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2013년작 일본 영화에 대한 내용은 기요스 회의(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키요스 회의[1] 清須会議 (きよすかいぎ) | |
일자 | 1582년 음력 6월 27일부터 4일간 |
장소 | 일본 혼슈 키요스 성 |
성격 | 후계자 지명 회의 |
참석 인원 | 하시바 히데요시 시바타 카츠이에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츠네오키 |
회의 결과 | 산보시의 오다 가문 당주 승계 (4명이 참석하여, 3명이 지지함) |
[clearfix]
1. 개요
오다 노부나가 사후, 1582년 음력 6월 27일에 열린 오다 가문의 후계자(당주) 지명 및 영지 재분배를 다루기 위한 회의.2. 배경
1582년 음력 6월 2일,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아케치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켜 노부나가와 후계자인 장남 오다 노부타다를 죽게 했다. 이에 주고쿠에서 모리 테루모토와 전쟁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2]는 급히 화친을 맺고 회군하여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츠히데를 죽였으며, 이로부터 한 달이 덜 된 시점에 오다 가문의 본거지인 키요스 성[3][4]에 모여 후계자 지명과 영지 재분배를 논의하게 되었다.3. 내용 및 결과
히데요시는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를, 시바타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삼남인 오다 노부타카의 옹립을 지지하며 대립했다. 오다 가문의 실권은 사실상 히데요시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시바타 카츠이에와 삼남 노부타카의 입지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히데요시는 후계자 후보를 오다 노부카츠에서 오다 노부타다의 3살 짜리 아들 산보시로 바꾼다.노부카츠를 산보시로 바꾼 이유는, 첫째로 차남 노부카츠의 인물 됨됨이가 많이 부족했다. 일부에서 바보[5]로 취급하기도 할 정도였고, 다소의 과장을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한 가문의 수장이자 천하패권을 차지할 만한 그릇은 못 되었다.[6]
둘째, 오다 노부카츠[7]나 오다 노부타카 모두 서자[8]에 중자(衆子)[9] 산보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적장손이자 오다 노부타다의 장자이다.[10]
셋째, 3살이었다. 아무리 노부카츠가 바보라지만 꼭두각시 마냥 휘두르기엔 3살짜리 어린아이가 더 쉬웠을 것이다. 쟁쟁한 오다 가문의 가신들이 그대로 남아있던 상황에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겠지만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려할만한 사항이다. 실제로, 산보시가 후계로 정해진 다음 히데요시는 산보시의 후견인이 되어 실권과 명분[11]을 모두 갖추게 된다. 아무리 노부카츠가 바보라지만 장성한 노부카츠의 후견인이 되기는 모양이 어색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카츠이에 쪽에 줄을 섰던 니와 나가히데와 비밀 협상을 개시하고 대체 후보로서 죽은 장남 노부타다의 세 살배기 아들인 산보시[12]를 후보로 내세우기로 합의한다.
히데요시는 산보시를 추대하면서,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로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가 잘못된 명제라고 지적한다. 오다 노부나가는 이미 1575년 나가시노 전투 후 노부타다를 후계자로 봉했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가 아닌 오다 노부타다의 후계를 정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주장했고, 회의 마지막 날, 니와 나가히데가 협조해 산보시가 후계자로 최종 지명되었다. 또한, 히데요시가 산보시의 후견인이 됨에 따라 그의 입지는 더 확고해졌다.
이로써 카츠이에는 권력의 정점에서 멀어지고,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하시바 히데요시 | 시바타 카츠이에 | |
후보 | 오다 노부카츠 (노부나가의 차남) ↓ 산보시 (노부나가의 장손) | 오다 노부타카 (노부나가의 삼남) |
지지 원로 | 하시바 히데요시 니와 나가히데 이케다 츠네오키 | 시바타 카츠이에 |
결과 | 지명 성공 | 지명 실패 |
비고 | 1. 투표권은 5명의 원로에게만 주어짐. 2. 투표권자 5명 중 4명은 참석, 1명은 불참. 3. 불참자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이다.[13] 4. 산보시의 후견인으로 하시바 히데요시 지명. |
4. 창작물에서
- 기요스 회의(영화) - 2013년에 개봉한 일본 영화.
[1] 외래어 표기법대로 적으면 '기요스 회의'가 맞다.[2] 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3] 일본어로 똑같이 '키요스 조'로 읽는데 쓸 때는 간혹 '清洲城(청주성)'으로 적기도 한다. 일본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의 한국어 번역 패치에서는 항상 청주성으로 적는다.[4] 현재는 아이치현 키요스 시(清須市)이다.[5] 정신적 문제 혹은 지능이 일반인에 비해 떨어진 수준은 아니지만, 여러 번 잘못된 판단을 했다. 오죽하면 이가의 난에서 패배하자 아버지인 노부나가가 또 지면 연을 끊어버리겠다고 서찰을 보냈을 정도고 선교사인 프로이스는 지능이 정상인보다도 딸린다고 평했을 정도. 그래도 막판(오사카 전투)에서 선택을 잘 해 노부나가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다이묘로 살아남았고 이후 오다 가문은 에도 막부가 무너지는 그 순간까지도 그 지위를 유지해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화족 계급에 탑승한다. 본인 역시도 20대에 사망한 형제들이나 조카와 달리 70대까지 장수했다.[6] 다만 이 같은 논리면 오다 노부타카가 제일 명분이 선다. 노부나가의 자식들 중 가장 그를 많이 닮았다고 일컬어지는 자식인데다 경쟁자(?)인 노부카츠는 말한대로 바보 취급. 산보시는 3살이라 누가 되었든 노부타카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 기실, 3살짜리를 차기 가주랍시고 내놓는 모습은 히데요시의 의도가 티나는 부분이다. 차라리 노부카츠라면 일단 성인(24세)라서 가주가 될 명분이 되고 멍청해서 다루긴 쉽다. 됨됨이가 부족하다지만 3살짜리 산보시보다는 낫다. 그나마 조선같다면야 "3살짜리라도 자라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라는 논거를 댈 수 있지만 전국시대 일본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논리다.[7] 오다 노부타다와 어머니가 같다.[8] 다만, 오다 노부나가는 정실인 노히메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일부 기록에는 딸을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서자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9] 첫째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들. 즉, 차남부터 막내아들까지를 말한다. 다른 말로는 서자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서자는 정부인 이외의 여자에게서 난 서자와는 다른 의미로 중자와 동의어다. 예를 들어 조선에서 현종 시기에 벌어진 예송논쟁 당시 서인측은 효종은 서자이니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서자가 바로 중자를 뜻하는 것으로 효종은 장남이 아니기 때문에 서자라 불린 것이다.[10] 때문에 만일 중국과 한국이었다면 산보시는 확실하게 정통성이 강했다. 종법질서에 따르면 적장자가 죽으면 차자가 잇는게 아니라 적장손이 잇기 때문[11] 자신이 옹립한 산보시가 오다 가문의 정식 후계자가 됨.[12] 훗날의 오다 히데노부[13] 일반적으로는 노부나가 사후 후 호조씨와 격돌한 칸나가와 전투(神流川の戦い)에서 패배한 후 철수가 늦어져 회의가 끝난 후에야 도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설을 반영해서 영화에서는 늦게 도착한 것으로 나오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설이 있다.