학대설은 역사적인 출처가 없으며 자신의 조카인 세나히메를 시집 보내고, 이마가와 가문의 가장 유력한 책사인 타이겐 셋사이를 가정교사로 붙였다는 설까지도 있을 정도로 실제로는 꽤 대접받았을 가능성도 있다.[3] 그러나 이마가와는 이에야스가 성인이 되고 나서도 슨푸에 계속 잡아두고 미카와에는 자기 가신을 보내서 대신 지배하게 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에야스의 조부 마츠다이라 키요야스(松平清康, 1511년 ~ 1535년) 시절에 일시적으로 미카와를 통일하긴 했지만 키요야스가 오다 측의 모리야마 성을 공략하던 중 가신에게 암살당하면서 미카와는 예전의 사분오열 상황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는 숙부에게 추방당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원조를 받아 다시 오카자키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키요야스 시절의 세력을 회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오다 노부히데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고 이마가와의 지원을 받아 겨우 세력을 보존하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 마츠다이라 가는 이마가와의 가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4] 이에야스가 인질로 보내진 것도 주종관계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미카와 진출을 위해 마츠다이라 종가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나 마츠다이라의 입장에서도 이마가와의 비호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했으므로 손해보는 관계는 아니었다. 요시모토의 입장에서 보면 마츠다이라 종가는 과거야 어쨌든 지금은 미카와 일부 지역에 세력을 가진 호족일 뿐인데, 그 가문의 후계자를 일문으로 들였으니 제법 파격적인 대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마츠다이라 가문이 요시모토에게서 입은 은혜가 적지 않음에도 요시모토가 죽자마자 관계를 끊고 독립한 것이 도의적으로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즉, 소설에서의 묘사는 어디까지나 허구일뿐이고, 실제로 그 당시의 기록 및 드러난 정황증거를 바탕으로 파악했을 때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를 배신했다는 것이 일본사학계의 정설이다.[5] 요시모토에 대한 나쁜 이미지는 에도시대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신군전설의 부속물인 것이 크다.[6] 실제로 이에야스가 볼모로 잡혀있고 인질로 잡혀있다곤 해도, 오케하자마 전투가 일어나기 1년전 인질시절에 오카자키에 있는 가신단에게 가법을 만들어서 공표한 적도 있고, 그 가법에 나(이에야스)의 명령에 불복한다면 세키구치 치카나가(関口親永, 1518 ~ 1562), 아시나 모토나가에게 읍소해보라고 한 내용을 보면 소설등의 묘사와는 다르게 이에야스가 인질인 시절에도 오카자키와의 주종관계는 여전히 성립하고 있었으나 그 가신단에 대한 장악력이 부족하였고, 그 것을 이마가와 가문이 오히려 후계자입장에서 이에야스의 권력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마가와 가의 대우나 요시모토에 대한 이미지, 배신의 여부 등과는 상관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인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마가와와 손을 끊고 독립할 생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오케하자마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바로 자신의 본래 영지로 돌아와 이마가와와 손을 끊고 가신단을 장악하고 오다와 손을 잡았다는 점만 봐도[7] 처음부터 오다와 손을 잡을 생각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기만을 기다렸다고 볼 여지도 있다.[8][9]
사실 아무리 이마가와 가가 이에야스를 잘 대해주고 교육시켜주고 결혼까지 시켜줬다고는 해도 당시 이에야스의 신세는 어디까지나 인질에 불과했다. 즉, 어느 날 갑자기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변덕에 쉽게 목숨을 위협받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는 것. 또한 아무리 뭐라고 해도 원래 이에야스의 영지인 미카와를 이미가와가 멋대로 다스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에야스의 인질 생활이 아무리 기존에 알려진 것에 비해 나쁘지 않았다고 해서 이른바 이에야스의 고난의 인질 생활에 대해 반감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역으로 이마가와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이에야스가 뒤통수를 쳤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렇게 이에야스의 신세가 좋았다면 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은 직후 이에야스는 이마가와를 배신했겠는가? 결국은 이마가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10][11]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공격을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국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를 기습하여 목을 쳤고, 이마가와 군에 종군하여 쏠쏠한 군공을 세웠던 이에야스도 급히 퇴각하여 오카자키에 입성해 혼란을 틈타 사실상 이마가와에서 독립하였다. 이후 후지나미나와테(현 아이치 현 도요하시 시 일대)전투 등을 통해서 미카와를 흡수하면서 자립,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이른바 기요스 동맹)을 맺음으로 이마가와의 종속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후 노부나가는 미노 국, 이세 국 등을 정복하며 서쪽으로 확장해갔고, 이에야스는 영지 내의 잇코 종도의 반란을 진압해가며 착실히 세력을 키웠다.
별개로 이에야스 개인적으로는 슨푸에서의 일상 생활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는지, 후일 스루가 지역을 확보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간토 지역으로 전봉되기 전까지 슨푸를 거성으로 삼고 증축했으며 오고쇼가 된 뒤엔 재차 슨푸를 거처로 삼아 성과 시가지를 정비하여, 그 곳에서 노후를 보냈다.
2. 미카와 잇코잇키
三河一向一揆인질 시절에 이은 제2의 고난. 이때는 이에야스의 목숨조차 위험했다.
혼쇼지(本證寺)를 거점으로 하는 승려 쿠세이(空誓)[12]가 격문을 날려서 일향종(一向宗) 신도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선 것. 딱히 이에야스가 일향종을 박해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당시 미카와 서쪽은 일향종, 동쪽은 조동종(曹洞宗)이 번성했는데 이에야스가 미카와를 통일하려고 했기 때문에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추측된다. 즉 최종적인 목적은 이에야스에게서 기득권을 인정받거나 혹은 이에야스를 죽이고 친 일향종 성향의 다이묘를 옹립하는 것이었던 셈. 직접적인 계기는 불명이지만 원인이 명확하므로 중요하지는 않다.
실은 이전까지 지배하던 이마가와 가는 일향종의 사찰에는 세금을 면세하고 지역 자치를 인정했다. 그런데 독립에 불타던 이에야스는 병량을 비축하기 위해 절에도 세금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미카와 잇코잇키의 원인이 되었다.
일향종은 꽤 번성했으므로 마츠다이라 가의 가신 중에서도 신도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츠다이라 가가 탄생한 이후[13]로 계속 마츠다이라가를 섬겨온 사카이 가에서도 배신자가 나올 정도였다. 후에 이에야스의 정치적 상담역이었던 혼다 마사노부도 이에야스를 배신했다.
당시 혼다 가나 사카이 가 등의 유력한 일족들도 둘로 갈라져서 싸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분가이면서 종가를 없애고 그 자리를 빼앗을 궁리만 했던 사쿠라이 마츠다이라 가문도 여기에 참여. 그 밖에도 이마가와 가를 버린 이에야스에게 원한이 있던 이마가와 가의 잔당도 합세하여 이에야스의 근거지인 오카자키성까지 적병이 몰아닥칠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일족 대부분이 배신을 했음에도 혼자서 개종까지 하면서 이에야스의 곁을 지킨 젊은 장수가 있었는데, 바로 혼다 타다카츠로 타다카츠는 이때 무공과 충성심을 높게 평가받아서 고속 출세를 하게 된다. 물론 타다카츠 말고도 이에야스의 곁에 남기로 한 가신도 많았고 그중에서 이시카와 카즈마사(1533 ~ 1593)는 일향종에 투신한 아버지를 등졌으나 결국 후에 이에야스를 버리고 히데요시의 밑으로 갔다.[14]
결국 성에 의지하여 어떻게든 버티고 직접 이에야스가 진두지휘[15]를 취하는 등의 수단으로 힘들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죽거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가신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가신들이 용서받았다. 이에 대해 이에야스가 관대하다고 평할 수도 있지만 사실 집안을 떠받들던 중신들도 반수 이상이 잇키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들을 전부 벌했다가는 집안이 그대로 망할 판이었고, 또 잇키에 참여하지 않고 이에야스의 곁에 남은 가신들도 같은 핏줄이었으므로 섣불리 벌했다가는 후환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용서했다는 게 중론이다. 잇키에 가담했다 용서받은 가신 나쓰메 요시노부는 이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를 피신시키다 전사한다.
실제로 이에야스는 일향종과 화평을 맺으면서 그들도 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일단 화평이 맺어지고 정리가 되자 바로 약속을 깨고 영내에서 일향종을 금지했으며 잇코잇키를 주도한 3개의 절[16]에 불을 질러서 쿠세이는 목숨만 건져서 도망쳤다고 한다.[17]
한편 이 미카와 잇코잇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왔는데, 이 일을 계기로 영내의 반대파를 싹 모아서 숙청하고 또 가신단 내부의 결속을 다질 수 있게 되었다. 당시 다이묘들은 봉건군주에 가까웠기 때문에 무엇을 할 때도 가신들의 반대가 있으면 그것을 억지로 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에야스의 경우 가신들이 한 번 반역을 했다가 용서받게 되었기 때문에 대놓고 반대의견을 내기 쉽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또 영내를 정리해야 다른 곳도 노려볼 수 있으므로 미카와 영내에서 큰 세력을 떨치던 일향종을 소탕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수확이었다.
3. 세력 확장
그리하여 1566년 미카와 동부와 북부를 평정, 미카와 국을 통일하였다. 이때 조정에게서 종오위하(従五位下) 미카와노카미(三河守)로 서임받았고, 도쿠가와 씨(德川氏)로 개성하면서 그의 이름은 최종적으로 도쿠가와 지로사부로 이에야스(徳川次郎三郎家康)가 되었다. 본래 마츠다이라 씨(松平氏)는 떠돌이 중이 미카와 국 마츠다이라 마을에 정착하며 시작되었다고 하는 호족 출신으로 아무래도 정통성이나 가문의 권위가 좋지 않았는데, 미카와 국을 통일한 참에 조정으로부터 상당한 권위를 가진 족보를 인정받아 갈아탄 것이다. 이때부터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의 일파인 닛타 씨(新田氏)의 세라다(世良田) 도쿠가와(得川) 가문 후손을 자처하였다. 마치 진짜 닛타 씨의 후손인 것처럼 행세했기에, 후일 닛타 씨 출신인 한 승려가 자신의 부하에게 굽신거리자 '같은 닛타 씨인데 눈뜨고 못보겠네. 우리 집안이 걔보다 명문인데 왜 그렇게 저자세로 구니?'하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미카와 국을 통일한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노려 카이(甲斐), 시나노(信濃)의 다케다 신겐과 연합, 이마가와를 멸망시키고 그 영지를 분할하여 도토미(遠江)는 마츠다이라 가문, 스루가(駿河)는 다케다 가문에 속하게 되었다.(1568)[18] 이때 이에야스는 거성을 도토미의 하마마츠로 옮긴다.(1570)
1570년 노부나가가 아사쿠라를 칠 때 종군하였으며 아자이의 배반으로 발생한 가네가사키 전투, 아자이와의 결전이었던 아네가와 전투에도 모두 참여하였다.
오다 가문이 아자이와의 일진 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1572년,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오다 공격을 결심하고 동해도(도카이도)로 진격하였다. 이에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맞서지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겐에 맞서는 길을 택했고, 다케다보다 수가 적으면서(11,000명 vs 27,000명)도 다수 대 소수에 유리한 학익진으로 도전했는데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종심 깊은 어린진으로 대응한 다케다 군에 크게 패배하였다. (전사자 2,000명 vs 200명) 오다측의 대장이었던 히라테 히로히데(平手汎秀, 1553 ~ 1572)[19]는 전사하였고, 도쿠가와 측은 도리이 시로자에몬, 나루세 마사요시, 나쓰메 요시노부 등의 유력 가신을 잃고 패주하였다.(미카타가하라 전투) 이것은 이에야스가 겪은 패배 중 가장 처참한 것이었다. 후에 이에야스는 패주해 와서 우거지상이 된 처참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젊은 날의 객기, 혈기에 대한 교훈으로 삼게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최근에는 아들인 도쿠가와 요시나오가 아버지의 고난을 잊지 않기 위해 그렸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다케다 신겐에게 패퇴한 직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현재 아이치현 나고야의 도쿠가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20][21][22]
이후 그는 화공을 불러 지금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라 명했다고 한다. 이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한 와신상담 비슷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 무사들이 명예를 중시했던 것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행동이다. 이 그림의 정식 제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 화상(徳川家康三方ヶ原戦役画像)>이지만, 세간에는 '이에야스의 우거지상(しかみ像)'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 속 주인공은 이에야스가 아니라는 설도 있으나 저 초상으로 석상까지 만들고 있으니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다케다 신겐에게 대패하여 도망친 후에는 거성인 하마마츠성에서 농성하며 월동하고 있었는데, 이 위기는 다케다 신겐의 갑작스러운 병사와 그로 인한 전 다케다군의 철군으로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겐 사후 타케다 가를 실질적으로 계승한 다케다 카츠요리가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그해 가을에 다시 동 미카와로 진출하는 등, 다케다 상대로는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1575년, 타케다 카츠요리는 부친의 사망 시에 도쿠가와에 붙은 나가시노 성의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의 재포섭에 실패하고[23], 이를 정벌하기 위하여 15,000명의 대군을 일으켰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를 요격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참전, 이에야스도 이에 호응하였기 때문에 그 군세는 38,000명이었다. 양군은 그해 5월 21일(태양력 6월 29일)에 미카와 국의 시타라가하라에서 회전하였다.(나가시노 전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6,000명에 가까운 전사자를 내면서도 다케다 군을 격퇴하였다. 카츠요리는 이 패전 이후 우에스기 가와 동맹을 맺고 가문 재건에 힘썼으나 오다-도쿠가와 연합의 지속적인 공격에 가신들이 이탈하면서 결국 1582년 멸망한다.
한편 이 시기, 노부나가의 딸인 며느리 도쿠히메와, 이마가와의 조카이자 이에야스의 아내 츠키야마도노 간의 고부갈등으로 오다 노부나가와의 관계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이 갈등은 어찌보면 당연한 게 이마가와 가문의 일원으로서 자란 츠키야마도노에게 있어 도쿠히메는 자신의 삼촌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벤 오다 노부나가의 딸이니만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이에야스와 츠키야마도노의 결혼 당시와 달리 도쿠가와는 이마가와의 영향력을 이미 벗어던진 지 오래인지라 츠키야마도노는 가문 내에서 전혀 뒷배경을 가지지 못한데 비해 도쿠히메는 기세등등한 오다의 딸이니 내전에서의 세력 다툼도,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노부나가가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아들 노부야스에게 자결을 명해 이에야스는 이에 따랐고, 츠키야마도노는 살해되고 노부야스는 자결했다.(1579) 단, 이 건에 대하여는 토쿠가와 가 내의 하마마츠파(이에야스파)와 오카자키파(노부야스파)간의 대립의 산물로 보는 시각 또는 단순한 부자 간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 등이 있어 진상은 확실하지 않다.[24]
4. 혼노지의 변 이후
1582년 6월 초,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지에서 사망하였다. 노부나가 사망 당시 이에야스 또한 교토에 있었는데, 아케치의 모반을 안 직후 이에야스는 사카이에서 이가의 경호를 받으면서 험준한 산을 넘는 도피행(이가고에) 끝에 미카와로 무사히 도망하였고[25] 미카와 귀환 직후에 미츠히데 토벌을 위한 군세를 편성하여 이미 오와리에 이르러 있었다. 이후 사실상의 공백지가 된 구 다케다의 영지를 흡수하였고, 간토의 패자인 호조 가와 사돈의 연을 맺으면서 도카이 지방의 패자로 등극하였다.한편 혼노지의 변 보름 뒤에 노부나가의 부하인 하시바 히데요시(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를 격파하였고, 그 달 말에는 오다 가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키요스 성에서 가신들(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츠네오키) 간에 다음 당주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가 열렸다. 당시 노부나가의 장성한 아들로는 2남 오다 노부카츠, 3남 오다 노부타카가 있었으나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남 오다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를 옹립시키는 데 성공하여 가신 중 약간의 우위를 점했고, 이듬해에는 오다 가 가신의 필두였던 시바타 카츠이에와 전쟁이 발발, 오미 국 시즈가타케에서 하시바 군이 승리함으로써 히데요시가 노부나가 사후 패권에 한발 앞서게 된다.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이에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과 시바타 카츠이에를 지원하며 히데요시에게 적의를 표했고, 이후에는 차남인 노부카츠와 함께 히데요시에 맞서 싸워 전술 국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승리를 얻었다.(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히데츠구가 이끄는 기습작전을 이에야스는 역기습으로 차단. 도요토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전술면에서는 패배했지만 정략에 능하다는 평가답게 오다 노부카츠와 화친함으로써 이에야스가 전투를 계속할 명분을 끊고, 도쿠가와 가문의 고참 가신이던 이시카와 카즈마사를 배반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이에야스를 압박했다.
그 후로도 한동안은 적대 관계가 계속되었으나, 히데요시는 대다이묘인 이에야스랑 싸워봤자 이득 볼 게 없었고 이에야스도 시바타 카츠이에를 숙청하고 오다 가문 세력을 흡수한 것도 모자라 오사카-교토를 장악해 천하인이 되기 직전에 가까운 히데요시를 지금은 이길수 없다는 판단을 한다. 결국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의 권위에 굴복하고 히데요시의 거성 오사카 성에 입조하였다.(1586) 이때 이에야스는 차남인 오기마루(후일의 유키 히데야스)를 히데요시의 양자(사실상의 인질)로 보내었고, 히데요시는 이부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고 신뢰의 증표로 히데요시의 친모도 함께 보내어 사실상의 종속관계를 구축하였다.
1590년 2월, 히데요시는 사나다와 호죠의 누마타 분쟁에 개입, 양측의 의견을 조율해 나루구미성을 포함한 1/3을 사나다에게 나머지를 호죠가 가진다는 중재안을 양 가문 대표단이 승락했으나 호죠는 누마타 성을 차지하자마자 나루구미를 공격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다. 당연히 도요토미는 분기탱천하여 도요토미 가를 따르지 않는 호조를 정벌하였는데, 이때 이에야스도 어쩔수 없이 종군하였다.[26] 오다와라성 공방전에서 호조는 히데요시의 유례 없는 대군에 포위당해 장기인 농성전을 거의 펼쳐보지 못한 채 그해 여름에 항복하였고, 호조 우지마사 등이 할복하면서 멸망하고 만다.
이후 이에야스는 호조의 영지였던 간토로 전봉되었다. 표면상으론 영지가 100만 석 이상 늘어난 영전이었으나, 히데요시는 삿사 나리마사 등 구 오다 가문의 가신들에게 영지 교체나 그로 인한 잇키(농민 봉기) 등의 트러블을 구실로 교묘히 숙청하는 상황이었으며 간토의 영민 및 무사들은 반항적, 독자적인 기질과 용맹함[27]으로 유명했으므로, 기존의 지지층인 미카와 지방을 모조리 빼앗고 호조 가문이 4대에 걸쳐 다스렸던 영지로 보낸 것은 "어디 생고생 하고 숙청당해봐라" 라는 노골적인 견제나 다름없었다.[28][29]
그러나 도쿠가와가의 옛 영토에 대한 히데요시의 관리 실패 및 히데요시가 얕본 이에야스의 내정 역량을 발휘하며 인해 도요토미 정권 개막 뒤 이에야스는 무사시, 이즈, 사가미, 가즈사, 시모사 5개국 완전 지배 + 고즈케, 시모즈케 및 히타치의 일부를 지배함과 동시에 옛 영토(미카와, 도토미, 스루가, 시나노, 가이 등)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 않은 거물로 성장한다. 명목상 총 석고는 150만 석에서 250만 석으로 증가,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이는 천하인인 히데요시의 석고 220만 석보다 더 많은 것이었다.[30][31]
이에야스는 간토에 들어오면서, 그 거점을 가마쿠라 막부가 존속했던 가마쿠라, 호조 씨의 중심지인 오다와라(小田原) 등에 두지 않고, 오타 도칸이 1457년 에도성(江戶城)을 축성한 뒤 관동 내륙부에서 도네가와, 아라카와를 거쳐 도쿄만에서 가마쿠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가 된 에도(현 도쿄도 특별구 중심부)에 두어 이를 철저히 개발하였는데, 이는 히데요시의 오사카 조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볼 수 있을 것이다.
5. 임진왜란의 시작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이라는 본인의 야망을 실현할 겸 급속히 세가 불어난 휘하 영주들에게 나눠줄 땅을 확보할 겸 전국시대를 거쳐 비대화된 각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소모시켜 관리하기 위해 조선침공군을 일으키려 했다. 이러한 독단적인 결정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해 고니시 유키나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도요토미 가(家)의 중진(重鎭)들이 명나라를 우려해 반발했지만, 히데요시는 결국 출병을 강행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난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최대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임진왜란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받았지만[32] 반전파인 도쿠가와는 내부문제는 거의 해결된 상황이지만 관동 일대의 반란 진압 및 관동 경영을 핑계를 대며 관동 다이묘들을 비롯한 자기 세력의 참전 규모를 최소화하고 일부만 전진기지인 지금의 사가현 가라쓰시 히젠 나고야성[33]에 주둔시키는 선에서 멈춰버렸다. 히데요시로서는 이에야스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했으나, 이에야스의 세력은 히데요시와 마에다 토시이에에 맞먹을 정도로 상당했고 히데요시의 세력은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었기에 이에야스에 참전을 강제할 수 없었다. 결국 이에야스의 군사적 지원을 포기해야만 했다.[34] 그리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역량을 크게 손상하면서 이 선견지명은 제대로 들어맞게 된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출전이 좌절되자 마에다 토시이에 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으로 파견되는 안건들이 고려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무산된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조치는 조선과의 관계 회복에 중요한 명분이 되었고, 조선 측에서도 의도는 의심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정권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35]
6. 막부의 성립과 오고쇼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야심을 조금씩 드러내며 아직 강한 도요토미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 도요토미가 내부의 오와리 국 출신의 다이묘들을 포섭은 물론 매일 성대한 연회를 열며 자신의 부와 재력을 과시하며 도요토미에 불만이 있던 다테 마사무네와 같은 다이묘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본래 이들 오와리 출신 다이묘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위 오미파라 불리던, 가문 내에서 비교적 신참 다이묘들과 기타 거대 가문들을 규합하여 도요토미가 내부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고, 양자를 모두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던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사하자 분쟁이 걷잡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른다.이러던 중 1600년 6월, 아이즈의 우에스기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고발과 우에스기 가문의 도발적인 대답[36]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이를 토벌한다는 구실로 오사카에서 출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이자 '천하를 둔 전투'라 일컬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었다. 이에 이시다 미츠나리는 준비된 각본이었다는 듯 도쿠가와가 도쿄서 거병해 아이즈로 올라가던 도중 모리 데루모토를 명목상 총사령관으로 내세워 서군이 거병, 이에 후계자 히데타다에게 사나다 견제를 맡기고 친도쿠가와 세력과 합류해 오사카로 향한다. 결국 세키가하라에서 서군과 결전을 펼친다. 도쿠가와와 사전에 내통하던 서군을 분열시킨 뒤 대다이묘 답게 군사적 재능이 떨어지던 미츠나리보다 더 능숙하게 병력을 지휘해 단 6시간만에 정리하여 승리, 마침내 천하를 잡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 대한 자세한 상황은 문서 참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직할 영지를 오사카 성과 그 일대의 65여만 석(본래는 220여만 석)으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자신을 적대한 서군 가담측 가문들도 모두 개역(추방) 또는 감봉, 전봉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를 예전부터 따르던 중신들 및 일족들을 전국의 요지에 배치하였다.
1603년에는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에 취임하고 에도에 바쿠후(幕府)를 열어 사실상 전국을 통일하였다. 1605년에는 쇼군 직을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그 자신은 '오고쇼(大御所)'[37]라 칭하며 표면상으로는 은퇴하였다. 쇼군 취임 당시 이미 60이 넘은데다 전임자가 세운 정권이 두 번이나 뒤집어지는 걸 경험한 이에야스로서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들에계 지위가 계승되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에 거처하고 하야시 라잔(林 羅山, 1583 ~ 1644)[38], 차야 시로지로, 윌리엄 애덤스 등 주요 인재를 등용하였다.
하지만 도쿠가와 가문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엄밀히 말하면 서군에 섰다 숙청당한 것은 도요토미파 중에서도 이시다의 문치파 뿐이었고, 승리한 동군은 온전히 도쿠가와 가문의 힘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도요토미 가문에는 충성을 다하면서도 이시다의 문치파가 너무 싫어서 돌아서 무단파 다이묘들의 힘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도요토미 가문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이러는 와중에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장성하여 우대신에 취임하면서 불안감이 더해졌는데, 도쿠가와 이예야스가 취임한 쇼군은 원칙적으로 오랑캐 토벌대장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취임했던 간파쿠는 덴노의 전권대리인이라 권위가 더 컸기 때문에, 적어도 기존 공경귀족들처럼 대항할 시늉조차 할 수 없도록 싹을 뽑아놓던지 아예 죽여버리는 수준까지 짓밟지 못하면 슬금슬금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관위가 오르다가 간파쿠에 복귀하는 순간 무단파 다이묘들의 지지를 받고 도쿠가와 쇼군의 머리 위에 올라서는 악몽이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사과의 의사를 표하고[39] 임진왜란은 일본의 뜻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 혼자만의 뜻이었음을 강조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른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출전한 것이라 해명하며[40], 소 요시토시를 시켜[41] 임란시 납치된 조선인과 약탈품들을 가능한 한 송환하도록 했다. 또한 도요토미계의 잔당들과 후예들을 '수적'이라 칭하면서 그들을 모두 소탕해 씨를 말렸다고 조선 조정에 알리면서 양국 관계가 점차 회복된다.
7. 오사카 전투와 사망
도쿠가와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을 안심시킬 겸 자신의 친딸 센히메를 히데요리에게 결혼시키면서 도요토미를 따르는 무단파를 조금씩 숙청하거나 자연사하면서 약해져가는 도요토미 가문을 박살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가문은 히데요시가 엄청난 재화를 쌓아놓은데다가 사카이라는 황금알 교역항이 있던 도요토미 가문의 재력과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며 이에야스는 숙청해야 할 대상으로 위험시하고 있었다.어떻게든 이를 소모시키기 위해 내놓은 책략이 '호코지(方広寺)[42] 종명 사건'이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건설이었기에 건축허가를 계속 미루다가 도요토미의 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이를 허가하였고 도요토미 가문은 곧바로 막대한 예산을 들여 호코지 대불전을 건립한다. 문제는 이 호코지 대불전의 범종에 새겨진 명문의 글귀 가운데 "國家安康, 君臣豊樂(국가안강 군신풍락)"이란 문구를 두고 이에야스(家康)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고 도요토미(豊臣)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이므로, 이것은 이에야스를 저주하고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는 역저주라는 음모론적 해석이 이루어져 트집거리가 된 것이다.[43]
이를 빌미로 전운이 감돌자 도요토미측 화평파가 방문해 오해를 풀려고 했으나 정작 이에야스 측은 사죄를 한다면 자신이 지정한 지역으로 전봉을 요구한다. 당연히 도요토미측은 이에야스가 전봉시킨다면 시코쿠나 규슈 등 재기를 노릴수 없는 지역으로 보낼것이 뻔하니 이를 거부, 결국 1614년 겨울에 오사카 토벌의 군을 일으킨다. 이때 도요토미 가는 히데요시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키무라 시게나리 등 기존 가신들과 사나다 유키무라라 불리는 사나다 노부시게 등 이름난 낭인들을 고용해 부족한 장수들을 보충하고 병졸들도 모아 10만 가량의 군을 동원하며 거병하였다. 이에야스는 사나다 노부시게가 유폐된 구도야마에서 나왔다는 소식에 가장 위험시한 사나다 마사유키가 오사카에 합류한 줄 알고 식겁해했으나 마사유키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안심해하며 이에야스는 자신을 따르는 다이묘들에게 토벌령을 내려 오사카로 집결시켜서 모은뒤 20만 대군을 직접 이끌었다. 이런 이에야스를 상대로 도요토미 가문의 상층부는 무능했지만 현장 지휘관인 오인중과 사나다 노부시게가 축성한 사나다마루라는 외성, 히데요시가 만들어둔 2중 해자라는 인공지형, 오사카성의 천연지형 덕에 이에야스 진영을 여러번 물 먹였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지고 전쟁이 장기화 되는데다가 진척이 없어 도쿠가와군은 병량 부족과 사기 저하로 전의를 상실했고, 더 나아갔다가는 호령에 모인 다이묘들이 다른 맘을 풀지도 몰랐다. 반대측인 도요토미군은 식량은 막대한 재화로 사들여둬서 2년 이상 버틸 식량이 있었으나 장기간 농성으로 인한 화약 부족과 연일 이에야스가 야간에 병력들을 동원해 소리를 질러대거나 땅굴 파는 듯한 블러핑, 대포 사격 등등 심리적 압박감으로 지쳐 있었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막내동생인 오다 우라쿠사이를 사자로 하여 강화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대포를 이용하여 성내의 건물을 직접 포격하여 교섭에서 우위를 점했다. 1614년 12월 18일부터 재개된 강화 교섭은 19일에 합의에 이르렀고, 20일에 서약서가 교환되면서 종결되었다.
당시 양 군에 부과된 조건은 다음과 같다.
히데요시 가의 의무는
- 본성을 제외한 둘째 성곽(二の丸)과 셋째 성곽(三の丸)을 철거하고, 바깥 해자를 메울 것
- 요도도노(淀殿 ;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를 인질로 삼지 않는 대신, 도요토미 가의 중신이 인질을 낼 것
이에 대하여 토쿠가와 가의 의무는
- 히데요리의 신변의 안전과 영지의 보장
- 성 중의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을 것
을 강화의 조건으로 성곽의 철거를 요구하는 조항은 당시 보편적인 것이었고 다분히 의례적인 면이 강한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이를 철저히 시행하였고 영지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진척을 확인했다. 본래 성곽의 철거는 수비측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공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가신들에게 철거를 명령하여 이를 철저히 진행했다. 안쪽 해자를 메우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속설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고 위의 이야기가 과장되어 전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도쿠가와 측도 전쟁 준비를 중단한 것이 아니었고, 도요토미 가문 쪽에서도 고용된 낭인들을 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의 긴장은 사실상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이듬해 4월 오사카측이 교토 일대를 약탈하거나 방화를 저지른 사건, 해자를 다시 파내며 수비를 정상화 하려던 행동이 도쿠가와측에게 빌미를 제공했는데, 이에야스는 이전과 같이 오사카측에게 병사들의 해고와 영지 이전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한 도요토미 가에 대해 이에야스는 교토 교외에 휘하 다이묘들을 집결시켜 무력으로 이를 압박하였고, 5월 초에는 다시 오사카 여름 전투가 벌어졌다.
겨울 전투에서 가장 활약하던 사나다 노부시게라 하더라도 오사카 성은 해자가 다 메워져서 사실상 벌거벗은 사람에 가까울 정도로 방어에 취약한 상태였고 이에 농성이란 수단은 무리였다. 당연히 이 전세를 읽을줄 알던 병졸 낭인들과 주민들은 피난을 한 끝에 5만 5천명정도 동원이 가능해질 정도로 초라해졌다. 사나다 노부시게는 농성이 안 되니 외부 관문을 요새화해 버티는 전략을 짰지만 초반부터 고토 마타베를 포함한 장수들이 전사하며 계획이 일그러진다. 역전의 한방을 노리던 노부시게와 모리 카츠나가는 카츠나가가 도쿠가와군을 붙잡아 두는 사이 사나다 노부시게와 그의 수하가 특공대로써 도쿠가와 본진에 쇄도하여 이에야스를 칠 계획을 짠다.
이는 큰 성공을 거두며 3번이나 이에야스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야말로 이에야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재림이라 할 정도로 그야말로 사색이 되어 온 힘을 다해 도망치기에 바빴고 노부시게가 코앞으로 오자 이에야스는 할복을 각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운은 도쿠가와의 편이여서 만신창이 상태로 쉬고 있던 노부시게의 군을 기습공격으로 노부시게가 전사해버린다. 그렇게 오사카 수비의 핵심 장수들인 오사카 오인중이 전부 전사하니 이중해자가 없는 오사카 성은 방어를 할 요소가 전무했으며 오인중을 오히려 방해만 했던 요도도노를 비롯한 상층부는 군 전문지식조차 없던 이들이라 저항이란 저항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 하며 개전으로부터 단 사흘 만에 5월 7일에는 성이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결하면서 도쿠가와와 유일하게 맞붙을만 하던 도요토미 가문이 멸문하면서 사실상 도쿠가와의 천하가 완성되었다.
이후에는 자기 거처인 슨푸(駿府)[44]로 돌아가서 국정을 관장했다. 이 시기에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천황 가와 쇼군 가의 군신 관계를 명확히 하였고,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제정하여 쇼군 가와 다이묘 가의 군신 관계를 정했다. 어찌보면 일인지상만인지하의 명분을 탄탄히 쌓은 것이고, 실질적으론 바지사장 천황 아래[45] 쇼군 중심 체제를 확실히 한 것이다.
이듬해인 1616년 1월 매사냥 도중에 쓰러졌고, 3월 21일에는 조정으로부터 태정대신(太政大臣)에 봉해졌다. 4월 17일 오전 10시경에 슨푸 성에서 향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는 슨푸 교외의 쿠노산(能山)에서 행해졌고, 1주기에 닛코의 닛코 동조궁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에도 막부의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동조궁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다.[46] 현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골은 5m 높이의 청동탑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47] 여기까지 이어진 길에 수백 개의 계단 + 그 옆의 삼나무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어 인기 관광지로 통하고 있다. 또한 에도에서 이곳까지 도쿠가와의 유골을 옮겨올때 장엄한 행렬을 거행하였다는 역사 기록이 있는데, 현재도 이를 재현하는 천인무자행렬(千人武者行列)이라는 행사가 유명하다.
이제까지 그 사인은 비자기름에 튀긴 도미 덴뿌라[48]의 과식(혹은 식중독)으로 알려져 왔으나, 실제로 도미 튀김을 먹은 것은 1월 중순이고 사망한 것이 4월이어서 그랬을 개연성은 낮다. 현재는 이에야스가 그 이전부터 위암 증세를 보였고, 직접 약을 조제해서 치료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때 사망 원인이 위암일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그래서 이를 다룬 일부 창작물에서는 덴뿌라와 이 위암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덴뿌라 먹어서 위암에 걸렸다는 건 아니고, '이에야스가 덴뿌라 먹고 쓰러짐→처음엔 식중독, 독살이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먹은 사람은 증상이 없음→증상을 살펴보니 위암' 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숨지기 전에 남겼다는 사세구로는 두 수가 전해진다.
"기뻐하다가 다시금 잠을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하늘과 같네."
"먼저 떠남과 뒤에 남겨지는 건 결국 같은 것. 함께 가지 못함을 이별이라 여기네."
"먼저 떠남과 뒤에 남겨지는 건 결국 같은 것. 함께 가지 못함을 이별이라 여기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마라. 부자유[49]를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일거든 곤궁할 적을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며, 분노는 적이라 여겨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언정 남을 책하지 말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50]
1617년에는 토쇼다이곤겐(凍照大権現)이라는 신호(神号)와 신계[神階] 정일위가 추증되었다. 이후에도 막부의 시조로 신군(神君) 혹은 곤겐 님(権現様) 등으로 불리며 숭배되었다.
[1] 이에야스(家康)의 이에(家)는 헤이안시대 후기의 무장인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의 이에(家)를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오는 대목인 준민용장 가용평강(俊民用章 家用平康 : 뛰어난 백성이 드러나 집안이 편해질 것이다)의 뒷구절에서 앞글자 家와 끝글자 康을 따서 이토호시(伊東法師)라는 승려가 지어준 것이라고도 한다. 이름의 변천사가 나름 의미심장하다.[2] 13살에 가신들에 의해 가주로 추대되어 이듬해부터 전쟁에 나서 꾸준히 성과를 거두고 약관이 되기 전에 미카와를 통일하며 세력을 떨쳤다. 이후엔 오다 노부히데가 다스리던 오와리로 진출을 시도하였고 오와리 모리야마 성을 공격하던 와중에 가신에게 살해 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25.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마츠다이라 가문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3] 실제로 봉건시대에 인질 또는 시종으로 상위 집안에 보내지는 경우 대체로 극진한 우대를 받았으며 양질의 교육을 제공받았다. 왜냐하면 이들이 인질의 성격을 갖는 동시에 다음 세대에 자신들의 가문을 위해 일할 가신이 될 가능성이 큰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이에야스라면 한 때 미카와를 통일한 마쓰다이라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이니 그를 계속 데리고 있으면 이마가와 가문이 미카와를 차지할 그럴듯한 명분거리가 되기도 했었고 말이다. 또한 나중에 계속 데리고있지 않더라도 쓸데없이 반감을 만들어놓기보다는 우대를 해서 호감을 쌓아두게 하는 편이 더욱 이득이 될 일이다.[4] 하지만 자기 영지가 있는 외부 세력인 만큼 가신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냥 복속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이에야스의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곧바로 미카와를 접수하고 이에야스를 가신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요시모토의 사망으로 실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5] 사실 그런 배신이 일상인 게 전국시대이긴 해서 특별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시대의 네임드 무장이면서 대망 등의 소설 덕분에 좋은 이미지를 쌓은 것과 다른 사실에 대해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듯 하다.[6] 메이지 시대에는 다시 이에야스의 이미지가 추락했지만 2차대전 이후 에도시대의 신군전설을 그대로 이어받은 이에야스 생부처 만들기 수준의 미화소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으로 되살아났다.[7] 이후 오다와의 동맹은 부침은 있었어도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을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다.[8]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에 인질로 가기 전 오다군에 납치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오다 노부나가와 뭔가 교감이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9] 또한 이마가와 가에서 가신단을 장악하지 못한 이에야스를 후계자 입장에서 지켜주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말은 어디까지나 이에야스가 미카와를 직접 다스리고 있어야지 통하는 말이다. 애시당초 이에야스를 미카와에서 떨어뜨려 놓고 이마가와에 인질로 잡아놓고 있었으니 가신단을 장악할 수 없는 건 당연한 노릇이다. 오히려 이에야스와 가신단을 일부러 떨어뜨려놔서 가신단 장악을 방해하고 미카와 영지를 이마가와에서 멋대로 차지했다는 게 더 그럴 듯하다. 그리고 정작 이에야스는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미카와로 돌아온 다음에는 고생은 하기는 했어도(이에야스가 없는 동안 몇몇 가신들이 잇코잇키에 빠졌기 때문. 이 역시 이에야스가 미카와 영지에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결국 가신단 장악에 성공한 만큼 이마가와 가에서 이에야스를 지켜줬다는 말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지 의심스럽다.[10] 마츠다이라에서 이마가와를 배신했다고 하지만 따져보면 이마가와가 먼저 마츠다이라를 배신했다고도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선대 마츠다이라 히로타다가 죽었고 정말로 이에야스를 돌보고 있었다면 제일 먼저 미카와 영지를 이에야스에게 돌려줘서 그를 영주로 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11] 당연하지만 이렇게 되면 마츠다이라 가문의 후다이들은 먹고살 길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마가와에서는 이렇게 거지꼴이 된 마츠다이라 가문의 가신들을 용병으로 써먹었다. 이러면 설령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고 싶어도 그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가신들은 절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 이에야스가 오다 핑계를 대고 츠키야마도노를 제거했을 때 반대하고 나선 가신들이 없었다.[12] 혼간지 당주인 렌뇨의 증손.[13] 에도 시대에 탄생한 족보에 따르면 마츠다이라 노부시게(? ~ 1392)가 아들이 없어서 데릴사위로 치카우지를 들였고, 이 치카우지가 이에야스의 직접적인 조상이 된다.[14]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핵심 가신인 카즈마사를 데려갔다는 말도 있다.[15] 당시에 일본은 이미 집단전 체제가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다이묘가 진두지휘를 하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꼭 필요하다면 직접 지휘할 때가 간혹 있었다.[16] 혼쇼지(本證寺-아이치현 안조시 소재), 조구지(上宮寺-오카자키시 소재), 쇼만지(勝鬘寺-오카자키시 소재).[17] 이 때 일향종의 사찰은 원래대로 두겠다고 하고 화평을 맺은 다음 불태워버리고, 원래 평지였으니 평지로 돌려보냈다라 언급했다고 한다. 태합입지전 5의 이벤트에서도 "약속? 나는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라고 말했을텐데.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란 것은 절이 세워지기 전의 원형으로 돌려놓는다라는 것이었다!"라고 언급했다.[18] 다케다 가는 이마가와 가, 호조 가와 삼국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이 분할은 동맹을 배반한 것이었다.[19] 일부 설화에서 노부나가에게 간언장을 남기고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는 노부히데 대의 명 군사이자 노부나가의 후견인인 히라테 마사히데(1492 ~ 1553)의 아들이다.[20]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신겐에게 패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급하게 도망치다가 말 안장에 똥을 지릴 정도였다. 돌아와서 시종들과 만나자 바지에 남은 똥을 식량으로 가져간 볶은 된장이라고 둘러댔다. 일설에는 똥을 싸신 것 아니냐는 말에 당황한 이에야스가 "이게 된장이지 똥이냐? 한번 맛이나 봐라, 이놈아!"하면서 부하인 이시카와 카즈마사에게 얼떨결에 자기 똥을 먹였다는 야담이 있다.[21] 참고로 이 가즈마사는 후에 도쿠가와를 떠나 도요토미 밑으로 들어갔다.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 직전 이에야스가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오다 노부카츠를 옹호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맞서려고 하자 가즈마사는 히데요시와 화친할 것을 혼자서 주장했다.[22] 다만 소설 등에서는 가즈마사가 히데요시의 계략으로 이에야스에게서 빼낸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23] 이 오쿠다리아 사다마사는 상당한 걸물이라서 나중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딸과 혼인하여 이에야스의 사위가 되었다. 이후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모리 나가요시를 참하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안코쿠지 에케이를 사로잡는 등 무공을 거두었다.[24]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노부나가가 죽을 때까지 동맹을 유지했으며 또, 노부나가 사후에도 둘째 아들인 노부카츠를 지지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맞서 싸웠던 적도 있었다.[25] 이 과정에서 비슷한 루트로 도망한 구 다케다 가신 아나야마 바이세츠는 폭도들에게 목숨을 잃었으므로 얼마나 위험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26] 호조의 반 히데요시 자세는 이에야스의 지원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캐스팅보트나 다름없는 이에야스 세력이 히데요시를 따랐기 때문에 그림이 어그러진 것.[27] 이를 히데요시의 호조 가문 정벌 때 일어난 오시성 전투를 주 내용으로 하는 영화 노보우의 성에서 어느 정도 표현해 놨다. 영화에선 주인공 측의 나리타 가문이 원래 호조 가문 소속이지만 히데요시 측과 내통해 항복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일이 꼬여 항복을 거부, 주인공 측의 성인 오시성에서 주변의 농민들도 입성시켜 같이 싸우기로 결정한다. 이 농민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집집마다 숨겨둔 갑옷과 창, 칼 같은 무구들을 챙기고 입성을 한다. 전투가 벌어지자 나리타 가문의 아시가루들은 적의 대군에게 쫄아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반해, 이 농민들은 이런 상황을 전에 자주 겪어본건지 높은 사기와 뛰어난 전투력으로 적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여준다.[28] 간토 일대를 지배했던 후호조씨는 전국시대 다이묘들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선정을 펼친 가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시 간토 지방 백성들에게 있어 호조가의 위상은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땅에 호조 멸망에 일조한 도쿠가와를 굳이 보냈다는 건 대놓고 그 땅에서 고생 좀 해보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며 실제로도 이에야스는 간토 통치 과정에서 호조를 그리워하는 백성들을 달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29] 이때 도쿠가와의 구 영지인 미카와, 도토미, 스루가로 전봉될 예정이었던 오다 노부카츠는 전봉 처분을 거절했다가 영지를 깡그리 몰수당해버렸다. 그리고 도쿠가와의 구 영지에는 히데요시의 부하들이 전봉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히데츠구 숙청 사건의 여파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대부분이 도쿠가와 편에 붙는다.[30] 다만 이에야스의 석고 250만 석은 가신들의 석고까지 포함한 수치이고, 히데요시의 석고 220만 석은 오로지 히데요시 '개인'의 석고로, 히데요시의 가신들의 석고는 따로 집계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총 석고 규모는 히데요시 쪽이 더 컸다.[31] 당시 혼노지의 변으로 죽기 직전 오다 노부나가의 석고가 거의 5~600만석 정도였다고 하니 그걸 고스란히 삼켰던 히데요시 또한 그 정도 석고를 쥐고 있었을 것이다.[32] 강항의 간양록에는 처음에 히데요시가 "내가 조선과 명을 모두 정복하고 나면 대륙은 내가 지배할 것이고, 너한테는 일본 전체를 봉지로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론 히데요시가 봉해주지 않았어도 일본 전체가 이에야스 차지가 되었지만.[33] 나고야 성으로만 언급해서 중경지방의 대도시인 나고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중경 지방의 나고야성이 아닌 사가 현의 나고야성이다. 나무위키에도 나고야성이라고만 표기되어 있어서 태그를 눌러 넘어가면 중경 지방의 나고야로 착각하게 된다. 한자로 표기하면 사가의 名護屋, 아이치의 名古屋의 가운데 한 글자가 달라서 착각하지 않지만 한글로는 모두 나고야로 읽기 때문에 착각하기 쉽다. 단 이러한 구분은 어디까지나 현대의 이야기고 에도시대까지는 나고야라는 발음이 중요하지 한자 표기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한자를 자기 임의대로 써댔기 때문에 센고쿠 시대 당대에는 적용할 수 없는 구별법이다. 그냥 속한 쿠니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오와리 나고야/히젠 나고야로 부르는 정도가 당대 기준으로도 확실히 구분이 되는 표기라 할 것.[34] 물론 이에야스 역시 지휘부에 소속되어있긴 했다. 실제로 참전을 안 했을 뿐이지.[35]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풍신수길(수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덕천가강(가강)'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36] 나오에 카네츠구가 작성한 것으로, 일명 '나오에장'이라 불린다.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37] 고쇼(御所)란 쇼군을 달리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즉 오고쇼란 '상왕'이나 '상장군'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38]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이자 유학자, 문인으로 4명의 쇼군의 시강이었으며 오사카의 진의 원인이 된 호코지 종명 사건을 뒷받침한 사실상 주인공이기도 하다.[39] 사실은 대마도주가 사죄한다는 내용의 국서를 슬그머니 위조해서 보냈다(그리고 조선에서 '사죄한다니 보낸다'고 국서를 쓰자 그 부분도 바꿔치기했다). 조선이야 피해를 본 만큼 사과를 요구했는데 정작 도쿠가와 입장에서는 '우리 가문은 조선에는 병사 안 보냈는데 왜..'라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서로 엇갈린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양쪽의 관계가 애매하게 흘러갈수록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인 대마도만 속이 타게 생겼으니 대마도주가 위험한 무리수를 쓴 것...이지만 사실 조선 조정도 도쿠가와 막부도 대마도주가 하는 짓 정도는 뻔히 눈치채고 있었다. 단지 양쪽 다 그걸로 다퉈봤자 좋을 게 없으니 그냥 눈감고 덮어둔 거지.[40] 외교관계 회복을 위한 핑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프로이스 일본사》 등의 1차 사료를 상고해보면 친도요토미 파벌이 아닌 이상 저게 거짓말도 아니다. 당장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도 조선과 일본사이의 중계무역이 자기 밥줄이라 전쟁에 찬동할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도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 때문에 억지로 출전한 것이 없잖아 있다.[41] 소 요시토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 측에 속해있었지만, 조선어가 가능하고 조선에 자주 가봤으며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에 통달한 외교전문가였기 때문에 조선과의 외교 회복에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에야스가 특별히 살려주었다. 다만 최소한 고니시와의 관계만큼은 완전히 끊으라는 의미로 고니시의 딸과 이혼할 것을 요구했고 소 요시토시는 정말로 고니시 마리아와 이혼하여 자리를 보전하였다.[42] 일본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천태종 산문파의 절이다.[43] 이런 해석을 한 것이 강항에게서 주자학을 배운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하야시 라잔으로, 어용학자로서 일부러 도요토미를 토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억지 해석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종명을 새긴 승려는 이에야스를 저주했다는 대목은 부정했으나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했다는 대목은 인정했다. 이유는 그 승려의 아버지가 가토 기요마사의 가신 출신이어서 도요토미가에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었다.[44] 현재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이며 이에야스가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 생활을 한 곳이다.[45] 물론 이후에도 천황가는 대외적으론 도쿠가와 막부의 공경을 받긴 한다. 아예 혼인으로 맺어지기도 하고.[46] 할아버지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이에미츠도 동조궁 옆에 있는 다이유인(大猷院)에 안장되었다.[47] 참고로 이걸 보려면 추가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48] 당시는 현대처럼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튀김옷 없이 그냥 썰어놓은 생선만을 기름에 튀긴 음식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입힌 튀김옷은 먼 훗날의 이야기.[49] 신체의 자유가 없음을 의미한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항상 의식주를 걱정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50] 널리 인용되지만 후세에 창작된 위서라는 설이 지배적이다.[神階] 신토에서의 신의 위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